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01:17:29

세종(금)


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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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제5대 황제
세종 | 世宗
파일:금흥릉.jpg
흥릉 전경.

출생
1123년 3월 29일
상경 회령부
(現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아청구)
사망 1189년 1월 20일 (향년 66세)
중도 대흥부 황궁 만안전
(現 베이징시)
능묘 흥릉(興陵)
재위기간 제5대 황제
1161년 10월 27일 ~ 1189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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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7><colcolor=#ece5b6> 성씨 완안(完顔)
중국식 : 옹(雍)
여진식 : 오록(烏祿)
부모 부황 예종
모후 정의황후
형제자매 11남 중 4남
배우자 명덕황후, 광헌황후
자녀 4남 3녀
묘호 세종(世宗)
시호 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聖明仁孝皇帝)
연호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절일 만춘절(萬春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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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다2.2. 재위 당시 그림자
3. 사망 이후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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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金) 제국의 5대 황제. 묘호는 세종. 시호는 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光天興運文德武功聖明仁孝皇帝). 휘는 여진식은 완안오록(完顏烏祿). 중국식은 완안옹(完顔雍).

2. 생애

아버지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예종 완안와리타(訛里朶), 어머니는 이추와지(李雛訛只)의 딸 정의황후 이씨(貞懿皇后 李氏)이며[1] 황후는 여진족 오림답부(烏林荅部)의 수장인 오림답석토흑(石土黒)의 딸 소덕황후 오림답씨(昭德皇后 烏林荅氏).[2]

금세종의 계보를 보면 모계/인척쪽으로 발해인과 연이 좀 있는데, 우선 어머니 정의황후 이씨의 아버지 즉 금세종의 외할아버지 추와지는 발해 유민들이 집단거주하고 있던 동경요양부 출신의 발해인이었고[3] 정실인 소덕황후 오림답씨 외에도 후비로 원비 장씨(元妃 張氏)[4] 원비 이씨(元妃 李氏)[5] 그리고 유비 대씨(柔妃 大氏)[6] 등이 모두 발해인이었다. 금세종은 황제에 오르기 전에는 동경유수를 역임했는데, 가문이 동경요양부의 통치를 담당하고 거기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면서 현지의 발해인들과 인척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발해인들만 후비로 있었던 건 아니고 거란족인 현비 석말씨(賢妃 石抺氏)와 여진족인 덕비 도단씨(德妃 徒单氏) 등도 있었다.

전임 황제였던 해릉양왕[7]은 금나라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폭정이 말로 못할 지경이었다.[8] 거기에 무리하게 남송에 대한 침입을 계속하였다. 잘 됐으면 몰라도 번번히 실패하였는데 또다시 남송 침입을 해릉양왕이 계획하다가 남정 중에 자신의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이 시기 동경요양부에 있었던 황족 완안오록은 해릉양왕에 반항하는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9]에 입성하였다.[10]

원래 해릉양왕은 금세종을 미워했고, 미녀였던 금세종의 아내 오림답씨를 빼앗은 적이 있었다.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갔다가 결국 자결하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고 금세종은 자신의 보물을 해릉양왕에게 뇌물로 바치며 연명했다. 그러다가 반란군에 의해 옹립되어 해릉양왕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금세종은 오림답씨를 황후로 추존했지만 계속 그리워했고 평생 후궁들 중에서 황후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자신의 사촌형인 해릉양왕 때문에 아내를 잃었으니 더더욱 충격이 컸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도 더했던 게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황제가 된 직후 금세종은 해릉양왕을 아예 해릉서인으로 강등하였으며, 따라서 해릉양왕의 무덤은 황릉이 아니라 사막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묻어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해릉양왕의 무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다.

2.1.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다

이후 그는 1163년 남송과 평화 협정을 맺었고, 본격적으로 내치에 집중했다. 우선 1164년부터 여진 문자로 경사(經史)를 번역하는가 하면, 영토와 국방력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에도 힘을 쏟아서 금나라 최고의 절정기를 만들었다. 특히 여진 문자가 만주 지역뿐만 아니라 화북 전역으로 퍼져 수많은 책들이 여진 문자로 번역되었고, 한족도 여진 문자를 먼저 배우게 되었다. 해릉양왕 말기의 금나라의 인구는 1,900만명에 불과했는데, 1170년에 이르면 화북의 인구가 2,000만명을 넘고 금나라의 전체 인구수가 3,000만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세종 말기, 장종 초기에 이르면 무려 5천만 명에 가까운 수치까지 상승한다.

또한 옛 수도 회령부를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의 하얼빈)로 고쳐 금의 5경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성씨를 한역(漢譯)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 동경요양부에는 요양백탑(白塔)을 건설하였으며, 재정도 탄탄해져 1177년에는 하북과 산동의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11] 1187년 여진인의 한족 복식 착용을 금지하였다.

금 세종은 무엇보다 단순한 국방력 수준이 아니라 문화, 경제 등 나라의 근간이 되는 부분을 크게 발전시켰는데 화북 지방의 모든 문화재 가운데 70%가 이 시기 금나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황하의 치수 사업도 성공적으로 끝나 화북 지역의 농작물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여 정강의 변으로 황폐화된 화북 지역의 경제가 복구되었다. 얼마나 태평성대였던지 이를 일컫어 사람들이 소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고 부를 정도였다. 재위기간 동안의 연호는 대정(大定)이었다.

세종의 일화와 언행을 보면 과연 성군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조세를 면제해주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의 고통이 가중되면 안 된다고 항상 말했다.
  • 황실의 공노비와 귀족들의 사노비들을 해방시켜 평민으로 환원시켰다. 불교가 융성했던 요나라 시절부터 사찰에는 '이세호'라는 노비들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이세호들을 해방시켜 평민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상서성에서 황실 종친을 자사로 추천했지만 세종은 황족의 나이가 너무 어려 관리가 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황제의 호위를 맡았던 무인이 지방관으로 천거되었을 때도 직무에 맞지 않는 이가 민생을 살피기에 무리가 있다고 말하며 반대하였다. 이렇게 인재 등용에 있어 공정함과 백성을 생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세웠다. 무능력한 측근들이 요직에 앉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능력이 있으면 하급 관리라 하더라도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였다.
  • 개인적으로 대단히 검소한 황제였기에 송사전 금 열전에는 평소 자신의 식사 자리에도 4, 5가지 반찬만 올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신들이 황제는 평민과 다르니 반찬의 수를 늘리라고 청했지만 세종은 "천자도 같은 사람이니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대신들의 청을 듣지 않았다.[12]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양 50마리도 넘게 먹을 수 있으나 그것이 백성의 피와 땀이라고 생각하면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태자의 생일과 정월, 추석을 제외하고는 술을 아예 마시지 않았다.
  • 식사 도중에 자신의 딸이 알현을 하러 왔지만 평소에 세종은 꼭 먹을 만큼의 음식만 준비해서 먹었기에 공주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었다.
  • 음식뿐 아니라 궁전의 화려한 장식도 제한하여 궁전을 금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을 동원하는 대규모 토목 공사도 금지하였다. 궁중의 시종들을 함부로 늘리지 못하게 하였다.
  • 자신의 옷을 제후와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입은 지 3년이나 되었지만 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황실에서는 황제가 옷을 한 번만 입고 그것을 버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세종은 옷을 세탁하여 계속 입었다.
  • 불교와 도교 등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였다.[13]
  • 길거리에 술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마차로 태워 집으로 보내주었다. 또한 평소 먹던 음식 맛이 고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수라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물어보니 모친이 위독해서 모친 생각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친의 병이 다 나을 때까지 그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요양을 할 수 있게 하였다.
  • 원비(元妃) 이씨가 세종보다 먼저 죽어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에 장례식 때문에 통행 금지가 내려져 길거리가 썰렁한 것을 보고 장례식이 백성의 생계에 누를 끼치면 안 되니 통행 금지를 풀고 백성들이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명하였다.
  • 해릉양왕의 폭정을 자신이 직접 보아왔기 때문에 황족들과 신하들에게 사치를 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 것을 누차 강조하였다. 덕분에 세종 시기에 금나라의 재정은 매우 좋아졌다.

2.2. 재위 당시 그림자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여진족에 대한 혜택은 늘어난 반면 한족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 징수는 더 강화되었다.

금나라가 중원에 들어온 후부터 세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터무니 없이 부족한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이 벌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 되고, 또한 문화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군사력만으로 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에 한족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가 되어 어느 새 여진족이 자신들의 수준 낮은 문화를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 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여진족의 수렵 경제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농경으로 전환되며 그 과정에서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이 생겨난 것이다. 나태해지고 궁핍해지는 맹안, 모극이 많아졌으며 해릉양왕 때 동북 지방에서 화북 지방으로 여진족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한족과 벌이는 갈등도 심화되었다.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하던 세종은 마땅히 그들의 빈곤도 구제해야 했다. 그래서 세종은 물력전(物力錢)이라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시행한다. 이 물력전은 맹안, 모극 등 여진 특수 계층과 노비를 제외한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매긴 일종의 재산세였다. 물력전을 징수하기 위해 1164년부터 장종 시기까지 통검추배(通檢推排)라는 재산세 조사를 실시하여 물력전의 액수를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어 서열을 매겼다. 그러나 이 물력전의 실질적인 타깃은 경제적 이권을 가지고 있었던 대다수 한족이었다. 세종은 세금을 공정하게 거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재정난에 시달리던 여진족과 조정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면 갈수록 가혹하게 징세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금나라의 재정은 좋아졌지만 징세 대상이었던 한족은 큰 불만을 가졌다. 세종은 또한 거란인과 여진인의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 출신 관료 숫자를 줄이는 등의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거란인의 불만을 가져와 후에 몽골 제국의 금나라 정벌때 거란인들이 몽골에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금 희종이 했던 것처럼 국내의 발해인에게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시키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해서 발해인들의 한화를 가속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세도가의 대토지 소유를 금지시키고, 기존 세도가가 가지고 있던 토지를 여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빈부격차가 벌어진 맹안, 모극들에게 부과되는 과세를 공평하게 조정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재위 마지막 해인 1189년 금나라 몽골 남송을 상대로 양대전선이 펼쳐지면서 나라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14]

3. 사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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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9년 1월 20일에 사망했으며 그가 사망하자 적손 완안경이 뒤를 이어 장종이 되었다. 원래 세종의 황태자이자 장남이었던 완안윤공은 1185년에 사망했는데 장종에 의해 현종으로 추존되었다.

4. 여담

흥미롭게도 남송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 송효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즉위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으르렁대는 두 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같은 시대의 두 명의 황제가 다스린 것이다.

대체역사소설 왕조의 아침에서는 정치적 사례를 받고, 해릉왕에게 죽을 뻔한 주인공과 연합전선을 구축. 해릉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주인공이 길러낸 총병 전력을 탐내지만, 권세에 협력하지 않음을 내세웠기에 다음을 기약했고, 후에 주인공이 금와의 무역을 할 때에 이때의 일을 말하며,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막대한 금액을 세금으로 내며, 이를 허락한다.

한국 사극에서도 한 번 등장하는데 바로 무인시대에서다. 배우는 안치용. 참고로 이 드라마에서는 세종을 비롯한 금나라 인물들이 이민족 복식을 착용한 것으로 등장한 위의 초상화와 달리 송나라식 복식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해서 제대로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

5. 둘러보기

금사(金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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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완안합달등전(完顏合達等傳)」 113권 「완안새불등전(完顏賽不等傳)」 114권 「백화등전(白華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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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권 「완안노신등전(完顏奴申等傳)」 116권 「도단올전등전(徒單兀典等傳)」 117권 「도단익도등전(徒單益都等傳)」
완안노신 · 최립 · 이기 · 섭대기 · 적잔위흔 도단올전 · 석잔여로환 · 포찰관노 · 완안승립 도단익도 · 점가형산 · 왕빈 · 국용안 · 시청
118권 「묘도윤등전(苗道潤等傳)」
묘도윤 · 왕복 · 이랄중가노 · 무선 · 장보 · 장진 · 정안민 · 곽문진 · 호천작 · 장개 · 연령
119권 「점갈노신등전(粘葛奴申等傳)」
점갈노신 · 유천기 · 완안대루실 · 완안중루실 · 완안소루실 · 오고론호 · 장천강 · 완안중덕
120권 「세척전(世戚傳)」
석가노 · 배만달 · 홀도 · 단도공 · 오고론포로호 · 당괄덕온 · 오고론점몰갈 · 포찰아호질 · 오림답휘 · 포찰정수 · 도단사충 · 도단역 · 오림답복
오고론원충 · 당괄공 · 오림답림 · 단도공필 · 단도명 · 단도사희
121·122·123·124권 「충의전(忠義傳)」
호사보 · 특호 · 복홀득 · 점할한노 · 조규 · 온체한포도 · 와리야 · 납란작적 · 위전 · 완안선양 · 협곡수중 · 석말원의 · 백덕매화상 · 오고손올둔 · 고수약 · 화속가안례 · 왕유한 · 이랄고여열 · 송의 · 오고론영조 · 오고론중온 · 구주 · 이연 · 이덕기 · 왕의 · 왕회 · 제응양 · 출갑법심 · 고석 · 오승가 · 오고론덕승 · 장순 · 마양 · 백덕와가 · 오둔추화상 · 종탄 · 패출로복수 · 오방걸 · 납합포랄도 · 여해열알출 · 시무선 · 온체한로아 · 양지승 · 가방헌 · 이랄아리합 · 완안육근 · 흘석렬학수 · 포찰누실 · 여해열자록 · 조익 · 후소숙 · 왕좌 · 황괵구주 · 오림답걸주 · 타만사열 · 이방고포로호 · 올안외가 · 올안외출호 · 점할정 · 도단항 · 완안진화상 · 양옥연 · 오고론흑한 · 타만호토문 · 희여작 · 애신 · 우현 · 장방헌 · 유전 · 마경상 · 상형 · 출갑탈로회 · 양달부 · 풍연등 · 오고손중단 · 오고손노신 · 포찰기 · 채팔아 · 온돈창손 · 완안강산 · 필자륜 · 곽하마
125·126권 「문예전(文藝傳)」
한방 · 채송년 · 오격 · 마정국 · 임순 · 조가 · 곽장천 · 소영기 · 호려 · 왕경 · 양백인 · 정자담 · 당회영 · 조풍 · 주앙 · 왕정균 · 유앙
이경 · 유종익 · 여중부 · 이순보 · 왕욱 · 송구가 · 방주 · 이헌능 · 왕약처 · 왕원절 · 손국강 · 마구주 · 이분 · 원덕명 , 子 호문,
127권 「효우·은일전(孝友隱逸傳)」
온체한알로보 · 진안 · 유유 · 맹흥 · 왕진 · 유정 · 저승량 · 왕거비 · 조질 · 두시승 · 학천정 · 설계원 · 고중진 · 장잠 · 왕여매 · 송가 · 신원 · 왕여가
128권 「순리전(循吏傳)」
노극충 · 우덕창 · 범승길 · 왕정 · 장혁 · 이첨 · 유민행 · 부신징 · 유환 · 고창복 · 손덕연 · 조감 · 포찰정류 · 여해열수우 · 석말원 · 장구
조중복 · 무도 · 흘석렬덕 · 장특립 · 왕호
129권 「혹리·영행전(酷吏佞幸傳)」
고염산 · 포찰합주 · 소이 · 장중가 · 이통 · 마흠 · 고회정 · 소유 · 서지국
130권 「열녀전(列女傳)」
사리질 · 강주주 · 완안아로진 · 풍묘진 · 포찰명수 · 섭순영 · 장봉노
131권 「환관·방기전(宦官方技傳)」
양충 · 송규 · 반수항 · 유완소 · 장종정 · 이경사 · 기천석 · 장원소 · 마귀중 · 무정 · 이무 · 호덕신
132권 「역신전(逆臣傳)」
병덕 · 당괄변 · 오대 · 대흥국 · 도단아리출호 · 복산사공 · 도단정 · 이노승 · 완안원의 · 흘석렬집중
133권 「반신전(叛臣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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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종의 부모는 모두 세종이 황제가 되자 추존된 것이다. 세종의 어머니는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위해 세종은 오늘날의 랴오닝성 랴오양시에 광우사(广佑寺)라는 절을 지었다. 이 절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2] 세종이 즉위한 뒤에 황후로 추존하며 올린 시호이다. [3] 기록에는 성씨를 뺀 이름인 추와지라고만 싸놨지만, 추와지의 친족들은 모두 이씨 성을 쓴 것으로 나타난다. [4] 아버지의 이름은 장현정(張玄征)이고 어머니는 성이 고씨(高氏)라고 해서 발해와 직접적인 언급은 명기가 없는데, 장씨와 고씨 모두 발해에도 실존했던 성씨인 데다 금 세종의 생모로 발해인 일족임이 분명한 정의황후 이씨와는 먼 친척 관계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비 장씨도 발해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5] 아버지는 광평군양간왕(廣平郡襄簡王) 이석(李石)이며, 정의황후 이씨에게는 친정 조카다. [6] 대씨는 두말할 것도 없는 발해의 국성(國姓)이다. [7] 폭군이라 죽은 뒤 묘호를 받기는커녕 황제 대우도 못 받아서 그냥 왕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연산군, 광해군과 같은 논리다. [8] 해릉양왕항목 참조. 특히 여자 관계가 막장이었다. [9] 지금의 베이징 [10] 금사에 의하면, 해릉양왕을 죽인 부장이 새로운 황제가 중도대흥부에 입성하였다고 하자 해릉양왕은 웃으면서 "오록이 황제가 되다니! 그 녀석을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데!"라고 말하고 죽었다 한다. [11] 하북과 산동은 세종 즉위 이전에 반금 투쟁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12] 사실 신하들이 황제의 반찬 가짓수를 늘리라고 청하는 건 독살의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3] 양무제의 사례를 들어 종교에 심취했던 양 무제를 비판했는데, 정작 세종 본인도 말년에는 불교에 꽤 관심을 기울였다. 공교롭게도 조선 세종 또한 명목상 숭유억불을 추구했으나 결국 말년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으니 이 점에서 나름 평행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14] 다만 아직까지는 몽골은 그리 강한 세력은 아니었다. 칭기즈 칸이 칸으로 즉위했지만 그건 그저 카마그 몽골이라는 집단의 칸이지 메르키트, 타타르, 케레이트 등의 모든세력을 제압하고 얻은 대칸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로부터 1년 뒤 벌어진 13익의 전투에서 칭기즈 칸은 대패하고 이후로 4년간 기록이 끊긴다. 그 이후에도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정벌하고도 금나라에게서 백부장밖에 안 되는 자리를 얻을 정도로 별것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