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둘러보기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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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War in Afghanistan د افغانستان جګړه, جګړه په افغانستان ک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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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536349> 전쟁 | 테러와의 전쟁 | |
기간 |
2001년
10월 7일 ~
2021년
8월 30일[1] (19년 10개월 3주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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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미국의
9.11 테러 주범인
알 카에다 축출 목적 알 카에다를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정권 축출 탈레반 소탕 및 일소 목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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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탈레반의 승리,
미군의 철수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멸망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재건 - ISAF 철수 미국, 영국 등의 대사관 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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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국가 및 세력 |
[[틀:깃발| → (2001~2021) 국제안보지원군 연합군 |
]][[틀:깃발| ]][[북부동맹| ]](~2001)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카에다| ]] |
]][[틀:깃발| ]][[탈레반| ]]
주요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아슈라프 가니| ]] [[틀:깃발| ]][[틀:깃발| ]][[조지 W. 부시| ]] [[틀:깃발| ]][[틀:깃발| ]][[버락 오바마| ]] [[틀:깃발| ]][[틀:깃발| ]][[도널드 트럼프| ]] [[틀:깃발| ]][[틀:깃발| ]][[조 바이든| ]] [[틀:깃발| ]][[틀:깃발| ]][[토니 블레어| ]] [[틀:깃발| ]][[틀:깃발| ]][[앙겔라 메르켈| ]] |
]][[틀:깃발| ]][[하미드 카르자이|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 ]] [[틀:깃발| ]][[틀:깃발| ]][[오사마 빈 라덴| ]] † |
]][[틀:깃발| ]][[모하마드 오마르| ]]†
전력[2] |
[[틀:깃발|[3] [[틀:깃발| ]][[틀:깃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군| ]] 50,000여 명[4] |
]][[틀:깃발| ]][[미군| ]] 110,000여 명
[[틀:깃발|[5] [[틀:깃발| ]][[틀:깃발| ]][[알카에다| ]] 3,000여 명 |
]][[틀:깃발| ]][[탈레반| ]] 200,000여 명
사망자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북부동맹| ]] 200명 이상 연합군 3,575명 [[틀:깃발| ]][[틀:깃발| ]][[미군| ]]2,448명 [[틀:깃발| ]][[틀:깃발| ]][[영국군| ]] 457명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군| ]] 159명 [[틀:깃발| ]][[틀:깃발| ]][[프랑스군| ]] 90명 [[틀:깃발| ]][[틀:깃발| ]][[독일 연방군| ]] 62명 [[틀:깃발| ]][[틀:깃발| ]][[이탈리아군| ]] 53명 [[틀:깃발| ]][[틀:깃발| ]][[윤장호| ]] 기타 338명 총합 73,295명 이상 |
]][[틀:깃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군| ]] 65,592명 이상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카에다| ]] 2,000명 총합 53,000명 이상 |
]][[틀:깃발| ]][[탈레반| ]] 51,000명 이상
민간인 사망자 47,245명 총 사망자 212,191명 이상 |
1. 개요2. 진행 상황
2.1. 2001년
3. 주요 전투와 사건 목록4. 미국이 패전한 이유2.1.1.
9.11 테러와 전쟁의 시작2.1.2.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전 개시2.1.3. 11월 13일, 수도
카불 점령2.1.4. 12월 14일, 아프간전 승리 공식 선언
2.2. 안정화 작전으로 전환2.2.1. 아나콘다 작전
2.3. 2003~2007년2.4. 2008~2015년2.5. 2016~2021년4.1. 분노로 시작된 준비되지 않은 전쟁4.2. 체제 교체의 실패
5. 기타4.2.1. 미국의 책임 문제
4.3. 더러운 전쟁, 현지인들의 민심 이반4.4.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군의 의지박약4.5.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부 배신4.6. 신뢰할 수 없는 미군과 국제안보지원군4.7. 미군의 무능함과 전술-전략적 오판4.8. 부족들의 탈레반 지지4.9. 핵관련 광물자원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의 가치4.10. 미국의 병력부족4.11. 전쟁 장기화로 인한 일선장병의 한계4.12. 다른 국가들의 철수4.12.1. 한국의 경우
4.13. 아프간 주변국과의 문제와 파키스탄의 엉터리 협조4.14. 책임에 대한 기묘한 침묵5.1. 미국의 전쟁 비용
6.
베트남 전쟁과의 비교7. 사망자 수8. 사건 사고9. 관련 방송10. 매체에서11. 둘러보기[clearfix]
1. 개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01년 10월 7일[6]부터 한국 날짜 기준 2021년 8월 30일[7]까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이다.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인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는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탈환하려 한 탈레반으로부터 새로 구성된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지원-유지하려던 양상을 보였다.
2001년에 알 카에다가 일으킨 9.11 테러 사건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시작되었으며, 21세기 최초의 전쟁이자 이변이 없는 한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이다. 미국이 테러가 발생하자마자 아프간에 이런저런 외교/군사적 압박을 바로 넣은 걸 감안하면, 실질적인 전쟁은 2001년 9월 11일부터 완전 철수일인 2021년 9월 11일까지[8] 정확히 20년간 계속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과 비교해보자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 때 병력을 파견한 기간은 1965년 3월 8일부터 1973년 3월 29일까지 8년 44일이다. 남베트남이 멸망하는 1975년 4월 30일까지 따진다고 쳐도 10년이 조금 넘는 수준이니까 아프간 전쟁과는 비교가 안 된다.
나토 가맹국이 공격받을 경우 모든 나토 동맹국이 집단, 혹은 개별적으로 공동 군사대응을 한다는 나토 헌장 5조가 최초로 발동된 전쟁[9]으로 미국 뿐 아니라 나토 가맹국 전부가 참전한 전쟁이기도 하다. 테러와의 전쟁이란 원대한 계획의 첫 단계로 펼쳐진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의 일부이자 마지막이다.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세 번째로 강대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실패로 끝난 전쟁이기도 하고, 미국이 이 무의미한 전쟁에 최소 2조 달러를 지출함으로써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가 약화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이 전쟁은 베트남 전쟁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이 해외 국가에게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10]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전 당시의 병/부사관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장교단도 물갈이가 됐으며 전쟁 초기에는 출생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지금 미군 입대 가능 연령이 되기까지 하면서[11] “한 세대의 전쟁”(war of a generation)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탈레반측 역시 전쟁 초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간부급으로 올라가거나 일선에서 은퇴했고 그 자리를 다음 세대가 채웠으니 세대의 전쟁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12]
2. 진행 상황
(연합뉴스)[일지] 아프간 전쟁 발발부터 미군 철수 발표까지2.1. 2001년
2.1.1. 9.11 테러와 전쟁의 시작
9.11 테러라는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대형 참사에 꼭지가 돌아가 눈에 뵈는게 없을 정도로 극대노한 미국은 테러의 배후를 찾아내 박살내어 지구상에서 지워버리려 하였다.[13]테러 단체의 공격으로 미국 본토 내에서도 미국의 심장부라고 할 만한 뉴욕,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건물이자 중심부인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두 건물이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수도 워싱턴 D.C.의 국방부 건물마저 공격당하며 3,0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전 미국인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전쟁 수행의 정당성을 실어주었다.[14] 여론은 이 사태를 제2의 진주만 공습으로 간주하고 일제히 복수를 외쳤고, 정치권도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주전론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국제사회도 유례 없는 테러에 함께 분노한 것과 더불어 소련이 무너지고 정당한 명분이 생긴 사실상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강경한 주전론에 거스르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평소 깐죽거리며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고 도발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북한을 비롯한 반미+ 반서방 국가들마저도 이 시기만큼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 바짝 엎드려 유감을 표하기에 바빴다.[15] 이란의 신정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테러는 나쁜 짓이지만 그렇다고 복수는 옳지 않다"고 표명한 정도가 그나마 유화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란 역시 이때는 내부적으로 벌벌 떨면서 어떻게든 미국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나중에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을 적극 도와주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이슬람권 국가의 대중은 "또 미국이 테러를 핑계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려 하는구나!"라고 반미 시위를 했지만 시위는 젊은 학생들과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민간 단체들이나 했지 각국의 정부들은 미국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번질까 벌벌 떨었다.
한편 그 당시 미국과의 대표적 라이벌 중 하나인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기 재임 시절이어서 전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의 실정에 의한 혼란을 수습하고 복구하느라 내부적으로 바빴던지라 국제정세에 별 관심이 없었고[16]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매우 아픈 타격을 입었던 옛 소련 시절의 경험에 의해 미국의 탈레반 정권 공격을 굳이 막지 않았으며 애당초 막으려 했다 한들 이미 눈 돌아간 미국이 들었을 리도 만무했다. 2021년 8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을 지지하고 있었다. 중국은 아프간하고 맞닿아 있어서 자국에도 테러 피해가 올 가능성도 있었고 미국이 대신 잡아주겠다고 하니 역시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했다.
반미 테러 조직들마저 CIA나 펜타곤에 앞다퉈 연락해서 자기들은 무고하며 다른 놈들이 수상하다고 밀고를 할 정도였다. 보통 이런 테러 조직들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무슨 사건이 터졌다 하면 자기들이 하지 않았어도 자기들이 한 일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기가 일쑤였는데 9.11 때만큼은 정반대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그 어느 때보다 테러 조직 박멸의 의지를 강하게 내보였고, 전쟁의 해악성이나 윤리, 국가 이미지, 전쟁으로 인한 손익 따위를 따질 상태가 아니었다. 목표로 지정되는 순간 수장부터 말단까지 섬멸당할 게 뻔했기에 그 누구도 미국을 도발할 생각이 없었다.
얼마 뒤 이 테러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거느리는 알 카에다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자 미국은 복수전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이들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집권 세력인 탈레반에게 좋은 말 할 때 순순히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요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엄청난 전력을 인근에 집결시켰다. 이미 테러 당일 엔터프라이즈급 항공모함 전단이 집에 가던 귀국길을 유턴하여 인도양에 전개를 마쳤고, 뒤이어 수많은 해군 전력이 가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탈레반은 미국이 하늘길 또는 육로로 와야 하는데 파키스탄을 거치지 않는 이상 직접적으로 침공해 올 루트가 없고, 자신들의 후견국인 파키스탄이 영공을 열어주지 않으면 침공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오판해서 이를 거절했다. 탈레반과 아프간 부족회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변을 인도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거절하면서도 오사마 빈 라덴에게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날 것을 권고했다. 강제 추방이 아니라 권고인 점에서 보듯이 이 시점에 탈레반은 이미 미국의 분노를 사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그렇게 믿고 있던 후견국 파키스탄도 '쓸데없이 버티지 말고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순순히 미국에게 내주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탈레반을 설득하려 했지만, 무자헤딘 출신도 섞여 발족된 탈레반은 자기들은 소련마저 이겼다는 자부심 때문에 오히려 파키스탄조차 겁쟁이라고 비난하면서 거부하고 나섰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공격을 받는 것은 무서웠는지 미국의 요구안은 듣지 않으면서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립 서비스를 했지만 미국의 분노는 그런 말장난으로 식을 수준이 아니었다.
신병인도 요구가 안 통하자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 정부의 반군 세력인 북부동맹[17]에 엄청난 자금과 최신 무기를 지원했고, 영공사용 허가를 거부하는 파키스탄에게는 " 좋은 말 할 때 길을 내주지 않으면 탈레반과 같이 석기시대로 만들어버리겠다."며 협박하는 동시에 영공 사용료를 주는 당근을 제시했다. 파키스탄은 미국에게 대들어서 망하는 것보단 차라리 돈 받고 협력하자는 계산 하에[18] 수락하여 미국은 단박에 영공 사용권을 얻어냈다. 저 석기시대 발언은 리처드 아미티지 당시 국무부 부장관이 파키스탄 고위 정보 당국자에게 건넨 말이라고 한다. #기사
그리고 뒤이어 아프간 북쪽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미국에 자국 영토 및 기지 사용 권한을 준다.[19] 또한 아프간 서쪽의 시아파 국가로서 수니파 세력인 탈레반과 앙숙인 이란마저도 탈레반을 비난하고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은 순식간에 포위된 상황에 놓였다.
그래도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마지막까지도 개전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사우드 왕가와 하메네이는 미국 측에 접촉하여 자기들이 아프간하고 으르렁거려봐서 아는데, 거기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마지막까지 외교적인 해결을 할 것을 주문하였고, 사우드 왕가는 급히 북부동맹과 탈레반 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선하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자 사우디아라비아는 즉시 탈레반과 단교하고 미국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였으며 이란도 미국의 민사작전을 돕는 한편 미국이 지지하는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의 수립을 돕기 위해서 카르자이의 라이벌들을 설득하면서 이들이 카르자이에게 협력하게 하는 등 배후에서 미국을 도와주었다.
미국은 즉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정했다. 탈레반 정권이 미군의 공습에 붕괴될 것은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새 지도부를 모색하는 한편 이들을 지원해 줄 국제안보지원군(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ISAF) 창설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요구하였다. ISAF는 침공 2달 후 결성되었고, NATO 참여국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들이 참가하였다.
그렇게 미국은 탈레반을 사멸 직전까지 몰아갔으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탈레반이 살아남으면서 20년 전쟁의 시작이자 사실상 벌집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하지만 오사마 빈라덴을 넘겨주지 않았더라도 미국에게 이 전쟁을 할 정당한 명분이 생기는 건 아니다. 알카에다와 탈레반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라는 공통점만 있었지 알 카에다가 탈레반 산하 단체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탈레반이 빈라덴을 넘겨주는 것을 거절했다는 것도 흔히 알려진 것처럼 탈레반이 깝죽댄 것이 아니라 빈라덴의 행방을 모른다며 미국에게 협의를 요청했지만 미국이 당장 넘기라며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 # 설령 탈레반이 알카에다와 전쟁을 벌여 빈라덴을 체포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했다. 훗날 탈레반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밝히기를, 미국과 그 사안을 협의할 수 있었는데 미국이 성급히 침공했다며 비난했다. #
2.1.2.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전 개시
미군은 해군 제5함대(엔터프라이즈 항모단, 칼빈슨 항모단, 키티호크 항모단, 루즈벨트 항모단.)의 함재기 250대와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디에고 가르시아에 배치한 제9공군 산하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가하면서 '항구적 자유'로 명명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개시한다.이때 육군 총병력은 미군 5,000명에 27개국의 다국적군 조금으로 매우 적었다.
초창기 침공과정은 전적으로 특수부대 위주로 육군 그린베레 제5특전단을 주력으로 하여 이를 지원하기 위해 160특수작전항공연대, 528특수작전지원대대, 112특수작전통신대대, 4심리전단, 96민사작전대대가 편성되었다. 또한 약간의 네이비 씰과 데브그루, 델타 포스 그리고 제75레인저연대 3대대가 투입되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미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등 12,000명~15,000명 가량의 현지 북부동맹군을 지원하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탈레반군은 50,000~60,000명으로 예측되었다.
작전 지휘관은 미 중부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대장이었고, 10월 초에는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이라는 이름 하에 합동특수작전전술본부(the Combined Joint Special Operations Task Force, CJSOTF, CJTF-Mountain)를 구성하여 제5특전단장 존 멀홀랜드 대령에게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예하에 두 개의 TF를 만들어 북부 작전은 북부 합동특수작전TF(Joint Special Operations Task Force-North, TF Dagger)가 담당하며 대부분은 5특전단은 여기에 배치된다.
12월 14일에는 아프간 남부에 해군 특수전단 1팀을 중심으로 남부 합동특수작전TF(Joint Special Operations Task Force-Southm)가 구성됐는데 미 해군 밥 하워드 준장이 지휘하며 5특전단 1대대 A중대 81명을 파견받았다.
2001년 10월 7일 공중폭격으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2002년 1월말 까지 약 18,000 소티의 공중폭격을 실시했으며, 탈레반 전사 8천~12,000명을 사살하고 7,000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이 기간 동안 민간인의 피해는 1,000명 가량이었다. 미군은 전사자 16명을 포함하여 39명이 희생되었다.
9.11 테러가 일어난지 15일 만인 9월 26일, 7명으로 구성된 CIA 특수작전단(SAD) '조브레이커' 팀이 최초로 아프간 국경을 넘었다. 이들의 임무는 아프간 내 반탈레반 세력인 북부동맹과 접촉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고, 탈레반 지도부와 주요 군사거점의 위치를 파악하여 곧 다가올 대대적 침공의 밑바탕을 그리는 것이었다.
곧이어 그린베레 5특전단 소속의 두 개의 ODA 팀이 합류했고 이들은 북부동맹의 도움과 정밀항공지원에 힘입어 아프간 주요 도시들을 상당수 탈환하는데 성공했다.[20] 소수의 특수부대가 지역 반군 세력과 연합하여 한 국가를 거의 전복시켜버린 이 대활약은 세계 특수전사에 길이 남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목표중 하나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놓치고 만다.
미국의 공식적인 군사 개입은 10월 7일, 수도 카불을 비롯한 주요 군사거점 및 대도시들이 대규모 총공습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단 하루만에, 아프간의 방공망과 통신망, 공군세력은 소멸되었다. 얼마나 미국이 분노했는지, 개전 전부터 전술핵 사용까지 언급하고 있었고[21] 나머지 핵강국들조차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는데 정작 핵으로 때릴 고가치 표적이 없어서 흐지부지되었다.
동시에 북부동맹도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고 미 항공세력이 북부동맹에 대한 대규모 근접항공지원에 나서며 탈레반 지상군은 순식간에 격멸당했다.
이 시기까지 미군은 아프간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고 북부동맹을 지원하여 특수전부대 위주로만 작전을 벌였다. 산악 지대에서 탈레반의 게릴라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2.1.3. 11월 13일, 수도 카불 점령
결국 개전 한달여만인 11월 13일, 수도 카불이 북부동맹에게 함락되었다. 11월 19일 미군과 북부동맹의 공격에 밀려서 최후의 저항을 하던 아프간 북부 쿤두즈의 탈레반군은 항복하느니 집단 자결을 하는 지옥도를 연출했고, 미국과 북부동맹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탈레반군을 사살했다. 결국 2001년 11월 19일 밤 쿤두즈의 탈레반은 유엔사무소에 사절을 보내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혔다. #한편 미국 정보부는 북부동맹의 군사행동과는 별개로 미군사령부의 직접적인 지시대로 행동하고 지상작전에 큰 지원을 해줄 아프간인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반탈레반과 왕정복고를 외치다가 파키스탄으로 망명을 떠났고 영어에 능통한 하미드 카르자이라는 사람을 찾아내어 조력자로 선택한다. 이후 카르자이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파키스탄에서 아프간 남부국경으로 몰래 입성하여 반탈레반 세력들을 규합하고 소규모 특수부대를 조직한다. 일부 마을주민들의 협조도 있었는데 탈레반의 가혹한 통치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미군의 훈련을 받은 카르자이의 특수부대는 미 공군의 지원을받으며 12월 7일 탈레반의 중심지 칸다하르를 함락시킨다.
중심지를 빼앗긴 알 카에다와 탈레반 패잔병들이 국경도시인 토라 보라(Tora Bora)에서 재정비를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군은 12월 12일부터 5일에 걸친 혈전 끝에 도시를 점령하나 오사마 빈 라덴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2.1.4. 12월 14일, 아프간전 승리 공식 선언
그래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이 시점에 이르러 사실상 탈레반 정권은 끝이 났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아프간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본 회의에서 12월 22일 새 임시정부의 수립이 결의되고, 탈레반 본거지 칸다하르를 함락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적이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지명되었다.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했다.10월 7일에 시작된 전쟁은 불과 2개월 7일만에 끝났다. 보기에 따라 2(현지시간)~3(미국시간)일 후에 북부동맹군이 알 카에다 최후 거점인 토라보라를 완전 장악한 것을 전쟁 종료로 보기도 한다.(이에 따라 미국 위키피디아는 12월 17일로 본다.)
사실 2001~02년 즈음부터 미국은 이라크전을 할 생각에 아프간전에서의 마무리와 탈레반 소탕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다. 덕분에 탈레반의 주력들은 미군과 북부동맹군을 기만하며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서 다수가 도주하여 전력을 보존한다. 포위되어 있던 빈 라덴조차도 미군의 지상군 포위망이 없어서 도주가 가능했다. 중부군 사령부에서는 10산악사단의 증원배치를 요구했었으나 럼즈펠드는 이를 거부했다. 게다가 IAI(아프간 재건 임시정부)와 탈레반을 몰아내는데 역할을 한 군벌인 북부동맹이 지원금 배분 문제를 두고 다투는 바람에 아프간 정규군과 경찰의 교육과 배치가 늦어졌다.
이렇듯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스스로 1년이 넘도록 개판 5분 전인 아프간의 상황을 방치했고, 되지도 않는 이라크전을 준비하느라 중부군 사령부만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게다가 항공폭격의 초기성과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최소한의 투입으로 정밀타격을 통해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요하던 럼즈펠드 체제 속에서 미군의 항공폭격과 정밀타격의 한계는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당장 탈레반 주력들을 포위하고도 제대로 된 항공폭격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바람에 적이 도주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라크전을 준비하느라 문민통제를 미국 역사상 최악으로 남용할 정도로 정신나가 있던 게 럼즈펠드 체제의 부시 행정부였다.
한편 일방적 침략이었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달리 이 전쟁은 해방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미군을 환영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대다수의 농촌 아프간인들은 탈레반의 몰락이나 미국의 진주에 별로 소감이 없었다고 한다. 어차피 아프간인들은 국가보다는 부족에 더욱 큰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에 중앙정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도시에서와 달리 향촌지역에서는 탈레반 이전부터 이슬람 원리주의가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레반의 막가파 정책도 조금 더 불편해졌을 뿐, 아프간인들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을 호의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고, 이것이 탈레반이 몰락한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농촌 아프간인들의 입장에서 미국의 진주와 카르자이 정부 수립은 그저 자신들과 별 상관 없는 중앙정부가 바뀐 것에 불과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자들의 수기를 담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아연 소년들>에서도 소련군들이 진주해올 때 웃으며 손을 흔들던 아프간인들이 소련군들이 퇴각할 때도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농촌지역과는 달리 도시민들인 카불 시민들은 탈레반의 축출을 기뻐했다. 도시 지역은 왕정과 공산정부 시절에 상당한 수준으로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탈레반의 정책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을 야기했던 것이다. 탈레반이 쫓겨나자 즉각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북부동맹군을 환영하였고 남자들은 탈레반의 강요로 길렀던 수염을 밀어버렸으며 여자들은 부르카를 벗어던지고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금지되었던 각종 음악과 춤이 등장했고, 탈레반에 당해왔던 시민들이 탈레반 병사들의 주검을 길거리로 끌고 와서 모욕을 가하는 것이 우리나라 뉴스에 여과없이 방송되기도 했다.
참고로 탈레반 정권의 붕괴는 의외의 나비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당시 탈레반의 비호를 받으면서 아프간에 숨어 있던 수천명의 사우디 무자헤딘들이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다시 모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왔고, 이들은 사우드 왕가도 타도대상으로 보던 과거의 태도에서 한발 물러서서 사우드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대신 사우드 왕가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탈레반과 같은 샤리아 율법통치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사우드 왕가가 이런 미친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으므로 이들은 대규모 테러리즘을 벌여 수백명을 살육하고 사우디 내무군 및 보안군과의 내전에 가까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란 역시 피해자 반열에 들었는데, 이란은 자신들이 미국의 아프간 전쟁을 도와주면 미국이 아프간에서 이란의 이익을 인정하고 지역적인 협력관계를 맺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미국은 나몰라라했으며, 이란의 대표적 라이벌인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을 끌어들여서 과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아프간에서의 이란 영향력을 파키스탄과 힘을 합쳐 몰아내려 했고 뿔난 이란은 다시 반미로 전환하게 된다.
2.2. 안정화 작전으로 전환
2002년 1월에는 빈라덴 색출을 위해 카불이 점령된 이후에는 지상군 투입을 늘려 기존의 합동특수작전TF 산하 북부/남부 합동특수작전TF 외에 TF-Rakkasan( 제101공수사단 3여단), TF-Commando( 제10산악사단 2여단), TF-58(미해병 15원정대), TF-64(호주군 SAS 특공대)등이 생긴다. 그리고 이를 통합지휘 하기 위해 제10산악사단이 주축이 되어 TF-mountain이 만들어진다.한편 ISAF 산하 다국적군도 속속 들어와 전년도인 12월 22일에는 영국군 300명이 들어 왔고, 2002년 2월 27일에는 한국군 의료지원단 동의부대 1진이 파병된다.
2.2.1. 아나콘다 작전
3월 1일부터 18일까지 '아나콘다 작전'이라는 대규모 작전을 실시하여 동부의 신카이 산맥의 아프간군을 소탕하게 된다. 여기까지 진행되니 더 이상 아프칸에는 탈레반 세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자 합동특수작전TF가 개편되어 안정화 작전에 힘쓰게 된다. 2월~3월경에는 미 중부사령부 예하 연합지상구성군사령부 제10산악사단(TF-Mountain)이 중심이 되어 작전을 책임졌다. 아나콘다 작전 당시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든 800~1500명의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전사했다.(황재연,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사', 군사연구(2017) 참조)5월에는 완전히 개편되어 미중부사령부 산하에 CJTF-180을 만들어 댄 맥네일 중장이 이끄는 제18공수군단이 작전을 책임지게 된다. 산하에는 연합특수작전TF, 연합민군작전TF, 아프가니스탄군사협력실(3특전단 1대대), CJTF-82( 제82공수사단)으로 구성된다. 주력은 CJTF-82로 산하에 82공수사단 3여단, 82공수사단 1여단, 229항공연대 3대대, 82공수사단 항공여단으로 구성된다. 82공수사단 2여단은 2003년 이라크 침공에 동원되어 북쪽에서 쿠르드 족을 도와 이라크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후 2013년 10월에는 18공수군단의 임무가 종료되어 10산악사단으로 전환된다. 즉 군단급 사령부를 사단급 사령부가 대체하게 된다. 10사단은 2003년 5월에 1, 2여단과 함께 투입되어 작전을 실시하였고, 사령부로서의 역할은 2004년 2월까지 하였다. 2004년 3월에는 25보병사단 3여단(+ 미해병 6연대전투단), 2005년에는 남부유럽사단(?)이, 2006년에는 다시 10산악사단이 아프가니스탄에 3번째로 투입되어 동맹군사령부 임무를 수행하다가 국제안보지원군의 지휘체계로 전환되었다.
2.3. 2003~2007년
2003년, 탈레반은 중흥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헤즈비-이슬라미(Hezb-i-Islami)와 탈레반이 손을 잡은 것이다. 헤즈비 이슬라미는 90년대 아프가니스탄 내전 당시 미군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훈련도가 높고 무장 상태가 양호했었고, 이들의 가세는 탈레반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외 파키스탄 등 여러 인접 지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무기와 전쟁 물자, 용병들이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초기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는 건 물론 오히려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 대가로 지나친 파슈툰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좀 희석됐지만 애시당초 파키스탄이나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오는 용병들의 수준도 탈레반보다 조금 낫다뿐 거기서 거기다.설상가상으로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 전투병력 및 동맹국 병력 상당수가 이라크로 재배치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이라크로 옮겨갔으며 아프간은 이미 안정화되었다고 판단,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이 기간을 모른 척할 탈레반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전력을 증강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면서 미국을 자극하는 대신 전력을 재건, 강화하고 각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에 전념한 것은 (탈레반 입장으로 보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게다가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통제력이 없고 답이 안 나오는 실패 국가였다.
그 뒤 미국이 이라크에 전념하느라 아프간 문제에 관심이 줄어든 틈을 타 수년에 걸친 전력 재건을 그럭저럭 끝마친 탈레반은 파키스탄 접경지대 등을 기반으로 삼아 세력을 빠르게 키우고 반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50명 이상의 규모로 미군과 아프가니스탄군을 습격하고 2~5명의 소규모로 뿔뿔이 흩어지는 게릴라 전법을 사용했는데, 이들을 잡기 위해서 병력을 증파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라크 전쟁으로 있던 병력마저 빼가니 상황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주기로 마을의 주인이 미군과 탈레반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예삿일이고, 심심하면 탈레반의 습격을 받으니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미군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탈레반에 대한 지지가 강했던 남부 파슈툰족 지역은 어차피 미군은 떠날 테고 정부는 답이 없으니 그냥 탈레반에게 잘 보이도록 하자며 탈레반에 가담하거나 최소한 그들의 활동을 묵인하였다. 탈레반 측도 몇몇 열성분자들을 빼면 주민들이 실질적으로는 자기들을 적극 지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지,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결국 탈레반 세력은 다시 남부에 맹위를 펼치고 수도에서 게릴라 공격을 펼칠 정도로 부활했다.
게다가 알 카에다 와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알 카에다는 테러 집단과 무자헤딘 집단 두 종류로 나뉘는데 테러 집단은 9.11 이후 미국의 추적으로 결국 와해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무자헤딘 집단은 건재했다. 나중에 알 카에다는 아예 테러는 서방 내 무슬림 출신 불만분자들에게 테러 수법을 가르쳐 주고, 결정은 알아서 하게 하는 쪽으로 전환하고 무자헤딘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이제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존병들이 파키스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고 의심되는 테러단체 '하카니 네트워크'가 이들과 협력하면서[22] 상황은 점점 막장이 되어갔다. 아프간은 그 특성상 국경 통제가 힘들고 외부 지원이 용이하며 주변국들 대부분이 막장이었기에 처음부터 실패가 예고된 전쟁이기도 했다.
2006년 미군의 활동을 ISAF가 이어받아 약 8,000명의 다국적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다. 이라크 전쟁으로 병력 부족을 겪고 있는 미군은 이들을 적극 환영하며 여세를 몰아 손가락만 빨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탈레반을 타격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미 탈레반도 최소 수만 명의 대군을 확보한 상태라 이때부터 시작된 전투는 이전과 비교하면 상당한 대규모의 전투로서, 전투만 일어났다 하면 ISAF측도 백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탈레반은 많으면 2,000명까지 죽어나갔다. 대표적인 전투로는 Mountain Thrust, Mountain Fury 작전이 있다. 가운데서 쥐어터지는 민간인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탈레반은 이러한 사상자에 그리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수천 명이 죽어나가도 각국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서민들이 용병이 되어 아프간으로 속속 들어오면서 병력이 곧 보충되곤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미국/중국산 무기를 막 뿌렸는데, 이 무기들이 지금은 미군을 노리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 2001년 당시 러시아군 관계자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미군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소련군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국은 보란 듯이 탈레반 정부를 전복시키면서 코웃음쳤으나, 미국의 엄청난 삽질(이라크 전쟁, 막장 전후처리, 지원하던 아프간 정부군도 개막장.)과 함께 결국 러시아의 경고는 맞아떨어졌다. 소련과 미국 모두 초강대국답게 압도적인 무력으로 쉽게 이전 정부를 전복하고 괴뢰정권을 세우면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그 때부터 끝도 없는 수렁과 나락에 빠져버렸다.
2.4. 2008~2015년
2.4.1. 모쉬타락 작전: 오바마 행정부의 미군 추가 파병
▲ 2010년 11월 당시 ISAF의 지역별 담당 구역 배치도. 동부지역사령부와 서남지역사령부는 미군이, 중앙지역사령부는 튀르키예군이, 남부지역사령부는 영국군이 통솔했으며 서부지역사령부와 북부지역사령부는 각각 이탈리아군과 독일 연방군이 지휘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오쉬노부대는 중앙부 바그람 일대에 표시되어 있다.[23] |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적으로 치명타를 입은 미국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오바마는 군비를 절약하기 위해 이라크를 과감히 포기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소탕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이라크에서 빠져나간 미군들이 줄줄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재투입되기 시작하여 한 때 100,000명 이상에 이르게 된다.
미국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ISAF 병력 증파를 추진하고 있지만, 국내에서의 반전 여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기에 주춤하고 있는 상황.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에서의 철수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집중하겠다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이에 대해 미군 추가파병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 2010년에도 나토에 아프간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며 경고하기도 했다. #
2010년 2월 13일, 미군은 육, 해병대 6,000명 이상, UAV 다수, IED 에 대응하기 위한 다수의 폭발물 제거차량, 아파치 헬기 등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Operation Moshtarak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서방 언론에서 'decisive(결정적인)'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작전으로, 아프간 전체 영토의 8할이 탈레반 통제하에 들어갔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을 반전시킬 여지가 있는지를 시험할 겸 진행된 공세였다. 작전이 망할 경우에는 패전 수순을 밟을 수도 있을 정도라고 판단되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연합군은 3일만에 목표인 마르자 시내에 진주하였으나, 마르자 시를 제외한 헬만드 주 제압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작전을 지휘한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은 대통령 등 행정부와의 의견 차이와 실언 논란, 그리고 작전 실패까지 겹쳐 교체되었다. 거기다가 원래 마르자 지역을 장악한 후 칸다하르를 칠 계획이었으나 후속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고 있으며 거기다 아프간 군대의 수준은 차라리 없는 게 도와주는 것일 정도로 형편없다. 애당초 제대로 된 군 조직이 없던 나라에 이 정도 기간만으로 군대가 자리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라크도 군대 해체 후 후유증이 심각한 수준이다.
전쟁 첫 7년 미군 전사자는 700명으로 많지 않았으나 탈레반이 전력을 회복하고 각 지역의 통제권을 재장악한 상황에서 전면 충돌에 들어간 2009년 이후 증가하였다. 2010년 6월 연합군 103명이 전사하여 월간 단위로 개전 이래 최다 전사자가 나왔다.
2.4.2.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과 평화 협상
그런데 2011년 5월, 전쟁의 원인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 숨어 있다가 CIA에게 발각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미국은 전쟁의 명분이던 빈 라덴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아프간에서 발을 뺄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프간에서 철군한다면 아프간은 중앙아시아의 소말리아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시 탈레반이 권력을 잡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탈레반이 그나마 1996년에서 2001년 집권 당시의 최소한의 합리성조차 상실한 집단임을 고려하면 그 여파는 이웃 국가들, 특히 핵을 보유한 파키스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기에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는 평가가 존재한다.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어 2011년 8월 6일 새벽,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공격으로 미군 31명이 탄 치누크 헬리콥터가 격추되어 타고있던 38명(아프간 정부군 포함)이 몰살당했다. 이 31명 중 대다수가 네이비 씰 내에서도 최고의 정예인 DEVGRU 소속,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그 부대다. 하필이면 이런 기막힌 우연 때문에 빈 라덴의 복수라는 비유를 하기도 한다. 하루만에 31명이 사망한 것도 운이 없지만, 미군 최고의 특수전 부대원 수십 명이 한번에 사라져버린 것. 일반 미군 사망 수백 명보다 훨씬 뼈아픈 손실이며 미 특수전 사상 최악의 대참사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빈 라덴 사살 작전에 참가한 부대원은 한 명도 없다고 발표되었다. 다만 이는 미군의 사기를 고려한 페이크일 수도 있다. 이런 류의 의도적인 발표는 군사관련 발표에서 흔한 것이다. 그리고 빈 라덴 사살 작전에 참가한 부대원이 있건 없건 같은 최정예부대 소속의 부대원들의 몰살은 동일하게 뼈아프다. 이 때문에 아프간 정부군에 슬슬 전쟁 주도권을 넘기려던 미국에서 아직 철군하기에 위험하다는 의견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군이 있든 없든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다. 2012년 4월에는 카불 곳곳에서 동시 다발 테러가 일어나 아프간 정부군 29명의 사상자를 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긴급 피신했고 미군도 출동했지만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미군에게 돌을 던지는 통에 미군에 대한 인식만 최악이라는 게 다시 한번 드러났다. 알 카에다는 모두 36명이 전사했지만 충분히 효과를 거두었다는 분석이다. 반미의식이 확인되었고 정부군은 우왕좌왕했으며 미군은 사람들의 돌팔매질이나 당하는 바람에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발빼기를 위해 계속 탈레반과 협상을 타진했고 탈레반은 이를 수락했다. 탈레반과 미국은 2013년 6월부터 전쟁 발발 12년 만에 카타르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여기서 배제된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반발했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집단인데다 어차피 망할 자들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탈레반과 협상을 하고 있다. 탈레반은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된 포로와 자신이 확보하고 있는 미군 포로와의 교환을 주장한다고 한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미국이고 이런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는 1973년과 1989년에 이미 증명된 만큼 탈레반이 정말로 답이 없는 수준의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결국 탈레반에 유리한 방향으로 처리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처음에 양측 입장차이가 커서 협상은 얼마 안 가 결렬되었지만, 미국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재개되었다. 2014년 6월 1일, 결국 2009년에 탈레반에 잡힌 유일한 미군 포로 보위 버그달(Bowe Bergdahl) 병장은 관타나모에 수감되어 있던 탈레반 간부 5명과 교환되어 풀려났다. 탈레반 포로 다섯 명과 교환되는 내용은 2014년 말에 방송되었다. 공화당은 의회 허가없이 테러리스트들을 풀어줬다며 난리지만, 일단 5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자국 병사가 돌아온건 미국으로선 환영할만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버그달 병장은 전투 중 포로로 붙잡힌게 아니라 기지를 무단이탈 하였다가 억류되었고, 그를 찾겠다고 나선 미군들이 몇 명이나 탈레반과 싸우다 죽었다는 게 뒤늦게 드러나는 반전이 있었다. 친지에 보낸 마지막 이메일에서 군생활에 대한 환멸감을 썼는데, 이 때문에 탈영 혐의를 받게 된 것. 그래서 환영 행사가 취소되는 등 내부적인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 일단 미군측은 버그달 병장이 5년간이나 사실상의 감옥 생활을 한 만큼 그걸로 벌은 충분히 받았다며 환영은 안 하더라도 처벌까지는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결국 조사 결과 버그달 병장은 단순 외출 중 피랍된 것으로 판단되어 다시 정상적으로 현역에 복귀하였지만, 2015년 3월에 적 앞에서 겁을 먹었고 탈영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군사법원에 기소되었다. 더욱이 그의 생환에 깊이 관여했던 마크 밀리 장군이 2015년 5월에 차기 육군참모총장에 내정되자 논란이 재점화되는 판.
2.4.3. 완전철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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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17 수송기로 철군하는 미군 병사들 |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들어서 미국도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해외 개입은 적극 자제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에서 개입을 최소화하고, 우크라이나의 2014년 크림 위기에도 그저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전부이며,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직접개입하는 대신 아베 신조의 보통국가화 추진을 묵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 극우화에 대해서는 주변 동맹국들의 입장을 감안하여 반대한다.
미국 입장에서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철수는 명목상으로나마 평화협정을 맺고 철군한 베트남 전쟁만큼 굴욕적인 것이다. 사실상 쫓겨나듯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소련군의 철수를 그대로 반복했는데, 소련군(10년)보다 좀더 오래 버틴 것(2016년에 예정대로 철수한다면 15년)이나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정도로 미군은 실망스런 결과를 얻었다.
이렇게 미군이 철수 움직임과 결정이 되자 한국군 역시 01~07년 12월까지 동의-다산부대 활동과 더불어서 2차 파병이었던 오쉬노 부대 또한 10~14년 6월을 끝으로 모두 철수하여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다만 주 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관 경비로 한국군 경비 인력이 남아서 활동 중이었으나 2021년 카불 함락 이후 주아프가니스탄 대한민국 대사관이 철수하며 자연히 경비 인력 또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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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미육군 해럴드 그린 소장 |
2014년 10월 27일, 이 전쟁에서 미국의 최우방국이었던 영국이 13년간 453명의 전사자와 190억 파운드의 전비 지출을 기록하고 헬만드주 마지막 기지였던 Bastion에서 최종 철수했다. 이로써 미군의 철수 또한 가시화되었으며 영국 내에선 이 전쟁에 대한 정당성과 토니 블레어 전총리의 참전 결정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고있다. 단 아프간 정부군을 위한 훈련교관과 기타 비전투요원들은 시간을 두고 철수할 듯 하다.
이런 가운데 중국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오면서 어부지리를 챙기려 하고 있다. 2014년 11월 중국은 무려 1,000조원이 넘는 경제협력을 아프가니스탄 측과 맺기로 하며 접근 중인데 증오로 남겨진 미국과 달리 중국은 반응이 좋은 편. 결국 미국은 중국이 좋아할 일을 만들어준 셈이다. article|default 중앙일보 기사
결국 2014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13년 아프간 전쟁 종료 나토 측에서는 15,000명 가량을 아프간에 2016년까지 주둔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10만이 넘는 병력도 아프가니스탄 평정에 실패한 상황에서, 게다가 상설이 아닌 한시적 주둔인 점에서 사실상 의미는 없어 보인다. 아마 2016년이 지나고 난 뒤 결국 탈레반이 재집권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
미국 일각에서도 이라크 전쟁에 이어 미국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간, 베트남 전쟁을 이은 전쟁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2014년 12월 28일을 기해 국제안보지원군(ISAF)의 임무는 끝이 났고,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군으로 전투 임무가 이양된 확고한 지원 임무(RS)가 수립되었다. RS의 멤버는 ISAF와 유사하며, 2015년 1월 1일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2.4.4. 철군 보류
2015년 10월 15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철군 보류를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다시 미군을 재배치하는 것은 아니고 2016년 이후에 완전철군하려던 일정을 이후로 연기했을 뿐이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은 9천여명 정도 남아 있었다. 미국은 말로는 조기철군했다가 아수라장이 된 이라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이라고 천명하고는 있기는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이는 9월 탈레반이 정부군의 거점이었던 쿤두즈를 함락시켰다.아프간 정부군이 탈환했다고는 발표하고 있지만, 서방의 분석가들은 탈레반의 게릴라전 전략상 적의 화력이 집중되기 전에 그저 물러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정부군은 승리한게 아니라 탈레반이 물러난 곳을 그저 재점령했을 뿐이라는 것. 또한 아프간 정부군을 지원하던 미군이 국경없는 의사회를 오폭하여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도 증가했기 때문에 탈레반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정치적 성과도 얻었다. 미군이 철수하면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바로 ' 사이공 1975'가 재연될 만큼 탈레반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10만명의 미군으로 못해낸 탈레반 완전 소탕을 9천명의 병력으로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이는 그저 오바마가 자신의 임기동안의 치적을 흐릴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사이공 어게인"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즉, 자신의 임기동안만 탈레반 재집권을 막고, 이후에는 철수해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
2015년 12월 22일 미군 사령부가 있는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자폭테러로 미군 6명이 전사했다. 이쯤되면 정말 1975년의 사이공과 비슷한 수준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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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탈레반 점령지 |
서방연합국이 떠난 이래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사상자는 매년 늘고 있다. 2015년에만 7천여명의 전사자를 기록. 미군의 완전철수와 탈레반 재집권 이후를 대비해 아프간 정부군에 참여한 군벌들이 재무장을 시작했다지만, 미국이 그동안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위해 사병모집을 엄금하고 군벌의 사병들을 정부군에 편입시켰다가 모두 날려먹었기 때문에 탈레반이 처음 집권할 때보다 군벌 세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나중에 탈레반이 골치를 앓을 수도 있던 군벌들을 본의 아니게 해체해 준셈.
현재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모색한다고 하지만, 승기를 잡은 탈레반이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응할지는 미지수이며, 1975년 베트남에서 보았듯이, 설령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고 해도 얼마 안가 깨지고 탈레반이 결국은 아프간을 석권할 것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 탈레반 세력이 다시 득세하자 바그람 지역의 공군기지 등을 유지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세를 바꿀 가능성은 없다는 시각이 많다. 무엇보다 지금 미국은 IS 같은 사이코들을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덜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패권장악도 용납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려 있다. 이걸 거부하면 아시아에서 중국을, 유럽에서 러시아를 막을 수 없다.
2016년 탈레반은 대담하게 사망한 지도자 뮬라 오마르의 이름을 붙인 '오마리(Omari) 작전'이라고 이름붙은 춘계공세를 실시했고, 수도 카불 전역에서 테러 및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공세로 사상자 수백 명이 나왔다. 탈레반의 주장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정보국 청사까지 진입했다고 한다. 아프간 정부는 부인. 이렇게 수도까지 잠입해서 교전을 벌일 정도면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호흡기 정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기사 이는 소련군이 철군한 1988년보다도 상황이 훨씬 나쁜데, 적어도 소련군 시절의 무자헤딘은 카불을 넘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기관인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은 이날 보고서에서 아프간 전체 407개 군(郡·district) 지역 가운데 아프간 정부의 온전한 통치권이 미치는 곳은 지난해 11월 15일 기준 233개 지역으로 57.2%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나머지 174개 군 지역에서는 탈레반 등 반군이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정부와 반군이 통치권을 놓고 다투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반군과 교전으로 사망한 아프간 군인과 경찰은 올들어 11월 12일까지 6785명을 기록해 2015년 전체 사망 군·경보다 35%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부상자는 1만1777명에 달했다. 기사
2.5. 2016~2021년
카르자이의 아프간 정부는 부정부패와 무능력 때문에 민심이 떠났고, 날이 갈수록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다만 현 아프간 정부가 무능하다고는 해도 구 탈레반 치하보다 객관적인 민생은 전쟁을 제외하면 상당히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 아프간 정부가 민심을 충분히 얻지 못하는 것은 서방의 지원액의 대부분이 아프간 민중보다는 정부인사들의 호주머니로 간다는 것. 민생이 조금 나아져도 민심의 불만은 억누를 길이 없다.미국도 민심을 얻는게 승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민생 지원책으로 뿌린 돈만 천억달러(무려 100조!) 이지만, 이 돈은 대부분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아니라 부패한 아프간 관리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러니 미국은 돈은 돈대로 쓰고 욕만 먹는 셈. 차라리 그 돈으로 탈레반을 달랬으면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위에 서술하듯이 탈레반이 남았는데 거기에 대들 아프간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전처럼 따르며 살 수밖에. 탈레반이 물러날 때 좋아라하던 지역도 분명히 많았었다. 무작정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이 반미를 내세우고 탈레반 환영하고 극단 무슬림인 것도 아니었다.
아프간 정부는 스스로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아프간 정식국호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다.) 실제로는 미국의 눈치를 보는 어정쩡한 정책만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법률로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포교하는 것은 금지지만, 미국의 눈치를 봐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입국을 눈감아주고 있다. 또한 기독교로 개종하면 사형이지만, 역시 미국의 눈치를 봐서 정신병자라는 핑계를 대며 국외 추방하고, 이러다가 결국 한국에서 현지사정을 전혀 모르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우격다짐으로 가서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2007)이 터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아프간 정부엔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미국의 괴뢰정부이기 때문에 시골의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차라리 탈레반을 더 낫게 본다고 한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부정부패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생긴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결국 현 아프간 정부 역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여론에 동조하여 잔인한 투석형을 부활시키는 등의 종교적 극단화가 계속되고 있다.
탈레반 자체도 자신들의 첫번째 실패를 거울삼아 예전에는 엄격한 이슬람 법률을 어느 정도 완화하고 예전에는 율법에 따라 돌팔매질 처형으로 다스렸을 일들을 그냥 훈계만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등, 아프간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시적으로나마 변한 척을 하고 있다니 미국은 이래저래 낭패. 탈레반측의 잔혹행위만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종류의 산악 게릴라전이 다 그렇듯이 미군이나 아프간 정부군의 잔혹행위나 미군의 소탕전에서 빚어지는 불가피한 민간인 피해 또한 심각하다. 특히 이런 종류의 전쟁을 하는데는 촌락민의 지지가 필수적인데, 탈레반이 세력을 떨칠수 있는 것은 아프간 정부군이나 미군의 문제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프간에서 널리쓰이는 드론공격의 피해자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라는 사실이 내부고발에 의해 폭로된 바 있다. 기사. 미군소속 드론 조종사들이 이런 민간인 피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PTSD에 시달리고 있고, 이들이 지속적으로 드론 공격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친미파의 주장과 달리 미군이 아프간에서 탈레반보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기사 이런 형편에 아무리 탈레반이 막장이고 잔혹행위를 벌인다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기 힘들다.[24] 기사
채수문 중령이 쓴 책자에서도 이런 사례가 나온다. 미국 측 주도로 가진 아프간 안정정책 회의가 있었는데 여기 나온 각 군벌 지도자들은 '돈 달라' 이 소리만 하여 평화유지군 소속 간부들은 미국에게 구걸하러 온 거지들 회의냐?라고 어이없어 했다. 미국으로선 이 돈벌레들에 이가 갈리지만 그렇다고 이들과 적대하면 아프간에서 이들이 탈레반과 합쳐 미군에 반격할 게 뻔하니, 결국 그 구걸을 들어줘야 했다.
2012년에 탈레반은 수도 카불 인근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자체 주지사를 임명하고 정부 행세를 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동안 인도주의적인 구호를 해온 NGO 단체마저도 아프간 정부가 아니라 탈레반과 손을 잡고 구호활동을 한다. 탈레반 몰락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동 통신 회사마저도 미군 스파이의 활동을 막기 위해 탈레반의 명령에 따라 밤에는 서비스를 중지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군의 통역요원 중 많은 수가 탈레반이라고 한다. 2011년 8월에 벌어진 헬기 추락으로 인한 네이비 씰 몰살 사건도 헬기에 함께 타고 있던 통역요원이 정보를 누설하여 계곡에서 매복하고 하던 탈레반들이 쏜 RPG-7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2011년 9월 13일에는 수도 카불에선 4곳 동시다발 테러를 당했고 속수무책인 현 정부군과 경찰 대응 속에 앞으로도 이럴 일이 계속 터질 듯 싶음에도 미군은 2016년 철수를 결정하였다.
결국 미군은 25년 전 자신들의 라이벌이였던 소련군의 전철을 밟게 되었고, 현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이 얼마나 개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결국 과거 무자헤딘에 전복된 친소 나지불라 정권의 말로를 반복할 것이다. 다만 아프간 구 북부동맹 인사들 상당수가 탈레반의 재집권에 맞서 무장을 재개하기 시작했기에 카르자이의 파멸과는 별도로 탈레반이 Again 1996을 이룰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미국인들 상당수가 여론 조사에서도 이 전쟁은 무익하고 미군이 철군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다. 이에 존 매케인을 비롯한 공화당 우익파들은 2014년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을 버리고 있지 않지만 기사 사실 미국이 아프간을 지금 와서 떠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될 시기는 이미 지났다. 미군이 철군하든 안하든 미국은 아프간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미국 논객 토마스 프리드먼은 컬럼에서 어차피 전쟁은 탈레반의 승리로 끝날 테니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지금의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와 같은 사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즉 베트남 전쟁 재현이라는 현실이 다가온 셈. 사실 아프간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하면 반미 세력이 장악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긴 막아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냥 극단주의만 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중앙아시아 진출을 추진중인 중국과 손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게 돈을 갈취하던 군벌들은 막상 '미국이 철군하는 걸 반대하지만 정 가려면 가고...'라는 태도를 취한다. 중국이라도 좋으니 다른 돈줄이 있다고 하는 것.
2012년 9월 힐만드 주에서 탈레반이 각종 관공서를 보란듯이 대낮에 공격하여 공무원 4명을 비롯한 다수 사상자를 냈으나 정부군은 우왕좌왕하며 1명도 잡지 못했다. 미군으로선 지금도 이런데 미군 철수한 다음에는 뻔할 노릇일테니 답답할 것이다.
카르자이 임기 말기가 되면서 다음과 같은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이 발 뺀 뒤 탈레반이 카르자이 정부를 전복한다. 하지만 구 북부동맹 출신 군벌들의 재무장과 외부의 간섭, 파키스탄의 애매한 태도 등으로 인해 아프간 전체를 재장악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2009년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탈레반의 난동으로 인해 파키스탄 정부는 탈레반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아프간 탈레반도 이 사실을 잘 아는지 자신들은 파키스탄 탈레반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카르자이는 이제 와서 미국을 비판하고 탈레반과 협상을 하는 등 부단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탈레반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결국 무하마드 나지불라 꼴로 고자가 돼서 조리돌림당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사람이 미국의 원조금액을 엄청나게 빼돌렸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해외도피에 성공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매우 잘먹고 잘살 것이다. 나지불라 같은 경우는 종주국 소련이 망해버렸고 대부분의 국제사회의 나라들이 소련군, 친소련 정부군과의 전쟁, 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무자헤딘 반정부군 세력들을 정식 정부로 승인하고 소련이 세운 카르말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나지불라 정권을 자주성, 정통성이 없는 괴뢰정권, 속국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망명을 할 나라가 없었다는 불운이 있었다.
일부 국제 전문가들은 1970년 론놀 장군의 군사 쿠데타로 왕정 폐지 후 피비린내 나는 유혈내전을 겪으며 1975년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크메르 루주 세력들의 폭정으로 자국민 백수십만 명이 학살당하다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되고 198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한 직후 UN의 개입으로 1993년 입헌군주제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캄보디아처럼 미군 철수 후 아프가니스탄이 캄보디아처럼 옛 왕정으로 복고될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물론 2014년 투표율이 탈레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50% 이상에 이르는 등 아프간인들이 탈레반을 그다지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입증됐다. 그러나 그것은 적극적인 반대가 아니라 소극적인 지지 철회일 뿐이며, 이들이 본질적인 측면에서 탈레반과 목숨 걸고 싸울 각오가 되어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단지 탈레반이 다시 복귀한다고 쳐도 이전처럼 날뛰기가 좀 더 어려워질 거라고 기대하는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공은 출범하는 아슈라프 가니 행정부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친서방 주의자로 알려진 그가, 산적한 내부 정치 현안을 잘 극복하고[25] 탈레반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 나갈지가 가장 큰 문제이다. 일단 BSA에 가니 신임 대통령이 서명하기로 함에 따라, 2016년까지 단계적으로 미군 철수는 이루어질 예정이다.
최근 미국이 이란과 어느 정도 화해-협력의 의사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어차피 이슬람 수니파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의 존재를 통해 답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며 그렇다고 이스라엘[26]이나 튀르키예[27]를 이용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란에게 메소포타미아 일대와 양 스탄 모두를 맡기는 대신 미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관철시킬 경우 미국으로서는 그나마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상대를 두어 중동을 안정은 시킬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인도의 반발이라는 변수가 있긴 하나, 인도 입장에서도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과 말이 세속정부지 사실상 탈레반과 사고방식에 차이가 거의 없는 파키스탄을 그냥 놔두느니 이란이 장악하게 하는 것이 이익이다. 핵무기가 미치광이 수니파 무슬림들에게 넘어가는 건 막아야 하니까 그렇다.
이런 와중에 탈레반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오마르가 죽은 것도 무려 2년이 지나서 공개됐다. 즉 2년동안 미군도 제대로 죽었는지 정보도 찾지 못했다는 거다.
2015년 10월 2일에는 C-130기가 추락해서 미국 공군 6명, 민간인 5명이 죽었다고 한다. 미 국방부는 적의 공격에 격추된거 같지 않다고 하는데 탈레반은 자신들이 격추 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
10월 3일에는 미군 오폭으로 국경없는 의사회 병원에서 무고한 19명이 사망했다. #
오마르에 이어 지도자가 된 만수르가 탈레반 내부 회의중 의견 충돌로 같은 탈레반한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탈레반측에서는 거짓 선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새 지도자 만수르가 미군 드론에 의해 사망한 것이 탈레반 고위 관계자한테도 공식 확인되었다. #
그런데 최근 아프간 탈레반 내부에서도 아프간 정부와의 평화협정과 내전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5.1. 트럼프 행정부의 반격과 IS의 개입
오바마 정권에 이은 트럼프 행정부도 아프간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는 중이다. 2017년 탈레반의 춘계공세가 심상치 않자 MOAB 폭탄을 사용하여 탈레반을 폭격, 어느 정도 효과를 내려고 했으나, 탈레반의 진격을 저지하는데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모양. 하지만 트럼프도 자기 임기중에 친미 아프간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원치 않아 쉽게 철군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리고 미국 친민주당 언론에서는 "군사작전의 목표는 탈레반의 진압이 아니라 협상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형편. 이는 국내외 반전여론 및 베트콩의 수그러들지 않는 전의에 미국이 발빼려던 베트남 전쟁 말기와 거의 똑같은 모습이다.2017년 7월 미군병사 두명이 부비트랩에 걸려 사망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not winning)있다며, 파견군 사령관 존 니콜슨 대장을 파면하려고 했으나, 백악관 참모들이 말렸다고 한다. #
2017년 8월 아프간에 4천여명을 추가 파병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대외정책 변화의 신호탄이 될지 주목된다. 기사. 한편 북한에 대해 트럼프는 김정은이 괌에 대한 "포위공격"을 취소한 것에 대해 북한이 현명한 결정을 했다며 긴장을 낮추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
하지만 전세를 돌리기는 여단 규모인 4천명으로는 어림도 없고(2014년까지 2만명 정도였다.이 중 병력에 안 넣는 PMC 용병이 2만명 정도였고 이걸 다 합쳐 미국 주도 연합군은 약 4만명 정도), 협상 촉진을 위해 탈레반을 좀 더 압박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 이에 탈레반은 미군은 당장 철수하라고 주장했다. #
2017년 11월 19일 미군은 아프간 정부군과 함께 탈레반의 마약 제조시설을 대대적으로 폭격하여 10여곳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
2017년 12월 27일 미군이 탈레반계 무장단체 하카니 네트워크의 사령관을 무인기 공격으로 사살했다. #
2018년 1월 1일에 아프간의 낭가하르주아친 지역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미군 1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
2018년 1월 11일 미국 정부는 아프간에 미군 1,000명을 추가 파병하며 드론과 공격기와 같은 중장비들을 배치할것이라고 밝혔다. #
2018년 벽두부터 탈레반과 IS의 테러가 자행되면서 엉망이 되고 있다. 시리아, 이라크에 집중되던 이목이 점차 상황이 정리되면서 아프간과 쿠르드 족에게 몰리는 모양새이다.
2018년 1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의 테러를 비난하며 그들과 대화를 하지 않을 것이며 탈레반을 끝내버릴것이라고 밝혔다. # 이에 탈레반은 결전을 선언했다. #
2018년 1월말, 현 아프가니스탄 친미정부는 약 30%의 국토만을 장악하고 있다는 보도가 났다. 소련군 주둔 말기의 상황과 거의 비슷한 처지. #
2018년 2월 8일 미군은 중동과 중앙아시아 군사작전을 담당하는 중부군의 주력을 아프간으로 배치하였고 공습을 강화하여 탈레반에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2018년 2월 15일 탈레반은 아프간 평화회담을 제안했다. 미국은 탈레반측이 폭력을 중단해야 회담을 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
2018년 3월 28일 미군은 26일과 27일에 아프간 북부 주즈잔 주에서 IS 연계 무장단체를 야간에 급습하여 무장단체 지휘관과 대원들을 사살하고 영상을 공개했다. #
2018년 4월 8일 미군과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의 마약공장 11곳을 공습하여 파괴했다. # 또한 미군과 아프간 정부군은 아프간 북부에서 아프간 IS의 최고위급 지휘관 카리 헤크마트를 드론 공습으로 사살했다. #
2018년 4월 26일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의 평화 협상안을 거부하고 춘계대공세를 선언했다. #
2018년 5월 15일 미군과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이 아프간 서부 파라 주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자 공습에 나섰다. # 그래서 5월 16일 탈레반은 서부 파라 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파라 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
2018년 5월 30일 미군은 아프간의 헬만드 주 무사콸라 지역을 공습하여 탈레반 지휘관 50여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이에 탈레반은 부정하며 민간인 5명만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오는 20일까지 탈레반과 휴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나 알 카에다 등과의 전투는 계속 될 것이라고 했다.
2018년 6월 17일 탈레반은 휴전 연장을 거부하며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
2018년 9월 2일 미군은 아프간 정부군과 함께 아프간 IS의 우두머리 아부 사드 에르하비와 IS 조직원 10명을 공습으로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
2.5.1.1. 제9차 평화협상
2019년 9월에 미국과 탈레반의 협정을 조건부로 체결된 상태이다. #미국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철수 등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미국이 사실상 '탈레반에게 아프간을 떠넘기고 떠나는 내용'이다. # 미군은 주둔병력 규모를 줄이고, 탈레반은 알 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 같은 무장조직들이 대미 공격에 아프간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기로 약속했다고 로이터통신 등은 전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도 협정안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으며, 앞으로 노르웨이에서 아프간 여러 정치세력들 간 협상이 별도로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탈레반이 현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2월 9일에 아프간 전쟁은 조작된 전쟁(!)이었고 온갖 거짓 정보로 포장해왔다고 보도했다. #
2020년 1월 27일 아프가니스탄 현지시각으로 미군 항공기가 격추되어 전원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군 "아프간서 공군기 추락" 확인..."격추 정황 없어"
2.5.1.2. 완전철수 합의
#결국 2020년 2월 29일 카타르 도하에서 장장 18년간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는 '도하 합의'가 진행되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동맹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미군은 합의이행 1단계 과정으로 135일 이내 8천600명 수준으로 감축할 것을 보장했다. 여기에 국제동맹군과 아프간 정부군의 탈레반 대원 5천명과 탈레반 포로 아프간군 1천명의 포로교환은 덤이다.
골때리는 건 이 합의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합의에 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도 3월 10일까지 아프간을 안정시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한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론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탈레반이 통제하는 제2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결말이라는 평가도 많다.
미국이 탈레반을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인정했다는 점과, 베트남 전쟁의 결말을 알면서도 미군을 퇴각시켰다는 점에서 사실상 미국의 패전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비록 철군합의를 했지만 중요성이 떨어지는 베트남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지역이다.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게 완전히 넘어가면 탈레반의 친구 파키스탄의 극단주의자들이 자국의 노선을 더욱 심하게 극단주의화할 가능성이 있다 . 파키스탄은 핵 보유국이다. 파키스탄과 중국, 이란 등을 제외한 인도 등의 주변 국가들도 신생 아프간 정부가 무너지지 않길 원하기 때문에 탈레반 입장에서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프간 정부군의 사기가 워낙 낮고 조직력이 빈약하기 때문에 결과는 어찌될지 모른다. 탈레반은 미국의 개입 이후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아프간 전국의 무장단체들을 흡수해 세력을 복구한 반면, 아프간 정부군 대부분은 여전히 질적으로 거의 나아지지 못했다.
3월에 아프간 정부가 포로 석방을 결정했다. #
2001년 이후 첫 아프간-탈레반 간의 대면 협정을 가졌다. #
4월에 다시 포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 이런 와중에 양측은 포로를 석방하였다. #
2.5.2. 미국의 최종 철수
자세한 내용은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6월에 들어서서 다시 전투가 발생하고 있다. #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의 민간인 사상자를 두고 논쟁 중이다. #
7월 31일부터 사흘간 이슬람 최대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를 맞아 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 '3일 휴전' 직전 동부에서 자폭 테러가 발생, 민간인 등 18명 이상이 숨졌다. #
8월 9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서 탈레반 포로 400명을 석방하기로 결정하였다. # 우선 80명 먼저 석방이 이루어졌다. #
9월 9일 암룰라 살레 부통령을 겨냥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 그리고 이런 와중에도 카타르 도하에서 아프간 정부 대표단, 탈레반, 카타르 정부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평화협상 개회식이 열렸다. #
10월 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올해 크리스마스 때까지 철군시키겠다고 하였다. #
2021년 새로 집권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5월 1일까지는 모든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겠다고 밝혔다가 # 다시 9월 11일까지로 연기하였다. # 다만 트럼프 때는 상황 봐서 바꿀 수도 있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아프간이 탈레반에게 장악당하건 말건 무조건 철군한다는 조건이라 어지간해서는 철군이 이뤄질 전망이다.
2.5.3. 탈레반의 승리
자세한 내용은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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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have the watches, we have the time."[28]
"당신들에겐 시계가 있지만, 우리들에겐 시간이 있다.
탈레반 간부 무자히드 라흐만[29], 2011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결국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결정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손쉽게 무너지면서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수를 단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탈레반에 의해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실질 병력 14% 장부상 86%라는 희대의 군비리를 가졌던[30] 아프간 군은 탈레반을 막아내지 못하고 대부분의 주를 뺏기는 바람에 수도가 포위당했고 결국 2021년 8월 15일[31]
정부는 버티지 못하고 탈레반에 항복하고 말았다.
대통령은 달아났고, 정부군은 해산되었으며 탈레반은 전쟁의 승자가 되었다."당신들에겐 시계가 있지만, 우리들에겐 시간이 있다.
탈레반 간부 무자히드 라흐만[29], 2011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결국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결정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손쉽게 무너지면서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탈레반의 승리가 얼마나 신속하기 이루어졌는가 하면 탈레반이 아프간을 재탈환한 시점에도 여전히 아프가니스탄내 미군 철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애초 미군의 완전 철수 일정은 9월 11일까지였는데 탈레반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미군은 대피과정에서 탈레반 검문 통과를 위해 탈레반에게 아프간 내 미국인·협력자 명단을 넘겨줘가면서 철수 협조 요청을 해야만 했다.[32] # 미국내에서도 명단을 넘겨준 것에 탈레반에게 '사살 리스트'를 넘겨준 셈이라는 비판이 나왔을 정도.
소련-아프간 전쟁과 마찬가지로 전술적인 우세는 전략적 우세를 뒤집지 못한다는 군사학의 명제가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전쟁이었다.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패퇴할 때조차 아프간의 반군세력보다 훨씬 전력이 강했으나, 이런 강력한 전술적 전력은 전략적인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미국은 원흉인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으니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 같지만 중요한 알 카에다가 2001년 수준으로 부활해 버렸으니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다. #
2.5.4. 종전
현지시간 2021년 8월 30일,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에서 마지막 미군 수송기(C-17)가 이륙하며 모든 철수 작전이 종료되었고 31일, 미군이 아프간으로부터 완전 철군을 선언하였다.이로써 2001년 9.11 테러 다음 달부터 시작된 아프간전이 20년만에 미국의 패전으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공식 종결되었다. #
"美 도운 죄"…탈레반, 통역 아프간 가족에 사형선고
탈레반, 집집마다 다니며 '부역자' 색출
야간통금령 내린 탈레반…`숙청 리스트` 들고 언론인 색출까지
부역자 낙인…미군철수 뒤 아프간 통역사 탈레반에 참수당해
뉴욕타임스 “탈레반, 미국 협력자 색출에 혈안”
Former Afghan Pilots Remain Grounded, Hunted by Taliban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패배하여 떠나간 이후 미국에 협조해온 아프가니스탄내 친미 세력은 궤멸당한다. 우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탈환할 조짐을 보이자 일부 친미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스스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거나 서방, 친서방 국가의 철군에 따라 함께 빠져나갔다. 그러나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친미 성향의 미군 협력자들은 탈레반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후 "부역자", '배신자"라고 부르며 색출해서 처벌하고 협력 정도가 긴밀한 경우 사형에 처해지고 있다. 일부는 파키스탄, 이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으로 도망가는데는 성공했으나 점차 비자 만료로 인한 당사국들의 추방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 일부는 영국에 가는데는 성공했지만 영국의 난민 정책에 따라 르완다로 보내지기도 했다.
미국이 철수한 후 2021년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일어났다.
3. 주요 전투와 사건 목록
4. 미국이 패전한 이유
전쟁의 세 가지 어두운 것[三闇]
1. 믿지 못할 사람을 데리고 승리를 거두려 하는 것.
2. 지키는 것을 못하는 백성을 앞에 세워 굳게 지키려 하는 것.
3. 싸움에 경험이 없는 군대를 거느리고 천행으로 이기기를 바라는 것.
{{{#!folding [ 한문 원문 펼치기 · 접기 ]
一。視不信之人而求利。1. 믿지 못할 사람을 데리고 승리를 거두려 하는 것.
2. 지키는 것을 못하는 백성을 앞에 세워 굳게 지키려 하는 것.
3. 싸움에 경험이 없는 군대를 거느리고 천행으로 이기기를 바라는 것.
{{{#!folding [ 한문 원문 펼치기 · 접기 ]
二。用不守之民而欲固。
三。將不戰之卒而幸勝。}}}
- 삼봉 정도전의 < 삼봉집> 제7권 < 진법(陣法)> 중에서. 아프간 신정부와 국민들을 신뢰할 수 없고 대반란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33] 미군의 패인은 이 세 가지에 전부 부합한다. #
2001년 9월 전쟁을 시작, 2달만인 2001년 11월 13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함락시키고 2001년 12월 5일에 토라보라를 점령, 12월 7일에는 탈레반의 중심지역인 칸다하르를 함락 후 12월 14일 아프간전 승리를 선언하였다.[34]
그러나 2001년 12월 14일의 승리 선언에 무색하게 이후 2021년 8월 15일 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에 공식적인 항복 선언을 하고 정권을 탈레반에 이양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전쟁은 정확히 20년 만에 미국의 전쟁 포기 및 철수로 막을 내렸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이 목표 달성에 완전히 실패한 전쟁이다.[35]
베트남전보다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모병 위주에 전사자도 3,800명으로 베트남전의 58,000명과 비교해 17분의 1 정도에 불과하여 미국 사회에 직접적으로 준 악영향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 정도다.[36] 그러나 이를 위해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막대한 인명 피해[37]를 감내해야 했으며 물론 그 악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미국 납세자들은 참전용사들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보훈복지를 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세금을 앞으로 수십년간 추가로 지불해야 하므로, 금전적 악영향은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아프간 전에서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알 카에다를 비롯한 저항세력을 제거한 후에(군사적 목표),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시키는 것(정치적 목표)이었다. 전쟁 초기 미국은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 결과 군사적 승리까지 무위가 되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2003년 이후 미국의 싱크탱크들조차 아프간 전쟁에서의 승리에 점점 회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이미 미국에서조차 미국의 패전을 예측하는 책이 2004년도에 출판되던 상황이었다. 오바마, 트럼프 재임기 시절에는 기성 미국 언론들조차 전쟁이 종결되지도 않았는데도 '패전한 전쟁'이라고 지칭하고 있었으며 바이든의 철수는 이거조차 숨기려고 눈 가리고 아웅하려는 어설픈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38]
하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겉보기에는 미국이 지는 게 불가능한 전쟁처럼 보였지만, 속을 뜯어보면 미국이 이기는 게 불가능한 전쟁이었다.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이 과거에도 몽골제국, 대영제국, 소련 같은 초강대국들조차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게 한 전적이 있는 일명 제국의 무덤이라는 게 미국 입장에서 변명거리이긴 하다.(...)
4.1. 분노로 시작된 준비되지 않은 전쟁
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39]
9.11 테러 직후 미국은 분노로 눈이 돌아가 있었고 테러의 수뇌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는 아프간 탈레반 정권이 신병 인도를 거부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탈레반 정부는 테러단체이다. 그러므로 일단 여기까지로 보면 명분적으로는 미국의 전쟁은 정당해 보이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 이후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간 것이 같은 해 10월 7일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을 당했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빠른 타이밍에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벌어진 전쟁이었다. 그 이전에 아프간에 대해 미국이 가지고 있던 계획이라고 해 봐야 북부동맹을 비롯한 무장 세력에게 무기를 쥐어 줘서 탈레반과 싸우게 한다는 게 전부였고 초유의 공격을 받아 보복 공격을 하는 상황에서 1달만에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의 전복 후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을 세우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훗날 벌어진 이라크 전쟁조차 몇 년의 준비 시간을 갖추고 전쟁을 벌였음에도 계획과 실제가 맞지 않아 여러 혼란을 겪고 승패와 상관없이 실패한 전쟁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하물며 1달도 채 안 되는 준비기간 동안 탈레반 정권 붕괴 후 아프간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 계획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40]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무너트리는 것 자체는 성공하긴 했으나, 오사마 빈 라덴조차 없어진 상황에서 정부가 없어진 아프간에 정부를 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 부시 정권은 뒷수습도 제대론 안 된 상황에서 이라크 전쟁을 벌이는 우를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아프간 전쟁은 시작부터 꼬인 상황에서 이를 수습하기도 전에 미국은 일을 벌리기만 했고, 뒤늦게 아프간 상황이 막장이 되어가는 것을 깨달은 후 아프간의 치안과 정부 재건에 큰 돈을 투자하였으나 사태는 그것만으로 수습하기엔 너무 커져 있었다.
전쟁 초기에 미국의 실책으로 부시 행정부가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를 같은 집단으로 묶어버려서 둘 다 제거해 버리려 한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탈레반 정권은 부시 정권의 프레이밍과는 달리 과거나 지금이나 파슈툰 족에서 가장 종교 원리주의적인 군벌 집단을 의미하는 거고 알 카에다나 IS와 같은 국제적인 테러조직이랑은 성격이 다른 집단이고 알 카에다와의 관계도 정적관계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제거해 주는 대가로 은신처를 제공해 주는 정도의 계약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시 정권이 무리하게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기 보다는 탈레반 정권의 빠른 항복을 받아내고 그들에게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변을 확보하도록 요구했다면 더 빨리 수렁에서 빠져 나올수도 있었다는 주장이다.
2001년 10월 7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퍼부었을 당시 반(反)탈레반 무자헤딘 압둘 하크는 "미국의 이러한 행동은 아프가니스탄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미국의 폭격은 조국을 갈기갈기 찢을 뿐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미군이 직접 개입하기 이전 탈레반은 폭정을 일삼는 광신도 집단으로서 아무 명분도 없었다면, 미국이 탈레반을 직접 공격하면서 졸지에 탈레반이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주권을 지키는' 세력이라는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의 이스라엘 지원으로 이슬람권 각지에 만연했던 반미 감정을 무시한 채 어설프게 아프가니스탄에 직접 개입하였다. 일전에도 압둘 하크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와중에도 미국을 뇌 없이 덩치로 밀어부치는 공룡에 빗대 농담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우려가 현실이 된 셈이었다. 파슈툰인 출신 압둘 하크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함께 다민족 국가였던 아프가니스탄을 연방제 국가로 개혁할 계획을 세웠으나 2001년 마수드와 압둘 하크가 차례로 사망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그들의 이상 및 염원과는 다른 파탄 국가로 치닫고 말았다.
4.2. 체제 교체의 실패
미국은 아프간을 친미 성향의 민주주의 정부가 통치하는 나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왕정 - 공산주의 정권 - 무자헤딘 정권 - 탈레반 정권으로 이어지며 탄압과 권위주의가 전제된 역사와 정치적인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카불에서 벗어나면 바로 무슬림 공동체의 공통 규범인 샤리아와 파슈툰인 고유 규범인 파슈툰왈리로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부족 단위의 사회인 관계로 이런 아프가니스탄을 곧장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들이 선택하는 것이지, 외세가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세워놓거나 우연히 알아서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외세가 들어오는 족족 완강하게 저항했고, 계속해서 토착 세력이 외국발 정권을 전부 무너뜨렸다. 당장 공산주의 정권부터가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던 현지인 무자헤딘들에게 축출되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형성된 이슬람주의가 국민들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는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하는 연고주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막무가내로 민주주의를 주입할 경우, 국민들은 늘 해왔던 것처럼 전통적 가치를 선택하므로 예멘이나 필리핀처럼 지주와 토호들이 실권을 잡거나 무함마드 무르시 시절의 이집트처럼 종교 극단주의 성향 단체가 정권을 잡는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탈레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미군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1인1표 민주선거를 하면 반서방, 반세속주의, 반외세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성립될 가능성이 컸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수도인 카불은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개발이 됐고 행정이 작동했으나, 수도권에서 벗어나면 도로망이 부실하고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농촌들이 널려있다. 이런 농촌에선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전통적, 종교적 가치에 기반한 반외세 감정이 강한 것이 당연하다. 거기다 지역, 민족마다 언어가 달라서 표준어가 아프가니스탄 국토 전반에 자리잡지 못했으며 오히려 탈레반이 권장하는 파슈토어, 우르두어[41]가 부족들의 공용어 역할을 하는 상황이다. 더욱이 근대적 교육의 부재로 문맹률이 높았다. 교육받지 못한 국민은 일부 유력자의 부정부패를 제어할 능력이 없으며, 인권과 개인의 자유 존중이라는 민주주의의 밑바탕이 되는 마인드셋조차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아프간을 서유럽식 현대 국가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는데 부패 문제로 인해 경제 개발이 지지부진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했다. 탈레반을 무찌르고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구성한 북부동맹 군벌 상당수 역시 실질적으로는 또다른 이슬람 원리주의자 그 자체에 마약 카르텔 두목 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군벌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부도덕한 인물들 투성이었다.
애초에 북부동맹을 형성한 무자헤딘 군벌들은 세속주의자들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시절 공산주의 정부의 반종교 및 국가 무신론 정책에 맞선 이슬람주의자들이었다.[42] 즉, 상술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탈레반과 북부동맹의 종교적, 문화적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자기들 편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해줬다고 해서 탈레반에 맞서는 집단을 순식간에 서구적이고 세속적으로 뒤엎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부르하누딘 라바니가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을 타도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탈레반 정권과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인 이슬람주의에 근거한 이슬람 국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43]의 건국이었다. 부르하누딘 라바니가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아꼈기 때문에 그를 개념있는 온건파로 생각할 수 있는데, 라바니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극단주의 이론에 경도되었던 사람이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시절 이들이 시행한 조치들은 술집을 폐쇄하고,샤리아를 공식 법률로 정하고, 여성에게 이슬람식 의복을 입을 것을 명령하는 전형적인 이슬람주의자적 행보였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자 다시 정권을 탈환한 무자헤딘 군벌들은 또다른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대신 미국의 입김에 떠밀려 이슬람 민주주의에 근거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출범시켰지만, 이 국가조차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공화국과는 백만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저의 목소리는 의회 내에서도 언제나 무시당하고 있고 진실을 말하려고 했을 때 마약상인 및 친군벌 성향의 의원들에 의해 신체적인 공격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한 의원이 "저 년을 강간하고 창녀로 만들어라!"고 외친 적도 있습니다. 저는 총을 싫어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무장한 보디가드들의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아프가니스탄 여성 국회의원의 증언. 의회에서 대놓고 특정 여성 의원을 겨냥하여 '강간하라', '창녀로 만들라' 같은 비상식적인 폭언이 나왔으나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44]
즉, 탈레반에 직접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유하기는 했지만 북부동맹을 형성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탄생시킨 무자헤딘 군벌들도 애초에
종교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 아프간의 비극이었다. 샤리아와 코란의 해석에 있어 북부동맹 쪽이 조금 더 세속적이고 관대하긴 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예 종교와 거리를 둔 터키의 케말주의나 시리아와 이집트 바트당의 아랍 사회주의와는 달리 북부동맹의 이념은 이슬람에 기초해 있었다. 탈레반이 부르카를 뒤집어쓰지 않은 여성을 살해하거나 구타했다면 무자헤딘 군벌들은 히잡을 쓸 것을 강권하는 정도로 만족했지만 그들도 분명히 이슬람교가 아프간 사회에서 영향력을 잃거나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는 위치에서 내려오길 원하지 않았다.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아프가니스탄 여성 국회의원의 증언. 의회에서 대놓고 특정 여성 의원을 겨냥하여 '강간하라', '창녀로 만들라' 같은 비상식적인 폭언이 나왔으나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44]
결국 또다른 종교 원리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넘겼을 뿐이지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풍조는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이슬람 극단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국민들은 체념 상태로 파키스탄, 아랍 에미리트, 튀르키예 등으로 난민이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다.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국민들은 계속 해외로 이탈하는 반면 탈레반 구성원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계속 충원되는 상황이 이어졌다.[45]
미국의 매거진 ‘내셔널지오그래픽’은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간
칸다하르주에 위치한 한 부족을 소개했다. 강변을 낀 마을에서 살고 있는 부족의 원로는 한탄하듯 말한다. “20년 동안 전 세계가 이 나라에 들어왔고 해외에서 돈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우리에게는 어떤 도움을 줬는지 모르겠다. 만약 물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면, 만약 전기가 들어온다면 우리는 아마도 전쟁 대신에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도로가 포장됐다면 지금과 같은 재앙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미국의 침공으로 축출됐지만 변한 건 없다고 말했다. “칸다하르에 우리에게 필요한 시설이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지역에 있는 유일한 대규모 병원은 1970년대에 중국인들이 지은 게 전부다. 주도(州都)인 칸다하르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출처
아프간의 경제발전을 위해
미국이 쏟아부은 지원금은 고위 관료들의 공돈으로 유용되면서 그들의 해외 계좌로 빠져나가버렸다.
탈레반 정권의
모하마드 오마르 등도 취미로
샹들리에를 수집하는 등
사치와 낭비가 극심했지만 적어도 자신은 초라한 오두막집에서 검소하게 산다고 선전하면서 국민들 몰래 사치를 즐긴 반면, 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권 유력자들은 미국의 개발 지원금을 삥땅친 돈으로 대놓고 사치를 일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이든 친미 정부건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다.결정적으로, 90년대 내전 때부터 지역의 토호이자 실력자들로 군림한 군벌들이 과거에 끼친 민폐나 만행에 대한 청산이나 진상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가장 악명 높은 대군벌이었고 미국과 정부에 총을 들이밀기까지 했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조차도 친정부 인사로 전향하자 그동안 저지른 만행과 전횡에 대해 처벌과 조사를 받기는커녕 정계에 입문하는 것을 허락받는 등 사회적 합의조차 없는 면죄부를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시절마냥 이슬람주의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이슬람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실상은 부패 군벌들의 불안불안한 사상누각 연립 정권이자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공화국처럼 사실상 미국 정부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급조된 한계국가에 가까웠던 것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근대적인 의미의 정부는 전부 붕괴되었기 때문에 소련과 공산주의,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들과 탈레반에 맞선 경력이라도 있던 무자헤딘 군벌들과 손을 잡지 않고는 국가 건설과 통치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이들도 탈레반보단 낫다 뿐이지 문제가 많았고 무엇보다 매우 탐욕스럽고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지도층의 지원금 횡령을 통한 부정축재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만연한 이슬람 근본주의 문화로 근대적 교육을 위한 예산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고, 문맹률은 여전히 높았으며 국민의식은 형성되지 못했다. 결국 그 전까지 질서를 유지하던 탈레반 조직을 제거함으로써 목표로 했던 체제 변동(regime change)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기존 체제가 붕괴했을 뿐이며, 그 힘의 공백 상태를 부족과 군벌들이 메움으로써 혼란만 더 가중시켰다.
4.2.1. 미국의 책임 문제
나토군과 미국인들은 그들의 아프간 정책을 매우 잘못 운용했고,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다른 비슷한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위협의 과장, 결여된 지정학적 구상이 실패를 불러왔다. 미국은 패배를 좀 더 일찍 받아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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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46]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46]
다만 이것이 아프간 자체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하기엔 어려운 점도 많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명목상 이라크 전쟁 이후 세운 이라크 과도정부같은 꼭두각시 정부와는 달리 자율권이 있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이 지지하는 친미 인사들에 의해 움직이는 정부였고, 나지불라 정부 붕괴 이후 실질적으로 탈레반과 계속 항전한 판지시르 등의 북부동맹 군벌들 상당수가 중앙 정계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47] 헤라트에서 아프간 정부 전복 전까지 항거했던 이스마엘 칸이 중앙정부에게 공격 당해 아들을 잃었던 전적이 있을 정도로 미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급조된 동시에 친미 인사들에 의해 운영된 중앙정부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듯 기존 군벌세력들과도 대립했고 군벌들의 무력에 의존하던 아프간 반 탈레반 세력의 전투력 악화를 불러왔다. 후술되는 아프간 정부군의 전투력 약화 또한,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 친미 중앙정부의 실권자들이 아프간을 잘 통치했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아프간 세속정부 20년 동안 여성에 대한 권리 신장과 문화적 개방 등 혜택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수도 카불에 집중되고 지방에 투자되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친미 정부수반들의 뒷주머니에 들어가 부정부패를 일삼는 데 사용되었다. 미국은 이들 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면서도 내버려 뒀는데, 이라크와는 달리 명분적, 형식적으로는 대놓고 내정간섭을 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으나, 실상 아프간에서 미국이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부정부패해도 친미적인 인사들이 정권을 잡는 게 미국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이들이 정권을 잡도록 뒤에서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미국이 결정적으로 오판한 것은 민주주의는 단기간에 확립되는 정치제도가 아니라 시민의식의 근대화, 문맹 타파, 세속주의 또는 자유주의 사상의 보편화, 반교권주의, 반권위주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정치제도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처들어가서 때려부순 후 무작정 민주주의를 심어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고 해서 그대로 민주주의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미국을 주도하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에 분포하는 자유주의적 매파와 네오콘들의 정치이상주의적인 한심한 망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속가능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발전되어야만 한다. 해당 문단 참조
결과적으로 과거 미국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같은 북부계를 외면하고 지원한 군벌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잘랄루딘 하카니[48]가 나지불라 정권 붕괴 후 탈레반으로 돌아선 것처럼, 이번에도 미국은 기존 북부 군벌과 같은 세력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보기엔 친미 인사라고 생각되는 이들로 정부를 구성했고, 결과적으로 또다시 자신들이 키운 친미 세력에게 또다시 통수맞고 물러나고 판지시르를 비롯한 아프간 북부 군벌은 다시 탈레반과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프간 전쟁에 처음 발을 들인 부시 행정부부터 종지부를 찍은 조 바이든 행정부까지 모두 일관성 있게 공유하는 실책이 있다. 무자헤딘 군벌과 손을 잡지 않으면 탈레반에 대항하는 정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그들과 손을 잡았지만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국무를 맡긴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군벌의 부패와 비민주성에 학을 때고 확고히 대안 세력을 육성하고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양당을 불문하고 아프간 전쟁 동안의 모든 미국 행정부들은 그 중간에 있는 선택을 했다.
경험도 부족하고 능력도 불분명한데다가 대중 사이의 인기도 사실 없다시피한 친미파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꿰차게 돕되 군벌의 존재는 존재대로 인정해 친미 인사들과 군벌들이 공존하게 두는 상황을 만들고 지원금을 퍼부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애매한 정책은 미국민의 세금은 세금대로 낭비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군벌들의 90년대부터 전장에서 쌓아올린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탈레반에 능숙히 맞서는 나라도, 다소 미숙하지만 잔혹한 과거사와 작별하고 민주주의가 번영하는 나라도 아니게 만들었다. 미국이 지원한 친미 인사들은 애초에 그럴 능력도 지지기반도 정치적 비전도 없었으니 민주주의 체제 확립이나 탈레반 축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미국이 지원하는 막대한 지원금과 물자를 빼돌려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는 데 집중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군의 중핵을 당담하게 된 군벌들 역시도 정부와 알력과 정부의 견제 때문에 본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탈레반에 점점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4.3. 더러운 전쟁, 현지인들의 민심 이반
왜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가,
미군들은 모두 괴물이다. 옛날에는
러시아인들이 우리를 케밥처럼 만들어 놓더니 이번에는 미군이...
아들이 이렇게 죽는 것을 보면 누군들 자살폭탄 생각을 안하겠는가?
인간의 땅; 아프가니스탄, 살아남은 자들 (KBS_2009.06.21.방송) #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미국이 전쟁에서 패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다. 베트남 전쟁 때는 2차대전 종전 직후에 이미 호치민과 월맹이 베트남 내 모든 정파를 압도하고 있어서 프랑스군이건 미군이건 반공주의 세력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다가 자국민의 염전 여론에 질려서 도망치듯 나가는 그림이라도 그렸다. 미 본토가 직접 공격당하는 등, 진주만 공습 이후 유례를 찾기 힘든 사태가 발생하여 훨씬 명분이 확실했던 이 전쟁이 이렇게 파국으로 치달은건 행정부들 뿐만 아니라 미군의 책임도 배제할 수 없다.아들이 이렇게 죽는 것을 보면 누군들 자살폭탄 생각을 안하겠는가?
인간의 땅; 아프가니스탄, 살아남은 자들 (KBS_2009.06.21.방송) #
미국이나 소련이나 아프가니스탄 개입 전략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프간 민중들이 외국군 더 나아가 외세에 매우 적대적이라는 점이다. 별 명분도 없이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하피줄라 아민 정권을 교체하고 엄연한 국가원수였던 하피줄라 아민을 살해한 소련에 비하면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은 명분이 훨씬 확실하긴 했다. 아프간 이슬람주의자들이 소련인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긴 했어도 하피줄라 아민 정권이 그것을 비호하거나 방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간인 다수에겐 미국의 침공이나 소련의 침공이나 별 다를바 없는 침략전쟁이자 이교도와 외세의 부당한 내정간섭이라고 인식하는지라 소련이 겪던 문제를 미국도 고스란히 겪게 된다.
탈레반 통치에 반감이 컸고 외부와의 교류도 비교적 활발해 계몽된 사람들이 많은 카불 등의 대도시 주민들은 미군을 환영하거나 최소한 저항하진 않았지만,시골로 가면 갈수록 미국이 이교도 십자군 국가고 생트집을 잡아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탈레반의 선전이 점차 먹혀들어가기 시작했다. 탈레반이 촌락 농민이라고 특별히 우대한건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 세계로 나가본 적도 없고 받은 교육이라고는 성직자들에 의한 코란이나 샤리아에 대한 지식 정도밖에 없던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아프간 농민과 목동들이다. 아프간인 모두가 공유하는 뿌리깊은 외세에 대한 반감을 역설하는 탈레반의 프로파간다와 선동은 이들에게 너무나 빠르게 파고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전력으로 게릴라를 토벌해 봤자, 이들 적대적인 민중들에게서 게릴라가 금세 충원되기 때문에 전혀 효과가 없다. 거기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여성들의 평균적인 교육 수준 및 가정 내 발언권이 낮아, 가족계획이 제대로 도입되지 못하고 그 결과 출산율이 상당히 높은데[49]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서 게릴라에 합류하게 되므로 게릴라를 죽이면 죽일수록 오히려 게릴라가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미군이나 소련군은 소수의 특수부대로 무자헤딘이나 탈레반의 지휘관들을 포착, 체포하거나 암살하는 방법도 쓰곤 했지만, 이들 반군은 이들 지휘자의 지휘력이 아니라 향촌민 대부분이 외국군에 대해 갖는 반감 및 신앙심( 이슬람 근본주의)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제거된 무자헤딘이나 탈레반의 지도자들은 바로 다른 인물로 대체되고, 반군의 무력이나 작전능력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
때문에 소련군이나 미군 입장에서 게릴라를 토벌해도 계속 충원되며, 결과적으로 외국군은 점과 선만 지배하고, 아프간의 그 넓은 영토는 게릴라들의 해방구가 되어버린다. 위에서 말한 전략적 실패라는 것은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민간인 협력자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전투가 키팅 진지 전투인데 초반에 키팅 진지 주변의 아프간 주민들이 미군에게 적대적이며 키팅 진지에 있는 미군의 위치와 무장수준을 탈레반한테 상세하게 알려주어 미군에 대한 정보를 알게된 탈레반이 이를 기반으로 공격해와 미군은 8명이 전사하고 3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는다.
혹자는 이에 대해 적대적인 민간인을 전부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논지를 펼치는데, 일단 미국 입장에선 점령지에서 인종 학살을 하게 되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의 손아귀에서 아프간 민중을 구하기 위해 미군이 개입한다"는 전쟁 명분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되며, 미군이 이런 짓을 하게 되면 그나마 친미적인 이슬람권도 모두 미국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또한 현지의 민중 자체가 칼같이 친미, 반미 집단으로 나눌 수가 없으며 한국에서조차 정치 성향은 정반대이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친밀한 경우가 많다. 이런 인적 네트워크 관계를 무시하고 그냥 적대적인 민간인이라고 마구 죽인다면 당연히 처음에는 우호적인 민간인들조차 적대로 돌아서게 된다. 1979년에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조차도 아프간 국민 다수가 반군의 기반이라는걸 알고 있었음에도 전부 죽여서 후환을 없앨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일당 독재 체제에 철저한 감시와 언론통제가 이뤄지던 소련도 게릴라가 있다고 피점령국의 전국민을 죽이거나 수용소에 감금하는건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학살 자체는 도덕 문제를 떠나서도 현실성이 없는 것이, 대규모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경제적으로 비용이 너무 크다.[50]
게릴라전 자체가 군사적으로 전술적 승패와 상관 없이 대전략적으로는 현지인과 점령군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현지민을 게릴라군의 편으로 만들어 점령군을 적대적인 현지민의 파도에 익사시키는 전략이고 당연히 점령군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민간인과 게릴라의 접촉은 최대한 차단하면서 대민작전으로 현지민의 민심을 사들이는 것이며 미국 등 서방세계가 단순히 도덕적이라서 민간인 학살을 꺼리는 것이 아니다. 간혹 이에 대한 예시로 ISIS 전쟁에서의 쿠르드족의 예시를 드는 경우도 있는데 ISIS 전쟁에서 쿠르드족은 점령군 ISIS에 맞서는 피점령민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프간 현지인의 사례와 비교해야 하는게 적합하다.
아프간의 민중들이 이렇게 서방 세력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것에 대해서는 애초에 아프간 사회 전체가 보수적인 이슬람교에 경도되어 어떤 이유건 외세의 개입을 거북하게 여기는 국민 정서 때문도 있지만, 미국 주도 연합군의 실책들은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다국적군이 군사 작전과 드론을 통한 민간인 폭격, 미군을 위시한 다국적군의 민간인 오인사살이나 학살 등의 전쟁범죄, 대민 범죄를 저지른 미군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처벌 거부 등으로 아프간인 일부의 그나마 호의적인 여론도 서서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일부의 주장과는 달리 현재까지 드러난 정보로는 아프간에 주둔한 미군이나 ISAF의 전쟁 범죄가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 보기는 무리가 있으며 폭격 등에 의한 사상자 사고도 고의적인 사고인 경우보다는 의도치 않은 오폭 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장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아프간 민간인이나 그 가족,지인들의 입장에서는 고의적인 것이건 실수에 의한 것이건 총이나 폭탄에 맞으면 죽거나 불구가 되는 건 똑같다.[51]
당장 전쟁 초기 3개월동안 미국은 아프간전에서 탈레반 전사 약 1만명을 사살하는 동안, 민간인 피해가 1000여명에 달했다. 아프간전 내내 미국 군 사령부는 민간인 피해를 부차적인 것으로 넘기면서 빠르게 현지 여론을 수습하기 보다는 군사적 작전 성과를 올리는 데 집중했고 사태가 심각해진 이후에도 문제를 덮기에만 급급했지 이를 해결할 생각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이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최종 철수 시기에 일어난 카불 테러에 대한 미군의 보복 행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 주도 ISAF군이 언론과 UN에 선전하는 데로 아프간인의 자유와 인권 수호를 위해 정말로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했다 쳐도 아프간인 다수는 탈레반보다 못한 이교도의 침략으로 간주했을 공산이 높지만, 드론을 활용한 광범위한 폭격 작전과 대게릴라 특수전은 필연적으로 아프간 민간인을 사상시켰고 ISAF군에 덜 적대적이던 아프간 무슬림들도 미국과 미국이 시작한 전쟁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게다가 미국은 20세기에 치른 전쟁들에서 익히 그러했듯 전쟁범죄 수사에 철저하게 비협조로 일관하며 방해한다. 결국 미군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는 흐지부지 된다. # 이후 아예 대놓고 전쟁범죄를 수사하는 검사까지도 제재를 하며 수사를 못하도록 한다. # 이런 상황에서 오폭으로 고의가 아니었다고 미군이 그나마 낫다는 것은 처음부터 외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프간인들 다수에겐 더욱 설득력이 없다. 심지어는 이렇게 나몰라라 하는 미국의 태도는 자신의 전쟁 수행에도 해악을 끼쳤다. 1979년에 세계 2위의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이 침공했을 때도 1989년 철수 때까지 철저한 반외세주의 전통에 기반을 둔 집요한 투쟁으로 소련군을 자력으로 격퇴하는 세계 역사의 희귀한 사례를 써낸 아프간인들이다. 20년쯤 뒤에 미국이 군대를 몰고 들어온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건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할 나라고 국민들인가?
미국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폭탄 테러 이후 배후에 있는 IS 지도자를 향한 보복 작전을 개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카불로 향하는 IS의 자폭차량을 발견해 공습으로 폭격했다고 밝히면서 민간인 오폭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이 과정에서 어린이 6명을 포함한 일가족 9명이 유폭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심지어 원래 타격대상이었던 차량조차도 자폭차량이 아닌 국제구호단체 협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미국 정부는 유가족에 대한 보상과 이주를 제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실제 이 보상을 위해 미국 정부는 유가족에게 접근조차도 하지않았고, 심지어 이 보복작전을 실시한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도 전무했다. 실제로 이런식의 사건들은 아프간 전쟁 내내 끊임없이 발생했지만, 공식적으로 제대로 인정되지도 못한 사건들이 태반이었고, 결국 이러한 일들이 수백 수천건씩 누적되면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죽었기에 아프간 지역에서 ISAF에 대한 인식은 최악을 달릴 수 밖에 없었다.[52] 결과적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실패처럼 아프간 전쟁도 미군의 고질적인 대민작전능력 문제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위 문단들에서 지적한 아프간전의 드론 폭격 작전의 문제는 이라크 전쟁보다 더 베트남 전쟁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호치민 루트가 지나가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겨냥한 미 공군의 폭격이 캄보디아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캄보디아인들이 미국이 후원하는 론놀 정부를 증오하고 크메르 루주 집권을 돕게 만든 것을 연상시킬 정도로 결과는 유사했다. 아프간전에서 폭격은 최신 폭탄과 무인기가 사용되어 그때보다는 정교하고 규모와 사상자도 적었지만 억울하게 가족과 지인이 죽거나 재산과 집이 파괴된 아프간인들이 외국군에 원한을 품는 일이 생겼다는 점에서는 베트남 전쟁 당시 폭격작전과 대동소이한 공통점이 있다. PFM-1 같은 국제 여론에 대놓고 반하는 폭발물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군의 행태를 답습하기보단 드론을 사용한 정밀타격이 덜 부담스럽고 더 효과적이겠다는 펜타곤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자신의 아프간 전쟁에서 투하한 나비지뢰나 화학탄, 멍텅구리 항공폭탄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제조와 설계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 미국의 똑똑한 유도폭탄들도 탈레반 반군만 골라서 폭사시키기엔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기술의 발전도 아프간에서 비극을 막진 못했다.
설령 드론 폭격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미군은 무장이 열악한 탈레반을 비롯한 반군들과 달리 대규모 물자지원을 바탕으로 지뢰나 IED등을 제거할 때 현지 민간시설의 피해와 상관없이 의심되는 지역에 폭약을 설치해서 폭파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당연히 이는 해당 지역에 있던 민간인 건물의 피해를 무시한 안하무인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무리 미군이 고의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고 주장해도 결과적으로 미군은 전사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과잉 화력을 사용했고, 결과적으로 인명 피해 이전에 아프간인들이 사용하는 인프라 일대를 탈레반 이상으로 물리적으로 박살을 내 버렸고, 그나마 기반 인프라가 있어 자체 복구라도 시도하는 도시와는 달리 아프간인 다수가 거주하는 농촌 일대의 인프라는 부셔지면 제대로 복구도 이뤄지지 않아 민심이 미국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넷플릭스 다큐 '터닝 포인트'에서는 IED 제거를 위해 현지 전통시장 구역의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린 것을 보고 화가 난 현지 주민들이 " 탈레반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더 나은 미래를 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나빠지기만 하고 있다."는 불만을 미군에게 말했다는 증언이 나왔을 정도였다 .
2021년 7월 기준으로 미군이 아프간 지역에서 철수에 들어간 가운데 이전의 아프간 전쟁들에서의 다른 나라들이 거둔 전과와 비교하자면, 19세기 영국은 큰 피해를 입긴 했어도 파슈툰족 거주지 상당수를 병합하고[53] 외교적으로는 목적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고, 소련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지만 나지불라 공산정권은 몇 년을 더 버텼으며, 탈레반이 처음으로 아프간을 점거했을 때도 북부에서는 탈레반에 반대하는 북부동맹이 마수드의 아래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20년 가까이 전쟁을 벌였지만, 미군이 철수한 후 미국이 세운 아프간 정부는 1년을 넘길 수 있을지 의심받는 상황에서 결국 미군이 아직 철수하지 않았는데도 무너졌으며 반 탈레반 북부동맹의 근거지였던 북부조차 탈레반의 영향력 아래에 떨어졌으며 미군은 바그람 기지에서 철수할 때도 장비는 죄다 파괴했어도 아프간 정부에 통보조차 안 해서 기지가 금방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전쟁 결과만을 놓고 봤을 때 너무 처참한 성적표라고밖에 볼 수 없다.
4.4.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군의 의지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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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게 훈련받는 아프가니스탄 병사[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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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미군들의 노고와 아프간군의 현실 |
아프가니스탄군은 싸울 생각조차 안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조국의 병사들을 끔찍한 전쟁터로 내보내야 합니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가장 큰 문제는 현재 미국이 구성한
아프간군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군 자체가 워낙 부패하고 징병한 병사들도 싸울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아프간군 문서에도 있지만 이들이 여기에 지원하는 건 직장이 없어서지 국민의식이나 애국심이 있는 게 아니다. 병사들 자체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
# 미군이 아프간 정규군이랑 합동작전을 하면 대다수가 탈레반 총소리에 바로 도망치기 일쑤이니까 미육군 대다수가 이들은 거의 없는 전력취급하였고 신뢰조차 주지를 못 했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부족주의 및 종파주의등 종족(宗族)의식을 기반으로 한 부족 집단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 투성이라 장교나 부사관이 지들 부족 출신 아니면 관심도 안 쓸 정도로 의식 수준이 결여되어있다. 공격하는 탈레반 소속이 자기네 부족 일원이면 적극성도 안 보일 정도이다. 오히려 탈레반의 경우 부대원들을 같은 민족 같은 지역 사람으로만 구성시켜 이런 문제가 없다. 당연히 정부군의 일반 부대원들 수준이 더 낮을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이 워낙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못하고 혈연, 지연이 중시되는 사회이다보니 병사들이 탈레반과 내통을 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만약 탈레반이 조금만 정상이었더라도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바로 붕괴되고도 남았다.
애초에 서로 다른 부족 출신 병사들을 한 부대에 섞어넣은 아프가니스탄 전 정부군이 바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게, 탈레반 외에 인도군 역시 부대를 편성할 때 서로 말이 통하는 같은 민족 출신 병사들로 부대를 편성한다. 인도군에서 시크 군단, 자트족 연대, 마라티인 경보병 연대 및 구르카 부대 등등 부대를 민족별로 따로 편성, 운영하는 이유는 밀덕들 재밌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같은 민족끼리 부대를 편성하지 않으면 서로 언어와 소속감이 달라서 기초적인 명령 하달, 상명하복조차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지방의 여러 민족들을 한 부대에 편성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을 갖추기를 원했겠지만, 그야말로 희망사항이자 자국의 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행정에 불과했다. 산악지대다 보니 방언이 다 다른 것은 물론, 오랜 전쟁 및 탈레반 정권 치하의 막장 교육 정책 이슬람 근본주의 성직자들의 우민화 정책으로 글도 못 읽는 이들이 태반이다.[55] 이를 가르쳐야할 장교나 부사관들도 군인들을 집합시키는데 몇 분이 아니라 1시간 30분이 걸리는 상황에서 의지가 생기기를 바랄 수가 없다. #
장성들이 극도로 부패하기 때문에 말단 병사들도 사기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아프간 정부의 부패를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로 부통령이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를 국빈방문했는데 짐속에서 현금으로 3천만 달러가 들어있는 트렁크가 발견되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국빈방문으로 외교관 면책특권이 적용되는 데다, 아랍에미리트는 친서방국가로 어찌되었든 아프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라 그대로 묻혀버렸는데, 나중에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공개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3천만 달러 밀반출 정도는 얘기거리도 안 되는 게, 카불 공항을 통해 공식적으로 신고하고 반출되는 금액만 한달에 2억달러라고 한다. 내전 중인 나라에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프간 침공 이후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경제재건과 민심안정 등의 명목으로 지원한 금액이 총 700억 달러를 넘는다. 군사부분은 제외한 순수 민간분야 원조만 해서 이 정도인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이런저런 루트로 유출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하미드 카르자이 행정부에서 국방차관을 지내고 현재 아슈라프 가니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했던 압둘 라시드 도스툼의 호화스러운 집이 탈레반에게 점령당해서 공개되었는데 이 현실만 보더라도 부정부패의 심각이 어느정도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 이런 상황이니 정작 1선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경찰들의 월급은 몇 달째 밀리는 상황인데, # 경찰들이나 군인들이 애국심이나 사명감을 가지고 근무하기를 바라는 게 언어도단이자 이율배반이다. 없던 애국심도 있게 만들어야판에 저러고 있으니 탈레반과 내통해서 돈받고 물자 넘기고 그 난리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셈이다.
하미드 카르자이 이후 취임한 아슈라프 가니는 최정예 병력인 코만도를 3만명 규모로 확대하고 군복을 통일시키며 군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는 등 일정부분 개혁에 성공했고 그 결과 아프간 정규군 단독 작전으로 탈레반을 상대로 승전하는 등 바뀌는 듯이 싶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탈레반에게 압도적 우위를 점하던 제공권을 ISAF를 비롯한 미군의 지원 덕이었으며 아프간 정규군의 실질적인 전력은 3만명 대의 코만도 특수작전군이었고 나머지 일반 부대들은 답이 없던 수준이었으며 허위명단으로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당연히 미군이 대대적인 철수를 시작하니 밀리는건 당연지사였다.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기 시작,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일반부대에서 허위명단으로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최소한 몇년간은 탈레반으로부터 버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탈레반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취하자, 아프간군의 내부 분열 및 탈영이 본격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나마 아슈라프 가니정부 들어서 당나라 군대시절과 달리 선전도 하고 있으며 7윌18에는 탈레반 반군 53명을 사살하고 탈레반이 장악한 5개지역을 탈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미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 아프간 정부군 평가서에서도 한결같이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하고 의지 문제등의 조직력의 결여가 심각하다는 문제가 재지적된 것을 보면 국방개혁 속도가 더 요구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
부패 문화의 직격탄을 받은 곳은 지방이었다. 특히 공권력이 피해를 입었다. 모하마드 아마디 전 칸다하르 주지사는 “경찰서에 15명의 경찰관이 필요한 경우 실제 배치되는 건 3명뿐이며 나머지 인건비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덕분에 탈레반은 싸우지도 않고 지방의 곳곳을 통과해 카불을 향해 빠르게 진군할 수 있었다. 아프간에서 세 번째 도시인
헤라트를 탈레반이 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고작 하룻밤이었다. 주지사를 포함한 고위 관료들, 수백 명의 병력은 탈레반이 몰아치자 곧바로 자신들의 직을 버렸다. 탈레반은 부패로 포장된 길을 타고 카불을 점령했다.
출처
현재 아프간군은 장부숫자로만 20~30만이라고 평가되고 있고 간부들과 정부 인사들의 부정부패로 월급 자체가 몇 달째 밀려있는데다가 남아있는 아프간군 병사들과 경찰도 코만도 병력이나 CRU-222 같은 경찰특공대의 지원이 없으면 전투를 거부하거나 회피한다고 한다. 게다가 항공기 운용능력역시 미군 철수 이후 급감해서 헬기만 39% 미만으로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상태이며 공군력의 운용 파일럿이나 기체도 정비 등의 문제로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 사실 아프간 공군이라고 해봤자 경공격헬기와 프로펠러기가 전부인 걸 감안해봐도 운용능력이 감소한다는 건 매우 심각한 일이다.아예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놓고 아프간 군은 싸우려고 하지 않는데 굳이 미국인을 보내 희생시킬 이유가 없다고 직접 언급까지 하였다. # 오히려 미국이 지원해준 돈과 물자는 모두 어디에다가 썼는지 의심될 정도로 굉장히 부패한 탓에 아프간 군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이들은 미군이 무조건 철수한다는 발표를 듣자 바로 당나라 군대로 전락하여 와해되었고, 결국 미군이 완벽히 철수하는 시점까지 버티지도 못한 채 해산당했다.
4.5.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부 배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배신 #했는데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탈레반과 과도정부 구성까지 요구하며 압박하기까지 했으며 결국 2020년 2월 29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무시하고 미국과 탈레반 둘이서 일방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해 버렸다. #부활절 공세 당시 월맹군이 확보한 남베트남 영토가 반환되지 않으면 평화회담에 사인하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린 베트남 공화국을 윽박질러 평화 회담 테이블에 앉혀놓은 베트남 전쟁 당시 평화협정 국면이 그대로 재연된 셈이다. 미국이 이렇게 막상 지들이 지원하고 있었던 현지 파트너 정권을 바보로 만들고 자신들이 적성 세력과 협상을 주도하기 시작한 전쟁은 한번도 예외없이 무조건 망했다.
반대로 대한민국의 경우, 미국의 진짜 몇안되는 국가 만들기(nation-building) 프로젝트가 성공한 사례로 대미관계에서 한국사람들도 할 말이야 많지만 적어도 한국은 이승만 정권부터 어디 한국사람들 몰래 탄저균 매장하고 이런 일은 있어도, 적어도 공개적인 대외 외교 석상에서 마치 북한 정권과 중국공산당, 구 소련에게 좋은 일 해주는 마냥 한국을 노골적으로 정통성이나 주권, 자체적인 대표력도 없어 보이는 나라로 만들진 않았다. 그런데 저 나라는 옛날부터 저렇게 지들 귀찮다고 현지 파트너 걷어 치우고 자기들이 회담 주도하는 순간부터 바로 그 적성 세력이 내내 떠들고 있던 친미 세력은 괴뢰 정권이란 프로파간다를 그냥 자신들이 완성시켜주고 있는 실책을 베트남 전쟁 시절부터 못 바꾸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군 사령관은 아프가니스탄의 항전의지가 와해된 결정적인 계기로 조 바이든이 도널드 트럼프의 계획을 고수하겠다고 확인하면서였다고 밝혔다. ##
미국도 20년 동안의 전쟁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부채는 부채대로 느는 등 한계에 몰려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아프간 이슬람 공화국에 자국의 입장을 강요한 처사는 결과적으로 미국 자신에게도 해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외세에 배타적이고 상대가 초강대국일지라도 침범당했다고 여기면 끝을 볼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 지독한 민족들이 가득한 베트남 못지않은 수렁이라는걸 전쟁 전에 깨닫지 못한 결과였다.
4.6. 신뢰할 수 없는 미군과 국제안보지원군
가장 큰 문제는 미군과 국제안보지원군이 아프간 주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데 있다. 즉 탈레반으로부터 자신들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호해준다는 신뢰를 주지 못했고 동시에 이슬람 문화와 같은 파병 주둔국 지역의 문화적 이해가 서툰 미군이기 때문에 문화적 충돌에 의한 불신을 키운 점이 있다. 물론 현지인들의 이슬람주의적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56]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산지 지역과 다르게 오히려 수도권인 카불 지역은 그래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세속적이다. 물론 탈레반이 처음 등장했을 때야 아프간인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각종 오락을 금지하고 여성의 교육은 물론이고 과부들이 먹고살길을 봉쇄하는 등의 막장짓거리로 민심을 잃고 있었고, 미군이 아프간을 점령했을 때는 처음에는 오랜만에 오락물 즐겨봐도 별다른 처벌이 없어졌다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라크 전쟁(2003 ~ 2012)도 참고. 이라크도 초반 바그다드를 미국이 장악하고 후세인을 몰아내자 엄청 기뻐하고 미군을 환영했다. 하지만 미군이 저지르던 무수한 병크로 인하여 후세인도 극단주의도 싫지만 미군도 싫다며 저항세력으로 간 이들도 많다. SBS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은 처음엔 미군을 반겼지만, 그들의 실망스런 행보에 마음을 돌렸다고 직접 밝혔다. 이처럼 미군이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장악에 큰 게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미군이 채명신 장군처럼 고보이 정신을 받아들였으면 모를까. 사실 탈레반을 미국이 크게 뿌리뽑았을 결정적 기회를 이라크 전쟁으로 날려버린 거야말로 가장 큰 이유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처럼 당시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느라 이걸 더 부추겼고 더욱이 이라크전의 수렁에 빠져서 아프간은 뒷전이었다보니 탈레반이 급격하게 세를 성장하여 주민들을 위협하며 협조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아프간 주민들이 과연 결국엔 떠날 미군을 믿고 지원할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군은 이라크로 빠져나가며 가득이나 부족한 병력에서 더 줄어든 병력으로 아프간을 통제해야했다. 남아있는 10산악사단이 유일한 사단급 부대였으며 08년도까지 미군병력만 약 5만명이 안되는 전력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싸우고 있었다. ISAF병력까지 합쳐봐야 10만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또한 레드 윙스 작전처럼 소수의 특수전 병력과 항공폭격을 통한 타격을 시도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민간인들 희생도 대량으로 초래했다는 점이다. 항공지원에는 당연히 지원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에 게릴라전에서는 그렇게 효율적이라 할 수 없었다. C4I체계가 원활한 미군도 이건 마찬가지이다.
이는 탈레반을 몰아내고 나서 소탕을 진행할 때 나타났던 한계[57]가 그대로 이미 노출되어있음에도 병력투자를 죽어도 안하려고만 하는 럼스펠드 체제의 고집 때문이었다. 럼스펠드는 미군의 구조조정을 위하여 철저한 외주화와 소규모 병력개입을 고집했다.
그렇다보니 항공폭격만 했다하면 마을 주민들이 떼로 죽어 주민들이 미군이라고 하면 학을 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미군 동조자는 날이 갈수록 줄고 탈레반 동조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괴상한 구도가 되었다. 아프간 현지 문화에도 불친절해서 민심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질적인 병력 부족으로 치안유지도 제대로 못하는 미군과 다수의 무장세력 간의 내전(?)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미군은 대민작전에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전쟁 초기 파슈툰어 통역사를 고용하는 데 인색했다.
이라크에서 갖은 삽질을 하느라 병력부족으로 증원도 못하고 있다가 이라크 철군 결정을 내리는 오바마 행정부 때에 와서야 변화가 생기긴 했다. 병력투자가 다시 이루어졌지만 상황 반전은 매우 어려웠다. 더 문제인건 이라크전에는 40만 병력 투자가 요구되었던 것에 비해 아프간 주둔 총병력은 09년도부터 1차 1.7만명, 2차 3만명 증원이 이뤄진 후에도 최대 12만명 내외였다는 사실이다.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병력부족은 여전했다.
그래도 소련 정권은 그나마 이념적 동조자를 모을 수가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건데 소련이 철군하고도 90년대 중반까지 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신론적인 사회주의 세력이 남아서 탈레반이라든지 각종 군벌과 죽어라 싸웠다.[58] 괴뢰정부군도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서 소련군과 연합작전도 가능했지만, 미국이 조직한 카르자이 정부는 카불이나 북부동맹을 제외하면 이념적 동조자도 모을 수 없고, 정부군은 말할 수 없이 개판 상황이다. 교육을 받았으면 장교. 글을 읽을줄 알면 부사관. 나머지는 병사 이렇게 수준을 뽑고 있는 상황이다. 마치 6.25 전쟁 당시 갑종장교나 을종하사관과 유사하다. 창설초기나 지금이나 거의 다를게 없는 상황이고 미군에 전혀 도움이 안되고 있으니 미국이야말로 더욱 진퇴양난이다.
4.7. 미군의 무능함과 전술-전략적 오판
즉 일종의 게릴라전 특징이었으나, 미군은 첨단 정보 정찰 및 감시 자산과 정밀타격 무기들을 동원하여 기선 제압작전(surge military operation)으로 탈레반 반군을 제압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는 것이다.
넷째, 군사 전문가들은 미군 군사 지휘관들이 아프간 전쟁에서 이론과 현실 간 차이를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도로, 고속도로 그리고 기지건설 등으로 도시화된 아프간 주(州) 지역에서의 전투 승리와 질서 유지에 만족하고 이를 아프간 전쟁 종식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오판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지난 8월 20일 『뉴욕타임스』는 그동안 탈레반 반군은 미군이 건설한 도로와 고속도로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였다면서, 미군은 공중전력을 동원하여 지방도로와 산악지대 촌(村)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탈레반 반군을 격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보도하면서, 특히 탈레반 반군이 차단한 도로와 고속도로는 현지에서 작전하는 미군과 나토 다국적군에 대한 군수지원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도하였다.
즉 탈레반 반군이 있다고 믿었던 산악과 지방 촌(村) 지역은 민병대가 야간 군사작전으로 미군을 괴롭혔고, 탈레반 반군은 도로와 고속도로 그리고 미군 합동기지를 공격하는 데 주력하였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 모비 메디어 그룹 사드 모르세니 박사는 미군과 나토 다국적군이 장악한 거점(outpost)과 검문소(checkpoint)가 아프간 군사작전에 있어 너무나 형식적 역할만을 하였다며, 이를 지원하는 재정 지원(monies)과 군사작전(military operation)이 각각 따로 놀았다고 비난하였다.
<<출처>>한국군사문제연구원[59] 뉴스레터 2021.8.23 제1067호 #
미국은 자신들이 탈레반을 제압하고 있다고 '착각'했으며, 잘못된 방식을 하면서도 그것들이 전쟁 종식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오판'했으며 적군인
탈레반과 아군인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둘 다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의 공세를 1년 이상 버틸 것으로 판단했었으며 바이든 본인 또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8일 기자회견에선 “탈레반은 월맹군이 아니다. 역량이 그에 훨씬 못 미친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미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탈레반은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완료되기도 전에 빠르게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해버리면서 미국의 탈레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넷째, 군사 전문가들은 미군 군사 지휘관들이 아프간 전쟁에서 이론과 현실 간 차이를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도로, 고속도로 그리고 기지건설 등으로 도시화된 아프간 주(州) 지역에서의 전투 승리와 질서 유지에 만족하고 이를 아프간 전쟁 종식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오판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지난 8월 20일 『뉴욕타임스』는 그동안 탈레반 반군은 미군이 건설한 도로와 고속도로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였다면서, 미군은 공중전력을 동원하여 지방도로와 산악지대 촌(村)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탈레반 반군을 격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보도하면서, 특히 탈레반 반군이 차단한 도로와 고속도로는 현지에서 작전하는 미군과 나토 다국적군에 대한 군수지원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도하였다.
즉 탈레반 반군이 있다고 믿었던 산악과 지방 촌(村) 지역은 민병대가 야간 군사작전으로 미군을 괴롭혔고, 탈레반 반군은 도로와 고속도로 그리고 미군 합동기지를 공격하는 데 주력하였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 모비 메디어 그룹 사드 모르세니 박사는 미군과 나토 다국적군이 장악한 거점(outpost)과 검문소(checkpoint)가 아프간 군사작전에 있어 너무나 형식적 역할만을 하였다며, 이를 지원하는 재정 지원(monies)과 군사작전(military operation)이 각각 따로 놀았다고 비난하였다.
<<출처>>한국군사문제연구원[59] 뉴스레터 2021.8.23 제1067호 #
전략적으로 미국은 초강대국의 국력을 자만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진행하면서도 추가로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는 심각한 자충수를 두었다. 아무리 미국이라 할 지라도 두개의 전쟁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처음에는 잘 진행되가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자 점점 미국이 실패하기 시작했다.[60]
4.8. 부족들의 탈레반 지지
카불에 본부를 둔 전쟁평화연구소의 설립자인 타밈 아세이 전 아프간 국방차관은 이를 ‘두 개의 세계관이 벌이는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쪽에는 보다 진보적이고 온건하며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농촌 사람들과 접촉해 본 적 없이 성장한 아프간 도시인들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카불의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중앙집권적 국가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보수적인 아프간 시골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또다른 문제는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탈레반보다 조금 덜하다 뿐이지 대부분
이슬람 근본주의를 따르고, 부족 간에 강약은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촌락의
닫힌 사회를 중심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엔 지리적인 요건도 큰 몫을 차지했다. 그나마 이동이 편한 대도시는 소련의 지배 및 이전 중앙아시아 다른 지역의 영향을 받아 좀 개방이 된 편이지만 다수 지역이 이렇다. 김혜자가 쓴 <꽃으로 때리지마라>를 보면 미군이 아프간 산지를 둘러보다가 정말로 오랫동안 이방인이 오지 않은 마을까지 발견했는데 명예살인은 기본이고 그야말로 꽉 막힌 지역이라서 이방인이 그 마을 여자에게 말만 걸었다하면 즉시 여자나 이방인인 미군이 돌팔매질을 당할 정도였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아연 소년들>이란 책에는 소련군 일행이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근교의 마을에 한 집에 들어갔는데 들어간 집 사람들은 파슈툰왈리[61]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차와 음식을 접대하였고, 소련군 일행이 차와 음식을 먹고 나오니 마을 내 다른 주민들이 그 소련군 일행을 접대한 집으로 쳐들어가 집 안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모조리 돌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62]많은 부족들이 적어도 탈레반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탈레반이 폭정을 저지를 때는 과부들이 구걸이나 매춘 외에는 경제활동이 완전 금지당하고 남자라도 수염을 깎거나 할 경우에는 최대 사형에 처하는 막장짓거리 때문에 탈레반에 대한 민심 이반이 일어났지만, 탈레반 붕괴 이후에도 지방 유력자들의 부정부패는 그대로라서 현지 주민들이 체념 상태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반면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산재해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입지가 흔들리자 부족들은 미국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탈레반이라고 해서 문제를 해결해주느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미군은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언젠가는 떠나지만, 탈레반은 끝까지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민중들은 더러워도 탈레반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위에 서술하듯이 전쟁 초반 미군이 압도적 전력을 바탕으로 탈레반을 몰아낼 당시 민중들이 좋아하고 죽은 탈레반 시체를 매달고 모욕을 가했던 걸 생각하면 아프간 민중들이 탈레반을 더 지지하는 건 아니다. 이라크 전쟁 때도 똑같았다. 여기서도 미군을 환영하고 후세인 동상을 부수고 그림을 태우며 사람들은 시원해했지만 길어지는 전쟁과 덩달아 당하는 테러 피해, 게다가 미군의 행패 및 갈등으로 인하여 이라크 전쟁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반미적으로 돌아섰듯이 아프가니스탄도 다를 게 없었다.
탈레반이 집권하던 시절 폭정은 상상을 넘어섰다. 당장 탈레반 문서만 봐도 극단주의자들이나 지지했지, 탈레반 정권 시기 대다수 아프간인들이 탈레반을 더 지지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탈레반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웃어도 처벌하던 놈들이었고 일반인들은 선풍기를 못 쓰게 해놓고 탈레반 간부들은 집에 에어컨(?!), 축사에 선풍기를 설치한다든가 대중문화 자체를 싸그리 금지하며, 면도해도 죽이고(!) 연날리기까지 알라의 하늘을 모독한다며 연날리던 아이들을 구타해 죽이며 축구를 금지해서 거리에서 축구공을 찼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을 화염방사기로 학살했으며 축구경기장을 사형장으로 쓰던 놈들이었다.
아프간인들도 미군이 쳐들어와 탈레반을 일시적으로 몰아낼 당시 미군을 환영하고 보란듯이 그동안 꼭꼭 숨겨오던 영화나 음반들을 꺼내 팔고 속시원해하던 반응을 보였다. 즉 주민들이 이슬람 원리주의자 성향이 강하다고 해도, 미국이 최소한 처음처럼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투자하고, 아프가니스탄에 20만 이상의 대군을 투입해 탈레반 와해를 노력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으리라 보는 분석이 많다. 적어도 미군과 갈등으로 일부 테러라든지 충돌을 피할 수 없어도 탈레반이 박살난 상황에서 '지금이 낫다, 적어도 미군이 행패나 피해가 있을지언정 탈레반보다 엄청나게 낫다'는 인식이 많을 가능성이 높았다. 같은 시기에 이라크 전쟁을 벌여서 탈레반을 부활시킨 미국이 이 부분에서 책임을 피하긴 어렵다.
4.9. 핵관련 광물자원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의 가치
이렇게 갈 길이 멀어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대충 손을 떼고 나갈 수 없었다. 이라크와는 달리 아프간 전쟁은 전쟁의 명분이 서있고 아프가니스탄이 우라늄을 비롯한 막대한 광물자원을 가득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웃 파키스탄이 핵 보유국이라는 점까지 생각하면 탈레반이 승리할 경우, 인접한 파키스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은 파키스탄 서북부에도 많이 살고 있다. 더욱이 파키스탄은 치안 막장 국가 중 하나다. 만일 핵 무기의 통제권이 탈레반에 넘어간다면… 따라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프가니스탄을 통제 하에 두거나 정 최악의 경우라도 미국과 비슷한 입장을 가진 국가가 통제를 할 수 있게 해야만 한다.오바마 정부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미군의 Covert Operation(비밀작전)의 횟수가 크게 증가했던 것도 정치적 생명을 걸고 아프간전을 끝내려고 하는 미국 정부의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는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태스크 포스 373의 존재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4.10. 미국의 병력부족
미군을 포함한 ISAF[63](국제안보지원군)의 병력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다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럼즈펠드 국방부는 미군 병력 감축과 민영화, 아웃소싱에 환장해있었는데,[64]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죽었다 깨어나도 대규모 병력투입을 피하고자했다.[65]이라크전을 잠시 살펴보자면, 전문가들이나 미군 장군단은 국토안정화 및 통제에 필요한 병력규모를 2개 기갑사단급 병력인 사실상 1개군단을 포함해 최소 40만명, 예비병력까지 포함해서 50만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럼즈펠드는 이를 비웃으며 자기 뜻대로 이라크전을 치렀고, 덕분에 미군은 만성적인 병력부족에 시달려야만 했다.[66] 이는 전쟁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아프간전의 병력상황은 이라크전보다 더 나빴다. 앞서 언급했듯 아프간전 초기 투입 지상군 병력은 끽해봐야 100여 명 미만이었다. 그 병력으로도(...) 북부동맹을 도와서 카불 진압으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탈레반 주력부대랑 추종세력들 및 기존의 정권 공직자들이 물주인 파키스탄으로 5천명 가까이 월남을 했고, 미군은 이를 손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도주 후에 이뤄진 폭격은 의미가 없었다. 빈라덴을 포착한 CIA와 군은 럼즈펠드에게 병력투입을 계속 주장했지만, 이마저도 수용되지 않아, 빈라덴마저 놓치게 된다. 적국을 때려 부수는 건 공군 폭격으로도 가능하지만, 뒤처리에는 보병이 필수적이다. 사실 럼즈펠드는 이라크건 아프간이건 박살내기까지는 성공했다. 뒤처리를 못해서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안정화에 투입된 병력은 특수전 병력을 제외하고 101사단 3여단 1000여명, 미해병대 제15해병원정대(15Th MEU) 1000명과 미육군의 10산악사단 소속 1000여명의 1개 여단뿐이었다. 이후 영국군 300여명이 들어왔으나 주둔 총병력이 1만명을 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0산악사단과 영국군 일부를 제외하고 미해병대는 이라크전때문에 철수하고 잔여병력은 미육군 10산악사단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2008년까지 미군은 무려 약 7년간 3만명이 채 안되는 지상군을 주축으로 공군 및 다국적군 포함 5만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아프간전을 치러야했다. 미군의 아프간 장악력이 확보되지 못한[67] 2003~2008년 사이 탈레반은 재기에 성공한다.[68] 물론 여기에는 파키스탄 정보부가 한몫했고 중국의 개입한 덕일 것이란 의혹도 있다.
미군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병력부족으로 벌어진 소련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했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50만 이상의 병력주둔을 통해 점령지의 안정화를 유지한 전적이 있었음에도, 아프간전 초기 5년 이상을 소련보다도 더 적은 규모로 통제활동을 한 것이다. 그나마 소련은 어떻게해서든 아프간 개입을 피하고자했음에도 말려들어간 거지만[69], 미국은 9.11테러로 본토가 공격을 받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소극적인 병력투입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미군 혹은 미 행정부가 아프간 전쟁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또한 미군의 강함은 걸프전을 통해 전세계에서 평가받았지만 걸프전과 이번 미국 -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걸프전은 점령전쟁이 아니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점령전이였다. 걸프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라크 점령이 아닌, 이라크의 쿠웨이트에서의 철군이 조건이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탈레반을 몰아내고 아프가니스탄내에 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정치 체제의 전환이였기에 반드시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필요했다. 아무리 미군이 강해도 적은 병력으로 점령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넒어진 전선을 감당하기엔 대군이 필요했기 때문. 대군 투입을 꺼린 미군에서는 첨단무기와 드론, 미국 공군의 엄청난 양의 폭탄 소모량을 써가면서 공격했으나 육군 보병들이 지역을 장악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탈레반이 전면전외에도 끊임없이 테러, 사보타주로 해가며 아프가니스탄내 사방에서 미군을 공격했기 때문. 그러나 이런 역할을 해줘야만 하는 미국 육군의 보병의 숫자가 너무나도 부족했고 결국 탈레반은 미군이 있지 않은 지역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군사 작전을 펼쳐댔다.
산악전 위주의 철저한 보병전투가 요구받는 아프가니스탄 전장은 이라크와 동일한 수준의 병력(40~50만) 동원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최대 주둔 병력은 12~13만명, ISAF까지 합쳐서 15만을 넘지 못했다. 이러한 병력부족이 해소되지 않음으로써 하술되는 일선장병들의 정신적 문제와 피로 문제 및 안정화 작전에 충분한 병력공급이 이뤄지지 않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 밖에 없었다. 더해서 럼즈펠드의 대책없는 무분별한 민영화와 아웃소싱[70]으로 질 좋은 병력들이 PMC에 대거 몰린 덕에, 미군은 양적 부족과 더불어서 질적 하락까지 떠안게 되었다. 현재도 미군의 이런 질적, 양적인 약화는매우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2차대전 이래 처음 미국이 침공받았다는 9.11 테러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에 아프간전은 대규모 병력동원도 가능했지만, 부시행정부와 럼즈펠드의 민영화 집착과 그에 따른 소수 병력 운용 정책 고집과 이라크전 개전으로 인해 미군의 동원은 소수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5만명 이하였던 아프간 주둔 미군을 15만명까지 증원시키려한 오바마 행정부는 큰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된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프간 파병증원은 여론적 반대에도 시달렸지만, 럼즈펠드의 아웃소싱화와 지속적인 병력감축의 후유증은 여전했다.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았다는 어마어마한 근본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징병제를 꺼내기는 커녕 기존 병력을 짜내 증원하는데 그쳤으며, 그나마도 겨우 16만명 선이었다. 이는 부시행정부의 럼즈펠드 체제에서의 대책없는 군축&민영화, 이라크전 삽질에 의한 병력과 국력 소모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4.11. 전쟁 장기화로 인한 일선장병의 한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선 장병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심각해지고 있으며 별의별 인간들이 병력 부족으로 군에 들어오게 되면서 전쟁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전쟁터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장병들이 본토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이건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장병들도 마찬가지. 미군 실전부대는 1년간 순환근무를 하는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웬만한 병사는 서너 번씩 이라크나 아프간을 다녀오면서 지옥을 경험하다보니 맛이 간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이런 대규모 전쟁을 치를 때는 징병제 부활이 일시적으로나마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 시위와 조국 방위를 위한 것도 아닌데 죽으러 못가겠다며 징병 거부가 엄청났고 여당이 선거에서 참패한 경험이 있는지라 정계가 시도를 하지도 못한다.미국 국방부의 의회 공개보고서인 2010년 10월~2011년 3월 분 1230 리포트에 따르면 현재 전반적인 치안이나 경제사정이 미약하게나마 좋아지고 친정부세력이나 아프간 군경의 규모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헬만드 지역과 칸다하르 지역은 여전히 유혈사태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4.12. 다른 국가들의 철수
2011년 7월 7일 캐나다군이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철군하였다. 그리고 2021년 6월 부로 독일, 이탈리아도 완전히 철수했다.4.12.1. 한국의 경우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미국은 한국에게도 전투병 파병을 요청한 바 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난지 몇년 지나서 미군이 고달파하던 시기였기에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고 이라크 전쟁 때와 달리 국내 언론에서도 몇몇 언론이나 작게 언급할 뿐 흐지부지 넘어가버렸다.일부 파병 지지자들은 산악전이 많은 북한에 대비하고자 산악전 실전 경험을 위하여 전투병을 투입하자는 의견도 냈으나 반대가 엄청났고 군 내부에서도 이라크 파병 때와 달리 거론할 것도 없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한국군의 헬리콥터 전력 자체가 크게 부족한 편이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본토에 배정된 수송헬리콥터만 해도 150대도 되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수명이 반세기 넘은 기체들이 수두룩한 판이었다.
유엔평화유지군 소속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갔다 온 채수문 중령은 평화유지군 자체는 필요하다고 인터뷰했다. 그러나 전투병 파병은 무척 부정적으로 봤다. 전투병 파병은 너무나도 한국군에게 도움이 안된다고 본 것. 탈레반이 숨어서 활약하는 산지는 오로지 헬리콥터나 의존해야 한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이자 만화가인 프랑스인 에마뉘엘 기베르와 프레데릭 르메르시에가 1980년대 소련과 전쟁중이던 아프가니스탄 산악을 의료차 들렀을 때를 그린 평화의 사진가(한국에서는 세미콜론을 통해 정발되었다)를 보면 산을 1주일은 계속 걷고 걸어서 다리에 물집 생기고 신발이 구멍나고 몸도 지쳐버렸다고 한다. 오죽하면 물품을 나르던 말이나 당나귀가 지쳐 쓰러져 죽은 것도 여러 번. 현지인들은 하도 많이 겪어서 남자들도 대충 신발을 꿰맬 바늘과 실을 준비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곳도 그냥 걸어다니며 빵을 팔던 상인도 있었다고. 지은이들도 그 빵장수 사진 찍으며 이런 곳에서도 사람은 먹고 산다고 느낌을 썼다... 그렇게 어렵게 마을로 가면서 의료 봉사를 하고 뭐 그랬는데 더 선배인 이들이 말하길 '그래도 이번은 가까운 편이야. 더한 곳에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아.'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가 이런 곳이라 소련군이나 미군도 걸어서 여기로 온다는 작전은 꿈에도 못 꾼다. 전차나 장갑차도 이런 곳에 오는 건 무리이고 군장비를 가득 가지고 며칠이고 행군해 오다가 오히려 미군이 지칠게 뻔하니 헬리콥터 타고 작전을 수행할 수준이다. 80년대 당시에도 아프간 무장 세력은 하늘만 예의주시했지 소련군이 걸어서 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오다간 지쳐서 싸우지도 못해, 행여나 걸어온다고 해도 이 산길에 감시하는 눈길이 엄청난데 무슨?" 이라고 저항세력이 프랑스인들에게 코웃음치는 게 나올 정도였다.
한국으로서는 미군처럼 종일 헬리콥터만 타고 순찰, 전투를 하기도 벅차기 때문에 수렁같은 전쟁에 전투병을 파병하는 것은 한국 경제에도 엄청난 손실이 갈 게 뻔했다.
산악전 경험을 쌓을 계기라는 의견에 대해서도 의문시하거나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필요 군비에 대하여 정계나 군도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극히 일부 주장이나 밀리터리 매니아 정도 의견으로 작게 거론되었을 뿐이다. 자연 조건이 비슷하다고 해도 북한과 차원이 다른 2~6천미터 산들이 가득한 힌두쿠시 산맥 말고도 산지가 엄청난 아프가니스탄에서 북한을 대비한다는 건 한마디로 혹한기 훈련한다며 히말라야로 파병해 훈련하자는 거랑 차이가 뭐냐는 의견도 많았다.
한국군 주력은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징집병들이기에 위험지역에 병들을 파병하는 것은 안된다는 의견도 컸는데, 사실 미국은 일반 육군 병력이 아닌 특전사를 원했다. 특전사의 전투병력은 전원 (본인이 지원해서 간) 직업군인인 만큼, 위험지역에 본인이 자진해 입대한, 검증된 병력을 보내는 건 어느 정도 시도해 볼 만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산지 환경이 한국 산지 환경의 압도적인 상위호환이라곤 하나, 일부러 혹독한 환경을 찾아가며 훈련하는 특전사라고 해도 특전사가 주로 한국에서 훈련하지 2000~3000미터 이상 산악지대가 가득한 저런 고산지대로 가자마자 잘 싸울지 의문이다. 특전사를 저렇게 보내봐서 적응한다고 해봐도 한국에서 개발된 신무기를 실전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고위 장교들이 정규전에서 실전경험을 쌓는 것도 아니다. 기껏 그냥 특전부사관들이 특수전에서 실전경험을 쌓고 끝날 확률이 높고 이 외의 장점이라곤 역시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돈독해진다는 것인데, 제아무리 스스로 지원한 간부들이라 한들 어쨌든 엄연한 국민 중 한 명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전투에 투입해 목숨을 잃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국민감정이 허락하지 않는 문제가 크다.
이후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4.13. 아프간 주변국과의 문제와 파키스탄의 엉터리 협조
지정학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친중반미, 친러반미 국가에 둘러싸여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북한과 다소 유사한 시스템의 독재 국가이고 이란이야 유명한 반미 국가이며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경제가 러시아에 잡혀있는 상황이다. 애초에 소련 해체 이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은 소련 영토였다. 이 상황에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접근하기 위해 택한 파트너는 친중반소 국가인 파키스탄이었는데, 이미 미국은 1959년부터 페샤와르의 공군기지를 파키스탄으로부터 임대해 쓰고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을 예속화할 목적으로 파슈툰인이 중심이 된 헤크마티아르 군벌 세력만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미국에게 계속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며 미국의 정확한 사태 파악을 방해하였다. 애초에 90년대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은 파키스탄 정보부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애초에 탈레반의 신학부터가 파키스탄 군부 독재자들의 어용 신학자(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들의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를 답습한 것이기도 했다.그러나 탈레반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을 예속화하려던 파키스탄의 시도는 파키스탄의 실세 펀자브인과 파슈툰인 사이의 갈등 및 파키스탄 정부의 부정부패와 형편없는 정치력 때문에 엇나가고 말았다. 탈레반은 중앙집권 체계를 갖춘 단일한 정치세력이 아니었다.[71] 파키스탄 입장에서는 파키스탄 북부의 탈레반 세력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예속화시키기를 바랬으나 정작 파키스탄은 자국 영내 탈레반 그룹 통제조차 실패한다. 오히려 파키스탄 군부가 여러 탈레반 군벌들과 동맹과 공격을 반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던 것이다. 즉 파키스탄은 한 편으로는 일부 탈레반 군벌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탈레반 군벌과 협조하는 상황으로 미국이 파키스탄의 도움으로 탈레반을 뿌리뽑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공식적으로야 파키스탄은 탈레반 지원에 대해서 절대부정하는 상황인데 그 근거로는 파키스탄 국가 기관이 탈레반에게 여러차레 테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탈레반은 단일한 위계 구조를 갖는 그룹이 아니므로 탈레반이 파키스탄에 테러를 일으킨다고 해서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전혀 돕지 않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9.11 테러이후 미국의 분노 문제때문에 미국의 협박에 굴하긴 파키스탄이긴 했지만 미국의 갖은 삽질로 상황은 파키스탄이 점점 갑이 되는 상황이 연출되게 된다. 특히 이런 문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때 파키스탄 정보부가 탈레반을 지원하고 있다는걸 파악하고도 "파키스탄이 탈레반 중 일부 그룹과는 싸우고 일부 그룹과는 협조하는 것"을 이이제이 전략으로 생각하고 문제제기를 안하고 있었다. 결국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돈을 쏟아붇고도 전쟁 진행이 지지부진해지자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이 문제를 들어서 경제지원을 조금씩 줄이며 압박을 넣자, 파키스탄은 밀당 차원에서 기존에 이미 탈레반과 협력하게 하던 하카니 네트워크(Haqqani network)를 이용하여 미국과 ISAF(국제안보지원군)을 적대하게 시켰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아프간 안정에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문제를 고려해서 오바마 행정부때 아예 파키스탄과의 전면전까지 고려했었다는 사실이다. #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와서는 원조중단을 본격화했으며 파키스탄에 강력하게 경고할정도로 미국이 얼마나 파키스탄의 탈레반에 대한 이중지원 행각을 부정적으로 보며 경계했는지 알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을 지나야 보급지원이 가능한 보급루트인 내륙국이다보니 개전초기야 미국의 협박에 파키스탄이 겁을 먹고 굴복했지만 미국이 아프간에서 삽질을 하고 더 크게는 이라크전에서 최악의 삽질을 장기화하게 되면서 파키스탄은 을이 아닌 갑으로 성장하는 상황이되었고 파키스탄은 그동안 핵개발로 제재당한 경제제재 해제는 물론이거니와 파키스탄에 대한 F-16판매까지하며 파키스탄 비위를 맞춰야하는 상황에 처하게된다. 이러한 부시행정부의 무능으로 이는 결과적으로 파키스탄 정보부가 탈레반을 돕는 짓거리를 해도 미국은 제대로 말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이는 탈레반이 지속적인 물자제공을 받으며 점점 고도화된 전투훈련을 받거나 심지어 탈레반의 티어1급 부대인 레드 그룹 혹은 레드부대가 탄생하게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을 지원하다가 통제하는데 실패한 이유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으로 난민 300~400만명이 유입되었는데, 파키스탄 정부는 2010년부터 국경 봉쇄를 이야기했지만, 국경선이 워낙 길어서 제대로 봉쇄를 할 수가 없다. 파키스탄 서북부지역의 파키스탄 정부도 포기한 파키스탄 탈레반을 통한 진격은 유효했었던 점을 감안하나 레드 그룹을 포함한 물자지원등의 사례나 인력수급등의 문제를 감안하면 파키스탄이 이 탈레반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거의 부정할 수 없다. 이미 탈레반 지원 문제로 오바마 행정부때 경제지원이 끊기자 흔들리면서도 정보부를 통제했던 통제하지 못했던 정부차원의 비공식 지원이 밝혀졌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오세티야 전쟁과 돈바스 전쟁으로 러시아와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이란과도 오바마 정권 시절에 한 핵합의를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솔레이마니 암살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반미적 성향이 강하더라도 아프간의 안정을 위해 미국과 암묵적으로 협조하던 러시아와 이란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면서 암묵적인 협력마저 중단해 버리면서 상황이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전에는 미국이 이들 국가들의 협조로 아프간 주변국의 영공과 공군 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지만 아프간 전쟁 말기에 카타르 공군 기지에서 장거리 비행해야 하는 상황은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중앙아시아의 길목인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위치가 미국의 국력과는 별개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주변국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보여준 셈이다.
4.14. 책임에 대한 기묘한 침묵
이라크 전쟁은 명분이 매우 부족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 해서 기껏 들어가 봤더니, 그런 건 없고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물론 당시 이라크군의 반격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엄청난 군비를 낭비한 셈이 되어 버렸다. 또한 조지 W. 부시의 독단 및 정보조작으로 개전했다(근데 조지 부시 본인도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조작된 보고서를 받았다). 반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개전에 대한 명분이 분명했으며 개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었다. 서방 국가들인 프랑스, 독일도 미국의 대이라크전 개전은 강력히 규탄했지만, 아프간에는 병력을 보낼 정도로 지지했고, 잠재적 적성 국가인 중국, 러시아도 아프간전을 방조하고 있었다.아프간 - 이라크 전쟁 문제로 부시를 극딜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조차 이라크에서는 철군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계속한다는 입장이었고, 아프가니스탄의 전황 악화의 책임은 지금와서는 부시 정부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을 때, 명분있게 철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오바마도 기회를 놓쳐버렸다. 결과적으로 공화당을 공격할 좋은 구실이 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공화당-민주당 모두 마땅한 출구전략이 없어 아프가니스탄 전쟁 책임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결국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식적으로 철군을 완전 결정하게 됐다. 물론 바이든 역시 10년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한 것을 명분으로 아프간에 계속 미군을 주둔시켜야 할 이유가 이미 사라졌다고 주장할 뿐 이 끝없는 수렁과도 같았던 전쟁의 책임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카불 함락 후 철수 작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는데, 바이든 행정부가 카불의 빠른 함락을 예측하지 못해 미국 시민들의 탈출이 지연되는 데다 전쟁 패배의 원인을 아프간 정부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등 미국 정치권은 양쪽으로 갈라져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으나 전쟁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음에도 제대로 된 계획조차 짜지 않고 전쟁을 시작하고, 그로 인해 벌어진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사실상 방기한 상황이다. 오죽하면 같이 파병한 영국이 여야 가리지 않고 끝까지 아프간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비교되면서 까일 정도이다.[72]
아프간 친미 정권 붕괴 초창기에는 아프간 군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점 등으로 인해 아프간에 대한 책임 여론도 상당히 높았으나 언론 취재를 통해 미국의 제대로 된 철군 계획조차 없던 점과 아프간 정부는 포함시키지 않고 탈레반과 단독 협상한 점[73]과 아프간 정부가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다 흩뿌려 놓아서 탈레반에게 쉽게 각개격파당하게 만든 것, 그리고 이런 무능한 인사들이 정권을 잡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한 게 미국이라는 점도 나오면서 오히려 영국 등 유럽에서는 "미국이 제 버릇 못 버리고 또 아프간 사람들에게 책임 떠넘긴다."고 비판하는 여론도 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패배에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5. 기타
탈레반이 이기건 현 아프간 정부군이 승리하건 아프가니스탄의 미래가 어둡기는 어떤 쪽으로든 마찬가지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웃한 나라로 문화와 역사가 비슷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문제가 없는 타지키스탄 역시 바다가 없는 내륙국에다 자원도 부족한 마당에 인구만 많은 이유로 상당히 가난한 최빈국으로 남아 있다. 이 쪽은 이슬람 극단주의 반정부군 세력들을 때려잡는데는 성공했다.[74] 또한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 주는데다 근대국가로서의 기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즉, 아프가니스탄의 근본주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주류민족 파슈툰족과 아프가니스탄 내 다른 민족들 타지크인, 우즈베크인, 하자라인 등과의 밥그릇 싸움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과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도 미국이 파키스탄을 통해 원조하는 물자는 전부 파슈툰족들이 꿀꺽하고 아흐마드 샤 마수드로 대표되는 타지크인들은 별 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군과 싸워야 했다.
만일 최상의 시나리오대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완전히 박멸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부정부패가 대대적으로 척결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의 10% 가까이가 사망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고아들이 생겨났는데, 이런 고아들은 대개 걸프 아랍 왕정 국가[75]의 지원을 받는 근본주의 성향 마드라사에서 아불 알라 마우두디[76]의 극단주의 신학을 배우고 자랐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민주 시민으로 개조가 어렵다.
탈레반 시절 학교 교육 역시 엄청난 수준이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 제일 먼저 나오는 문장이 "XX는 칼을 들고 지하드에 참전합니다."였을 정도였다. 비교하자면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의 차우셰스쿠 의 출산 강요 정책으로 태어난 세대 이른바 "차우셰스쿠의 아이들" 문제가 루마니아 민주화 이후에도 루마니아 국내에서도 문제가 진행형인 상황인데,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훨씬 더 암울하다.
201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에서도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속 해야 한다는 주장은 나날이 힘을 잃고 있다. 9.11의 원흉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군이 사살하는데 성공했고, 미국에서 이제 전쟁은 끝난 셈이다.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파병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많이 늘어났으니 말 다 했다.
전쟁 당시에 미군과 싸운 것은 탈레반, 알 카에다만이 아닌 우즈베키스탄, 체첸 같은 타 이슬람 국가에서 지원 온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ISIL 도래 전부터 이슬람 극단주의 네트워크 사이에서는 서로간에 돕는 모습이 있었던 것( 관련 기사). 체첸인의 경우 CIA SAD 소속 요원의 회고록으로도 그 존재가 증언되었다. 번역본(출처 : Schroen, Gary, First In: An Insider's Account of How the CIA Spearheaded the War on Terror in Afghanistan, Presidio Press, 2005, ch.41(pp.279-284)) 탈레반은 2001년 이래로 합류한 외부 무장단체를 미군에 맞선 총알받이로 내세워 줄곧 소모시켜왔다. 미군의 공습에서 가장 먼저 죽음에 내몰린 전사들은 한때 중앙아에서 맹위를 떨친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이하 IMU) 대원들이었다. IMU의 리더인 타히르 욜다쉬는 2009년, 행동대장이었던 주마 나망가니는 그보다 앞선 2001년 각각 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IMU는 타히르 욜다쉬의 아들 손으로 넘어가면서 2010년까지 근근히 명맥을 이어갔지만 최근에는 탈레반 조직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에서 밀려난 근본주의 조직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뿌리를 박을 경우 파슈툰족 탈레반 지도자들의 밥그릇이 위험해지니 파슈툰 탈레반 입장에서는 이들을 전멸당하도록 떠미는 것이 당연했다.
최근 아슈라프 가니(페르시아어: اشرف غني) 현(2018년 기준) 아프간 대통령이 개혁을 천명했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조치들을 차근차근 시행중이며, 탈레반의 테러 공격 방해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가는 아프간 국민들이 상당한 숫자가 되는 등, 그렇게 아프간의 미래가 어둡기만 하다고 전망할 필요가 없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 마약 단속국( DEA)도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전 세계의 반이 넘는 아편 및 헤로인의 생산지로서 무려 85%나 되며 그중에서 4%가 미국으로 유입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마약 단속국도 묵과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마약 판매 자금이 탈레반과 IS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때문에 미군과 아프간 군경도 마약 시설을 파괴하여 탈레반과 IS의 돈줄을 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결과는 무척 엉망인데, 2017년 미국과 유엔 공동 조사를 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양귀비 재배는 오히려 5년전보다 무려 87%가 늘어나 마약 근절은 커녕 더 확대되었다는 것만 입증되었다.
물론 아프간 정부군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는 있다. 2021년 1월 탈레반 반군 58명을 사살하고 불리하다고 알려진 7월18일에는 공습으로 탈레반 반군 53명을 사살하고 5개지구를 탈환하는 저력을 보이며 일부지역에서 맹렬한 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미군이 출구전략 짜기 전까지의 이야기. 미군의 철수가 확정되자 레인저부대와 코만도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정부군은 말 그대로 붕괴수순을 밟고 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도 불리하기는 마찬가지다. 탈레반의 주전력은 10만 정도이나 동조자가 많고 친탈레반 세력들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실제로는 몇 배나 더 많다. 게다가 이란 국경을 제외한 다른 국경에서 광범위한 밀수가 이뤄지고 있다. 또한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에게 막대한 원조를 받아 현대화된 무장도 갖추는 추세이다. 반면 아프간 정부군과 경찰은 오합지졸 병력 20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으나 이들은 말이 20만이지 월급도 밀리고 훈련도도 처참하며 기본적인 무장조차 갖춘 부대가 드물다.[77] 아프가니스탄에선 공군 정도를 제외하면 정부군이 탈레반보다 장비 면에서 뒤지는 실정이며, 특수부대 정도를 제외하면 탈레반을 만나자마자 아쟁쿠르 전투 직후 프랑스군처럼 도망가기 일쑤다.
위기에 처하자 아프간 정부 인사들은 제3세계 사회지도층들이 위기상황에서 흔히 하던 관행대로 국민들을 버리고 그 동안 횡령한 외화와 원조물자를 싸들고 줄줄이 외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다. 남베트남의 사례에서 보듯이 엘리트의 대규모 해외이탈은 국가붕괴 확정 신호다. 당연하게도 아무리 엘리트라도 결국 국가가 있어야 지배층 행세를 할 수 있고, 외국에서는 일개 시민에 불과하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건 이미 국가 멸망이 확정되어 남아있다가는 죽을 상황이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미군이 그나마 1000명 정도의 대사관 경비병력을 남긴다고는 하나, 수십명의 무장세력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는 것 정도는 뉴스도 안 되는 아프간의 현실을 고려하면 대사관 경비를 위해 그 정도는 필요하며, 또한 탈레반이 아프간 전체를 장악하더라도 최소한 외국인은 해치지 못하게 하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봐야 한다.
5.1. 미국의 전쟁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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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지출의 경우 2001년 전쟁 시작 이래 공식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총 비용은 8220억 달러(한화 약 986조원)로 아프간에서의 총 군방비(2001년 10월부터 2019년 9월까지)는 7780억 달러(한화 약 933조원)이며 미국 국무부와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및 기타 정부 기관은 재건 사업에 440억 달러(한화 약 52조원)을 썼다.[78]
6. 베트남 전쟁과의 비교
"사이공보다 치욕" 美 20년 아프간 전쟁 이렇게 끝났다이 전쟁을 베트남 전쟁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다. 베트남은 통킹만 사건, 아프간은 9.11 테러로 전자는 거의 조작된 사건이라 피해는 당연히 후자가 더 크지만 어찌됐건 미국이 공격받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한 점. 그리고 베트남은 북진금지, 아프간은 과도하게 부족한 병력이라는 제한조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사상자.[79] 무능을 넘어 매국노들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형편없는 현지 정부와 적군에게 무기를 돈받고 팔아넘기는 군대.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승리를 할 수 없는 현실. 결국 미국이 견디다 못해 발을 빼자 급격하게 붕괴된 국가와 붕괴중인 국가 등 여러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베트남전도 출구전략 직전 라인배커 작전으로 북베트남을 폭격하여 전쟁수행여력을 크게 깎아먹어서 그나마 남베트남의 수명을 2년 연장시켜 줬듯이 아프간전도 철군 한달전 대규모 폭격으로 결말이 뻔하지만 아프간 정부의 수명을 일단은 연장시켜주려고 하는 것 또한 비슷하다.[80]
명분만 놓고 보면 이슬람 극단주의로부터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평가받는 등 베트남 전쟁보다야 훨씬 낫다. 당시 베트남 전쟁의 무용성을 비판하는 것은 서구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 트렌드가 되었고, 당시 일어난 반전 여론은 미국의 히피 문화 및 유럽의 68 혁명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부도덕한 전쟁으로 비판하기는 어렵다. 특히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는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는 초등교육 인프라가 대대적으로 개선, 확장되었고 21%대 수준에 불과했던 초등학교 취학률이 통계상으로는 97% 정도로 증가하였다. 만약에 미국이 과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에 대해 계속 경제제재만 하고 팔짱만 끼고 있었다면 인권문제 관련하여 심각한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81] 비교하자면 팔레비 왕조 시절 이루어진 여성 인권 신장 결과 이란 혁명 이후 수립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서 대놓고 여성의 교육권을 박탈하지 못했던 사례[82]와 마찬가지로, 미군 주둔 기간동안 일어난 아프가니스탄의 교육 인프라 개선 및 여성 교육 증대 덕분에 이번에 재집권한 탈레반은 과거와 같은 극악한 폭정을 반복하기 힘든 상황이다.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극악한 여성 인권 탄압과 우민화 교육을 그대로 시행했다가는 국민들의 반발이 훨씬 더 거세진다. 반대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심지어 스웨덴마저 공개적으로 북베트남을 지지했을 정도로 미국은 도덕적 명분에서 별로 할 말이 없었으며, 또 고엽제 문제와 미라이 학살 폭로로 인해 미군의 국제적인 이미지도 악화된 상황이었다.
전쟁 전개 및 결과를 놓고 보면 기초적인 공군력조차 전혀 갖추지 못한 테러리스트 민병대에게 패전했기 때문에 더 수치스러운 패배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베트남 전쟁보다 더 수치스러운 패배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베트남 전쟁은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소련, 중공으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고 싸운 경우라 변명이라도 조금 할 수 있었겠지만,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막장 테러리스트 집단이라 아무도 지원을 안 해주는 상황인데도 미군이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어쨌든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정권보다는 확실히 더 넓고 강한 지지기반이 있었다. 게다가 베트남군이나 케산 전투 같은 베트남전쟁 시기 내 직접 군사사를 살펴보면 알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북베트남-베트콩이 순수하게 게릴라전으로만 이긴것도 아니다. 미국-남베트남과 비교하기는 힘들어도 중소의 적극적 지원 아래 나름 튼실한 포병, 방공, 항공 자산도 갖추고 있었고, 승산이 있어 보일때는 대규모 전면 회전도 종종 벌였으며 특히 디엔비엔푸 시절부터 갈고 닦은 땅굴 은신, 신속 배치, 방열, 사격, 분해, 퇴각 기습 포격 실력을 갈고닦은 월맹 포병전력은 미국도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을 만큼 북베트남-베트콩은 국가간 정규전에도 튼튼하게 대비했고, 실제로 그럴 역량도 있었다.
반면 탈레반은 당시 북베트남 수준의 국민적 지지, 정치적 통합, 외부 지원, 미국과는 비교 안되지만 그래도 나름 튼실한 현대전 자산 이딴거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초창기 탈레반의 토대가 된 헤크마티아르 군벌 등을 지원했던 국가는 러시아가 아닌 바로 미국 그 자신이다.[83] 물론 개전 초반에 미군 본대의 우월한 화력, 기갑과 공중우세력을 토대로 탈레반과 알카에다 지도부를 비롯 상당수 세력을 일소한 것은 사실이며, 지지부진한 수색 끝에 개전 10년만에 빈 라덴을 사살하면서 미군이 목표로 하던 목적은 달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머리가 잘린 탈레반은 점조직화하며 세대를 거쳐 가장 뿌리뽑기 힘든 마약 군벌연합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되었고, 이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미군이 어떻게 손을 쓰기엔 적절치 못한 판도가 되어 의미없는 주둔군 사상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아프간 정부는 남베트남과는 달리 미군 주력이 철수한 이후 그렇게 지원받은 자본과 군사자산에도 불구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했다.[84] 베트남 전쟁보다 더 끔찍한 패배라는 것이 중론이다.
“AK-47 소총, 로켓추진수류탄, 지뢰로 무장한 반군에게 패배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첨단 동맹[85]”- 토비아스 엘우드 영국 하원 국방위원장
때문에 미국을 도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영국내부에서도 이번 아프가니스탄 패배를 치욕과 수치로 평가하고 있는데 베트남전쟁과 비교해서 미국은 엄청난 재정 투자를 기반으로 발전을 거듭 걸프전을 통해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자타의 공인을 받는 최첨단 군사자산들을 자랑하는 군대였다. 그런 최첨단 군대가 과거 월남전 수준 내지는 그 미만인 한심한 무장 수준의 반군을 제대로 섬멸하지도 못한 채 내몰리고 스스로는 빠져나가지도 못해서 마지못해 협상을 해가면서 쫓겨난 셈이다. 그것도 배운게 전혀 없다. 진짜 과거 그 베트남 전쟁 시절때는 아예 베트남전 같은 비대칭, 비정규, 무장봉기적 전쟁(asymmeterical, irregular, insurrectionary)을 싸우는 법에 대한 메뉴얼 자체가 없었다 쳐도[86] 21세기에는 당장 미군 본인들부터 웨스트포인트에서 옛날에 적으로 총을 겨누던 베트콩의 전략, 전술을 배운다. 민간 밀덕계 수준에서도 어마어마한 분량의 비정규전, 게릴라전, 정치전략전 메뉴얼이 나와 있는 상태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인재들이 모여 이를 연구해 훈련 시킨 군대가 월맹군, 베트콩 보다도 훨씬 질이 떨어지고 지원도 못 받는 중세적 광신도 집단에게 더욱 비참하게 패배 했다. 이는 어떤 변명도 불가능한 참사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 대해 영국 하원 국방위원장이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에 대해 “이것은 기념비적인 전략적 오류이며 역사는 우리를 가혹하게 심판할 것” # 이라고 한탄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군에 협조한 몽족 상당수를 버려두고 이라크 내전에서 IS토벌에 앞장선 쿠르드족들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은 자신들에게 그나마 적극적으로 협력한 하자라족들을 대부분 방치한 상태로 철수하였다. 하자라족들은 이미 탈레반 정권 시절 심각한 박해로 인구 상당수가 이란이나 파키스탄으로 망명한 전력이 있으며,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내내 탈레반의 주요 테러 타깃이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남은 하자라인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정리하자면
- 북베트남-베트콩은 소련과 중국이란 양대 강대국에게 엄청난 물자 지원을 받은 반면 탈레반은 파키스탄 정부 내 부정부패를 통한 지원 빼곤 외부 지원도 거의 없었다.
- 미국 자국만 빼곤 심지어 서방권 내에서도 방금 해방정국과 6.25 전쟁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교조적인 반공 사상이 있는데다[87] 남베트남에 대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던 한국 빼고는 전부 버림받았고[88], 심지어 미국 자국 내에서도 결국 반전여론이 주전파를 넘게된 베트남과 달리, 탈레반은 전세계에 메이저 정치 세력, 국가 치고 아무도 옹호하지 않았다. 심지어 반미권도 어쨋든 침략자인 미국이 더 나쁘다는 논조를 폈지, 중세적 광신도 부족연합체인 탈레반을 정의의 투사로 치켜세우는건 거의 없었다.
- 북베트남은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확실하게 범국민적 지지를 받았고[89], 60년대 동시대 낭만주의적 좌익 민족주의 사관에 대한 역풍이 많이 분 지금도 남베트남 내에서도 적어도 베트콩은 수만 규모의 국가 내 국가 역량을 유지할만큼의 민중적 지지는 받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탈레반은 당장 자국인 아프가니스탄 내에서도 싫어하고 근본적으로 타협하기 힘든 적대 세력이 엄청 많았으며, 이들은 미국에 열심히 협력했다.
- 베트남전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발전한 정보자산, 군사 기술, 베트남전에서 배웠던 대게릴라 진압전 (Counter-insurgency)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네가지 요소만 봐도 북베트남-베트콩에 비해 훨씬 더 초라하고 미약한, 아니 초라하고 미약했어야 했을 적인 탈레반 상대로 이렇게 사이공 1975 어게인을 찍고 쫒겨 나는 꼴을 보면 미국 입장에선 아무리 봐도 베트남보다도 더 굴욕적인 패배이다.
반면 미국 국민들에게 다가오는 충격은 베트남 전쟁보다는 훨씬 덜한 편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와는 달리 징집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참전한 군인 군인 수도 베트남 전쟁에 비해 훨씬 적으며 5만여명의 전사자가 나온 베트남 전쟁에 비해 전사자 수도 2,420명으로 훨씬 적고, 미국 관점에선 제한전이라 어쨌든 국내에는 피해가 덜했기 때문이다. 또한 2020년대에는 이미 미국 내에서도 자국의 패권주의와 세계경찰로서 능력에 대해 좌우파 가리지 않고 비판적인 성찰이 우세한 것도 영향을 끼친다. 이미 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라는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나마 현실을 받아들이는 면에선 연착륙이 가능했다.
결국 베트남 전쟁에 이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패하면서 아무리 미국이라도 일방적으로 전쟁을 한들 좋은 성과가 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 다시 증명됐으며, 아프가니스탄은 베트남과 더불어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라 한들 자국을 함부로 공격했다간 뼈아픈 패배만을 맛보는 " 제국의 무덤"임을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
7. 사망자 수
20년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미국 및 연합군 측, 탈레반 측, 그리고 민간인 사망자를 합하면 약 20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는 적게 추산되는 편이다.2001년 침공 당시부터 2021년 8월까지의 미군 전사자(사상자가 아니라 전사자만) 수는 총 2,448명이다. 이 수치는 50,000여명이 전사한 베트남 전쟁에 비해서는 훨씬 적지만, 그동안 미군의 방탄복과 방탄장비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음을 생각할 때 결코 무시 못 할 수치이다. 게다가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미군 숫자 자체가 2010년대 초 10만 명이던 시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6~7만 명. 이라크전 종결 덕분에 병력이 늘어나기 전에는 30,000~40,00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베트남에서 미군은 54만 명이 주둔했고 그 중 다수가 오합지졸이라고는 해도 어쨌거나 전투병력이었는데, 현재 미군은 전투병력이 오히려 소수이므로 비율로 따지면 베트남보다 낫다고 하기도 뭐한 상황. 게다가 미군의 발달된 "의술" 로 예전이면 전사였겠지만 식물인간 상태로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중상자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미군 전사자 외에도 영국과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 연합군 전사자들은 1,144명에 이른다.
공식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미국측의 병력이 있는데, 바로 민간군사기업에 소속되어 작전에 참가한 용병(컨트랙터) 들이다. 이들은 최절정기에 약 2만명이 있었으며, 2020년 당시 집계로 미국방부와 용역계약을 맺은 약 3846여명의 미국측 용병(컨트랙터)이 전사했다. 즉 이들은 미군의 공식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병력이자 사상자지만 실제로는 미군측 사상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미군과 함께 싸운 아프간 보안군은 약 66,0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탈레반 및 탈레반측에서 싸운 외국병력은 미군집계로 51,191명이 전사했고, 교전중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도 4만여명이 넘는다.
소련군이나 미군이나 모두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90],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는 이런 전력이 승리를 거두는데 무용지물이었다.
8. 사건 사고
여느 전장이 그렇듯이 탈레반과 알카에다 뿐만 아니라 미군과 ISAF군도 민간인에게 가혹행위와 학살을 가했다. 2010년에는 미군이 그룹을 이루어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고 다닌 킬 팀 사건이 벌어져 미군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되었다. 2012년 1월에는 네 명의 미국 해병대원들이 전사한 탈레반 병사 세 명의 시체에 소변을 갈기는 동영상이 폭로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일로 중동권을 비롯해 미국을 비난하는 여론이 매우 커졌는데, 사실 미국인들조차도 "명예를 중요시 한다는 미 해병대가 적군 시체를 모독하다니!"하고 굉장한 충격에 빠진 반응이었다. 결국 해당 해병대원들은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 1년 금고 또는 이등병 강등 후 불명예 전역과 같은 처분을 받고 군대에서 쫓겨났다.2012년 2월, 미군이 "실수로"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을 쓰레기장에서 소각한 것을 아프가니스탄 측이 발견, 안그래도 어려운 상황을 더욱 꼬아 놓았다. 초반에는 미군의 반응이 '이슬람 과격 저서들을 불태웠더니만 코란이 있더라... 그래서 뭐 대수냐?' 이랬다가 반발과 시위가 넘치고 미군 2명이 사살당하자 부랴부랴 책임자인 장교를 미국으로 전출시켰다.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는 미군에 대한 항의시위가 벌어지고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빚은 현지 주민과의 마찰을 다시 걱정해야 할 지경. 버락 오바마까지 나서서 사과했으나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
이런 종류의 전쟁이 대체로 그렇듯이, 외국군이 현지민과 사이가 나빠지면 거의 전쟁은 끝난 셈이다. 마오쩌둥이 남긴 유명한 말이 한가지 있는데 "게릴라는 민중이라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다" 라는 거다. 즉, 민중이 어느 편이냐에 따라서 게릴라도 힘이 달라진다는 것인데, 이미 민중의 마음이 미군을 떠난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미군으로서는 결정적 실책을 범한 셈이다. 이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한 술 더 떠서 코란을 칼로 베고 책에다가 부비트랩을 설치했다. 이슬람 국가는 기본적으로 대규모 학살과 분살행위도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에게 내심 동조하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무슬림의 심기를 건드린 행위는 바로 코란에 대한 훼손과 능욕이었다.[91]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미군 병사라면 모르고 코란을 태울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방이 항의를 해올 정도의 실례를 저질렀음에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둥 무례하게 넘기려한 태도는 명백한 미군측의 잘못이다. 시위 초에 지휘부가 눈치채고 군중을 진정시키고 오해를 풀려는 노력을 했다면 무슬림들도 문화적 차이에 의한 해프닝이라며 용서해 주었을 지도 모르지만, 미군 특유의 피점령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결국 잘 수습될 문제를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키워버렸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이렇게 커졌다는 것이 미군의 현지 안정 정책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인적 교류가 없어 피점령지에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제국주의 시대에 비해 정보통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무엇보다 미국 본토에 수백만에 달하는 무슬림이 정착을 하고 있는 시대에 미군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트러블을 일으켰다. 전략적으로 현지 주민의 호감을 얻기 위한 대민 지원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피점령지의 문화적인 토양을 고려하며 트러블을 최대한 피하는 것인데, 게릴라 제압을 위한 대민 지원 수준도 아니라 아예 장기 주둔을 고려하는 군대가 이런 준비를 안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지휘부는 주민들 신경 쓰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문제다'라고 책임을 돌릴 수가 없는 게, 현지 주민들이 항상 마주치는 것은 일선 병사들이지, 윗선 참모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병사의 일탈을 막고 행동방침을 교육시키는 것은 지휘부의 몫이다. 그런데 그 지휘부 마저도 상황 파악을 못하다 일이 커지자 부랴부랴 잠재우려 달려들었다.
2012년 3월 11일에는 미군 병사가 아프간 마을을 돌며 비무장 민간인 열여섯 명을 사살한 칸다하르 학살 사건이 벌어져 반미 감정이 더 거세졌다. 피해자 중에는 두 살짜리 아기까지 있어서, 아기 부모가 '우리 아기가 탈레반이냐?'라며 울부짖으며 분노하는 인터뷰 영상이 전 세계에 퍼졌다. 원래는 성실하고 바른 군인이였다는데, 이 때문에 소식을 전해들은 주변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사회와 영구 격리. 미국 측은 피해 보상금을 내놓고 민심 달래기를 하고 있지만 별 효과는 없다. 애초에 이 사건이 터지기 1년 전에 있었던 킬 팀 사건과도 마찬가지로 너무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종신형이 아니라 사형을 시켜야 마땅하다는 것이다.[92]
그리고 위에 나온 2012년 4월 카불 동시 테러에 미군들은 아프간 시민들의 돌팔매질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여 미국 극우파들도 민심이 떠난 자리에 아무리 미국이 열심히 해봐야 반미만 거세지는 현실에 고민 중이다. 존 매케인이 철군 반대를 인터뷰했지만 기자에게 "그럼 철군 말고 대체 뭐 뾰족한 방법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변을 못했다. 아니 그 방법이라는 게 없을 테니까 말이다.
미군은 자기들과 다른 문화권에서는 대민정책을 끝내주게 못하는 걸로 유명하다. 대민정책도 그렇지만 애초 미군은 타국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도 개입시키고자 했는데, 그 이유가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해본 적이 있기에 한국인과의 친밀도가 있을 것이라는 한국인 입장에선 어이가 나갈 이유였다. 결국 한국의 반대로 이뤄지진 않았지만 저 정도로 현지에 대한 이해도가 심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반 세기 넘게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대민정책도 못 하는 건 당연지사. 미군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반감은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은 모두 다르며, 개인 문제는 개인 문제'라는 미국식 사고에 있다. 예를 들어, 미군 한 명이 민간인에게 잘못하면 이 일이 오직 그 미군 한 명에 국한된 문제라 생각하고 처리해버리는데, 문제는 이슬람 문화권의 피해자 입장에서는 단순한 개개인의 차이가 아니라 '미군들'이 저지른 만행이라는 다른 판단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의 공식 대응이 '한 개인이 저지른 사건' 수준에 머무르고, 이게 문화적 인식의 차이로 피해자 측에서는 점령군의 오만한 행위로 싸잡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를 이슬람 문화권의 고유한 속성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특정 개인들을 보고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으며, 국내에서만 해도 몇몇 몰상식한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로 인해 쪽발이나 짱깨라는 멸칭으로 전체를 비하하는 일이 흔하다.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럴진데, 실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이런 편견이 더 작용한다는 것은 뻔히 예상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반대로 '자기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 내로남불의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다.
대표적인 미군의 대민정책 실패의 사례로 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모두 초기에 미군 병사들이 일으킨 문제들을 미군 당국이 '한 병사가 사고친 것으로 '미군의 이름과는 무관한 개인 단위의 사고'로 취급하다 반미 감정이 엄청나게 거세진 케이스다. 단순한 사고로만 치부하다가 엄청난 후폭풍을 맞은 우리나라의 '여중생 장갑차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 영국이나 소련군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점령을 했을지언정 비슷한 문제로 반감을 얻어 게릴라전으로 시달리던 문제를 겪었으며 이런 사고에 대하여 미국처럼 한 개인이 저지른 일 수준으로 우습게 보며 대하다가 똑같은 분노와 저항을 얻었다. 그리고 과거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들 대다수가 자국 문화 위주로 다른 나라들을 다스리려다가 나중에 된통 당하고 반감을 얻었던 것처럼 강자라서 남을 이해할 거 없다는 사고방식은 매우 흔하다. 그러나 이 문제가 유독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미국의 대 아랍권 정책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건 다른 전쟁들보다도 이런 무지를 더 심각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장으로 보이는 20세기 초중반의 미군 군정 사령부들이 이 시기 미군과 비교하면 요순으로 보일 정도.
호주군 특수부대 SASR가 아프가니스탄 파병 기간 포로와 민간인 등 39명을 살해했다는 호주 국방부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전·현직 호주 군인 25명이 중범죄에 연루된 증거도 발견됐다. 보고서는 "'블러딩'(blooding, 여우가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을 처음 본 초보 사냥꾼의 얼굴에 여우의 피를 바르는 입문 의식)으로 불리는 병사의 첫 사살 의식을 위해 정찰 사령관이 병사에게 죄수를 쏘라고 명령했다는 믿을 만한 정보가 있다"고 기술했다. SASR의 전쟁 범죄는 전직 법무관인 데이비드 맥브라이드가 관련 비밀문서를 현지 방송사에 제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맥브라이드 전 법무관은 비밀누설 사실을 인정한 뒤 기소됐지만, 이를 계기로 호주군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기사 관련 영상
9. 관련 방송
- 2021년 10월 10일 KBS 시사기획 창 - 미국 새 게임을 시작하다
10. 매체에서
- 12 솔져스: 2018년 미국 영화.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탈레반 정권을 3개월 안에 기적적으로 무너뜨린[93]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일명 그린베레) 제 5특전단[94] 산하 태스크 포스 대거 소속 ODA[95] 595 부대원 12명의 활약상을 그린다. 그리고 망했다... 미국에선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이 이길 가망도 없는데 이런 영화로 뭐 미국 만세라고 부르고 싶냐는 비아냥도 많았다.
- 론 서바이버: 2005년에 일어난 레드 윙스 작전을 다루고 있다.
- 메달 오브 아너(2010): 아프간 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탈레반을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았고 결국 탈레반이라는 명칭은 못쓰게 되었다.
- 붉은 하늘: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미 공군에 근무하며 아프간 전쟁에 참전한다.
- 셜록(BBC): 존 왓슨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설정이 나온다. 원작이 나온 지가 100년도 더 됐는데, 왓슨 박사가 아프간에서 복무했다는 설정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생각하면 심경이 씁쓸해진다.
- 스펙 옵스: 더 라인: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아프간은 해당 게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제33차량화보병대대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두바이 사태가 터지자 대대장 콘래드 대령의 독단적 결정을 따라 두바이로 진입한 부대이다. 33대대의 대대장인 존 콘래드 대령은 카불에서 주인공 워커를 구해준 적이 있는 인물로, 명예 훈장도 받을 정도로 유능하고 인망 있는 인물이었으나 아프간에서 벌어진 한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곤 PTSD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자신의 패배를 설욕하는 데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었고, 결국 두바이행을 결정하게 된다.
- 아웃포스트(2020): 2020년 미국 영화. 2009년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투 중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투인 캄데쉬 전투를 그린다.[96]
- 아이언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 시리즈의 시작점이다. 200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최신식 현대 무기 제리코 미사일을 선보였던 주인공이 텐 링즈에게 납치되어, 동굴에서 첫 번째 아이언맨 슈트를 만들어 탈출하게 된다. 그 이후 텐 링즈가 노획한 제리코 미사일을 파괴하기 위해, 다시한번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제리코 미사일을 파괴한다.
- 조지 부시의 위대한 미국: 빠르게 수도를 제압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는 것으로 끝내면서 고작 2시간 27분 만에 미국의 승리로 종전된다.
- Rebel Inc.(반란 주식회사):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후 폐허가 된 지역을 안정화시킨다는 내용의 게임이다. 다만 인게임에서는 직접 아프가니스탄이나 탈레반 등을 언급하지 않는다.
- 더 커버넌트: 제이크 질렌할주연. 존 킨리 상사가 작전 실패 이후 현지 통역관에 의해 구해졌지만, 그 통역관이 보호받기는 커녕 탈레반에게 쫓겨 다니는 꼴을 못봐 가명을 이용해 직접 그를 구출하러 간다. 영화내에서는 반 탈레반 부족들, 킨리를 구한 통역관을 보호하지 않고 비자받게 기다리게 만드는 미국정부의 탁상행정, PMC의 존재등 아프가니스탄전에 대한 전반적인 면모가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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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9월 11일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때까진 무조건 철수한다."라고 정한 날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2021년
8월 15일에 극소수의 미군만 남겨놓고 전면 철군을 시작했으며 카불 함락 이후 카불 시내가 대혼란이 일어나면서 전면 철수도 사실상 8월 31일로 앞당겨졌었다. 원래는 8월 31일까지였으나 완전 철수를 24시간을 앞당겨 8월 30일 23시 59분에 마지막 미군을 태운 항공기가 카불 공항에서 이륙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2]
2021년 8월 기준으로, 누적 자료가 아니다.
[3]
최대 파병 숫자. 2001년도에는 만 명 미만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증가해서 2011년도에는 정점을 찍어 아프간 주둔 미군 규모는 11만에 달했다. 2011년 이후부터는 꾸준히 감소.
[4]
종전 직전 숫자, 장부상 상비군이 30만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6분의 1밖에 안된다.
[5]
미군 주둔 당시 60,000명 정도에서 종전 직전에는 강제징집과 지지자들의 자원으로 20만 명 이상으로 증가. 탈레반의 핵심 전력은 대략 6~7만명 규모.
#
[6]
공식적 개전일. 다만 전쟁 시작일 자체는
9월 11일이다.
[7]
미국이 지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의 부활을 선언한 날이다. 단 미국은 9월 11일에야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8]
공식적인 미군철수는 8월 31일이지만, 완전히 발을 빼는 시점은 9월 11일이다. 단 아프간 정부가 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지도 않은 8월 15일에 탈레반에게 항복하고 권력을 넘기기로 함에 따라 실질적인 전쟁은 8월 15일에 탈레반의 승리로 끝났다. 졸지에 미군은 자신들이 몰아낸 탈레반 정부 하에 철수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는 아프간전이 완벽한 낭비였음을 상징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9]
이 조항은 미국과 그 동맹세력들의 안전 보장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속된 말로
파이브 아이즈라 불리는
호주,
뉴질랜드조차 이 조항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10]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에서 미국이 초강대국의 위상에 맞지 않게 크게 부진하긴 했다만은 최소한 아프가니스탄 수준의 파국을 맞지는 않았다. 다만 이라크는 2021년 현재 이란에게 영향권을 빼앗긴 상황이며, 남아 있는 잔여 미군들조차 이라크의 강력한 철수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패전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며 시리아도 친러시아, 친이란 독재 정권이 건재한 상황이다.
[11]
미군 최소 입대 가능 연령은 만 18세이다. 종전 직전 시점인 2021년 7월을 기준으로 삼으면 2003년 7월 생까지 포함된다.
[12]
다만 미군은 병사들의 대부분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생으로 전부 물갈이된 반면, 탈레반은 기존에 있던 병력이 지휘관이 될만한 리더십이 없어도 전역하지 않고 고참병으로써 부사관급 역할을 맡아 계속 참전하기 때문에
30, 40대 이상 병사들도 많다는 차이가 있다.
[13]
통념과 달리
9.11 테러 이전의 미국 역사를 통틀어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812년
미영전쟁 때는
워싱턴 D.C.를 점령한 영국군에 의해 백악관이 불탄 적도 있었고,
멕시코군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양차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에게 공격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영전쟁은 당시를 기준으로 200여 년 전의 일이었고, 멕시코군이나 독일군의 공격은 본토에 피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일본군은 진주만에서
미군 전함들을 대부분 파괴하는 큰 피해를 입혔지만, 미국 본토에는
풍선폭탄으로 자잘한 피해만 입혔을 뿐이었다. 때문에 미국인들의 사고에는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 본토는 총알 한 발 안 떨어질 만큼 안전하다"는 믿음이 자리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9.11 테러였다.
[14]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저자
크리스 카일의 회고에 따르면 네이비 실 요원 시절 테러 사건 발발 이후 긴급 소집으로 인해 부대로 빨리 복귀하는 과정에서 교통위반에 걸려 경찰에게 붙잡혔는데, 본인이 네이비 실이어서 빨리 가야 한다고 말하자 경찰이 길을 열어드리도록 안내해드릴 테니 꼭 개자식들에게 복수해 달라며 크리스 카일 차 선두에 서며 그를 부대까지 안내했다고 한다.
[15]
이때 분위기 파악 못하고 9·11테러는 신의 응징이라며 어그로를 끈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전쟁에서 패전하여 축출되고 이라크 전쟁 개전 약 3년 후(9.11 테러 발생 약 5년 후)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16]
게다가 이 시기 러시아는
체첸을 상대로 자신들만의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러시아는 온갖 전쟁범죄와 비인간적인 수단을 총동원한 끝에
이츠케리아 체첸을 멸망시키고 반군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17]
탈레반, 또는 이들의 지지 세력인 파슈툰족에 반대하는 부족들이 결성하여 세운 단체.
[18]
다만 이는 단순한 경제지원이 아니고,
1998년의 핵실험으로 이루어졌던 경제제재의 철회 역시 포함된 것으로서 사실상 파키스탄의 핵 개발 및 보유를 묵인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19]
중앙아시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 또한 이를 묵인했다. 국내정치는 옐친의 실책을 수습하던 푸틴 정권으로 바뀐 지 얼마 안 된 아직 혼란스럽던 과도기인 데다 미국이 아프간에 들어가 탈레반을 때려잡아서 맡닿아 있는 중앙아시아 영역에 탈레반의 영향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도 이득이기 때문이다.
[20]
이 이야기는
12 솔져스로 영화화된다.
[21]
전술핵은
ICBM으로 대표되는 전략핵과는 다르게 전선에서 사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생산된 핵무기로서 최소 수 킬로톤(kt)에서 수백 킬로톤 정도의, 비교적 작은 폭발력을 지닌 핵무기다. 예를 들면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 투하한
리틀 보이와
팻 맨도 그 폭발의 위력은 현대 기준으론 전술핵에 들어간다. 다만 비교적 위력이 작은 것이지, 그 폭발력은 여전히 다른 재래식 폭탄을 찍어누르는 수준이다. 당장 얼마 전에 일어났던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에서 베이루트 항을 초토화시키고 베이루트 시가지에도 광범위에 걸쳐 피해를 입혔던 질산 암모늄 폭발의 위력이 약 1킬로톤 이었다. 최소 폭발력이 수 킬로톤에 달하는 전술핵의 위력은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2]
하카니 네트워크는 미국이 가장 열심히 지원하던 반소 게릴라 집단 중 하나였다. 정작 지금은 수장 중 한명인 할릴 하카니에게 5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미국이 걸어놓은 상태.
[23]
본 지도는 독일 연방군이 2024년 2월 9일 배포했다.
#
[24]
애시당초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등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제아무리 깨끗하고 확실하며 도덕적인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해도 전쟁이 본격화하면 그 이후는 더럽고 추악해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전쟁의 본질이 결국 누가 죽고 누가 죽이냐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5]
2014년 아프가니스탄 대선은 부정선거 시비에 휩쓸려 개표 연기와 재검표가 반복되었다.
[26]
개입시켰다가는 진짜로 헬게이트가 열린다. 아랍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는 서방인들에 대한 것처럼 단순한 종교 및 역사, 정치 문제로 인한 증오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중국,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비슷한 인간적 증오다. 그리고 설사 이 모든 것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인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현 영토보다 넓은 지역을 원활하게 통치할 수가 없다. 현상유지는 매우 잘할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의 팽창은 절대적으로 무리라는 말.
[27]
최근 유럽 쪽으로 다시 관심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28]
'너희들은 결국 떠날 자들이다. 우리는 그 때까지 버티면 그만이다'라는 뜻. 섬멸전을 수행하지 못하는 점령전에서 무기와 화력, 기술력의 우세가 지구전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모순을 드러낸 말.
[29]
당시 연령 28세
[30]
전체병력 30만 이중 실 병력은 4만으로 나머지 26만이 장부상 병력이었다.
[31]
공세로부터 고작 2개월
[32]
말이 좋아 협조 요청이지 사실상 패자가 승자에게 자비를 구걸한 것과 다를바 없다. 탈레반이 협조를 거부했다고 한들 미국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며 결국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줄테니 살려달라는 굴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손석현 연구위원에 따르면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패전 이후 게릴라 전쟁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잘못된 전훈을 얻었으며, 이에 그간 피를 흘리며 획득했던 대반란전에 대한 노하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출처: <냉전기 강대국의 대반란전 비교분석 연구>)
[34]
inss 전략보고서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전개과정 및 미중관계와 한반도 파급영향 - 박병광 책임연구위원 저.
[35]
이라크 전쟁은 후세인을 어찌됐건 제거하긴 했고, 미국이 세운 이라크 세속 정부가 IS의 과한 난동으로 이라크인들이 폭력을 통한 문제해결의 위험성을 깨달은 탓이라고는 하나 결국 IS를 무찌르고 생존에는 성공(?)하였으므로, 미국이 원하던 목표가 이뤄지지 못하긴 했어도 실패라고까지 하긴 어렵다.
[36]
이마저도 동 시기에 벌어진
이라크 전쟁 참전용사 보훈 문제까지 생각하면 그다지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37]
20년간 전체 병력의 5분의 1인 6만6000명이 전사했다.
## 즉 이들이
고기방패로 미군에게서 돈과 무기를 제공받는 대신 미군을 대신해서 죽어나간 것이다.
[38]
미국 의회에서 아프간 친미 정권의 붕괴에 대해 뭐라고 비난하든, 미국 연방정부는 아프간 전쟁의 패전을 인정한 적이 없다. 사실 미국 행정부는 패배해서 철군했으면서도 남배트남 전쟁조차 공식적으로는 패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39]
복수는 바로 하지 말고 분노를 삭히고 침착함을 찾은 후에 계획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은 9.11 테러로 광분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침공을 결정, 이후 일을 꼬이게 만들었다.
[40]
사실 국제법적으로는 아프간 전쟁 개전 시기 미국의 태도는 국제법적으로는 문제가 될 소지도 있었다. 다만 당시 미국이 지금의 위상과는 비교도 안 될 위치에 있던 상황에 전쟁을 해야 할 이유 자체는 확실했던 터라 나중에 뒷처리하는 식으로 넘어가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을 뿐.
[41]
남아시아 이슬람계에서 권위있는 언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하다보니 우르두어 사용 가능 인구가 더 늘어난 것도 있다.
[42]
개중에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 등의 서방 관점에서도 온건하고 신사적인 경우도 분명 존재는 했으나 전체로 보면 소수에다가 그나마도 알 카에다의 정밀한 암살에 사라졌다.
[43]
Islamic State of Afghanistan.
이슬람 국가 호라산 지부와는 무관하다.
[44]
해당 기사는 지나치게 반미주의적인 관점 + 파슈툰 부족주의 관점에서 작성되었다는 문제가 있지만, 탈레반 몰락 이후에도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한 여성 인권 억압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45]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면, 탈레반의 통치에 거부감을 크게 느끼던 카불 등의 대도시와는 다르게 아프간의 지방 농촌은 탈레반 이전이나 이후나 외부 문물 확산도 제한적인 몹시 폐쇄적인 전통주의 사회였기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미군과 협력자들을 쫓아내자는 탈레반의 주장에 넘어가기도 쉬웠다. 해외에서도 미국의 개입을 소련의 침공과 동일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도전이자 모욕으로 간주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몰려들어 후퇴한 탈레반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산악지대에 유입되기까지 했다. 탈레반에 동조적인 아프간인을 모병하건 이 아프간 외부 출신 테러리스트들을 무장시키건 탈레반은 안정적으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46]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가 벌려놓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냈고, 소련군 철군도 깔끔하게 끝냈다. 정작 자신의 국가의 라이벌인 미국이 자신의 국가가 했던 삽질을 더 심하게, 더 오랫동안 하다가 철군 과정도 참으로 우왕좌왕하게 하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했을 듯 하다.
[47]
그나마 도스툼 정도가 우즈벡키스탄을 등에 업고 실세 노릇을 했지만, 정치적 능력은 별로였다.
[48]
아프간 무장단체 하카니 네트워크의 창립자. 하카니 네트워크는 미국의 지원을 빠방하게 받은 무자헤딘 군벌 중 하나였으나 탈레반으로 전향 후 탈레반 세력 최대 분파 중 하나가 되었다.
[49]
2020년 기준 4.64.
[50]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이 더 길었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몇 달만에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사상자 수가 우크라이나인 사상자 수를 넘어섰다. 그나마 안전한 서부로 도망갈 수 있던 우크라인들과는 달리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사방이 가로막혀 도주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적대하는 민간인들을 다 죽여야 한다면 한반도의 세 배에 육박하는 아프간 일대를 10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들쑤시고 다니면서 사람이 보이면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며, 당연하지만 핵무기를 써도 그 광범위한 영토의 모든 사람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51]
게다가 여성의 경제활동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적인 사회 문화 때문에 가장이나 아들들의 경제력이 중요한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이나 장성한 아들들이 갑자기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면 일가족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는다. 대신 일할 아들이나 형제가 있다면 경제능력이 전무하고 얻을 수도 없는 가족 내 여성과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내몰리지는 않겠지만, 만약 집 안에서 일하고 돈을 벌어올 수 있는 유일한 성인 남성이 사망한다면 그 가족의 처지는 몹시 암담해진다. 아프간 이슬람 공화국 정부의 몰락 전에는 ISAF와 UN이 대량의 식량을 무상으로 배포했기에 굶어죽지는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무상 원조만으로 수많은 유가족 가정들을 지탱하는건 현실적으로 무리다. 결국 가장을 잃고 남겨진 유가족은 신체의 장기를 불법으로 팔거나 아동 성매매 악습 바차 바지(Bacha bāzī,بچه بازی) 등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내몰리게 된다. 멀리서 분쟁을 접하는 세계인들이야 아프간인들의 죽음이 안타까울 뿐 크게 와닿진 않겠지만 아프간에서는 그 유가족들에겐 사형 선고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테러리즘이란 것 자체가 이렇게 아무도 돕지 않는 가난한 분쟁지역에서 원조와 성금을 미끼로 자국의 어용 종교를 강요하는 걸프 만 국가들의 야욕 때문에 이리도 악화된 측면도 있다. 당장 90년대 탈레반의 부상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파키스탄의 막대한 후원 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52]
심지어 미군의 이런 문제는 아프간지역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국제구호단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15년에 쿤두즈에서 발생한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공습이 그것이다. 이때 미군은 공습으로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을 공습해 19명의 의사를 죽였고, 37명에게 큰 부상을 입혔지만,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국제법상 책임 추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았다. 당시 오바마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지만, 미 국방부는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사고였으므로 국제법상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조사 결과 징계 대상이었던 이들은 모두 형사처벌이 기각된 후 기초적인 재교육을 받는 것으로 징계가 정리되어 실질적으로 제대로 처벌받은 이들은 전무했다.
[53]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에 해당
[54]
초등학교에서 기초적인 체조 교육이라도 받았다면 이런 수준 낮은 훈련을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아프간의 병사들의 탓이라기보다는 의무 교육의 부재가 큰 원인이다. 초등학교 체조 교육을 받지 못했을 정도로 사회 인프라가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다.
[55]
북부동맹과 탈레반이 대치하던 시절 북부동맹의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압둘 하크도 아프가니스탄의 이러한 현실을 파악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서로 다른 민족들이 폭 넓은 자치를 누리는 형태의
연방제로 개혁하려 했었다.
[56]
미국은 무슬림 국가가 아니면서 이슬람 세계의 일부인 아프간을 침공해온 국가이므로 미국 편에서 같은 무슬림인 탈레반과 전쟁하는 것은 배교자이자 불신자들의 행위로 선동되지만, 반면 미군에 협조하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및 친정부 민간인을 공격하는 행위는
타크피르주의를 통해 정당화된다. 아랍 무슬림들과 대치하는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지지하고 있는게 미국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은 이슬람 세계에 속하지 않은 나라인데 무슬림들의 세계 일부인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해 좌지우지하려고 하니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정통으로 반하는 국가인 셈.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모로코 등은 이슬람권 전역에 혁명을 수출하려고 시도하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화해를 시도하는데도 부도덕하다는 비난은 퍼부어도 사우디나 모로코를 곧장 적대하는 이슬람 국가가 드물듯이 등 같은 친이스라엘 국가라도 이교도라면 무슬림들은 훨씬 민감하게 여긴다.
[57]
럼스펠드 문서에서도 언급이 있지만 병력이 없다보니 탈레반 주력부대와 추종 집단(빈라덴 포함)이 물주인 파키스탄으로 도망을 치는 데도 포위섬멸하지 못하고 그대로 놓아주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 실책이 아프간 통제실패와 탈레반이 아프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당시 미군의 지상군 병력은 특수전병력 100여 명이 전부였다.
[58]
도스툼의 휘하로 들어가지 않은 인민민주당의 잔당들은 끝까지 항전했다.
[59]
국방부 산하 비영리법인.
[60]
대표적으로 많은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만 하던 시기에는 탈레반 세력을 잘 색출하는등 수월하게 군사작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아프가니스탄내 군사작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이라크로 차출되어 버렸다. 탈레반을 공격하던 이들이 이라크로 가버리자
탈레반들은 되살아났다.
[61]
유목민 특유의 접대의 문화 및 가족의 복수를 대신해주는 여러 가지 풍습을 포함한 관습법
[62]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파슈툰왈리의 기준으로 집안에서 외부인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인 남자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손님 접대가 정 필요하다면 여성과 아이들은 집 어딘가에 숨어있고, 남성들만 접대를 한다. 그리고 여성들이 외부인에게 노출되면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거라고 의심하고 죽이는데, 보통 파슈툰인들끼리는 그래서 주인이 미리 집안 내 출입구역을 정해주고 손님은 그 구역 내에서만 움직이는 식으로 접촉을 피한다. 이 사례는 집주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소련군이 아무 생각없이 여성들의 거주지에 들어가는 바람에 터진 것으로 보인다.
[63]
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64]
당연하달까, 그 돈을 받아먹은 하청업체들은 럼스펠드와 유착되어 있었고, 그 결과 돈은 돈대로 나가고 병력은 부족한 환장할 체제가 되어버렸다. 물론 하청 용병대 PMC는 민간사상자를 내어도 미군의 범죄가 아니고, 자신들이 죽어도 미군 사망자가 아니라는 장점이 있기는 했으나 그 PMC를 누가 고용했는 지가 뻔해서 의미없는 일이었다.
[65]
주한미군 지상군 부대를 대대적으로 감축시킨 것도 럼즈펠드였다. 2보병사단과 2공중강습여단의 철수가 대표적 케이스다.
[66]
처음부터 부족했던 아프간 주둔군 상당수가 이라크로 이동하며 탈레반은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아프간 주둔군을 떼서 투자한 이라크마저도 안정화에 실패해 ISIL이 나왔다.
[67]
물론 이라크전의 삽질이 가장 큰 원인이다.
[68]
전쟁 초기 5천명의 인재가 온전히 파키스탄으로 도망친 덕도 있다.
[69]
그래서 병력투입이 소극적이었겠지만
[70]
이는 냉전 후 유럽각국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71]
파슈툰인은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이지만, 아프가니스탄 내 파슈툰인 인구보다 파키스탄 내 파슈툰인 인구가 더 많다. 다시 말해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으로 단일한 세력으로 통일되었다 하더라도 국경선 넘어 파키스탄 내 탈레반 그룹들이 서로 이합집산하는 상황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72]
영국이 브렉시트를 한 이유로 무분별한 시리아 난민 수용이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는 점을 생각하면 영국 정치권이 결단을 내린 것이라 봐야 한다. 다만 영국도 수송기에 자동차를 실은 것을 두고 비판 여론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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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남베트남 멸망 과정에서도 남베트남 정부를 제외시키고 협상때린 일이 있었다. 달리 말하면 사실상 미국이 공개적으로 아프간 정부는 우리의 괴뢰이자 시한부 인생이라고 스스로 선언한 꼬라지였다. 아프간 정부건 군대건 의욕이 생길 수가 없다.
[74]
중앙아시아가 원래 페르시아나 아랍에 비해
종교에 덜 매달리기도 하고
소련이
무신론과 유물론을 확산시켜 이슬람 극단주의 자체가 생길 여건이 적었다. 전반적으로 구소련 회원국이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전체적으로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다.
[75]
다만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무함마드 빈 살만 집권 이후로 이슬람 근본주의와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카타르는 여전히 이슬람 근본주의를 선교하기 때문에 별 타격은 없다.
[76]
탈레반의 사상적 원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정작 본인은 파키스탄 군부의 비호로 뉴욕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낸 위인이다.
[77]
비슷한 사례로
조선인민군이 있다. 병력은 110만이지만 특수부대나 평방사, 전연군단 기갑부대 등을 뺀 대부분은 매년 실탄사격을 겨우 3발 해보고 기본적인 식사조차 제공되지 않아 체력이 전혀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78]
여기에는 파키스탄 기지비용 지출등이 다른 지출 내용들은 빠져있다.
[79]
아프간에서 발생한 전사자가 3,600여 명인 점을 들어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가장 많을 때도 총병력이 10만명이 될까말까하던, 그나마도 대부분의 기간 병력이 2~3만에 불과했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반면 베트남전 당시 투입된 병력은 최대규모가 54만 명이었고 총인원은 300만에 달했다. 그 중에 전사자가 58,000명이다. 만일 베트남전도 미군이 많아야 10만. 평소 3만정도 유지하는 식이었으면 전사자는 수천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80]
다만 미군 폭격으로 크게 줄어든 북베트남군을 막아내기는 한 남베트남군과 달리, 아프간군은 그냥 붕괴되고 있어서 효과가 전혀 없다는 점은 차이다. 물론 탈레반의 피해가 예상보다 커지기는 했지만 1만 명 죽어나갈 게 2만 명 죽어나가는 정도로 전의가 꺾였으면 20년간 전쟁을 이어가지도 못했다.
[81]
9.11 테러 4개월 전 작성된 딴지일보 기사 링크. 탈레반 정권 당시 비참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함과 동시에
바미안 석불 파괴에 경제제재만 하고 팔짱만 꼈던 미국을 비판하는, 평소 딴지일보답지 않은 제대로 균형잡힌 기사이다.
[82]
호메이니 살아생전 여성 전문직 상당수가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호메이니 사후 상당수는 원래 직장에 복귀할 권리를 되찾았다.
[83]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및 ISI를 통해서 제한적인 왜곡된 정보만을 입수할 수 있었고, 미국의 무기와 자금 지원은 무자헤딘 중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그룹으로 향했다. 정작 당시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데다가 온건파였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영어를 못하는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했는데, 미국의 정보통들은 프랑스어 통역하기가 번거로우니까 영어 못하는 사람은 필요가 없다고(…) 그에 대한 정보를 대충 누락시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국제외교에서 프랑스어가 가진 엄청난 비중을 생각해본다면... 게다가 마수드는 미국에 연줄이 있다는 설도 있었기에 정말로 그가 영어를 못하는지도 의문이다.
[84]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얼마나 빨리 멸망했는가 하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던 미군, 미국인, 영주권자들, 미국이 탈출시켜야만 했던 미군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철수가 완료되기도 전에 멸망해버렸다. 결국 미국은 철수를 위해 새로 아프간의 주인이 된 탈레반에게 철수 협조를 받아야 했다.
[85]
영국과 미국을 뜻한다.
[86]
이것도 좋게 봐주려 노력한 것이지 없을 리가 없다. 게릴라전은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전술이고 이에 시달린 서구 식민제국들은 대게릴라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고 매뉴얼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당사자인 미국부터가 월남과 기후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필리핀의 정글에서 게릴라와 싸워본 경험이 있었고 20년 전에는 그리스에서, 15년 전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빨치산을 토벌한 전례가 있었으며 10년 전에는 프랑스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전례에서 성공적으로 게릴라를 토벌하던 프랑스의 전략을 분석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의 학정 끝에 월남은 분열 되고 반공 군벌들이 토사구팽 되어 군대는 무력해졌고 그 지역은 공산 게릴라의 해방구가 되었다. 이에 지엠을 죽여버리자 월남은 명백한 미국의 괴뢰국으로 전락 하고 쿠데타를 거듭하며 혼란 끝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하고 패망 했다. 독립전쟁, 영미전쟁 정도를 제외하면 압도적인 국력으로 찍어누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미국의 역사적 경험과 아메리카 대륙에 고립 되어 있어 타국에 대한 이해가 낮았던 무지와 오만함으로 불러 일으킨 대참사이다.
[87]
1990년대 이전까지 공산 정권이 수립된 국가와의 수교 자체가 없을 정도였다.
[88]
남베트남에 주둔했던 제1세계 군대 중에서 남베트남에서 마지막에 철수한 군대가 바로 한국군이었다.
[89]
공산주의 국가니깐 그냥 때려 패서 강제 통합한거 아니냐 반문할 수 있겠으나 이건 MACV-SOG 같은 특수전 스페셜리스트들과 베트남 내 소수민족까지 동원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던 미국의 북베트남 내 공작 노력을 무시하는 관점이다.
[90]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고전한 것을 가지고 소련군이 약체였다고 주장하는 밀덕들도 많은데, 실제론 그래도 소련은
교환비라도 앞섰다는 걸 감안하면 미군이 더욱 더 크게 참패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소련이 남긴 아프간 정부는 2년이라도 견뎠지, 이슬람 공화국은 불과 1달도 안되어서 무너졌다.
[91]
ISIL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중동 걸프 산유국들에 반기를 드는 살라피-지하디스트 파벌이기에 그런 면도 있다. 사우디나 카타르 등의 지원을 받는 와하비 무슬림들도 반감이 심하거나 최소한 대놓고 인정하진 않았다.
[92]
다만 미군은 해외 전장 파병군인들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서인지 PTSD에 따른 감형사유가 작용해서인지는 모르나 군인들이 해외파병 중 현지주민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1960년대 이후에는 사형만은 내리지 않고 있으며, 정 내려야 한다고 해도 사법거래 혹은 배심원간의 의견 불일치 등을 통해 사형선고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는 게 관행이기는 하다.
[93]
엔딩컷에서 미군 상층부에서는 2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이들은 3개월 안에 기적적으로 해냈다고 나온다.
[94]
중동, 페르시아 만,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특수작전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냥 이슬람권 지역 담당 전문 부대라고 보면 될 듯.
[95]
그린베레의 부대 단위 가운데 하나. A분견대(Special Forces Operational Detachment - Alpha , 줄여서 SFOD-A, ODA 또는 A-team)는 지휘관(팀장)인 대위를 비롯한 12명의 팀원으로 편성되어 실제 작전을 수행한다.
[96]
다만 이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가 컸던 것은 애초에 전초기지 자체를 잘못 세웠기 때문이며, 게다가 차량보급까지 제대로 안돼서 미군이 화력우위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탈레반과 총기로 직접 전투를 벌이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 컸다. 즉 몰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오히려 이런 상황인데도 8명의 전사자로 탈레반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낸 미군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