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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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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新羅
Silla
파일:통일 신라 지도.jpg
기원전 57년 6월 8일
~ 서기 936년 1월 13일 (약 992년)
시대 구분
사로국 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신라
삼국통일 이전 후삼국시대 이후
고구려 태봉
백제 후백제
신라 신라
통일 <colbgcolor=#fff,#191919> 676년 음력 11월
위치 한반도 중ㆍ남부 및[1] 부속도서[2]
역사 642년 삼국통일전쟁[3]
670년 ~ 676년 나당전쟁
672년 석문 전투
675년 매소성 전투
676년 기벌포 전투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762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822년 김헌창의 난
839년 달벌대전
889년 원종·애노의 난[4]
889년 후삼국시대 개막[5]
896년 적고적의 난
936년 멸망
수도 서라벌
행정구역 9주 5소경
민족 신라인[6], 고구려 유민[7], 말갈인[8], 백제 유민[9], 가야 유민[10], 한족[11][12]
언어 신라어 (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이두, 향찰, 구결)
종교 불교( 교종[13] 선종[14][15][16][17])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 황왕)[18]
매금지존
주요 군주 29대 태종 무열왕[19][20]
30대 문무왕[21]
31대 신문왕[22]
37대 성덕왕[23]
38대 열조 원성왕[24]
41대 헌덕왕[25]
42대 흥덕왕[26]
51대 진성여왕[27]
52대 효공왕[28]
56대 경순왕[29]
국성 (金)[30]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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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3. 정치4. 영토
4.1. 만주 영토 상실 논란
5. 화려한 불교 문화6. 유교 문화 확산7.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8. 신라인의 거취9. 역사
9.1. 삼국통일이전(상대)9.2. 초기(중대)9.3. 중기(하대)9.4. 후기(후삼국시대)
10. 역대 군주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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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統一新羅)는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신라 삼국통일전쟁 끝에 최초로 한반도 일대를 통합하여 한반도 중남부를 지배했던 시기, 또는 그 시기 신라의 국체를 오늘날에 이르는 말이다. 물론 신라의 국체 자체는 정권 교체 형태였던 고려-조선의 경우와는 달리 상국인 고려에게 나라를 완전히 바치는 형태로 끝나긴 하였으나, 신라가 삼한일통을 주장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승계하였음을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또한 같은 논리로 삼국을 통합 계승하였음을 천명하였기에, 고려에게 삼한통합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통일신라는 한국사에서 최초로 통일한 국가기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제29대 태종 무열왕부터[31] 제51대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의 약 220여 년 존속했으며,[32] 시대는 크게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중대[33]와 귀족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하대[34]로 분류된다.[35] 나당전쟁이 끝나는 676년 시점을 기준으로 삼국시대 때의 수백년간의 끝없던 전쟁이 사라지고,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화되며 옛 고구려계, 백제계와 말갈계 등 다양한 종족집단이 신라 내부에 공존하고, 이를 통합하기 위한 정책을 하고, 또한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체제적인 성격을 띠는 등 이전 삼국시대 세 나라 중 하나이던 신라 시절과는 근본적인 국가 성격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구한말 때부터 이 시기를 한정해 부를 때 시대구분을 위해 통일신라로 분류해 부르기 시작했다.[36]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근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고대 왕조였던 발해의 존재를 부각한 남북국시대론이 부상하면서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비판받았다. 과거에는 통일신라시대로 불렀던 것을 21세기에 이르러 남북국시대로 정의하기도 하며 남북국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부르는 것이 혼재된 상태이다.

한국사의 최초 단일국가이며, 한국 고대 국가의 성격과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중세 국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 앞 시대 삼국시대는 고대로, 이후인 고려 중세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가운데 이 시대를 고대로 분류할지 중세로 분류할지도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고대 국가적 요소의 예시로 폐쇄적 골품제가 있었고 이는 결국 전국 다발적인 지방 호족들의 반란으로 나라가 분열되었다가, 나중에는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

세계의 신라 국호
한국어 신라(新羅)
의미는 '덕업일사방 : 德業日四方’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 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羣臣)이 말하기를, "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운 뜻이요, '라'(羅)[37]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羣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wiki style="text-align:right"
金富軾, 《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第1 - 智證麻立干-}}}
다만 실제로는 '신라'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에 377년과 381년에 《 자치통감》 등에서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고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제22대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鷄林)[38],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가운데 일부가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 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신라가 '계'(戒)를 나타내는 시라(Sila)에서, 서라벌을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슈라바스티(Sravast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상 어느것이 맞다 아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병도나 환빠들이 그렇듯 성운의 유사성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딱히 근거랄게 없으며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거라고 내미는 것이 도올 김용옥의 뇌피셜이다.
신라의 또 다른 이름으로 '걸의식국'(乞衣食國)이 있다는 정보도 인터넷상에서 많이 떠도는데 이는 중국의 기담집 《유양잡조》(酉陽雜俎]) <방이 설화>의 한 구절을 띄어쓰기가 없는 한문을 제대로 끊어 해석하지 않고 오역한 것이다. '(방이가) 옷과 음식을 빌어먹고 살았는데(乞衣食), 나라 사람들(國人) 중에 남는 땅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에서 '걸의식'과 바로 뒤에 나오는 국인의 '국'을 '걸의식국'이란 한 단어로 오역한 것이다.
중국어 신뤄(新罗,Xīnluó)
일본어 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신라에 대해서는 新羅라 적고, "シラギ(< シラキ)"(시라기/시라키)로 읽는데, 이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인 斯羅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은 シラ에 キ(城의 뜻)를 더한 것이다. 마쿠라고토바에서는 "栲衾新羅(タクフスマシラキ)"(타쿠후스마시라키)라고도 하는데, 이는 특산물인 종이의 원료 "닥(タク(타쿠))"과 "シラ"에서 연상되는 백색의 이미지가 이불(フスマ(후스마))과 연상되어 이루어진 명칭이다.
아랍어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39]
페르시아어 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신라 시기, 아랍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이때 '베' 혹은 '바' 부분(ب)이 '더 나은, 더 좋은'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무슬림들에게 신라가 일종의 이상향으로 여겨진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반영된 것이라는 의견이다.
영어 SILLA/SHILLA
라틴어 SELLA[40]
인도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41]
만주어 샨로(Siyan lo),
영어권 국가 Later Silla / Unified Silla[42]
한자권 국가 統一新羅[43]
한반도 국가 통일신라 / 후기신라 / 신라

사실 '신라'라는 국호는 삼국시대부터 사용했던 국호다. 제22대 지증왕 이전에는 신라 외에 다른 음차 서라벌(徐羅筏), 사로(斯盧), 사라(斯羅), 시나, 시라 등의 국호가 병용되었다.[44] 이들은 당시 신라어상 같은 이름을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제4대 탈해 이사금 시기에는 계림(鷄林)을 국호로 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나중에도 별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504년에 지증왕이 '신라'를 공식적인 유일한 국호로 정했고, 그 이후로는 국호를 바꾸지 않았다.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신라 당시에 사용된 이름은 아니고 근현대 사학자들이 676년 이전의 신라와 구분하려고 만든 시대구분 명칭이다. 이를테면 백제를 시기별로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 등으로 구분하는 관행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예시로는 옛 서독과 현 독일이 공식적으로는 같은 독일연방공화국이지만 시대별로 나라의 특성이 달라졌기 때문에[45] 통일 이전을 서독이라는 용어로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 있다. 사실 676년 이전의 삼국 중 하나인 신라와 이후의 신라는 무열-문무-신문왕 시대의 여러 급진적 개혁과 넓어진 영역 등 국가운영 양상이 여러모로 차이가 있기에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신라'라는 용어로 퉁치려면 상당히 불편하다는 점에서 명칭구분 자체는 편의적인 측면도 있다. 한 예를 들어 미술사 등에서 부연설명 없이 '신라 양식'이라고 한다면 백제, 고구려 양식과 대비되던 삼국 시절을 말하는 것인지, 백제, 고구려 양식과 일체화되어 발달한 676년 이후 양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호할 것이다.

다만 통일신라라는 용어 자체는 후대 사람들의 편의적 구분이지만 당시 신라인들이 용어대로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던 것은 사실이다. 《 삼국사기》, 《 삼국유사》, 청주시운천동사적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에서도 '일통삼한'과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하는 당대 기록이 다수 남아있다. 특히 신라는 나름대로는 민족 융합 정책을 추진했다. 옛 고구려, 백제 출신 귀족들에게 신라의 관등을 일률적으로 주었다[46]. 그러나 이런 《삼국사기》 1차 사료만 보고 착각해선 안 되는 것이, 원래 갖고 있었던 관위에 비하면 분명코 낮춰서 준게 맞다는 거다. 고구려는 사실상 상한이 6두품, 백제의 사실상 상한은 5두품이었고 아예 이런 상한이 제대로 지켜졌는지조차 상당히 의문시되고 있다. [47] 옛 3국에 각각 3주씩 행정 구역을 균분한 점이나 역시 수를 균등히 맞춘 중앙군 편제 등 다방면으로 당시 신라의 통합 노력은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인의 임시정부로 시작했던 보덕국[48]을 신라가 흡수한 것도 신라가 고구려를 관념적으로 통합했다고 인식한 근거였다는 주장도 있다.[49]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신라의 통일론은 인정받았고, 회의 내지는 부정하는 의견이 조선 후기 이래 21세기에 들어서까지 꾸준히 생겨나면서 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 두 가지 견해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라의 세력권은 8세기 중엽 이후에서야 대동강 이남 지역에 진출한다. 이를 굉장히 작은 영토인 것처럼 표현하곤 하는데, 신라 자체가 원래 영남쪽 소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대단한 것이다. 게다가 대동강 이남임을 따지고 보면 대동강 근처도 못 가는 대한민국의 현재 강역보다도 더 컸다! 다만 백제는 그렇다 쳐도 고구려와는 완전히 통합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 신라의 삼국통일 부정론의 주요 골자이며,[50][51] 정작 북방은 당나라[52] 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발해가 차지해 옛 고구려 영토를 반분한 형세였기에[53] '통일' 신라라는 명칭이 합당한가에 대한 반대론이 조선 후기에도 있긴 했다. 현재는 이 시대를 《 발해고》에 나오는 남북국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르는 편이다.

고구려 북방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공격받고 있음에도 여전히 '통일신라'나 676년에 있었던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여전하다. 왜냐면 당장 이걸 부정해버리면 통일된 국가의 맥은 최소 고려시대부터 시작해야 하며, 고려조차도 고구려 북부 고토까지 전부 회복하지 못한 건 신라와 마찬가지라는 한계도 따른다. 교과과정에서 표현은 위와 같고, 역사학계에서는 삼한 유민 통합을 '시작'[54]한 신라의 삼국통일과 '완성'[55]한 고려의 후삼국통일 모두 의의가 있는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편이다. 소련 먼저 우주에 사람을 보냈고 미국 달에 사람을 보냈는데 둘 중 하나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고 둘 다 중요하듯 시작된 것과 완성된 것 둘 다 중요한 것이다. 또한 현재 한반도 정세상 대한민국의 기본적인 기조는 통일부라는 독립 정부부처를 비중있게 운용할 정도로 통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에, 당연하게도 분열된 모습을 의미하는 남북국보다는 더욱 더 단일대오를 갖춘 통일국가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중이 담긴 것도 있다.

다른 분류명을 더 들어보자면, 1000년이나 지속된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왕조이므로 전 삼국 구도가 무너진 시기를 '후기 신라'라는 용어로 말하기도 한다.[56] 그러나 비슷한 예로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았음에도 이후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편의상 고구려라고 통칭하는 중이며, 고조선도 원래 조선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이성계가 세운 훗날의 조선과의 구별을 위해 그냥 고조선이라고 부르듯[57], 그리고 발해도 당초 '진'(대진국)이라는 명칭으로 건국했으나 역시 '발해'로 뭉뚱그려 부르고 있듯이 여러 가지 편의성 면에서 그냥 '신라'로 용어 통일이 이뤄졌다. 신라 또한 초창기에는 '사로국'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지고 제22대 지증왕 때에 들어서야 신라라는 이름과 왕호를 갖추지만 그전 시기까지도 다 신라로 퉁치고 제17대 내물왕이니 제19대 눌지왕이니 하며 지증왕 이전의 지도자들까지 왕호를 붙여주기도 하는 실정이다. 다만 676년 이전과는 달리 신라 한반도의 지배권을 가져갔으니까 이전보다는 품격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일신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58]

발해사 연구자들의 경우 한규철은 신라가 당병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부터 발해가 개국되는 698년까지 30년이라는 좁은 시간에 한정해 통일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30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 신라 외에 통일된 왕조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발해가 세워진 698년 이후에는 '통일신라'라는 호칭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하고 '대신라(大新羅)'라는 호칭을 주장하였다.[59]

3. 정치

신라는 통일 직후[60]에는 신문왕(제31대)의 대대적인 공신 숙청을 거치면서 나름 꽤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비 및 절대 왕권 확립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 절대 왕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이후 신라 하대에 들어서는 너도나도 왕위를 노리고 반란 쿠데타를 일으킴에 따라 차츰 혼돈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일부 지역에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지방까지 행정력이 미칠 역량이 충분했고 200여 년 이상 통치를 이어갔다. 신라가 통일 왕조로서 멀쩡히 한반도를 지배한 기간만 떼놓고 따지면 676년~892년 정도인데, 216년이면 중국 역대 왕조와 비교하면 청나라, 당나라, 명나라와 비슷하여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인 장수 왕조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신라 중대~하대의 정치가 보편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마냥 혼란하고 취약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고려 초중기보다 지방 통제력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기도 했다.[61] 그러나 오랜 기간 골품제 등의 고대 국가적 병폐가 쌓인 끝에 말기인 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고 세금도 못 걷는 궁색한 지경으로 전락하였으며, 920년에는 본디라면 반란 세력으로 간주했을 왕건의 고려와 정식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수교하여 삼한일통 이데올로기는 이미 신라 왕실 내부에서조차 완전히 끝나게 된다. 그 이후엔 다들 잘 아시다시피 견훤의 서라벌 함락으로 영토 치명타를 입었으며, 서기 935년에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나라를 바치는 것으로 그 왕조의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국가가 종교를 주관할 정도로 국가 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심지어 후고구려와 후백제 역시 신라 출신이 세운 나라이며 이성계 역시 족보상으론 신라 귀족으로 되어 있다. 단, 후고구려와 태봉의 나머지 건국층은 신라6부의 후예가 아니었고 전주 이씨의 가문 조상이 정말로 신라 귀족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함을 알아두어야 한다. 통일신라 당시 황해도 일대를 제외한 신라 영역 전체에 오히려 고려 전기의 그보다도 훨씬 강력한 신라의 밀도 높은 직접 지배가 이어져 옛 고구려, 옛 백제 유민의식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행세하려면 호족들은 통일신라 체제와의 연관성을 내세워야 했던 걸 두고, 정말로 신라가 삼국 유민들의 정체성을 완전 희석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신라 체제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타도와 배제의 대상 또한 되는 현상 자체가, 신라의 한계를 말한다. 특히 골품제가 아쉽긴 한데, 그걸 두고 신라가 태생부터 악하거나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다. 사실 어떤 사회든 신분제가 제대로 개혁되려면 머리 꼭대기부터 한 바탕 뒤집어져야 하므로, 골품제는 결국 신화로 기억되는 고대부터 국가를 쭉 유지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정체성이자 어쩔 수 없는 멍에였다.[62] 후세의 한국인들이 아는 이것을 신라 국왕들이 몰라서 훗날 후삼국 시대가 온 게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신라 왕실은 그 기능을 유지하는 한 진골층의 억제와 지방민 위무를 포기한 바는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골품제의 근본적 개편을 끝까지 거부해서 신라 국왕들의 꾸준한 개혁을 모조리 좌초시켜버려 신라가 망하는 원인을 제공한 원흉은 모두 진골층이 큰 문제였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국가 체제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당시 동아시아 각지에는 당나라의 새로운 행정 체계인 율령제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율령제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긴 했으나, 견당사를 통해 급격히 중국화한 일본이나 당의 행정 체계를 거의 본뜨다시피 한 북쪽의 발해 등과 비교해볼 때 신라는 당이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구축한 통치 체계를 꾸준히 계승하고 있었다. 하대에도 계속된 이 같은 전통의 고수는 신라의 정부 체제가 기존의 갑절 이상 넓어진 영토에서도 충분히 기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끝내 골품제 혁파 등 구습 혁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골품제가 신라 고대부터 이어진 것이라 완전히 바꾸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다 좋은데 유독 정치판의 막장급 다툼을 오점으로 평가하며 신라를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왕위쟁탈전은 어느 나라든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군주제 국가에선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도 모두 겪었고, 특히 태종 무열왕의 방계 왕족인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의 3대 연속 반란 고려 무신정권 이전까지 한국 반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나마 한국사에서 왕위 쟁탈전이 많이 사그러든 왕조가 조선이었다.[63] 《삼국사기》에서도 4명의 왕이 반역자라며 정치판을 막장으로 만들었다고 김부식이 혜공왕(제36대) 시절 때 정치적 상황이나 반란을 평가하기도 했다. 해구‧연신의 난[64]이나 간주리의 난도 막판에 고려가 낫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옆나라 당과 일본( 헤이안 시대)과 비교해도 딱히 큰 차이는 없다.[65] 오히려 마지막 결정타인 후삼국시대가 개막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다음 시대인 고려 초중기에 비해 정치는 안정적이었던 측면도 있는데, 김헌창의 난 등 수도 외부에서 주도해 일어난 반란이 서라벌을 뒤집어버린 경우는 후삼국시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신라 자체의 역사로 한정지으면 통일신라의 최후반 100여 년간은 그 전대와 비교해 집권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 다소 심하게 치중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거기서 그대로 망하지 않고 재도약을 꾀할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었으나 막판의 반란이 너무 대규모라 이겨내질 못했다.

다만 진골들이 너무나도 기득권을 집착적으로 양보하지 않았고, 도리어 개혁 세력이라 할 무열왕계가 타도당하고 보수 세력인 원성왕계가 등장하여 개혁과 경장의 속도가 너무나도 늦어져버린 건 큰 불운이었다. 물론 800년대 신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비판은 삼국사기가 신라를 비판해야 고려 왕조의 입장이 사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였던 건 맞다. 조선도 역으로 800년대 정치적 혼란은 문성왕 시기부터 헌강왕 시기를 마지막 치세로 두어 지적하지 않다가 오히려 후삼국시대가 시작하고 최치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900년대를 정치적 대혼란기와 몰락으로 삼으면서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고 신라를 재평가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삼국사기의 견해가 완전히 틀렸다곤 볼 수 없다. 고려와 조선도 물론 내부 모순은 있었으나 어쨌든 큰 틀에선 개혁을 주장하는 신진 세력이 등장해서 기존 보수 세력을 질타하고 몰아내는 구도가 이어졌는데, 신라는 거꾸로 백제 유민 정서 달래기와 골품제 완화를 주장하는 무열왕계가 몰락하고 기존 보수파인 진골 귀족 집단인 원성왕계가 집권한 역행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물론 원성왕계도 나름대로는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본인들 자체가 진골 집단의 일원이었던데다 무열왕계만한 삼한일통이란 군공이 없었던지라 근본적인 개혁은 무리였고, 그 결말은 모두가 아는 바다.

당시의 임금과 인물에 대해서는 신라/왕조, 신라/인물 문서 참고. 여담이지만 통일신라 중기 무열왕 직계 국왕들(무열왕~ 혜공왕)의 수명들이 하나같이 짧은 편이다. 50대에 사망한 무열왕(59세), 문무왕(56세)를 제외하고 신문왕부터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 국왕들은 50세를 넘기고 생존한 임금이 없다.[66] 그래서 조선 후기에도 비슷한 이유로 왕손이 적어진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4. 영토

새로이 편입한 구 고구려령에 대해서는 9주 5소경 중 고구려 멸망 전의 영토를 삭주(朔州), 명주(溟州)로, 고구려 멸망 후의 영토를 한주(漢州)로 이름하여 복속시켰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경우 초기에는 당이 안동도호부를 세워 차지하다가 나당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 유민과 함께 축출시켜 잠시 편입하기도 했고, 뒤에는 신라 혹은 발해의 관할로 들어갔을 터인데 그럼에도 이들 남북국에서 평양 일원은 국경으로 밀려난 변방이 되어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신라는 옛 고구려의 수도가 있는 서북방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2정을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계가 있었고 발해 역시 평양에 대한 지배 흔적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신라는 나당 연합 당시 약속되었던 황해도 지역에도 느슨하게나마 행정력을 관철하는데 100년 가까이 걸렸고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한 고려 때까지는 이민족들이 기승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 발해, 당 모두 이 지역까지 행정을 펼치지 못했다.

다만 최근에는 황해도의 재건 및 평안남도 지역으로의 진출 등이 패강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발해가 점령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평양 지역이 실제로는 고구려 멸망 당시 황폐화되었고, 신라 대동강 이남 지역의 개발을 통해 서서히 평양 방향으로 영향을 넓혀나갔다는 주장. 특히 이러한 개발의 중심이 되는 예성강 ~ 대동강 구간은 고려 태조 왕건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일단 왕건의 전임자인 궁예가 자리잡은 곳이 개성이다. 이는 어느 정도의 경제 & 사회적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다만 현재의 미수복 경기도 황해도에 해당하는 이 패강진 지역은 임진강 이남의 9주, 즉 현 남한령에서와 같이 강력한 행정통치가 관철되지 못하였고 어느정도 권력공백적 성격을 띠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패강진에 잔류한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은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훗날 고려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에게서 양해 받아 확보한 패서 일대 전체에 직접 지배를 처음으로 확고하게 관철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태봉의 궁예였다.

4.1. 만주 영토 상실 논란

고구려 북부였던 만주 영토를 한국사에서 제외시켰다는 이유로 학계에서도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보는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신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라기 보다는 통일신라라는 말처럼 "신라의 삼국통일을 과연 통일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평가에 가깝다. 다만 이 부분은 발해가 있어서 미묘한 편이기도 하다. 고구려 북부 영토는 발해가 대부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만주가 한국사에서 거의 이탈한 것은 발해의 멸망 및 부흥운동 소멸 이후인데 그 과정에서 신라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신라와 발해 사이에는 외교적 갈등 외에 거대한 군사적 충돌을 찾아보긴 어렵다. 신라는 통일을 하면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영토를 상실했지만 고려시대에 한반도 북부를 거의 수복하며 북원이 점령 중인 요동 정벌때 잠깐 동안 요동을 점령하고 후퇴하고 이후 만주는 포기했다.[67][68][69] 현대인 지금에도 만주를 포기한 것은 상당히 현명한 선택으로 볼 수도 있는데, 만주는 지리적으로 전쟁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라 사방에 적에 둘러싸인 환경에 처하기 쉽기 때문이다. 중국, 몽골, 만주족, 일본 등. 전쟁중에 일본까지 한반도로 침략하면 정말 최악이다. 반면 한반도는 산지가 많기에[70] 산성에서 방어하기 매우 좋다. 실제로 당나라가 남은 한반도를 차지하려고 기벌포 전투 매소성 전투로 잘 알려져있는데 이둘을 합쳐서 한반도에서 당나라와 40번 이상 싸웠다. 역사적으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한, 당, 거란에 의해 멸망했고, 중국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 없는데, 동남아 국가(미얀마, 베트남 등)나 북방유목민족, 중앙아시아 국가( 돌궐)에게 공격을 당했다. 결국 중국대륙과 유럽 일부도 원나라에 점령당할 정도였다. 이후 만주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등 일본군, 중국군, 러시아군이 싸우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고대세계에서도 통일은 정복국가의 영토를 흡수하는 것과 함께 왕족과 천명 등 명분론적 정통성의 확보도 중요했다. 같은 맥락으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데 있어서 명분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신라는 미약하나마 고구려인이 직접 추대한 안승 보덕국은 흡수했다고 하지만 백제의 핵심 요인들 상당수는 당나라로 끌려가거나 백제부흥운동을 전후로 일본으로 망명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들을 흡수하지 않았다.[71] 백제 구 지배층 중 신라에 몸 담아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 중 가장 높은 사람은 충상 상영인데, 이 둘은 높게 잡아도 방계 왕족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대신 신라는 백제 승려 경흥을 나라의 어른(國老)으로 임명하고 미륵사 왕궁리의 절, 제석사 같은 백제의 초대형 왕실 사찰을 백제 멸망 후에도 계속 운영하는 등 백제 불교 위주로 회유한 정황이 나타난다.

또한 영토에 관해서는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전부 차지한 반면, 고구려의 실질적인 수도권이자 핵심 영토인 패서(浿西)[72]는 성공적으로 점유했어도 고구려의 또 다른 인구 밀집지이기도 했던 국내성 일대, 책성 일대, 그리고 요동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73] 따라서 현재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고[74] 고려가 민족적인 측면에서 재통일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고려는 엄연히 고구려계 호족들이 분열된 신라 땅을 다시 통합하고 고구려라는 기치 아래 옛 고구려의 영토까지 회복했다는 점도 통일국가라는 요소에 긍정적으로 직용하고 있다. 다만 신채호처럼 민족주의자들 경우에는 통일이 현대까지 한 번도 된 적이 없다며 이와 같은 지적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통일국가 대신 단일국가라는 명칭으로 부르자는 견해도 종종 나오고 있는 편이다. 사실 고구려를 살피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남쪽으로 영토를 팽창하며 획득한 이들을 한인(韓人)과 예인(穢人)이라 지칭하고 있고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 매금이라 여기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와 비슷하며 예국과 옥저는 고구려와 비슷하지만 한(韓)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특정 시각과 달리 서로 다르게 봤다는 여지가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당시 신라는 삼한일통을 주장하긴 하였으나 고구려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하는데 소극적인 편이었다.[75] 특히 당시 신라인들은 통일 전쟁 후 자신들이 더 거대해졌다고 생각했지 결코 작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에서 고구려를 작은 나라로 비유하고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방계로 조롱했으며,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마저도 발해를 고구려에 부속된 말갈로 여겼다. 일본의 《자각국사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신라 승려들이 매년 8월 15일에 발해에 대한 신라의 옛 승리[76]를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를 벌인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왕조가 계속해서 통일하고 성장하는 와중에 겨우 한반도에서 나오는 자원과 인구로 옛 고구려 영토를 수복하는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느냐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구장창 신라탓만 할수는 없다는 변호도 있다. 신라 말고 만주 수복 의지가 있는 왕조가 들어섰다 가정하더라도 중국과의 물리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만주를 계속해서 통치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신라는 나당연합 나당전쟁 과정에서 중국 통일왕조가 얼마나 강대한지 확실히 느꼈다. 사실 신라 이전에 그 고구려조차도 중국 통일 왕조와는 웬만하면 충돌을 피하려 했었으며 그 평양을 가지고 있었다던 고구려가 멸망한 큰 원인도 중국과 자주 충돌하면서 그 피해가 축적되었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신라의 의지 이전에 한반도 지역에서 끌어올 수 있는 역량의 한계점에 도달한것으로 보는게 맞다는 것이다. 내부 문제가 많았던 신라의 사정은 둘째치고, 그 이후 건국된 태봉, 고려, 조선도 결국 만주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된다.[77]

신라의 삼국통일이 비판을 받는 핵심 이유는 단순히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거나, 고구려 영토를 완전히 흡수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통일을 '외세를 끌어들여' 이루었고, 그 과정에서 삼국 중 고구려의 핵심 역량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 채 사실상 외세에 의해 상실하고 이를 복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78] 이 문제에서 고구려가 어차피 중원 왕조들과의 충돌로 망할 운명이었다거나 하는 가정은 무의미할뿐더러, 실제로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행보를 보면 그 가정의 설득력도 그다지 높지는 않다. 당은 총력을 기울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번 등 서역전역이 열려 당이 동쪽에 신경을 쓸 여력을 상실하고 신라의 북진과 발해의 건국을 용인하며 결국 무왕대 이후 멸망하는 그 날까지 만주에 대한 무력투사를 재시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고구려보다 명백히 체급이 떨어지는 신라 역시 계림도독부 취급하며 아예 병탄하려 들기까지 했지만 결국 나당전쟁은 신라가 별 다른 외부 동맹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한반도 내의 자원을 동원하여 격퇴하고 국체를 보전할 수 있었다. 물론 신라의 입장에서는 나당동맹을 위한 삼국통일이 자국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그 결과 후대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선택의 대가로 감내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허나, 신라가 민족의 생활공간을 실추했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관점이며, 삼국시대때 자국 생존을 위해 서로 박터지게 싸웠던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이 "서로 같은 한민족이니 외세를 배척하고 나중에는 하나로 합쳐져 한민족의 생활권을 지키는 게 옳다"는 인식을 가졌어야 한다는것 역시 현대인의 무리하고 오만한 주장일 뿐이다. 당장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반도는 두개 나라로 쪼개져 있으며, 두 나라 모두 외세를 끌어들이고 있다. 더군다나 이 두 나라는 옛날 삼국시대와 달리 수시로 전쟁을 벌이는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연 양국의 감정이 서로 동질감을 느낄만큼 좋다고 할수 있는가? 라는것 또한 역지사지로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다. 삼국시대에 비하자면 건국시기에 딱 한번 전쟁했고, 분단이후 '겨우' 100년도 안지난 시점인데 '벌써' 현실에 지쳐서 통일을 포기하자거나 서로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는 여타 과격한 여론들도 생겨날 정도이다. 한민족의 개념이 명백하게 들어선 지금에 와서도 이런데 삼국시대에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낄수도 없었던것이 당연하다. 삼한일통도 어디까지나 마지막 살아남은 국가인 신라가 자신의 치적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고 몇몇 이득을 위해 사용한 단어에 가깝다.

당시 신라는 어디까지나 경상권에 국한되어있던 남부의 국가였고, 백제를 합병하고 평양 유역까지 진출한 것 만으로도 신라인들의 관점에선 국력상 감당키 벅찰 정도로 괄목할 수준의 국토팽창을 일군 것이며, 당연히 자신들의 옛 영역도 아닌 고구려땅까지 진출할 이유는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한일통 의식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유민들이란 인적자산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무한겁 끌어쓰기 위한 유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사에는 통일 신라와 함께 병존하다 거란의 등빨에 밀려 만주에서 축출당한 발해왕조와, 발해유민 흡수 후 만주로 재진출 하려다 거란과 여진[79]의 등빨에 밀려 좌절당한 고려왕조가 존재한다. 만주 고토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은 당연히 만주와 아무 인연이 없는 통일신라 파트에서가 아닌, 고구려의 직계 후예들인 발해사와 고려사 파트에서 느껴지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발해가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당시 정치 체제가 불안정했음을 의미 하기도 한다. 두 나라는 다민족 국가인데, 여진족 조상들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 당, 거란의 지배를 받다가 이들도 부족 간 전쟁으로 융합되어가면서 규모가 점점 커져가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져 한족, 한민족, 몽골계들 입장에서도 상대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여진족이 융합되어 금나라를 세워 송나라와 연합해 거란을 멸망시키고, 이후 송나라를 남쪽까지 후퇴시켰으니. 중국이 요동을 차지하려는 이유가 있다. 산해관만 넘으면 산둥반도는 평야라 방어도 불리해 그냥 점령 당한다. 또한 중국 대륙 대부분은 한반도와 비교도 안될만큼 매우 높은 산지거나 나머지 조차도 사막이다. 국경이 넓으면 방어에 불리한 점도 있었다. 6.25 전쟁때도 중공군이 내려오니 청천강-영흥만으로 유엔군이 처음 방어선으로 설정 했다.] 현대에도 낙동강 방어선 전투만 보더라도 강을 국경으로 하면 방어하기에 용이하다. 통일신라도 고구려 국경을 다 막기는 역부족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현대에도 6.25 전쟁때 중공군을 너무 얕보며 산개해서 북진 하지말고 평양-원산에서 유엔군이 모여 재정비 했으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의문까지 남고 있다. 고대에는 국경이 워낙 널뛰기가 심해 큰 의미가 없었기에 청나라 말기나 되어서야 현대의 국경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는데, 후대의 사건들만 봐도 이때까지 만주를 유지하긴 힘들다는 의견이 많은 상황이다. 만주는 커녕 요동도 힘들다. 요동도 중국, 북방유목민족, 한민족 모두 다 노렸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5백년간 남쪽 지방에 살던 고대인들이 북부의 높은 고산지대와 혹독한 추위를 감당하면서 영토를 넓게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 서울까지만 해도 지금의 부산의 기온과 비교 할 때에 10도 이상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대동강 까지의 영토를 차지한 것이 옳다는 판단. 거기에 통일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대륙 세력의 공격을 받을 때에 길목이 넓은 북부 지역 보다는 수비하기에 용이한 대동강을 끼고 싸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주땅을 상실하여 지금의 국력이 약해졌다는걸 생각하면 안타까울수밖에 없는 일인건 어쩔 수 없다.

5. 화려한 불교 문화

불교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이 시기에 많은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 만들어져 지금도 다수가 남아있는데, 뒤를 계승한 고려가 불교 문화에 있어서 규모나 질적인 수준에 있어서 오히려 통일신라에 비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정도다.[80] 특히 신라 시대가 다른 한국사의 시대와 비교되는 것이 불상의 완성도인데, 석굴암 본존의 조형미나 크기는 한국 불상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불국사 석굴암 등 신라와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불교 유산들과 명승 고찰이 대부분 통일신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고려도 신라 못지 않은 불교 국가여서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을뿐더러 이 시기에도 흥왕사 보제사 같은 거찰이 많이 세워졌고, 기존에 있던 황룡사 같은 신라 거찰들도 후기에 외적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관리를 받으며 잘 번성했다. 그러나 신라와 달리 교종 선종의 대립 탓에 신라처럼 수도의 왕실이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입장은 못 되었고, 전국에서 비슷한 경주 스타일 표준형식 불상과 탑이 지어지는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에서는 호족 등 지방 세력의 지분이 커서 파주 용미리 불상, 논산 은진미륵 등 투박하고 개성적인 형식의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고, 신라의 사실적이고 각 잡힌 불교미술과 비교당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고려가 통일신라보다 역사가 2세기 더 길고 더 후대 왕조인만큼 남아있는 유물의 양은 고려가 더 많다.

신라는 통일 직후 새로 편입한 땅의 변방에 큰 절을 세우면서 불교 보급과 점령지의 민심 교화를 시도했고 또한 국방상의 기지 확보까지 꾀했다. 그 예가 의상대사의 화엄10찰 창건이다. 덕분에 원래 백제 영역이던 서남부 지역에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이나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처럼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이 세워졌고, 지금은 북한령인 금강산처럼 신라의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도 정양사 삼층석탑처럼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등 신라 중심지에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문화가 전파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이전 중고기와 달리 화엄종을 밀어주었다. 중국에서 화엄학을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의 화엄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화엄일승법계도》에 따르면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 결국 하나라고 하며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뒷받침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5악을 위시한 전국 각지 명산에 화엄 계통의 사찰을 세웠는데, 유명한 것이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화엄사 등 열 곳이라 이들을 '화엄 10찰'이라고 한다.

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선종불교가 도입되었고, 선종의 개인주의적 경향은 지방 호족세력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풍수지리 또한 이 때에 도선 등에 의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6. 유교 문화 확산

이미 통일 이전부터 유교는 화랑 문화와 접목되어, 삼국통일전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여 신라군을 강군으로 단결시켰다. 더 이상 전쟁이 없어진 통일신라에 이르러 제31대 신문왕은 유교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하고,[81] 거기서 오경을 가르쳤으며, 제38대 열조 원성왕때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내성에서는 대부전(大傅典)이란 전담 관청을 설치해 왕실 자녀에게 유교적 제왕학을 가르쳤다.

또한 고유 조상 숭배 사상이 아닌 유교식으로 체계화된 종묘를 한국 역사상 처음 도입한 것도 신라였으며, 이는 고려 조선의 종묘로 이어진다. 신라의 종묘 체계에 관해서는 종묘 문서 참조.

지방 교육기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토산군 최응, 광해주( 춘천시)의 박유, 영암군 최지몽 등 지방 출신 지식인이 증가하고, 5대 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 청주시)에는 학교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하대는 이렇게 유교적 교육이 전국에 보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7.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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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유럽에서 작성한 세계지도.[82]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 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프랑스어-아랍어 대역 346쪽 영문판 358쪽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 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기타 중근동 문헌들의 신라 관련 기록들[83]

세계와의 무역도 활발했으며[84] 장보고 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해상을 장악한 시기도 이 때. 진정 아시아 이탈리아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신라 정부도 유학생의 책값과 체류비를 지원하고 유학 경력자가 귀국하면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엔닌의 《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연안항해를 하지 않고 당나라 적산포에서 충청남도 해안까지 이틀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어 자리잡고 있던 데다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 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흔치 않았다. 사실 당과 일본 모두 삼국통일 전후 혼란기에는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 집적거리긴 했지만 이내 역관광당했고, 통일 뒤 통일신라가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가적인 공격 기도를 멈췄다.

특히 일본의 경우 사이메이 덴노 ~ 덴지 덴노의 시기에 멸망한 백제를 돕겠답시고 대규모 군사를 내어 한반도로 보냈다가 싹 날려먹는 병크로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었고 이후 8세기에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추진됐으나 이는 임진왜란과 같이 내부적 불만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었고, 발해 또한 무리한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발해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끝내 당시 최강 국력을 자랑하던 통일 직후의 전성기 신라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아마도 실행했다면 사이메이 덴노 시즌 2 확정.[85] 오히려 신라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올까봐 두려워했다는 당대 정황도 나타나고 있으며, 실제로 일본측 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공격하였다는 기록들도 꽤 나오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내륙에 신라인의 거점인 신라방이 구축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그 외에도 신라관, 신라촌, 신라원, 신라소라 이름 붙은 이 시기의 대당 거점이 꽤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 신라의 진취성과 당나라 개방성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 뿐만 아니라 국수주의로 돌아선 헤이안 시대 일본에조차도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오가면서 교류가 꽤 있었기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꽤 많으며[86] 심지어 적성국으로 출발한 발해와도 후대에 교역을 트면서 <상경 → 동경 → 남경> 루트를 거쳐 금성까지 연결하는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개척되기도 했다. 《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당대 가탐의 저서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이 있었던 책성부[87]에서 신라 북쪽 천정군[88]까지의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는 비가 오는 날 가가호호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할 정도. 말기인 헌강왕 때에 이르면 도성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하긴 그만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문화적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다만 모두 수도의 융성함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보니 여타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나말여초 대에의 소설이나 지방에 도로가 이어져있는 것 등을 볼 때 지방 사정도 낙후되거나 방치된 것이 아닌 정돈이 잘 정리 되어있고 서라벌만큼 융성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조차도 신라에 와 보고는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영구 정착,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그들의 지리서에 기록했다.[89]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위에 첨부된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에도 신라가 표시돼 있는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서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 삼국유사》에 용왕의 아들로 나오는 처용이 사실은 아랍에서 온 인물이었다는 정수일 선생의 설이 유명하다. 이외에 중세 이란의 서사시 《 쿠시나메》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의 왕자와 그의 혼혈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으로, 현대에 한국에도 알려져서 공연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원성왕릉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은 신라에서 거주하는 페르시아계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원성왕릉 석상이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헌덕왕릉 석상[90], 용강동 돌방무덤 등에서 비슷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경주시에서 특이한 유리구슬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식리총 상감 유리구슬, 경주 노서리 상감 유리구슬이 그것이다. 영국 런던 고고학연구소의 제임스 랭턴 박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지역의 고대 펠랑기 구슬과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적어도 4세기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 주민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외에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신라 승려 2명이 인도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을 거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스리비자야 왕국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로 오가는 구법순례의 중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와 교류가 있었던 근거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 베트남에 대해 기록한 최초 사례는 신라의 문인 최치원의 882년 저작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이다. 《계원필경》의 일부이며, 당시 베트남 역사에 대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신라 승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기록이 부족한 당시 인도-중앙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행기를 남긴 혜초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신라 승려들이 인도를 오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법사, 혜업 법사, 현태 법사, 현각 법사, 혜륜 선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까지 일곱 명의 신라 승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현태법사는 중앙아시아 루트를 선택한 혜초와 달리 650년에서 656년 사이에 티베트와 히말라야 산맥, 네팔을 거쳐서 육로로 인도에 갔고, 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승려는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해로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신라인의 인도 구법순례는 비록 기록이 부족해 완전한 복원은 어렵지만, 이렇게 여러 경로가 개척될 정도로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를 지나는 바닷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로도 꾸준한 교류가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부터가 갈 때는 바닷길로, 올 때는 육로로 돌아온 케이스이며, 한편 실크로드 사막 오아시스에 있는 세계유산 막고굴 중 제61굴의 벽면에 새겨진 오대산도(五臺山圖) 그림에는 신라송공사가 그려져 있다. 신라 사신단은 사신, 관원 2명, 통역관, 마부까지 총 5명이며 이들이 중원을 넘어 실크로드의 둔황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막고굴 중 제355굴 벽화에도 조우관을 쓴 신라인 2명이 그려져 있다.

그 외 신라 주변국에서 견신라사로 파견하여 활봘한 교역을 하였고, 반대로 신라가 견탐라사, 견일본사, 견발해사, 견당사 등을 파견하여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8. 신라인의 거취

삼국통일 이후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 통일신라의 신라인들은 제각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방으로 이주해 정착, 그에 따라 폭넓은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많은 이들이 유학과 상업을 목적으로 바다 건너의 당나라로 건너갔는데, 이들 가운데는 중원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명성을 떨친 당대의 고승들도 포함되어있다. 신라인들은 이주 외에도 문화 교류 차원에서 당나라와 활발하게 교역하고 우호관계를 다져나갔다. 한편, 어떤 이들은 왜국으로 이주해 정착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일부는 정황상 의외로 발해로 들어가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인들의 활발한 대외활동을 고려하면 적어도 수만은 건너가 더러는 정착하고 더러는 귀향했을 것으로 보인다.
  • 당나라
재당 신라인들로 말할 것 같으면 일종의 고대 코리아타운과 같은 신라방(新羅坊)으로 많은 것들이 요약이 된다. 당시 신라방은 신라와 인접한 당나라의 동해안인 산동(山東) 강수(江苏)에 걸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는데, 이곳 신라방들을 중심으로 신라의 수많은 숙위학생, 상인, 구법승, 사절, 경제 및 정치적 난민들이 거주 내지는 활동하였다. 당나라 내의 신라방 가운데서는 대운하 일대의 초주(楚州)와 산동반도의 적산촌(赤山村)에 있는 신라방이 가장 성하였다. 특히 적산촌(赤山村)은 그 유명한 해상왕 장보고가 직접 법화원을 세웠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제 물류에서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던 신라방은 신라인들로 하여금 중원뿐만 아니라 저 멀리있는 서역[91]의 여러 나라에서 온 상인들과 교류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거점들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당나라와의 원활한 외교를 도모할 수 있게 한 발판이기도 하였다. 신라방 외에도 신라에서는 당나라와 정치외교적인 관계만을 가지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문화 교류 차원에서 서로 활발히 통하기도 하였다.[92]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듯,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인들 중에서 일부는 해적이나 도적한테 붙잡혀 노예가 되기도 하였다.[9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력이 최고조에 이른 통일신라의 위상[94]과 그에 걸맞은 신라인들의 소양[95]에 힘입어 수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에서 이름을 알리며 크게 성공하기도 하였다.[96]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신라인들로는 대표적으로 김교각[97], 장보고[98], 신라삼최[99], 혜초[100], 이동[101], 정년[102], 박구[103] 등이 있다.[104] 당나라에서 활동한 이들 가운데 정치나 군사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고구려[105]나 백제 유민[106] 출신들과 달리,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 출신들은 반대로 상업, 학문, 불교, 문화 분야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 왜국
당나라에 신라방(新羅坊)이 있었다면 왜국에는 신라군(新羅郡)이라는 신라인 공동체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신라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야마토 왕권으로의 이주는 7세기 말부터 9세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나라에서 활동했던 신라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대개는 각종 상업 활동 및 상권 형성을 도모하는 상인층과 불교를 전파하려는 고승들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 외에 일본에서 주목받은 또다른 부류는 다름 아닌 기술자들이었다. 율령 반포를 통해서 중앙집권적 체제를 향유한 일본이었지만 당나라 다음으로 가장 융성한 국력과 선진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통일신라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에 일본은 신라인 가운데 특수한 기술들을 갖고 있었던 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상업 활동을 장려하기도 하였다.[107][108] 특히 통역[109], 제련술[110], 가무[111], 선진 불교문화[112]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이 우대받았다. 불교 전파를 위해 승려나 기술을 전파하는 기술자 외에도 예술가와 경전 번역자 집단의 이동 또한 동반되었다.[113] 무엇보다 당시 신라인들은 선진적인 조선술(造船術)로 만든 신라선(新羅船)이라는 우수한 배들을 앞세워 당나라 야마토 왕권을 잇는 중개자 역할을 일방적으로 독점하다시피 하였는데, 왜국으로서는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에서 귀국하는 일본 사신이나 승려들이 신라선을 임대하여 항해에 익숙한 신라인을 고용하여 귀국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114] 일본으로의 이주에는 정치적 망명을 목적으로 한 부류도 있었다. 일례로 속일본후기에서는 장보고가 살해당하고서 청해진이 폐지되었을 때, 청해진에 몸담고 있었던 어려계(於呂系) 같은 사람들이 망명한 것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 발해
일본과는 달리, 신라인 가운데 발해로 이주한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발해가 멸망했던 당시 고려에 귀부했던 발해인들의 이름에서 신라계 발해인의 존재를 유추할 뿐이다. 전형적인 신라식 성씨를 가지고 있는 발해의 인물들 가운데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115], 박승(朴昇)[116], 김신(金神)[117] 등이 전해지고 있다.

9. 역사

9.1. 삼국통일이전(상대)

신라 문서 참조.

9.2. 초기(중대)

나당전쟁을 완료한 문무왕이 승하한 후, 다음 왕인 신문왕은 강한 개혁정책을 펼쳤고,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감수하고 진골에게 주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했다. 옛 삼국에 각각 3주와 2소경씩[118] 분배해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신라군 중앙군 9서당에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로 출신별로 군부대를 만드는 등 옛 삼국의 균형을 맞추려 했으며, 신문왕대의 왕권강화는 통일신라의 국가 기반을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3. 중기(하대)

흥덕왕 장보고에게 서남해를 맡기고, 장보고는 청해진을 세워 바다를 지키게 된다. 그러면서 아랍, 당나라, 왜국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어 많은 이익을 벌게 되었다. 이 시기 김헌창의 난이 있었으나 중흥으로 국가를 이끌어간다.

9.4. 후기(후삼국시대)

후삼국 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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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70000,#0a3711>전쟁 교전세력
교전세력
원종·애노의 난
,889,
신라 원종ㆍ애노
비뇌성 전투
,899,
궁예 양길
제1차 대야성 전투
,901,
신라 후백제
나주 공방전
,903~914,
태봉 후백제
제2차 대야성 전투
,916,
신라 후백제
제3차 대야성 전투
,920,
후백제 신라
제1차 조물성 전투
,924,
고려 (무승부) 후백제 (무승부)
제2차 조물성 전투
,925,
고려 (무승부) 후백제 (무승부)
제4차 대야성 전투
,927,
고려 후백제
서라벌 기습
,927,
후백제 신라 고려
공산전투
,927,
후백제 신라 고려
삼년산성 전투
,928,
후백제 고려
제5차 대야성 전투
,928,
후백제 고려
백제의 나주 탈환
,928,
후백제 고려
고창 전투
,929~930,
고려 후백제
예성강 전투
,932,
후백제 고려
사탄 전투· 자도 전투
,933,
고려 후백제
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고려의 나주 탈환
,935,
고려 후백제
일리천 전투
,936,
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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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지자 호족들이 자립하기 시작하고 그 중 901년 북쪽에서는 궁예가 태봉을, 전라도 지역에서는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다. 초기까지는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신라의 국력이 어느 정도 건재했지만 결국 920년 대야성을 후백제에 잃고, 경애왕 사후에는 신라의 위기가 찾아왔다.

한편 북쪽에 있는 태봉은 왕건의 쿠데타로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된다. 한편 후삼국의 정세가 930년 고창전투와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고려의 승리로 급격히 고려에게 유리해지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려에게 항복하면서 신라의 1200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경순왕은 낙랑왕으로 책봉되어 고려 수도 개성에서 살았으며 978년 사망한다. 그는 죽어서도 남긴 자식들이 고려 왕실과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10.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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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휴 이사금 내해 이사금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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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 마립간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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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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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서


[1] 676년 나당전쟁 승리( 임진강선) → 694년( 효소왕3) 송악성 축성( 예성강선) → 748년( 경덕왕7) 대곡성(오늘날 평산군) 등 축성 → 선덕왕대 패강진( 황해도 일대) 개척 → 헌덕왕대 취성군(오늘날 황주군) [2] 우산국, 탐라국 [3] 통일신라의 시작점이며, 삼국통일전쟁이 시작된 시기는 학계에서 의견이 다르다. [4] 통일신라의 끝맺음이다. [5]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건국되면서 통일신라의 영토가 축소되었다. [6] 골품제를 기반으로 통일신라의 정치사회적 주류를 차지하였다. 삼국 통일을 전후로 9주 5소경의 행정 체제가 완성되면서 서라벌의 왕경인(王京人)들을 중심으로 신라인들은 오소경(五小京)을 비롯해 지방 곳곳의 크고 작은 군현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훗날 이들 가운데는 더러 현지의 고구려계나 백제계 인구에 동화되거나 일대의 유력자나 호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통일신라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를 아우르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관념이 확산되었지만 후삼국의 분열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된 종족 정체성을 완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7]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 다수는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들 지배층은 예맥족이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주로 패서(浿西) 지역, 이른바 한강을 경계로 이북에 걸친 평안남도 • 황해도 • 강원도 • 경기 북부(현재 기준 파주, 장단, 개성 등) 일대에서 주류를 차지하며 거주하였다. 신라의 직접 통치 아래에 놓여있던 구 백제 영토의 백제인들과 달리, 패서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은 반자치 형태로 존속하며 고구려의 문화, 언어, 종족 정체성을 상당 부분 계승, 훗날의 고려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한편, 패서의 고구려인들과는 반대로 익산시와 그 주변부를 터로 잡았던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은 신라에 의해 철저하게 익산 이남 전라도 지역 및 서라벌에 분산 배치되는 식으로 사민되어 끝내는 고구려인 정체성을 잃게 된다. [8]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남하하면서 편입된 부류. 9서당 중에 하나인 흑금서당에 소속된 이들이 대표적이다. 고구려의 예맥과 오랜 기간 함께한 민족이다. [9] 신라에 편입된 백제 유민들. 인구와 비옥한 땅이 밀집해있던 수도권 지역인 패서(浿西)를 차지했어도 다수의 영토가 당나라로 넘어간 고구려와 달리, 백제 전역은 신라에 완전히 편입되어 그 유민들도 당나라( 의자왕과 왕실을 비롯한 1만 2천 명 등)나 왜국(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 와 그 휘하 세력 일부)로 흘러들어간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통일신라에 그대로 편입되었다. 반자치적인 형태로 존속했던 고구려 유민들을 반세기간 방치했다시피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라는 백제 유민들을 직접 통치하면서 때로는 백제 고토에 잔류(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시키거나 신라의 내지로 철저하게 사민( 나당전쟁 당시 김품일 등 신라 장수들의 웅진도독부 공략을 계기로 내지로 사민된 수십여개 성(城)의 백제 유민과 같은 경우)하였다. [10] 예를 들어 신라에 협조적인 대가야 왕족 후손들은 재지 세력으로 활용되었다.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은 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802년(애장왕 3년)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옛 대가야 영토인 가야산 자락에 해인사를 창건했다. [11]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막기 위해 안동도호부 등 설치 했다. [12] 그외에도 고구려를 구성하는 거란, 실위 등 여러 민족들이 같이 유민으로 내려왔다. [13] 신라에서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하대가 되면서 중국에 유학한 구법승려가 개인주의적, 사회개혁적, 민중지향적인 선종을 수입전파하고 호족들이 선종을 후원,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왕건의 고려는 선종 세력으로부터 사상적 후원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고려도 국가 성립 이후에는 지배층은 교종과 밀교를 많이 신앙하였다. 고려시대 불교 통합운동을 위해 노력한 의천도 교종 승려였다. 고려시대때는 의천이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수행 방법으로 '교관겸수'를 제시했다. [14] 신라 때 원효 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신라 하대 선종의 출현으로 신라 말의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는데, 신라계 중앙귀족들은 왕실의 지원을 받는 교종(5교)을 신봉했다면 삼한계 지방 호족들은 신라의 원신라계 우대정책에 반발하여 중앙에 대한 악감정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수있다는 교리를 지닌 선종(9산)을 추종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한 자를 말한다. 하지만 궁예는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악용하여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던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왕건 고려는 초반에 선종 세력의 후원을 많이 받았음에도 정작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불교 교종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하였는데, 귀족 지배층 입장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교종쪽이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15] 그 중 고종 시기 대각국사 의천은 선종을 매우 증오하여 선종을 사문난적이라 표현하며 조선 연산군의 파불에 가까울 정도로 박해를 가한다. 하지만 아무리 위에서 박해를 해도 대중의 지지는 선종쪽이 더 높았기 때문에 선종의 씨를 말리는것은 불가능했다. 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12세기 후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숭유억불 방향으로 나가면서 왕실의 불교 지원이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이로 인하여 정통 교종이 몰락하면서 오히려 선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한국사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도의선사(9산중 가지산파)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전체로 봤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시기는 서기 8세기 후반에 신행대사가 단계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북종선을 들여온 것이 최초다. (도의선사는 우리가 잘 아는 돈오=즉각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을 들여왔다.) [16] 선종이 들어오던 서기 820년대, 이 시기는 한국사의 3대 반란으로 칭해질 만큼 기세가 무시무시했던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이고, 그 규모는 신라 9주 중 4주를 점령할 만큼 막강했으나 상당히 빨리 진압된다. 거기다가 일부 주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공로로 7년간 면세, 이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890년 이후에 일개 지방의 독립선언도 못 막는 상황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의 혜택을 주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신라 정부의 여력이 충분하고 권위도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 입장에서도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북종선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주목받지 못했다. 때문에 도입되던 당시에는 선종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인 서기 890년대 이후, 흔히 말하는 국가 막장 테크 시기에 9산 선문이 소율희 등 몇몇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면서 보편화되었다. [17]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 정부는 선종과의 제휴를 시도했다. 이유는 선종을 통해서 떨어지는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물론 호족의 지원이 더 커서 선종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에는 남송을 통해 12세기경 유입되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간단하게 말해 원효대사의 정토종(법성종)보다도 파격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그 때문인지 '무식한' 호족과 무신정권기의 무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이 표현은 조금 비약이긴 하다. 교종은 본래 문벌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무신정권으로 문벌귀족 사회가 무너지자 이들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때문에 최충헌 시기 지눌과 같은 승려가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고 한다. [18] '황왕' 신라의 금석문에서 발견되는 칭호,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제왕(帝王)과 비슷하게 황제국에서도 쓰이는,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19] 율령 정비,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 멸망시킴 [20] 태종 무열왕때까지는 삼국이 공존하였으나 사실상 통일의 기반이 마련된 상태였다. [21] 고구려 멸망 시킴, 삼국통일, 당나라 문화 수입 [22] 국학 세움, 관제 정비 [23] 당나라 문화 받아들임 [24] 독서삼품과 둠, 벽골제 증축 [25] 친당 정책을 핌, 김헌창의 난 평정, 패수에 패강장성 축성 [26] 청해진 만듬, 복색 제도를 개정 [27] 삼대목 편찬 [28] 후삼국시대 개막 [29] 망국의 군주 [30] 신라 왕조 초기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왕을 했지만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다. [31] 백제+신라 통일만. 고구려까지 통일한 것은 제30대 문무왕 때부터다. [32] 제52대 효공왕 재위기에 후백제 태봉이 건국해 후삼국으로 분열하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말대 경순왕까지의 35년은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을 감안하더라도 통일신라라고 부를 수는 없다. [33] 태종 무열왕계가 왕위를 이었던 시대. 제36대 혜공왕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34] 제37대 선덕왕부터 제51대 진성여왕까지. 제52대 효공왕~제56대 경순왕은 신라 하대에는 속하지만 통일신라는 아니다. 신라/후삼국시대 문서 참조. [35] 신라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는건 《삼국사기》 기준이다. 《삼국유사》는 상고, 중고, 하고로 나누는데 이 경우, 통일신라는 '하고'(제29대 태종 무열왕~제51대 진성여왕. 물론 하고는 말대 경순왕까지 이어진다.)에 포함된다. [36] 또한 남한 지역에 연고를 둔 백제와 신라의 발굴, 정비, 홍보에 따른 신라 알리기로 이 용어가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 당시 북한은 북한 치하 북부 지방에 연고를 두는 고구려를 중점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37]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 [38]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일종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 [39] 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 [40] 라틴어로 의자라는 뜻도 있다. [41] 꾹꾸떼스바라(Kukkuṭeśvara). 산스크리트어에서 꾹꾸떼(Kukkuṭe)는 닭을, 스바라(śvara)는 생각을 의미한다. 당나라 의정은 한문으로 계귀(鷄貴)를 의미한다고 기록했고, 故 고병익은 계귀지향(鷄貴之鄕), 닭을 존숭하는 나라로 해석했다. [42] 통일신라, 후기신라를 모두 표기하고 있다. [43] 혹은 신라 [44] 다른 삼국 중 고구려도 고례, 구려(句麗/句驢), 고려(高麗), 한자가 다른 고구려 등의 국호를 음차로 사용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십제(十濟), 혹은 한자가 다른 伯濟가 조금 쓰이거나, 부여 계승의식에 따라 일시적으로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했는데 신라, 고구려와 달리 음차를 표기한 다른 국호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45] 실효지배하는 범위의 영토 인구, 동•서독을 통합한 정권이라는 정체성. [46] 신문왕 6년(서기 686년)에 고구려 사람들에게 중앙의 관위를 주었는데 고구려의 관품에 준하였다. 일길찬은 고구려의 주부(主簿), 사찬은 고구려의 대상(大相), 급찬은 고구려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 나마는 고구려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 대사는 고구려의 소형(小兄), 사지는 고구려의 제형(諸兄), 길차는 고구려의 선인(先人), 오지는 고구려의 자위(自位)에 준하도록 하였다. ...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관등은 백제의 관직에 준하였다. 중앙 관직으로서 대나마는 백제의 달솔(達率), 나마는 백제의 은솔(恩率), 대사는 백제의 덕솔(德率), 사지는 백제의 한솔(扞率), 당은 백제의 나솔(奈率), 대오는 백제의 장덕(將德)에 준하였다. 외관으로서 귀간(貴干)은 백제의 달솔, 선간(選干)은 백제의 은솔, 상간(上干)은 백제의 덕솔, 간(干)은 백제의 한솔, 일벌(一伐)은 백제의 나솔, 일척(一尺)은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신라 외관'. [47]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 유민》 편 참조 [48] 나중에 실체가 없는 신라의 부용국이 되긴 했지만, 보덕국의 전신인 검모잠 안승의 '고구려국'은 신라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인들과 신라가 서로 협력하는 공생관계에 가까웠고, 이들은 옛 고구려 남부 지역, 지금의 황해도 일대라는 근거지가 있었다. [49]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1982; 김영하,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2010 참조 [50] 이 때문에 극단적 의견으로는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적이 없고 '일통삼한'같은 역사적 전승은 그저 정신승리만 했던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후의 고려와 조선 역시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거두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라 현대인 기준의 영토적 관점에서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경우 고려 역시 같은 이유로 불완전한 통일이 된다. 요동과 한반도를 동시에 아울러야만이 통일이라면 한국사에 완전한 통일 왕조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그리고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도 지금 통일이 안되었거나 미완의 고토수복 상태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51] 애초에 고구려의 주무대이자 영토가 만주나 요동이었더라도 지금의 한국이 거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부터 고구려 땅은 고구려 땅이었을 뿐이고, 한국 땅은 한국 땅일 뿐이다. 국가의 구성 요건에 영토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니 영토 외에도 그 소속 백성을 모두 아우르지 못했다면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고려의 통일이 신라의 통일보다도 의의가 보다 높게 간주되는 것이 발해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을 '동족'으로 대하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라가 기울어가던 고려 말기까지도 "요심(遼瀋, 요양, 심양을 아우르는 지금의 랴오허 동쪽의 랴오둥 반도로써 '요동'으로 알려진 지역)은 원래 우리 땅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북진의 기조를 왕조의 목숨과 맞바꾸어 가면서까지 아주 포기하지는 않았기 때문. [52] 다만 나당전쟁 결과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축출되어, 대동강 이북은 비록 신라 땅은 아니지만 당나라로서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는 명목상의 영역에 그치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성장하면서 당의 느슨한 고구려 고토 지배는 장기간 이어지지도 못했다. [53] 영토 자체는 발해가 차지한 지역이 넓지만 고구려의 대도시 3경 중 가운데 국경에 끼어 몰락한 평양을 제외하고 남북이 각자 하나씩 가져간 형태였고, 옛 고구려의 인구도 고구려 멸망과 직후의 고구려 부흥 전쟁, 나당전쟁 과정에서 중원과 신라로 많이 빠진 상태였다. [54]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통일과정에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사실상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존재로 남북국의 대치상황으로 불완전한 통일이란 점이다. [55] 적어도 후삼국의 영역은 모두 지배하는 한편 청천강~영흥만까지 약간 북진했고 외세의 도움 없이 자주적인 통일을 하였으며 발해 유민까지 흡수/통합하여 완전한 통일이란 점이다. [56] 실제로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북한에서 발행된 《 조선통사》, 《 조선전사》, 《 조선단대사》에서는 <후기 신라와 발해>로 장이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한반도 북부에 있는 북한이 '전기 신라'를 주제로 다룰 일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57]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후조선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재야사학 등지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가진 정보량, 현재 대한민국과의 연결성 등이 고대 조선과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사실상 받아들여지는 건 힘든 주장이다. [58]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발해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고,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통치한게 아니라 반박당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북쪽 경계선( 압록강, 두만강)이란 것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인문학적 인식이라 후대의 기준으로 논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지리적 의미에서의 '반도'는 가장 반도와 대륙의 경계가 좁아지는 통일신라~고려시대 국경선(가장 좁아지는건 통일 직후 고려의 영토인 청천강~영흥만이다.) 쪽이 조선 이후의 압록-두만강선보다 더 일리가 있다. 당장 중국사에서 '요동(遼東)'이라고 부르는 지역도 지금의 랴오허 서쪽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일대를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나라 때의 요동은 랴오허(요하) 동쪽의 모든 지역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현재의 한반도까지도 '요동'으로 간주되었다. [59] 출처: 《발해의 대외관계사》 [60] 신라 중대 시기. [61] 고려 초기에는, 고려 왕실이 신라가 어떻게 지방 반란으로 산산조각났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통일 자체도 호족들의 협조를 받아서 했기에, 신라식으로 지방 호족들을 찍어누르기는 영 어려운 형편이었다. 물론 왕건이라고 포용으로만 일관한 게 아니라, 비협조적이거나 견훤에게 반부했던 호족들에겐 철저한 보복을 해두는 걸 잊지 않아 고려초 군현 체제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통일신라 시대 군현에 비교하면 최소한 2/3는 위계가 달라져 있었고, 물론 군사적 요지에는 고려 왕실 직할군이 주둔했다. 하지만 호족들의 물리력을 완전 해체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고, 따라서 고려는 나당 전쟁을 이긴 직후 통일신라와는 달리 중앙집권 체제를 말단까지 관철해낼 수가 없었다. [62] 요컨대 고구려 백제가 한반도를 통일했더라 손 쳐도 이런 신분 질서가 완화되길 기대할 순 없다는 이야기. 고구려나 백제도 신라의 골품제 비슷한 신분 제도가 있었다. 고구려의 고추가나 백제의 대성팔족 등은 어떻게 보면 골품제보다도 더 심한 적폐 세력이었다. [63] 조선에서는 왕실에서 암투는 있었지만, 왕자의 난과 이인좌의 난을 제외하면 왕위 쟁탈을 위한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64] 웅진시대 문주왕, 삼근왕 때 백제에서 일어난 반란. [65] 당쟁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사를 분쟁의 역사로 몰아세우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즐겨 써먹던 여론몰이 수법 중 하나이나, 정치가 있는 곳에 다툼은 필연이다. 중국만 해도 60여 개에 달하는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65년 정도이며, 진시황 이후의 통일 왕조 중에서 송나라만이 북송과 남송을 합쳐 300년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1,000년 이상 존속시켰다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귀족 세력과 다이묘( 막부)의 정치적 농단을 그저 지켜만 보다가 가끔씩 쫓겨나거나 죽어나가는 마스코트에 불과하였고, 결정적으로 무슨 무슨 막부 하는 세력들 모두가 천황의 명목상 신하이기는 하되 실상은 서로 항쟁하는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다. 즉 따지고 들면 통치 체제가 외침과 내란에 맞서 건재하게 유지됨에 있어서 한반도만큼 안정적인 지역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당장 신라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이 건국부터 멸망까지 대항했거나 사대했던 국가들만 따져봐도 이는 간단하다. 신라는 수나라 당나라, 고려는 북송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조선은 명나라 청나라. [66]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피살당했고, 나머지 임금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오래 왕위를 지키다 세상을 떠나거나 해서 아무튼 50세를 넘기지 못했다. [67] 당시 고려의 상황이 매우 안좋았다. 고려말이었기에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민생이 피폐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요동 정벌 후 결국 요동을 차지하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기에 포기한 것이다. 전쟁을 하려면 병사, 식량, 무기, 갑옷 등 정말 많은 것이 필요하다. [68] 위화도 회군 역시 설령 이성계의 활약으로 당장은 요동을 수복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한계에 다다른 고려의 국력으로는 머지않아 또 빼앗겨서 아무 의미 없어질것이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69] 단,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정말 나라의 어려운 재정문제와 병력 보존의 문제로 결정한 것이지 정말로 전쟁이 두려워 내린 결정이 아니다. 태조로 즉위하며 조선을 건국한 뒤 국력이 회복되자 명나라와의 군사적 충돌도 감수하고자했던 용맹한 인물이다. [70] 고지대는 저지대 상대로 관측이나 공성전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 [71]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왕족들을 비롯한 백제의 지배층 대다수는 신라에 편입되었다. [72] 오늘날의 행정구역에 따르면 황해도 전체와 평안남도 일부, 함경남도 일부까지 군현을 설치했다. [73] 이 고지(古地)들은 훗날 발해가 점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곳 인구도 흡수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부흥운동 나당전쟁 당시 상당수의 인구가 신라, 중원으로 유출되기도 하였다. [74] 최근 들어 학계 신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75] 나당전쟁 당시 요동 일대인 개돈양을 먼저 공격해서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등 마냥 소극적으로 나간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당나라를 상대로 벌여야 하는 총력전이라는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정복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에 가깝다. [76] 신라인들은 삼한통일에서 발해를 찬밥 취급했지만 동시에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 비슷하게 여겼다. 물론 정통성 논란에서는 오랑캐라고 비난했다. [77] 다만 고려의 경우 공민왕 대에 지용수, 이성계를 필두로 단행한 요동 정벌로 일시적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인 요동을 탈환하기도 했으며, 그 이전인 문종 ~ 숙종 대에는 여진족 회유나 여진 정벌 등을 통해서 동쪽 변경의 간접 통치 영토를 크게 넓히기도 하였다. [78] 신라가 흡수할 수 있었던 고구려의 자산은 보덕국 패서 지역의 유민집단,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 그리고 요동과 책성 등 동만주 일대에서 남하한 집단들이었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야 대박 수준의 하이리턴이라고 할만 했겠지만, 평양성 국내성 • 책성 등의 핵심 인적자원이나 인프라를 전부 흡수하지 못한데다 한성 패서에서 흡수한 인적 자원들이 신라의 국가운영에 제대로 활용된 것도 아니었으니 한국사 전체로 보면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수준의 로우리턴이었다. 물론 신라는 거의 온전하게 흡수된 백제의 지배층도 제대로 활용할 생각이 없었고 쭈욱 골품제에 따라 발 아래에 두려고 했다. [79] 사실 여진도 발해유민을 많이 포용한 편에 속한다. 일례로 금나라의 최고 명군인 금세종은 모계로 발해계 혈통이였을 정도. [80] 물론 고려의 근본은 지방 세력인 호족의 연합 정권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이 신라에 비해서 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81] 이는 제28대 진덕여왕 시절부터 추진하던 문제였으나 전쟁 와중에 미뤄져 결국 제31대 신문왕 시대에 설치한 것이다. [82] 참고로 이 지도는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83] 여담으로 중근동 쪽 문헌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로 접어든 중세 11세기까지도 '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정보나 교통은 현대 같지 않았다 보니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과거부터 이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던 듯 하다. 사실 조선 시대에도 외국에서 ' 고려'라는 명칭을 쓰는 등의 일이 있었고, 멀리 떨어진 아랍도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여진족에 심지어 19세기 이양선을 타고 오는 서구 열강까지 고려란 표기를 쓰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꽤 흔했던 듯하다.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한국의 영어명 코리아 자체가 이미 고려를 어원으로 한다. [84] 당나라, 발해,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아라비아 상인도 왔다. 이는 당이 다른 중국 통일 왕조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이었던 탓도 크다. 반대로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해외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도 명이 폐쇄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 크다. [85] 신라에 대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이후 당은 주로 서쪽 토번, 일본은 동북방의 아이누족과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토번은 송첸캄포 대왕 때 크게 성장하여 안 그래도 한반도 쪽에 신경 쓰느라 바쁜 당을 털어버렸다.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을 승리로 빠르게 당나라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토번은 당이 막장 테크를 타자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털어버린다. [86] 헤이안 시대의 경총(經塚)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불입상이 대표적이다. 덴무 덴노 시절에 제정된 팔색성(야쿠사노가바네)이라는 씨성제가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87]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 [88]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89] 물론 아무리 부를 많이 쌓았다고 한들 자연환경을 사올 수는 없는 일이니, 척박한 사막과 황무지 환경이 대부분이었던 중동에서 살다 온대기후의 풍요로운 동아시아의 자연환경을 보면 훨씬 좋아보이는건 당연하다. 그래도 유독 아랍인들의 영구정착지로 신라가 많이 꼽힌 것은 다른 나라들보다 부를 쌓기 편하고, 사회 분위기가 이방인에게도 다른 나라보다 좀 더 친화적인 좋은 조건 덕택이었을 것이다. [90] 헌덕왕릉이 자연재해로 많이 훼손된 관계로 묘사가 뚜렷하진 않다. 오늘날에는 경주고등학교 교정 한켠으로 옮겨져 있다. [91] 페르시아 등. [92] 한때 신라 원정을 고려하던 당 현종이 신라를 군자의 나라로 치켜세우면서 신라인들이 또 바둑도 잘 둔다고 하니 당대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바둑박사(棋博士) 양계응을 신라로 보내 한 수 가르쳐오라고 하기도 하였다. [93] 신라인들이 노예로 끌려나가는 광경을 보고 장보고가 귀국을 결심, 청해진을 설치해 바다를 일망타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94] 당나라에서는 외교관례상 신라가 가장 상위에 있었다. 국위(國位)의 등급을 전성기 시절 해동성국이라고도 불리던 발해를 신라 아래에 두었을 정도였다. [95] 단적으로 통일신라의 문화재와 고려 초의 문화재들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시기가 앞선 통일신라의 것들이 화려함과 정교함에서 비교불가할 정도로 극치(極致)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96] 당시에는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백제 유민 출신보다 오히려 신라인들의 명성이 더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수도 맞먹을 정도였다. [97] 중국 불교에서 지장보살과 동격이 된 신라 왕자 출신의 고승. 중국에서 고선지는 몰라도 김교각은 알 정도로 명성을 떨친 중국 불교계의 거물이다. [98] 흥덕왕 대에 청해진을 설치해 신라로 하여금 동중국해 등의 해상 패권을 쥐게 한 말그대로의 해상왕(海上王)이었다. [99] 최씨 성을 가진 신라의 3대 천재들을 일컫는 말로, 각각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를 가리킨다. [100] 왕오천축국전 참조. 신라의 빠니보틀 [101] 당나라의 빈공과에서 발해인들과 경쟁하던 신라의 숙위생. [102] 장보고의 옛 친우이자 청해진의 실질적인 2인자로 알려져 있던 부관. [103] 당대 신라의 바둑 천재로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 당의 수많은 문인들과 교유해 이름을 알렸다고 전해진다. [104] 여담으로 이 당시 왕륭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도 해상 무역에 뛰어든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5] 고선지, 왕사례, 이정기 등. [106] 흑치상지, 부여준, 사타충의 등. [107] 일본의 사서인 유취국사에 따르면, 일본조정은 774년 신라인이 표착하였을 경우에 배를 수리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표류민에 관한 규정을 제정함으로써 신라 상인들의 왕래를 장려하였다고 한다. [108] 다자이후의 귀족과 호족들뿐만 아니라 일개 호족들도 신라 상인들과 무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9] 신라와의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왜국 조정은 신라역어(新羅易語), 혹은 신라학어(新羅學語)를 두어 통역을 담당하는 인재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때론 발해인 사신들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10] 신라인이 부젠국에 구리 채취 기술을 전수하는가 하면 금속세공술 같은 기술에서는 오히려 신라가 당나라의 것보다 더 정교하게 구현할 정도로 발달하였다. [111] 오늘날 일본에서 전해지는 고려악(高麗樂) 가운데 발해 음악과 더불어 일부 신라 음악도 전해지고 있다. [112] 오늘날의 현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신라승(新羅僧) 원효 의상 같은 고승들의 명성은 왜국을 포함한 동방 전체에 걸쳐 퍼져 있었던데다, 실제로 불교계에 끼친 영향력이 막대해 신라의 불교계 앞에서는 왜국의 불교계가 몇 수는 접고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113] 정계경, 『8世紀 日本으로 移住한 新羅人의 動向』. [114] 다만 훗날 나말여초 때 이런 선박 기술과 항해술을 보유한 신라구라 불리는 신라의 무수한 해적 집단들이 기승을 부리게 되면서 규슈 일대가 말그대로 초토화되기도 하였다. 일본판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인 셈이다. [115] 926년(태조 9년) 좌수위소장(左首衛小將) 창두간(昌豆干)과 함께 유민 1,900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부. [116] 938년(태조 21년)에 발해인 3,000여 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부. [117] 928년(태조 11년)에 발해인 60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부. [118] 단 신라는 옛 가야 지역까지 신라로 쳐서 영남 지역에 3주를 두고, 수도 왕경이 있으므로 소경은 김해소경 하나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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