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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 신라와 고려의 관계. 신라와 꽤 오래도록 형식적으로는 군신 관계,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군사동맹 관계였다. 하지만 서라벌 함락 사건으로 신라가 자력으로 운명을 개척할 동력을 완전히 잃은 후, 이런 대등한 군사동맹 관계는 고려가 서라벌을 비롯한 신라의 요소요소에 신라 왕실의 동의도 받지 않고 고려 군부대를 자의적으로 설치하게 되면서 사실상 끝나게 된다. 그때 이후부터는 사실상 신라의 고려 괴뢰국화가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물론 신라 왕실에겐 기분 좋은 얘기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고려 괴뢰국으로 명맥이나마 보전하는 게 후백제한테 완전 병탄당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후 경과는 다음 단원에서 후술한다.2. 역사
태봉과의 관계는 극악이었으나, 918년 궁예가 왕건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왕건이 고려로 국호를 되돌린 후엔 상황이 바뀌었다. 왕건은 후백제와 다르게 신라에겐 우호적이었고, 존왕의 의로 왕실을 높이며 신라를 형식적으로는 주군의 나라로 놓았다. 다만 여기서 군신 관계라 함은 왕건이 신라란 나라 내부의 지방관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신라 천하 세계관 내부에서 천자격인 신라대왕이 중심이면 고려왕 왕건이 그 변방 수호를 자처하는 제후국 국왕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지겹도록 자주 보게 되는 사대 관계였다고 보면 된다.이런 세계관에서 신라가 직접 지배를 관철했던 옛 백제 지역은 아예 논의조차 될 수가 없었고, 백제왕이라는 견훤은 조상 대대로 신라인인 신라 장군이었기에 백제왕은 아예 이런 신라 천하에 독자적 행위자로서 낄 수조차도 없었던 걸 보면 이런 관계는 나름 고려와 신라에겐 의미가 컸다. 고려왕 왕건은 신라 천하란 개념 안에서도 견훤에 비해 위치가 높았다는 얘기다. 정작 통일신라 사회 골품제 개념으로는 견훤이 왕건보다 지위가 높았던 걸로 봤을 땐 아이러니.[1]
이런 관계는 경명왕 때부터 확립되었는데, 말하자면 이는 보덕국왕 안승이 신라왕과 가졌던 관계와 완전히 똑같았다. 국세로 보면 정반대였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 설정은 후백제가 크게 한몫 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전까진 고려왕 왕건도 후백제와 마찬가지로 신라 왕실에겐 반란참칭자에 불과했으나, 견훤에게 옛 대가야 영역과 대야성이 몽땅 다 넘어간 상태가 되자 왕건을 제후왕으로 인정하여 다독여주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신라가 또 대놓고 고려왕 왕건을 제후국 군주로 대우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경명왕이 왕건에게 보낸 사신은 책봉사가 아니라 '내빙'명목으로 보내는 국왕 대 국왕의 대등한 형식이었고, 왕건 또한 경명왕에게 보내는 사신은 조공사가 아니라 '내빙'을 목적으로 보내는 정식 사신이었다. 이는 신라가 후백제에게 옛 대가야 영역을 모두 빼앗기고 추풍령 일대까지 잃은 상태였던지라 대놓고 왕건을 제후국 군주 취급을 할 수가 없었던 사정에 원인이 있었고, 왕건 또한 신라가 알아서 굽혀서 나오는데 굳이 의전을 낮출 필요가 없다고 본 데 이유가 있다. 실은 이것이 바로 왕건의 본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왕건과 견훤 사이에 오간 국서에서 보듯, 왕건은 신라와 주고받는 사신의 예에선 구태여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서 은근슬쩍 신라를 길들이려 하는 한편, 겉으로는 신라국에게 정식으로 제후국 군주로 인정받은 양 선전하며 아예 신라한테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견훤에 대한 악선전하는데 이 상황을 잘 써먹었다. 사실 이 당시에는 후백제가 일본에게서 백제왕으로 인정받는 데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2], 고려 또한 오월이나 후당에게서 정식 고려왕 책봉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후백제가 오월에게서 백제왕 책봉은 고려보다 먼저 받아낸 것과 상당히 대조되는 패턴인데, 한반도 상황에 대해 일본보다는 좀 정보가 적었던 후당이나 오월이 아직 신라의 한반도 내 패권이 확실히 무너졌는지 확신하지 못한 것에 이유가 있었다고 해석된다.[3]
이와 같은 패턴은 공산 전투에서 고려-신라 동맹이 크게 패배한 상황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때 경애왕은 죽고 왕건은 죽다 살아나며, 이후 견훤이 옹립한 경순왕은 초반에는 아예 고려와 어떠한 교섭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게 고려에게 손해만 되었던 건 아니었다. 신라가 자력으로 뭘 해볼 군사력, 경제력, 인구력이 크게 훼손되면서 그야말로 사로국 시절로 국력이 추락하고 말았는데, 이는 신라가 약소국이어도 이제 더 이상 고려의 대등한 군사동맹국이 될 수 없음을 뜻했다. 그러면 남은 건 약소국의 처지로 전락한 신라가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갈지, 고려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왕건이 정말로 신라대왕의 충실한 신하이자 동맹자였으면 후백제를 격퇴하고 난 후 획득한 영토를 신라에게 돌려주어 신라를 경명왕 시절 수준으로 되돌려줬어야 했지만, 왕건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왕건은 신라가 후백제를 어떻게 대우하든 견훤을 내내 백제왕으로 대우하며 정식 국서를 교환하며 견훤의 후백제를 제대로 된 국가로 인정했고 그건 견훤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왕건의 ‘존왕의 의’라는 게 철저하게 이해타산으로만 이뤄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다만 그러나 아직 신라에겐 마지막으로 잃을 게 남아 있었다. 신라의 이런 독자적 천하관은 5세기 신라왕들인 내물 마립간- 실성 마립간- 눌지 마립간 등이 고(구)려대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에게 복속하면서 받아들인, 고구려 천하관을 신라가 중심에 서는 세계관으로 변경해 적용한 것이었는데, 931년 초 경순왕이 고려에게 순(順)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관을 오백 년 만에 원형 그대로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고려대왕 왕건에게 신라왕 김부가 제후왕으로서 복속하는 구도가 되어버렸다는 얘기. 이로써 형식적인 존왕의 의는 이 단계에서 완전히 부정되었고, 눌지 마립간이 수도 서라벌 근처에 주둔한 고(구)려군들을 몰살하면서 정면 부정한 바 있는 고(구)려 천하관이 신라 왕실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견훤의 서라벌 함락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932년, 933년에 왕건이 후당과 오월에게 정식으로 ‘고려왕’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상황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고려왕 왕건이 신라왕 김부를 제후국 군주로 거느리게 되면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였다.[4]
하지만 나름 신라 왕실에게 큰 충격이었을 이 조치 자체에는 별 큰 반대가 없었다. 어쨌든 이 체제에서도 신라의 국체와 신라왕 지위는 보전되어 있었기 때문. 내심 더 큰 단계까지도 고려하고 있었을 경순왕도 이런 건 과거에도 선례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순왕이 4년 후 935년에 아예 귀부까지 결정하자 이번에는 마의태자를 비롯한 이들의 큰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귀부’는 신라의 국체 자체를 폐지하고 일개 지방으로 격하하며, 신라왕이란 지위도 폐지하겠다는 건데, 이건 신라가 건국된 이후 선례 자체가 있을수 없었던 망국 자체였기 때문. 흔히 ‘선양’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선양이 아니라 ‘귀부’다. 나름 삼국지에도 정통했고 조조와 조비를 의외로 좋아했던[5] 왕건이 선양 비슷한 형식을 아주 약간 흉내냈던 것이지, 실질적 절차든 명분상 내걸었던 제목이든 어디까지나 ‘귀부’지 선양은 아니었다.[6]
이에 견훤의 귀순과 더불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정통성까지 완전히 흡수하게 된 왕건은, 그해 말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40여년간의 후삼국시대를 마무리짓는다.
3. 같이 보기
[1]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견훤은 신라 왕실에게 용납될 여지가 없었다.
[2]
일본이 후백제에게 군사원조를 해주기 싫었던 상황이 더 큰 이유였지만.
[3]
그럼 후백제는 어떻게 오월에게서 인정받았는지 이 대목에서 궁금해질텐데, 후백제는 일본, 신라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상황 탓에 오월, 후당, 거란에 대한 외교에서 고려보다 적극적이었던 게 이유다.
[4]
또한, 그 시점에서는 고려가 대중국 외교에서조차 후백제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대단히 중요한 국제사회적 시그널이었다. 견훤이 알았다면 상당히 충격받았을 일이었다.
[5]
즉 이때까지만 해도
조위정통론이 결코 밀리지 않았다.
촉한정통론이 본격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은
성리학의 본격화 이후다.
[6]
애당초 선양을 노렸다면 함부로 건국이나 칭왕을 한 것이라던가 신라를 신하국으로 격하시킨 것 자체부터가 명분을 잃어버릴 월권행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