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머스크 앨라배마호 피랍 사건 Maersk Alabama hijack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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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09년 4월 8일~12일 | |
장소 | 소말리아로부터 440km 떨어진 인도양 해상 | |
작전명 | 아프리카의 뿔 항구적 자유 작전 | |
결과 | 해적 제압 및 인질 구출 성공 | |
세력 |
미합중국 해군 미합중국 특수작전사령부 |
소말리아 해적 |
전력 |
USS 베인브릿지 USS 핼리버튼 USS 복서 DEVGRU 레드 전대 |
원파 161호 구명정 |
피해규모 | 없음 |
1명 생포 3명 사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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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머스크 앨라배마호 피랍 사건(Maersk Alabama hijacking)은 2009년 4월 8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 소말리아 해적 4명에 의한 미국 국적의 구호 식량 화물선 머스크 앨라배마호 점거 및 인질 납치 행위이며 이에 대응한 미군의 무력 행사로 해결되었다.2. 머스크 앨라배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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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1일 케냐 몸바사 항의 머스크 앨라배마호 |
머스크 앨라배마호(MV Maersk Alabama)는 1998년 대만 지룽시 대만국제조선(CSBC) 사에서 건조된 컨테이너선이다. 본래 A.P. 몰러-머스크(A.P. Møller – Mærsk A/S) 본사가 있는 덴마크 국적으로 등록되었다가 2004년에 싣지도 않은 고가 선적물에 대한 배상 고소로 인해 쿠웨이트에 억류된 후 계열사인 머스크 라인 본사가 있는 미국 국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활동 범위가 케냐와 오만 사이의 인도양이어서 그런지 2011년까지 나포 시도를 다섯 번씩이나 당했을 정도로 소말리아 해적과의 악연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2014년에는 네이비 씰 출신 보안요원 두 명이 내부에서 음주 중 헤로인 주사에 따른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6년부터는 소유권이 엘리먼트 쉽매니지먼트(Element Shipmanagement SA) 사로 이전되면서 타이그라(MV Tygr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화물 운송 업무를 계속 이어 나가고 있다.
3.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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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해적의 모선으로 쓰인 원파 161호 |
2009년 4월 8일 소말리아 및 우간다를 지원하기 위한 유엔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의 구호물자가 담긴 17,000톤의 컨테이너 300개를 싣고 케냐의 몸바사를 향하던 머스크 앨라배마 호로 원파 161호(穩發161號)[1] 출처의 소형 보트가 다가왔다.
나포 목적으로 접근하던 소말리아 해적임을 인지한 머스크 앨라배마호의 리처드 필립스 선장과 선원들은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를 막으려고 했다. 일단 선교 쪽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 선원 14명을 기관실로 대피시키고 비상용 조명탄을 직사화기로 쓰거나 미리 설치한 물대포를 사방에 틀면서 진로 방향을 이리저리 흔들었으나 승선을 저지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더이상 따돌릴 수 없음을 직감한 필립스 선장과 선교 선원들은 대피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소말리아 해적 4명에게 인질로 잡히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전에 머스크 앨라배마호의 시스템과 직결되는 주 전원을 내렸기 때문에[2] 선박 통제권마저 넘기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항행이 멈추자 당황한 해적들은 기관실로 내려가 다시 가동시키려고 했는데 이들을 어둠 속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마이크 페리 기관장과 소말리아인 승무원[3]을 비롯한 선원들이 우두머리인 압두왈리 무세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선원들은 필립스 선장과 그들이 붙잡은 수괴를 교환하려고 했지만, 선원들이 수괴를 풀어준 데 비해 해적들은 필립스 선장을 풀어주는 걸 거부했다. 필립스는 해적들을 구명정[4]으로 안내했고 작동법을 알려줬지만 해적들은 필립스를 납치해 배를 탈출했다. 다음 날인 2009년 4월 8일 미합중국 해군 소속의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인 USS 베인브리지 함이 아덴만에서 인질 구출을 위해 출발했고 9일에 머스크 앨러배마 호와 접촉했다.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무장한 대원들의 에스코트를 받고 새로운 선장인 1등 항해사 래리 D. 에어셰임의 지휘를 받아 몸바사로 출발했다. 필립스는 9일 전에 직무대행자로 에어셰임을 지정해 뒀다. CNN과 폭스뉴스는 이 사건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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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기 스캔이글 | 스캔이글로 포착된 구명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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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L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구명정의 모습 |
구명정에는 식량과 물이 있었지만 머물 곳이 부족했고 화장실이나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USS 베인브리지는 스캔이글로 구명정을 확인했고 다른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USS 핼리버튼은 헬리콥터를 함상에 탑재했다. 두 군함은 해적들의 총기가 닿지 않는 수백 야드 뒤에서 따라갔다. 정찰기가 항공궤적을 파악했다. 두 배 사이에 무선통신이 이뤄졌다. 그 외에 해적에게 납치당한 4척의 외국 배가 구명정을 따라왔는데 중국, 독일, 러시아, 필리핀, 투발루, 인도네시아, 대만 등의 국적자 54명이 납치당했다.
2009년 4월 10일에 필립스는 배를 탈출하려고 했지만 해적들이 사격하자 다시 잡혔다. 해적들은 미군이 필립스 선장에게 지시할까 봐 겁이 나 바다에 휴대폰을 버렸고 미 해군은 해적들에게 쌍방 교신이 가능한 무전기를 줬다.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USS 박서도 접근했다. 해적들의 전략은 그들의 동료와 합류하는 것이었는데 동료들은 다른 국적의 선박을 납치한 상태였으며 해적들은 필립스를 숨기기 위해 소말리아로 가려고 했다. 협상은 FBI 협상가에 의해 USS 베인브리지의 함장과 해적 사이에서 진행됐다. 납치범들은 위성전화로 다른 해적선과 연락하기도 했다. 한편 협상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4월 10일 미 해군의 최정예 대테러부대 DEVGRU 대원들이 미국 본토에서 현지로 급파되었다. 상황이 매우 급박했기 때문에 DEVGRU 대원들은 수송기에서 해상으로 HALO 강하를 한 후 USS 박서 함에 승선하여 작전을 대기하였다.[5]
그러나 협상은 해적들이 토요일 일출 후에 USS 핼리버튼에 사격하면서 중단됐다. 미군은 반격하지 않았고 사태가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고 우연히 해적 중 하나가 구명정의 해치 쪽에 사격했다.
해적 중 하나는 위성전화로 로이터 통신에게 자신들은 안전하며 미국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공격받을 때 방어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필립스의 가족은 상황의 해결을 기다리며 버몬트에 모였다.
2009년 4월 11일 토요일 머스크 앨러배마 호는 몸바사에 도착했다. FBI[6]는 배를 억류하고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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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을 준비하는 DEVGRU 대원들 |
USS 베인브리지의 함장이었던 프랭크 캐스텔러노(Francis Xavier Castellano) 대령[7]은 바람이 거세서 해적들이 흥분했고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고 밝혔다. 4월 12일 일요일에 DEVGRU 대원들이 Mk.11 Mod.0 반자동 저격소총으로 해적 셋을 저격, 사살하면서 필립스를 무사히 구출하였다. 캐스텔러노 대령은 상급자의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필립스의 생명이 위험했기에 발포했다고 밝혔는데 해적들이 AK-47로 필립스의 등을 겨눴기 때문이었다.
DEVGRU 저격수는 USS 베인브리지의 고물(함미)에서 저격했고 모두 머리를 맞췄다. 당시 USS 베인브리지는 구명정과 25~30야드(22.9~27.4 m) 떨어진 수준이었다. 죽은 해적들은 알리 아덴 엘미, 성이 하막으로 알려진 자,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자였다. 압두왈리 무세는 작전 직전에 필립스의 석방을 두고 USS 베인브리지에 협상하려고 승선했다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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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해군 USS 박서(LHD-4) 함의 승조원들에게 구출받는 필립스 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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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베인브리지(DDG-96)에 인양되는 구명정 |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에 따르면 4명 모두 17세에서 19세 사이였다. 죽은 세 해적의 시체는 2009년 4월 마지막 주에 소말리아의 밝혀지지 않은 수습자에게 미 해군이 인도했다.
생존한 해적 압두왈리 무세는 USS 박서에 구금됐고 미국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뉴욕의 법원에서 검사는 해적과 완력으로 배를 억류하려고 한 음모, 인질 납치 등의 죄를 주장했다. 무세의 변호사는 무세가 청소년[8]이었음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무세가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으로 보았다. 무세는 해적죄와 기타 여죄로 2011년 2월 17일 33년 9개월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에 리처드 필립스는 이 일을 책으로 썼다. 선장의 의무(A Captain's Duty)란 책으로 영화의 원작이 되었으며 이 작전에 참가했던 DEVGRU 대원 맷 비소넷은 후일 오사마 빈 라덴 을 사살한 넵튠 스피어 작전에 참가한 후 마크 오언이란 필명으로 빈 라덴 사살 작전을 다룬 회고록 노 이지 데이(No easy day)를 집필하면서 한 챕터를 필립스 선장 구출 작전에 할애하였다.
4. 기타
유사한 작전으로 아덴만 여명 작전이 있다.5. 매체
-
메달 오브 아너: 워파이터 - 미션 중 관련 미션이 있다.
[1]
사진에도 '원파161호(穩發壹陸壹號)'라고
갖은자로 적혀있다. 2009년 4월 6일
세이셸 부근의 해상에서 납치된
대만 국적의
원양어선이며 2010년 2월 11일에야 몸값 협상을 완료하고 본국에 송환될 수 있었다.
[2]
이는
해적을 상대로 할 때 기본적인 메뉴얼이다. 물론 해적들도 진화할수록 어느 정도
선박 운용법을 익힐 수도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고급 기술을 배웠다면 그냥 해외
선박 회사에 취업해 제대로 된 급여를 받고 안정적으로 일하지 해적질 따위를 하진 않는다.
소말리아/해적 항목 참고.
[3]
이 승무원이 해적 두목인 무세를 잡을 때 가장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칼로 무세의 팔을 찔러 무세가 비명을 지르자 "다음에는 목에 칼이 박힐 테니 그땐 절규도 못 할 거다!" 라고 차갑게 말하여 기선을 제압했다고 한다. 그는 이 활약으로 업체로부터 따로 위로금 1만 달러를 받았으며 더불어 무세의 재판에서 통역으로도 일했다.
[4]
Life Boat (구명보트)
[5]
이 작전에 참가한 전직 DEVGRU 대원 맷 비소넷의 수기 노 이지 데이에 따르면 DEVGRU 대원 이외에
공군 기술통신병 등 3명이 추가로 동행했다고 한다.
[6]
해상 범죄 수사는 FBI의 영역이다. 현행범 체포는
미합중국 해군이나
미합중국 해안경비대도 할 수 있으나 상황 종료 후 FBI에게 인계한다.
[7]
당시에는
중령.
[8]
15-16세라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무세는 범행 당시 18세였다고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