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3:23:51

무슬림 형제단

<colbgcolor=#339933><colcolor=#fff> 무슬림 형제단
جماعة الإخوان المسلمين | الإخوان المسلمون
[1]
Muslim Brother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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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1928년 3월 22일
설립자 하산 알 반나
총수 모하메드 바디
본부 이집트 카이로 (불법화 이전)[2]
불분명 (현재)[3]
당 색 녹색
이념 종교적 보수주의 ( 살라프주의)
반유대주의 · 반시오니즘
수니파 이슬람주의
반서방 · 반제국주의[4]
사회보수주의
반공주의
스펙트럼 우익[5] ~ 극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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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2.1. 이념과 행적2.2. 역사
2.2.1. 창당부터 아랍의 봄까지2.2.2. 집권 및 정교일치화 강행2.2.3. 군부 쿠데타로 몰락
3. 아랍 군부 정권과의 갈등4. 대외관계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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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범 아랍권에 퍼져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 조직, 정당. 무려 500만~1,000만 명에 이르는 수[7]의 회원을 가진 세계 최대이자 가장 역사가 오래된 이슬람주의 단체이며 사우디아라비아 와하브파와 함께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의 모태라고 볼 수도 있다.

2018년 기준으로 러시아,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이집트에서는 이 단체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합법-불법 조직을 오가다가 2012년에 집권까지 했으나 무리하게 샤리아를 강행하려다가 세속주의 세력의 큰 반발을 불렀고, 2013년에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군부가 나서 쿠데타를 벌여 집권당에서 내려오면서 불법조직이 되었다.

2.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2.1. 이념과 행적

무슬림 형제단의 첫번째 목표는 이슬람의 샤리아를 국가와 사회의 모든 방면의 기초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주로 아랍국가들인 이슬람 국가들을 통합하고, 이들을 외부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8]

무슬림 형제단의 제1목표는 활동 국가 사회 정치에 이슬람 샤리아를 기반한 신정국가를 건설하는 것이고, 제2목표는 범이슬람권, 특히 아랍 무슬림권을 통합하는 것이며, 외세(서구) 제국주의에서 이슬람권을 해방함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일단 이들은 민주주의 매커니즘과 이슬람의 권위를 동시에 내걸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를 견지하면서 다수의 여론의 지지를 받고 선거로 집권하여 궁극적으로 샤리아의 전면적인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슬람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 형태로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평화적 정권 교체 등을 주장한다.

폭력혁명이나 테러와 같은 극단적 방법[9]보다는 선거를 통한 집권전략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비이슬람권에서는 온건 이슬람 민주주의 정당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많으나 이들은 궁극적으로 샤리아 법에 의해 통치되는 정교일치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삼는다. 게다가 이들 조직은 전체적으로 테러를 부인하고 있지만, 하부조직은 극단주의자들이 많은 데다 극단적인 사상 때문에 끊임없이 비이슬람 종교에 대한 차별[10], 성차별적 요소[11]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이 창설 이래 수십년만에 정계에 집권한 이집트에서의 2011년~2013년간의 통치를 보면[12] 소위 '온건 이슬람 정당'이라고 언론플레이를 하던 이들의 본모습을 알 수 있는데 무함마드 무르시를 필두로 권력을 잡자마자 샤리아를 이집트 헌법보다 우위에 두었고 샤리아를 기준으로 삼아 자유주의 탄압/ 언론탄압/여성차별/현대식 교육 제재/타 종교 차별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정작 아랍의 봄을 일으킨 경제적 문제는 해결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해외자본 추방, 이슬람 문화가 아닌 타 학문과 기술, 종교에 대한 탄압 등을 벌이지를 않나, 사회 문제 해결 의지는 기도만 열심히 하면 다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방치하는 등 시대의 변화를 거슬러 오르는 종교 근본주의 정책만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계속 이야기해 왔으면서 소위 '파라오 헌법'이라고 조롱받는 독재에 가까운 권위주의 헌법을 통과시키는 등 자세히 보면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숙주로 삼아 이슬람 신정 국가를 설립한다는 게 주 전략인 이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할 리가 없다.

게다가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과 공존해 왔고 2011 이집트 혁명에서도 이슬람 세력과 연대하고 함께 시위에 나서 호스니 무바라크를 끌어내리는데 공을 세운 콥트 정교회 등 이집트 토착 기독교인들을 뒤통수쳤다. 처음에는 그나마 콥트 정교회를 보호하는 법안을 발의하려고 하는 등 일말의 존중은 있었던 듯 보이지만 알누르당 같은 살라피즘 계열 극단주의자들의 표심을 의식해 기독교에 대한 탄압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보 때문에 이집트의 세속적인 국민들[13]과 기독교, 특히 아랍 민족주의, 세속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군부의 큰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일단 민주주의를 좋게 보는 서구권에서조차 이들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질려 군부 쿠테타를 지지할 정도로 반감을 사게 되었다. 군부에서 축출당한 후에도 평화적으로 이념을 추구한다는 당 강령이 무색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한 폭력적 테러와 박해를 수없이 저질러 이집트에서의 이미지가 그야말로 안드로메다급으로 추락해 버렸다.

결론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이용하려 들기만 할 뿐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관과 어긋나는 반인권적 이슬람 신정국가를 건설하려는 전체주의적 목표를 가진 정당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사실 이런 대중주의-포퓰리즘적 전략으로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합법적으로 집권하려는 극단주의 세력이 상당히 많다.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겠고, 인도 인도 인민당도 힌두교 근본주의, 극우 성향 정당으로써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이용해 집권한 극단주의 세력이다. 튀르키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도 보수적인 이슬람 세력을 기반으로 선거에서 승리하며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는데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에 특히 우호적이었고 튀르키예는 이집트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서 무슬림 형제단 정부가 전복되자 서방 내로남불 침묵하던 가운데 이집트 군부를 규탄한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 다만 인도는 민주주의 전통이 길기 때문에 모디가 폭주하고 있지는 않으며 튀르키예는 세속화가 거의 불가역적으로 진행되어서 에르도안의 종교화 정책은 잘 먹히지 않는 데다 이집트와 계속 으르렁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에르도안은 2021년에 이집트의 엘시시를 공격하는 TV 프로그램의 방영을을 모두 중지시켰다고 한다.

2.2. 역사

2.2.1. 창당부터 아랍의 봄까지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역사는 중동 이슬람 근본주의 부흥,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와의 싸움의 역사와 함께한다. 1928년 서구로부터의 독립과 이슬람 문화의 부흥을 내걸고 하산 알 반나(Hassan Al Banna, 1906 - 1949)가 이집트 국제도시 이스마일리아에서 결성하였다. 1940년대 이슬람주의 운동이 성장하면서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주변 여러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현재는 수많은 아랍 국가에서 폭넓게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인 하마스의 모체가 되었다.

원래 이 단체는 개별 무슬림에게 이슬람을 내면화할 것을 주장한 순수한 종교단체로서 정치단체는 아니었고, 테러단체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의 압박이 심해지자 급진화되었다.
아민 알후세이니가 어디를 가든 그 길에는 환영 인사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는 영웅이요, 인간의 기적이다. 젊은이들, 내각의 장관들, 부유한 자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이라크, 튀니지, 모로코, 트리폴리의 왕자들이 이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할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 이 영웅은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시오니즘과 맞서 싸웠다. 히틀러는 사라졌지만 아민 알 후세이니는 그의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 하산 알 반나
무슬림 형제단의 창건자 하산 알 반나는 원래 온건한 사람이었으나 팔레스타인에 계속 이주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이스라엘과 그 후견인인 영국 제국주의자들에 반발하여 점점 극단화되었다. 그리하여 나치가 영국의 세력을 이집트에서 몰아낼 요량으로 그에게 접근하자 나치에 호의적이 되었다. 하산 알 반나의 나치즘에 대한 호감은 나의 지하드라는 번역명으로 나의 투쟁을 번역하는 등 꽤 색채가 선명했으며 보스니아에서 한트샤르 사단을 창설하는 걸 돕는 등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아민 알후세이니를 찬양하는 말을 했다. 하산 알 반나는 실제로 히틀러 정권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활동비를 지원받아 조직 운영에 사용했고,나치당 선전매체의 애독자이자 배포자인 등 나치와 연대했다. #

이렇게 급진화되자 당시 이집트 왕국의 왕이었던 파루크 1세는 반나를 암살하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지만 이는 더 큰 후환을 불렀다. 반나 이후 이 당을 지휘하게 된 사이드 쿠틉은 한 술 더 뜬 원리주의 및 극단주의로 무장했고, 대외적으로는 폭력을 반대했던 반나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폭력마저 옹호했다.

1952년 왕정 타도에 참가하였으나 새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세속주의 정책을 내걸자 무슬림 형제단은 여기에 반발해 1952년 7월 26일 이집트 군부정권에게 샤리아를 이집트 국법으로 받아들이라는 협박문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묵살당했다. 뒤이어 1954년 수에즈 운하 반환을 둘러싼 영국과 이집트의 협정도 이교도와의 협력이라는 이유로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더 나아가 무슬림 형제단은 군부 인사 암살 및 정권 장악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사이드 쿠틉 및 여러 무슬림 형제단 인사들은 체포되었다.

이집트 군부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의 해산을 선포하고 1954년 4000명의 단원들을 체포하여 투옥했다. 사이드 쿠틉은 일단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 뒤 건강 악화로 인해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군부에 의해 다시 투옥되어 처형되었다. 이렇게 탄압을 받자 이후 이집트 군부와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는데 나세르가 사망하고 1970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취임하자 조직을 재편하여 테러 위주의 극단주의를 배제하고 국회를 통한 정치 활동을 시도하는 등 합법적인 이슬람주의 운동으로 갈아탔다. 이들은 테러리즘을 포기하고 선거로 집권하는 것으로 전술을 바꾸었을 뿐, 극단주의적 사상과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 목표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나중에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한 것도 무슬림 형제단의 과격파들이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대중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도모하였는데 종교 활동은 물론, 의료, 교육, 상호부조 등의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실시하였으며, 이러한 빈곤층 구제 활동을 통하여 굳건한 지지를 모으게 되었고, 이슬람주의 조직이나 단체들 중에서 가장 지지 기반과 조직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로 이어지는 군부정권 수십년 동안 끊임없이 탄압받으면서도 이러한 사회활동을 통해서 굳건한 대중적 기반을 확립했고 결국 아랍의 봄으로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자 이집트 최대의 정파로 떠올랐다.

2010년 말부터 2011년에 걸쳐서 일어난 아랍의 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2011 이집트 혁명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정당 "자유공정당"을 결성하여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수로 취임하였다. 자유공정당은 의회 선거에서 약진하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르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2.2.2. 집권 및 정교일치화 강행

무르시의 집권으로 무슬림 형제단은 꿈에도 그리던 집권에 성공했으나 그들의 이집트 통치는 이슬람 근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과격하고 성급한 시도 때문에 1년만에 세속주의적 국민들의 반발 및 군부 쿠데타로 파탄을 맞이했다.

무슬림 형제단에 열광했던 이집트 국민들은 이런 행태에 환멸을 느꼈으며 1년만에 형제단에 대한 지지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기사 다만, 이것이 이집트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보수화와 종교화가 강화되고 있어 형제단과 같은 조직이 좀 더 성향을 온건하게 바꿔서 부흥할 여지는 아직 적지 않다.
"국민들이 무슬림 형제단에 반대하여 일어나자, 그들은 적어도 67개 이상의 (콥트 기독교) 성당을 불태웠어요. 성당에 대한 강도질도 판을 쳤죠. 그들은 나라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건 이집트를 혼돈으로 몰아넣는 것이죠."

- 이집트 콥트 정교회 신자인 모합. 2017년 독일 언론인 DW와의 인터뷰 증언.

내정 측면에서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무슬림 형제단이 야권 가운데서는 가장 큰 세력으로 상당한 시민 운동 경험이 있었지만 행정 경험은 부족한 인사들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능력보다는 형제단에 충성하는 인물들만 발탁하다 보니 친목질 논란이 일어났고, 형제단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국가 문제를 해결할 인재는 세속주의자라는 이유로 절대 등용하지 않고 이슬람 꼴통 인사들만 주요 요직에 배치하는 등 근본주의적인 친목질과 바보짓을 일삼았고, 당연히 하루종일 쿠란만 파는 인간들이 세속 행정에 대해 아는 게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업무 능력 하락과 현실 인식 부족, 다양한 혼란으로 이어졌다. 즉, 갑작스런 혁명으로 집권한 탓에 전형적인 '준비되지 않은 정권'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다.

게다가 이집트의 군부 독재는 이집트에서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형제단의 급격한 이슬람 극단주의 움직임은 세속주의 야권 세력들과 군부에서 "이러다 이집트가 근본주의 신정국가가 되어 버리는 것 아니냐" 같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민주화를 주도한 세속주의 세력들이 성급한 민주화를 포기하고 다시 과거의 앙숙이었던 군부와 결탁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무슬림 형제단 내부도 분열되면서 광신도 극단주의자들이 내부의 실권을 장악하여 악화되는 여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군부의 재집권과 몰락 이후에는 가까운 시리아 이라크에서 테러조직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발호가 무슬림 형제단의 이미지도 함께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 기사 예비역 장성으로 보안전문가인 사예드 알 가브리는 중국의 신화통신에 "다수의 사람들이 IS와 무슬림 형제단 및 기타의 살라피스트 성전주의자들을 동류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IS의 테러 활동으로 무슬림 형제단의 세력이 위축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무슬림 형제단에 동조했던 일부 국민들도 IS가 이슬람의 이미지를 어떻게 왜곡시켰는가를 깨닫자, 등을 돌렸다."고 말했다. 압델 파타 엘 시시 현 이집트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 테러와의 전쟁은 IS에 국한돼서는 안 된다"면서 IS와 무슬림 형제단을 묶어 "근본주의적 어두움"의 세력이라고 비판하며 무슬림 형제단을 IS와 연결시키려 하였다. 엘 시시 장군의 쿠데타로 축출되었을 당시 여당이었던 형제단의 주요 구성원들에게 있는 죄 없는 죄를 다수 씌워 수백명에게 사형 선고를 때린[15] 이집트 군부의 가혹한 조치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은 서구나 이집트에서 어느 정도는 동정을 받고 있었지만, IS가 악명을 떨치자 무슬림 형제단도 이들과 똑같은 부류로 묶이면서[16] 동정의 시선이 증발했다. 심지어 이집트인들마저 무슬림 형제단을 이집트를 시리아 이라크처럼 지옥으로 만들 테러단체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집트에서 아랍의 봄이 발생한 원인은 이슬람권 국가에 만연해 있는 궁핍한 경제 문제와 심각한 실업 양극화 문제인데 무슬림 형제단은 이러한 경제에 대해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샤리아에 근거한 성차별, 콥트교 탄압 등 이슬람주의 정책 밀어붙이기와 외국 기업 추방 같은 경제를 살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일반 무슬림들도 반발하고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17] 이미 몰락이 예고되어 있었다.

2.2.3. 군부 쿠데타로 몰락

2013년 이집트 쿠데타으로 무르시는 대통령 권한을 잃고 이집트군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2013년 8월 14일, 카이로 동부의 라바아 알 아다위야 광장에서 쿠데타에 항의하던 무슬림 형제단원들을 이집트군이 학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희생자는 최소 594명[18]에서 최대 2600명이었다.[19]

2013년 12월 25일, 차량폭탄을 사용한 테러가 발생하여 이집트 임시 정권에게 '테러 조직'으로 지정되었다.

2014년, 무려 683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지도부에게 사형, 종신형이 수없이 겹쳐서 선고되었다. 지도부는 망명하여 외국을 전전하는 등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기사

무슬림 형제단에 우호적이던 카타르가 형제단 지도부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이집트로부터 송환 요구가 반복되고 사우디, UAE, 바레인 등에서 압력이 가중되자 결국 형제단은 재망명을 떠나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문민독재자인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들의 망명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기사

이집트의 정치평론가이며 중동정치연구소 소장인 암마르 알리 하산은 "IS의 출현으로 서방이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이집트의 신 정부(압델 파타 엘 시시)에 미국 주도의 대IS 연합전선에 참가하도록 요청함으로써 무슬림 형제단은 큰 손해를 보았다"고 진단했다.

결국 이 단체의 몰락으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무신론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이집트에서는 무슬림 형제단 회원들에게 법원이 종신형을 선고했다. #

2020년 8월에 지도자가 체포되었다. # 이집트 법원 9월 12일에 무슬림 형제단 회원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

3. 아랍 군부 정권과의 갈등

전술했듯 무슬림 형제단은 근본주의 세력임에도 대중주의 노선을 취하고 체제의 대응에 따라서는 합법적인 집권 노선을 취하기 때문에 종종 민주주의 정당으로 오해되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통한 집권만을 추구할 뿐 실제로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교일치, 신정주의를 추구한다. 교파가 다르기는 하지만 무슬림 형제단이 추구하는 체제는 이란식 체제라고 보면 된다. 이란도 제도 민주주의는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샤리아가 지배하는 모습을 띄는데 이들도 바로 이런 식의 체제를 원하고 있다. 다만 신학자들이 세속권력에 전면에 나서 세속 정치를 감독하는 이란과는 달리 무슬림 형제단의 창시자 반나는 국민 개개인의 이슬람적 각성 및 이런 이슬람화된 대중의 힘에 의한 이슬람 체제 수립을 지향했다.

이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근본주의 세력은 왕정으로 유지되는 걸프 지역의 모든 국가들과 이슬람이라는 같은 종교를 믿고 있음에도 적대적인 것도 모자라 종교 정치를 분리하려는 세속주의 지향의 아랍민족주의 국가들과도 상당한 마찰을 빚었다. 특히 아랍사회주의 정당들과 마찰이 잦았는데 무슬림 형제단은 포퓰리즘에 기반한 종교 정치 일체의 신정국가체제를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이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대통령제 정치체제를 가진 중동 국가들인데 그 필두인 이집트 군부 정권[20]은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사회주의( 나세르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친이스라엘적인 서방을 적대시하면서 반서방 정책을 폈음에도 무슬림 형제단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방 언론은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 민중봉기의 한 축이었던 무슬림 형제단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단순한 오판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단순한 오판이 아니라 의도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도 친서방적이었으나 인권문제 및 일부 마찰, 당시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권의 대외적 이미지였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가 겹쳐 결과적으로 무바라크 정권이 엎어지는 것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은 ISIS 수준의 막장은 아니었더라도[21] 집권 이후 콥트 정교회를 탄압하고 알누르당 같은 극단주의 집단의 행패를 방조하였고, 경제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이후 이집트에는 국제 사회의 방조와 국내의 여론에 따라 차악에 해당하는 군부 정권이 재집권하였다.

4. 대외관계

극단적 살라피스트들은 서구적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무슬림 형제단은 '반이슬람적' 요소가 많으며 순수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카타르를 제외한 걸프 왕정 국가들은 무슬림 형제단을 좋게 보지 않는다.
  • 시리아: 시리아의 무슬림 형제단은 알라위파 하페즈 알아사드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다만 아사드 정권을 비판하면 모두 무슬림 형제단 극단주의자로 매도하는 주장은 가려들을 필요가 있다. 일례로 무슬림 형제단의 극단화를 주도한 사이드 쿠틉을 비판했던 온건 성향의 이슬람 학자 셰이크 알 알바니는 상식적인 선에서 정권 비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모국이나 다름없던 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추방당했다.
  • 카타르: 무슬림 형제단의 강력한 지원자로 알려져 있다. # 이 때문에 2017년 6월 발생한 카타르 단교 사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여담으로 카타르는 국민 소득이 세계 최상위권인 부국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열악한 근로 환경에서 노예 취급하며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데 이는 이슬람 신정 국가가 건설되면 지상낙원이 건설될 것이라고 막연히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근거로도 지적된다.
  • 튀르키예: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 정권의 집권 이후 무슬림 형제단의 주요 후원국으로 알려져 있다. 2013년 이집트 쿠데타로 무슬림 형제단을 축출한 이집트 군부는 튀르키예와 외교관계를 격하한 적이 있었으며, 이에 튀르키예는 카타르와 동맹을 맺었다.
  • 팔레스타인 하마스: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떨어져 나와 1987년에 설립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무슬림 형제단과는 결별하여 독자노선을 걷고 있지만 서로간의 정치적 협력관계는 계속 굳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수단 공화국: 친 무슬림 형제단 성향 외에도 19세기 말 마흐디 운동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 리비아: 한국이 인정하는 GNA( 트리폴리 정부) 측이 무슬림 형제단과 손을 잡았다.
  • 사우디아라비아: 무슬림 형제단과의 관계가 현재 매우 좋지 않은 국가 중 하나. 2010년대 입법한 테러금지법으로 아예 활동을 모두 불법화시켰다. # 무슬림 형제단이 주도한 2011 이집트 혁명 당시 무바라크의 축출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무슬림 형제단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전복한 압델 파타 엘 시시의 쿠데타 역시 지지했다. # 2차 리비아 내전에서도 반무슬림 형제단 토브룩 정부를 지원했다.

5. 기타

무슬림 형제단은 개요 문단에서 서술했듯이 러시아, 시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에서 테러조직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세우는 가치관( 와하브파)이 무슬림 형제단보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우스운 일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국가에서 이슬람은 대단히 근본주의적이지만 동시에 관변 종교의 성격이 강해서 정권에 위협이 되면 근본주의 이슬람이나 다른 사상이나 다 때려잡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일종의 정치적 결정이다. 사우디 보수 성직자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비이슬람적 사상인 '민주주의'를 이슬람에 도입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단시한다는 명분을 대지만 실상은 이집트 아랍인에 대한 걸프 아랍인의 우월감이 더 크게 작용한다.[22] 극도로 보수적인 걸프 만 아랍 왕국들에서 합법적으로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도 걸프 만 왕가들에게 문제다. 한때 아랍 정치를 풍미한 바트당 등은 감히 세속주의를 주장하는 불순분자로 몰아 탄압할 수라도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 등의 이슬람 보수주의 정당들은 공화주의를 주장한다는 것 이외에는 똑같이 보수주의적인 왕가 입장에서 꼬투리를 잡기 어려워 아예 테러단체로 지정하고 전면 금지한다.

2019년에 무슬림 형제단 간부 한국 난민 신청을 하였는데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선 거부하였으나 법원이 이 결정을 취소하며 난민으로 인정해 논란이 되었다. # 법원이 난민으로 인정한 이유는 이집트로 돌아갈 경우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비민주적인 샤리아 강요, 타종교 및 신도 탄압, 외교공관 인질극 등 테러공격 자행을 일삼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대응을 일반적인 정치적 의견에 대한 박해와 동일시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한국에서 무슬림 형제단과 사이가 좋은 단체는 노동자 연대가 있다. 202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 이후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가 열렸는데, 노동자 연대가 결집시킨 이집트 난민 출신 인사들이 즉, 앞서 언급한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들이다.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집트 소설 중 “야쿠비안 빌딩”을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23] 소설 자체도 완성도가 높고 이슬람주의자에 대한 옹호도 비판도 아닌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묘사[24]로 국제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6. 관련 문서


[1] 자마아트 알이크완 알무슬리민 [2] 2013년 이집트 쿠데타로 정권을 독점한 군부가 직접 테러조직으로 규정하여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을 불법으로 지정하였다. 당시 군부의 수장은 현재도 정권을 독점 중인 압델 파타 엘 시시 대통령이다. [3] 현재도 하마스와 더불어 카타르,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고 있다. # # [4] K. Gani, Jasmine (21 October 2022). "Anti-colonial connectivity between Islamicate movements in the Middle East and South Asia: the Muslim Brotherhood and Jamati Islam". Post Colonial Studies. Routledge. 26: 55–76. [5] 우익 관련 출처: #, # [6] 극우 관련 출처: #, # [7] 대표적인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도 많아봐야 10만 단위 규모의 회원을 가질 뿐이다. [8] "firstly the introduction of the Islamic Sharia as "the basis for controlling the affairs of state and society" and secondly, working to unify "Islamic countries and states, mainly among the Arab states, and liberate them from foreign imperialism"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출처 : 영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무슬림 형제단 강령) [9] 사이드 쿠틉이 실질적인 지도자였을 때 폭력혁명으로 집권하려는 전략을 수립했다가 당 지도부 수십명이 내란음모 혐의로 처형당한 후 폭력혁명은 포기했고 반대급부로 합법화되어 제도권 내에서 집권하는 것으로 전략을 삼았다. [10] 일례로 무슬림 형제단이 잠시 집권했다 물러났던 이집트에서는 정당 고위 인사들이 정권이 실각했다는 이유로 토착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 공격을 선동하여 수없이 많은 콥트 정교회 성당과 신자들이 공격당하게 만들거나, 쿠란 소각으로 물의를 일으킨 미국인 목사 테리 존스에게 궐석으로 사형선고를 하지를 않나(!),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집트 여성징역 15년을 선고받는 등 도저히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는 심각한 인권탄압이 벌어졌다. [11] 2012년 외신 취재에 따르면 무슬림 형제단 계열~ 살라피즘에 치우친 단원들 중에서는 여성 정치인의 정계진출에 대해서도 용납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12] 참고로 이집트는 민주화 직후 선거 이전부터 세속주의 vs 원리주의의 갈등이 심했다. 무함마드 무르시의 대선 득표율은 51.1%로, 당시 2위를 기록했던 세속주의자 후보(48.9%)를 근소하게 앞섰다. [13] 2013년의 언론 보도를 보면 특히 카이로같은 대도시의 기득권층들이 무슬림 형제단을 정말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14] 참고로 이 집단은 그 악명 높다는 탈레반 알카에다가 등을 돌리고, 소말리아에서 활개치며 수시로 케냐에 테러 원정을 나가는 알샤바브조차 서로 무시하고 살자고 말할 정도의 악질 테러 단체다. [15] 실제로 재판 과정이 막장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세속 세력과 형제단이 같이 충돌해서 수십명이 죽었는데 형제단은 법을 FM대로 적용해서 사형을 수십건씩 때리는 반면 세속 세력은 주동자 몇 명 빼고는 적당히 몇 년 가둬두는 불공평한 형 집행도 이뤄지고 있다. [16] 묶인다는 표현을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했듯 무르시가 집권하고 한 일들을 보면 이들이라고 전혀 나을 것도 없다. 걸프 아랍 왕정 국가에서조차 하지 않는 여성할례를 대내적으로는 미풍양속이라고 권장하던 집단이다. [17] 어느 정도로 이집트인들의 반감이 심했냐면 이미 군부 쿠데타 직전에도 시위만으로 정권을 갈아엎을 기세로 무슬림 형제단을 비난하는 거대한 민중 시위가 연일 벌어졌을 지경이다. [18] 이집트 보건부 집계 [19] 무슬림 형제단 자체 집계 [20] 집권 중인 엘 시시 및 아랍의 봄 당시 집권했던 호스니 무바라크 제외. [21] 엄밀히 말하자면 ISIS나 보코 하람이 유별날 정도의 근본주의 집단인 것에 가깝다. [22] 이를테면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였다가 무슬림 형제단에도 불만을 품고 분리해나온 하마스에 대해 싫은 소리 하는 사우디인은 드물다. 그냥 이집트인이라서 싫어한다 보면 된다 [23] 해당 소설은 2000년대에 아랍권에서 가장 인기 있었으며 훗날의 아랍의 봄을 예언했다는 평을 받는다. [24] 무슬림 형제단보다는 부패한 이집트 군부 때문에 인재들이 무슬림 형제단으로 빠져 “소모당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시점. [25] 무슬림 형제단에 우호적인 관영 선전매체 알 자지라를 왕실이 후원하고 있다. 아랍의 봄 당시에도 세계 곳곳의 무슬림 형제단 계열 반군과 단체에게 막대한 자금과 살상무기를 제공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