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5:52:56

고구려부흥운동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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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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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5d2,#ccc4a8> 연대 부흥운동 주요인물 결과
670~673 한성 고구려국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실패
681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의 모반 보장왕 무산
684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대문 실패
696~698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발해
897~901 송악의 궁예 정권 궁예 후고구려
918 왕건의 역성혁명 왕건 고려
1217 최광수의 난 최광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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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운동
高句麗復興運動
존속기간 669년 ~ 678년 or 684년, 698년
901년 ~ 918년
정치체제 부흥운동(군주제)
주요 인물 검모잠
고안승
고연무
걸걸중상
대조영
궁예
왕건
최광수
주요 사건 668년 고구려 멸망, 안승 추대
6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
673년 당에게 패배
→신라의 안승 보덕국왕 책봉
678년or684년(?), 698년 발해 건국
901년 고려 부흥
918년 고려 국호 회복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1217년 최광수의 난
멸망 이전 고구려
성공 이후 발해, 후고구려, 고려

1. 개요2. 목록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구려부흥운동2.2. 발해2.3. 고려2.4. 최광수의 난
3. 기타 국가
3.1. 이정기의 제나라3.2. 괴뢰국
3.2.1. 보덕국3.2.2. 소고구려
4. 의의

[clearfix]

1. 개요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를 부흥하려 했던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들을 뜻한다. 한국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구려부흥운동은 멸망 직후 고구려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말하지만 대조영 발해 궁예 왕건 고려 그리고 무신정권 시기 최광수의 난까지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는 발해부흥운동,[1] 백제부흥운동이나 신라부흥운동과 달리 한국사에서 한국 독립운동과 마찬가지로 의미 있게 실질적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2. 목록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구려부흥운동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가 망했지만 당은 평양성 이외 각지에서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먼저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현재의 황해도 한성을 기반으로 한 검모잠, 안승, 고연무 등은 신라와 협력해 나당전쟁에 참여해서 고구려를 부활시키려 했다. 이 황해도 지역은 고구려 멸망 당시 북진하는 신라군에게 전쟁 없이 항복했기에[2] 오랫동안 싸워온 당나라에 대한 반당감정에 비해서 반신라감정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역시 나당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원세력 하나하나가 절실한 상황이었으므로 두 세력의 뜻이 맞았다. 그러나 나당전쟁 초기 내분으로 검모잠은 살해당하고 안승, 고연무 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요동 일부 지역과 황해도 지역의 고구려 부흥군은 나당전쟁 초기에 신라군과 연합해 계속 싸웠지만 671년 7월 안시성에서 검모잠의 남은 무리가 고간이 이끄는 당군에게 패했고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싸우러 북상한 신라군이 당군에 크게 패배하면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당군과 부흥군의 전투가 계속되다가 결국 673년 5월 호로하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의 옛 땅에 잔존해있던 고구려 부흥 세력은 고간이 이끄는 당군에 의하여 완전히 토벌되었고 남은 무리는 신라로 피난해 신라 안에서 보덕국을 만들어 자리잡았다.

2.2.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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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영토인 요서의 영주(융저우)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만주 동부 동모산으로 도망가, 추격하는 무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격파하여 698년 발해를 건국한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딱 30년 만에 이룩한 부흥 운동 성공이었다. 동모산은 옛 고구려의 세력권인데다가 초기 발해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고 배경 때문에 발해에겐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에겐 당나라와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에 국제사회에서 고려로 행세하질 못한 뼈아픈 한계가 있었다.[3] 이는 현대의 남북한에게 있어선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순 있게 되었으나, 발해에 대해선 연고권이 약해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기에 역시 아쉽다. 이 당시 대내외적으로 '고려'라 칭했다면 지금처럼 고구려계냐 말갈계냐 하는 논란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4] 후술하지만 이런 측면에선 고구려 계승성에서 고려에 비해 치명적으로 불리했던 건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후세의 누군가들이 보기 좋게 영토만 크게 차지한다고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5]

물론 발해의 무덤 묘지석이나 일본에 보낸 국서 등 기록에는 몇 번 분명히 '고려'로 칭했으나, 발해가 동북아시아 외교계에서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신라와 당한테서는 끝내 '고려'로 인정받지 못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건 그냥 일본한테서도 완전히는 인정받지 못한 것이고 일본과의 국서에서조차 늘상 고려로만 일관했던 건 아니었다.[6] 서로마의 후예를 자처한 게르만계 유럽권에서 동로마를 부정하고 비잔티움, 그리스라 칭한 사실이 있으나 이와 같은 건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더 높이 두고자 했던 몇 번의 시도에 불과했을 뿐, 그 이외엔 서구권도 내내 일관되게 동로마를 정통 로마로 인정했다. 한편 거꾸로 발해는 몇 번의 예외 외엔 공식적으론 내내 부정당했고 체제 연속성도 없었으니 동로마는 고사하고 고려와도 아예 경우가 다르다.

일본이 발해를 고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튀르크가 동로마를 로마로 불렀던 것과 비슷하지 않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나라였고 조공-책봉 관계에서도 많은 부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신라의 삼한일통 주장이 당나라를 비롯한 그 시대 국제 사회에서 강력하게 통했던 게 가장 큰 이유다.[7] 애초에 발해라는 국호마저도 고구려 고씨들이 이미 기원후 4세기 전연의 국내성 함락 후 강제로 중원 지역으로 이주된 이래로 무려 삼백 년 넘게 중원 사회에서 발해 고씨를 사칭한 바람에, 발해란 용어 자체가 반쯤은 고구려를 뜻하는 은어 비슷해진 상황에서, 당나라가 대조영과의 밀고 당기는 합의 아래에서 정한 국호였다. 때문에 발해 입장에선 아쉬웠겠지만 아예 발해를 발해도 아닌 '말갈'로 칭한 신라 입장에선 '발해'란 국호가 통한다는 현실마저도 대단히 불편했을 개연성이 크다.

2.3.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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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내부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한주, 삭주, 명주 (+ 패강진) 3주에 소속되었는데, 구백제 지역에 비해서는 비교적 신라 조정에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9세기 초반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 당시, 구백제 지역 대부분에 원신라 지역 일부까지 난에 가담하며 조정의 권위가 흔들릴 때까지도 북부 3주는 반란에 동참하지 않고 굳게 방어한 데서 드러난다.[8] 후속 반란인 김범문의 난 역시 한산주에서 일어났으나 신속하게 진압한다. 신라 수도에서 거리가 멀어 자칫 통제하기 힘들 수 있던 북부 3주가 왕조에 순조롭게 협력한 점은 통일신라 체제가 백 년을 넘게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9세기 후반에 들어 중앙의 행정력이 약화되자 북부 3주도 차츰 독립성을 띠기 시작한다.

결국 9세기 말,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고려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궁예 본인은 비록 옛 고구려 땅에서 봉기하기는 했지만 출신은 신라 왕실이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며, 연고지도 청주 일대였기에[9] 어떤 이유로든 굳이 그에게 고구려 유민의식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다. 결국 건국 3년만에 국호를 고구려 계승의 의미가 강한 '고려'에서 불교적이고 추상적 명칭인 마진으로 바꾸며, 수도 역시 고구려 유민의식이 강했던 패서 지방 송악에서 고구려 유민의식과 연관성이 적은 철원으로 옮기고 아지태 등 청주 출신 백제계 호족을 중용한다. 그리고 7년 후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다. 이런 고구려색 빼기는 패서호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였고[10] 초기의 고구려 부흥 행보는 자신의 건국에 도움이 되니까 했을 뿐 궁예의 진심은 고구려 부흥에는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패서 호족은 당연히 반발했고, 결국 패서 호족 출신 왕건이 918년도에 궁예를 끌어내린 다음 국호를 다시 고려로 되돌려 궁예가 초래한 이 이상한 사태를 정상화한다.[11] 원신라 출신인 궁예와 달리 왕건은 대대로 패서 호족으로 고구려 유민의식에 완전히 귀속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궁예와 달리 국명에서부터 엿보이듯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경우 통일신라의 영역을 대부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하면서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을 깎아서 보려는 동북공정스런 견해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고려는 예전 통일신라 시대 때는 지배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대동강 영역은 물론 직접 손을 뻗치고 있었고, 그 이북 지역으로도 약간 올라간 영역에서 시작했다. 또한 고려가 혼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편 건 사실이지만 이는 신라 구왕족 계열에 한정된 조치는 아니었고, 고려는 굳이 경순왕의 귀부가 아니더라도 그 전부터 신라에게서 대왕 인정을 받는 등으로 확고한 외교적 우위에 있었으므로[12] 이 혼인 정책으로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흡수했다고는 볼 수 없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주도한 서경파가 신라계인 주류 개경파가 대립했다는 것도 대단히 잘못 알려진 설이다. 서경 세력 자체가 왕건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세력이었다. 또한 개경의 정치 세력 자체가 신라계였다는 것도 잘못 알려진 설인데 왜냐하면 신라계 인물들이 고려 조정에 대거 동참한건 맞지만 12세기 즈음 가면 이미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관철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내세웠다는 것도 결국은 "신라 계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삼한 계승"이었다.[13]

고려가 건국되었을 당시까지는 성공한 고구려 부흥운동의 또 다른 사례인 발해가 엄연히 그때까진 엄존했으나, 발해는 고려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고(구)려의 후계자란 명분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던 데다가[14] 한반도에서 후삼국시대가 진행되던 당시에는 발해 역시 왕조 말기 증상으로 힘이 약해지고 거란과의 연이은 소모전을 치르는 상황이어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을 전혀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발해는 그 차지한 면적으로만 보면 현대 한국인들의 만주 애호 현상을 만족시켜 주기에는 충분할진 몰라도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이 두 나라는 발해를 도저히 고구려로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고려 역시도 같은 고구려계 형제국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고구려의 적통은 고려 왕조라는 사실을 주지했기 때문이다.

발해 또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국제관계를 파탄으로 이끌 수가 없어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고려 국왕'을 자칭할 수 있었고 이마저도 지속적이지 않았으며[15] 당과 신라를 상대할 때는 결국 '진국', '발해' 등 다른 국호를 사용할 수밖엔 없었다. 고려라 칭했어도 당과 신라가 그렇게 기록했을거란 가정은 의미가 없다. 이건 공식 외교문서인 국서를 주고받을 때 접수 자체를 하냐마냐인 아주 중요한 문제로써 이건 혼자 국내에서 칭하고 말고하곤 전혀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신라는 그나마 발해로는 불러준 당나라와는 달리 초지일관 말갈로 취급하면서 당나라보다도 더욱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부정하지 못해 안달이었다.[16] 한편 당나라 또한 신라보다 발해와 접한 국경이 더 넓은데다 애초에 발해란 국호를 당나라 자신들이 직접 정해줬던지라 신라 같이 말갈 운운하면서 대놓고 까대지는 못하는 입장이었으나, 신당서와 자치통감에서 유독 고구려, 발해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쪽팔린 역사적 사실을 대거 축소한 데서 보여지듯 당송대 중국 지식인의 고구려에 대한 콤플렉스는 이만저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한데 대외적으로 대놓고 고려라 칭해도 당과 신라가 가만히 있는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양사의 불가리아 제국도 초반에는 로마 제국과 동등한 황제를 자칭할 권리를 인정받았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일단 로마에게 망한 후 부활했을 때는 로마 제국의 위신 문제 탓에 로마 제국은 처음과는 달리 도저히 불가리아 제국을 인정해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잠깐 재흥한 불가리아 제국은 로마 제국과의 계속된 분쟁 끝에 바실리오스 2세에게 망하고 만다. 발해는 신라와 당에 대해 계속해서 고구려의 후계자를 무리하게 국서에서 고집해서 벌어질 수 있는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현대의 마케도니아 공화국 그리스와의 관계 탓에 국호를 북마케도니아로 변경해야 했고[17], 대만 또한 중화민국이란 국호를 국제사회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과 비슷하였다.

반면 적어도 궁예 왕건 고려는 이 문제에 관련해 매우 자유로웠다.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자체가 당고종의 중대한 업적이었기에 고려란 국호를 칭하는 나라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었으나, 당나라 멸망 후 그 후신격 되는 화북(중원)의 5대 왕조들은 당고종의 명예니 뭐니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데다,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또 다른 주역인 신라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는 이미 고려에 압도당해 고려왕 왕건을 도리어 대왕으로 칭하고 신라왕을 고려대왕의 신하로 두는 굴욕을 감내하는 상황이었다. 발해 또한 거란 전선에 국력을 집중해야 했기에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이래러저래라할 처지가 아니었다.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의 기호일 만주 영토와는 전혀 별개로 명분에서 그다지 밀릴 형편은 아니었다.[18][19] 발해가 국력을 추슬러 중흥에 성공했다면 얘긴 달라졌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고려는 발해인들을 '형제'로 일컫는 여유를 보이면서 오히려 강자의 입장에서 호기롭게 포용할 수 있었다.

2.4. 최광수의 난

그러나 고려의 고구려 계승은 훗날 다시 한 번 내부에서 정면 도전을 받게 된다. 고려 무신정권기 무신들의 거듭된 권력쟁탈전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했는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 최광수(고려)가 고구려흥복병마사 금오위 섭상장군(高勾麗興復兵馬使 金吾衛 攝上將軍)을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자칭한 관직명은 고구려 부활이란 명분이 드러나 있다. 고려가 바로 옛 고구려에서 따 온 이름이고 고구려 부흥을 표방한 국가인데 어떻게 고구려 부흥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후삼국 시기에 비해서 약해졌을망정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20]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개경과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인 서경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옛 고구려의 진짜 중심지였음에도 묘청의 난 진압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권력의 중심지인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마침 무인 집권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정통성이 극히 약화되자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다시 평양이 새로운 중심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 (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 국호를 고려 아닌 고'구'려로 내세운 것도 그렇다. 앞서 인종 때 국가 공인 정사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대 고씨 고려는 '고구려', 중세 왕씨 고려는 '고려'로 명칭을 정리했기에[21] 이 시점에 고려가 아닌 고구려란 이름을 다시 내세우는 건 평양에서 일어난 자신들이 개경보다 더 정당한 원조 고구려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냥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이런 식의 부흥 운동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신라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에 비해 정권욕이 너무 강렬히 드러나 있는데다, 개경 자체는 그들이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관 별개로 이름부터 옛 고구려에서 따 온 고려의 수도라서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고려 왕가의 출발점인 개경 호족 또한 서경 호족과 마찬가지로 신라 치하에서도 나름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했던 고(구)려 유민들인 패서 호족들이었고, 서경 세력 자체가 애초에 왕건이 집중적으로 황해도와 개경 일대의 호족들을 사민해 육성한 게 시초였던만큼 고구려의 옛 수도가 근거란 이유만으로 고구려 계승성이 더 있다고 내세우기엔 명분에 하자가 있었다. 이 마지막 고구려 부흥운동(?)은 1217년에 최광수가 서경성을 빼앗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내세워 군사를 모으고 북계 지역에 격문을 돌리며 세력을 키웠지만 반란에 회의를 느낀 정의의 암살로 끝나는 결말로 막을 내린다. 이후 여몽전쟁이 일어나면서 전국토가 몽골군과의 전장이 되면서 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날 여력이 없어졌고 이후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의 이름도 아닌 더 과거의 고조선 이름을 딴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 시기를 거쳐 삼국유민의식이 사실상 소멸된 걸로 파악되고 있다.

3. 기타 국가

3.1. 이정기의 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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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를 세운 일도 있었다. 직접적인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며, 제도 또한 이전 고구려나 발해와 비슷한 면이 많이 보인다. 다만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 정권은 고구려 유민들이 물론 정권의 수뇌부이긴 했으나 당나라 사람들 또한 당연히 제나라 정권에 협력자로 많이 참여했고, 이정기 일가의 속마음은 정확힌 알 수 없지만 제나라는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여러 지방 절도사 정권 중 독립성이 보다 강한 정권에 불과했으며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도 신라는커녕 발해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이슬람 제국사에서도 아랍인들에게 멸망당한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인들이 중심이 된 강력한 군사 정권들이 있었고, 이들이 내심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의식했던 게 사실이지만 적어도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사산 왕조의 군주 호칭을 가져다 쓰지 못했던 사례들과 비슷하다.

3.2. 괴뢰국

고구려 멸망이후에 신라와 당은 멸망한 고구려의 세력들을 모아 괴뢰국들을 만들었다.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고구려의 후신을 표방한 국가들이라 할 수 있고 신라와 당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3.2.1. 보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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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를 중심으로 이뤄진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남하한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문무왕은 한반도 서남부 금마저에 정착해 살게 하고 일종의 고구려계 자치집단인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보덕국왕은 과거 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던 안승, 태대형(太大兄)에는 고연무가 취임했다. 이 보덕국은 신라의 속국이고[22] 그 영역도 신라 내부에 있는데다 어디까지인지도 명확하지 않아 제대로 된 고구려 부흥운동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일단 보덕국에 정착한 고구려인들은 일본에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 받기도 하고[23] 옛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갖추었으며, 신라와 외국의 예로 국서를 주고 받는 형식을 취하는 등 고구려의 사직을 보전하고 기회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보덕국을 허락했던 문무왕 이후 신라 신문왕은 옛 전쟁공신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으며, 구시대의 잔재인 보덕국도 신문왕의 제거 대상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승 서라벌로 불러 경주시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했고, 국왕이 경주로 떠나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은 안승의 서자(혹은 조카)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 반굴의 아들 김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이때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던 신라 중앙군이 다름아닌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황금서당이었다는 것에 이들의 비극성이 있다. 황금서당은 새로운 고향인 신라에서 살려면 신라 왕실에 충성하면서 같은 고구려인들을 학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한편 이들에게 진압당한 보덕국인들은 당연히 황금서당에게 심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보덕국은 해체되고 보덕국인들은 일부는 서라벌, 대체로는 금마저, 즉 오늘날 익산 지역의 남부 지역에 뿔뿔히 흩어져 식민당한다.[24] 즉 말하자면 오늘날의 경주,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지역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 서라벌로 끌려갔던 보덕국인들은 적금서당으로 편재된다.

한편 삼국통일 후 고구려인들은 신라 내에서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주었고, 그 중 고구려의 왕족 안승 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선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25] 그러나 이들 또한 중앙 권력에 진입할 수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신라의 지배력이 무너진 상황이 되자 기존 고구려의 수도권이였던 패서 지역에서 주류를 차지하던 기존 고구려계 유민들과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의 지배에서 탈주한 유민들의 후손들은 고구려의 제2수도권이었던 평안남도 • 황해도 • 경기도 북부 일대에서 다시 한 번 부흥의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보덕국을 이뤘던 고구려인들은 뿔뿔히 흩어져 사민된 탓에 패강진 고구려 유민과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패강진은 신라가 간접 지배하던 지역이었고 고구려 유민끼리 모여 살았기에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보덕국을 이뤘던 고구려인들은 신라의 강력한 감시 아래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지역과 서라벌에 뿔뿔히 흩어져 살아야 했기에 정체성을 보존하지 못했다. 9서당도 훗날 전면 해체되어 중군, 우군, 좌군 등의 신라 중앙군으로 개편되는데 이 단계에서 9서당 특유의 정체성 또한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보덕국인들의 후손은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 지역의 지역 정체성에 동화되고 말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3.2.2. 소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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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개로 요동에서는 당이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보장왕을 '조선군왕'[26]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이 아니라 나름대로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결국 발각되어 보장왕은 서쪽 멀리로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는데 고보원도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적인 지위가 아닌 당 관직 체제 내의 안동 도독으로 존재하는 이상 적어도 이 시기의 고덕무 체제를 독립국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차라리 괴뢰국 내지 부용국이면 모를까. 그래서 부흥운동의 결과로 보긴 꽤 어렵다. 소고구려는 약 10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해당 문서 본문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 이 100여년이란 게 단 2개 기록으로 추산한 것이고 중간 기록이 텅 비어서 매우 부정확하다. 아무튼 소고구려가 쭉 존속했다고 본다면 발해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 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늦어도 선왕대에 발해에 멸망한 것으로 보이며, 발해도 대외적으로야 당과 신라의 압력 탓에 고구려 계승을 내세울 수가 없었지만 그들 자신의 입장으로 볼 때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정통 후신은 발해였다. 때문에 적어도 대내적으로는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발해가 소고구려의 존재를 언제까지나 용납할 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7]

4. 의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사실상 한민족의 정체성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 부흥운동 성공으로 성립한 고려는 통합 기간이 길어지면서 각지의 유민의식을 희석시키게 되었고 뒤이어 나온 조선은 정부, 영토, 인민 등 모든 점에서 고려의 연속 그 자체였다. 이는 엄연히 고려 왕이 외국 군주의 입장에서 귀부받은 신라와의 중대찬 차이다. 물론 당연한 얘기로 조선에게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었음은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지은 한시인 안주회고에서 드러난다. 당시 명나라 사신인 축맹이 조준에게 오만방자하게 굴자 살수대첩 일화를 바탕으로 시를 지어 화답해주었고 축맹은 불쾌한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왕조는 고려(=고구려)라는 이름이 옛 삼국 중 하나의 이름인데서 정통성이 치우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 국명도 대과거인 고대왕국 고조선에서 따 오고 삼국의 시조묘 제사를 똑같이 우대하는 등 삼국 중 어느 나라만 계승하지 않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만 고조선 계승의식은 고려 왕조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왕조는 비록 고구려 부흥 성격을 띠고 시작했지만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백제나 신라의 전통행사를 잇거나 하는 식으로 고구려에 지나치게 치우치진 않도록 구삼국에 균등한 계승의식을 보이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구삼국 유민의식을 희석시키는 한편 패서지방의 권위 강화 목적으로 고조선을 이전 시기보다 띄워주기 시작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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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발해도 고구려부흥운동으로 세운 국가인 만큼 발해부흥운동도 고구려부흥운동의 일부인 셈이다. [2] 668년 북진하는 신라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인 곳이 사천 전투, 즉 평양성 근교였다. [3] 일본 역사서에 고려와 발해가 번갈아 나오는 건 어디까지나 발해 사신이 그렇게 칭한 게 원인이다. 일본 사서에서 당나라와 신라쪽의 발해에 대한 호칭을 조금이라도 신경썼으면 애초에 고려라는 단어 자체가 나올 수가 없다. [4] 발해가 정말로 퉁구스계 말갈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국가면 계승성 자체가 대단히 의문시되는 게 사실이다. 로마 제국은 보편 제국이었기에 한 번이라도 받았거나, 그랬던 나라를 차지한 나라라면 아무나 로마의 후예라고 자칭할 수 있던 것등도 주장할 수 있었으나, 고구려는 어디까지나 예맥인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발해의 건국 주축인 속말말갈은 예맥계 비중이 꽤 높은 말갈이었고 애초에 말갈 자체도 퉁구스계, 예맥계 등이 섞인 개념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있으나, 대부분은 말갈 전체가 그저 예맥과 무관한 퉁구스족이었다고만 오해하고 있는 형편이다. [5] 서강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한 '발해 국호 연구' 참조 [6] 문왕(발해)대부터 국제관계가 안정되면서 당나라측에서 인정한 발해국왕(渤海國王)이란 작호를 처음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때쯤부터는 고구려의 계승이라는 내면적인 인식과는 별개로 대외적으로는 발해라는 국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7] 대만이 엄연히 하나의 별도 국가고 중화민국의 연속임에도 중화인만공화국의 막강한 국력 탓에 중화의 연속 운운은커녕 나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발해도 마찬가지로 국력과 로비에서 통일신라에게 밀려 고려를 정식 국호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8] 다만 해당 항목의 전개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다고 해서 마냥 충성스럽게 협력한 건 아니었고 좀 대면대면한 협력에 해당했는데, 중앙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이 현지 호족들의 군대를 자유롭게 동원하는 데에는 좀 거북한 기조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신라 조정은 이후 본토 3주만을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방어선을 새로 구축하고, 이는 후에 후백제에 대항해 어느 정도 선전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된다. [9] 드러나는 행적으로도 신라 본토 출신들은 증오한 반면, 청주 출신들은 매우 우대해 중용한다. 적어도 궁예는 성장기를 청주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10] 사실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의 국호만 칭하면 나머지 두 삼국 정체성을 포용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는 발상 자체는 옳았다. 김헌창이 꾸준히 옛 백제 지역 민심을 챙긴 무열왕계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최초로 분리독립을 시도했을 때 '장안국'이라고 칭한 것도 이런 이유였고, 조선 건국 세력 또한 이런 이유로 삼국의 대과거인 조선을 국호로 채택한 것을 봤을 때 궁예가 미치광이라서 그런 시도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궁예가 애초에 분명히 패서 호족들과 고(구)려 부흥운동을 약속하고 고려를 건국한 이상(후고구려는 후대의 편의적 분류일 뿐 실제 국호는 고려였다.) 이런 짓은 명백히 패서 호족과의 약속과 합의을 위반한 배신이었다. [11] 왕건이 고려란 나라를 완전히 새로 세운 게 결코 아니다. 그저 정권이 바뀌었을 뿐이고 엄연히 고려란 나라는 궁예가 건국한 나라였다. 패서 호족 입장에선 계약을 위반한 당사자인 궁예에겐 충성할 이유를 잃었을 뿐이었다. 단 이때 궁예의 친위대 역할을 하며 패서 호족 숙청에 앞장선 백제계 호족들에 대한 철저한 복수가 이어졌는데 사실 이는 훗날 광종의 호족 탄압에 대한 경종 시절 호족들의 역복수만큼 지독했던 보복이었다. 물론 패서 호족들이 당했던 처사를 생각해보면 이해못할 현상은 아니었으나, 이에 백제계 호족들이 상당수 후백제에게 귀부하면서 궁예의 발상이 완전히 틀린 것 만은 아니었음을 입증하게 된다. [12] 아이러니하지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고려가 바로 신라와 이러한 관계에 있었다. 수도 코앞과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굴욕적인 군사령부의 존재도 그렇고, 신라 입장에서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며 입장이 뒤집힌 지 몇백 년만에 다시 처하게 되는 역사의 반복이었다. [13] 사실 이에 대해 딱히 구체적으로 역사인식에 기반해서까지 파당을 나눠서 대립했다는 기록은 없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서도 내세웠던 명분은 어디까지나 지기가 뛰어난 서경에 천도하면 국운이 흥해 고려가 강대국이 되고 금나라를 비롯한 여러 국가, 부족들이 항복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고려에서는 역사인식 문제 같은 건커녕 예로부터 자신들의 전통적인 부용민족 따위에 불과했던 여진족이 갑자기 강대국을 이룬 걸로도 모자라 상국까지 되었다는 것에 심한 충격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 발해의 중심지가 옛 고구려의 중심지완 달랐다는 점은 이 대목에선 전혀 관련 없는 사항이다. [15] 그래서 일본 사서에서도 간혹 고려가 아닌 발해로 호칭한다. [16] 신라의 후손이기도 한 현대 한국인의 입장에선 좀 뭣하지만, 이런 인식은 현대 러시아의 발해 정체성 규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어차피 현대 한국에서는 남북국시대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가장 본류라 할 수 있는 고려에서 그냥 쿨하게 발해는 우리 친척 맞음이란 인식을 딱 남겨놨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진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17] 다만, 발해랑은 달리, 북마케도니아 고대 마케도니아와의 연계성이 영토말고는 그닥 관계가 없었던 탓에, 마케도니아라는 국명을 밀어붙이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미 그리스에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의 행정구역이 있는데다, 심지어 고대 마케도니아의 진짜 중심지와 발원지는 현대의 그리스령 지역에 있었으므로, 국제사회에서 마케도니아 국명 분쟁을 핑계로 북마케도니아에게 그리스가 갑질하는 것만 뭐라했을 뿐, 마케도니아에 대한 역사적인 연원에 대해서는 그리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이 문제는 발해의 국호 문제보다는, 차라리 오스만 제국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통성 승계 문제에 더 가깝다. [18] 사실 만주는 당시에는 요서쪽의 평야지대를 제외하고는 농경에는 거의 쓸모없는 땅이라서, 특히 발해의 영토였던 동만주의 경우 고려가 차지했더라도 계륵 같은 취급이 되었을 것이다(만주의 자원을 본격적으로 활용해 지속가능하고 강력한 정권을 구축한 건 근대 과학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된 뒤에야 출현한 봉천군벌이 최초였다). 발해의 경우 그러한 영토로 흥기할 수 있었던 건 당시 기후의 특수성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는데(확실한 연구가 진행된 부분은 아니다, 다만 당대에 쌀농사의 재배상한선이 북상한 기록은 확실히 있다), 그러나 발해 말기에는 이미 기후변화로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고 추정되고, 무엇보다도 차후에는 백두산 폭발로 추정되는 요인으로 그 영토를 차지한 요나라도 포기했을 만큼 결국에는 심히 상태가 안 좋게 된 걸로 보인다. 요동지방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한반도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는 강력한 요충지이긴 했는데, 안타깝게도 만주에 발을 들여놓은 모두가 노리던 곳이라 강대국인 요나라가 진작에 차지한 상황이었고, 이후로도 요동정벌 이슈는 전근대 한국사의 지속적인 맥거핀이 된다. [19] 참고로 동만주의 경우 이후에는 기후가 꽤 나아졌는지 나중에는 고려도 요나라에 막힌 요동 대신 동북쪽으로 진출을 시도하여 고려의 여진 정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또 이미 완안부 여진족이 그쪽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상황이었다. [20] 비슷한 시기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이연년의 난, 신라 부활을 명분으로 건 이비 · 패좌의 난이나 김사미 · 효심의 난도 일어났다. [21] 실제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국호를 고려로 바꿨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668년 멸망까지 고구려로 국호를 일원화해 기록하는 역사 정리를 통해 중세 왕씨 고려와 국체를 구분하였다. [22]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 [23] 일본서기에는 이러한 보덕국의 사신임이 분명한 인물들에게 일본측에서 보내는 답사들이 모두 고려사/견고려사로 기재되어 있다. [24] 개중 특히 남원소경(현 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 사민된 인구가 많았던 걸로 보이는데, 남원 일대에 고구려(보덕국) 유민이 많아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문고 명인으로 유명한 옥보고(玉寶高) 또한 남원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원래 고구려 악기였던 거문고의 전통이 이로 인해 남원 일대에서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25] 이는 백제 귀족들이 문무왕의 포용 조치를 강력하게 거부하며 일본과 연대해 부흥운동을 했던 게 주요 원인이었다. 문무왕 및 그의 후손들인 무열왕계 임금들은 그럼에도 백제 유민 회유를 포기하지 않았으나 초반에 이렇게 백제인들이 강력하게 포용을 거부했던 탓에 진골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면서 고구려인들과 똑같이 대해주는 건 불가능했다. [26] 당연히 고조선에서 유래. [27] 물론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라도 요동은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당연히 힘의 공백을 틈타 정복할 유인은 그냥 넘치고도 남았다. 거기에 소고구려는 존재했다고 해도 이미 유력민이 흩어지고 남은 인구로만 세운 부용국에 불과했기에 전성기를 달리던 발해에 스리슬쩍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발해가 옛날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요동반도 전체를 완벽하게 점유했는가, 아니면 압록강 루트 및 천산산맥의 요충지 위주로 점거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참고로 옛 건안성 일대에는 소백제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발해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28] 삼국은 미약하지만 고조선 계승의식이 있었고, 어차피 고조선의 중심지 또한 당시 패서지방이었기에 정권의 정당성에도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