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08 13:35:35

황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황제(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문화권에 따른 황제의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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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초대 황제
시황제

1. 개요2. 어원3. 상세
3.1.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3.1.1. 중국3.1.2. 한국
3.1.2.1. 고조선3.1.2.2. 고구려, 백제, 신라3.1.2.3. 발해3.1.2.4. 고려3.1.2.5. 조선3.1.2.6. 구한말3.1.2.7. 현대
3.1.3. 일본3.1.4. 베트남3.1.5.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사한 칭호들
3.2. 유럽
3.2.1. 고대 로마3.2.2. 중세
3.2.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3.2.2.2. 번외: 교회의 인정
3.2.3. 근대 이후
3.2.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3.2.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3.2.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3.2.3.4. 19세기 서양에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
3.3. 인도3.4. 서아시아3.5. 중앙아시아 유목제국3.6. 아프리카3.7. 아메리카
4.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
4.1. 한국4.2. 스페인4.3. 비잔틴 제국 부흥운동4.4. 불가리아4.5. 이탈리아4.6. 추존 황제
5. 참칭 황제
5.1. 중국5.2. 한국5.3. 일본5.4. 베트남5.5. 러시아5.6. 미국5.7. 세르비아5.8. 루마니아
6.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7.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8. 같이보기



1. 개요

Emperor[1]/ 皇帝

자기 휘하의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지를 통치하는 제후를 거느리고 다스리는 군주(君主)이자 군주들 중 가장 높은 권위와 지위를 지니는 군주중의 군주이다.

일반적인 왕 또는 그 이하의 군주들과 달리, 명목상 또는 실질적으로 다른 국가의 군주인 왕을 자신의 밑에 둘 수 있다는 점이 황제와 왕의 차이점이다. 자신의 휘하에 왕을 신하로 둘 정도면, 그 영토 또는 정통성의 스케일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다만 황제라고 해서 항상 영토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나라의 군주를 해당 문화권의 주변 국가들이 자기네 군주들보다 실질적인 국력이나 권위 면에서 한 수 위라고 널리 인정한다면 그 칭호가 해당 문화권의 황제의 칭호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각 국민국가들이 기존 황제국의 정통성과는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는[2] 근대 이후가 아닌 그 이전의 황제 칭호는 주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대국의 역사와 결부된다.

21세기 기준으로 호칭이 emperor인 군주는 일본의 덴노가 유일하다.

황제라는 단어는 영어 어휘인 Emperor의 번역을 위해 쓰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천자(天子)[3]라고도 한다.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황제와 Emperor의 개념은 완전히 같지 않다.

유럽의 황제는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군주만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호칭이다. 동서 로마를 제외하고 로마의 후계를 자처한 황위는 총 3자리.
  • 러시아의 차르는 모스크바 대공이 동로마의 마지막 공주와 혼인하며 로마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차르는 라틴어 카이사르에서 온 명칭인데 일반적으로 로마의 황제로 번역되는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가 아니다. 이 명칭은 3세기에 로마 황제의 자리를 분할하면서 부제(副帝)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로마의 황제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하다. 다만 러시아의 군주 명칭은 다른 슬라브 국가들의 군주 명칭으로 차르가 이미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후에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로 바뀌기는 한다.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프랑크 왕과 독일 왕이 서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 교황에게 로마의 후계임을 인정받으며 얻어낸 작위이다. 서기 800년에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가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신성 로마 제위는 중프랑크의 왕 로타리우스 1세가 가졌고, 로타리우스가 사망한 후 신성 로마 황제위는 이탈리아 왕국을 차지하는 자가 가졌다.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2세 교황령을 침공하자 962년 독일 왕국 오토 1세는 이탈리아를 정벌하고 그 공로로 교황이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해주었다.
    • 프랑스 왕국은 프랑크 왕국의 직계를 주장했기에 원칙적으로 카롤루스 대제 때에 획득한 제위를 요구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고(대신 ‘왕은 그의 영토 내에서는 황제다.’ 라며 일종의 외왕내제를 주장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는 프랑크 왕국 이후 최초로 제위를 차지한 사람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나폴레옹 시대 이전에 이미 수백 개의 영방국가로 쪼개지면서 유명무실해졌으나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했는데, 나폴레옹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사라졌다. 나폴레옹이 교황의 축성을 받은 것은 옛 로마의 황제위에 올랐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덧붙이자면 나폴레옹은 1804년 5월에 프랑스 제국 황제로 즉위하지만, 대관식은 12월에 하였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는 해는 1806년이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황제를 자칭한 시기이때 프란츠 1세로 명칭이 변경는 1804년 8월부터다.
  • 로마 황제의 계보를 인정받지 못한 영국은 근세에 국력이 신장되었어도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다가 인도 제국을 설립한 후에 영국의 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물론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영국 왕 조지 6세가 인도의 마지막 황제이다.

실제로 여러 왕국을 지배하지 않아도 황제의 호칭을 쓰는 경우도 많다. 과거 대한제국이나 현재의 일본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다른 국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주들을 이끄는 강대국임을 자부하기 위해서다. 원래 뜻은 여러 왕국을 지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여러 왕국을 거느리지 않더라도 원 의미와 비슷하게 구색을 맞추려 했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자국 영토 내에 태수 또는 번왕을 두었고 영토 밖의 국왕들과 함께 제후로 취급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의 경우도 스페인 왕국,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왕국, 스웨덴 왕국 등 여러 국가의 왕들을 휘하에 두었다. 이러한 대제국들과 동일한 나라임을 자부하기 위해 작은 제국들은 보통 자기 아들 등 핏줄들에게 왕의 칭호를 주거나 지방의 일부를 제후국처럼 명목상 취급하기도 했다.

이 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황제라는 표준어(?)가 있음에도 천자나 황상(皇上)처럼 다른 단어로 돌려 부르기도 했다.[4] 유럽 문화권에서는 로마 제국 초기에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지만 후에는 임페라토르로 굳어지고 카이사르는 동의어처럼 사용하였다.[5]

2. 어원

최초로 중국 전토를 통일한 진 시황제 영정(嬴政)이 새롭게 만든 천자의 칭호. 진시황 이전에 천자를 왕이라 불렀고 그 밑의 군주들을 제후라 불렀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에 그 제후들이 너도나도 왕을 칭하게 되자, 왕이라는 작위의 가치가 떨어졌고, 이 왕들을 모조리 정복한 시황제가 새롭게 한 급 올려서 황제를 만들었다.그리고 나중에는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게 된다. 진나라가 쇠락하고 항우 유방이 거병하던 시대에는 진나라 군주가 자진해서 왕으로 직위를 낮췄다.

황(皇)은 상고 시대에는 왕(王)과 동의어였으며, 제(帝)는 상나라 때부터 군주를 가리키는 어휘이긴 했으나 보통은 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옥황상제나 기독교 신의 번역어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상제(上帝)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황제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 위대한(皇) 하느님(帝)이라는 뜻.[6] 주나라 이후 중국이 점점 인문화되다가, 시황제 시기에 이르러서는 帝라는 칭호가 신격화의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왕(王)[7]을 대신해서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명칭을 올리도록 이사(李斯)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요구했다. 이에 신하들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태황(泰皇)이라면서 태황이라는 호칭을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태황의 황과 신을 뜻하던 제를 붙여 직접 만든 것이 황제(皇帝)[8]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삼황오제나 황천상제(皇天上帝) 등의 단어에서 보듯이 황(皇)이라는 단어와 제(帝)라는 단어가 각각 사용되었지만, '황제'라는 합성어를 만든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다. 그리고 황제라는 어휘가 널리 사용되면서 오히려 황(皇)과 제(帝)는 황제라는 말의 약자로 여겨졌다.

황제를 구성하는 두 단어인 황과 제 사이에서도 의미 차이가 있다. 그런데 기원부터가 왕(王)의 이체자였던 황(皇)보다 신격 상제(上帝)와 연결성이 있는 제(帝) 쪽이 더 강렬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설상의 삼황오제도 삼황은 매우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오제는 대단히 구체적인 존재로 묘시되고 있다. 즉, 황은 권위는 있지만 추상적으로 위대한 존재라는 개념이며, 제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개념이 강하다.[9]

한나라 시대에 황제의 아버지로서 명목상의 존칭을 받을 때는 태상황이라고 불렀지 '제'를 붙이지 않았다. 한서에 안사고(顔師古)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천자의 부친이므로 '황'이라고 한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제'라고 하지 않는다." 또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태상황제라고 불렸다. 이처럼 황과 제 양자가 거의 동격이기는 하나 실제로 '황'은 수식어에 가깝고, '제' 쪽에 더 실질적인 권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10]

위와 같은 이유로 조선에서는 황(皇)은 왕(王)과 혼용해서 썼으나 제(帝)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영조 경종을 추억하며 '황형(皇兄)'으로 칭했던 것이 하나의 사례다.

여담으로 무협소설에서는 황(皇)을 제(帝)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경향(예를 들어 열혈강호)이 있지만 실제로는 위에서 보듯 제(帝) 쪽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황제라는 단어에서 제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는 맞으나 '황'과 '제' 중에서 '황'이 위상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진시황 본기에 진왕 영정이 전국을 통일하고 새호칭을 정할 때 이사 등이 진시황의 통일 업적을 "5제도 따르지 못할 일"이라고 평하면서 3황 가운데 가장 높다고 평가하던 태황을 진왕 영정의 새 호칭으로 제안한다. 즉 5제를 능가하는 진시황의 업적이 3황에 비견된다는 평가이기에 적어도 진시황이 황제 호칭을 정하던 시절에는 3황이 5제보다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3. 상세

3.1.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3.1.1. 중국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역사 관련 정보/중국 역대 군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진시황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건 자신의 계승자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 하는 식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 이세황제까지는 이어졌지만 진이 예상보다 일찍 붕괴돼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고, 한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무제 광무제 태종이니 하는 식으로 시호와 묘호로 칭한다.

참고로 진시황 사후 진 제국의 수도를 점령했던 항우는 황제라는 호칭 대신 - 명목상 서초 회왕의 신하였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 스스로를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하고, 회왕 웅심(熊心)은 의제(義帝)로 높였다. 황제는 "천하를 통치하는 자"이고 패왕은 "힘으로 지배하는 자"라고 보면 되겠다.[11]

중국의 황제 개념은 원칙상으로 '천하의 지배자'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유지할 능력만 있다면 개나 소나 황제를 칭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지방의 자칭 황제들은 후대의 역사서에서 지역명+왕(또는 주主) 혹은 본명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남북조시대처럼 남북이 각기 역사 기록을 남긴 경우 서로 상대방을 참칭 황제라 서술하기도 한다. 또한 정통성 논란이 발생하는 중국의 분열 시대는 특정 국가만 후대에 정통으로 평가되기 어려우므로 여러 국가의 군주가 다 황제로 인정받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는 수준을 넘어 주변국을 신하로 대하며 작위를 준 경우도 많다. 한국인들에게 황제란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는 유일무이한 지배자라는 이미지가 있는 까닭은 옆나라 중국의 군주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을 넘어 먼 지역까지 제국의 위상을 높인 중국 황제들도 여럿 존재하였다. 대표적으로 정화의 원정대를 파견하어 인도양 인접 각국에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고 위상을 떨친 영락제.

동아시아의 황제는 휘하에 , 공작 등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우위를 인정하나 독립되어 있는 조정을 구성하고 따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인 왕이 아니라 황제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인 태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에게 주는 작위로서의 왕(주로 친왕(親王))도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군국제를 거쳐 전면적인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실시되자 황제국의 영토 내에서 반(半)독립적인 통치권을 지닌 지방 왕(주로 번왕(藩王))들은 황제권에 심각하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 거의 폐위되었다. 역사적으로도 반독립적인 지방 왕들은 반란을 여러번 일으켰는데, 전한 시대에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는 번왕에 봉해진 노관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전한 중기의 오초칠국의 난, 서진 팔왕의 난, 청나라 초기의 삼번의 난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는 번왕보다 친왕이 더 많았다. 따라서 주나라 이후의 중국 역대 국가는 주나라의 경우처럼 제후와 제후국을 만들어 지방을 간접통치하는것이 아니고 군현을 두고 태수, 주목, 자사, 절도사, 순무, 총독 등의 관료를 파견하는 직접통치를 하였다.

중국의 천자인 황제는 '천상'의 천제로 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 전체를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모든 땅의 주인이자 인간 세상의 지배자였다. 왕공후백자남의 제후는 단지 황제의 땅을 대신 다스리는 자에 불과했다. 이것이 중화사상에 입각한 관념적인 천하관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내부의 제후들과의 관계에도 이러한 체계를 도입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인 중국이라 인식했고 외국의 군주는 천자에게 봉국과 제후의 작위를 책봉받아 천자의 허락하에 신하로서 각 영토를 다스린다는 이론을 성립했다.

그래서 중국의 한족 국가들에게는 외국 이민족과의 동등한 외교관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오로지 천자의 신하국이라는 개념만이 있었다.[12] 이는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과 동등한 외교관계를 성립하게 됨으로서 깨지게 된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칙(勅)이라고 부른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황제와 왕은 엄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에 쓰이는 한자부터 달랐다. 한국사에서는 구한말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이 된 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어명보다 당연히 높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담은 칙서(勅書)를 신하가 성지(聖旨)로 전달하며, 칙명을 따라야 하는 제후와 신하는 황제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받들었다. 이건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도 마찬가지

중국 역사를 설명할 때 황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진나라가 얼마 가지 못해 망했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였고, 몇년 후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가 400여년간 이어지면서 중국에서는 '국가 최고권력자 = 황제'라는 공식이 굳어졌다. 한나라 이후로는 환란이 와도 춘추전국시대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보다는 자신이 중국을 통일한 황제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서로 치고 박다가 결국 다시 하나의 국가로 모이곤 했다. 즉, 황제라는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화 세계의 1인자로서 사실상 중국의 정체성의 중심이다. 황제라는 구심점이 없었으면 중국은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들이 지금까지 갈라져 있었을 수도 있다.

특이하게도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제후처럼 책봉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금나라 남송 황제를 책봉했다(...). 금은 송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싶었지만 중국 전역을 완전히 차지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를 인정하되 자기네 황제가 책봉하는 방식을 썼던 것. 송나라로서는 굴욕적이지만 전쟁의 종결 및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의 반환을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3] 금나라는 송나라 외에도 괴뢰국인 초(楚)나라[14]와 제(齊)나라[15]라는 허수아비 국가를 세워 각각 황제를 책봉했다.

한편 오호십육국 시대 이래로 중국으로 진입한 비(非)한족 군주들은 선우 카간 같은 고유 칭호 말고도 천왕(天王) 같은 한자식 조어도 사용하였는데, 시대가 갈수록 황제(皇帝)로 칭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16] 남북조시대의 북조, 요나라, 금나라, 서하, 대리국, 원나라, 청나라 등이 비(非)한족 지배자의 황제국의 예.

기원전 221년에 등장한 황제 칭호는 1912년 대청제국이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면서 소멸하였다. 1916년 중화민국의 총통 위안스카이 중화제국 건국을 선포하면서 제위가 일시적으로 부활하였으나, 전국 각지의 반발로 곧 취소되었다. 1917년 7월에는 장훈복벽이 발생,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황제로 다시 복위하였으나, 이 쿠데타는 11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멸망 후 청나라 소조정이라고 불리는 청나라 황실은 중화민국이 황실의 예우는 해주었으나 1924년 군벌 펑위샹에 의해 해체되어 명목상으로도 황제가 남지 않게 되었다. 이후 선통제가 일본에 협조하여 1932년 만주국 원수로 취임하고, 1934년에 만주국 황제가 되어 만주 지역이나마 제위가 다시 들어섰다. 하지만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도 멸망하여 중국사에서 황제는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17]

3.1.2. 한국

고대 한국어 발음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조선 전기에는 황제를 한글로 '황뎨'로 표기했다. 조선 후기에는 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ㄷ이 ㅈ로 바뀐다.

일본과 달리 한반도는 중국의 조공, 책봉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대내적으로든 대외적으로든 황제를 대놓고 자칭하는 군주는 드물었다.
3.1.2.1. 고조선
고조선의 대외적인 군주의 명칭은 중국의 공후백자남 중 "후(侯)"였다. 그런데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칭왕하자 경쟁국이었던 고조선도 거기에 맞서려고 따라서 칭왕을 하였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중국에 황제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상주 삼대의 중국에서는 '왕(王)'이 천자로서 가장 높은 군주의 직위였다. 더 높은 황제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왕(王)이란 단어 그 자체 격으로만 따지면 중국에서 제일 높은 칭호였던 왕과 동급이었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황제를 자칭한것처럼도 보인다.

다만 왕이라도 하나만 있던것은 아니었고 그 개념상 가장 높은 왕은 '천자'(天子)인 주나라 왕이었고 다른 왕은 주왕이 분봉하는 형태였으므로 주나라는 이후 한반도 국가들 처럼 왕 위에 왕이 있고 왕 아래 왕이 있는 왕중왕 체제라 이름만 같은 '왕(王)'일 뿐 어떤 왕이냐에 따라 그 격이 달랐고 예를들어 주왕의 권위와 초왕의 권위는 당연히 넘사벽이었다. 이것은 마치 신라왕과 명주군왕[18]의 권위나 고려왕과 낙랑왕[19]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또한 이때는 춘추시대에 주왕의 권위가 어느정도는 섯던 시절과는 다른 전국시대 주나라 왕의 권위가 땅바닥으로 추락해 초왕이나 연왕처럼 각지에서 왕들이 생기고 있었던 시기로 왕들은 꽤 있어서 춘추시대 만큼의 희소성이 있던 시기는 아니다.

따라서 고조선이 주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후대의 황제가 되는 천자의 의미로서 '왕(王)'을 주장했다기 보단 한참 대립하고 있던 연나라 '왕(王)'과 같은격으로 올라서기 위해 '왕(王)'의 자리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한편 고조선에선 비왕이라는 왕작이 있어 고조선왕은 왕중왕의 지위에 있기도 하였고 후대의 한민족 국가들도 이와 같은 전통이 있었다.
3.1.2.2. 고구려, 백제, 신라
전국시대를 통일한 시황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의 권위가 하락하여 너도 나도 '왕(王)'을 칭해 가치가 떨어지자 왕보다 더 특별한 지위를 원했고 그래서 공후백자남 위에 황제라는 왕보다 더욱 높은 왕중왕의 개념이 생성된다. 이는 후대에도 이어져 중국과 주변 동아시아국가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한동안은 중국의 주변 민족에서 왕중왕의 칭호로 황제가 아직은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각 민족들은 독자적인 천하관의 형성하여 중국식의 동아시아 조공-책봉 체제에서 통용되는 황제칭호와 달리 각 종족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기능하는 고유의 칭호를 통해 왕을 초월한 위상을 표현하는 경향도 있었다. 5호 16국의 북방 유목민족에서 통용된 천왕, 일본에서 사용한 천황[20], 고구려의 태왕, 백제의 대왕, 신라의 황왕이 그 예이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으로 인해 점점 한반도를 포험한 주변민족들에도 중화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삼국시대는 그 과도적인 시기였다.

삼국은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왕중왕으로서의 위치에 있었다는것이 역사기록으로 확인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태왕이라는 격이 높은 칭호가 있었고 비류국을 점령한 후 송양을 다물국왕으로 책봉하고 또, 부여 임금 대소왕의 동생에게 왕작을 하사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백제와 신라, 가야를 속국으로 부렸다.

백제의 경우에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단순히 왕의 경칭이 아니라 더욱 높은 위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매라왕, 벽중왕, 아착왕, 면중왕 등 왕작을 하사하였고 칠지도의 명문에는 일본국왕을 "후왕"이라고 칭하여 일본국왕을 제후왕 취급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탐라가 입조했다.

신라는 귀순한 고구려 왕족에게 '고려국왕' 내지는 ' 보덕국왕''작위를 내렸고 왕족에게 하사하는 명주군왕 갈문왕의 지위도 있었다. 그리고 탐라, 우산국을 입조시키고 속국으로 거느렸으며 마운령비 창녕 척경비의 금석문 기록에 제왕(帝王)이나 (朕) 같은 용어도 사용도 발견된다.

이렇듯 삼국은 '황제'를 자칭하지 않고 '왕'으로 있으면서 중국 황제에게 입조하여 신하국으로서 조공·책봉 체제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삼국의 왕이 국내의 제후왕과 국외의 속국왕도 봉작하고 조공을 받는 이중적인 체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외왕내제라고 하기는 애매하다. 외왕내제의 엄밀한 개념은 국외의 국제사회의 외교적 상황에서는 왕의 위치를 갖고 있으면서 국내의 신민들에게 내치의 상황에서는 황제로서 군림하는 상황에 적용되는 개념인데 삼국은 국외 상황의 경우에 황제의 신하가 되기도 하고 왕 위의 왕이 되어 황제나 다름 없는 상황이 되는 형국이고 국내적으로도 황제로 칭제건원을 한 것은 아니면서도 왕중왕으로서 군림은 하는 애매한 체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상황은 국외의 외교상황에 국한하여 사대교린이란 표현이 정확 할 것이다. 한반도 국가들의 이런 사대교린은 후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3.1.2.3. 발해
발해는 군주명이 가독부의 지위였으나 오등작의 작위가 있었고 왕부를 따로 설치한 것이 유물로써 확인되어 왕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왕의 태자 대무예 계루군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중왕 체제를 가진것으로 보인다.

발해부흥운동의 시기에는 대발해 고영창 칭제건원 하였다. 한편 흥료국 대연림 연호를 세우거나 태사(太師)관직을 내리는 등[21] 천자국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왕(王)'을 칭했는지 '황제(皇帝)'를 칭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발해를 포함한 한국사의 나라들이 황제를 칭하지는 않으면서 법식은 황제의 예로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기록으로 확증되지 않는 한 뭐라고 단정 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3.1.2.4. 고려
고려는 천자국을 표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다.
  • 천자국의 용어를 사용하였다.(폐하, 절일, 황상, 태후, 태자, 조서, 짐 등등) 그래서 태자에 대한 경칭을 "전하", 왕족에게 삼공의 직위를 부여하며 "제왕"이라 통칭하고 왕족 및 훈신들에게 오등작을 수여하였으고 특히 공, 후의 반열은 종친의 경우 "영공 전하", 훈신의 경우 "영공 저하"로 경칭하는 등 예법의 수준이 천자국과 동일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세자는 태자로 하기도 했지만 왕의 동생이 세제가 된 일도 있었는데 이때도 왕세제가 아닌 황태제(皇太弟)에 임명되었다.[22]
  • 육부(六部)의 체계 도입 하였다.[24]
  • 고려의 군주는 천자로서 하늘로 부터 부여 받은 권력이라는것을 과시했다.
    • 원구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25]
    • 태조는 황제로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연호는 천수(天授)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한' 이라는 의미였다.
    • 만월대의 제2 정전인 천덕전(天德殿)의 명칭 역시 '하늘의 덕이 있는 전각'이란 뜻으로 역시 하늘로 부여받은 권한을 강조한것이라 볼 수 있다.
  • 봉작제를 시행하여 고려의 군주 아래에 친왕[28] 제후왕,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책봉하였다. 황자들은 기본적으로 후(侯)가 초봉되었으며(태자는 황위를 이을것이므로 봉작을 하지않았다) 기타 황실종친들과 공신등 유력한 신하들에게도 작위를 하사했다. 그 예로 황실 종친은 개성국공(開城國公)[29], 광평백(廣平伯)[30], 낙랑후(樂浪侯)[31], 대령후[32], 익양공[33], 평양공(平壤公)[34] 신하는 보성백(寶城伯)[35], 조선국공(朝鮮國公)[36], 진강공(晉康公)[37], 한양공(漢陽公)[38], 해양후(海陽侯)[39] 등이 있다.
  • 만월대의 구조가 5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에 도착하는 형태 였다.(조선같은경우 제후국의 예로 3개의문을통과)
  • 고려황실의 핏줄을 황제를 상징하는 상상속의 동물인 용의 후손으로 여기고 신성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북방 유목민족이 천왕, 일본이 천황, 고구려가 태왕, 백제가 대왕을 중국의 황제와 유사한 독자적인 왕보다 높은 존재의 칭호로 사용한 것 처럼 고려는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는 표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대놓고 황제를 자처한 군주로 확실한 인물은 잠시나마 칭제하였다가 북송의 반발로 제위를 취소했던 광종뿐이며 고려도 중간 중간 끊어 진적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중국 국가들에게 입조하는 속방의 신하국 지위였고 여진이나 탐라에게 조공을 받고 상국으로 섬겨진 것도 이전부터 있었던 사대교린의 연속이었을 뿐이지 고려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사실 삼국시대의 국가들과 근본적인 면에서 달라진것은 없었다.

또한 황제의 격식만 갖추었지 명시적으로 '황제'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제후의 격식이 아닌 황실의 격식을 쓰더라도 군주명 만큼은 이라고 하였고[43] 자체 연호도 가진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또한 왕작이 있기는 했지만 생전에 내린 예는 오로지 초창기 신라가 투항할 때 경순왕 낙랑왕에 봉한 사례가 유일하고 그나마 일대에서 끝나고 세습된 상설 제도는 아니며 나머지 제후왕들은 다 추증으로 보여 독립된 왕부나 세습 봉국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제후왕의 숫자도 500년 고려 역사에 열개도 되지 않아 상시적인 제도가 아닌 매우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

더구나 친왕도 일부 기록에서 '친왕'이라는 단어가 발견 될 뿐 왕의 자식들은 기본적으로 공(公)보다도 아래격인 대령후같은 후(侯)로 임명했고 높아봐야 익양공이나 평량공처럼 공작이었다. 사실 이는 고려가 군주명을 ''으로 하면서 부를때 '황상'이라 하듯이 유사하게 왕자들을 ' 친왕'으로 임명하지는 않으면서 단지 '친왕' 운운한것에 불과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 친왕'으로 임명된 왕자는 기록상 없었다. 황제 아래는 왕이므로 황자들은 예법상 친왕이 되야 하는것이 황제국의 예법상 맞았다.

단 친왕이던 후작이던 제후 천자만이 임명하는 것이므로 황제의 행위이다. 거기에 세자는 태자로 하였다. 태자 뿐만 아니라 대비도 태후였다.[44] 태자는 시호로 굳어지지는 않으니 왕을 황제 폐하로 부르기만 하고 정식명칭은 왕인 상황과 구분이 안되지만 태후 같은 경우는 그냥 호칭도 아니고 정식시호가 '태후'였다. 왕도 시호만 왕이지 호칭으로는 황상으로 부르니 평상시에 서로 이상할건 없었겠지만 어쨋든 왕은 정식명칭인 시호가 왕으로 정해지는데 어머니는 태후였다. 그러니까 군주는 왕인데 대비는 격이 더 높은 태후가 되는 이상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태후라도 왕의 부인일때는 황후가 아닌 왕후였다가 나중에 대비가 아닌 태후로 오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황제국이면서 황제국이 아닌 고려의 애매한 법식을 보여주는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진짜 완벽한 황제로 등극하고 외왕내제 베트남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외왕내제 체제라고 할 수 있고 일본 같은 경우와 비교해 보면 쇼군이 일본 왕으로서 중국 황제의 신하로 입조하지만 역시 일본 국내 천황의 신하가 되는 독특한 상황 덕분에 형식상 독자적인 연호가 한번도 멈춘적이 없고 천황의 황자를 왕(王), 황녀를 여왕(女王)으로 봉하는 등 황제국의 제도를 갖추었던 일본에 비해서 고려는 황제국으로서의 이론적 기반이나 제도적 기반이 미흡한 체제였다. 천왕이라는 칭호를 만들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천자의 격식을 사용하는 방식'을 취했던 5호 16국 북방 유목민족들과 비교하면 천왕이라는 표현이 외왕내제의 형식으로 '한족황조'에 사대하기 위해 만든게 아니고 단지 고유의 독특한 한자조어를 따로쓴것일뿐 외왕내제 형식이 아닌 진짜 황제 노릇을 한데 반해 고려는 외왕내제체제였고 거기에 특별히 황제 비슷한 한자조어를 만든것도 아니니 경우가 서로 다르다.[45] 고려와 비슷한 체제를 살펴보면 중국 삼국시대 원술과는 다르게 칭제건원 하여 제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하늘에 제사 지내고 여러 예법과 용어등의 형식을 대부분 황제식으로 하여 실질적으로 황제나 다름없는 군림을 하였던 유표의 체제와 흡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부족할지언정 어쨋든 외왕내제는 외왕내제인 체제로 볼 수있는 고려의 체제가 여몽전쟁에서 몽골제국[46]에 항복한 이후로는 외왕내제가 아닌 내부적으로도 원나라 황제의 부마인 신하로서 군주의 격을 의 형식으로 강등했다. 다만 군주명은 이전에도 제(帝)가 아닌 왕(王)이었기 때문에 더 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완전한 왕의 격식으로 군주의 급을 내려서 더이상은 과거처럼 단지 '황제'라는 단어만 않쓰지 결국은 황제 노릇하던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전에 쓰던 묘호를 쓰지 못하였고 거기에다가 왕명 앞에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忠)자를 붙였다.[47]
3.1.2.5. 조선
조선시대는 전대의 왕조들에 비해 훨씬 중화사상이 정립된 시기였다. 그래서 사대에 충실했고 외왕내제 체제에서 벗어나 제후왕의 격식을 대부분 따랐다.[48] 그래서 공후백자남의 작위들은 없어졌고 대신 군(君)이란 직위를 썻다. 다만 그래도 일부 고려의 전통이 남아 묘호만은 계속 사용했다.[49] 그외에도 몇몇 법도는 왕인데도 황제식으로 하는 것들이 있었다.

또한 한반도 국가들의 전통인 사대교린 정책은 계속 이어나가 중국에게는 신하국으로서 조공하는 속국의 위치지만 주변의 여진족이나 유구국, 일본의 지방정권에게는 조공을 받았고 경우에 따라선 조선국왕이 '황제'로 불리운 적도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조정에서 공론도 일었으나 쟤네들이 잘모르고 그런거라고 대충 넘어갔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이징옥이 황제를 참칭한 일이 있었고 조선후기의 영조 년간에는 일부 유생들이 소중화사상에 입각한 사고방식으로 영조가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으나 그저 해프닝으로 끊났다.
3.1.2.6. 구한말
구한말에는 갑오개혁의 일환인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면서 '제1조'에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끝낸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군주명을 황제에 종속된 에서 서양의 국왕에 해당하는 대군주(大君主) 칭호로 바꾸고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청나라 연호나 비공식적으로 사용하던 명나라의 숭정연호 대신하여 개국기년(開國紀年)을 만든다. 이는 매우 역사적인 사건으로 중간 중간 단절이 있기는 하였으나 큰틀에서는 한국사 고조선으로 시작된 이래 중원 통일왕조의 황제에게 조공, 책봉 체제로 예속된것에서 최종적으로 벗어나는 일대 사건이었다.

또한 태종이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왕보다 높여 지성(至誠)으로 천자의 사신(天使)을 섬겨야 한다."는 의미로 세운 사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은혜를 맞이 한다'는 의미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중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한다는 의미로 독립문을 세웠다. 또한 바로 옆에 있는 '중화를 흠모한다'는 의미의 사신 영빈관이었던 모화관(慕華館)을 폐지하고 독립협회의 사무실인 독립관으로 사용하는 등 시대가 격변한다.

사실 청나라는 세상의 중심인 중국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근본이 만주족이었던 오랑캐였고 조선이 마음으로 섬기는 중국 명나라를 무너뜨린 나라였다. 조선도 힘으로 굴복당해 어거지로 모시는 입장 일뿐 진정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아서 내내 못마땅한데 억지로 모시는 형국이었다.[50] 심지어 재조지은을 갚고 정의를 실현시키른 명분의 북벌론까지 나왔고 이것은 그저 왕실의 구호가 아닌 조선 후기까지도 민간에도 추종자가 많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사상이었다. 그래서 청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이런 행보가 유림들에게 큰 반항을 부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일부 유림들은 영조 대에 칭제건원 상소까지 올렸을 정도였다. 만약 명나라가 끝내 산해관에서 청나라를 틀어 막고 이자성의 난도 진압하여 위기를 넘기고 구한말까지 존속했더라면 조선 후기의 명나라에 대한 광신적인 추종과 유교국가인 조선에서의 유림의 힘을 보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51]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해 동아시아 책봉체제가 완전히 와해되자 고종 1897년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칭제건원하여 황제가 되고 연호를 광무로 선포하는 한편 선왕들과 선왕비들을 황제와 황후로 추존하고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실 직계는 왕족(王族)으로 방계를 공족(公族)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을 침탈하기 위해 청나라의 영향력을 없애 버리려고한 일본의 흑심이 크게 반영된 결과였고 청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한다는 독립협회도 실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 단체였다. 그리고 대한제국도 말만 자주적인 황제국이지 내실은 크게 부족하여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낸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리고 이런 일본의 행보에 반항적이었던 고종을 폐위시켜 버려서 태자였던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니 그 연호는 융희였다.

결국 몇년 뒤 대한제국 한일합방조약으로 일본제국에 합병되어 나라는 없어지고 황가는 보존은 하지만 일본제국의 황실 귀족제에 편입되어 대한제국 황실 궁가들 중 황실과 가까운 집안은 왕공족, 먼 집안은 조선귀족으로 격하되어[52] 일제 천황의 신하로서 존속하게 된다. 그리고 구 대한제국 황실이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일부 미온적인 반발은 있었으나 크게 반항하지 않고 대체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자 1919년 3.1 운동 이후 결집된 독립운동세력은 그러한 구 황실의 태도에 실망하게 되어 대한제국 복벽이 아닌 민주공화정체인 대한민국 성립을 결의하게 된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하여 조선왕실의 방계 후손인 이승만이 임명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비록 민주공화정체의 국가수반인 대통령이었으나 자신의 핏줄이 대한제국 황실의 모태가 되는 조선왕조 왕실의 후손인 양녕대군 17대손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외교가에 Prince를 자처하고 다녔다.
3.1.2.7. 현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래 대한제국 황가였던 일본제국체제 내의 왕공족 조선귀족은 1947년 GHQ 체제하에서 신적강하를 거쳐 평민으로 강등 당하였으며 1948년 한반도에서도 별다른 복벽 움직임도 없이 남북이 모두 자유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서 구 대한제국 황실 제정복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쪽에서는 대한민국이 들어선 후 이승만 정부 구 대한제국 황가를 견제하기도 하였고 그 이후에는 별다른 복벽주의 세력도 없이 쭉 잊혀졌다가 21세기 들어 사회 일각에서 대한제국 황실 복원 움직임이 일어나 황녀인 이해원 여사가 여제로 옹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세는 매우 미약하여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거의 퍼포먼스 수준의 사회적 반향만 일으켰을 뿐이다.

다만 2000년대 들어 만화 과 이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 의 흥행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쭉 이어진다는 가정의 설정을 한 대체역사 소재의 창작물들이 한 장르로서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편 북쪽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 구체제의 봉건적인 요소와는 상극인 체제가 들어섰으나 후에 변형되어 주체사상이라는 비민주적인 일인 숭배 사회와 계급사회가 이루어 졌다. 그 결과로 한 가문이 삼대에 이어 세습을 하고 백두산 혈통이라는 로열 패밀리가 있으며 창업공신들의 가문이 높은 계층 귀족을 이루고 세습되어 계층간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전근대 계급사회의 황조나 다름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남한에는 김씨 왕조, 김씨 조선이라 부르며 비아냥 거리는 등 북한은 김씨 일가가 황제 칭호만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 전근대의 황제체제나 다름없는 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형국이다.

3.1.3. 일본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본/황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 군주 칭호는 중국 기록에 왕(王)으로 처음 등장한다. 적어도 5세기 후반에는 자국의 군주를 오키미(大君, 大王, 治天下大王)[53]로 좀 더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명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8세기 초의 율령제 시행과 함께 군주의 공식 칭호를 천황(天皇)[54]으로 고정하고 자국을 황제국으로 간주하였다. 다만 천황이라는 칭호가 공식화된 것은 8세기이지만, 7세기에도 天皇이라는 명칭은 다른 명칭들과 혼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는 중국 주도의 책봉 체제를 이반하는 정치 행위였고 중국이나 한국 같은 주변국에서도 천황의 존재와 이런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55] , 지리적 위치상 일본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어려운 중국에서는 '오랑캐 놈들이 뭘 몰라서 그런다'라는 식으로 넘어갔고 조선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은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쇼군( 정이대장군)을 국가 원수인 국왕(國王) 또는 대군(大君)으로 대했고, 일본을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어찌됐든 이론상 덴노를 황제에 끼워맞추면 쇼군이 왕의 포지션이 된다. 그래서 개화기가 되자 일본은 그 독특한 체제를 이용하여 조선과 비교하면 조선왕과 쇼군이 동등하니 일본은 그 위에 천황이 있어 국격의 서열이 조선보다 위가 되고 중국은 황제 아래 쇼군이 사대했으나 일본은 그 위의 천황이 있어 중국과 국격의 서열이 같다는 일종의 꼼수와도 같은 해석으로 발전하였다. 막부 시대까지는 이 문제로 조일간 외교적 마찰이 별로 발생하지 않았으나 1867년 쇼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는 대정봉환이 발생하고 일본은 대외에 황제국임을 재천명하였다. 그리고 왕인 쇼군이 아닌 황제인 천황의 명의로 조선과 다시 국교를 맺어 일본이 우위에 서는 형태로 양국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하였으나 조선은[56] 국서를 거부하는 등 크게 반발하여 조일 양국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57]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국호에 제국을 붙이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서구의 전통을 수용한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국호에 ~국(國)을 붙이는 경우는 있었고 자국을 드높일 목적으로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제국, ~왕국 등의 정체(政體)를 표시하는 전통은 없었다. 일본이 국호까지 황제국임을 표명하기 시작한 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황제국임을 강조하고 외교적으로 일본 및 서양 국가들과 대등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국호에 제국을 붙여 외교 문서에 표기하였다. 그것이 바로 대청제국(大淸帝國), 대한제국(大韓帝國)이다.

일본 역사에서 실권을 행사한 천황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이후의 일본의 천황은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로서의 황제라기보다는 일본 고유 종교인 신토의 수장 혹은 일본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서구에서 아직까지 Emperor로 칭해 주는 군주는 일본 천황이 유일하다. 다만 일본의 정식 국명은 1947년 이후부터는 ' 일본 제국'이 아닌 ' 일본국' 이다.

3.1.4. 베트남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의 군주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진나라 멸망 후 혼란을 틈타 조타 광둥 베트남 북부에 걸쳐 남월을 건국하였다. 조타는 처음 왕을 칭했으나 전한 여태후 정권과의 대립이 심화되자 기원전 181년 칭제하였다. 이것이 베트남 황제[58]의 시초이다. 하지만 문제가 즉위하자 전한에 신종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여 명목상 대외적으로는 제후국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은 대내적으로 칭제건원하고, 대외적으로 칭왕하는 외왕내제 체제를 갖추는 전통이 생겨나게 된다(단, 남월의 군주들은 칭제만 했지 연호는 없었다.). 한반도의 군주들이 독자적 천하관을 갖고 황실 예법을 가져다 쓰면서도 국내에서 황제라고 대놓고 한 경우가 적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베트남 역대 황제국들이 좀 더 정석적인 외왕내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남월은 기원전 112년에 전한에 멸망하고 베트남 지역은 수백년간 중국 역대 왕조의 직할령이 되어 한동안 황제는 사라졌다.

544년 이족(俚族) 출신의 리비(李賁, Lý Bí)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북부에 만춘(萬春)을 건국하며 제위가 부활하였다. 리비는 자칭 남월제(南越帝)라 하고 연호를 천덕(天德)이라 하여 중국식으로 칭제와 건원을 함께 하였다. 하지만 602년 수나라에 멸망해 베트남의 제위는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59]

당나라가 멸망한 후 10세기 전반부터 사실상 반독립 상태가 된 베트남은 968년 딘보린이 대구월(大瞿越)을 건국하면서 황제 체제가 부활하였다. 그 이후로는 잠깐씩 외세의 지배를 당하기는 했어도 제위가 수세기 이상 끊기는 일은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안남(安南)이라고 불리며 외왕내제를 했던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에도 황제의 칭호는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다가 1945년에 소멸하였다.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는 이후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는 사용하지 않고 남베트남의 국가원수로 1949~1955년 사이에 재임했다.



3.1.5.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사한 칭호들

동아시아에서는 '황제'라는 용어는 아니지만 황제와 유사한 개념의 칭호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중국 황제의 권위에 도전은 못하겠지만 왕보다는 더 높은 특별한 지위를 만들고 싶어 생긴 용어들이다.

3.2. 유럽

유럽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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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황제는 동아시아와 개념이 다르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혈통과 종법제도에 근거한 정통성을 강조하며, 그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천자다. 그러나 유럽 세계의 황제는 기독교의 수호자인 로마 제국의 황제( 임페라토르, 바실레우스)의 후계자이며, 세속 세계의 최고 군주이며 유럽 세계 전체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권위를 획득한 군주를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통과 법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신권 또한 동아시아보다 강해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황제=최고 종교인[61]인데 반해서 강력한 권력을 가져서 우상화되는 최고 시민인 로마 제국 황제[62]와는 개념이 다르다. 또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독자적 종교 권력( 교황)이 너무 강력해져서 오히려 신권을 기반으로 하는 왕권 강화가 더 힘들게 되었다. 유럽 왕조가 왕권신수설을 뒤늦게서야 주장하게 된 까닭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의 힘이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이고, 이후에 성직자들의 힘을 어느 정도 제압하고 난 시대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3.2.1. 고대 로마

로마의 '황제'는 혼란한 공화정을 군사력으로 갈아엎으면서 등장한 존재이다. 공화정 말기의 로마는 전례없는 영토의 확장과 시민의 증가를 겪었지만, 정치 체제는 여전히 도시국가 시절의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일례로 포로 로마노에 1만 명을 자기 사람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지중해를 지배하는 로마 전체의 정책을 입맛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기 일쑤였고 지지자들끼리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시민들의 총의를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화정의 혼란은 이윽고 공화정을 포기하려는 권력자의 등장을 불렀다. 그러나 그 카이사르조차도 로마에서 가장 강한 세력일지언정 모두를 제압하지는 못했고 결국에는 암살당하기까지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서 교훈을 얻었는지 원로원에게 종신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과 임기 제한없는 군단 지휘권(Imperium Maius) 두 가지를 얻어낸다.[63] 이 두 가지 특권은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자손들에게 계속 상속되었으며, 그의 후임들은 광대한 직할령[64]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구 체제의 권위를 더해서 로마 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법적으로는 여러 시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초월적 지위를 누리는 특성을 고려해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을 원수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로마 초기의 황제라는 것은 'Emperor'라는 새로운 이름의 관직인 것이고, 그것 또한 완벽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던 기존 관직들의 권한을 약간 변형하고 조립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즉, 그 당시의 로마인 누구도 새로운 이 직책을 동양의 황제처럼 천하와 뜻을 받드는 고귀한 존재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의 권한인 호민관 특권과 로마군 최고통수권이 합쳐져서 어떻게 강력한 황제권으로 둔갑하였는지 그 비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공화정 시기부터 호민관이 가졌던 권한은 ①원로원 의결에 대한 거부권 ②민회를 통한 입법권(원로원 의결과 동등함) ③신체에 대한 불가침 특권이다. 각 권한이 부여된 취지를 살펴보면 ①은 원로원이 귀족에게만 유리하고 평민에게 불리한 법이나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시행하는 것을 견제하고 ②는 평민의 입장을 반영한 법이나 정책을 제정하고 시행할 여지를 제공하며 ③은 힘을 가진 원로원 및 귀족세력이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호민관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 그렇다고는 하나 곰곰이 따져보면 매우 강한 권한으로 다른 나라였으면 전제군주나 다름없을 정도다. 발상을 전환해 본다면 ①을 통해서 현대로 치면 의회+내각(+법원) 정도에 해당하는 원로원의 결의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집을 수 있고, ②를 통해 지지자들을 모아서 자신이 원하는 법을 뚝딱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65] 마지막으로 ③을 통해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공적으로 처벌하고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이러한 권한을 평민들이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호민관의 권력보다 원로원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큰 로마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정도 권한을 주어도 원로원은 호민관과 민회에 대해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66]. 하지만 로마 황제가 가진 또 하나의 권한인 군단 지휘권이 호민관 특권과 시너지를 내자 이런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로마 제국의 기반인 로마 군단병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게 되면 호민관은 원로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용하여 사실상의 전제권력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리고 황제는 이런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책을 본인의 사적인 '재산'으로 인정받는데까지 성공하여 자손이나 원하는 이에게 상속/수여할 수 있는 권리마저 따내고야 말았다. 즉 로마 황제의 직위는 '신성하고 역사적으로 정통성있는 공적인 군주의 자리'라기보다는 (짱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속 및 증여가 가능한) '사적인 개인의 재산'으로 여겨졌다는 것.[67] 이런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상상도 못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황제 제도 같은 것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가진 재산을 단지 분할증여한 것으로 본다면 신기할 것도 없다.[68]

이렇게 출발한 로마 황제직은 권력은 강했지만 권위는 부족하였다. 고귀한 특권 계층이라기보단 '큰 재산을 가진 시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외려 호민관의 피선거권은 평민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황제는 반(反) 귀족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혼란의 불씨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나마도 초대 황가인 아우구스투스 가문이 오래오래 황위를 계승하면서 혈통의 의한 권위를 쌓아갔다면 모르겠는데, 그마저 중간에 갈려나가고 그 이후에는 다른 가문 또는 계파들에서 황제가 배출되었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의 치세 내내 황제의 권위는 매우 불안정했다. 따라서 기회만 보이면 황제를 자칭하는 야심가들이 발호할 수 밖에 없었고, 군인황제 시대에 그 혼란은 절정에 달한다.[69]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누르고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넷으로 늘려 각각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보다 밀도 높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고, 대신 황제 간의 서열을 확고히 하여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자신의 권위가 사두정치를 유지시켰고,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그의 후임인 갈레리우스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갈레리우스마저 급사한 뒤에는 네 명의 황제는 동등한 위치가 되어 혼란이 다시 시작되었다.[70]

결국 다른 황제들과 자칭 황제들을 격파하고 다시 정국을 안정시킨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군주제를 로마에 맞게 벤치마킹하면서 안정화 작업을 펼쳤다. 황제의 자리에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라는 권한을 주면서 정통성을 부여했고, 덤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동방의 요충지로 이사를 가버렸다.[71] 이렇게 해서 동로마는 어떻게든 천 년을 더 버티게 되었지만 서로마는 그게 안되서 멸망할 때까지 이것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 이후에도 구 서로마 제국령의 황제는 근본적으로는 '힘있는 자 A'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한다.

이러한 로마식 황제 제도는 이 후 다른 유럽 제국들의 군주 제도에도 영향을 크게 끼쳐서, 유럽의 군주제도는 동아시아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때문에 유럽 문화 배경의 창작물이나 역사물을 볼때 동아시아인들은 꽤 미묘한 느낌을 받는다. 한 국가 안에서 XX왕조 XX왕조 하는 식의 여러 왕조가 있다든지[72], 왕실의 혈통이 끊기자 외국에 있는 왕실의 먼 친척을 모셔와 왕으로 삼는다던지.[73]

3.2.2. 중세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 생긴 유럽의 황제는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폴레옹 시대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서유럽 세계에서 유일한 황제로 인정받았다.

단, 동로마 제국의 군주는 쭉 황제로 인정받았다. 왜냐면 나라가 로마 제국 자체인 것이었기에 너무나도 당연했다. 신성 로마 제국 또한 어느 정도의 정당성은 있었으나, 아예 로마인들에게서 직접 이어지는 동로마 제국의 황위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처지는 본인들이나 동로마측이나 이슬람측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로마 총대주교 교황의 승인과 지지를 통한 권위의 보강이 필요했던 것이며, 동로마측은 이러지 않아도 되었기에 어디까지나 전체 기독교 세계 서열에선 2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승인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어도 황위 문제에 한해선, 서방교회인 카톨릭과 동방교회인 정교회의 분리보다는 옛 로마 세계의 서방에 종교계의 1인자인 교황이 있게 된 반면 동방에는 정치계의 1인자인 황제가 있게 되어 이러한 일이 빚어졌다고 보면 된다. 각각 로마의 뿌리는 같지만 지역과 종교가 분할되었기 때문에 로마도 둘, 기독교도 둘이 공존했으나, 서방은 종교적 권위가 보다 높았던 반면 동방은 정치적 권위가 보다 높아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교회에서 말하는 제1총대주교는 로마 주교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가 아니다.
3.2.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단 1명의 황제가 존재해야 했다.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4마리의 짐승" 예언에 의하면 지상에는 4개의 거대 제국이 차례로 존재하며 이는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 제국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온 유럽 세계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마지막이어야 했고, 그 제국이 멸망하면 바로 찾아올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 황제는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즉, 새로운 정통성의 황제가 나타나는 것은 교리상 용납 불가하므로 본인을 황제로 칭하고 싶은 자는 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의 수는 불어나기 시작했다.)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현실 외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와 관련 있거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첫째로 로마가 아닌 국가를 계승하는 황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유럽세계의 실질적 전부를 지배한 사람은 로마 황제 말고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권위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둘째로 자신부터 시작하는 황제도 큰 의미가 없었다. 중세 내내 '로마 제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국력을 갖춘 나라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누가 인정을 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권위는 매우 떨어져 있고 주변의 어그로만 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 초기에는 동방에 잔존한 동로마 제국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 국가였으나, 이미 서유럽에서 영향력을 잃은 동로마 황제의 서방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형식뿐이었다. 그러던 중 800년 성탄 전야에 교황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망한지 300년도 넘은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이 사건을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 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1세로부터 811년 황제 자리를 승인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 중이던 불가리아 왕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 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100년이 안 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제국이 3분되면서 황제 명칭이 잠시 유명무실해졌으나, 독일의 오토 1세가 황제 자리를 넘겨받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자신의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키면서 다시 한번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창립한 작센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잠시 대공위 시대(황제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까지 계속하여 이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이 끊긴 이후 왕좌를 이어받은 방계 위그 카페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대혁명 이전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74] 하지만 손꼽히는 강한 국력을 가진 프랑스의 왕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명령을 받는 왕을 표어로 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래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행보를 걸었다. 그것을 위해 카페 왕조와 그 자손들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랭스에서 개최함으로서 나름대로 황제에 버금가는 신성한 권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내려받거나 인정받았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전까지 수많은 유럽 국가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할 수 없었다. 사실 9세기 무렵 크누트 대왕이 다스리던 잉글랜드, 10~11세기의 카스티야 등등에서 황제를 스스로 칭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전혀 로마적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개중에는 스스로도 외교 문서 같은 데 쓰지 못하고 국내에서 몰래 몰래 쓰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3.2.2.2. 번외: 교회의 인정
서유럽의 황제에게는 다른 대륙 국가와는 차별되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전통은 457년 레오 이후 동로마 황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서 제관을 받던 것을 시초로 볼수 있으나, 서유럽만으로 본다면 그보다 300년 뒤인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로마 교황이 거행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그 이전에는 교황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하는 관습이나 권한은 전혀 없었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위를 받기 전까지는 로마 제국 그 자체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유럽 전역의 기독교의 보호자였다. 소위 '서로마의 멸망' 이후 열린 5, 6, 7차 기독교 세계공의회 역시 당대의 동로마 황제가 소집한 것이었다.[75]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교황은 있는 그대로 말하면 '로마 총대주교'일 뿐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부하1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이는 성상 문제 등의 일을 촉매로 양측의 갈등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동로마 제국은6~7세기 사이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이때 랑고바르드족에게 밀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세력권이 남부로 쪼그라들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낸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의 제관을 요청한 것. 이를 통해 교황은 '황제를 제관해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동등한 권위를 얻고, 카롤루스 대제로서도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은' 권위를 손에 얻은 것이다.[76][77]

이 사건이 결론적으로는 서로에게는 윈윈이었지만, 당시에 둘의 관계가 밀월관계였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카롤루스는 원래는 동로마 제국과 발을 걸쳐보려고 노력하고 있었고[78], 로마 교황도 존경하기보다는 이용하기 위한 존재로 생각했다. 대관식도 교황의 작전으로 얼렁뚱땅 진행된 것으로, 카롤루스 입장에서는 내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관을 '받음당하면서' 자신이 교황의 아랫사람처럼 보이면 어쩔까 우려했다[79].

어쨌거나 로마 교황의 계략으로 연출된 이 한번의 '사건'은 그 뒤로 '관례'가 되었고,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은 교황이 집전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특히 카롤링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이후에 교황의 대관식 유무가 황제의 권위에 매우 중요해지면서, 어느새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가 되었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바로 황제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혔다. 군주를 선출하는 것은 독일 제후의 권리지만, 그렇게 뽑힌 인물이 황제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리는 로마 교황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기 전에는 격이 떨어져서 ' 로마왕'이라고 칭해야 하며, 대립 황제와 같이 로마 교황의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하는(무효인 경우) 경우에는 격이 또 한 단계 더 떨어져서 '독일왕'이라고 했다.

이로써 교황의 권위는 수직상승하여 서유럽 열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최전성기의 교황은 제위에 올라있는 황제도 파문 한방에 굴복하게 만드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사실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 꿇은 것까지만 기억하는데, 파문을 취소받자마자 군대를 이끌고와서 교황을 교체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는 혼란기에 회사가 세워지고 없어지듯이 없어지는데 교회는 그대로 있었기 때문. 처음에는 별 힘도 권위도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도 커지고 오랬동안 잘 버텨온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강한 힘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 힘도, 권능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인 것이 이 체제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국가들의 틀이 잡히고 각자의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젠 교회의 인정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가 칼을 갈고 닦은 뒤 1081년 교황을 폐위해 버리는 복수를 한 사건이 대표적.

그래도 교황이 제관을 씌워주는 일은 유지되었지만 이미 실추되기 시작한 교황권이 아비뇽 유수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 파괴를 한 이후 완전히 폐지 되었다. 카를 5세의 재위 중 사코 디 로마로 카를 5세의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고 로마를 약탈함으로서 이후 교황이 어떻게 대항해 볼 엄두가 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교개혁이 터지는 바람에 교황은 세속은 커녕 종교적으로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교황이 '손수' 제관을 씌워준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형식적인 인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때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다만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서유럽 황제와는 사정이 달랐다. 로마 제국 자체였기에 그 누구의 인정이 굳이 필요없는 권위와 정통성이 있었고 때문에 굳이 다른 누군가의 축성을 꼭 받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황위에 대해서라면 교황이 개입할 건덕지는 없었고, 서유럽 가톨릭 세계와 동유럽 정교회 세계는 두 황제와 두 총대주교를 구심점으로 삼으며 정신적으로 자연스럽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동로마 제국이 신성로마제국보다 일찍 망한 뒤에 발생했는데,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이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칭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출된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는 메흐메트 2세를 로마 황제로 인정해버렸다. 오스만 제국도 셀림 1세 이후로는 5개의 총대주교구 중 로마를 제외한 4개를 보유하고 있으니[80] 어떤 의미에서는 나름대로 기독교의 보호자라고 할 만은 했다.

문제는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것이었고, 교황은 이딴 것을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세계관에서 오스만 제국이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는 멸망한 것 취급을 받았으며, 거꾸로 나머지 4개 총대주교의 권위가 바닥을 치게 되었다.[81]

러시아도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 칭제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근거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였고,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신생 러시아 제국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했다.(제2의 로마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이때 사용한 칭호 차르(Tsar)는 유럽의 공용어 라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칭제를 한 것이 아니라 'Tsar를 칭한 것' 정도로 취급당하며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표트르 1세가 스웨덴과 싸워 이긴 후 차르 대신 라틴어로 황제(Imperator)라고 선포한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비중있게 알려졌다. 이후 나폴레옹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점차 유럽 전체에서 열강으로서의 위신이 높아지면서 이때쯤에는 서유럽에서도 대충 황제라고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3.2.3. 근대 이후

3.2.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며 서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격에도 변화가 생긴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를 기점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교황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선제후들의 선거로만 황제직에 올랐다.

막시밀리안 1세 이전의 황제는 선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일단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머물렀다. 이후 교황의 대관식이 치뤄진 후에야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교황은 대관식을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며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즉 교황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황제로 선출되는 경우 그에게 대관식을 치뤄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선출된 황제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머물고 만다. 실제로 역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된 이들 중 제법 많은 이들이 황제 대관을 받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로마왕에 머물고 말았다.

중세 교황의 위세가 절정에 이른 시절에 황제 자리가 비게 되는 대공위 시대가 발생하기도 했고,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들은 한동안 교황 대관을 받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교황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연이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 14세기 기근과 흑사병 등의 재난,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 분열 등을 거치며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356년 카를 4세 금인칙서를 통해 황제 선출 방식을 명문화했다. 이 과정에서 카를 4세는 제후들의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황제 권한을 양보하여 황권이 더욱 유명무실해지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황제 선출과정에서 교황의 관여를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15세기 합스부르크 가문 막시밀리안 1세는 선거에서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물론이고 어떠한 세속 군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직함을 선출된 황제를 의미하는 Imperator Romanus Electus (Elected Roman Emperor)로 바꾸었다. 이 직함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의 공식 직함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들은 로마의 교황 대관식 없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카를 5세가 마지막으로 교황의 대관을 받은 황제가 되었다. 이전까지의 황제와는 달리 그는 대관을 받아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된 다음 대관도 받은 것이다. 그의 대관식은 황위에 오른지 11년 뒤에야 치뤄졌으며, 교황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추진한 것이다. 예전만큼의 중요성은 없는 단순한 세레머니에 불과했다.
3.2.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이어 서유럽에서 황제가 된 이는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1804년에 프랑스 상원의 요청을 받아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가 되고 프랑스 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명목상 프랑스 혁명으로 대두된 혁명 정신과 공화국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프랑스라는 국가를 소유한 황제'의 의미가 되는 '프랑스 황제'가 아닌 '프랑스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썼고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국가원수가 황제인 공화정'으로 포장했지만,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새로운 황제의 등장'으로 간주했다.

이미 근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황제 이래 황제 제위에 대한 중세시대의 규칙은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갔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권위라는 것은 덕지덕지 붙이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나름 명목상 제위에 대한 조건을 충족하려고 했는데,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제3의 반열'이라는 사상을 급조해 로마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의 인정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열었는데 본인이 로마로 가지 않고 교황을 파리로 직접 오도록 했다(...) 또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기는 했는데, 왕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 또한 나폴레옹은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 로마왕에 책봉하고, 점령지를 제후국으로 삼으면서 최대한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오직 신성 로마 제국 황제만이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권신수설의 논리가 무너지고 힘에 의해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로마 제국의 계승과는 별개로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를 자처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 '황제 인플레' 현상이 나타났다. 교황의 대관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는 프랑스 제국에 꿀리지 않기 위해 1804년에 합스부르크 세습령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프란츠 2세는 두 개의 황제 제위를 가졌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패배로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를 내려놓았으며, 이로서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그러나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했으며, 외교적으로도 계속 황제 대우를 받았다. 나폴레옹 또한 현실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를 인정하였는데,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려 하였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나폴레옹 이후 루이 18세 샤를 10세는 다시 왕을 칭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들어선 공화정의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 3세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코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호엔촐레른 가문 프로이센 왕국도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황제의 명분은 당연하게도 독일 땅에 세워졌던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제후국들이 거의 그대로 독일제국의 제후국이 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때와 달리 제후들의 실권은 크게 제한되었고, 제국은 황제의 권한이 크게 강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진작부터 서유럽에서 황제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버렸기 때문에 독일 제국 성립 이후 50년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유럽에서 황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3.2.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보았듯이 유럽인들은 황위에 있어서 정통성과 권위를 극히 중시했지만, 정작 유럽 밖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아 그런 게 있나보다'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 제국이 유일했으므로 '유럽 내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 뿐이지만, '그 외의 땅'에 대해선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다른 황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

유럽의 열강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자, 영국에서도 황제 직위에 대해 갈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의 수상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모시는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다. 즉 식민지였던 무굴 제국의 타이틀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의 칭호를 추가했던 것. 유럽인의 관념에서는 이것이 통하는 방법이기는 했다. 왜냐면 중세 유럽의 모든 국가와 칭호는 개인이 아닌 땅에 귀속되며 세속은 칭호와 국가가 아닌 그 칭호와 국가를 가진 땅을 넘김으로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황제 자체도 고대 로마의 세습 가능한 관직(또는 특권)에 가까운 것에서 출발한 것이고. 하지만 이런 시도는 영국 국내 여론에서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취급되어 조롱받았고, 빅토리아 여왕은 Empress라고 불리기보다는 여전히 Queen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런 꼼수의 원조는 포르투갈 브라질 제국이다. 인도제국보다 50년 빠르다. 더 웃긴 건 인도제국은 형식적으로라도 원래 있던 무굴제국으로부터 제국 타이틀을 얻었는데 브라질 제국은 그냥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와 브라질 사람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거다. 물론 브라질 땅에 로마 제국이 힘을 미친 적이 없으니 빈 땅에 황위를 제수해버리는 것 자체도 유럽적인 관념에서는 틀린 것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결국 2개월 만에 왕조 가문만 그대로고 나라와 군주는 따로 놀았다.

2차 대전 때로 가게 되면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고 에티오피아 황제 직위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겸임하면서 이런식으로 황제를 자칭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 후 1943년 이탈리아가 추축국을 탈퇴하면서 에티오피아 황제 자칭은 폐지했고, 몇 년 뒤 군주제도 소멸해버렸다.
3.2.3.4. 19세기 서양에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

3.3. 인도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최초의 황제로 본다. 그리고 그의 손자 아소카 전륜성왕 황제(Samraat Cakravartin)인정한다. 그 후 라자(서구의 Prince에 비견되는 칭호다.) 칭호를 쓰는 북인도, 데칸, 벵갈의 여러 왕조가 난립했고 이슬람 세력이 진입해오면서 술탄이란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이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파디샤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황제들은 미르자라는 칭호를 쓰기도 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어로 아미르의 아들이라는 뜻의 amirzadeh가 변형된 것으로 아미르 티무르의 후손이란 의미에서 쓴 것이지 황제격과는 관련이 없다. 마라타 제국에서는 전통적인 국왕의 의미인 마하라자(직역하면 대왕)에 더해서 마하라자디라자(왕중왕)나 차트라파티란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영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한 후 인도제국을 성립하자 영국왕이 인도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3.4. 서아시아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럽의 imperator에 비견될 만한 지위로는 고대 서아시아의 왕중왕(王中王, king of kings)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 군주들을 평정한 앗시리아 제국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사용 시기로 따지면 황제격 칭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이후 서아시아 일대를 1100여 년간 지배한 이란계 제국들( 아케메네스 왕조, 아르사케스 왕조, 사산 왕조)의 군주들이 모두 군주의 기본 호칭으로 왕중왕을 쓰면서 로마의 imperator augustus에 맞먹는 황제격의 칭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산 왕조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된 이후 중세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식 군주 칭호가 더 널리 쓰여 왕중왕이라는 칭호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근세에 들어 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부활시킨 사파비 왕조 시대부터 이란의 왕중왕이라는 표현이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팔레비 왕조 시절에 '샤한샤(왕중왕)'의 공식적인 번역을 황제로 정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팔라비 왕조가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왕중왕 칭호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페르시아어 칭호 중에는 파디샤(pad-e shah, padishah)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왕(shah)들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역시 왕보다 한 단계 높은 황제격의 칭호이다. 이란 본토와 직접적 관련은 없었지만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근세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의 군주들이 군주의 기본 칭호로 이 파디샤를 썼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수장들은 신이거나 신의 위치에 준하는 자들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봉건적 수직 질서 아래 일반인들은 평생 보지도 못하고 고위 관료들조차도 황제를 만날 때는 특수한 예를 갖춰야 했다. 한마디로 황제는 형이상학적인 국가 자신 그자체였다.이집트의 파라오는 하늘에서 내려온 神 호루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살아 생전에는 神 라의 아들, 神 호루스의 지상대리자이며, 죽어서는 神 오시리스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당시의 다른 중동의 체계와 비슷하게 고위 관료들이 담당하는 직무가 군주의 개인적인 업무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곳들보다 더 심하다.(파라오의 면도담당자, 파라오의 신발담당자 등)

이슬람 문화권의 칼리프, 술탄들의 경우 보통 칼리프를 술탄의 상위 군주로 보고 황제와 왕의 관계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물론 칼리프가 명목상 술탄의 상위 군주이긴 하지만, 이미 10세기부터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여 세속 군주들의 종교적 권위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황에 더 가까울 것이다. 칼리프가 세속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초창기에는 술탄이 세속 군주의 칭호로 쓰이지 않았다. 칼리프의 지방 통제력이 무너진 뒤 사실상 독립 세력화된 지방 군주들이 명목상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프의 권위를 존중하되, 그를 대신하여 실권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왕(아랍어로 말리크, 혹은 페르시아어로 샤)을 쓰지 않고 대신 쓰기 시작한 호칭이 술탄이다.

술탄이라는 단어는 그냥 지배자 정도의 의미라서, 일반적으로 왕과 동격으로 보긴 하지만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술탄은 도시 몇 개나 지방 하나 정도를 다스리는 소국의 군주일 수도 있고, 여러 지방과 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의 군주일 수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군주의 격을 한 단계 올린다는 의미에서 술탄 중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썼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만 쓰인 특수한 경우이며 상술했듯 오스만 황제들은 술탄보다는 파디샤라는 칭호를 더 많이 썼다. 다른 대부분의 거대 이슬람 국가들(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 이집트 맘루크 왕조, 델리 맘루크 왕조 등)은 그냥 술탄, 혹은 大 술탄 정도의 칭호를 썼다.

3.5. 중앙아시아 유목제국

중앙아시아 튀르크, 몽골 문화권에서 (Khan)은 왕이나 부족장 격에 해당하며, 몽골 제국이 성장하며 황제 격에 해당하는 칭호인 Khagan(카간 혹은 카안)이 생겼다. '카안'이라는 칭호는 본래 오고타이 칸이 스스로를 타자화하기 위해 붙인 칭호이나, 몽골 제국이 팽창하며, 제국 전체를 지배하는 최고 지위의 칸을 이르는 보통명사화 된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를 "대(大)칸"으로 번역한다.

이후 몽골 제국 중국 전토를 장악하면서 몽골의 대칸이 원나라 황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대칸 지위 대신 중국의 황제가 된 것은 아니고 둘 다 겸하고 있었다.[86] 이후 원나라가 주원장에 의해 북원으로 쪼그라들어 다시 내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 북원) 이후 중국식 원 황제 지위는 포기하고 대칸 지위만 이어지다[87] 훗날 청나라가 내몽골을 정벌한 이후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 대칸의 지위도 세습하였다.[88] 그리고 투르크계인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어인 파디샤와 함께 칸호(Han)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술탄 술레이만 한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아랍식과 투르크식 군주 칭호를 같이 썼고 유럽 국가를 상대할 때에는 룸 카이세리(로마 황제)도 자칭했다.

3.6. 아프리카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에서 1889년부터 하일레 셀라시에가 폐위된 1974년까지 황제가 있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을 전설적 조상으로 한 솔로몬 왕조가 그것인데, 황통(皇統)이 3000년간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아닌 것처럼 사실 에티오피아의 황통 자체는 여러 줄기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며 3천 년 황통설은 근대 국가를 확립한 메넬리크 2세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아프리카의 말리제국에서는 황제를 만사라고 칭했고 유명한 만사로 만사 무사가 있다.

이외에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인 장 베델 보카사가 잠시 황제를 칭하고 제정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

3.7.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국가들 중에서는 아즈텍, 잉카의 군주들도 황제라고 불리며, 오세아니아의 국가들 중에서는 투이 통가 제국의 군주들을 황제라고 불린다.

4.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

4.1. 한국

  • 고려에서는 광종이나 경종 등 고려 전기에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같은 나라를 상대할 땐 외교상 황제라 하지 않았다. 중원의 천자와는 별개로 고려만의 천자를 자칭한 것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 고대왕조들은 황제라는 명칭은 사용하진 않았지만 태왕, 대왕 등의 칭호를 통해 황제국의 체제를 사용하였다. 중국에는 형식상 번국 행세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의 군주와 동등하다는 생각을 한 것. 사실 조선도 관행적으로 황제국 격식을 섞어 썼다가 정유재란 명나라의 정응태한테 트집이 잡히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묘호를 쓰는 것도 황제만 하는 건데 조선에서 썼다가 트집을 잡힌 것.
  • 조선에서 고종이 1894년에 군주의 지위를 대군주로 올렸는데 이게 황제에 준한 건지 애매하다. 일단 호칭으로는 '대군주 폐하'로 불리긴 했다. 사실 황제보다는 서양 국가들의 king을 참고해서[89] 황제의 간섭을 안 받는 독자적인 칭호를 만들어낸 것에 가깝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오랜 관점에서는 애매한 칭호이기 때문에 결국 3년 뒤 칭호를 황제로 업그레이드시켰다.

4.2. 스페인

11세기 무렵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을 전 스페인의 황제로 자칭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위에 나온것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명목상 로마 제국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불평을 대차게 사고, 그가 죽자마자 이 칭호는 폐지되었다.

4.3. 비잔틴 제국 부흥운동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잠시 라틴 제국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 재건을 위해 서 아나톨리아에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의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옛 트라페주스) 지방에 옛 황제 가문이었던 콤네노스 가문의 트레비존드 제국이 생겨났으며, 니케아 제국은 후에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이 제위를 찬탈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해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4.4. 불가리아

1946년까지 불가리아의 공식 국호는 불가리아어로 차르스트보 벌가리야(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로 불가리아의 왕은 불가리아어로는 '차르'로 불렀다. 그러나 이 국호는 타 언어로는 "불가리아 왕국"이라 번역되고 불가리아의 차르는 "왕"으로 번역된다. 비슷한 예로는 19세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그리스 왕국이 있다. 국왕을 동로마 제국 황제가 썼던 ' 바실레우스' 칭호로 불렀다.

4.5. 이탈리아

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는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하고 인도 제국을 본따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이탈리아 국왕 겸 에티오피아의 황제 칭호를 주었다.[90]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사칭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1941년 영국에 의해 에티오피아 제국이 해방되면서 명목만 남았다. 게다가 1943년 9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을 탈퇴하자 허울뿐인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도 공식 폐지되었다.

4.6. 추존 황제

수 많은 왕조에서는 살아생전에 황제를 한 적이 없지만 후손을 잘 둬서 죽은 이후 황제로 추서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삼국지에만 여러명이 등장하는데 그 예가 조등, 조숭, 조조(이상 위나라), 손종, 손견(이상 오나라), 사마의(진나라) 등이 있다. 조선왕조도 대한제국 선포 후 건국자인 태조 정조에서 철종까지의 임금들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5. 참칭 황제

나라에 혼란이 올 때 실제로는 황제도 아니면서 황제라고 사칭하거나 황위계승권자도 아니면서 황위계승권자라고 사칭해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가짜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삼국지만 해도 원술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일본의 경우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천황을 사칭했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 가짜 드미트리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좀 애매한것이 예를들어 한고조도 딱히 이세황제에게 양위를 받은 것은 아니기에 진나라 입장에서는 원술이나 다를것 없는 참칭자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역사의 승자는 한나라였기 때문에 유방을 참칭자라 부르지 않고 정식 황제로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유방이 어느 정도 할거하다 무너졌으면 평가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원술도 만약에 성공하여 한나라 이후에 ' 중나라'(仲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으면 그도 유방과 같이 평가되었을것이다. 또한 남북조시대에는 남북이 서로 상대방을 참칭 황제라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반란이 성공하면 혁명이고, 혁명이 실패하면 반란이듯이 창업군주나 실패한 황위 즉위시도도 그런 경향이 있다. 또한 성패와 별개로 촉한정통론이나 조위정통론 같이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도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참칭황제는 실은 실패한 황제에 더 가깝다.

5.1. 중국

5.1.1. 신중국(新中国) 이전

  • 개등(蓋登, ? ~ 165) - 165년 겨울 10월에 발해현에서 태상황제를 칭하면서 옥 도장, 홀, 벽, 철권을 준비하고 부서를 배치했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공손술
  • 대이(戴異, ? ~ 166) - 166년에 패국에서 글자가 없는 황금 도장을 얻어 광릉 사람 용상 등과 함께 우물에 제사를 지내고 부서를 지어 태상황이라고 칭하다가 잡혀 죽었다.
  • 마면(馬勉, ? ~ 145) - 144년 11월에 구강에서 서봉과 함께 한나라의 성읍을 공격하고 불태웠으며, 145년 3월에는 황제를 칭했고 당도에 있는 산 속에 영루를 지어 연호를 세우고 백관을 두었다. 등무의 공격을 받아 범용, 주생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 배우(裵優, ? ~ 150) - 150년 2월에 우부풍에서 황제를 자칭하다가 잡혀 죽었다.
  • 이견(李堅, ? ~ 147) - 진류현에서 황제를 자칭하다가 잡혀 죽었다.
  • 이헌
  • 화맹(華孟, ? ~ 145) - 역양현에서 흑제(黑帝)를 자칭해 구강태수 양잠을 공격해 죽였고 등무의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다.
  • 궐선
  • 마상
  • 원술
  • 장거
  • 허창

5.1.2. 중화인민공화국

  • 스딩우(石顶武:1947~1953), 스진신(石金鑫: 1983) - 스딩우는 대중화불국이라는 거창한 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올랐으나, 중공당국에 의해 반란죄로 체포되어 처형. 아들 스진신은 후주가 되어 국가를 재건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처벌받는다.
  • 딩싱라이(丁兴来:1981-1990) - 사이비교주. 도덕금문교를 창시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도덕금문황제라고(...) 자칭. 재상과 비빈을 책봉했으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10년후에 발견되었다. 체포후 처벌.
  • 장칭안(张清安:1982) - 중원청정국의 창업자. 승상과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장제스를 위국왕으로 봉하고(...) 인민공화국을 토벌하기 위한 친정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역시 관계당국에 체포된다.
  • 린원융(林文勇:1980-1982) - 성조국(聖朝國)의 창업자. 역시 공안당국에 체포된다.
  • 차오자위안(曹家元:1982) - 옥황대제(...)를 자칭했다.
  • 리청푸(李成福: 1990~1992) - 만순천국을 세웠으나 경찰 세 명한테 체포당한다.
  • 쩡잉룽(曾应龙) - 계획생육정책에 반기를 들고 대유국을 세운다. 군사를 일으켜 병원을 점거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을 포로로 삼았으나 인민해방군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찰에 허무하게 당했던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군대까지 출동시켰으니 그나마 반란다운 반란.

5.2. 한국

5.3. 일본

5.4. 베트남

5.5. 러시아

5.6. 미국

  • 노턴 1세: 대담하게도 스스로를 미국의 황제라고 자칭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황제를 자칭한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엄청난 대인배에다가 사람을 인종, 빈부에 따라 차별하는 것을 싫어했던 인도주의자였기에 이 항목에 있는 다른 가짜 황제들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

5.7. 세르비아

  • 시메온 우로스
  • 존 우로스
  • 스메데레보의 폴

5.8. 루마니아

  • 조번 네바드

6.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

한국에서는 보통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거나,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황제라는 최고의 미칭을 붙여주는 사례가 종종 있다. 다만 이러한 용법은 한국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이는 별명으로 특히 서양권에서는 '황제(Emperor)'라는 칭호 자체가 천하를 주름 잡거나 패권을 거머쥔 왕의 상위 단계라는 느낌 보다는 로마가 무너진 이후 로마를 계승하는 군주에게 주는 고유 명사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황제라는 별명 보다는 오히려 '왕(King)'이 더 의도하는 바와 어울린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런 왕(King)을 최고의 미칭으로 더 여긴다.

7.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황제/캐릭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같이보기



[1] Em(Im, In)+Pir(Par=준비하다, 명령하다)의 합성어로 제국, 제왕의 통치권, 절대 통치권 등의 의미로 발전하였다. [2] 대표적으로 나폴레옹 프랑스 제국 대한제국. [3] 천자랑 황제는 같은 개념이지만 뉘앙스가 대략 황제는 정치적 의미, 천자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 마치 단군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왕검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뜻인 것과 유사하다. [4] 사실 천자가 황제보다 더 오래된 어휘이다. 본래 왕(王)으로 칭해지던 천자의 호칭을 한층 격을 높인 것이 황제인 것. 따라서 중국 천자라고 하면 선진시대의 왕과 진(秦) 시황제 이후의 황제들을 포괄한다. [5] 로마제국을 개창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장 높게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 임페라토르(Imperator, 전 군의 임페리움을 지닌 자/군 최고사령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제사장)>, 프린켑스(Princeps, 시민의 제1인자),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Tribunicia potestas, 호민관의 특권을 가진 자)등의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각각이 모두 로마 공화정체에서는 극존칭들이였지만, 황제라는 의미와 동일한 것은 아니였다.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이를 원수정이라고도 하는데, 원수로 번역할 수 있는 명칭은 프린켑스이다. 이후 동방의 전제군주제가 수용되면서 황제의 의미를 가진 명칭은 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부황제(副皇帝)로 카이사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이사르로부터 승계받은 군단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임페라토르라는 명칭도 황제의 의미로 쓰였다. [6] 서주 시대 청동기에는 황상제(皇上帝)라는 낱말이 쓰여 있는데 위대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 상서》 여형(呂刑)편에서 이 황상제는 한 글자씩 빠져서 "황제"와 "상제"로 나온다.1851년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은 기독교의 신을 天父上主皇上帝라고 불렀다. [7] 백스터-사가르(Baxter-Sagart)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ŋ/ [8] Baxter-Sagart의 상고음 재구 소리값은 /*ɢʷˤaŋ tˤek-s/이다. 중세 소리값인 중고음으로는 /ɦwɑŋtei/, 현대 표준중국어로는 huángdì라고 읽는다. 청나라를 통치한 만주 황실의 만주어 발음으로는 ᡥᡡᠸᠠᠩᡩᡳ(hūwangdi)이다. [9] 실제로 3황(천황, 지황, 태황 혹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은 사마천의 시대에 이미 전설 속 인물로 여겨졌다. 반면에 5제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전근대 동아시아인들이 역사상 가장 태평한 시대로 미화하는 요순 시대의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은 5제의 마지막 2명에 해당한다. [10] 확실히 하늘을 지칭하는 명칭은 상제였고, 황제의 제호(帝號)는 ~帝였기에 이에 맞겠지만, 시황제가 처음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을 때에도 이렇게 생각하였을 지는 미지수이다. 무엇보다도 진나라는 후대 왕조들의 제호(帝號) 법과는 다르게 시황제를 시작으로 2세, 3세 황제 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11] 소설 초한지에서는 항우가 자신의 호칭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 범증이 유방의 책사 장량을 위태롭게 하고자 장량에게 호칭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눈치챈 장량은 항우에게 3황과 5제의 칭호를 설명(인의로 천하를 교화하고, 덕으로 통치하는 자)하였으나, 항우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기에 다음의 것을 물었고, 춘추오패(왕에게 충성하며, 제후들을 통솔하여 이민족을 방비하고, 정의를 세우는 자)를 설명하자 마음에 들어하는 것으로 나온다. 나중에 범증은 '패' 라는 명칭은 천하를 경영할 만한 호칭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항우가 그냥 패와 왕을 합쳐서 사용하였다. [12] 단 예외가 있었으니 흉노 금나라다. [13] 해릉왕의 남침 실패 이후에 이 군신관계는 숙질관계로 바뀐다. [14]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초나라라는 뜻에서 위초(僞楚)라고 불렀다. 괴뢰 황제의 성을 따서 장초(張楚)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난징인 금릉(金陵)이었다. [15]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제나라라는 뜻에서 위제(僞齊)라고 불렀다. 괴뢰 황제의 성을 따서 유제(劉齊)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한단(邯鄲)인 대명부(大名府)였다. 참고로 한단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였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지만 새로 점령한 장강 이북 지역의 한족들을 당장 직접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대신 북송의 신하였던 장방창(張邦昌)과 유예(劉豫)를 각각 괴뢰 황제로 책봉했던 것. 그런데 초나라 황제로 책봉된 장방창은 금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금나라가 " 변경(북송 옛 수도)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 없다 이거지?"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만 억지로 황제 행세를 했다(...). 하지만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남송으로 도망쳐 버려 초나라 건국이 취소됐고, 유예는 어쨌든 제나라 황제로 버텼으나 남송에 털렸고 결국 금·남송 간 합의에 따라 폐위된다(...). 대신 유예는 금나라 황제에 의해 촉왕(蜀王)으로 새로 책봉되었다. [16] 한족이라고 해서 천왕이라고 칭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태평천국의 군주가 그러하다. [17] 간혹 현대 중국이나 대만 국민정부의 독재자들이 황제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독재를 비꼬기 위한 비유일 뿐 실제로는 공화정체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진짜 황제와는 차이가 있다. [18] 김주원 [19] 경순왕 [20] 이 중에서 천황은 끝까지 살아남어 현대에도 있다. [21] 황실의 '태자', '태후'나 신하의 벼슬인 '태사', '태위' 같이 태(太)자 들어가는 것들은 천자국의 법식들이다. [22] 무신정권의 복잡한 상황에서 최충헌 주도로 형인 명종 왕좌에서 쫓아내고 세자와 아들들이 아닌 동생 신종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전에 황태제로 임명하였다. 조선왕조와 비교하면 경종의 후임으로 동생 영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왕세자였다. [23] 다만 이건 천자국을 지향하지 않은 조선도 사용하긴 했다. 그래서 나중에 청나라에서 이것으로 시비를 걸자 고려때 부터 관용적으로 사용했던 것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24] 조선같은경우 제후국의 예로 6조를 사용 했다. [25] 예법상 천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지낸다. [26] 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인 도화견문지에 보면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27] 다만 나중엔 관계가 역전되었다. [28] 이정묘지명에는 '무릇 우리 황제(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 황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이라는 대목에 친왕이 나온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해주목에는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라는 대목에 친왕이 나온다.' [29] 정간왕 [30] 종실 원(源) [31] 정종의 3남 [32] 인종의 2남 [33] 명종 [34] 현종의 4남 [35] 최향 [36] 이자겸 [37] 최충헌 [38] 이자겸 [39] 김준 [40]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을 통해 통천관과 옥대의 사용을 알 수 있다. [41] 제후국의 법도로는 천세(千歲)라 해야한다. [42] 제후국의 법도로는 '전문(箋文)'을 받아야 한다. 유명한 표문으로 출사표가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황제국의 법도를 따랐기 때문에 김부식 삼국사기 인종에게 바치면서 진삼국사기표라는 표문을 올렸다. 만약 원간섭기나 조선시대였다면 '진삼국사기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43] 정확히 따지면 대왕(大王)이다. 고려 뿐만 아니라 조선도 흔히 (王)으로 알고 있지만 단순미칭이 아닌 대(大)자가 항상 붙어 고유명사로서 대왕이었다. 지금은 세종대왕같이 훌륭한 임금만 대왕이라고 하나 실은 모두 다 대왕이었다. 단 시호에 '대(大)'만 붙인게 아닌 앞에 위대하고 고귀하고 존귀하고 등등 시호글자가 덕지덕지 붙고 꼭 마지막에 '대(大)'를 붙여서 딱히 '대(大)'만 붙인건 아니기 때문에 보통 왕으로 여긴다. 그러나 시호의 다른 글자는 달라도 대왕은 다 동일하기에 대왕으로 보는것이 맞다. 예를 들어 세종은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철종은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이런식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모모대왕은' 이런식의 기록이 많다. 고려의 경우도 헌종은'정비공상대왕'(定比恭殤大王), 명종은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 이런식이었다. 다만 서양 문물이 들어온 후에는 서양식으로 훌륭한 왕만 대왕을 붙이는 방식이 정립되었다. [44] 황실의 '태자', '태후'나 신하의 벼슬인 '태사', '태위' 같이 태(太)자 들어가는 것들은 천자국의 법식들이다. [45] 신성제왕이라는 표현은 보이나 기록이 부족하다. 또한 그래봤자 외왕내제의 체제 안에서의 용어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외왕내제 하지 않은 5호 16국하고는 상황이 다르다. [46] 아직 원나라가 분화되기 전이었다. [47] 고려 왕실 입장에서는 무신정권이라는 여우를 몰아내고 원나라라는 호랑이를 부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48] 조선 초에는 그냥 고려시대와 비슷하게 가다가 세종대왕이 바꾸라그래서 바꿨다. [49] 성종이 제후국의 격식에 맞지 않는다고 앞으로 쓰지말고 이제까지 한국사의 왕들이 쓴것도 다 기록을 수정하자 하였으나 김종직이 그거 다 바꾸려면 너무 일이 커진다고 반대했다. 그 후로 흐지부지되어 그냥 계속 사용했는데 이것 때문에 청나라와 시비가 붙게되어 조선측에서는 전부터 쓰다보니 관례적으로 쓰는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다고 변명했고 청나라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아서 이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50] 그냥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고 치욕으로 여겼다.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은 당시 왕이었던 인조가 무릎까지 꿇어야 했고 만주족은 실은 그 근본이 여진족으로 조선을 부모로 섬기고 조공을 바치며 사대하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반농반목의 수렵생활을 하는 종족이라 스스로 중화의 우등생이라 자처하여 문명국이라 여기던 조선이 원래는 교화대상으로 삼던 야만족이었으니 그냥 적국에게 숙이는것 이상의 수치심을 느꼈다. [51] 사실 고종 대군주 선포나 칭제건원에 그다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52] 합방 당시 황제였던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상황이었던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이 되고 친왕들도 공이 되고 공들은 조선귀족으로 한 단계식 강등 당했다. [53] 와카타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는 명문이 유랴쿠 천황의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에서 발견 [54] 고대에는 주로 훈독을 하여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로 발음했으며, 중세 이후로는 점차 한자 그 자체대로 음독하기 시작하여 덴와(てんわう), 덴오(てんおう)를 거쳐 현재는 덴노(てんのう)라고 발음하고 있다. [55] 예컨대 신숙주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며 天皇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였고 일본 황실의 내력에 대해서 기록했다. [56] 흥선대원군 집권기이다. [57] 이익 성호사설에서 미래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것임을 어느정도 예측하였다. [58] 현대의 표준 베트남어 발음으로는 호앙데(hoàng đế). [59] 베트남의 재독립 이전까지 칭제했던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 시대인 722년에 마이툭로안(梅叔鸞, Mai Thúc Loan)이 거병하여 매흑제(梅黑帝)로 자처하였지만 신속히 진압당했다. [60] 황제와 패왕 둘 다, 자기 휘하의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지를 통치하는 제후를 거느리고 다스리는 군주(君主)이자 군주들 중 가장 높은 권위와 지위를 지니는 군주다. 사실상 개념이나 용례는 차이점 없이 완전히 동일하다. 실제로, 역사상 유일하게 패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항우도 재위 기간이 짧았을 뿐,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역사서 '사기'에서 항우를 당시 전중국의 지배자(황제)로 간주하고 황제의 일을 기록하는 '본기'에 적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61] 동아시아의 황제는 그 시작부터 천하 제패를 스스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려 보고하는 제사장과 같은 위치였다. 황제 등장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부덕하여 천명이 다른 필부에게 옮겨가는 개념'이 등장했으므로 황제=신의 등식은 엄밀히 말해 성립하지 않는다. [62]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우상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삼두정 시절부터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철저히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는 호칭을 썼다. [63] 카이사르가 행정수반인 집정관의 비상시 관직인 독재관으로써 정권을 획득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기에,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인 공직에서 물러나는 대신에 비토권을 가진 호민관의 특권으로써 로마의 행정과 입법에대한 권한을 장악하였고, 카이사르 사망 이후 유산으로 받은 군단에 대한 지휘권은 원로원의 인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였지만, 대외적으로 보이기에 좋게 보이기 위하여서 반납하였다고 되돌려 받는 모습을 취하였다.(물론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군단을 바탕으로 안토니오스와 클레오파트라와 싸우면서 원로원으로부터 군단의 확장을 허가받기는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이전시기부터 로마의 군대는 장군이나 재력가들에게 클리엔텔라 관계로 귀속된 사병과 같아졌기에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다.) [64] 대표적으로 이집트 [65] 현대와 같은 체계적인 국민투표 시스템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민회를 통한 결의' 라는것은 공정한 대중의 의견수렴이 아니라 포럼을 지지자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민회의 결의'로 포장하여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이 한 도시에 모여있던 도시국가 시대와 달리 광대한 제국 전역에 시민권자들이 흩어져 있는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명색이 황제인 자가 사람을 못 모을 리는 없으니 이런 민회의 의결이란 단순한 요식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 것. [66] 호민관 특권이 사실상 전제군주권과 다름없이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반면 호민관 특권의 명분상 권력이 군사력이나 자금력과 같은 현실권력(=원로원) 앞에서는 생각보다 무력하다는 한계를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 였다.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호민관들은 대부분 호민관 임기를 마친 후 원로원 의원이 되어 정치경력을 이어갔다. 즉 로마인들의 정치관념에서는 '호민관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면 승진하여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 말하자면 호민관보다 원로원 의원이 더 격이 높은 직급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이건 좀 이상한 것이... 이렇게 원로원 의원이 된다고 해 봤자 행사 가능한 영향력은 고작 300표중의 한 표, 그것도 의회제 체제 내에서는 필연적으로 영향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신참자의 한 표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고대 로마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원로원에서 300표중의 한 표라면 현대로 치면 국회의원 한 명의 권력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이긴 한데, 정작 원로원 의원보다 격이 낮다는 호민관은 단독으로 원로원 결의를 거부하거나 원로원 결의와 동등한 입법행위를 할 수 있으니 혼자서 원로원 전체와 맞먹을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물론 평민집회의 지지를 얻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애초에 호민관 자체가 평민집회에서 선출되는 관직이다. 즉 호민관으로 당선된 시점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합리적인 입법안이라면 충분히 지지 확보를 기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 점에 주목한 그라쿠스 형제는 어차피 원로원에서 주장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불보듯 뻔한 친 평민적 정책을 호민관의 권한을 통해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당대 로마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전까지 다른 호민관들이 죄다 바보라서 호민관 특권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몰라서 못 사용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고... 결국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영향력을 가진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경고라는 새로운 수단까지 만들어내어 그라쿠스 형제의 계획을 무너트리고 말았던 것이다.(물론 그라쿠스 형제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원로원이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반격해 올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말하자면 원로원의 행태가 그라쿠스 형제의 예상보다 좀 더 뻔뻔하고 파렴치했던 것에 가깝다.) 결국 똑같이 호민관 특권을 이용하여 로마의 국정을 장악하려던 아우구스투스와 그라크스 형제 사이의 차이는 단 하나였다. 명분상의 권력을 뒷받침해줄 현실권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67]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해괴한 해석이지만... 유럽의 경우 고대뿐 아니라 중세, 심지어 근대 무렵까지도 관직을 그 사람의 '재산'으로 여겨 사고 팔거나 상속하는 것을 그리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68] 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영토인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재물을 바탕으로 사병집단인 군단에 충성을 받는 인물이였고, 공식적인 지위가 평민들의 대표였기에 평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오락<콜로세움>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굉장히 복잡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인데, 로마라는 국가는 황제 개인의 재산으로써 방위하고 운영될 뿐, 여타 귀족들은 공직에 있을 때에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설 뿐이였으며, 평민들은 로마가 팽창하면서 대다수들이 빈민화되면서 사실 시작부터 붕괴되는 체계였다, 다만 대외원정을 통한 재물획득과 황제의 개인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유지될 뿐이였다. 그러나 가장 찬란했다는 5현제시기에 로마의 팽창이 멈추면서 붕괴가 시작되었고, 5현제라는 현명한 자에게 대를 이어가는 제도가 마지막황제인 아우렐리우스에 의해서 파괴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만든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69] 앞서 이야기하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군단을 상속받았고, 이집트라는 부유한 젖소를 획득함으로 사적인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젖소라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비용<군단 유지비와 빈민층 복지-콜로세움 운영비와 음식비 지출, 어찌되었든 황제는 평민들의 대표로서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야하는 존재였기에 불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책임이 있었다.->을 모두 충당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였다. 이를 그나마 채우던 것이 외정으로 적들을 약탈하는 것이였는데, 로마의 팽창이 한계가 되자 이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돈으로 산 충성은 돈으로 무너지기에 군대는 자신들을 보다 더 잘 대우할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게 된 것이다. [70] 혼란한 제국을 평정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가 지명한 후계자는 조정자로서 권한을 가졌지만, 각자가 군대를 가진 세력가들 사이에서 황제와 부제로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설사 임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세력가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지고, 종국에는 또다시 혼란이 올 수 밖에는 없는 구조였다. [71] 당시 동방지역은 서방지역보다 발전되고, 번화한 지역이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방에 군주제를 채용하면서, 오랜기간 쇠락하였지만 공화정의 향수가 남아 있던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조성하였다. [72] 동아시아의 경우는 특정 왕조의 종말은 곧 국가의 교체로 보았다.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왕조가 교체되면 국가 이름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왕조의 단절을 국가의 멸망으로 보지 않는 견해는 비유럽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한국사의 신라만 하더라도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던 초기에는 세 가문이 왕을 돌려먹는 등 현대 동아시아인의 관점으로는 꽤 이질적이었다.(그러나 王의 후계자로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 혹은 딸까지 포함되는 것<다만 혼인이 가능한 족속이 박, 석, 김씨로 제한>이였기에 사실은 많이 괴이한 것은 아니다.) [73] 이는 동아시아식 왕조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유럽식 군주와 달리, 동아시아식 군주는 많은 첩(후궁)을 거느리기에 혈통이 끊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서양의 왕이나 황제들 역시 개인적으로 정부를 두었고 정부의 자식도 있었지만, 정부는 첩과 달리 법적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소생은 모두 사생아로 취급되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74] 사실 그 이전에 샤를 8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전통 로마 제국 황제의 타이틀도 명목상 보유하고 있긴 했으나, 스페인도 안드레아스의 유언을 통해 동일한 타이틀을 확보한 상태였고, 따지고 보면 공식적인 타이틀 자체는 '임페라토르 콘스탄티노폴리타누스(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즉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였다. 더구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정복된 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위와는 달리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계승한 수단이나 경로도 좀 그렇고(...) 주권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이탈리아로 도망친 그리스인들에게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누구 앞에 내놓기 영 민망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75] 비록 제관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가진 칭호 중에 하나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계속해서 황제가 가지고 있다고 했기에 동로마의 황제는 자의적으로 교황으로써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참고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현재 로마 교황의 비공식적인 칭호 중에 하나로써 사용된다.) [76] 사실 5대 총대주교라고 지칭하지만,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는 비교적 정통성을 가진 직위인 것과는 다르게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뒤늦게 만들어진 자리였다. 다만 예루살렘은 그 자체적인 중요도에서 넘어 갈 수 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수도가 이전되면서 높아진 것이였다. 이슬람이 커지면서 안티오크와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넘어가게 된 이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기독교 사회에서 2인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의 후계를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가장 앞선 주교였고, 알렉산드리아는 이슬람에게 넘어가지 전까지도 기독교 사회에서 2인자로 공인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아프리카의 교황을 겸하였다. 지금의 아프리카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로마에서도 이 명칭을 인정했다. 안티오크는 시리아와 아시아를 담당하던 곳이였으나, 예루살렘이 총대주교가 되면서 약화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가 안티오크 교구에서 나왔음을 보면 오래되고 정통성을 가진 곳이였다. [77] 초기 기독교가 한참 성장하던 당시, 로마 제국 내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영어로 이교도를 뜻하는 pagan과 농부, 시골뜨기를 뜻하는 peasant가 모두 라틴어 paganus를 어원으로 하는 것이 이 때문. 따라서 로마 제국 내에서 대도시=거대 기독교 공동체의 본거지였던 것이며, 이 점에서 로마 제국의 3대 대도시였던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에 총대주교구가 설치된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것. 이에 비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 명색이 새로운 수도(새로운 로마)인데 총대주교가 없으면 격에 어울리지 않으니 총대주교구를 설치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구 2019년 현재 인구 30만 수준으로 지방도시치고도 아주 크다고 하기는 어려운 세종특별자치시지만 주요 행정기관이 이전된 일종의 제 2 수도 역할을 하나는 점을 감안하여 광역지자체로 만들어준 것과 비슷한 셈.(물론 이후 시간이 지나며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최대의 대도시로 성장하지만 이건 한참 나중의 일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대주교구의 경우 자체적인 규모보다는 예수의 탄생지라는 상징성 때문에 총대주교가 부임한 곳으로, 이는 말하자면 일본의 도도부현 시스템에서 교토가 그 자체는 썩 대도시가 아님에도 다른 현과 구별되는 '부'의 지위를 인정받은 것과 비슷한 셈. [78] 불가리아 제국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로마 황제로써의 정통성이 있다고 여겨지던 동로마의 황제에게 "응 너 황제 해라" 라고 인정받는 것은 황제로써의 정통성에 대한 아주 강력하고 일반적인 근거로 여겨졌다. 물론 동로마 역시 이런 황제라는 칭호의 이름값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단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어쩌다 인정해주더라도 절대 '로마 황제'로 인정해 주지는 않고 '불가리아의 황제' 나 '트라페준타의 황제', 정 뭐하면 로마 황제긴 한데 로마인의(=로마라는 국가의) 황제는 아니고 로마 땅(지리적으로 로마라는 도시가 포함된 영역을 다스리는)의 황제로만 인정해주는 식으로 대단히 짜디짠 반응을 보여주긴 했지만, 어쨌건 카롤루스와 그의 제국이 보여준 위세를 생각하면 적당한 외교적 교섭+위력 과시등을 통해 동로마로부터 '응 너 서방의 황제 하셈' 하고 인정받을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던 것. 물론 그렇다고 동로마가 카롤루스를 선뜻 자신과 동등한 로마 황제로 인정해줬을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로 낮지만... 불가리아 제1제국만 보더라도 그 위력이 카롤루스 제국을 뛰어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동로마에 군사적 위협(+경우에 따라서는 협력)과 영향력을 가한 끝에 (불가리아인의) 황제로 인정받았다는 사례(=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로마의 바실레우스와 동등한 군주인 짜르로 인정받은 것)등을 생각하면 동로마측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융통성과 협상력만 발휘했다면 황제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동로마가 가진 로마 제국으로써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로마인의 황제'(=로마 제국의 황제) 라는 칭호는 쓰지 않겠다. 하지만 내 제국도 이정도의 위세가 있으니 황제보다 한 격 낮은 왕이 아니라 당신네와 동등한 황제라는 칭호는 쓸 자격이 있는 것 아니냐? 그리고 내가 다스리는 땅에 로마가 분명 포함되어 있으니 내 황제 칭호로 '로마 땅(로마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황제' 를 쓰겠다"는 식으로 협상하는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뭐 자기 나라 안에서 '로마 땅의 황제를 줄여서 로마 황제~' 라고 쓴다고 일일히 동로마가 쳐들어올 수 있는것도 아니고... 또는, 카롤루스가 동로마와 혼인동맹을 시도하는 등 동로마에 우호적,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임 황제로써 동로마의 우위까지 인정하겠다. 그 대신 나를 정식으로 서로마 황제로 인정해 달라'는 협상정도까지 가능했을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은 이미 공동황제나 복수황제의 전통이 있는 나라였고, 동방과 서방의 황제가 공존하던 시절에도 한 쪽 황제위가 비면 다른 쪽 황제가 선임황제로써 후임황제를 임명한 전례는 여러 번 있었다. 즉, 동로마 제국(=상대쪽 로마 제국)의 인정은 카롤루수의 제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법적, 전례적 근거가 이미 있었다는 것. 이에 비해 '교황의 대관'은 카롤루스가 교황에게 대관받기 이전까지 단 한번도 전례가 없었고 당연히 법적 근거도 없었던 것이다. 카롤루스가 작정하고 새로운 전통을 확립할 목적이었으면 모를까, 전통에 따라 황제로써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동로마의 인정이 훨씬 유용했다. [79] 사실 카롤루스의 이 우려는 완벽히 적중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교황등의 총대주교를 포함한) 주교란 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써 당연히 황제의 권위아래 임명받아야 하는 자리였던 것. 하지만 카롤루수의 대관식 이후 교황의 대관이 '관례'가 되어버리면서, 교황의 대관(=인정)을 받아야 왕이든 황제든 즉위할 수 있다는 인식(=교황이 황제를 심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버리고, 이것이 교황권 수직 상승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사실 중세 유럽에서 황제등 세속군주와 교황간의 가장 첨예한 권력투쟁의 대상이 된 것이 주교등의 성직자 서임권이지만... 로마 말기~중세 초반까지만 해도 이건 논란거리도 아니었다. 주교등의 사제는 '해당 지역의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 이였기에 그 영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이 관직을 임명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 현대인이 이해하기 편하게 비유하자면 원래 대통령에게 임명받던 특정 부처의 장이 대통령 취임식을 주관하는 권한을 가짐으로써 권위를 높인 끝에 '선거결과 누가 당선되든 내가 취임식을 안해주면 그 대통령은 무효다' 라거나 자기 부처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 발휘에 대헤 '내 부처에 왜 대통령이 인사권을 발휘하냐. 그건 공직매매다' 주장하기 시작한 격. 물론 카롤루스 입장에서야 동로마의 갑질을 참고 견디고 숙여 인정받기보다는 차라리 교황을 통한 권위 인정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쪽이 더 매력적이었을 가능성도 높고(카롤루스의 시대에는 교황의 권한이 아직 강력하지 않았으므로, 카롤루스 입장에서 교황은 '여차하면 자기 권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 이었던 것.) 교황의 권위 강화 자체가 대관식 권한빨 하나로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세속적 정치체제의 심각한 불안정 속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해 온 교회조직의 역량'에 힘입은 바 크며, 카롤루스 이후의 신성로마황제들도 통제하기 어려운 봉건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영주를 임명하는 등 교회조직에 힘을 실어준 이득 역시 적지 않게 보았다는 점 등을 감안해야겠지만... 어쨌건 카롤루스이 대관식을 주관함으로써 시작된 교황권의 상승이 이후 카롤루스의 뒤를 이은 신성로마황제들의 권위까지 위협한 것은 분명 사실인 것. [80]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81] 물론 교황과 별개로 서유럽 국가들은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황제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항목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82] 윈저가의 황제 직위는 조지 6세 때 끝이 났다. [83] 인도 황제로서만. [84] 홀슈타인 - 고트로프 가문은 표트르 3세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1700년 ~ 1739년)에서 나왔다. [85]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 한정. [86] 그러나 몽케가 사망한 이후 쿠빌라이와 아릭부카가 카안 자리를 두고 다투면서 서방의 汗國들은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쿠빌라이가 카안자리에 올랐음에도 서방은 그 통치에서 벗어났기에 카안의 통치력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에케 몽골 울루스의 통치자라는 관념만 유지될 수 있었다. [87] 영락제가 북원의 잔당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때려대면서 실질적인 힘을 모두 잃어버렸고, 이후에는 보르지긴 혈통의 인물을 초원세력가가 옹립하는 것으로 명맥만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다얀칸이 초원을 다시 재통일하면서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88] 청의 중국통일 이후 청나라의 황제는 중국의 황제, 몽골의 대칸, 만주의 한(han) 그리고 강희제 이후에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 칭호까지 겸하게 된다. [89] 그래서 외국의 king도 대군주로 번역하였다. [90] 1939년에는 알바니아 국왕도 (자칭)겸임한다. 이 역시 1943년에 포기. [91] 위에 서술되어있는 이주일과는 또 다르다. 이주일은 모든 코미디를 통합한 황제라고 본다면, 이경규는 흔히들 말하는 예능 이라는 장르의 황제라고 보면 된다. [92] 포어로는 O Rei do futebol,즉 축구의 왕이라고 불리었다. [93] 이것 역시 직역하면 L'Ottavo Re di Roma, 로마의 여덟번째 왕이라 불리었다. [94] 2000년대 초반 한정, 06년 이후 몰락한다. [95] 스타크래프트가 정립된 이후로 보통은 그냥 '황제'라고 부른다. 그냥 테란만의 황제라기엔 스타판 전체에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해졌기 때문. [96] 영어로는 The king of Rock 'n' Roll. 그러나 항목에 가보면 알겠지만 제왕이라고 표기되있다. 하지만 영어로보면 왕이다. [97] 한국 한정. 영어로는 The king of pop. 즉, 황제가 아닌 왕이다.일본에서는 으로 불린다 카더라 [98] 한국 한정.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는 왕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his highness의 말장난인 his airness. 물론 중계를 보다보면 the king도 나오고, 역대 최고의 선수로 널리 인정받던 워싱턴 위저즈 시절엔 대놓고 중계자가 the greatest of all time이라고 했다.(물론 경기력은 이때가 제일 안 좋았다) 문서화할땐 GOAT라고 쓰인다. 한술 더 떠서 basketball god(!!)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god이란 수식어는 한 분야에서 역대최고수준의 달인을 지칭할 때 종종 쓰는 단어다.예를 들어 guitar god인 에릭 클랩튼. 물론 이 수식어가 붙으려면 웬만한 달인이 아니라 조던이나 클랩튼처럼 정말 역대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조던을 제외하면 god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농구선수는 없다. 조던의 위치가 그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음악의 경우 여러명이 있는데(제프 벡이나 지미 헨드릭스 등), 종목 특성상 객관적인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 [99] 과거에는 지금은 은퇴한 강진우 김대겸을 말하기도 했다. [100] 1박2일에서 황태자 에서 성인이 되 황제로 불렸으나, 사실상 장난식으로 황제라 불렀지만, 당시 찬란한 유산 1박2일 두개의 프로로 시청률 70%를 자랑하던 한때는 진짜 황제였다. [101] 김범수의 얼굴이 독보적으로 못생긴건 연예계에서 아주 유명한 얘기라서, 김태호 PD가 대놓고 못친소 페스티벌 특집에서 그를 얼굴 황제(...)라고 칭송해 마지 않으면서 해당 특집의 1부와 2부에서 내내 황제니, VVVIP(...)니 하는 수식어가 다닥다닥 붙었다. [102] 그덕에 방송만 키면 시청자들이 백성을 자처해서 황제 폐하 문안드리러 왔다는 드립이 매번 나온다.근ㅡ엄 [103] 황제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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