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22:17:03

통일신라-발해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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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성립2.2. 초반2.3. 중반2.4. 후반2.5. 종결
3. 관련 사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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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 발해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삼국시대와 달리 남북국시대에는 발해-당 전쟁을 제외하면 양국 간 직접적인 큰 전쟁이 없었고 대신 양국은 신라도를 통해 교역을 자주 했다. 단, 빈공과 경쟁이나 의전 서열 관련 분쟁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라이벌 의식이나 얕은 적대감은 존재했다.[1]

2. 역사적 관계

2.1. 성립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 당나라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당나라로 끌려가거나 신라로 이주했다. 신라에 정착한 고구려인들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진행했다. 신라는 보덕국을 세웠지만, 보덕국은 이후에 해체됐다. 698년에 대조영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2.2. 초반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뒤, 신라측에선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란 벼슬을 줬다.[2] 발해가 2대 국왕 무왕때부터 영토를 확장하면서 발해는 당나라와 전쟁을 치렀다. 당나라는 신라에게 발해 공격을 요청했지만, 도중에 폭설로 인해 중지됐다. #[3]

통일신라와 발해는 문왕때부터 신라도를 통해 교역이 이뤄졌다. 한편, 일본이 발해에게 신라를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발해가 거절했다.

790년 3월 원성왕때 신라는 발해에 사신 백어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2.3. 중반

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日本道이고, 南海는 新羅道이다. 압록은 朝貢道이고, 長嶺은 營州道이며, 부여는 거란도이다. #
신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조(渤海條)

발해는 10대 국왕 선왕때부터 요동을 수복하는 등 영토확장이 일어나자 신라측은 장벽을 세웠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지만, 당나라로 유학한 신라인 유학생들과 발해인 유학생들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신라와 발해는 신라도를 통해 교역을 활발히 했다. 양국은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비중이 높았다. #

발해와 통일신라는 당나라와의 교역, 교류를 통해 여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다. # 신라도를 통해 신라의 천정부에서 책성부까지 39개의 역참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812년 헌덕왕 때 통일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존재한다.

826년 7월 헌덕왕 때 통일신라는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2.4. 후반

十二年春 北鎭奏 狄國人入鎭 以片木掛樹而歸 遂取以獻 其木書十五字 云 寶露國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
12년(886년) 봄, 북진에서 보고하길 적국인이 진에 들어와, 진에 들어와 판자 조각을 나무에 걸고 돌아갔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가져다 바쳤다. 그 나무 조각에는 글이 15자 쓰여 있었는데, “보로국(寳露國)과 흑수국(黒水國)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해 소통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통일신라와 발해는 800년대 후반부터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통일신라는 887년에 진성여왕의 즉위로 혼란이 계속됐다. 892년에 후백제가 건국된 것을 시작으로, 901년에 후고구려가 세워졌다. 통일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지면서 후삼국시대가 시작됐다.

발해는 800년대 후반부터 말갈족들이 이탈하는 등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보로국 흑수국에서 화친을 맺기를 희망한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거란의 위협이 커지면서 발해의 15대 국왕 대인선이 신라와 동맹을 맺을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란의 위협을 막기 위해 신라에 병력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신라 역시 발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건 둘째 치더라도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던지라 남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2.5. 종결

926년에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수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하며 양국 관계는 종결됐다. 신라 역시 머지않은 935년에 고려에 합병되며 양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3. 관련 사건

4. 관련 문서



[1] 최치원의 문집에서 빈공과에 발해인 합격자들이 늘어나자 비판하는 글을 적었다. # [2] 대아찬이 진골 이상부터 받을 수 있는 신라의 관직이었으니 국가 수장으로서 인정해 준 셈이다. [3]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도 언급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