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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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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교육과정4. 평가5. 여담6. 유사 기구
6.1. 한국
6.1.1. 국립6.1.2. 사립
6.2. 외국

1. 개요

국학(國學)은 통일신라 신문왕 대에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유사한 것으로 고구려 태학(太學), 발해 주자감(胄子監)이 있다. 이후 고려 국자감(國子監), 조선 성균관(成均館)의 원조 격이다. 지금의 경주 향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

2. 역사

신라에서는 화랑제도라는 전통적인 교육, 인재 천거 방식이 있었고 초기 유교적 교육 또한 화랑제도 하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고구려나 백제, 중국과 같은 체계적인 중국식 유교적 고등 교육 기관의 설치는 상당히 늦었는데, 김춘추는 648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나당동맹 체결건 이외에 당나라의 국자감을 견학했고 이 때 국학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당시는 삼국통일전쟁의 절정기로 제도개혁의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34년이나 미뤄져 결국 통일전쟁이 완전히 끝난 682년이 되어서야 신문왕이 국학을 세워서 오경과 그 중에서도 특히 논어와 효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했다.

신라의 특성인 전통적인 화랑제 역시 계속 존속했기 때문에, 두 과정을 병행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신라 국학은 입학 나이제한이 굉장히 널널했다. 참고대상이었던 당나라 국자감의 입학연령이 14~19세로 제한됐던 반면 신라 국학의 입학연령은 30세까지였다. 입학으로부터 9년제 과정 교육기관이란 점과, 현대에 비해 빨랐던 당시의 활동연령과 평균수명까지 감안하면 굉장히 늦은 나이의 입학까지 받아들였다. 즉 당나라의 국학이 미성년자의 교육만 담당했다면 신라 국학은 미성년자 교육뿐 아니라 이미 성인이 되어 관등을 가진 사람의 재교육 역할도 담당했다.

경덕왕 때 태학감(太學監), 대학감(大學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혜공왕 때 국학으로 돌아왔다.

국학에는 학생 녹읍(學生禄邑)이라는 녹읍을 붙여줘서 녹읍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운영했다. 기록상 소성왕이 지금의 거제도로 비정되는 거로현(居老縣)이 학생녹읍으로 내려 지정돼 있었다고 한다.

3. 교육과정

국학에서는 유학 경전 교육 위주에, 그 외 행정 실무에 쓰이는 수학 등의 실용적 학문도 같이 가르쳤다.

대사 이하의 관등 소지자부터 아예 관등이 없는 15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이가 입학했는데, 학업기간은 9년이 원칙이었다. 일단 입학했어도 별로 자질이 없어서 인재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퇴학시켰다.

3개 과로 나눠서 교육을 했는데 예기, 주역, 논어, 효경을 가르치는 과, 춘추좌씨전, 모시, 논어, 효경을 가르치는 과, 상서, 논어, 효경, 문선을 가르치는 과가 있었다. 보다시피 오경 중에서도 특히 논어 효경은 모든 과에 공통되는 과목이었다. 이 밖에도 산학박사( 수학), 천문박사( 천문학), 의학박사( 의학), 율령박사( 법학)가 있어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실무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는데 예를 들어 수학 교재로는 철경, 천산, 구장산술 등을 사용했는데 구장산술은 원주율 계산법이 이미 담겨있는 책이었다. 산학을 제외한 천문 이하는 저마다 교습하는 담당기관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에는 박사 조교가 소속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9년 기한으로 교습을 받은 뒤 그 사이의 학업 성취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또한 과거 제도의 초보적 단계인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기도 했다.

골품제가 있었던 신라에서 특이하게도 국학 조직이나 운영과 관련된 기록에서 골품을 구분짓는 기록이 없다. 기록이 간략하다보니 단지 생략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국학의 교육은 신분에 따른 차등 없이 동등하게 실시하고 대신 과정이 완료된 후 관등을 수여하거나 관료로 선발할 때만 골품을 고려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4. 평가

위의 교육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 국학의 목적은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 중에서 유교적 교양에 충실하고 행정 실무에 강한 관료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계속된 골품제에 의거한 인사 관행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문왕이 이룩한 중대의 강한 전제왕권이 하대로 들어서며 약화되자 그와 동시에 국학의 기능도 관료제와 함께 무력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학과 독서삼품과의 실시는 이후 고려, 조선까지 천 년 넘게 계속된, 실무능력을 갖춘 인재 등용이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5. 여담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성균관대가 성균관을 통해 국학을 간접 계승한다고 본다.

6. 유사 기구

6.1. 한국

6.1.1. 국립

6.1.2. 사립

6.2. 외국


[1] 다만 경주향교 자리에 국학이 아닌 요석공주가 머물던 요석궁이 있었다는 이야기 또한 많다. 신문왕대에 국학이 설치된걸 볼때 원효와 결혼한 요석공주가 더이상 요석궁에서 살 이유가 없어져 궁의 주인자리가 사실상 공석이 되어버리자 요석궁을 국학으로 재창했다고 하면 얼추 두 주장이 양립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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