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21:33:40

검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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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3. 소멸4. 검투사의 특징5. 검투사의 실력6. 병종 구분
6.1. 동물과 싸우는 사람6.2. 사람과 싸우는 검투사6.3. 여성 검투사
7. 기타 이야깃거리8. 대중 문화 속의 검투사
8.1. 영화8.2. 드라마8.3. 만화8.4. 소설8.5. 게임
9. 관련 문서

1. 개요

/ Gladiator
Ave Imperator, Morituri te salutant.
"황제 폐하 만세, 곧 죽을 자들이 인사 올립니다."[1]
고대 로마에서 유행했던 검투 대결에 출전하는 선수. 굳이 비유하자면 현대의 프로레슬러 격투기 선수로 비유할 수 있다. 검투사를 가리키는 라틴어 글라디아토르의 뜻은 을 뜻하는 글라디우스를 다루는 사람이다. 다만 모든 검투사가 검을 무기로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고 , 도끼, 둔기 등 여러 무기를 사용했다.

경기장에서 칼이나 그물, 삼지창 등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종의 격투가로 야생 동물,[2] 다른 검투사, 범죄자 등과 싸웠다. 흔히 원형 경기장에서 싸우는 모습이 유명하다.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로 유명하지만, 모든 경기가 패자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신변의 자유가 적었다는 점에서 '검투사'보단 '검노'라는 번역이 더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래 서술을 보면 알 수 있듯 노예가 아닌 검투사들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특히나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고 살생을 피하는 하나의 스포츠로 발전한 로마 제국 후반기에는 유명 검투사들은 최상급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또한 검투 게임은 스폰서[3] 프로모션이 존재했고, 심판까지 존재해 단순 노예들의 막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근데 검투사 게임이 재밌는 게요, 로마 사람들은 엄격하게 계약하고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듯이 아무렇게나 막 죽이는 게 아니고 요즘말로 하면 기획사 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규모가 얼마냐, 며칠 할 거냐, 몇 명 동원할 거냐, 생사 불문의 경기는 몇 번 할 거냐, 어느 정도 수준의 선수로 맞붙일 거냐 같은 것을 기획사에서 다 계산해서 한 거예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33부 中
다만 아무리 콤모두스 같은 사례가 있다고 한들 검투사는 로마 시민권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에 인기 있을 수는 있어도 명예롭다고 보기엔 어려운 직업이었다.[4]

2. 유래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BC 1세기에 고대 그리스 역사가 니콜라오스는 본래 에트루리아의 제사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썼다.[5] 한 세대쯤 후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BC 310년에 캄파니아가 삼니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기록에서 에트루리아설과 캄파니아설이 계속 번갈아 나오는데, 현재는 로마식 검투 경기 자체는 캄파니아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검투사가 되는 자격 조건은 따로 없었다. 초창기에는 포로 노예를 검투사로 훈련시켜 죽고 죽이게 했지만,[6] 나중에는 일반 시민들도 검투사로 자원하여 프로모터와 계약을 맺고 직업으로 삼거나 심지어 귀족 자제들도 검투사를 업으로 삼는 등 흐름이 많이 바뀐다. 물론 자유민 검투사는 엄연히 계약 선수이므로 모든 조건을 알려주고 상호 합의한 뒤에야 경기에 나갔다. 극단적으로는 콤모두스 황제가 경기장에서 직접 싸운 사례도 있는데, 황제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살상을 금하고 한쪽이 항복하면 끝내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7] 실력 좋은 검투사는 요즘의 연예인 내지 스포츠 스타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화산이 터져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지만, 폼페이에는 셀라두스라는 트라키아인에 대해 여자들이 사모하는 남자라고 쓴 낙서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여성 팬을 거느렸다는 소리.

스파르타쿠스 반란 등이 일어나기도 한 것을 보면 노예 출신인 제정 이전의 검투사들의 삶은 자유민 출신의 후대의 검투사에 비한다면 비참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은 진압하러 온 로마군을 격파하고, 생포한 로마군 포로들에게 자신들이 당했던 검투 경기를 시켜서 복수했다고 한다. 이건 복수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이기도 했는데, 원로원은 이 부분에서도 분노했다. 이런 추모 경기 등은 높으신 분들만 주최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Uri, vinciri, verberari, ferroque necari
몽둥이로 맞고, 쇠사슬로 묶고, 불로 지지고, 칼로 죽여도 좋다.[8]

제정 후대의 검투사들의 생활과 취급도 제정 전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가 연예인 취급을 받은 것은 맞지만, 현대와는 달리 로마는 배우를 비롯한 연예인이 최하층 천민 취급을 받았던 사회였고 검투사의 신분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현대에서도 성공한 스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예인은 밤무대 가수 정도 수준의 사회 최하층이다. 한국의 직업별 평균소득 리스트를 보면 당당하게 최하위를 차지하는 게 연예인이다. 이들은 지원할 때 위 인용구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는 스스로를 타인의 종으로 낮추고 로마 시민권이 있다고 해도 시민권이 제공하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선언과도 같았다.[9] 자유민 검투사가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일반적인 상한선은 스스로 싸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고, 경기장에 나가기를 거부할 권리는 있지만 일단 나가면 상대에게 죽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권리의 상한선을 획득한 최고참 검투사(auctorati)조차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에게 공연을 하여 돈을 버는 연예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일지언정 그 이상의 법적인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10]

제사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나 추모 경기, 처형식 행사 등으로 자주 치러졌다는 점을 들어 검투 경기를 인신공양 풍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3. 소멸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검투 경기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검투 경기는 지나치게 잔인하고 부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점점 줄어들었다.[11] 하지만 열성 관중의 맥은 쉽게 끊이지 않았던 데다 검투사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검투 관두고 나가도 정작 검투 기술 말고 배운 게 없다 보니 밖에 나가서 할 게 없어 도적이 되느니 차라리 검투사로 밥 벌어 먹는 게 낫다고 다시 돌아오는 일도 많았다. 은퇴를 수차례나 번복하고 검투사 생활을 하다가 끝내 마지막 경기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한 검투사 이야기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4세기 이후 상대의 몸에 상처만 내면 무조건 승리하도록 규정이 바뀌고 정당한 이유 없이 저항을 포기한 상대를 죽이는 것도 금지되면서 오히려 이 시기 검투사의 직업적 위험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로마 황제들도 금지령을 반포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수위만 완화되면 묵인하는 일이 많았고[12] 오히려 대중의 구매력이 떨어지고 검투사를 유지할 만한 거액의 스폰서가 줄면서 검투사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13]

4. 검투사의 특징

세간의 사람들이 흔히 검투사 하면 떠올리는 대로, 검투사는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를 벌이는 잔혹한 직업이었다. 다만 모든 경기에서 패자를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로 양성할 전쟁포로들이 넘쳐났던 공화정 초기의 검투 경기에서는 무자비하게 패자를 죽이는 경향이 높았다. 어차피 검투사 양성소에 공급되는 노예는 차고 넘쳐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으로 "패자를 무조건 죽이는 검투 경기를 금한다."라고 명했지만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 했다. 공화정 초기에 높았던 검투사의 사망률은 검투 경기가 절정에 달한 제정 중기까지 서서히 감소해갔다. 점점 관중들과 황제가 사망자 없는 시시한 경기에 질렸기 때문이다.

검투사들의 사망률이 높았다는 것은 통계가 증명한다. 대략 한 번의 검투 경기를 치를 때마다 최소 20명의 검투사가 죽어나갔다. 투입되는 검투사의 숫자가 평균적으로 많아봐야 백 명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원 사망(50명)까진 미치지 못 해도 상당히 높은 숫자다. 총 투입되는 검투사 숫자가 100명이라 가정할 경우 20명이 사망한다면 전체 투입원 중 1/5가 경기 끝났을 적엔 이미 사망했다는 거다. 100명 투입했을 때 기준으로 50명이 전원 사망이라 할 경우 그 반절이 25명인데, 20명은 거기서 겨우 5명 정도 덜한 숫자다. 즉 전원 사망을 가정할 경우 실질적으로는 반절 가까이 되는 검투사가 경기 때마다 죽어나갔다는 뜻. 많이 잡아서 평균 투입원의 2배인 200명 참여했다고 가정할 경우 20명이 죽어나갔다면 전체 대비 10명 중 한 명이 죽은 거고 전원 사망을 100으로 잡을 시 실제 경기 끝나고 나서 최소 20명이 죽었다면 실질적으론 거기의 1/5씩 죽어나간 거니 꽤 많이 죽어나간 게 맞다. 게다가 저건 최소다. 그 이상 죽어나간 경우도 있다는 뜻. 게다가 신참 검투사는 보통 1년 내로 사망하기 마련이고, 운이 좋아 1년을 넘기더라도 3년 안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앞서 언급한 검투사 20명의 비문을 해석해보면 8명이 아예 처음 싸워본 신참 검투사였고, 베테랑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검투 경기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베테랑 검투사가 신참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죽이는 것을 싫어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승부를 좋아했다. 그래서 검투사는 무조건 비슷한 실력대의 검투사와 싸우는 것이 원칙이었는데[14], 신참이라 해도 검투사로서의 재능이 뛰어나 동기들 중엔 당해낼 사람이 없는 경우엔 베테랑 검투사와 붙이고, 심지어 신참이 베테랑 검투사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신참은 신참끼리, 베테랑은 베테랑끼리 붙는 경우가 많았다.

베테랑 검투사는 몸값이 높은 데다가 이들을 키우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베테랑끼리의 전투는 일단 승패가 결정되더라도 쉽사리 죽이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테랑 검투사들은 경험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거기다 같은 양성소의 동료끼리 싸울 경우, 한솥밥을 먹은 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죽이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경험이 얼마 없는 신참에게 그런 노련함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보통 신참 검투사들의 경기는 한쪽의 사망으로 끝나곤 했다. 물론 베테랑들에게도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승리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기에 경기 도중 상대가 사망하는 일이 제법 발생하곤 했다.

검투 경기의 패자를 처분하는 것은 보통 관중이 결정했다. 관중이 보기에 경기 내용이 재미가 없었다면 패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반대로 지더라도 경기가 스릴 있고 재미가 있었다면 관중들은 검투사를 살리려고 했다. 이런 경우 검투사는 졌지만 살아서 콜로세움을 나갈 수 있었다. 양성 비용이 많이 드는 검투사를 살리고 아래 티투스 황제의 예에서처럼 흥행에 도움이 되는 일화로 포장할 수 있어서 모든 관계자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관중이 패자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죽이냐 마느냐의 결정권은 황제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경우 관중들이 살리고 싶어하는 검투사를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또 관중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는 경우 보통 주최자나 심판이 패자의 목숨을 결정했다.

검투사들에게 있어 어떤 황제를 만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베테랑 검투사라 해도 황제의 마음에 안 들면 목이 날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대우도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칼리굴라 황제의 경우, 육성 및 관리 비용이 많이 들어 국고 낭비가 심하고 부담간다는 이유로 검투 경기에서 승리한 검투사들을 다른 양성소에 팔아버렸다. 이게 왜 문제냐면, 승리한 검투사들은 시설이 좋고 비교적 대우를 받는 황제 직속 양성소에서 열악한 사설 양성소로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경우, 특이하게도 죽는 순간의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패배한 레티아리우스 검투사의 목을 치도록 명령했다.[15] 콤모두스 황제는 같은 양성소의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기를 머뭇거리며 소극적으로 싸우자 격노해 모든 검투사를 한꺼번에 투입시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관중의 의견에 반하는 명령은 대중에게 좋지 않게 보였기 때문에 평판에 악영향을 끼치고는 했다.

모든 황제가 다 검투사들에게 잔인무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례적인 케이스도 있었는데, 티투스 황제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즉 콜로세움의 완공을 축하하는 검투사 경기에서 유명 검투사 프리스쿠스(Priscus) 베루스(Verus)가 치열하게 싸운 끝에[16] 서로 동시에 항복하자, 두 검투사 모두에게 종려나무 관과 루디스(목검)를 하사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었다. 쌍방 모두의 승리라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로마 제국이 서서히 몰락해가던 4세기 즈음에는 검투사로 공급할 노예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자유민 검투사였기 때문에 사망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승패의 조건을 완화하는 식으로 운용되었다.

5. 검투사의 실력

검투사는 온 로마에서 최고로 검술 실력과 싸움 기술이 뛰어난 존재들이었다. 검술 훈련 말고도 진지 구축이나 숙영에 관련된 잡다한 기술을 배워야 하는 군단병과 달리 검투사들은 온전히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검술 실력은 당연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현대로 치자면 맨손 격투기 부분에 있어 현역 군인/경찰과 격투기 선수의 차이와도 흡사하다.

검투사들은 목검으로 나무를 타격하는 기초적인 기술 훈련에서부터 다양한 체력 훈련을 하였는데, 무작정 빠짐없이 지옥같이 힘들게 훈련을 시키는 방식은 아니라서 4일을 기준으로 돌아가면서, 매일 훈련량이나 방식을 다르게 했다. 예컨대 첫날은 고강도 훈련을 하되 웜업 목적으로 시간을 짧게, 둘째 날은 고강도 장시간 체력훈련으로, 셋째 날은 휴식, 넷째 날은 중강도 훈련으로 4일에 한 번씩 휴식을 가지면서 훈련 강도와 시간도 다르게 조절하면서 선수들의 체력 배분에 신경을 써서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링크

더불어 목적에 따라서 근력, 스피드, 체력향상용 복합 컨디셔닝 트레이닝 등으로 체계적으로 나뉘었다.

근력 훈련으로는 땅파기와 무거운 물건 들기 및 들고 걷기[17] 및 서있기, 로프 오르기, 줄 및 대들보 타기, 중량을 들고 팔을 올린 상태로 다른 사람이 밀어대는 것을 버티기 등이 있었다.

스피드 훈련으로 뛰기와 펀치백 치기, 공을 들고 뛰기, 섀도 복싱, 팔과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는 것 등 달리기 연습에도 발끝으로 선 상태로 팔의 전후 왕복 속도만 빠르게 하거나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빠르게 왕복하는 제자리 뛰기 훈련도 있었다.

그중 백미는 이를 혼합한 복합 컨디셔닝 겸 체력 훈련으로 고반복 제자리 점프, 무게를 지고 점프하기, 갑옷 입고 전력질주하기 등이 있었다.

훈련을 위해 여러 가지 운동 기구도 사용하였는데, 할테레스(Halteres)라는 그리스식 덤벨도 있었고, 자연석이나, 혹은 암석에 손잡이용 구멍을 뚫어서 훈련에 사용하기도 했는데 현존하는 것 중에 100kg가 넘는 훈련용 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외에는 모래 주머니도 있었고, 현대 기계체조의 안마(pommel horse)와 동일한 것, 다양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위해 공을 이용한 훈련 방법도 있었다.

검투사들의 실력과 충성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황제들은 은퇴한 검투사를 근위대에 채용하거나 내전이 벌어지면 검투사 부대를 조직해서 투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예로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게르만족이 마리우스 시대 이후 본국 이탈리아를 침공해 북이탈리아 최대 도시 아퀼레이아를 포위하자, 검투사들을 소집해 기존 병력과 해방을 조건으로 만든 노예 군대와 합류시켰다. 그리고 이때 소집에 응한 검투사들은 아퀼레이아 포위전에 합류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다.

검투사들의 전투는 무조건 실전이었다. 서로 봐주거나 짜고 치는 경기는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검투 경기는 조 추첨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관중들이나 검투사들이나 자신이 정확히 누구와 싸우게 될지는 경기 날짜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가령 자신이 레티아리일 경우 주로 세쿠토르나 무르밀로와 싸우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투사들은 평소 양성소에서 훈련하면서도 훗날 자신과 싸우게 될 검투사 그룹의 기술이나 실력을 눈여겨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러 검투사 양성소가 참여할 정도로 큰 경기의 경우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끼리 싸우기 때문에 검투사들을 곤란하게 했다. 같은 병종이라 해도 상대방의 스타일에 따라 싸우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방과 싸울 경우 실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상대방이 어떤 유형의 전술을 구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큰 경기에 투입되는 검투사들은 서서히 탐색전을 하며 경기의 흐름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실제 로마의 정규군과 검투사가 겨루기도 했는 데 로마 정규군이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한다. 로마 정규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체로 대오를 갖춰 싸우는 집단 전술이지 1:1 대결이 아니었고, 진지 축성, 식사 조리처럼 여러가지 잡무도 병행하느라 온전히 단련만 할 수 없었기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반대로 백인대장을 필두로 한 백인대와 검투사 100명이 동시에 싸우게 했다면 전원이 통일된 상위호환 무장과 전술[18]을 갖춘 정규군 쪽이 유리했을 것이다. 로마군에 대한 평가 중 "체구가 건장한 게르만족 전사들 앞에 서면 라틴족 병사들은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대규모 전투를 벌이면 로마군이 이겼다"라는 것과 비슷한 사례인 셈.

6. 병종 구분

6.1. 동물과 싸우는 사람

동물과 싸우는 사람은 베스티아리(Bestiarii)[19][20]라고 불렀다. 사실 엄밀히 말해 글래디에이터는 사람과 싸우는 직종만을 가리키므로 베스티아리는 글래디에이터로 취급되지 않는다.

원형 경기장에서 이들은 오전에 싸웠으며, 이 오전 시간에는 동물끼리의 싸움도 벌어졌다.

이들은 대개 수입해온 흔치 않은 동물들과 싸웠다. 제국 각지에서 잡아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카스피호랑이, 코뿔소, 시리아코끼리, 아틀라스불곰, 유라시아불곰, 아시아사자 같은 희귀한 맹수들도 잡아 왔다. 모두 위험한 맹수들이기에 이들은 활과 창, 횃불, 갑주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스코틀랜드 사냥개들을 대동한 채 맹수들과 대결했다. 대개 베스티아리가 유리하지만 동물이 이길 확률도 약간 있었다. 이 때문인지 관중들은 짐승을 죽이는 장면 못지않게 베스티아리가 죽는 장면을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

맹수를 따돌리기 위한 통로나 엄폐물 등의 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보다 정면으로 맹수에게 대항할수록 더 많은 환호를 받았으며 때로는 오늘날의 투우처럼 짐승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리거나, 사자나 호랑이와 대적하면서 죽마 위에 서서 싸우는 등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는 선수도 있었다. 심지어 이나 사자를 맨손으로 대적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도적 수괴나 기타 중죄인을 이런 식으로 처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사례는 박해받던 크리스트교 순교자들.

상금과 명예를 위해 싸우는 베스티아리는 용기의 증명이라고 하여 젊고 용맹한 사내에게 권장하기도 했으며, 네로나 콤모두스는 직접 베스티아리로 나서서 맹수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런 상금 경기를 하는 베스티아리를 위한 훈련 교실도 존재했다.
  • 가장 뛰어난 베스티아리로는 Carpophorus가 알려져 있는데, 사자, , 표범을 한 전투에서 죽여버린 적이 있으며, 한 개의 창으로 코뿔소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고,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 20마리를 한번에 죽인 적도 있다.
  • 로마 황제인 콤모두스도 이 짓을 자주 했다. 그는 검투사질을 하는 게 취미였는데, 말년엔 너무나도 심취해서 나중엔 이미 있던 집정관들을 죽인 다음 자기가 검투사 복장을 하고 검투사 집정관이 되려고 했다. 그는 싸움이나 사냥 실력이 매우 좋아서 기린, 얼룩말 같은 강력한 동물이나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들을 하루에 100마리씩 잡아댔고 아프리카코끼리도 3마리나 잡았다고 하며,[21] 대략 시속 70km 정도로 전력질주하는 타조를 활로 쏴 맞히기도 했다. 당대의 기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첫날 그는 난간에서 활을 쏘고 ...(중략)... 혼자 힘으로 100마리의 곰을 모두 죽였다. 다른 날들은 위층 자신의 자리에서 투기장 바닥으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축들을 모두 베어버렸으며 ...(중략)... 그는 또한 호랑이, 하마, 코끼리도 제압을 했다. 그는 이러한 묘기를 보여주고 난 뒤에는 물러났다가, 다시 점심식사 후에 검투사가 되어 격투를 벌였다. 그의 격투 방법과 입은 갑옷은 '세쿠토레'의 것이었고 ...(중략)... 그는 오른손으로 방패를 잡고 왼손으로는 나무 검을 쥐었으며,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사뭇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사격술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고 ...(중략)... 한번은 그가 끝이 초승달 모양인 화살로 미우레타니아의 타조들을 쏘았는데, ...(중략)... 콤모두스가 화살로 타조들의 목 맨 윗부분을 맞추어 쓰러뜨렸더니, 새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녔다.
헤로디아누스, 1. 15
  • 또 다른 베스티아리의 타입으로, 종종 중범죄자를 맹수와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Damnatio ad Bestias라 했다.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노예나 로마 시민이 아닌 자들에게[22] 적용되는 사형집행방법 중 하나인데 이것은 다른 검투사 경기에 비해 별로 흔한 경우는 아니다. 이들은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사형을 당하기 위해 경기장에 맨몸 혹은 잘해봐야 막대기 하나 들고 내몰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부분 맹수의 한끼 식삿감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한 명의 죄수를 처형하는데 두 마리 이상의 맹수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한 숫사자는 이런 식으로 200명 이상의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쳐도 다른 맹수에게 죽을 때까지 계속 맹수를 투입했으며, 이게 매우 야만적인데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잔혹하게 처형당하였기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이 형벌을 폐지해달라고 콘스탄티누스에게 청원하여 폐지되고 만다.[23]
    이런 형벌에서도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안드로클레스(Androcles)[24]라는 한 노예가 있다. 안드로클레스는 칼리굴라 시대의 도망 노예였는데, 도망 중에 은신처로 삼으려 숨은 동굴이 하필 사자의 굴이었다. 그런데 그 사자는 발에 큰 가시가 박혀서 아파하고 있었고, 안드로클레스는 그 가시를 빼 주고 사자와 친구가 되어 그 동굴에서 생활했다. 3년 후, 문명이 그리워진 안드로클레스는 도시로 나왔다가 곧 붙잡혀서 로마로 이송되었고,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기장에 등장한 사자는 그의 친구였던 바로 그 사자였고, 사자가 안드로클레스를 잡아먹으려 하지 않자 의아해한 칼리굴라가 사정을 듣고는 우정의 힘에 감동하여 안드로클레스를 석방시켜 주었다. 이후로 안드로클레스는 사자에게 목줄을 채워서 같이 도시를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안드로클레스에게 돈을 주고 사자에게 꽃을 뿌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의 역사가였던 아피온이 직접 보고 적은 이야기인데, 문제는 그의 저작들이 소실되어 다른 역사가들의 언급으로만 남아 있어 진위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의 사람판 버전이 아래 나오는 죄수 검투사인 녹시다. 녹시 역시 보통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하는 죄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 베나토레스(Venatores)는 역시 야수와 싸웠으나, 정면 대결이 아니라 사냥을 보여주는 사냥꾼이다. 이들 역시 사람과 싸우지 않으므로 글라디아토르로 취급하지 않는다.

6.2. 사람과 싸우는 검투사

여러 종류의 검투사들
명칭은 왼쪽에서 오른쪽 순
파일:Gladiator.jpg
세쿠토르
Secutor
프로보카토르
Provocator
호플로마코
Hoplomaco
트라키오
Tracio
에퀴테
Equite
무르밀로
Murmillo
시소르
Scissor
레키아리오
Reciario
위의 베스티아리가 오전에 싸우면, 오전 경기로 생긴 시체를 치우고 모래를 새로 뿌린 뒤 사람끼리 싸우는 경기가 벌어졌다. 이들은 무장과 전투 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무장과 전투법으로 다른 부류의 검투사들과 싸웠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종격투기와 비슷하다. 원래 검투사 경기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원혼을 기린다는 희생제의 개념에서 전쟁 포로들을 잡아와서 시작한 것이고, 또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터의 모습을 재현해 보인다는 목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검투사 타입들은 승패의 흥미로움을 더해주기 위해 다양하게 늘어가는데, 병종 간에 일방적인 승패가 가려지지 않도록 밸런스 패치가 가해졌다. 더 유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를 줄이는 식으로 페널티를 주고, 불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나 무장을 더 늘리고 숫자를 늘리는 식. 보통 얼굴과 팔다리는 철저히 보호했는데, 치명상으로 인해 경기가 일방적으로 흘러가 지루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흉부-복부의 방어는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결정타를 먹일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불리한 병종이라면 흉부-복부의 방어까지 철저했지만 유리한 병종이라면 갑옷 따위 없다.

무장과 방어구가 다양하니만큼 관중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달랐다. 예로 티투스는 트라키아인을 좋아했고, 클라우디우스는 레티아리를 싫어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검투사들은 다음과 같다.
  • 레티아리우스(Retiarius)[25]
    어부 검투사, 어부를 흉내내어 그물 단검 또는 그물 삼지창을 사용했다. 상대를 그물로 얽어서 꼼짝 못 하게 하거나 무기를 묶어서 무장을 해제시킨 후 단검과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 필승 패턴으로 검투사 병종 중에서 가장 승률이 높았다. 다른 검투사들은 무장이 고정되었던 것과 반대로 그물, 삼지창, 단검이라는 3가지 무장을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 어떤 적을 상대하더라도 약점을 공략할 수 있는 범용성이 특기였다. 일단 그물에 상대를 잡히게 만들기만 한다면 상대는 움직일 수가 없고, 그 다음에는 원하는대로 죽이면 그만이다. 그물이 빗나가도 삼지창과 단검으로 여전히 전투 속행이 가능했다. 마무리 용도 혹은 혹은 삼지창을 떨어뜨렸을 때 비상용 보조 무기로 단검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왼팔을 덮는 팔의 갑옷(마니카)이나 목과 아랫쪽 얼굴을 덮는 고정식 어깨 방패(갈레루스), 허리띠 외에는 방어구가 없이[26] 알몸으로 싸웠다. 주무기인 그물마저도 유리에 금박을 입혀서 매우 무겁게 만들었으며,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머리 방어구인 투구조차 없었다. 따라서 상대의 공격을 맞으면 안되기에 회피 위주의 싸움을 했다.[27] 레티아리우스를 잡기 위해 설계된 세큐토레스와 라이벌 기믹이 있어서 레티아리우스 vs. 세큐토레스 대결은 흥행의 보증수표였고 검투사 경기를 묘사하는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28] 레티아리 vs 세큐토레스 재현 영상.[29]
    재미있게도 이들에 대한 관중의 반응 역시 현대에 미디어 매체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는데, 몸과 얼굴을 드러내고 싸웠기에 놈팽이 취급을 받았지만 여성 관객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이들에게 붙었던 게이 같다는 이미지도 동성애자보다는 현대 게이머들이 말하는 게이의 의미와 거의 유사했으며, 관중들은 이들을 욕하면서도 계속 구경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투구를 쓰지 않으니 죽을 때의 고통스런 표정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레티아리우스가 자신 앞에서 패배할 때마다 죽이라고 명령했다.[30] 이런 반응은 경기 주최자들의 입장에서 다분히 의도적인 결과인데, 단순히 어부를 리인액트했을 뿐인 병종을 흥행을 위해 남자답지 못하다는 낙인을 찍고 욕받이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 라퀴에아리우스(Laquearius)[31]
    레티아리와 비슷한데, 그물 대신 올가미를 사용하고 단검이나 삼지창을 든다.
  • 삼니테스(Samnites)
    기원전 4세기에 출현한 최초의 검투사 병종 중 하나로, 과거 도시 국가 로마의 적이었던 삼니움족을 정벌한 후 예식 겸 삼니움족을 조롱하는 의미로 벌이던 검투 경기에서 비롯되었다. 글라디우스 칼, 스쿠툼 방패, 정강이 보호대와 투구를 사용하였다. 제정 초기에 삼니움 지방이 로마 제국에 완전히 편입되고 삼니움족이 완전한 시민권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삼니움족을 조롱할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자취를 감추었다. 칼과 방패를 사용하는 조합은 명칭과는 별개로 근접전을 벌이기에 합리적인 무장이었고 관중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으므로, 후술할 스쿠타리우스 대분류로 계승된다.
  • 스쿠타리우(Scutarius)
    삼니테스가 변형된 병종으로, 대형 방패인 스쿠툼을 장비한 병종을 총칭하는 대분류이다. 무르밀로, 세큐토레스, 프로보케이토레스 등이 해당된다.
    • 무르밀로(Murmillo/Myrmillo)[32]
      물고기 모양의 투구를 쓰고 물고기 모양의 가슴갑옷을 걸친다. 글라디우스와 로마 군단병 스타일의 긴 방패가 무장. 무거운 투구와 방패를 사용해야 했기에 대부분 근육질이었다.
      레티아리우스와 함께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병종 중 하나이다. 물고기 모양인 무구를 입음으로써 어부 컨셉인 레티아리우스와의 대립각을 세웠다.
    • 세쿠토르(Secutor)
      레티아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변형된 미르밀로니스로 미르밀로니스와 비슷한 수준의 중무장인데 목적에 맞게 투구는 그물에 잡히지 않도록 매끈매끈하고 삼지창에 찔리지 않도록 눈을 제외한 머리 전체를 덮는 형태이며 그 눈구멍도 극히 작다. 레티아리우스를 상대하는 주된 전술은 방패로 그물과 공격을 막고 전진하다가 근접전에 돌입하여 방어구가 부족하고 근접 무장이 부실한 레티아리우스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레티아리우스를 상대하기 위해 설계된 병종이지만, 삼지창을 막을 목적으로 투구의 눈구멍을 좁게 만든 탓에 시야에 사각지대가 많았고[33], 무거운 갑옷을 입고 통기가 안되는 투구를 쓰고 몸이 가벼운 레티아리우스를 쫓아가는 사이에 삼지창의 리치를 이용한 찌르기를 막느라 체력이 심하게 소모된다는 문제점이 있어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유리하지 않은 싸움을 묵직하게 수행하였기 때문에 놈팽이 취급을 받은 레티아리우스와 비교하여 남성적이라 받아들여졌고 사회적인 취급이 더 좋았다. 다리 위의 레티아리 한명을 양쪽에서 세큐토레스가 잡으러 가는 형태의 매치도 있었다고 한다.
    • 프로보케이토레스(Provocator)
      군단병의 무장을 적당히 생략한 형태로 서로 싸우게 된다. 정강이받이는 왼쪽만, 팔목가리개는 오른쪽만, 장식을 대폭 생략한 투구에 흉갑을 입고 방패와 검으로 싸운다.
  • 파르물라리우스(Parmularius)
    스쿠타리우스와 대비되는 병종으로, 소형 방패인 파르마(파르물라)를 장비했다. 방어력이 약화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세큐토레스보다 더 많은 방어구(주로 다리 방어구)를 입었다.
  • 갈리(Gallus)
    갈리아에서 유래한 스타일로 '갈리아인'이란 뜻. 창, 투구, 그리고 작은 갈리아 방패를 사용한다. 갈리아가 로마의 적일 때 유행이었다가 갈리아가 로마 영토가 된 후 사라진다.
  • 호플로마키(Hoplomachus)
    호플로마키는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에서 온 이름으로 트라키아 기원의 트라키안(Thracian)과는 투구의 장식과 병기의 차이로서 구분된다. 호플로마키는 흔히 그리스 투구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초승달 모양의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글라디우스나 창을 잡고 구리로 된 라운드 실드를 들었다. 라운드 실드는 실제 호플리테스의 방패보다 크기가 작았기에 방어 목적으로는 스쿠툼보다 불리했지만,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벼웠기에 먼 훗날의 버클러처럼 타격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 트라키안/트라에키스(Thracian)[34]
      ' 트라키아인'. 호플로마키 수준의 무장을 갖춘다. 머리 전체를 가리고 그리핀 형상이나 높은 깃털 장식 투구, 흉갑과 정강이 보호대를 입고 한 변이 60cm 가량 되는 사각형 방패인 파뮬라를 든다. 무장은 시카라고 부르는 트라키아 특산의 구부러진 검으로, 상대가 방패를 칼로 막더라도 등 뒤를 찌르기 좋은 형태로 되어 있다. 갈리아가 병합된 이후로 등장했다.
  • 파에그니아리(Paegniarius)
    채찍, 곤봉을 갖고 있으며 왼팔에 방패를 묶어두었다.
  • 디마카에루스(Dimachaerus)[35]
    그리스어 기원으로, 단검이나 곡도 두자루를 든 쌍검 검투사. 갈리아식 투구와 정강이 받이를 착용했다. 기원후 2~4세기에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고는 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어구를 착용하고 어느 병종을 상대로 싸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일부 문헌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움직임이 무거운 중장 병과와 싸웠거나, 동일한 디마카에루스와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으로 겨루는 경기를 했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36]
  • 크루펠라리우스(Crupellarius)[40]
    갈리아 고유의 검투사로부터 기원한 중장보병 검투사. 온몸을 로리카 세그멘타타와 중세 기사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철투구로 완전히 감싸고 칼과 방패를 든 병종이다. 다른 검투사 병종과는 차원이 다른 방어력을 자랑했으나, 온몸에 무거운 갑주를 입었기에 체력 소모도 차원이 다르게 극심했으며, 한번 넘어지면 자력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특수한 상황에만 나오는 검투사들이다.
  • 루디아리우스(Rudiarius)
    자유의 상징인 목검(루디스, Rudis)[41]을 하사받고 신체의 자유와 생사여탈권을 되찾은 검투사들이다.
    관중에게 매우 열렬한 지지를 얻은 후 경기에서 이긴 뒤에야 황제로부터 목검을 하사받을 수 있었으므로 모든 루디아리우스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황제가 목검을 하사하는 수여식은 또다른 공연으로 받아들여져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목검을 수여받은 후에는 은퇴해서 유망한 고관의 호위를 맡거나, 검투사 양성소의 교관이 되거나, 검투사 경기의 정직원 혹은 심판이 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물론 은퇴를 거부하고 검투사를 업으로 삼아 계속 싸움에 뛰어들 수도 있었는데 이를 루디아리우스라 불렀다. 그들은 훌륭한 쇼 엔터테이너, 진행자로 여겨졌고 인기가 많았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마이크 타이슨 같은 슈퍼스타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플라마(Flamma)라는 한 세큐토레스는 16살에 검투사를 시작해 목검을 무려 네 번이나 하사받았는데, 은퇴를 전부 거부한 뒤 마지막 경기인 34번째 경기에서 30살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최종 전적은 34전 21승 9무 4패였다고 한다.[42]
  • 녹시: 죄인 검투사. 녹시 경기는 보통 한쪽은 무기 하나를 가지지만 눈을 가리고, 다른 쪽은 맨손이지만 눈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어느 쪽이든 사실 싸우다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검투사군이 녹시였다. 인간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만큼 시각이 차단당하면 행동이 많이 봉쇄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무기를 쥐여줘봤자 상대가 눈을 뜨고 있으면 압도적으로 불리해진다. 그래서 시력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맨손 싸움을 택한다 해도 상대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의 무기를 빼앗거나 맨손으로 상대를 완전 제압할 정도의 초인이 아닌 한 승률이 팍팍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 일단 상대 검투사가 든 것이 아무리 짧은 단도 정도의 무기라 가정해도, 무기가 상대의 손에 들어가 있는 한 상대의 사정거리와 사용 수단의 폭이 넓어진다. 종종 둘 다 눈을 가리고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각각에게 심판 한 명씩이 붙어서 자기편 녹시에게 상대의 위치를 가르쳐줬다. 이때 군중들은 소리를 질러서 가르쳐주거나 거짓으로 가르쳐주면서 재미를 보았다.
    죄인에 대한 처형으로 무기를 든 죄인과 맨손의 죄인이 대결하는 경기도 있었다. 대개 무기를 가진 자가 승리하지만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자가 무기를 반납하고 이번에는 자신이 맨손이 되어 새로운 도전자와 싸워야 했다.
  • 안다베타에(Andabata)
    말 등에 올라타서 싸운다. 카타프락토이와 비슷한 수준의 중무장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투구에 눈구멍을 뚫어놓지 않았다는 것. 중세 기사들의 주스트와 비슷하게 싸우지만 상대를 볼 수 없다.
  • 에쿠스(Eques)[43]
    로마 기병 스타일로 시작했지만 이후 보다 검투사 스타일[44]로 바뀐다.
    일단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싸우다가 이후 창을 버리고 말에서 내려 검으로 싸우며, 다른 종류의 검투사와는 잘 싸우지 않았다.
  • 에세다리(Essedarius)/에세둠(Essedum)
    전차를 타고 싸우는 검투사.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국 원정을 다녀오면서 켈트인들과 전투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생겨났다. 대규모 전투를 흉내내는 형태의 검투 시합에서 등장했다고 한다.
  • 프라에그나리: 오프닝 담당. 검투사 자유의 상징인 나무 칼로 싸우는 동안 주변에서 각종 악기로 음악을 연주한다.
  • 사지타리(Sagittarius)
    궁수, 당연히 투기장에서 인간 상대로 싸우는 건 아니고 동물들을 상대로 베스티아리들이 벌려놓은 판을 정리할 때 썼다. 자세한 건 쿠오바디스를 참조. 활은 파르티아-페르시아 식의 곡궁.

6.3. 여성 검투사

Gladiatrix[45]

여성 검투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는 문헌 기록을 남기는 로마 식자층이 남자들의 미덕[46]을 겨루는 검투 경기에 여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남성의 미덕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의 다음 시를 보면 당시 식자층 남성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여성 검투사들은 모든 훈련을 경험했고, 플로라 축제에서 트럼펫을 불 가치가 있지만 더 큰 꿈을 가지지 않고, 아레나에 나타나기를 원하지만 않는다면 정숙한 부인들이다. 당신은 투구를 쓴 여성에게서, 자신의 성을 버리는 여성에게서, 힘으로 쌓은 업적에 기뻐하는 여성에게서 얼마나 겸손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략) 그녀가 교관이 그녀에게 보여준 대로 타격을 반복, 연습할 때 얼마나 씩씩거리는지, 그녀가 투구와 무릎을 감싼 두꺼운 나무 보호대의 무게로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보라. 그녀가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서 오줌을 눌 때 웃기지 않은가?”

이외에도 철학자 세네카,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 등을 비롯해 많은 로마 시대 지식인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비난하는 기록들을 남긴 것을 찾아볼 수 있고, 후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이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ladiatrix_relief.jpg

여성 검투사들의 존재 여부와 생활 양식에 대한 정보들은 문헌 기록이 없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템즈 강 유역의 할라카르나소스[47]에서 발견된 두 여성 검투사의 시체와 함께 매장된 장비, 그리고 두 사람을 묘사한 부조 및 기록은 생활상을 추측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두 여성 검투사는 아마존 아킬리아라는 이름[48]을 사용하였으며, 상위 랭크의 검투사였다는 기록에서 당시 여성 검투사에게도 등급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또 이 부조는 이들의 신화적인 경기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승부의 경우 무승부로 끝났고, 둘 다 살아서 경기가 끝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콜레기아 이우베눔', '루두스 마그누스' 등의 당시 검투사 양성소에서 여성들의 훈련 공간이 발견되는 등, 분명히 여성 검투사들을 전문으로 양성하는 곳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구역의 비중 차이를 볼 때 흔하지는 않고 대단히 드물게만 열렸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로마 제국이 굉장히 넓었으니만큼 지역별로 또 격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roman-statue-may-depict-female-gladiator_51794_600x450.jpg

함부르크에서 발견된 여성 검투사상은 아예 상의 탈의 상태로 나오는데, 이런 자료는 또 여성 검투사들이 성적 대상으로서 취급받았을 거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젖가슴을 드러낸 모습은 여자 노예들에게도 흔했기에 하급 여자 검투사를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역시 아직까지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당시 여자 검투사들의 위상이나 경기 방식을 완전히 추측하기는 힘들다.

아무튼 여성 검투사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이 직종이 실존하기 때문인지, 로마 시대를 다루는 소설인 《폼페이 최후의 날》에선 여성 검투사 출신의 조역이 등장하기도 한다.[49]

7. 기타 이야깃거리

파일:터키 로마 검투사.jpg
터키 부르두르에서 발굴된, 검투사 묘지의 비석에 새겨진 검투사들의 격투 모습
  • 로마 최초의 검투 경기는 기원전 264년이었다. 집정관이 주최한 최초의 공식 경기는 기원전 105년이었다.
  • 서기 80년에 완공된 콜로세움 개장을 축하하는 경기에서 하루에 5,000마리의 동물이 죽었다. 개장 후 100일간 죽은 동물의 총수는 90,000마리에 달한다.
  • 콜로세움의 지하에는 동물 우리와 검투사 대기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 콜로세움에는 1.5m까지 물을 채울 수는 있지만, 새어나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최소한 두 번의 모의 해전이 벌어졌다. 콜로세움 이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나우마키아'라는 저수지가 해전장으로 쓰였는데 이 저수지의 넓이는 20만 제곱미터였다. 한 번의 행사에 19,000명의 검투사들이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 베스티아리 문단에서도 언급된 로마 황제 콤모두스는 검투사 황제라 일컬어질 정도로 검투사란 직종에 환장하기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였나면 말년에는 아예 검투사들과 함께 검투사 숙소에서 지내는 황제가 되려고 했을 정도다. 이외에도 그의 지나친 검투사질에 골몰하는 것 때문에 그는 민심을 잃었고 정적들이 그가 죽기 전부터 암살 각을 재게 되었다.
  • 네로의 그리스도교 탄압 당시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교도를 콜로세움 한가운데에 묶어놓고 사자를 풀어놓아 뜯어먹히게 만들었다는 학살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50] 사실 중세 시대에 콜로세움의 공간을 이용해서 민가로 불하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프란지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사들여서 요새화해서 성채로 삼기도 했다. 바위를 빼다가 건축 자재로 써버리는 일도 잦았다. 순교자가 생긴 장소에 대해 보여주는 기독교적 묵상과는 영 딴판인 취급이었던 것이다. 사실 콜로세움이 종교적 성소로 여겨지게 된 것은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가 난 성소[51]라고 선포하면서였다. 하지만 베네딕토 14세의 주장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으며, 16세기 이전에 기독교가 그와 같은 입장을 보인 적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흔히 생각하는 거와 다르게 네로 황제 때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원래 네로 얼굴로 된 거대한 거상이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그 거상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경기장을 지어서 콜로세움[52]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네로 황제의 콜로세움에서의 박해에 관한 이야기이며, 로마가 사자에게 그리스도인들을 밥으로 던져주며 박해한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실제로 네로도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 학살을 안 했을 뿐, 화재의 원인을 무고한 기독교도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짐승들의 밥으로 줘버리는 처형법을 시전했다. 위에서 언급된 베스티아리의 죄인 버전.
    이 놀라운 행위(순교)는 어느 로마 도시에서나 가장 중요한 공공장소 가운데 하나에서 아주 암울하게 진행되었다. 순교는 원형경기장의 구경거리라는, 로마인들의 생활을 특징짓는 폭력과 질서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축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Christopher Kelly,[53] 「The Roman Empire」
  •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검투를 엄청나게 싫어하였다. 콜로세움에서 검투 경기를 반대하다가 분노한 관중들에게 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검투 경기가 금지되면서 이 노력은 결실을 이룬다. 비록 검투 경기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보다는 스포츠적 요소가 강하기는 했으나, 사람의 목숨이 오락거리로 쓰이는 건 고대인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윤리적으로 논란거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금지된 것은 아니고 죽이지 않는 방식으로 좀 강도가 완화돼서 진행되고 한쪽이 항복을 선언하면 무조건 승리를 인정하는 식으로 서서히 줄어들었다.
    자네의 눈과 귀를 도회지로 돌려 보면, 자네는 가장 황폐한 곳에서보다 더 슬픈 군상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걸세. 저곳에는 포악한 눈들의 욕망을 피로 충족시키기 위해 칼부림 유희를 준비하고 있군.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 몸을 살찌우고, 건장한 지체에 기름 바르는 것은 살육당하기로 이미 작정된 살찐 육체가 더욱 값비싸게 죽어 가기 위해서이네.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죽어 가고 있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경험을 쌓고 연습하고 기술을 연마하지. 이런 극악한 짓이 자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있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더 참혹한 일이 어디 있겠나? 살인하는 능력을 쌓는 것이 훈련이요, 사람 죽이는 것이 영예이네. 자네에게 물어 보겠는데, 꽃 같은 나이에 멋진 체격을 가진 자들이 죄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값진 옷을 입고서 맹수들과 대적해 싸워야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짓인가?

    멀쩡히 살아 있는 자들이 자원해서 자신의 장례를 위해 치장되고 있고, 처참히 죽은 자들이 영광을 받고 있네. 그들이 맹수들과 싸우는 것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광기 때문이네.



    체칠리우스 치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 AD 210~258), 《도나투스에게(Ad Donatum)》 中
  • 투기장의 관중석에서는 오늘날 야구장에서처럼 잡상인이 차가운 음료수, , 소시지 따위를 팔며 돌아다녔다. 콜로세움 개장식 같은 축하 행사 때는 황제가 관중에게 음식과 음료를 한턱 쐈다고 한다.
  • 엄지를 밑으로 향하는 것이 패자의 숨통을 끊으라는 표시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희박하다. 유베날리스는 "엄지를 세워 뒤로 젖히면 패자를 죽인다."[54]라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고전학자 존 메이어의 1853년판 번역본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면 찔러 죽이라는 신호, 바닥을 가리키면 무기를 버려 살려주라는 신호였다."라고 나와 있다. 루이스와 쇼트가 쓴《라틴어사전(1880)》의 "엄지" 항목을 보면 "오므리면 부정이고, 펴면 긍정이다."라고 쓰고 있다.
  • 검투사의 주식은 보리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은 사람들이 먹는 곡식이었고 보리는 가축의 사료였기는 하지만 딱히 검투사를 가축으로 취급해서는 아니다. 근육을 강화하는데 보리가 밀보다 더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검투사들은 호르데아리[55]라고 불렸다.
    페르가몬의 검투사 학교 의사였던 갈레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들의 식사는 보리와 콩류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탄수화물 식단은 아래의 체형을 만드는 데에 유리했다. 또한 검투사들은 음료에 재를 섞어 마셨다고 한다.
  • 경기 중 상처로 인해 피를 흘리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검투사들의 체형은 근육질 보다는 살집 있는 뚱뚱한 체형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는 회칼에 찔릴 일이 많은 조직폭력배들이 살집을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몸이 느리면 당장 칼 맞아 죽기 딱 좋기 때문에 어느 정도 스치는 상처에 버티는 수준까지만 살집을 키웠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다들 몸짱에 가까웠다.
  • 현대의 격투가들도 다수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서 챔피언이나 상위 랭커되면 일반인은 벌기 힘든 큰 돈 벌고 부유층이 되는 것과 노예 신분에서 자유 신분을 얻는 게 비슷한 이치로 발전하고 있다.
  • 죽었어야 할 패배자가 살아서 '스폴리아리움(시체실)'로 실려오면 관리인들이 숨통을 끊었는데, 죽어야 한다고 판정났을 때 이야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냥 패배하기만 했다면 다음 경기에 다시 나가면 그만이었다.
  • 진귀한 케이스로 로마에서는 드물었던 흑인끼리의 싸움, 난쟁이와 여자의 대결 등도 있었다. 여자가 검투사가 되는 것은 서기 20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 서기 326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죄인을 투기장에 내보내는 형이 금지되었다. 사실 검투사 사망의 거의 대부분이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봐도 되기 때문에 이후에는 검투 경기 사망자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 서기 404년에는 최소한 제국의 서쪽 절반에서는 검투사의 경기가 완전히 불법화되었다. 그러나 각종 편법으로 규제를 피해 검투 경기를 즐기는 관중들은 그 후에도 남아 있었으며, 확인할 수 있는 최후의 검투 경기가 벌어진 해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한참 뒷날인 서기 536년 (또는 576년)이다. 이후에도 비공식적으로 검투 경기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동물끼리 싸우게 하는 경기도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소년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호랑이 VS 사자의 경기도 있었는데, 호랑이는 카스피호랑이였고 사자는 바바리사자였다. 승패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거의 무조건 호랑이가 이겼다고 한다. 이는 통상적으로 호랑이의 크기가 더 큰 경우가 많았고, 앞쪽 한 발은 땅에 붙이고 남은 한 발만 휘두르는 경우가 많은 사자와 뒷발로 버티고 서서 두 앞발을 모두 휘두르는 호랑이의 전투 방법의 차이라고 한다. 결국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어린 암컷 호랑이와 장성한 숫사자가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불곰 들소[56]가 싸운다든가, 황소와 인도코뿔소가 싸운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 콜로세움에서는 싸움만 있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볼거리도 있었다. 사자 아가리에 팔을 집어넣는다든가, 훈련된 코끼리가 황제의 관람석 앞에 무릎을 꿇고 코로 라틴어를 쓴다든가, 코끼리를 로프 위에서 걷게 한다든가, 표범이 마구를 달고 전차를 끈다든가 했다. 심지어 사람(남녀 모두)을 동물과 수간시키는 볼거리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수간 문서의 고대 로마 문단과 콜로세움 항목 참고.
  • 동물을 사용한 범죄자에 대한 처형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형태로 진행되기도 했다.
  • 검투 경기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는데, 동물을 이용한 볼거리가 첫 순서였고, 다음은 범죄자에 대한 처형, 마지막이 검투사들의 싸움이었다. 지식인층이 없애라고 계속 요구한 것은 물론 두번째였다.
  • 검투 경기가 금해진 후 유일하게 남은 볼거리인 전차경주의 인기가 급상승했는데, 전차경주 역시 엄청나게 위험한 스포츠였으며 관객들이 일부러 사고를 유발하는 행위를 종종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차경기는 어린애들 사이에도 인기여서 양(동물)이나 염소, 가 끄는 이륜차를 타고 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전차경기에서 전차가 트랙을 도는 회수는 가로대 위에 매달려 입에서 물을 뿜는 돌고래를 뒤집고, 가로대 위의 공을 밑으로 내리는 것으로 표시했다. 영화 벤허에서 실감나게 볼 수 있다.
  • 아즈텍 제국 인신공양 방식의 하나로 검투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전쟁신인 우이칠로포치틀리에게 제물을 바치는 방식이 포로와 아즈텍 전사가 검투 대결을 벌이게 하는 것이었는데, 살찌워 잡아먹을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양상태와 장비가 형편없고 움직임이 불편하게 묶어놓는 패널티까지 주는 등 포로가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그런데 이런 불리한 처지에서도 완전무장한 아즈텍 전사를 죽이고 상으로 재규어 전사로 임명되는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8. 대중 문화 속의 검투사

꼭 주인공이 검투사일 필요는 없다. 투기장이 주요 장면으로 묘사되는 작품이면 족하다. 단, 후자의 경우 어떤 맥락에서 투기장이 묘사되는지 기술할 것.

8.1. 영화

  • 데미트리우스와 검투사
    영화 성의 시퀄. 칼리굴라 시대, 기독교 신자인 코린트의 데미트리우스(전작 성의의 남주인공에게 기독교를 전도한 노예)는 예수가 남긴 의복을 지키려다가 근위대와 싸우고, 그 벌로 검투사가 된다.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교리 때문에 검투시합에서 이기고도 상대를 죽이려 하지 않자 칼리굴라가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이 자에게 매력을 느낀 메살리나가 아깝게 그냥 죽이지 말고 호랑이 4마리와 싸우게 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살아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8.2. 드라마

8.3. 만화

  • 권투암흑전 세스타스 - 다루는 내용은 주로 고대 권투지만, 고대 로마 투기장이 주요 배경인 만큼 검투사도 다뤄진다. 적어도 상대를 살릴 수는 있는 권투, 팡크라티온과 달리, 상대를 죽여야 경기를 끝낼 수 있는 검투사라 엄청 살벌한 집단으로 묘사되는 게 특징.
  • 무사만리행 - 1부의 무대가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을 중점으로 이루어져 있어 검투사들의 전투와 더불어 공성전이나 전쟁을 재현시키는 등 고증을 제대로 묘사시켰다.[57]
  • 투수사 베스티아리우스 - 레인보우 2사 6방의 7인의 작화가 가키자키 마사스미가 소학관에서 연재한 배틀물 + 다크 판타지+ 괴수물 만화로 단행본 7권으로 완결되었다. 대한민국에는 서울문화사가 3권까지만 정발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작화와 연출을 자랑하나 작가의 변에 의하면 정작 자신은 판타지에는 영 조예가 없었다고하며 이때문인지 일부 무장이나 몬스터의 디자인을 타 작품[58]에서 도용한 듯한 흔적이 보인다.

8.4. 소설

  • 폼페이 최후의 날
    주요 소재나 주제와는 관련 없지만 2번 정도 등장한다. 중반에 여성 검투사가 전직이었던 중년 여성과 검투사 출신인 남성의 이야기가 나오고 후반에 주인공이 사실상 죽으라는 의미에서 베스티아리가 되어 단검 하나만 가지고 사자와 싸워야 했던 부분으로 나온다.

8.5. 게임

  • The Bilestoad(더 빌레스토드): 1982년 데이터모스트 게임. 검투사를 소재로 한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 방패와 도끼로 무장한 두 명의 검투사가 거대한 미래 경기장에서 혈투를 벌인다.
  • 엘더스크롤 4 - 플레이어(주인공)가 자진해서 검투사가 되어 원형경기장에서 싸울 수 있다. 배경이 되는 도시가 고대 로마를 모티브로 삼았기 때문.
  • 시저 3 - 검투사 학교에서 양성하고 원형극장과 콜로세움에서 보내는 NPC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나는 시나리오가 있다.
  • 로마: 토탈 워 - 로마 3가문이 각각 특색 있는 검투사 부대를 운용한다. 삼니움 검투사(율리우스 가문), 벨리테 검투사(브루투스 가문), 머밀로 검투사(스키피오 가문).
    • 토탈 워: 로마2 - 로마가 근접 보병인 검투사와 여성 검투사, 창병인 검투사 창병대와 여성 창 검투사를 굴린다.

9. 관련 문서


[1] 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 범죄자 출신 검투사들이 올린 인사로 추정되고 있다. [2] 주로 바바리사자 [3] 주로 정치인, 특히 로마 시장이 맡았다. [4] 때문에 검투사를 현대의 AV 배우에 비유하기도 한다. 업계 정상급에 오른다면 상당한 인기를 누릴 수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며 대부분의 경우 비참하게 된다는 점 등 유사점이 많다. [5] 죽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장례식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6] 서기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로마로 끌고 온 다키아족 포로들 중 일부가 콜로세움에서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 역할을 맡아야 했다. 5만 명 전원을 검투 노예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며칠간 경기를 치러도 될 정도로 수가 많았다고 한다. [7] 다만 콤모두스가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누가 봐도 뻔한 봐주기 경기가 아니라 상대 검투사가 죽어라고 싸워도 답이 없어서 항복하는 식이었다고. 그 정도로 콤모두스는 검투사로써 매우 강했다. [8] Sacramentum gladiatorium, Petronius Satyricon 117 [9] The Roman Games, Alison Futrell, 2006 [10] De Speculates, Tertullian, 22, cited by Futrell, 2006. [11] 그리스에서 행해지던 고대 올림픽 로마 제국에서도 계속 개최하고 있었지만 기독교의 영향 이후 점점 쇠퇴하게 된다. [12] 5세기에조차 검투 경기가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와 논쟁을 벌이던 심마쿠스가 주도한 경기였는데, 그냥 검투 경기도 아니고 게르만족 노예를 끌어내 치른 경기였다. 경기 결과는 노예 검투사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13] 전차경주도 마찬가지였다. [14] 이는 오늘날의 프로 격투기에서 체급을 나누는 것이나, 두뇌 스포츠나 PvP 온라인 게임에서 Elo 레이팅을 매겨 되도록 비슷한 레이팅인 플레이어끼리 매칭하는 이유와 같다. [15] 굳이 레티아리우스에게만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레티아리우스는 투구를 쓰지 않아 관중이 표정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6] BBC의 2003년 다큐멘터리에서는 서로를 잘 아는 두 검투사가 벌인 일종의 연극으로 해석하고 있다. 두 검투사는 데뷔 초 같은 양성소에서 한솥밥을 먹던 친구 사이였다가 서로 다른 양성소로 가서 갈라진 후 해당 경기에서 재회하는데, 서로 전투 방식과 기술을 잘 아는 덕분에 치명상을 피하면서도 치열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단순히 죽이는 것보다는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서로를 제압하는 쪽이 더 어려우므로, 양쪽 모두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다고 해석하고 있다. [17] 특히 언덕으로 [18] 글라디우스는 베기의 위력도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방진을 짜서 일부러 좁은 공간을 만든 뒤 복부를 향해 찌르기 공격을 하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경기를 위해 복부의 방어력이 일부러 약화되는 검투사에게 매우 치명적인 공격이다. [19] 단수형은 베스티아리우스(Bestiarius) [20] 작자 미상의 중세 우화집 베스티아리 #와는 발음이 비슷해도 스펠링이 다르다. 검투사를 뜻하는 베스티아리는 Bestiarii 이고 우화집 베스티아리는 Bestiary 이다. [21]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산 아프리카코끼리는 아니고, 북아프리카코끼리라고 어깨 높이 2미터쯤의 작은 아종이며 현재는 멸종했다. 물론 현생 아프리카코끼리와 비교할 때나 작고 약했지, 사람보다는 당연히 훨씬 더 강했다. [22] 로마 시민권은 남성에게만 적용됐기 때문에, 여성은 로마 시민의 가족이라도 사형이 확정되면 이런 처벌을 완전히 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로마 시민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방식으로 사형당한 사례가 있다. [23] 후대에 창작된 소설들 중 로마 시대를 다루는 폼페이 최후의 날과 쿼 바디스에서 사실상 처형당하라고 밀어넣어진 주인공과 기독교도들이 강제로 베스티아리 취급을 받으며 맹수와 대치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폼페이 최후의 날의 주인공의 경우 그나마 단검이라도 쥐어졌고 사자가 뜻밖에도 공격하지 않아서 살아남았지만 쿼 바디스의 기독교도들은 모두 빈약한 최소 무장마저 없는 맨몸 상태로 경기장에 들이밀어졌으며, 끝내 맹수들에게 죽임당한다. [24] 해당 이름은 그리스어로, 라틴어로는 안드로클루스(Androclus)이다. [25] 복수형은 레티아리 Retiarii - 라틴어로 그 뜻은 '그물꾼 Net-man'을 의미한다. [26] 겉옷을 입는 경우는 게이 또는 여장남자 컨셉이 붙게 된다. 검투사의 사회적 계층 중에서 최하층이었다고 한다. [27] Baker, Alan (2002). The Gladiator: The Secret History of Rome's Warrior Slaves. Da Capo Press. p.55 [28] Junkelmann, Marcus (2000). "Familia Gladiatoris: The Heroes of the Amphitheatre", Gladiators and Caesars: The Power of Spectacle in Ancient Rome. p.51, 59–6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9] 현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용 재현이기에 레티아리 역을 맡은 사람의 삼지창은 끝이 둥근 면보로 감싸는 식으로 마감 처리되어 있고 세큐토레스 역을 맡은 사람도 메이스는 안 쓰고 방패만 쓴다. 참고로 세큐토레스가 초반에 레티아리를 상대하다가 그물을 놓치게 만들자 레티아리가 삼지창으로 견제하고 세큐토레스는 방패로 공격하다 결국 엎어치기로 레티아리 승. 무기의 의미가 보다시피 대회 도중 그물을 잃으면 레티아리의 위력이 확 절감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리치가 긴 무기(삼지창)를 가진 특성상 상대를 보다 쉽게 견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영상에서도 잘 나온다. [30] Auguet, Roland (1970), Cruelty and Civilization: The Roman Games, p.49 [31] 복수형은 라퀴에아리(Laquearii). 라틴어로 '덫꾼/올가미꾼(Snarer)'을 의미한다. [32] 복수형은 미르밀로니스(Murmillones). [33] 각 병종의 3D 재현 영상에서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체감할 수 있다. [34] 또는 트락스 Thraex - 트라세스 Thraeces [35] 복수형은 디마카에리(Dimachaeri). [36] Nossov, Konstantin (2009). Gladiator: Rome's bloody spectacle. Osprey. p. 208. [37] 복수형은 시소레스(Scissores). 저 철자는 현대 영어로 검색하면 가위가 나온다. [38] 공구를 쓰는 손 쪽은 완전히 덮이기에 꼭 후크 선장 비슷한 느낌이 된다. 무장의 경우 제법 두텁게 껴입었다. [39] 2번째 영상에서 시소레가 반월 공구를 어떻게 전투에서 활용하는지 잘 나온다. 상대역은 가장 승률이 높은 그물을 쓰는 레티아리인데, 시소레 역이 공구를 쓰는 손으로 레티아리가 자기 쪽으로 던지는 그물을 잡아채서 역으로 뺏은 다음 공구와 검을 이용해 창을 걸고 막는 식으로 창도 무력화시킨다. 검과 팔보다 조금 긴 공구만 쓰는지라 리치가 짧은고로 시소레 역은 리치가 더 긴 무기를 쓰는 상대에게 처음부터 달려들기보단 거리를 재면서 간을 보다가 여차할 때 무기를 빼앗아 전력을 감소시키거나 무력화시킨다. 사실 상대 역 레티아리가 상대를 빨리 잡는 데 특화되어 있지 무기 뺏기면 취약한 직종이긴 하지만. [40] 복수형은 크루펠라리(Crupellarii). [41]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프락시모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받은 그 칼. 검투사 만화에서 가이우스랑 크레스켄스가 받은 그것과 동일. [42] Kyle, Donald G. Sport and spectacle in the ancient world. Vol. 5. John Wiley & Sons, 2014. pp. 302 [43] 복수형은 에퀴테스(Equites). [44] 한쪽에만 갑옷류를 걸치고 반대쪽은 벗는다. [45] 복수형은 gladiatrices. [46] 전투 기술과 체력 [47] 고대에는 비슷한 이름의 도시가 많았다. [48] 예명으로 추정된다. [49] 이 여자는 해당 소설의 레귤러 + 서브 히로인인 나디아의 여주인으로, 검투사 출신의 남편과 함께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현역 검투사 시절에 황제 앞에서도 경기를 했던 전적이 있으며 이를 자랑으로 삼는다. 작중에서도 그녀의 전투력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세다고 묘사된다. 소설 묘사상 검투사들이 거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묘사되니 이 전직 검투사였던 아줌마도 목숨을 건 혈투를 많이 거쳐봤고, 그런 상황들을 거쳐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단련되었을 것이다. 현재는 검투사 일을 하지 않으며 그 대신 남편과 함께 술집을 경영하는 걸로 봐선 그녀 역시 노예 출신 → 자유민 전철을 밟은 검투사거나 자유민이어도 돈 문제로 검투사를 하다가 그만둔 사람인 듯. 성격도 매우 억세고 잔혹해서, 자기 노예인 나디아에게 학대 수준의 폭행을 해댔다. 덕분에 당대 소설 등장인물치곤 여성 검투사라는 이례적인 기믹을 지녔긴 하나 소설 포지션상 그냥 조역 + 악역이다. 그녀에 대해서도 여성 검투사로서의 면모가 많이 묘사가 안 되는 걸 보면, 여성 검투사 직종에 대한 자료가 지금보다도 부족한 시기에 만들어진 소설상의 등장인물이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50] 이런 식의 처형법은 영화 쿼바디스에서 잘 묘사되었다. [51]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면서 초기 신자들을 사자에게 물어죽이게 한 장소. [52] 거상은 라틴어로 콜로수스다. [53] 케임브리지 대학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교수. 로마 제국사(고대 말기) 전공. [54] 1693년판 번역본 [55] 보리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56] 아마도 오록스였을 것으로 보인다. [57] 다만 그외의 주인공의 배경 등등은 거의 판타지 수준이며, 작가 또한 이것도 어디까지 만화일 뿐이라서 고증에 크게 신경쓰지는 마라고 당부했다. 당장 주인공이랑 황제가 무협물에 나올 수준의 먼치킨이다. [58] 글래디에이터, 몬스터 헌터 시리즈, 맥팔레인 토이즈 [59] 자라모리스라는 파에그니아리와 글라디투스라는 파르물라리우스의 대결인데, 합을 주고받다가 파르물라리우스가 파에그니아리를 검으로 쓰러뜨리면서 파르물라리우스의 승. [60] 여기서 레이저 버나드가 대표적인 검투사 출신으로 사막왕국의 장군 직위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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