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9:16:23

호족(한국사)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후삼국 고려 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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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목록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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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족이 아닌 지방의 유력자. 토호(土豪)라고도 불렸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건국때 역사의 전면에 처음 등장했다.

중국, 유럽, 일본 등 중세 봉건제도 아래 영주들이 그러했듯이 그랬듯 고려의 지방 세력들은 왕씨가 아니었음에도 각자 세력을 구축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연・혈연 등을 배경으로 토지와 농장, 노비, 자체적인 사병까지 거느리면서 해당 지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호족은 현대에 이들을 나누기 위해 붙인 이름일 뿐 원래는 성주, 장군, 도(盜), 적(賊) 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됐다.[1] '장군'(將軍)은 본래 각 군단을 지휘한다. 진골 6두품이 맡았고, 정원은 42명이었다.[2][3]

각 호족들이 실제로 자칭했던 성주, 장군 등의 호칭은 각 호족들이 자칭했다는 설과 신라 중앙정부가 부여했다는 설로 나뉘고 있다. 후자의 경우 통일신라 정부는 본래 전국 9주 5소경 450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했고, 그 탓에 신라 중기까지 직접 통치의 비중이 높았으나, 9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 이상 지방을 직접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신라 조정이 당나라의 지주군주사(知州軍州事)를 모방한 지주제군사(知州諸軍事) 제도를 시행해, 지방 세력가들에게 경제적, 군사적 독립성을 일부 인정하고 대신 왕실에 대한 충성을 확약받았다는 것이다.[4] 다만 견훤처럼 자칭일 가능성이 높은 케이스가 보이기 때문에 자칭과 신라 조정의 인정 둘 다 혼재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특히 신라 후기에는 중앙 조정의 권력 약화, 기근 등 여러 혼란을 틈타 전국 각지에서 친족 집단 중심의 호족 세력이 세를 불려나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신라의 지방 관료들과 결탁하여 신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는 등 후삼국시대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통일 전쟁에서 호족들 중 고려에 적대하거나 후백제의 편에 선 호족들은 고려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 통일을 끝맺음하면서 연거푸 몰락한 반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거나 귀부한 호족들은 결혼과 등용 등 포용 정책의 혜택에 힘입어 고려 초기 국가의 주된 지배층을 이루게 된다.[5] 이후 중앙 정계로 진출한 호족의 가문들은 왕실 내 권력을 노리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으며, 이는 2대 혜종(912~945)과 3대 정종(923~949)의 요절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광종(925~975) 대에 들어와 호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노비안검법 과거제를 연달아 쓰는 등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대부분 숙청되어 사라져갔고, 그 세도 약해졌다.

그러나 광종 사후 숙청으로부터 살아남은 호족들은 경종이 즉위하자 자기들끼리 이전보다 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이후 음서 공음전을 바탕으로 한 문벌귀족 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이때 문벌귀족이 되지 못한 중소 호족들은 향리 계층을 이뤘고, 후기의 혼란기에 또 다시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아 일부는 권문세족이 되기도 했으나 여기서도 기회를 잡지 못한 호족들은 여전히 향리층으로 남았으며, 조선 개국 이후에 대과에 급제하여 양반 계층이 될 수 있었던 사례들 이외에는 중인 계급인 아전층을 형성하게 된다.

2. 상세

파일:나말여초(891).png
891년 호족의 난립

한국에서 호족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는 시기는 나말여초, 즉 통일신라 말기 ~ 후삼국시대로 왕권이 비교적 강했던 8세기경의 신라 중대까지는 미미하다가 신라 하대인 9세기 농업의 발달로 인한 인구 폭증과 계속된 진골 귀족들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 지방 통치력에 공백이 생겼고, 이에 따라 여러 형태의 호족이 나타나게 되었다.[6] 당시 중앙의 6두품 세력은 내물왕계 김씨와 화백회의 중심의 절대적 카스트 골품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들이 호족에게 포섭됨에 따라 신라 멸망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또 교리와 규율을 중시하는 귀족 중심의 교종 불교 대신, 개인적인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 중심의 선종 불교를 지원했다. 이들은 선종 승려 도선이 들여온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경주의 기운이 이러이러해서 다했고 자기네 연고지가 길지'라고 주장해 세력을 불리기도 했다.

대개 신라 말 등장한 호족들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몰락 귀족형: 모종의 사유로 중앙정치에서 배제된 경주 김씨 귀족집안이 지방에서 토착화되어 호족이 되는 경우. 예시로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명주(강릉)에 자리잡은 김주원의 후손 김예가 있다. 후삼국시대는 아니지만, 신라가 항복한 후 기존의 경주 김씨, 박씨 등의 진골 귀족들도 동경(경주)을 근거지로 한 고려의 호족이 되었다. 참고로 후삼국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던 일리천 전투에 10,0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참전한 대호족이었던 명주의 왕순식을 오래 전에 중앙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해 명주에 자리잡은 김주원의 후손으로 추정하고 이 몰락귀족형인 경우로 보기도 하는데 정작 왕순식이 김주원의 후손이라는 명백한 근거는 없다.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 정설인 것처럼 보여줘 확산된 경우.
  • 군진 점거형: 신라 하대에는 전국에 군진이 설치되었는데, 서남해의 청해진, 예성강 유역의 패강진[7], 남양만 일대의 당성진, 강화도의 혈구진 등이 있었다. 이런 군진에서 지방군을 지휘하던 사령관이 사적으로 확보한 부하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군진을 사실상 사유화해버린 다음 인접 고을들의 지배권까지 손에 넣으면서 그 일가가 호족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견훤 등이 있다.
  • 촌주 가문형: 기존 신라의 최하급 행정단위인 촌(村)의 유력자인 촌주의 가문이 세력을 키워 인근 마을까지 자신의 지배권에 넣고 호족화한 경우이다. 이 유형이 호족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아자개[8], 서신일, 홍술, 선필 등이 있다. 촌주 출신이라고 해서 굉장히 낮아보이지만 그 지역에서 빠르면 삼국시대부터 가문 대대로 자리잡고 살아온 터줏대감 같은 유력자들이기 때문에 중앙에서 내렸던 높은 관직만 없을 뿐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 상업 세력형: 상공업으로 재부를 쌓은 유력 가문이 지방의 지배권까지 확보한 경우. 왕건 유천궁 일가 등을 위시한 패서 호족들과 서남해 해안의 호족들이 이쪽 계통이었다. 지역유력자 출신이니 촌주가문형과 어느 정도 겹치기도 한다. 서남해의 능창 해적질을 하면서 사병을 대거 보유하고 무역으로 재부를 쌓았다. 당시는 국가의 통제력이 사라져 치안이 무너지고 각지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던 때라 안위가 단순히 상업만으로 유지된다는 건 불가능했기에 당연히 무역을 호위할 병력 정도는 있었고, 애당초 전근대에 해상에서 무력을 갖춘 상인 세력들은 기본적으로 해적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 설득력이 있는 추정인 것이 통일신라 말기는 신라구(신라 해적)가 창궐하여 오히려 일본 큐슈는 물론이고 세토내해에 신라구가 진출해서 일본 각지를 털어먹던 시절이다. 그런 신라에서 해상무역으로 거상이 되고 한 지역의 호족이 된다는 것은 이미 상당한 무력을 지닌 집단이었다는 것.

나라가 중앙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과 사치, 기근 등으로 망조에 접어들자 각 지역에 퍼져 있던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으로 군사를 모으고 세금을 걷는 등 사실상 각기 독립적인 소왕국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호족별로 성향은 천차만별이라 신라 조정에 명목상 충성하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9] 중앙의 조정과 왕실이라는 개념을 매우 가볍게 보는 자들도 많았다. 이런 성향 때문에 신왕조인 고려가 들어선 후에도 이들은 왕을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가문의 이득을 위해 연합할 수도 있는 이용의 대상, 좀 크고 센 호족의 수장 내지 연합 대표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고 해서 중앙과 별개로 지방에서는 강력한 토착 호족들이 한동안 실세로 군림하였으며, 당연하게도 호족들은 조정과 왕실의 안위보다 자기 가문의 이익과 권세를 우선시했으므로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신뢰가 안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태조 왕건조차 이런 지방 호족 세력에게 뒤통수 맞을까봐 이 가문 저 가문에서 부인을 엄청나게 많이 들인 까닭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부인만 29명이었을 정도였다. 말이 좋아 표면적으로는 왕가와 호족가문이 혈연관계를 맺어 가문 간 정치적 동맹을 확고히하는 혼인동맹이지 사실은 호족들이 섣불리 뻘짓을 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책략이었던 거다.[10] 그게 설득력이 있는게 왕건은 유력한 군사력을 지닌 호족과는 여러 번 중첩해서 혼인하기도 했다. 특히 패강진[11]세력으로 보이는 평주에서만 세 명의 부인을 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왕건은 창업군주로서의 실적과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왕건 생전에는 이러한 무리수가 통했지만, 왕건 사후에는 그마저도 효력을 잃어서 곧 고려 왕실의 존립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왕건의 처가측 호족들이 각기 자기네 가문쪽 왕자, 왕손을 왕위에 올리려고 일종의 왕위쟁탈전에 돌입한 것이다. 당장 적장자이자 적법한 후계자인 혜종 왕무는 공산 전투 전후 왕건이 한창 밀릴 때 후백제 손에 일시적으로 나주가 점령되었다가 재탈환하는 과정에서 나주의 외가가 너무 몰락해버려서 적장자의 정통성과 태자로서의 업적, 일신의 무력을 갖고도 오래 버티지 못했고, 그나마 외가의 기반이 상당하던 정종조차도 호족들 상대하다가 젊은 나이에 비명에 갔다.

이후 정종의 동생인 광종이 왕위에 오른 후 아예 작심해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이런 믿을 수 없는 호족들을 모조리 박살냈고, 과거 제도를 기반으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호족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고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호족세력은 하급 귀족을 이루게 되었다.[12][13]

고려의 지방 행정조직은 크게 5도 양계 경기 체제였는데 이 가운데 군사적 성향이 강한 양계와 중앙에서 직접 지휘하는 경기를 제외한 5도 지역[14]은 인구나 규모가 큰 고을인 주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하고, 부근의 작은 고을인 속현에는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현의 지방관이 간접 통치하고 실질적인 지배는 기존의 호족층인 '향리층'이 맡았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태종을 시작으로 향리 ' 계급'의 세력을 급속도로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 시작되었고, 엄밀히 말해 하급귀족이었던 향리층은 양반과 상민 사이의 아전, 그러니까 중인층으로 격하되었다.

사실 이 호족이란 용어는 말이 꽤 논란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한국사에서의 '호족' 은 이 용어가 원래 나온 중국과 달리 친족 집단이 아니었으므로. 개념이 서로 다르므로 용어도 서로 달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신라 말에 지배자의 위치까지 올라간 사람들 중에는 자기 일족이 없거나 일족이 본디 유력하지도 호족으로 토착화되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기훤이나 양길은 한 지역의 지배자였지만 본디 도적이었다가 일개인이 초적 수장으로서 운좋게 관아를 잡아먹고 지역의 패자로 군림한 것이지 일족이 유력한 가문으로서 호족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고, 능창이나 작제건은 상인이자 사실상의 해적 수장급의 인물이었으며, 견훤의 가족은 지방 호족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자기 나라를 세우면서 일족이 바로 왕족으로 격상되었고, 궁예는 본인의 가문과 인연을 끊은 승려 출신으로 왕위에 올라 국혼을 하기 전까진 아예 가족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지방세력들은 당대에 성주나 장군 등으로 불렸기도 하다. 그러니 호족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자면 이들은 호족이 아니고, 편의상 호족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고려사 연구자들 중에는 이러한 호족이란 용어 자체를 일본 사학계의 영향으로 보고 당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성주, 장군 등으로 칭하는 연구자도 있다.[15]

3. 목록

파일:후삼국지도_v1.02.jpg
<후삼국시대 호족 지도>

다만 위 지도는 정사나 기타 당대 사료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과, 후대 조선시대에 조상과 가문을 미화할 목적으로 만들어 일반적으로 사료로 채택되지 않는 가문별 족보에만 등장하는 인물을 모두 포함한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기할 점은 왕건의 사성정책과 더불어 중국식 성씨가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이 후삼국시대이다보니, 각 가문의 시조들이 많이 등장한다. 개중엔 《고려사》엔 언급이 없고 《동국여지승람》이나 문중의 족보들에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제법 있으므로 교차검증 등의 연구가 더 필요한 실정이다.

호족 대표적 인물 기타
경흥(강릉) 최씨 최필달 고려 태조 때 경흥(강릉)의 부원군으로 봉해짐.
경주 평씨 평준[16]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고령 신씨 신성용 신라의 공족이었으나 고려 태조 때 안일호장에 임명됨.
골화현 → 고울부(영천)
황보씨
황보능장 고울부장군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이후 고려로 귀부.
고흥 류씨 류영 고려 태조 때 호장에 임명됨.
광주 왕씨 ( 함씨) 왕규 고려 초기에 2대에 걸쳐 왕들과 정략결혼[17]을 함.
정종 왕식렴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해 제거됨.
기계 유씨 유의신 신라의 신하였으나 고려의 호장으로 귀속됨.
나주 오씨 오다련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남양 방씨 방계홍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남양 홍씨 홍은열(홍유)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고려 태조에게 이름을 하사받음.
단양 우씨 우현 고려 태조 때 호장에 임명됨.
동래 정씨 정회문 고려 태조 때 안일호장에 임명됨.
동주(서흥, 서경) 김씨 김행파 고려 태조 때 김씨 성을 하사받음.
동주(철원) 최씨 최준옹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면천 박씨 박술희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고려 혜종 때 호족들의 권력다툼에 제거됨.
면천 복씨 복지겸(복사괴, 복사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고려 태조에게 성씨를 하사받음.
명주(강릉) 왕씨 왕유 고려의 왕족 계열의 호족.
명주(강릉) 왕씨(사성) 왕순식, 왕렴 명주장군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이후 고려로 귀부.
목천 마씨 마육황 고려 태조 때 호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반기를 듬.
목천 상씨 상국진 고려 태조 때 호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반기를 듬.
밀양 손씨 손긍훈 신라의 호족이었으나 고려에 귀부함.
벽진(성주) 이씨 이총언 성주의 호족. 이후 고려로 귀부.
성산 이씨 이능일 본피현의 호족. 경산의 제주(祭主). 이후 고려로 귀부.
봉화 금씨 금용식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선산(일선) 김씨 김선궁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성주(경산) 이씨 이순유 고려가 건국되자 복종을 거부하지만 강제로 귀속됨.
순창 조씨 조자장 고려 태조 때 호장에 임명됨.
순천 김씨 김총 후백제의 호족.
승주(순천) 박씨 박영규 후백제 견훤의 사위로 그의 휘하에 있다가 귀부함.
신주(신천) 강씨 강기주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아산 이씨 이주좌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안동 권씨 권행(김행) 신라의 호족으로 김선평, 장정필과 고려에 귀부함.
고려 태조에게 권씨 성을 하사받음.
안동 김씨 김선평 신라의 호족으로 권행, 장정필과 고려에 귀부함.
안동 장씨 장정필(장길) 신라의 호족으로 권행, 김선평과 고려에 귀부함.
양천(공암) 허씨 허선문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무령군(영광) 전씨 전종회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용구(용인) 이씨 이길권 고려 태조의 부마가 됨.
원주 원씨 원극유, 원극부 고려의 건국 직후 가문의 내분이 일어남.
내분이 끝난 직후에 고려에 귀부.
유주(문화) 류씨 류차달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이천 서씨 서신일
서필, 서희, 서눌
서신일은 이천 서씨의 시조.
아들 서필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이후 내리 3대가 재상으로 활약함.
의성 홍씨 홍규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전의 이씨 이도(이치)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왕건에게서 이름을 하사받음.
정선 전씨 전이갑, 전의갑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활약.
정주 류씨 류천궁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벌귀족 중의 하나로 자리잡음.
진주 소씨 소격달 신라의 호족이었으나 고려에 귀부함.
진주 임씨 임명필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진주 정씨 정자우 고려 태조 때 호장에 임명됨.
진천 임씨 임희 고려 태조 때 혜종과 정략결혼을 함.
고려 1대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됨.
천안 임씨 임언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청주 이씨 이능희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청주 한씨 한란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충주 유씨 유긍달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벌귀족 중의 하나로 자리잡음.
파평 윤씨 윤신달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활약.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벌귀족 중의 하나로 자리잡음.
평주(평산, 무송) 유씨 유금필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활약.
평주(평산, 무송) 박씨 박수문, 박수경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활약.
광종 때 호족 대숙청 과정에서 몰락.
풍양 조씨 조맹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한산 이씨 이윤경 고려 숙종 때 호장에 임명됨.
합주(합천) 이씨 이원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해주 왕씨 왕유(박유) 고려 태조 때 왕족의 성인 왕씨 성을 하사받음.
해평 김씨 김훤술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홍주(악계) 홍씨 홍규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황주 황보씨 황보제공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결혼을 함.
회인(의성) 홍씨 홍유( 홍술)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활약.
고려 태조 때 왕실과 정략 결혼을 하고 성씨를 하사받음.
후에 남양 홍씨와 합본되었다.
흥려 박씨 박윤웅 고려 태조 때의 대장군 개국공신으로 활약 흥려부(울산)지역을 다스림.

이 밖에 광주 이씨, 진성 이씨, 덕산 이씨, 봉화 정씨, 창녕 성씨, 예안 김씨, 반남 박씨, 양주 조씨, 평주[18] 윤씨, 목천 우씨, 목천 돈씨, 목천 장씨 등이 고려 개국 초기에 호장에 봉해진 것으로 여겨지나 고려 태조 때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위의 성씨들은 고려 초, 중, 말기 중에 전해지는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다.

4. 관련 문서



[1] 이들 중에는 실제로 도적 출신의 인물도 물론 있었겠지만, 신라에 반기를 든 지방 반란군이란 의미에서 견훤을 완산주 도적으로 기록하거나, 혹은 통일전쟁 당시 고려 태조와 협조한 호족은 성주, 장군 등 긍정적인 호칭으로 불러주고, 대립한 호족은 도적으로 기록한 경우가 많아 용어만으로 출신을 따지기는 어려운 편이다. [2] 수도 근위를 담당하는 시위부장군 6인, 대당장군 4인, 귀당장군 4인, 9서당 장군 각각 2명씩, 한산정장군 3인, 하서정장군 2인, 우수정장군 2인, 웅천주정장군 3인, 시위부장군 6인. [3] 신라에서 '장군'이란 명확하고 철저하게 관리되는 최고 군 계급으로 일개 지방 유력자들이 마구 임명될 수 있는 지위가 절대 아니었다. 즉 호족들이 장군이라는 건 통일신라 체제에서 정상적으로 수여된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4] 서로마 제국 게르만족이 밀려들어오고 제어가 힘들어지자 지역 유력 부족장에 지휘관(DUX) 작위를 남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5] 호족의 본관별로 분석하면, 통일 전 옛 고려 지역 출신이 성씨의 수에 있어서는 전체의 62%, 고급 관료의 수에 있어서는 75%를 차지했다. [6] 호족의 선구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은 바로 장보고이다. 호족들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후삼국시대의 반 세기 전에 등장해 신라는 물론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7] '예성강 유역'의 군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름 그대로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근처의 군진이라고 보는 주장 또한 존재하고, 고려 태조가 세 번에 걸쳐 거듭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은 박지윤, 박수문, 박수경 부자의 평주 세력이 패강진 세력이라고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8] 아자개는 기록상 농민 출신이지만, 기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상 평범한 농부 출신이라기보다는 촌주나 그에 준하는 정도의 부농으로 비정할 수 있다. [9] 이런 자들은 왕건이 신라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견훤이 신라 조정을 업신여기자 대부분 고려 측에 붙게 된다. [10]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굳이 정실을 29명이나 둘리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내명부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라도 정실 부인(=왕비)은 한 명만 두고, 그 아래는 전부 후궁으로 퉁치게 마련인데 왕건은 정식 왕비가 29명이었다는 거다. [11] 대동강 이남을 경비하는 신라 말의 유력 군진. [12] 신라의 옛 진골 귀족들 또한 고려 왕가와 유착된 경순왕계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경주 일대의 향리로 전락하여 고려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이 불만이 이어져 무신정권 시기 신라부흥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13] 오늘날 전해지는 많은 본관들의 시조 또는 중시조들은 광종 대에 과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물인 경우가 적지 않다. 호족들 중에서도 일찌감치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여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은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고 지방에 머물던 계층들은 향리가 되었다. [14] 경상, 전라, 양광, 서해, 교주 [15] 대표적으로 고려 지방제 권위자인 경상대 윤경진 교수. [16] 나말 여초에 존재했던 경주의 호족으로 고려 태조 때 좌윤을 지냈으며 딸인 헌목대부인이 왕실과는 혼인관계를 맺게되어 외척이 된다. 그러나 평준 이후로는 경주 평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봐서는 왕권강화 과정에서 숙청된 것으로 여겨진다. [17] 왕규의 첫째, 둘째 딸은 태조의 15, 16번째 왕비가 되었고, 셋째 딸은 혜종의 두번째 왕비가 되었다. [18] 평산, 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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