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21:22:05

대야성 전투

1. 개요2. 삼국시대
2.1. 대야성 전투(642년)
3. 후삼국시대
3.1. 1차 대야성 전투(901) - 신라 vs 후백제3.2. 2차 대야성 전투(916) - 신라 vs 후백제3.3. 3차 대야성 전투(920) - 신라 vs 후백제3.4. 4차 대야성 전투(927) - 후백제 vs 고려3.5. 5차 대야성 전투(928) - 고려 vs 후백제3.6. 관련 기록

1. 개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대야성에서 있었던 전투.

대야성은 원래 반파국의 영역이었지만 이사부 장군에 의해 신라에 편입됐다. 전라도 방면에서 오는 군세를 경상도 쪽에서 방어하기에 적합한 난공불락의 형세였던 덕분에 삼국시대 후삼국시대에 모두 주요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후삼국 통일 이후로는 영ㆍ호남이 늘 한 나라 안에 있었으므로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기지 못 했다. 대야성 문서에 써 있듯 서쪽에서 동쪽으로 쳐들어오는 걸 막을 때 유리한 지형이기 때문에 동쪽에서 쳐들어온 임진왜란에서도 이곳 대신 진주성에서 큰 전투가 일어났다.

2. 삼국시대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 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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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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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발해
김헌창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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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구의 일본 침입
,811 ~ 936,
- 일본
후삼국 통일 전쟁
,889 ~ 936 ,
원종ㆍ애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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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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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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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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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기습
,927,
고려 후백제
고창전투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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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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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대야성 전투(642년)

진흥왕이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군사적 요충지이니 만큼 무왕 때에 41년 동안 대야성을 수차례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다만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전투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642년의 전투로, 김춘추가 백제에 악감정을 가지는 계기가 된다.

대야성 전투(642년) 항목 참조.

이후 백제군이 수비하고 있다가,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648년 김유신이 대야성 앞에서 백제군과 한 번 대치한 후, 김유신이 중과부적으로 퇴각하는 척 하며 백제군을 옥문곡 계곡까지 유인해 승리를 거뒀는데 이 때 신라군이 대야성을 탈환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다만 학계의 정설은 대야성의 병력을 몰살한 이 옥문곡 전투 이후 20여개 성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대야성은 신라에게 회복이 되었고, 그 결과 661년 대야주 설치는 전투기사 없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3. 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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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전쟁 <colbgcolor=#4a2d5b,#0e0f37> , 황산진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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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 포상팔국 연맹
신라-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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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우산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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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효공왕릉
관련 문서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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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에 여러 차례 벌어진 전투. 총 5차례 벌어졌다.

3.1. 1차 대야성 전투(901) - 신라 vs 후백제

견훤 후백제를 건국한 직후인 901년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성을 수비하는 김억렴 등이 이끌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신라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끝내 물러났다. 이를 김억렴의 동생인 김효종 화랑으로서의 동원력[1]을 포함한 일가의 사병을 털어서 이뤄낸 성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전투 직후인 902년 효공왕 때 효종이 시중에 오른 것도 이 군공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2]

3.2. 2차 대야성 전투(916) - 신라 vs 후백제

이후 916년에 견훤이 직접 대야성을 다시 공격하지만 신라군에 막혀 또 실패한다.

3.3. 3차 대야성 전투(920) - 신라 vs 후백제

920년에 세 번째 공격 만에 견훤은 대야성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대야성을 차지한 후백제는 이후 서라벌 인근까지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반면 신라는 수도 서라벌을 지키는 코 앞이 텅빈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3.4. 4차 대야성 전투(927) - 후백제 vs 고려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한 후에는 장수 추허조가 지키고 있었는데 927년에 고려의 장군 김락과 재충에 의해 함락되었다. 앞서 상주의 고려 귀부(918)와 강주 정벌(927)에 이어 대야성까지 함락당하자 사면에서 고려에게 포위당할 상황에 놓인 견훤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타 레이드를 실행하였고 이를 성공시키며 상황을 반전시킨다.

3.5. 5차 대야성 전투(928) - 고려 vs 후백제

928년에 후백제 장군 관흔이 고려 장군 왕충이 이끄는 고려군을 북쪽으로 유인한 후 신속히 남하해 대야성을 다시 점령한 뒤 후백제 멸망까지 후백제 땅으로 남았다. 결국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자연스레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3.6. 관련 기록

  • 901년
    가을 8월,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금성(錦城, 전남 나주) 남쪽으로 군사를 이동하여 인근의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 효공왕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 916년
    가을 8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 신덕왕

  • 920년
    겨울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진례(進禮)로 진군하였다. 임금이 아찬 김율(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바로 물러갔다.



    《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920년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 924년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強)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 928년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1] 삼국통일전쟁 때도 그렇고 김헌창의 난 때도 명기 등 화랑들이 나라를 위해 휘하 낭도를 이끌고 김헌창의 장안국을 토벌하기도 했다. 그리고 효녀 지은 열전에 의하면 효종의 낭도가 수천 명(郎徒幾千人)이라고 되어있다. [2] 이에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대야성을 효종이 방어하는 것으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