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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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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제5대 무신 집권자 / 초대 최씨 집권자
崔忠獻 | 최충헌
파일:경성공 최충헌.jpg
{{{#white 이름}}} 최난(崔鸞)[초명] → 최충헌(崔忠獻)
출생 1149년
고려 개경 개성부 우봉군
(現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 우봉면)
사망 1219년 10월 29일 (향년 70세)
고려 안흥리(安興里) 사택 연회장
(現 북한 강원도 천내군)
시호 경성공(景成公)
작위 진강군 개국후(晉康郡 開國侯)
진강공(晉康公)
별칭 은문상국(恩門相國)
본관 우봉 최씨
가족 아버지 최원호[2]
어머니 진강국대부인 유씨(柳氏)
동생 최충수
부인 송씨(宋氏)[3], 수성택주(綏成宅主) 임씨(任氏),[4] 정화택주(靜和宅主) 왕씨(王氏)
아들 최우[5], 최향, 최성[6], 최구
묘소 고려 봉황산(鳳凰山) 서남쪽 언덕
1. 개요2. 생애
2.1. 성장과 순탄치 않았던 벼슬길2.2. 비둘기 강탈 사건과 병진정변2.3. 반대파 숙청2.4. 명종 폐위2.5. 끝없는 숙청2.6. 무신정권의 정점에 오르다2.7. 거란의 공격 당시의 행적2.8. 말년2.9. 사후와 묘지명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려 무신정권의 제5대 집권자이자 최씨 정권 초대 수장. 본관은 우봉 최씨[7]이고, 초명은 최난(崔鸞)이다.

2. 생애

2.1. 성장과 순탄치 않았던 벼슬길

고려 최고위 무관직인 상장군을 역임한 최원호의 아들로 그의 외조부인 유정선[8]도 상장군을 지낸 전형적인 무인 가문 출신이다.[9] 허나 문신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당시 부친의 뜻에 따라 글을 배워 처음에는 음서로 문관 벼슬에 진출했다. 문관이 된 후 양온령에 임명되었으며 성릉직, 위위주부 등을 거쳤다가 스스로 도필리[10]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흥위위[11], 보승[12], 산원[13]으로 옮겼다.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문관에서 무관으로 빠르게 탈바꿈했으며, 제19대 명종 4년인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부터 출세 코스를 타게 되는데 당시 무신정변에 동참한 공로로 권력을 얻었던 부원수 기탁성[14]에게 발탁되어 별초 도령[15]이 되었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흥위위 별장으로 승진했다. 1176년 지안동부사부사(知安東府事副使)[16]에 임명되면서 서리들에게 엄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관대하여 찰방사가 그 공이 으뜸이라 보고했으며[17] 임기가 끝나자 1180년 응양부[18][19]낭장[20], 1181년 응양부 낭장[21]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승진가도를 달리던 그의 관직 승진 속도는 이의민 집권기부터 쭈욱 줄어든다. 1187년 경상진주도 안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이의민의 뜻에 거슬려 탄핵을 받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용호군[22] 섭중낭장[23]에 임명되었다가 1188년 용호군 중낭장이 되었다. 1193년 감문위 중랑장, 감문위 차[24]장군이 되었다가 1194년 감문위 섭장군이 되었으며, 1195년 □□좌우위 정용 섭장군이 되었다. □□(으)로 되어 있는 것은 최충헌의 묘지에서 글자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으며 아래에 나올 □□도 동일한 이유다.

10년도 채 안되어서 낭장까지 오르다가 중랑장으로 가는 속도가 꽤나 오래 걸렸고, 이후에는 섭장군에 머무르는 것만 보더라도 이의민 집권기 때 그가 철저하게 승진 인사에서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이의민 척결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2. 비둘기 강탈 사건과 병진정변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시대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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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정변 최충헌, 최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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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정변 임연
원종의 폐위 임연
충정왕의 폐위 공민왕
병신정변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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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피화 우왕, 이성계,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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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 나라의 권력 교체가 어이없는 문제로 인해 발생했는데 이의민의 세 아들 중 차남 이지영과 3남 이지광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만행을 저질러 세간에 쌍도자(雙刀子)라는 악명까지 있을 정도였다. 1196년 4월에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민의 차남인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인 최충수가 아끼는 애완 비둘기[25]를 다짜고짜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고려사》에는 기록이 간략하여 세부적인 정황을 알기 힘들지만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었다는 기록과 이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가서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말투가 무례해 이지영이 최충수를 결박했다는 기록 등이 나온다. 격분한 최충수는 이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지영은 그 말투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종들을 시켜 그를 결박하게 했다.

그런데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장군이 나를 묶지 않는 않는다면 누가 묶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이지영은 그의 호기로운 모습을 재미있게 여겼는지 그를 풀어주었다. 끝내 최충수는 비둘기를 강제로 뺏기고 심한 굴욕을 겪었으며 이 일로 화가 난 최충수는 그 길로 곧장 형인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 부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모의한다. 최충헌이 처음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최충수는 이미 자신의 뜻은 정해졌으므로 혼자서라도 일을 치르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26] 이에 최충헌도 마음을 고쳐 종친 노석숭, 생질인 대정 박진재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이의민과 일당 및 추종 세력들을 완전히 일소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27] 이 사건이 바로 62년 동안 이어질 최씨 무신정권을 개막시킨 병진정변이었다.

다만 비둘기 탓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우봉 최씨들도 음서로 벼슬할만큼 권위있는 가문이었는데 그들의 재산을 함부로 뺏어갔으니 이의민 일가가 얼마나 앞뒤 안 가리고 다녔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또한 이의민은 본래 소금장수였던 아버지와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천민이었는데 천민 출신들이 귀족 출신의 무장들을 만만하게 보고 다닌 꼴이니 이들의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다는 것은 쉽게 느낄 만하다.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무례하게 군 일도 한 시사점인데 비둘기는 이의민 제거를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맞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추측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말로 이의민을 없애려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면 당연히 거사 직전까지는 수상한 낌새를 철저히 감춰야 하는데 최충수는 비둘기를 뺏긴 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이지영의 집에 쳐들어가 대놓고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하는 찍힐 짓거리를 했다. 거사를 준비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경솔했기 때문에 정말로 비둘기를 빼앗긴게 원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최충수의 이후 행보를 보게 되면 실제로 과격하고 충동적인 인물이다보니 생각이 없어서 거사가 발각될 위험은 생각지도 않고, 이지영의 집에 쳐들어갔거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일종의 정탐 겸 이의민 집안의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갔을 확률도 있으나 결국 진실은 본인만이 알 것이다.

이와 달리 진짜 비둘기 때문에 분노했을 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당시 권력자들이 키우는 비둘기는 보통 비둘기가 아니라 혈통좋고 유서깊은 비둘기였고, 1마리의 가격은 오늘날 고급 외제차 또는 서울 아파트 가격에 맞먹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정도의 물건을 빼앗기면 적대심이 일어나는 게 당연할 수준. 당장 전서구에 쓰이는 연락용 비둘기만 해도 현대에 10억원 수준의 가치이다. #

이후 대장군이던 이의민의 장남 이지순과 장군이던 3남 이지광은 미타산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씨 집안의 종들을 거느리고 길가에서 최충헌의 패거리와 맞붙었으나 상황이 불리해지자 달아나버렸다. 한편 비둘기 사건의 원흉이었던 차남 이지영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찾아가 태수 허대원(許大元)과 술을 마시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최충헌의 수하 한휴(韓休)에게 살해당했다. 전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곧장 경주로 부하들을 보내 이의민의 3족을 멸하였고, 이의민의 종들과 도당들까지 모두 잡아 죽였다. 앞서 달아났던 장남 이지순과 3남 이지광은 인은관으로 나아가 최충헌에게 잘못을 빌었으나 최충헌은
"이 놈들이야말로 재앙의 씨앗이다"
라고 말하며 모두 죽여버렸다. 이렇게 하여 10여 년에 걸쳐 장기 집권을 누리며 고려를 주물렀던 이의민의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확실한 것은 이의민이 당시 미타산 별장에 있었고, 10년 넘게 장기 집권 중이라 자신 외에는 큰 정적도 없었기에 방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28]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당돌하게 찾아오는 놈이 암살 음모를 꾸밀리가 없다고 이의민이 역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한 최충헌 형제의 계획일 수도 있으며, 이의민의 차남과 최충수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알리도 없고, 알았어도 해프닝 정도로 넘겼으리라 보는 것 또한 합리적인 생각일 수 있다. 최충헌은 권신 이의민을 죽인 후 감문위 섭대장군에 올랐다가 좌우위 섭대장군을 거쳐 추밀원좌승선 - 지예부상서사[29] 겸 지어사대사[30] - 태자첨사[31]에 임명된다.

2.3. 반대파 숙청

이의민을 죽이고 장군 백존유에게 이러한 사실을 얘기하면서 명종에게 죄를 청했다가 위로하자 대장군 이경유, 대장군 최문청과 함께 이의민의 남은 잔당들을 칠 것을 청했다. 평장사 권절평과 아들 권준, 평장사 손석과 아들 손홍윤, 장군 권윤, 장군 유삼상, 어사중승 최혁윤 등을 체포하여 죽였는데 이때 죽인 손홍윤의 처 임씨의 아름다움을 듣고 몰래 사통했다.

대장군 이경유도 이들의 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지자 죽였으며 상장군 길인, 장군 유광, 장군 박공습 등이 항전하자 직접 군사를 이끌어 무너뜨리고, 이들이 수창궁에서 항전해 포위하자 유광, 박공습 등은 자살했다. 개경 수창궁에서 항전하기 전에 도망간 길인은 북산에서 승려로 변장했다가 바위 아래로 투신했으며 상장군 주광미, 대장군 김유신, 대장군 권연 등을 죽였다.

그 밖에도 참지정사 이인성, 상장군 강제, 상장군 문득여, 좌승선 문적, 우승선 최광유, 대사성 이순우, 대복경 반취정, 기거랑 최형, 낭중 문홍분 등 36인을 잡아 죽이면서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했으며 판위위사 최광원, 소경 권신, 장군 권식, 장군 두응용, 낭장 최비 등을 남쪽 변방에 귀양보냈다.

오로지 대장군 최문청만이 정직하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좌승선 문적의 처 최씨가 남편의 시체를 찾아서 이고 가니 열녀라 칭송하면서 장사지내도록 했다. 조정 신하들이 많이 죽어 인심이 흉흉했기 때문에 사자를 각 도에 보내어 안심하도록 했다.

2.4. 명종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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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권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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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방(重房) 교정도감(敎定都監) 교정도감 & 정방(政房) & 서방(書房) 도방(都房) 삼별초(三別抄)

1196년 5월에 아우인 최충수와 함께 그 유명한 <봉사 10조>[32] 개혁안을 국왕인 명종에게 정식으로 건의했다.
<봉사 10조>의 내용
1. 왕이 머물던 별궁 수준인 수창궁 대신에 정궁인 연경궁으로 환궁할 것.
2.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관리들의 수를 줄일 것.
3. 불법적으로 탈취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환원할 것.
4. 불법적으로 세금을 함부로 징수하거나 세율 인상을 하지 않도록 할 것.
5. 왕실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무분별한 특산물 진상을 하지 않도록 할 것.
6. 승려의 정치 참여와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할 것.
7. 지방관들의 향리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할 것.
8. 중앙 관료들의 사치를 금하고 근검, 절약을 장려토록 할 것.
9. 너무 많이 세워진 사찰들의 숫자를 대폭 줄이도록 할 것.
10. 언론 기관인 대관의 역할을 강화하고 인물을 가려 등용하도록 할 것.

<봉사 10조>는 뜻은 좋았으나 이게 제대로 시행되어 고려가 안정화될 가능성은 낮았다. 안건을 발의한 최충헌 때문이다. 본인부터가 왕궁과 맞먹는 크기의 집을 짓고, 교정도감이라는 매우 기형적인 기관을 설치하여 관리를 등용하며 정적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등 저 내용과는 매우 거리가 먼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불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최충헌이 철저하게 저 내용을 지켰는데 이는 지나칠 정도로 세력이 커진 불교계[33]를 약화시키고 통제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을 유지해왔던 불교계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불교계는 최충헌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는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에 어김없이 절과 승려가 끼어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봉사 10조>를 올린 이후 최충헌은 본격적으로 국정 개혁에 나서 권세를 업고 부당하게 승진한 내시 호부시랑 이상돈, 군기소감 이분 등 50여 명을 쫓아냈다. 또한 소군(小君)으로 승려가 된 왕홍기, 왕홍추, 왕홍규, 왕홍구, 왕홍각, 왕홍이 등 6명은 대궐 안에서 정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절에 돌아가게 하고, 명종이 총애하는 승려인 운미, 존도 등도 본래 속해 있던 절로 쫓아냈다.

이와 같이 개혁을 착수하자 좌승선, 지어사대사가 되었고, 1197년에 '충선좌리공신'의 작호가 내려졌다. 흥왕사에서 불상이 이룩된 것을 축하하려고 했지만 흥왕사의 승통 요일과 중서령 두경승이 흥왕사에서 자신을 처단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했다.

나중에는 국왕 명종이 <봉사 10조>를 이행하지 않자 이를 알게 된 최충헌이 불만을 품었고, 아우 최충수가 왕을 폐위할 계획을 제안했다. 이에 최충헌도 받아들이며 제사를 지내어 하늘에 고했다. 그러나 이 날 저녁 천둥, 번개가 치는데다가 우박이 내렸으며, 폭풍이 불어 나무를 뽑고 담과 집이 무너졌으며 7일 뒤에 또다시 천둥과 번개가 쳤다고 한다. 아이러니한건 이런데도 불구하고 최충헌은 눈 하나 꿈쩍 안하고 태연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명종 폐위 뒤 옹립할 왕으로 최충수는 제8대 현종의 6대손인 왕진을 지지했다. 이는 최충수가 왕진의 노비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조카인 박진재가 금나라에서 왕진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왕진을 왕으로 세운다면 왕위를 찬탈했다며 트집을 잡을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이에 최충헌은 제17대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명종의 친동생인 평량공 왕민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제20대 신종이다.

1197년 9월 최충헌은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점령했다.(정사정변) 명종 폐위에 반대할만한 신하 중에 두경승을 본보기로 붙잡아 자연도로 귀양보내고 추밀원 부사 유득의, 장군 고안우, 대장군 백부공, 친종장군 주원적, 장군 석성주, 시랑 이상돈, 낭중 송위, 낭중 염극권, 어사 신광한 등 12명의 문•무 대신들과 대선사 연담 등 10여 명의 승려들도 영남으로 귀양보냈다. 그리고 왕홍기 등 소군(小君) 10여 명을 붙잡아 해도로 귀양보내며 명종을 폐위한 뒤 유폐시키고, 태자 왕오(왕숙)[34]와 태자비를 강화도로 유배보낸 뒤 신종을 옹립했다.

2.5. 끝없는 숙청

신종이 즉위하자 최충헌은 대중대부 상장군 □□, 겨울에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지주사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내시 민식 등 70인을 내쳤다. 민간에서 왕이 달애정의 물을 마시면 환관이 권세를 부린다고 하여 이를 무너뜨리고 광명사의 우물을 어수로 하였다. 신종으로부터 상장군 추밀원지주사, 정국공신(政國功臣) 삼한대광(三韓大匡) 대중대부상장군(大中大夫上將) 주국(柱國)에 임명되었으며 추밀원사 최련을 성주에 귀양보냈다.

10월에 아우 최충수가 신종을 협박하여 태자비를 강제로 쫓아내버리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고 하였다. 최충헌이 이를 말려 멈추게 했지만 최충수가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가 이를 말리는 어머니를 떠밀어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러자 분노한 최충헌은 박진재, 김약진, 노석숭과 함께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최충수가 이끄는 군사를 몰살시켰다. 최충수는 임진강 이남으로 내려가 후일을 기약하고자 했으나 파평현[35] 금강사에서 결국 추격군에게 살해당했으며 최충헌은 이 공으로 지주사 지어사대사에 임명되었다.[36]

1198년 5월 최충헌의 가노(家奴)인 만적과 다른 노비들이 반란을 모의했는데 반란 모의에 참여했던 노비 순정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율학박사 한충유에게 이를 밀고했다. 한충유는 최충헌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최충헌은 이들을 체포하여 강에 던져 죽였다. 이후 한충유를 합문지후에 제수하고, 순정은 노비에서 면하여 양민으로 삼았다.

1199년 김준거, 김준광 형제를 의심하여 각각 황주목사, 상주목사로 낮췄으며 6월에는 조정의 신하 30여 명을 강제로 은퇴시켰다. 8월에 황주목사가 된 김준거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항상 사냥을 일삼으면서 상주목사인 김준광과 모의하고, 또한 박진재의 문객이었던 신기지유 이적중이 김준거와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황주의 백성들을 뽑아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개경에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김준거의 장인인 낭장 김순영이 고하자 김준거를 잡아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처자식을 노비로 삼았다. 김준거의 아버지인 평장사 김영존은 늙었기 때문에 황려현으로 유배보내면서 어사중승 강순의, 내시 정공필을 보내 안변에서 김준광을 잡도록 시켰는데 정공필이 기은별감을 사칭해 김준광이 이를 맞아들이자 체포하여 잡아 죽이고, 도망가는 이적중도 잡아 죽였다.

이에 김순영을 장군으로 삼고, 정광필 등 5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하면서 신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었다가 병부상서 지이부사가 되어 문•무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1199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수대위상주국(守大尉上柱國)이 되었으며, 최충수의 사위인 조준이 호부시랑 우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또한 1200년 12월에 제3대 집권자였던 경대승이 운용했던 사병 집단인 도방을 부활시키고, 도방을 '육번도방'으로 바꾸어 자신의 경호를 강화했으며 추밀원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로서 경주에서 벌어진 별초군의 난을 진압했다.

이 해에 추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에 임명되었으며, 1201년 내시 이부원외랑 노관과 함께 인물을 심사하여 관직을 배치하면 신종은 수락만 하고, 2부의 판사가 살펴보기만 할 정도로 권세가 막강해졌으며, 최충헌 좌•우의 부탁을 받거나 뇌물을 받아서 뜻에 맞는 자들은 모두 관직에 앉혔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외가 친척인 노관을 총애하여 수 년도 되지 않아 이부낭중에 임명하거나, 자신의 애첩 월부를 통해 뇌물을 바친 충주판관 최효기를 내시에 소속시킨 것이 있다.

그의 권세가 컸기 때문에 용호군의 군졸인 중미가 최충헌이 보냈다고 사칭하면서 군사 도장을 이용하여 봉추의 일흥창에서 백성들을 수탈하면서 마음대로 돈을 거두었다. 중미의 탐학질은 갈수록 심해져서 나중에는 탄원서가 날아왔고, 최충헌은 이 사실을 전해듣자 가구소를 통해 중미를 붙잡아 참수했다. 이후 최충헌 자신을 사칭하는 것과 내외에 3일 동안 군사 도장을 가지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빈객들을 인도하면서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맞아들였는데 그 자리가 매우 사치로웠다고 한다.

1201년 겨울 추밀원 이부상서 어사대부가 되었으며, 1202년 10월 경주에서 반기를 들자 3품 이상의 문•무관을 모아 의논하여 병부낭중 송효성, 형부원외랑 박인석 등을 보내 설득했으나 듣지 않자 대장군 김척후 등에게 이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1202년 수태부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었다가 중서시랑평장사 이부상서 태자소사에 올랐다. 춘주에서 길이 험하여 고을 사람이 뇌물을 바치자 춘주를 승격시키고, '안양도호부'로 삼았으며 어느날 왕궁에 나가니 어사대 관리가 영접했다고 한다.

1203년 4월 노비들이 나무와 풀을 베는 것으로 대오를 나누어 동교에서 전투 연습을 하자 이들을 잡아들이도록 했으며 도망간 이들을 제외하고 잡은 50여 인을 고문하고 강에 던졌다. 1204년 급사 동정 지구수의 집에 모여 무리 30여인이 최충헌 죽이기를 모의했다는 사실을 전해듣자 지구수를 잡아들이려고 했지만 놓쳤으며, 대신 지구수의 아우인 지구영을 붙잡아 주모자가 장군 이광실인 것을 알아내자 이광실을 해도로 귀양보냈다.

2.6. 무신정권의 정점에 오르다

1204년에 신종동심좌명치리공신에 책봉했으며, 신종이 병이 심해져 아들인 희종에게 양위하자 그 해 겨울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더하여 벽상삼한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병부어사대판사 태자태사가 되었으며, 또한 왕실 소유의 토지 100결을 하사받고,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에 책봉되었다.[37]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
대략 벽상삼한 / 삼중대광 / 개부의동삼사 / 수태사 /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상장군 / 상주국 / 병부어사대판사 / 태자태사 정도로 끊어서 읽으면 된다.
  • 벽상삼한(삼한벽상공신)
    - 초기엔 건국공신, 즉 신흥사의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공신을 의미했다. 태조 신성대왕 왕건이 신흥사를 세우면서 거기에 공신당을 세우고, 건국 초기에 활약한 공신들을 그려 공신당 벽에 초상화를 걸었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이 삼한벽상공신이었다. 이후 고려 후기부턴 위의 의미뿐만 아니라 밑의 삼중대광과 합쳐져 "벽상삼한삼중대광"이라는 제1품 품계가 만들어졌다. 다만 무신정변을 주도했던 이고, 이의방, 정중부도 그들이 옹립한 명종으로부터 나란히 벽상공신에 임명되었고,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두경승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거 하나만으로는 최충헌만 두드러진다고 보기 어렵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 삼중대광
    - 최고위 향직 품계이다. 향직 품계는 9품 16등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최충헌은 1품 1등위인 삼중대광을 차지했다. 거기다가 '벽상삼한공신'호를 덧붙혀 유래없는 품계를 만들어냈다. 향직 품계는 원래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였으나 제6대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어 이를 정식 품계로 삼았다. 그래서 태조의 품계는 '향직 품계'로 명칭이 바뀌고 명예직이 되었다. 제25대 충렬왕 시기에 삼중대광을 문산계 품계로 도입했고, 벽상삼한도 붙였다가 떼었다를 반복했는데, 이는 권신 최충헌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개부의동삼사[38]
    - 고려의 문산계 품계 중 종1품 품계로 가장 높은 품계이다. 고려는 정1품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로 인해 종1품 개부의동삼사가 최고위 품계가 되었다. 향직 품계로 따지자면 삼중대광과 같은 급인 셈이다.
  • 태사
    - '수'는 수직이라 해서 행수법을 따른 칭호인데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혔다. 최충헌은 종1품이지만 태사는 정1품이니 수직이 붙었다. 태사는 원로 대신들에게 내리던 정1품 명예 관직으로 국왕의 고문직인 3사(三師)[39] 중 가장 높은 직위였다.
  •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고려 최고의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차관급 직위이다. 평장사 계열엔 네 가지 등급이 있는데,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평장사 순이다. 최충헌은 이 중 가장 높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차지했다.
  • 상장군
    - 고려에는 문관직과 무관직이 있는데[40], 문관직의 실질적 최고위직이 종1품 문하시중이라면, 무관으로서 이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 고려시대 중앙군인 2군 6위의 장들로서 정3품인 상장군이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장쯤 되고, 상장군들과 대장군들이 모이는 중방 합참의 역할을 하며, 2군 6위 중에서도 응양군의 상장군이 합동참모의장 역할을 하게 된다.
  • 상주국
    - 왕조 시대의 관직에는 품계와 실제 직위, 명예직인 3사직, 작위, 훈위가 있는데, 이 중 훈위는 공을 세운 신하를 치하하기 위해 준다. 주국과 상주국이 있으며, 상주국이 더 높다.
  • 병부어사대판사(병부상서판사 - 어사대판사)
    - '판사'는 '해당 부서의 장관'이라는 의미이며, 상서성의 6부 중 병부의 장관은 '판상서병부사'라고 불렀다. 다만 이름이 너무 길어서인지 상서성은 떼고, '판병부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현재 대한민국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 재상들이 겸직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장관은 정3품 상서이며 고려에서는 1인자가 통상 판이부사와 판병부사를 지닌다. 한편 어사대는 역시 상서성에 속한 기관으로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했으며, 대한민국으로 치면 감사원장 격이다.
  • 태자 태사
    - 태사, 태부, 태보가 천자의 스승이라면 태자태사는 황태자의 스승이다. 동궁관에 속해있는 명예직이다. 한 마디로 태자의 개인 스승인데,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국왕이 될 사람이 바로 태자인 만큼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임명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지키되 온갖 명예직과 고위 관직은 죄다 가져다가 붙여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하지만 최충헌도 이렇게 긴 관직명이 불편했는지 나중에는 그냥 은문상국(恩門相國)[41]으로 줄여서 불렀다고 한다.

또한 문하시중에 임명되면서 진강군 개국후라는 작위를 받아 식읍 3,000호[42], 식실봉 200호를 받았는데 희종에게서 항상 '은문상국'이라 불렸으며 작위만 공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1205년에 지금의 진주 지역에 진강부(흥녕부)를 설치해서 많이 털어먹으면서 관복이 아닌 평상복으로 왕궁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행차할 때는 일산을 받치게 했다. 특히 최충헌은 자신의 첩인 임씨[43]를 수성택주, 왕씨[44]를 정화택주로 삼게 했다.[45]

내전숭반 우광유를 권지합문지후로 삼았고, 성랑(省郞)이 남반의 관원이라는 이유로 관례에 맞지 않다고 하여 서명하지 않자 금나라의 사신을 독단으로 응대한 재능이 있다고 제수한 것이라 하여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 때 희종이 중서령 진강공에 임명하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206년에 중서령 상주국 판이부사가 되었고, 진강후에 봉해졌다.

1207년 5월에 외조카인 박진재가 대장군이 되어 자신을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한 시도를 하자 그를 붙잡아 다리의 아킬레스건(힘줄)을 끊어버린 뒤 벽령도로 귀양을 보냈고, 그의 문객 중에서 사나운 자는 먼 섬으로 나누어 유배보냈다. 희종이 최우의 저택에서 거처를 옮기자 어가를 맞이하여 활동(闊洞)의 저택을 바치자 왕족과 고관들이 이를 보고 다음날에 파하였는데 매우 사치했으며, 희종이 격구를 관람할 때 온갖 물품을 받았다. 이때 진강공에 봉해졌다.
박진재가 대장군이 되자, 문객의 수가 최충헌과 맞먹었으며 모두 용감하고 날쌨다. 박진재는 문객 중 관직에 임명된 사람이 적은 것을 한탄하면서 항상 원망하고 불평하였으며 술을 마시면 최충헌의 나쁜 점을 말하였다. 그리고 만약에 최충헌이 없다면 국권을 자신이 혼자 좌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최충헌을 없애고자 하여 헛소문을 퍼뜨리기를 "외삼촌이 임금을 없앨 마음을 갖고 있다." 라고 하였다. 또한 매번 문객들에게 "어찌 하루의 영화가 없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최충헌은 박진재가 반드시 자신을 해칠 줄을 알고 그를 불렀다. 박진재가 섬돌 아래에서 알현하니 최충헌이 그를 앞으로 오게 하고서 (...) 좌우에 명령하여 포박한 후, 다리 힘줄을 끊어 버리고 백령진으로 유배 보내니 수개월 뒤에 병들어 죽었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
1208년에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고, 1209년 4월에 청교역리(靑郊驛吏) 3인이 최충헌 부자를 죽이려고 하여 거짓으로 공첩을 만들어 승려들을 모았고, 귀법사의 중이 공첩을 가진 사람을 잡아 이 사실을 알리는 등 살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무신들의 의결 기관인 중방을 유명무실화하고,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그들의 당을 수색했다.

청교 사람이 우복야 한기를 무고하자 그와 세 아들을 죽였으며, 장군 김남보 등 9명도 죽이고 종자는 먼 섬에 나누어 유배보냈다. 이 때 설치한 교정도감은 실질적인 최씨 정권의 중앙 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하게 되었으며, 희재찬화협보익량공신에 봉해져서 식읍이 13,000호에 이르렀다.

1210년 3월에 익명서를 통해 직장동정 원서가 재상 우승경과 함께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원서를 문초하였다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유익겸이 벌인 소행이라 하자 서초(書草)를 찾아내어 유익겸을 섬으로 귀양보냈다.

일찍이 최충헌이 활동(闊洞)에 집을 지을 때 집 100여채를 헐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 대궐과 비슷했으며, 별당을 짓고 '십자각'이라 했는데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목 공사를 벌였기에 나라 안에서 불평이 많았다.
남자 아이, 여자 아이를 잡아 오색 옷을 입혀 놓고, 네 모퉁이에 묻어놓으면 집 기운이 없어질 것이다.
이러한 말이 떠돌자 아이를 가진 자는 이를 숨기거나 무뢰배가 아이를 잡으면 그 부모가 놀라서 뇌물을 줘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는 최충헌에게도 보고가 되었고 최충헌은 듣고는 이 소문을 부정하며 어사대를 시켜서 방문을 붙여놓았다.
인간의 목숨은 귀중한 것인데 땅에 묻어서 재앙 따위가 없어지겠는가. 아이를 잡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을 잡아오도록 하여라.
라는 내용을 붙여서 소문이 약간 없어졌다.

노인우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직언을 하자 화가 난 최충헌은 그를 인주 수령으로 낮추어 인주로 좌천시켰으며, 이후 노인우가 임기가 다 차서 왔을 때, 집 세 채에 금•옥, 전국 등을 왕부에 바쳐서 국가에서 사용하는 것에 돕자고 했다. 이때 노인우가 남겨 경비에 쓰면서 백성에게 거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권력을 부리던 와중인 1211년 12월에 수창궁에 나갔다가 국왕인 희종이 내시낭중 왕준명을 중심으로 참정 우승경, 추밀사 사홍적, 장군 왕익 등과 함께 최충헌을 암살하려고 했다.(수창궁 사변) 희종은 내전으로 들어갔으며, 내시부의 관원이 최충헌의 종자에게 분부가 있어서 음식을 하사한다고 속여서 좁은 마루로 유인했다.

그때 갑자기 10여 명이 최충헌의 종자 여러 명을 공격해서 죽이자 최충헌은 깜짝 놀라 희종에게 가서 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희종은 문을 잠그고는 듣지 않았다. 결국 쫓기다가 지주사방의 지장에 숨어서야 그들이 찾지 못했다. 뒤늦게 지유 신선주, 지유 기윤위, 상장군 김약진과 도방 군사들이 달려오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암살이 미수에 그치면서 최충헌은 상장군 정방보에게 지시하여 사약 정윤시 등 내시를 잡아 가두고 문초하여 주모자 왕승경을 비롯하여 우승경, 사홍적, 왕익 등을 알아내어 이들을 외지로 귀양보냈다. 또한 자신을 살해하려 한 희종을 폐위한 뒤 강화도에 유배보냈다가 자연도(지금의 영종도)로 옮기고, 태자 왕지는 인주(지금의 인천), 덕양후 왕서는 교동도, 시령후 왕위는 백령도에 각각 유배보냈다.

희종을 폐위시킨 뒤 최충헌은 14년 전 자신이 폐위시켰던 명종의 태자인 왕오[46]를 제22대 왕으로 즉위시켰다. 1212년 1월에 흥녕부를 진강부라 고치면서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에 책봉되었다. 강종의 뒤를 이어 1213년에 그의 아들인 고종이 제23대 왕으로 즉위하자 장군 이광유를 보내어 자연도(영종도)에 있는 폐주 희종을 교동도로 옮겼다. 이 때 별장을 옮겼는데 창검을 든 경비병이 수 리(里)에 가득 차면서 조신들 중에 따르는 이가 많았다. 처음으로 첨서 추밀원사 금의, 추밀원 부사 정배보 등이 이를 따라갔다고 한다.

1215년에 단오날에 백정동궁에서 그네를 매어넣고, 4품 이상 문•무 관원들을 초청하여 3일간 잔치를 하였다. 중방과 장군방에 행차하면 반드시 화려하게 꾸며놓고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며, 그가 돌아갈 때도 화려하게 하였다.

2.7. 거란의 공격 당시의 행적

1216년 8월에 대요수국의 난[47]이 시작되었다.[48]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는데, 최충헌은 스스로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변방에서 보고한 자가 있으면 오히려 귀양을 보냈다. 이 때문에 변방의 장수들이 해이해져서 보고하지 않았고[49], 거란이 개경까지 공격하면서 인심이 모두 최충헌을 원망하였다. 결국엔 거란군이 남진하여 개경 근처까지 오자 그때서야 오만을 떨었던 최충헌은 놀라서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삭주 분도장군 이지영이 사망하자 그의 기생인 자운선을 첩으로 삼았으며, 인구를 계산하여 공물을 더욱 징수하는 것이 이지영보다 심했는데 이에 흥화 운중도에 많이 살던 양수척(楊水尺)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에 양수척들이 거란군에게 항복하여 길을 안내하면서 기생의 무리와 순천사의 주지승려를 죽이면 나라를 돕겠다는 익명서를 보내자 최충헌은 기생인 자운선, 상림홍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세도를 믿고 방자하게 굴던 순천사의 주지 승려는 도망갔다.

그 다음에 장수들을 보내어 거란군을 막게 했는데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의 문객이라 관군은 약했으며, 집의 병사들을 사열하면서 창 끝에 은화를 매달아놓아 나라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군사를 모집하였다. 문객들 중에서 관군에 종군하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먼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싸움 연습을 보았는데 문의 계단이 높고 험하여 말이 오를 수 없자 사람으로써 말 형상을 만들면서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여 싸우게 했다.

또한 거란의 장군을 사로잡으면서 금패를 찬 형상을 거짓으로 만들어 베어버리는 쇼를 하며, 군사를 개선하게 했다. 또한 기생들을 시켜 봉래산의 선녀가 와서 하례하는 형상으로 만들어놓고, 이를 즐거워했고 은화, 명주, 비단 등을 상으로 주었다.

평주에서 거란 군사 2명을 잡아보내자 잡힌 거란의 군사가 이 달 그믐달에 개경을 치겠다고 실토했으며, 이를 듣고 선주 충위를 시켜 군사를 정돈하면서 수만의 군사들에게 자신과 아들인 최우를 호위하게 했다. 자신의 집에 군사들을 배치하면서 경계하였고, 거란군이 가까이 오자 백관에게 명령하여 성을 지키게 하면서 성 밑의 집들을 허물고 도랑을 파게 했다.

1217년 1월에 최충헌을 따라 종군한 흥왕사, 홍원사, 경복사, 왕륜사, 안양사, 수리사 등의 중들이 최충헌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거짓으로 도망가며 거란병이 왔다고 알리면서 문지기 56인을 베어 죽였다. 이들은 낭장 김덕명의 집을 허문 후 최충헌의 집으로 향했지만 최충헌의 군사들이 이들을 추격하여 300여 명의 승려를 베고 이들을 사로잡았으며, 이들을 문초하니 중군 원수인 정숙첨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화가 치민 나머지 최충헌은 성문을 닫고 도망간 승려들을 찾아내어 모두 죽였으며, 중 300여명을 남계사 냇가에 베어버렸다. 이때 시체가 매우 많아서 몇 달 동안 사람이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거란군과의 전투에 나가 있던 정숙첨은 이 사건으로 인해 압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참수될 위기에 놓였으나 아들인 최우가 최충헌에게 간청하여 처형을 면하고 전라도 하동으로 귀양가게 된다. 한편 거란병은 선의문에 이르러서 황교(黃橋)를 불사르고 퇴각했다.

2.8. 말년

1218년 1월에 낭장 김덕명이 풍수에 따라 선왕 강종의 능을 개장하는 것을 고하자 명령을 내려 날짜를 받으려고 했다. 사천대(司天臺)가 의심하여 점을 치지 않자 판사 최계량을 고란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어서 대장군 이부를 섬으로 귀양보냈다.

고종이 아들인 장군 최향 및 장군 신선주, 장군 기윤위, 장군 박세통, 장군 최준문 등에게 쌀, 명주, 비단 등을 주자 군사들을 모아 주었는데 기윤위의 군졸이 이유없이 고함을 질렀다는 이유로 자기 마음대로 명령하여 주는 것을 중지시켰다.

옛부터 도목정[50]은 연말에 하는 것이었는데 전쟁 때문에 돈으로 벼슬을 구하는 자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거란군을 핑계로 날짜를 미루었다. 1218년 정월에 도목정을 열고 뇌물을 받아 벼슬을 주었으며, 거짓으로 늙었다는 이유로 정사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을 고종이 그 뜻을 알아채고, 궤장(几杖)을 주고 나와서 정사를 보게 했다.

아들인 최우를 시켜서 사졸들에게 자신을 호위하게 했으며, 대집성 등 5인을 차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대집성은 거느리는 군사가 없었기 때문에 승려, 노예를 불문하고 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하여 크게 요란하자 이를 듣고 노하여 관직을 빼앗았다.

1219년 3월에 고종으로부터 국성인 왕씨 성을 하사받았고, 때마침 조충 김취려 거란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최충헌은 이를 시기하여 군공을 논하는 것을 주관하여 공이 있는 자인 조충과 김취려에게 상을 주지 않았다. 6월에 낭장 기인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다 들통나자 그의 목숨을 뺴앗았으며, 7월에 조충과 김취려에게 상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교위 손영 등 10명이 탄식하고, 주위 사람이 이를 고하자 격분하여 이들을 잡아죽이며 동류 100여명도 잡아다 보정문 밖에서 처형시켰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1219년 9월,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라도 하듯 최충헌은 7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자 왕씨 성을 되돌려 주면서 죽기 전에 고종에게 궤장을 반납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선행을 베풀었지만 큰 틀에서 나라가 달라진 건 없었으며, 죽을 때는 저택에서 하루 종일 풍악을 울리게 하고는 노래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임자일에 달이 화성을 침범하였다. 일관이 아뢰기를 "귀인이 죽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최충헌이 그 말을 듣고 악공 수십 인을 소집하여 종일 음악을 연주하였다. 밤 삼고에 이르러 연주를 마치기 전에 최충헌이 과연 죽었다. 시호를 경성이라 하였다. 백관은 소복을 입고 모여 장례를 치렀다. 비기와 우보, 고취, 기상이 모두 왕의 상과 비슷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6년(1219) 9월 20일
한편, 최충헌은 그의 치밀한 성격을 죽기 직전에도 잘 보여줬는데, 그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직감하고, 아들 최우를 불러서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불순한 모의를 하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너는 오늘부터 문병을 끊어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결코 부르지 않겠다."
는 말을 남겼고 최우는 그렇게 하기로 했으며, 손녀사위인 김약선에게 자신을 문병하게 했다.
최충헌이 병이 나자, 표문을 올려 관직과 사성을 사양하였다. 은밀하게 아들 최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병이 들어 장차 일어나지 못하면 형제간의 다툼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너는 다시 오지 말라." 라고 하였다. (...) 최충헌이 병이 들자 네 사람이 모의하기를 "공께서 만약 세상을 떠나시면 우리들은 반드시 최우에게 가루가 될 것이다. 막내아들 최향은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니, 큰일을 맡길 만하다. 최우가 병문안할 때를 노려 그를 제거하려 한다." 라고 하였다. 최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영공께서 병환이 위독하여 급히 공을 보려고 하십니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세번 하니 최우가 더욱 의심하여 가지 않았다.
《고려사절요》고종 6년(1219) 9월
최충헌의 말대로 그가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반란 음모가 싹텄고, 그 중에 최준문이라는 이가 있었다. 최충헌의 노비 동화가 마을 사람들과 많이 사통하자 이를 희롱하면서 "누구를 남편으로 삼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공생 최준문을 얘기하니 그를 종으로 부리다가 대정에 제수했고, 대장군에 이르러 최충헌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총애받은 대장군 최준문과 함께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 등은 자신들이 최우에게 숙청될 것이라 여겨 최우가 최충헌의 문병을 오는 틈을 타서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우가 부친이 위중한데도 문병 한 번 오지 않자 김덕명이 최우에게 이 계획을 발설했으며, 이를 모른 음모자들은 최우를 찾아가서 그에게
"아버님께서 위중하셔서 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라는 전갈을 전했다. 최우는 대뜸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보내어 도중에 최준문을 죽여버렸는데, 이는 앞에 나온 부친 최충헌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에 한 일로 죽은 뒤의 일까지도 생각했던 최충헌의 치밀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다만 권력을 두고 최우와 최향간의 사이가 나빠서 어떻게든 중재를 해서 좋게 하려고 했지만 형제관계가 좋아지지가 않았고 이 문제로 말년까지 골치아파했다. 결국 그가 죽고 나서 최향이 형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홍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로 귀양가고 귀양지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당하고 감옥에서 사망하게 된다.

3명의 부인을 두었고 자식으로는 5남 1녀가 있는데 상장군 송청의 딸과 결혼하여 얻은 아들 최우, 최향, 딸 1명인 2남 1녀가 있고, 임씨에게서 최성, 왕씨에게서는 최구와 아들인 2남을 두었다.

2.9. 사후와 묘지명

본인 묘지명엔 1219년 12월 24일, 고려 봉황산(鳳凰山) 서남쪽에 묻혔다고 한다. 허나 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크게 지었을 게 분명하지만 1258년 무오정변으로 최씨 정권 붕괴 이후, 훼손 내지 파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우봉 최씨 정권의 횡포 때문에 고려 왕실과 신하, 백성 전원이 최씨 정권을 증오한터라 최충헌의 무덤이 무사할 수가 없다.

제9대 집권자였던 김준이 최충헌의 증손자 최의를 살해하여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이후, 공신전에 있던 최충헌의 공신 화상은 제거되었고, 묘정에 배향되어 있던 위패 또한 철거되었다.

현재 우봉 최씨는 전국에 300명이 채 되지 않는데 일단 우봉 최씨의 시조가 최충헌의 아버지 최원호인데다 최원호의 장남이 최충헌, 둘째이자 막내가 최충수였는데 정권다툼 속에서 최충수가 살해당하여 방계 혈통이 남을 수가 없었고, 최씨 정권 붕괴 이후 천하만민의 분노와 증오를 사 거의 멸족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현재 수가 매우 적다.

최충헌이 봉작받은 진강공(晉康公)의 '진강'은 진주의 고호(古號)로, 진주 최씨로 본관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으나 《진주 최씨 족보》를 보면 간신 최충헌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51]

사후 최충헌의 봉지인 진주는 계속 세습되어 손자 최항까지 이어졌다. 대신 고려는 작위 세습을 금지했기 때문에 편법으로 같은 지역을 다른 명칭으로 봉했다. 최충헌은 진강, 최이는 진양, 최항은 진평.

<최충헌 묘지석>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5층 한국문화재 전시실에 崔忠献墓誌(チェチュンホンぼし)[52]라는 타이틀로 전시되어 있다. #

판독문/표점문/번역문은 링크 참조. #

묘지명 상단에 기록된 최종 관직 및 품계:
  • 공신호: 익성정국[53]동심좌명치리우모일덕안사제세[54]희대찬화협보익량상집[55]주번[56]한주[57]당경[58]광찬우익 복벽[59] 재조[60]격천관일늑정기상문경호위향리석안산기촉물전수결승한광한상악강천수[61]평행보아정전서일금려미매속사득체선?명?질주택초대외소회반국[62]정세[63]제빈[64]인사[65]보상[66]광구총관?사종덕화민게부재성제천보애변리미윤촉유정원공신[67](翊聖靖國同心佐命致理訏謨逸德安社濟世熙載賛化夾輔翼亮商楫周藩漢柱唐鏡光賛羽翼復辟再造格天貫日勒鼎紀常文經虎緯嚮理措安先機燭物轉籌决勝寒纊旱霖嶽降天授平衡保阿定典畫一金礪羹梅練事得軆先?明?叱秦吒楚大畏小懷磐國鼎世帝賚人師輔相匡救揔管?事種德和民啓沃裁成濟川補哀燮理𦇯[68]綸燭幽定遠功臣)
  • 향직 품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69]
  •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70] - 특진(特進)[71]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72][73]
  • 수직: 수태사(守太師)
  • 직위: 중서령(中書令) - 상장군(上將軍) -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 훈위: 상주국(上柱國)
  • 작위: 진강공(晋康公)
  • 식읍: 10,000호
  • 식실봉: 2,000호
  • 시호: 경성공(景成公)

<최충헌 묘지명>과 《고려사》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 <최충헌 묘지명>은 최충헌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했다. 손자인 <최항 묘지명>에도 최항이 '훙'했다고 나오는데 당시 최충헌의 권세가 어떤지 알 수 있다. 사실상 제후왕이었던 셈이다. 한편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그를 명분 없는 권신으로 여겼는지 죽음을 '졸'(卒)도 아닌 '사'(死)로 표현했다.[74]
  • 아들 최이가 '부추공'(副樞公)으로 등장한다.
  • <애책>(哀冊)을 언급했다. 《고려사》엔 <애책>을 만들었단 기록이 없다.
  • 조부를 '왕부'(王父), 증조부를 '증왕부'(曾王父)라고 했다.
  • 본인이 명종을 내쫓은 걸 명종이 신종에게 양위했다고 표현했다.
  • 희종이 자신을 죽이려 한 걸 자신을 질투한 간신이 한 것으로 돌렸다.
  • 《고려사》엔 최충헌의 장례식이 왕의 장례식과 동일했다고 직설적으로 기록했으나 <최충헌 묘지명>은 기존의 제도와는 다르게 했다며 에둘러서 표현했다.
  • 고려 500년 역사상 가장 긴 공신호를 가졌다. 고려를 상, 주, 한, 당으로 비유해 자신을 상의 노, 주의 제후, 한의 기둥, 당의 거울로 표현하고, 자신이 임금을 되찾으며 국가에 '재조지은'을 베푼 공신으로 묘사했다.

3. 평가

62년 동안 이어진 우봉 최씨 정권의 초대 집권자로 생전에 진강후(晉康侯)에 봉해져 3대가 세습했다.[75] 본인뿐만 아니라 4대손까지 무신정권 집권자로 세습에 성공한 권력 장악 측면에서는 가장 성공한 무신정권 집권자로 허수아비 왕 아래 명분상으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실제로는 고려의 최고 실권자로 1196년 4월의 병진정변 성공 이후 죽는 날까지 군림했다. 실제 최충헌 이전의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무신 집권자들은 기회만 잘 잡아서 기존의 집권자를 죽이고 권력을 쥐는 형태였다면 최충헌은 최씨가 대를 이어서 장기 집권하는 막부 체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76] 그러나 최충헌은 본인의 정치 감각과 잔인한 반대파 숙청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고, 자신과 우봉 최씨 가문의 권력을 극도로 끌어올렸으나 <봉사 10조>를 내건 초창기 시절 정도를 빼면 갈수록 방탕해져 말기로 갈수록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힘쓰는 모습만 보이며 왕실을 겁박해 오늘날에는 개혁가보다는 이름난 권신으로 그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사에서 신하의 직위로 전무후무한 막대한 권위를 가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최충헌과 최씨 집권자들[77]을 가리키는 영공(令公)이라는 칭호이다. 최씨 정권 이전에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 등을 가리키는 칭호였던 '영공'이 최충헌의 집권과 정권의 안정화 이후 최충헌 1인만을 가리키는 칭호로 변하고, 이러한 관습이 후대에도 이어졌다는 것이 고려에 대한 최충헌의 거대한 영향력을 보여준다.[78]

100여 년 뒤에 위화도 회군을 거쳐 실권을 장악했었던 이성계와 비교해도 최충헌의 권세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비롯한 우봉 최씨 정권의 후계자들은 군주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고려 왕조의 지지 기반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79] 최충헌의 지지 세력 역시 그를 왕위에 올리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한 예로 최충헌과 결탁한 문벌귀족들은 무신정권 초반기 암흑기를 보냈으나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최씨 집권기 때는 무신 가문들과 혼인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세력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는데 고려라는 틀을 지키기를 바랬지 새 왕조 개창을 바라는 집단은 아니었다. 이들이 완전히 몰락함은 대몽항쟁을 지난 원 간섭기 때로 이 시기에 자신들의 자산이었던 토지가 작살나고, 권문세족들에게 실권을 모두 빼앗기면서 사라져갔다. 문벌귀족이 사라짐은 무신정권 이래로 외척이 못 나왔던 탓도 있다.[80]

지방 호족이었던 전주 이씨 가문의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왕조를 뒤집어엎기를 바란 신진 사대부의 지지와 그의 개인 영지를 기반으로 한 사병, 즉 가별초 덕분이었는데 최충헌은 그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고, 개인적인 면모를 봐도 이성계는 단순히 지배층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올라간 것이 아닌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으로서의 면모 또한 갖추었기에 민심도 확보하고 있었지만 최충헌은 그런 업적이 전혀 없었다. 심심하면 홍건적, 여진족,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이 이어지고 왕실이 민심을 상실한 고려 말기와는 달리 최충헌 대에는 무신정권 이후로 착취가 심해져서 민란이 자주 일어나기는 했지만 외부의 침입은 거의 없었기에 아직 국가 시스템 자체는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81]

최충헌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고구려 연개소문이나 제8대 현종 때의 강조와 비교해볼 때도 차이가 나는데, 두 사람은 군주를 시해하는 과정을 거쳐 권력을 차지했지만 탄탄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군주도 함부로 몇 번씩 갈아치우지도 않았다. 연개소문은 비록 후계자 선정 때문에 빛이 바랜 측면은 있으나 양면전쟁의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안시성 전투 사수 전투에서 세계 제국 당나라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성공을 거두면서 전쟁 지휘에 있어서는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조 역시 솔선솔범해서 전쟁에 나섰고, 비록 요성종에게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여 사로잡혔지만 죽음을 앞두고 국문을 당했을 때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에 반해 최충헌은 보신에 급급했고, 자신의 안위에 문제가 되면 군주도 여러 번 갈아치웠다. 권세는 대단했지만 그건 오로지 자신이 고려의 무관직을 가졌기 때문에 가질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장 가지고 있는 군사력도 군벌로서 가진 군대가 아니라 국가의 군대였으며, 가진 경제력도 일천했기에 재물과 사병을 모으려고 그렇게 악착같이 토지와 인력을 긁어모은 것이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타도할 때 내세운 명분이 군주 시해범이라는 것이었는데, " 의종을 시해한 범인을 제거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이 그의 쿠데타를 용인한 주된 이유였다. 그 말뜻은 즉 최충헌 본인도 이의민과 같이 군주 시해를 저지르면 타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도 담겨있으며 군주 시해에 대한 사회적 반발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군주를 시해하지 않고 양위받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어지간한 군주들은 살해 협박에 내몰려도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사직을 자기 대에서 남의 손에 넘기는 선택은 필사적으로 거부한다.[82] 허수아비 군주지만 그 존재를 무시하기에는 고려 왕실을 지탱하는 기득권 세력도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전통적인 문벌귀족들이었으며 귀족이라는 정치 세력의 대표자가 바로 군주였다. 귀족들이 동조해주지 않는 한 최충헌 스스로 군주를 시해하거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기에 오히려 군주를 앞세워 귀족들을 통제하는 편이 권력을 유지하는데는 훨씬 유리했다.[83]

또한 최충헌은 이전 집권자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은 모습을 보이는데, 문신들을 적대하면서 딸을 태자비로 보낸 이의방의 몰락을 두고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멀쩡한 태자비를 쫓아낸 최충수의 행동을 두고 " 이의방이 어떻게 됐는지 잊었냐?"라고 하며 정중부가 했던 문신들과의 결탁을 그대로 따라해 문신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었으며, 경대승의 도방을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 폐지해버린 중방을 대신하는 새로운 통치기관으로 삼았으며,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이 받던 수많은 불이익들을 교훈 삼아 명종과 희종을 시해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이전 집권자들의 장단점들을 참고한 것이 티가 나게 보인다.

4. 기타

  • 무신 집권자 중에는 아들인 최우와 함께 드물게 시호를 가지고 있는데 시호는 경성공(景成公)이다.
  • 최충헌의 죽음으로 무신정권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이 시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무신정권 전체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의민까지를 형성기, 최씨 정권을 안정기, 최의의 뒤를 이은 김준부터를 무신정권 붕괴기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최충헌은 형성기를 끝내고 안정기를 수립한 인물이 된다. 사실 최충헌이 죽는 1219년은 무신정변이 일어난지 49년이 되는 해이다.
  •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권신이라고 평가된다. 영의정을 세 번 하고 군주의 장인을 두 번한 한명회 정도가 그나마 범접하는데, 한명회도 자신의 권세를 후손들에게 이어주지는 못했는데 최충헌은 그걸 해냈다. 보통 이 정도 권세를 누리는 자는 왕조를 뒤집어엎고 본인이 군주를 꿈꾸는 경우도 허다하나 그는 죽는 날까지 고려의 신하로 머물렀다. 이 점은 여러 추측과 이견이 난무하는 한국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 무려 46자나 되는 엄청나게 긴 관직명으로 인해서 2005년 4월 9일에 KBS의 스펀지에서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룬 적이 있었다.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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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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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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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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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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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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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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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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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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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우왕) ( 신창(창왕)) }}}}}}}}}}}}

[초명] [2] <최충헌 묘지명>에 따르면 '벽상찬덕영렬좌성공신 - 삼중대광 - 개부의동삼사 - 검교태위 - 수사공 - 중서령 - 판호부상서사 - 익정공'으로 추증됐다. 《고려사》에 따르면 생전에 '상장군'을 역임했다고 한다. [3] 최우 최향의 친모. [4] 정안 임씨(定安 任氏) 임부의 딸로 최성의 친모. [5] 후에 '최이'로 개명. [6] 후에 '최전'으로 개명. [7] 경주 최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설도 있긴 한데 사실 이건 모든 최씨를 경주 최씨를 대종으로 하는 단일 계보로 구성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선계는 불명이다. [8] '금자광록대부 - 중서령 - 상장군'을 역임했다. [9] <최충헌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부 최주행, 조부 최정현도 관직을 지냈지만 높은 관작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니 아버지인 최원호가 상장군을 역임하며 우봉 최씨 가문이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0] 刀筆吏. 아전의 낮춤말이다. [11]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중 6위. [12] 위 밑에는 정용과 보승으로 나뉘었다. [13] 하위 무관직. [14] 행주 기씨이다. [15] '별초'는 소대 같은 부대명, '도령'은 소대장 같은 직위. [16] 외직으로 안동도독부의 차관. [17] 다만 최충헌 찬양 일색인 <최충헌 묘지명>의 내용이라 신뢰성은 떨어진다. [18] 응양군의 다른 말. [19] 임시로 맡았다는 표기. [20] 하위 무관직. [21] <최충헌 묘지명>에는 '진'낭장이 됐다고 하는데 이는 전에 낭장직을 '섭'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22] 2군 6위 중 2군. [23] 중낭장은 장군 바로 아래인 무관직. [24] 임시인 '섭'직보다 더 낮은 '빌렸다'는 뜻. [25] 무슨 비둘기였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당시 무신들이 쓰던 연락용 비둘기인 전서구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KBS1 <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고려시대에 전서구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관상용 비둘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26] 《고려사》의 <이의민 열전>과 <최충헌 열전>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에 최충수가 최충헌을 찾아가 권신 이의민을 없애겠다는 뜻을 밝히고, 바로 얼마 뒤에 이의민 일파가 제거를 당한다. "도저히 못 참겠으니 군사를 준비하자!"라기보다 드라마 < 무인시대>처럼 일찍부터 이의민을 제거하려 준비했으며, 비둘기 사건은 빌미이자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격'에 불과하다고 봐야 자연스럽다. [27]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는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을 암살했을 때의 정황을 제법 상세하고도 극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의민은 명종이 보제사로 행차할 당시 병이 들었다면서 행차를 호종하지 않고, 미타산의 별장에 들어가 머물고 있었는데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 외조카 박진재, 부하 노석숭 등과 함께 칼을 소매 속에 숨긴채 미타산 별장의 문 밖에서 이의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의민이 외출하려고 별장의 문을 나서 말을 타려고 하자 최충수가 갑자기 들어가서 이의민을 칼로 쳤으나 맞지 않았다. 그러자 최충헌이 곧바로 나아가 이의민의 목을 단칼에 빠르게 베었다. 당시 이의민을 수행하던 수십 명의 종자들이 있었으나 이의민의 머리가 날아가는 광경을 보고 겁을 내며 모두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상황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28] 이는 무신정권 제2대 집권자였던 정중부 일당이 제3대 집권자인 경대승 일당에게 기습당해 한순간에 몰락한 기해정변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29] 상서성 예부의 차관. [30] 어사대의 3관. [31] 태자부의 관직. 당시 태자 왕숙. [32] '<시무 10조>'라고도 부르는데 제6대 성종때의 최승로가 올린 < 시무 28조>와는 다르다. [33] 당시 고려의 절들은 단순한 절이 아닌 사실상 중세 봉건 영주와 같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절에서 왕실과 문벌귀족들의 비호하에 광활한 농장을 소유하고, 수백 명 단위의 노비들까지 소유했다. 물론 이 노비들은 무장을 시키자마자 바로 사원 세력의 무력이 될 수 있는 사병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실제로 최씨 정권 내내 사원 세력들이 수백 명 단위 이상의 반란을 지속적으로 일으켰기에 최씨 정권의 골칫거리였다. 또한 최씨 정권의 기존 교단 탄압 정책은 그 동안 왕실과 귀족의 비호를 받으며 고려의 주류 교단 자리를 유지하던 교종 계통 교단을 쇠퇴시키고, 선종이 고려의 주류 교단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34] 강화도에서 14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최충헌이 제21대 희종을 폐위시키면서 왕으로 옹립되었다. 14년 전 자신의 아버지 명종을 폐위시킨 사람한테 옹립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60세로 고려 역대 국왕 중에 최고령 즉위였다. 하지만 강종은 즉위했을 때 건강이 좋지 못해 왕이 된지 얼마 안되어 붕어한다. [35]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36] 최충헌도 친동생을 죽이는게 결코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추격꾼들이 최충수를 죽여서 돌아오자 이를 꾸짖고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냈다고 한다. [37] 자기가 가진 실제 권력에 비해 그 권력을 공인받는 정통성은 약하거나 불안한 경우에는 이처럼 관직과 작위를 화려하게 꾸며서 그 결여를 메꾸려는 경향이 있다. 최충헌이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합당한 이유는 없었으므로, 관작을 잔뜩 붙여서 권위를 높인 것이다. 신라에서 독립하기 직전의 견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자칭 관작이 무척 화려하고 길었다. [38] 단어 의미를 그대로 풀자면 '개부'(開府)는 부, 즉 ' 막부를 열 권한이 있다'는 뜻이었으며, '의동삼사'(儀同三司)는 의전을 3사와 동급으로 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3사는 상징적인 최고위 재상인 3공(三公)을 의미한다. 즉 최고의 권위에 실질적인 인사권력까지 누린다는 의미이다. [39] 태사 > 태부 > 태보. [40] 문관직과 무관직의 품계도 문산계, 무산계라 해서 구분된다. 하지만 고려는 문관과 무관 모두 문산계를 적용했다. [41]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신하가 아닌 상국(국가의 큰 어르신)으로 대접한다는 호칭이다. [42] <최충헌 묘지명>에는 식읍 1,300호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43] 손석의 아들 손호윤의 아내였으나 미녀라서 최충헌이 남편 손호윤을 죽이고 첩으로 삼았다. [44] 왕도인으로 강종의 서녀이다. [45] '택주'(宅主)는 당시 고려에서 왕녀에게만 붙이는 칭호였는데, 최충헌은 왕녀도 아닌 자신의 첩한테 왕녀의 칭호를 붙여 왕족의 지위로 격상시킨 것이다. [46] 초명은 왕숙 [47] 이때 거란족 여진족 북송의 협공으로 나라가 멸망한 상황이었다. 잔존 세력이 압록강 근처로 도망쳤고, 이후 고려를 침공한 것이다. [48] 이때는 몽골의 칭기즈 칸이 여진의 금을 침공한 시기였고 금 선종은 중도에서 변량으로 천도했다. 이에 포선만노 동진국을 세웠고 거란족의 야율유가가 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동요를 세웠으나 이후 친몽적인 성향을 지닌 아율유가에 반감을 품고 야율유가를 몰아낸 뒤 후요를 세웠다. [49] 2~3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보고하기로 했다. [50] 매년 행하는 인사행정. [51] 진주 최씨의 인구는 약 8,400여 명으로 우봉 최씨보다 28배 많다. 진주 최씨의 경우는 한국전쟁 이전에 평안도를 중심으로해 현재의 북한 쪽에 많이 살고 있었다. [52] 최충헌 묘지. 일본식 한자를 사용하여 獻을 献으로 표기했다. [53] 나라를 안정시킴. [54] 손자 최항도 제세공신호를 가졌다. [55] 상나라, 즉 고려의 '노'와 같은 공신. [56] 주나라, 즉 고려의 제후와 같은 공신. [57] 한나라, 즉 고려의 기둥와 같은 공신. [58] 당나라, 즉 고려의 거울와 같은 공신. [59] 고려의 임금을 회복시킨 공신. [60] 즉 고려가 크나큰 은혜를 입은 공신. [61] 하늘의 뜻을 따른 공신. 태조 왕건의 연호이기도 하다. [62] 나라의 반석이 되는 공신. [63] 세상을 받치는 공신. [64] 황제가 아끼는 마음을 표하는 공신. [65] 사람의 스승인 공신. [66] 보좌하는 재상인 공신. [67] 기나긴 미칭을 가진 정원공신호. [68] 糹+彌(꿰멜 ). 모바일에서는 글자가 깨진다. [69] 삼중대광은 9품 16등 향직 중 1품 1등 품계다.앞의 벽상삼한은 '벽상삼한공신'을 의미하는데 최충헌이 둘을 합쳐버린 것이다. [70] 종 1품 품계. 최고위 품계이다. [71] 정 2품. [72] 종 2품. [73] 최충헌은 위 3개의 최고위 품계를 모두 독차지했다. [74] 천자는 '붕'(), 제후는 '훙'(), 사대부는 '졸'(), 나머지는 '사'()로 죽음을 표현한다. [75] 손자 최항은 사후에 세습됨. [76] 실제 몽골이라는 외부 변수(약 40여 년간의 여몽전쟁) 때문에 최씨 정권이 무너지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이어졌을지 알 수 없다. 이 경우 변수에 따라서는 훗날 조선의 이씨 왕조가 들어서는게 불가능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 역사상 첫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 역시 이 시기쯤 태동되었고, 똑같이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과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의 무신정권은 붕괴되었고, 막부는 일단 태풍의 힘으로 여몽 원정군의 침략을 막아냈으나, 방어전이라 전리품이랄게 없다보니 보상(토지)을 지급하지 못하여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고, 참전무사들은 불만을 표출해 이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이후에도 막부 시대가 이어졌다는 것이 한국(고려)와 일본의 차이지만. [77] 최충헌과 그 이후의 최이, 최항, 최의 등. [78] 현대의 각하라는 호칭이 대한민국 대통령만을 상징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 당시 황제는 폐하, 왕은 전하, 훗날의 조선 정승들이 합하였다면 고려시대 호칭도 영공 전하(令公 殿下) 또는 영공 저하(邸下)였다. 왕족인 제왕들은 "영공 전하", 신하들이 제왕의 반열에 오르면 "영공 저하"라는 경칙을 받았다. "상국 각하"라는 말은 고금상정예문에는 없다. [79] 비슷한 경우로 청나라 말기 위안스카이가 군주가 되었다가 민심의 반발로 3개월만에 쫓겨난 예를 보았을 때 설익은 왕위 찬탈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또한 고대에도 왕망이 무리하게 역성혁명을 하여 신나라를 건국했다가 15년만에 패망한 사례도 있다. 이렇게 쭉 간 게 일본 쇼군 막부 체제이다. [80] 원 간섭기에는 왕후 원나라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황실의 공주였다. [81] 그런 상태에서는 군주를 하고 싶어도 실제로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끔살당하거나 나라가 쪼개질 판이었으니 도저히 할래야 할 수가 없었던 것. [82] 조정의 여론을 완벽히 장악한 이성계의 선위 요구를 받은 공양왕조차도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했는데 조정의 여론을 그만큼 장악하지도 못한 최충헌에게 고려 군주들이 옥좌를 넘겨줄 리가 없었다. [83] 군주라는 존재가 마냥 걸림돌은 아니었던 것이 정권 유지를 위한 방파제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한 예로 신라부흥운동과 같은 반란을 진압할 때에는 고려 왕실과 군주의 존재가 반란 진압의 중요한 근거이자 명분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