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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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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은 왕릉, 귀족묘, 벽화묘 등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고구려왕릉 문서를 참고.
※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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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중국어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영어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프랑스어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틀:국기|]][[틀:국기|]]
지린성 지안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135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ⅰ)[1], (ⅱ)[2], (ⅲ)[3], (ⅳ)[4], (ⅴ)[5] }}}
파일:external/pic.pimg.tw/1441966055-3556259104_n.jpg
정비, 복원된 국내성 성벽의 모습.

1. 개요2. 지명3. 역사4. 국내성 관련 조사와 연구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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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국내성 일대.jpg
파일:goguryeo_seong.jpg
국내성의 외성인 환도성의 터(좌측 상단)와 국내성 터(중앙 하단) 고구려 지도와 국내성의 위치.
실제로 중국 춘추시대만 해도 도읍의 국인과 그 바깥의 야인을 구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도시가 곧 국가였다. 고구려도 4세기 중후반 이전까지는 ' 고구려민'과 그 외의 '속민'을[6] 구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춘추전국 이야기》 및 《고구려의 영역 지배방식 연구》참조

국내성(國內城) 또는 통구성(通溝城)은 고구려 도읍지다. 현재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일대의 통구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왕조의 두 번째 수도[7]이자 두 번째 이중수도이다. 사실 첫 번째 수도 졸본은 수도였던 기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국내성이 고구려 초중기를 대표하는 도시라고 볼 수 있다. 국내성은 평지성 수도였으며, 짝으로는 산성 수도 환도성이 있었다. 한때 국내성과 환도성 중 어느 쪽이 고구려의 진짜 두 번째 수도인가에 대해 말이 많았으나, 현재는 안학궁 - 대성산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성을 통틀어서 묶는 편이다. 즉, 당시 고구려는 평지성 국내성이 뚫리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나암성으로 비정되는 근처의 환도산에 위치한 산성인 환도성으로 도피하여 외세에 저항했다.[8]

‘말 달리는 만주 벌판'의 이미지로 알려진 고구려의 이미지와 달리 초기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 주변의 지형은 산골짜기 속의 압록강 쪽의 작은 평지에 불과하다. 구글 지도에서 지형 레이어로 보면 국내성이 위치한 지안시 주변 지방에서 시가지가 들어설 수 있는 평지는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 개성보다도 훨씬 좁아터졌다. 현대 도시와 비교하면 부산광역시 1/2개 정도 면적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기후 역시 매우 혹독해서 작은 성읍국가면 모를까 대국의 수도로서는 걸맞지 않다. 굳이 이런 지역을 수도로 사용한 것은 미약했던 초기 고구려가 여기서 시작했고 오랜 세월 기득권이 뿌리박혀서 쉽게 옮기지 못했던 거였지만,[9] 제20대 장수왕에 이르면 국내성을 중심으로 운영하기에는 나라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에 결국 훨씬 넓은 평야가 있고 지형적으로도 발전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지도만 보면 만주가 넓어 보이니까 왜 고구려가 그 넓고 알토란 같은 만주를 두고 굳이 한반도로 남하했는지 의아해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평양 천도에는 국내성의 다소 좋지 않은 지형이라는 속사정도 있었던 것이다. 또 고구려의 핵심은 후기에 가까워질수록 만주가 아닌 한반도 북부 패서지역으로 중심이 점차 이동되었고, 평양 천도 역시 패서지역의 영향력과 위상을 한층 강화시키는 쐐기가 되었다. 현재 국경으로 굳어진 4군 6진의 압록강 바로 위에 위치하기에 국내성 광개토대왕릉비,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환도산성이 중국 땅인건 상당히 안타까운 부분이다. 압록강, 두만강으로 둘러싸인 4군 6진에서도 일부 지역들이 여진족의 공격에 폐군되기도 했는데, 당시 상황에서는 이지역을 지키긴 힘들어 보인다.

2. 지명

지명은 한자 의미 그대로 해석하거나, 고구려어 이름의 이두 표기로도 볼 수 있다.
  • 한자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나라 안에 있는 성'이 된다.
  • 이두 표기일 가능성을 검토해보자면, 고구려 지명에서 內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 땅(壤)과 통한다. #[10] 신라어에서는 누리(世)와도 통했는데 이 또한 비슷한 맥락의 어휘이다.[11][12]

당나라 기록인 『한원(翰苑)』에 따르면 국내성의 이칭으로 불내성(不耐城)이 있었다고 한다. #
  • 不(불)을 신라어 伐(벌), 백제어 夫里(부리)와 같은 '벌', 즉 '평평한 땅'으로 해석하고, 耐(내)를 內(내)와 같다고 볼 경우, 평양(平壤)과 뜻이 통하게 된다.
  • 불내성(不耐城)과 닮은 지명은 함경남도 안변군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불내예국 낙랑군에 속했던 불이현(不而縣)이 있다.[13]

3. 역사

제2대 유리명왕 22년(서기 3년)에 수도를 졸본성(= 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이후 남하정책을 펼쳐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제20대 장수왕 15년( 427년)까지 총 424년 동안 고구려의 도읍지였고, 이는 고구려 역사 704년의 약 60%에 해당하는 오랜 기간이었다. 또한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20대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28명의 고구려 군주 중 무려 19명의 군주가 이곳에 정도했다.[14]

제11대 동천왕 조위의 장수인 관구검이 이끄는 위군의 공격으로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 자신은 북옥저까지 몽진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제16대 고국원왕 때는 선비 모용부가 세운 전연 모용황이 쳐들어와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고, 태후와 왕후가 모두 납치당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남만주의 하곡분지 및 산악지대와 압록강과 송화강의 중상류 수계, 개마고원, 요동에 이르기까지 교통로를 감제하면서 수비에 유리한 입지를 가진 곳이다. 이후 제19대 광개토대왕, 제20대 장수왕 시대를 거치면서 고구려가 대국이라 할만한 체급을 갖추자 인프라와 입지가 더 좋은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그래도 옛 수도라서 그런지 국내성은 지리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 도시로 남았다. 평양성, 한성(現 황해도 재령군 부근)과 함께 고구려의 3경이라고 불렸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날 때 연남생이 주둔했던 성이 국내성이었을 정도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그 위용을 잃지 않았다. 연남생이 국내성을 들고 당나라 고종에게 항복하면서 당군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곳은 몰락하여 잊혀졌다. 졸본성 같은 산악지역이 아니라 평야 지형이라고 하지만 거의 산골짜기 속 분지에 가까운 데다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이 부근에 있을 정도로[15] 겨울이 상당히 혹독한 지역이다. 초기 고구려가 수도로 삼지 않았다면 더 빨리 쇠락했을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예 존재감 병풍인 졸본성과 달리 국내성은 꽤나 오랫동안 수도여서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발해의 5경 중 서경압록부가 여기라고 보기도 하지만, 압록강 상류로 좀 더 올라간 위치의 임강[16]이 더 유력하다. 문헌기록의 설명에서도 린장(임강)이 더 부합하고, 고고학적으로도 지안에 고구려 유적은 말 그대로 널려있지만 발해 유물은 많지 않기 때문에 밀린다.

4. 국내성 관련 조사와 연구


국내성이 자리한 지린성 지안시도 과거 만주국의 영역이었던 만큼 일제강점기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대략적인 현황조사가 이루어졌었다.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 조사가 본격화된 70년대 이후에 국내성 성벽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약식보고의 형태로 내용이 소략하였다. 그럼에도 절개조사를 통해서 '토성(1차, 한나라)→석축(2차, 고구려)→수축(3차, 고구려)→민국시대 개축'의 순서로 성벽의 축조되었다고 파악하였으며, 이 토성이 한나라의 토성이라고 파악하였다.[17]

파일:gncqbpm.jpg
▲국내성 단면도(70년대 조사). 각 T4, T5 구간의 단면이며 A가 고구려 1차 석축, B는 고구려 2차 석축, C는 민국시대[18]. 석성 아래의 층위가 토축부인데 당시엔 이것을 한나라 토성으로 파악하였으나 2000년대 이후의 조사에서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2000년대부터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업을 계획하면서 지안시 일대의 발굴계획에 따라 국내성 성벽과 일부 성내 유적이 조사되었다. 다만 한성백제의 궁성인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 내부에 현대의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부분에 한해서만 이루어졌고 각 구간별 유적 성격이나 잔존정황이 제각각이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오녀산성의 초기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이 일부 확인되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론 4~5세기대의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체육장 유적에서는 정연한 건물지 3기가 확인되었고 그곳에서 서진~동진 초의 시유도기들이 다량 출토되어 국내성 내부 유적의 위계와 성질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뿐만아니라 국내성 성내 유적 및 성벽에서 환도산성에서 출토되는 것과 유사한 늦은 시기의 기와와 와당도 출토되어 고구려 멸망까지도 연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발해 및 요금시기의 유물도 일부 출토되지만 수량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로 진행된 여러 조사 중 성벽에 대한 조사도 학계의 주요한 관심을 끌었다. 단연 국내성의 초축시기에 대한 문제였는데, 그간 중국 학계에서는 80년대 조사에서 한나라 토성(土城)이 초축되고 그 위에 국내성 석축(石築) 성벽을 쌓았다고 추측해왔었기 때문에 그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토축시설물이 확인되긴 했지만 그것은 토성이 아닌 단순 기저부 토축 내지 보조시설 정도의 구조물이었으며, 무엇보다 한나라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기에 해당 가설은 설득력을 잃었다. 즉 지금의 국내성은 '석축(1차, 고구려)→개축(2차, 고구려)→민국시대 개축'의 순서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파일:gncxmfj.jpg
파일:gncbqmz.jpg
국내성 서벽과 서문 전경[19] 국내성 북벽의 문지[20]

그 밖에 오각형의 쐐기형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한 성벽과 치(稚), 문지 등이 조사되었다. 다만 너무 당연한(?) 것이므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아니고 되려 주목을 끌게된 것은 '국내 천도'의 시점인 AD 3년을 전후한 시점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며, 성내 유적과 마찬가지로 4세기 이후의 유물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국내성이 축조된 시기는 서기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천도 기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21][22] 향후 추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3세기 이전에 해당하는 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중 성벽 절개조사를 통해 보았을 때 적어도 현재의 국내성 성벽은 3세기 이전으로 올려볼 수 없다는 점을 토대로 성 내부에서 3세기 이전의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적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또한 조사결과 자체도 고국원왕 12년(342년)의 국내성 축조 기사와 부합하고 있기 때문에 현존 국내성이 국내성이 아닌 것도 아니다.

조사 이후에 남겨진 과제는 국내성 자체의 연대에 대한 재검토를 비롯하여 '국내' 지역의 도성사(史), 특히 국내 천도 이후부터 석축 국내성을 축조하는 사이의 상황은 어떠한지에 대한 것으로써 실제로 국내성 보고서 출간 이후 관련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 198년에 축조된 환도성, 247년에 축조된 평양성[23] 등의 또 다른 도성들과 함께 많은 논의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1년 7월조에 묘사된 위나암성의 지세가 환도성이나 국내성보다는 환인의 오녀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 초기의 국내 위나암성은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과 하고성(下古城: 하고성자토성과 같은 성)이며, 고구려의 지안 천도는 환도성이 축조되고, 고구려의 도읍이 환도성으로 옮겨간 제10대 산상왕 재위기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다. 유리명왕이 천도했다는 국내와 지안의 국내를 서로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내는 '국나'(國那)의 다른 표현으로, '국(國: 도읍)이 있는 나(那: 개천 혹은 땅)'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풀이된다. 한편 이 설에 따르면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곳은 지금은 환인댐에 잠겨 수몰된 나합성(螺蛤城)이다.[24]

이 밖에도 국내지역 자체의 고구려 왕릉의 조영은 3세기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즉, 국내지역 자체가 광의의 도성으로써 국내성 성벽보다 빨리 시작되고 있는 근거가 있으므로) 마선구 626호분, 2378호분과 같은 초기 왕릉이 자리하는 마선구 일대를 초기 중심지로 추정해 왔다. 특히 2012년에 집안시 마선향 건강(建疆) 유적의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국내성 건립 이전의 중심지가 이곳이 아닐까하는 견해들이 일부 제시된 바 있다. 유적에서는 주거지 3기, 구(溝) 1기가 확인되었고 유적 층위 지표상에서 기와 다수가 확인되었다. 기와만 놓고보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들이 초기 왕릉에서 출토되는 기와와 유사성이 많고, 주거지 내부 출토 토기들도 4세기대의 토기와 일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연대가 빠름은 분명하다. 4세기대 왕릉 및 건물지에서 보이는 와당과 기와류는 건강 유적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연대가 빠름을 설명한다. 특히 기와는 고구려가 관청과 궁궐과 같은 곳에서만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유적의 위계가 탁월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들이 실상 주거지 3기에 불과하며, 그 마저도 1기는 창고지의 성격, 1기는 일반 주거지, 나머지 1기는 훼손 정도가 심해 이것이 기와를 사용한 건물인가를 판단하기 어렵다.[25] 때문에 단정적으로 이 유적을 비롯한 마선구 일대가 국내성 건립 이전의 중심지라고 확정하기에는 자료적으로 부족한 상태이며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만 논단하고 있을 뿐이다.

고고학적 측면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물질자료가 부족한 탓에 국내성 출토 유물의 상한을 조정하거나 재검토하기 어렵다는 요인도 크다. 최근의 고구려 유적 발굴 추세를 보면 고구려 초기 유적의 발굴이 상당히 진전[26]되어 아주 간략하게 나마 대략적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주변 초기 자료들로써 향후 국내성 출토 유물에 대한 재해석 및 연대보완될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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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tablewidth=100%> [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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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 [6] 세베루스 왕조의 제2대 황제인 카라칼라가 선포한 <안토니누스 칙령> 이전 고대 로마에서 로마 시민권자와 아닌 사람을 구분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7] 흔히 고구려의 역대 수도를 국내성과 평양성 단 2개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한데, 국내성은 졸본성과 평양성 사이의 2번째 수도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졸본성이 수도로써의 역사가 너무 짧았고, 나라의 기틀도 아직 덜 잡혔던 건국 초기 당시의 수도여서 잘 알려지지 않은 통에 고구려의 역사를 배울 때도 졸본성은 아예 생략하거나 '그런 곳도 있었다' 수준으로 무성의하게 짧게만 언급될 정도로 인지도가 심히 낮고 존재감도 병풍이기 때문이다. [8] 조선만 하더라도 수도 한성부가 뚫리면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했다. 평지성과 산성은 방어도 자체가 다른데, 국가의 행정력이 집중되는 수도를 이런 산에다가 할 수는 없으니 평지에 수도를 정하고, 이를 보완하는 산성을 주변에 따로 둔 것이다. 이 외에도 고려와 조선은 이런 임시수도 역할로 바다가 해자인 강화도를 활용했다. [9] 한국사에서만 따져봐도 천도를 준비하다가 실패한 사례가 많다. 백제 제30대 무왕 익산시 천도, 신라 제31대 신문왕 대구광역시 천도, 고려 제3대 정종 평양 천도, 현재 대한민국 세종시 천도 등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기존 수도의 기득권에 막혀서 결국 실패하거나 얼마 못 가 완전 취소되었다. 천도가 성공한 사례로는 국가 건국 초기에 아직 수도의 기득권이 덜 잡혀 있는 시기거나 백제의 웅진성 천도처럼 침략에 의해 강제로 쫓겨간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백제의 웅진 천도만 해도 장수왕한테 원래 수도 위례성이 함락된 것도 모자라 아예 뺏겨버려서 어쩔 수 없이 임시로 옮긴 수도지만, 여기도 국내성처럼 너무 좁아터진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지장들이 많아서 곧 성왕 사비성으로 재천도하게 된다. [10] 예) 今勿內郡(금물내군) = 黑壤郡(흑양군), 骨衣內縣(골의내현) = 황양현(荒壤縣). [11] 예) 불구내(弗矩內) = 赫居世(혁거세) [12] '세상'과 '땅'이 동일시 되는 현상은 다른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예로 영어 earth. [13] 而의 당대 발음은 *nV로 읽어야 한다. [14] 단, 한국 고대사 분야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노태돈은 지안 지역에 서기 2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제3대 대무신왕 11년조에 묘사된 위나암성의 묘사가 오녀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을 이유로 《삼국사기》의 유리명왕대 천도 기록의 국내 위나암성은 지안의 국내성과 동일한 곳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15] 다만 바로 압록강 건너편에 있지는 않다. 건너편에 있는 도시는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이다. [16] 북한 자강도 중강군에서 압록강 건너편 [17] 중국 측의 견해가 마냥 동북공정에 입각한 것으로 보기엔 약간 애매한데, 평면이 정방형에 가까운 성곽은 동북아시아에서는 한나라 토성을 제외하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한나라 토성설이 제기된 70년대의 시점으로는 못할말 정도까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도 방형성곽이 국내성, 하고성자토성이 있고 평양에서는 안학궁성이 있으니 고구려것이라 말하는게 맞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평양성의 형태는 부정형이라는 점에서 방형성곽이 다소 특수하다 볼 여지가 있다. 또 방형이며 평지성인 '석성'이 국내성 뿐이라 발굴 이전 여건으로는 가설적인 제시를 해볼 수 있긴 했다. 단지 답습이 오래 지속되었을뿐.. [18] T5 구간에는 민국시대 수축 구간이 없다. [19] 사진 좌측의 서벽과 사진 하단의 돌출된 부분 사이로 통행하는 방식의 어긋문 구조이다. 멀리보이는 산은 북한 만포시. [20] 국내성에는 고구려 성곽의 특징인 치성이 많이 설치되었으며 현재도 많지만 원래는 더 많았었다고 한다. 특히 국내성 북측 문지엔 입구 양측에 치성을 두어 옹문구조처럼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21] 이는 백제나 신라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역사문헌의 실물검증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각 도성관련 기사가 건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다소 삼국의 존재자체가 이러한 발굴조사결과로 인해 4세기로 미뤄진다고 보는 인식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의 건국 당시, 중앙집권화가 완비된 상태로 건국이 된 것이 아니듯 각국의 도성 및 천도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예를들어 문헌에 등장하는 ~城이 넓은 의미의 공간(이를테면 한양)을 뜻하는지 아니면 구체적인 시설물에 의해 구분되는 공간(이를테면 경복궁)을 의미하는지 등을 같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또 고고학자료로 보더라도 어떤 도성의 연대를 말할땐 보통 '성벽'의 축조연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된 연구들이 도성의 개념과 운용 및 성립의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며, 현존 성벽의 초축연대가 문헌의 '천도'나 '도성'의 사용 자체와 다르다고해서 상호 부정하는 관계라 보긴 어렵다. 물론 이와는 달리 실물자료를 기록에 맞추는 역사학·고고학 연구도 있긴하지만 학계의 정설이된 경우는 없다. [22] 첨언으로, 고구려의 경우엔 다소 특수하다고 볼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엔 각 도성에 해당하는 풍납토성 월성의 초축 연대가 지금의 발굴조사로는 4세기로 파악된다. 이는 고구려와 상황이 같지만 백제, 신라는 1~3세기의 부체제, 또는 '國단계'를 어느 정도 설명해줄 수 있는 실물자료가 존재한다. 백제의 경우엔 중도식문화유형, 신라의 경우엔 영남지역 원삼국문화 내지 사로국단계라는 개념으로 그 대상이 있어 중앙집권화고 정치권력이 발전하는 4~5세기 이전의 양상을 문헌자료와 함께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되려 백제·신라의 4세기 도성의 등장은 각국의 성장과정을 설명해주는 사례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엔 기원전 1세기~3세기의 고고학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국내성이 4세기가 되면 실물자료로는 설명이 어렵게되는 문제가 상대적으로 크다고 할 수 밖에 없다. [23] 중천왕 247년에 축조한 평양성이 지금의 집안시에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를 국내성의 실질 초축연대로 보기도 한다. 다만 평양성 자체의 위치비정의 문제도 있으며, 실물자료 측면에서는 약점이 있다. [24] 출처: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 [25] 기와들 또한 층위 지표상 출토이며 주거지나 특정 유구에서 출토된 것은 극히 일부기 때문에 기와와 유구를 연결짓기 어렵다. [26] 예로 신빈 영릉남성지(고구려현 관련, 고구려 유물은 대체로 3~4세기), 통화 만발발자 유적(고구려 성립이전~고구려 성립 초기(?) 무렵.)이 있고, 본문의 건강 유적이나 왕의구 유적, 패왕조산성 인근의 북둔촌 제철유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