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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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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진골 출신 인물

1. 개요

진골()은 신라의 계급체계 골품제에서 성골의 바로 아래 계층이다.

2. 특징

초기에는 왕위계승권이 없었던 고위 귀족층으로 추측되나 신라 중기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의 대가 끊기자 진골 출신인 상대등 김알천이 김춘추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후 왕위계승권까지 가진 통일신라시대 최고위 귀족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진골을 왕족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폭넓은 계층이었다. 진골은 왕족 외에도 중고(中古)시대의 왕비족에 해당하는 유력 가문, 신라에 병합된 큰 국가의 왕족들에게도 주어졌다. 금관가야 왕족 후손인 김유신의 집안 김해 김씨도 진골이었다. 이처럼 왕성 이외의 다른 성씨들도 진골에 포함되어 있었다.

국성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진골인 것은 아니었다. 김씨( 경주 김씨)나 박씨 중에서도 6두품인 경우가 있었다. 진골 집안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왕실과 혈연적으로 멀어지면 족강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신라 하대로 가면 왕성이라 하더라도 진골보다 6두품인 경우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김씨의 경우에도 6두품이 많았다. 이처럼 같은 성씨 안에서도 진골, 6두품 등 계층이 갈렸고, 진골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

막장 상황이었던 9세기 신라 하대에는 대를 이어가며 계속된 끝에 진골의 숫자가 너무 늘어나, 특권이 군주의 근친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며 진골끼리의 동질감이 떨어지고 분화, 결국 서로간에 왕위를 두고 열심히 싸우게 된다.

대부분의 진골은 신라 초창기부터 귀족이었던 자들이 대물림하면서 내려오는 지위였지만 다른 국가 출신으로서 최상급인 진골에 편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실이 진골에 편입되었는데, 이것이 이후 김유신의 가문이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던 안승 보덕국왕의 직책을 받으면서 진골이 되었고, 탐라국왕으로 귀화한 양부에게도 진골을 주었다. 또, 대조영 발해를 건국한 이후 신라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신라가 사여한 벼슬이 대아찬으로써 진골의 품계이니 대조영을 진골로 인정한 경우가 된다. 금관가야 왕족의 경우 문명왕후를, 탐라왕족출신 진골 대각간 양품의 딸은 선덕왕의 부인 구족왕후를 배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골 호족[2] 출신으로 말갈족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다 전사한 소나가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잡찬을 추증받아 유일무이한 평민 출신 진골이 되었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이 표현이 비유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문서 참고

3. 진골 출신 인물


[1] 초기 화백회의를 창설하고 주도했던 6촌의 촌장 가문들도 진골이었을 개연성은 있다(ex. 경주 이씨). 사료의 미비로 이들의 본가가 계속 진골이었는지 아니면 가문 전체가 족강되었는지 확인하기 힘들다. [2] 경주나 심지어 오늘날의 경상도 출신도 아닌 충남 천안 사람이다. [3] 이에 관한 설은 해당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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