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사망자별 항공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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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9.11 테러와 아프리칸 항공 추락 사고는 사고/테러의 중심 대상이 항공기가 아니었으며 항공기의 탑승자 수보다 건물과 지상의 사망자 수가 더 많았으므로 틀에서 제외함. | ||||||
<rowcolor=#ffffff> 순위 | 이름 | 사고 기종 | 사망자 수 | 사고 분류/원인 | 발생일 및 위치 | 비고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1 | 테네리페 참사 |
보잉 747-121팬암 보잉 747-206BKLM |
583명 | 지상 충돌 / 조종사 과실 |
1977년
3월 27일 [[스페인| |
항공기 사고 사망자 수 1위 | |
2 |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 보잉 747SR-46 | 520명 | 벌크헤드 폭발 / 정비 불량 |
1985년
8월 12일 [[일본| |
단일 항공기 사고 사망자 수 1위 | |
3 | 뉴델리 상공 공중 충돌 사고 |
보잉 747-168B사우디아 일류신 Il-76TD카자흐스탄 |
349명 | 공중 충돌 / 조종사 과실 |
1996년
11월 12일 [[인도| |
공중충돌 사고 사망자수 1위 | |
4 |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 맥도넬 더글라스 DC-10-10 | 346명 | 화물칸 도어 폭발 / 기체 결함 |
1974년
3월 3일 [[프랑스| |
DC-10기종 사망자수 1위 | |
5 |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 | 보잉 747-237B | 329명 | 폭탄 테러 |
1985년
6월 23일 [[아일랜드| |
||
6 | 사우디아 항공 163편 화재 사고 | 록히드 L-1011-200 | 301명 | 기내 화재 |
1980년
8월 19일 [[사우디아라비아| |
불시착 후 항공기 전소, L-1011 기종 사망자수 1위 | |
7 |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 | 보잉 777-2H6/ER | 298명 | 민항기 오인 격추 |
2014년
7월 17일 [[우크라이나| |
보잉 777기종 사망자수 1위 | |
8 | 이란항공 655편 격추 사건 | 에어버스 A300B2-203 | 290명 | 민항기 오인 격추 |
1988년
7월 3일 [[이란| |
A300기종 사망자수 1위 | |
9 | 이란 일류신 Il-76 추락 사고 | 일류신 Il-76MD | 275명 | 불명 |
2003년
2월 19일 [[이란| |
사고 원인이 규명되지 않음, Il-76기종 사망자수 1위 | |
10 |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 | 맥도넬 더글라스 DC-10-10 |
271명탑승객 2명지상 |
엔진 이탈 / 정비 불량 |
1979년
5월 25일 [[미국| |
||
11 |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 | 보잉 747-121 |
259명탑승객 11명지상 |
폭탄 테러 |
1988년
12월 21일 [[영국| |
||
12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보잉 747-230B | 269명 | 격추 / 조종사 과실 |
1983년
9월 1일 [[소련| |
대한민국 항공사고 사망자 수 1위 | |
13 | 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 | 에어버스 A300-605R |
260명탑승객 5명지상 |
수직꼬리날개 이탈 / 비행규정 미비, 조종사 과실, 기체 결함 |
2001년
11월 12일 [[미국| |
||
14 |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 | 에어버스 A300B4-622R | 264명 | 실속 / 조종사 과실 |
1994년
4월 26일 [[일본| |
||
15 | 나이지리아 항공 2120편 추락 사고 | 맥도넬 더글라스 DC-8-61 | 261명 | 공중 폭발 / 정비 불량 |
1991년
7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
DC-8기종 사망자수 1위 | |
16(공동) |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 맥도넬 더글라스 DC-10-30 | 257명 | CFIT / 조종사 과실 |
1979년
11월 28일 [[남극| |
화이트아웃으로 인한 추락 | |
16(공동) | 2018년 알제리 공군 IL-76 추락 사고 | 일류신 Il-76 | 257명 | 이륙 직후 추락 |
2018년
4월 11일 [[알제리| |
||
17 |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 사고 | 맥도넬 더글라스 DC-8-63 | 256명 | 실속 / 날개 결빙, 과적, 조종사 과실 |
1985년
12월 12일 [[캐나다| |
||
18 |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실종 사건 | 보잉 777-2H6/ER | 239명 | 불명 |
2014년
3월 8일 인도양 해상(추정) |
항공기 실종으로 사고 원인이 규명되지 않음 | |
19 |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 152편 추락 사고 | 에어버스 A300B4-220 | 234명 | CFIT / 조종사 과실 |
1997년
9월 26일 [[인도네시아| |
||
20 |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 | 보잉 747-131 | 230명 | 공중 폭발 / 기체 결함 |
1996년
7월 17일 [[미국| |
||
21 |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 | 맥도넬 더글라스 MD-11 | 229명 | 기내 화재 / 기체 결함 |
1998년
9월 2일 [[캐나다| |
MD-11기종 사망자수 1위 | |
22(공동) |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 보잉 747-3B5 | 228명 | CFIT / 악천후, 조종사 과실, 공항 시설 낙후 |
1997년
8월 6일 [[괌| |
||
22(공동) |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 | 에어버스 A330-203 | 228명 | 실속 / 조종사 과실, 기체 결함 |
2009년
6월 1일 [[브라질| |
A330기종 사망자수 1위 | |
23 |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 | 보잉 747-209B | 225명 | 공중분해 / 정비 불량 |
2002년
5월 25일 [[대만| |
||
24 | 코갈림아비아 항공 9268편 테러 사건 | 에어버스 A321-231 | 224명 | 폭탄 테러 |
2015년
10월 31일 [[이집트| |
A320 패밀리기종 사망자수 1위 | |
25 | 라우다 항공 004편 추락 사고 | 보잉 767-3Z9(ER) | 223명 | 실속 / 기체 결함 |
1991년
5월 26일 [[태국| |
보잉 767기종 사망자수 1위 | |
26 |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 | 보잉 767-366/ER | 217명 | 자살 비행 |
1999년
10월 31일 [[미국| |
부기장의 고의 추락 | |
27 | 에어 인디아 855편 추락 사고 | 보잉 747-237B | 213명 | 실속 / 기체 결함, 조종사 과실 |
1978년
1월 1일 [[인도| |
||
28 | 중화항공 676편 추락 사고 | 에어버스 A300B4-622R |
196명탑승객 7명지상 |
CFIT / 조종사 과실 |
1998년
2월 16일 [[대만| |
||
29 | 아에로플로트 7425편 추락 사고 | 투폴레프 Tu-154B-2 | 200명 | 실속 / 조종사 과실 |
1985년
7월 10일 [[소련| |
Tu-154기종 사망자수 1위 | |
30 | TAM 3054편 활주로 이탈 사고 | 에어버스 A320-233 |
187명탑승객 12명지상 |
활주로 이탈 / 조종사 과실, 활주로 배수 문제 |
2007년
7월 17일 [[브라질| |
활주로 오버런으로 인해 건물과 충돌 | |
31(공동) | 라이온 에어 610편 추락 사고 | 보잉 737 MAX 8 | 189명 | 설계 결함, 운항 매뉴얼 교육부족, 정비불량 |
2018년
10월 29일 [[인도네시아| |
보잉 737기종 사망자수 1위 | |
31(공동) | 버겐에어 301편 추락 사고 | 보잉 757-225 | 189명 | 조종사 과실, 정비 실수 |
1996년
2월 3일 [[도미니카 공화국| 북동쪽 16km 지점 부근 |
보잉 757기종 사망자수 1위 | |
32 | 1975년 로얄 에어 모로코 보잉 707-321C 추락 사고 | 보잉 707-321C | 188명 | CFIT, 조종사 과실 |
[[모로코| |
보잉 707기종 사망자수 1위 | |
33 | LOT 5055편 추락 사고 | 일류신 Il-62M | 183명 | 제조 결함으로 인한 엔진 고장 |
[[폴란드| |
Il-62기종 사망자수 1위 | |
34 | 아비앙카 항공 011편 추락 사고 | 보잉 747-283B | 181명 | 조종사 과실 |
[[스페인| |
||
35 | 드니프로제르진시크 상공 공중충돌 사고 |
투폴레프 Tu-134A아에로플로트 몰도바 투폴레프 Tu-134AK아에로플로트 |
178명 | 공중충돌 |
[[소련| |
||
36(공동) | 우크라이나 국제항공 752편 격추 사건 | 보잉 737-8KV(WL) | 176명 | 민항기 격추 |
[[이란| |
||
36(공동) | 수리남 항공 764편 추락 사고 | 맥도넬 더글라스 DC-8-62 | 176명 | 조종사 과실 |
[[수리남| |
||
36(공동) | 자그레브 상공 공중충돌 사고 |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3B영국항공 멕도넬 더글라스 DC-9-32이넥스 아드리아 항공 |
176명 | 공중충돌 |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
||
36(공동) | 나이지리아 항공 보잉 707-3D3C 추락 사고 | 보잉 707-3D3C | 176명 | 기어 탈락/악천후 |
[[나이지리아| |
||
37(공동) | 풀코보 항공 612편 추락 사고 | 투폴레프 Tu-154M | 170명 | 조종사 과실, 실속 |
[[우크라이나| |
||
37(공동) | UTA 772편 폭파 사건 | 멕도넬 더글라스 DC-10-30 | 170명 | 폭탄 테러 |
[[차드| |
||
38 | 케냐항공 431편 추락 사고 | 에어버스 A310-304 | 169명 | 조종사 과실 |
[[코트디부아르| |
||
39 | 카스피안 항공 7908편 추락 사고 | 투폴레프 Tu-154M | 168명 | 엔진 고장 |
[[이란| |
||
40(공동) | 파키스탄 국제항공 268편 추락 사고 | 에어버스 A300B4-203 | 167명 | CFIT |
[[네팔| |
||
40(공동) | 멕시카나 항공 940편 추락 사고 | 보잉 727-264 | 167명 | 기내 화재 |
[[멕시코| |
보잉 727기종 사망자수 1위 |
대한항공의 보잉 747 3년 연속 폐기처분 사고 | ||
1997년 | 1998년 | 1999년 |
KAL801 | KAL8702 | KAL8509 |
HL7468 | HL7496 | HL7451 |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명칭 | Korean Airlines Flight 801 crash |
발생일 | 1997년 8월 6일 |
유형 | CFIT, 악천후, 조종사 과실, 공항 시설 낙후 |
발생 위치 |
[[틀:국기| ]][[틀:국기| ]][[괌| ]], 니미츠 힐 |
기종 | Boeing 747-3B5 |
운영사 | 대한항공 |
기체 등록번호 | HL7468 |
출발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서울특별시 김포국제공항 |
도착예정지 |
[[틀:국기| ]][[틀:국기| ]][[괌| ]]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 |
탑승인원 | 승객: 237명 |
승무원: 17명 | |
사망자 | 승객: 214명 |
승무원: 14명 | |
부상자 | 승객: 22명[1] |
승무원: 3명 | |
생존자 | 승객: 23명 |
승무원: 3명[2] |
|
사고 12일 전인 1997년 7월 25일, 오카야마 공항에서 촬영된 사고기 |
|
추락 사고 후 사고기의 잔해 |
[clearfix]
1. 개요
1997년 8월 6일 오전 1시 43분경(현지 시각) 서울 김포발[3] 대한항공 801편, 테일넘버 HL7468이 미국령 괌의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으로의 착륙을 위해 접근하던 중 추락해 승객과 승무원 총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항공사고이다. 더하여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다 인명피해를 기록한 사건이 되었다. 희생자와 관련해선 아래 내용 참고.
이 사고는 대한항공 창립 사상 사망 사고 2위를 기록하였으며(1위는 007편) 더불어 대한민국의 단일 항공기 사고 2위이다. 세계 항공 사고 순위로는 공동 22위(다른 한 사고는 AF447)이며 또한 보잉 747-300의 유일한 사망 사고이다.[4] 이 사고는 대한항공 소속 항공기가 마지막으로 일반인 탑승객 사망사고를 낸 사고[5]이기도 하다.
세계 항공사고 역사를 통틀어봐도 매우 특이한 유형의 사고이다. 공항으로부터 거의 5km나 떨어진 곳에서 기장을 비롯한 항공승무원 3명이 집단적인 착각을 일으켜 자신들이 공항에 착륙 직전이라고 믿었던, 그리고 훈련받은대로라면 사고 훨씬 이전에 복행(go around)을 했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않았던, 최저고도(minimum) 경보가 나왔음에도 무려 6~7초 가량을 더 하강했던,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여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 사고로 인해 안전 기준이 미달되어 대한항공은 본래 가입하려 했던 항공 동맹인 스타얼라이언스로부터 가입을 거절당하고 말았다.[6] 하지만 2000년에 델타항공, 에어 프랑스, 아에로멕시코와 함께 스카이팀을 새로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7]
2. 기체 정보
|
1984년 12월 17일 도입 당시 영상. 딱 2분쯤에 착륙하고 택싱 하는 장면에 도입식, 기내 모습[8]까지 촬영되어 있는 귀한 영상이다. |
1980년대 어느 날 김포국제공항에서 |
1985년에 방영된 대한항공의 광고 초반부터 사고기의 비행 장면이 나오며 'B747-300(SUD) 1번기 서울 - L.A간 논스탑 운항'이라는 문구도 나온다.[10] |
일등석을 메인덱 기수에 배치하였고, 그 뒤에 L2까지 프레스티지 클래스를 뒀다. 어퍼덱은 '이그제큐티브 서비스 객실'로 운영되었다.
만약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 기체는 2000년대 초반까지 운항하다가 HL7469와 비슷한 시기에 퇴역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3. 탑승객
해당 사고기에는 승객 237명, 승무원 17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탑승객은 모두 4개의 국적으로 이루어졌다.국적 | 인원 수 | 비고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235명 | 승객 218명,승무원 17명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13명[13]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5명 | |
[[뉴질랜드| ]][[틀:국기| ]][[틀:국기| ]] |
1명[14] | |
총 인원 | 254명 |
3.1. 사망자 국적
국적 | 인원 수 | 비고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213명[15] | 승객 199명,승무원 14명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10명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4명 | |
총 인원 | 227명 |
4. 사고의 배경과 진행 과정
1997년 8월 6일 새벽 1시 쯤, 서울을 떠나서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 801편[16]이 괌 아가나 공항에 착륙 직전 공항 바로 앞의 언덕인 니미츠 힐(Nimitz hill)[17] 밀림 지대에 추락하여 탑승객 254명 가운데 228명이 사망하고 기적적으로 26명만 살아남은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18]
박용철 비행기 기장, 송경호 부기장, 남석훈 항공 기관사 3명의 운항승무원이 운항을 맡았다. 박용철 기장(1953년생)은 대한민국 공군 조종 장교 즉, 직업군인 출신으로, 1987년 공군 소령으로 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1992년 기장으로 승격, 1995년부터 보잉 747을 조종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 5월에는 비행안전 부문에서 대한항공 사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송경호 부기장(1955년생)은 1994년에, 남석훈 항공 기관사(1939년생)는 1980년에 각각 공군 중령 즉, 직업군인으로 있다가 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근무해 왔다.
당시 조종실에서는 이 사고의 주요한 원인이 되는 두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괌 공항의 비행기 유도 무선표지소, 즉 VOR[19]이 다른 공항들의 것은 보통 활주로 끝에 있는 것과 달리 3마일(약 4.8km) 정도 앞에 있다는 사실.[20] 때문에 원래 정상 착륙 절차대로라면 아가나 국제공항 6번 활주로에 착륙하는 비행기들은 니미츠 VOR을 기준으로 빙 돌면서 접근을 한다. 두 번째는 괌 공항 계기착륙장치의 활공각 유도 장치인 글라이드 슬롭이 고장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조종사들이 알지 못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는데, HL7468에 비치되어 있던 차트는 구식이었기에 1997년 사고 당시보다 착륙 고도가 낮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충돌 30여 분 전, 박용철 기장의 착륙 브리핑이 있었다. 이 대화에서 박용철 기장은 괌 공항의 글라이드 슬롭이 고장났다는 사실을 명확히 언급하였다.
충돌 29분 전, 41,000ft(12,496.8m) 상공에 있던 비행기는 2,600ft(792.5m)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충돌 22분 전 갑자기 비구름이 나타나 10마일(16.1km) 정도 우회하기로 했다.
충돌 11분 전, 비구름에서 벗어난 801편은 괌 공항 6번 활주로로 내려가겠다고 관제탑에 보고했다.
충돌 9분 전, 착륙을 위해 괌 공항 계기착륙장치와 VOR을 맞췄다. 로컬라이저란 계기착륙장치에서 발사하는 무선으로서, 이것을 수신하면 착륙 비행기의 항로와 활주로의 중앙선을 일직선상에 맞출 수 있다. 당시 괌 공항에서는 착륙 시의 강하고도를 보여주는 글라이드 슬롭은 작동하지 않고 있었으나 로컬라이저는 작동하고 있었다. 사고기는 90도로 좌회전하여 로컬라이저 무선을 포착한 다음 고도 2,600ft(792.5m)를 유지하며 비행하고 있었다.
충돌 3분 전, 괌 관제소는 "대한항공 801편, 활주로 6번 왼쪽으로 계기 착륙 방식의 접근을 허가한다. 글라이드 슬롭은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착륙 지시를 내리면서 글라이드 슬롭이 고장나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켰다.
그런데 이 직후 조종실에서는 "글라이드 슬롭이 돼요?", "글라이드 슬롭 되나 보라고" 등등의 이상한 대화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글라이드 슬롭 전파송신소는 고장이 나있더라도 비행기 계기판에는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된 신호가 나타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라디오 같은 전자 제품에 의한 전파 간섭이나 비행기 외부에서 방출된 전파로 인한 오작동을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기내에서 휴대전화 등 무선기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다. 나중의 대한민국 건설교통부 조사팀의 보고에 의하면 만약 괌 공항의 글라이드 슬롭 송신 시설이 120헤르츠의 전파를 발사하였더라면 801편의 수신기에 허위 신호가 나타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블랙박스에 남겨진 대화를 보면 해당 기체 계기판에 글라이드 슬롭과 관련한 어떤 신호가 나타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충돌 2분 전, 801편은 고도 1,400ft(426.7m)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괌 공항의 시각 비행 착륙 규칙에 따르면 해당 위치에서는 2,000ft(609.6m)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801편은 그 최저고도보다 600ft(182.9m)나 아래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사고기 조종사들이 이러한 심각한 실수를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원인이 제시되었는데 조종사 특히 박용철 기장의 피로[21], 구름과 비가 내려서 바깥 상황이 보이지 않는 악천후, 고장나 있는 글라이드 슬롭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착륙 절차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던 점[22],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이 되어서 괌 공항 활주로 3마일(4.8km) 앞에 있는 VOR을 다른 공항처럼 활주로 바로 끝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23] 즉 하강 기준점인 VOR이 괌 공항 3마일(4.8km)이나 앞에 있는데도 이를 공항 활주로 끝에 있다고 순간 착각하고 VOR을 향하여 사고기를 강하시키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VOR은 괌 공항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활주로보다 훨씬 높은 고도(니미츠힐)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사고기 조종사들이 니미츠힐 바로 위 몇십미터를 아슬아슬하게 날면서도 괌 공항에 착륙 직전이라고 착각한 것이 충분히 설명된다. NTSB가 발생한 최종 사고 조사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점을 나열하여 사고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
대한항공 801편 추락 당시 항적도 |
충돌 1분 40초 전, 관제탑은 801편에게 착륙을 허가했다.
충돌 1분 20초 전, 기장은 착륙 전 최저고도를 560ft(170.7m)로 세트하라고 지시했다. 즉 이 고도까지 내려가도 활주로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착륙을 포기하고 복행(고어라운드)해야 한다. 이 최저고도 560ft는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를 설명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다.
충돌 40초 전, 기장은 또 다시 "글라이드 슬롭 안되나?"라고 말하여 계속 글라이드 슬롭에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801편 추락 하루 전인 8월 5일 오전 1시 30분 즈음에[24] 컨티넨탈 미크로네시아 보잉 727-200 항공기도 801편과 동일한 경로로 공항에 접근하던 중에 갑자기 글라이드 슬롭이 작동 되었었다.[25] 조종사들은 이미 글라이드 슬롭이 작동이 안 되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무시하고 접근하여 활주로에 안전하게 착륙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관제사에게는 알리지 않았는데, 추후 인터뷰에서 기장은 글라이드 슬롭의 갑작스런 작동은 새로 설치된 GPS의 일시적인 오류 (배선 설치의 문제)라고만 생각해서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만약 이 사실을 관제사에 보고했으면 그 다음날 801편에 '글라이드 슬롭이 고장나 있지만, 신호가 잡힐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또는 무시하라)'고 경고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26]
5. 사고 직전 상황과 조종실 음성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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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R[27][28] 아래쪽 기록문은 교신외 조종실 내 음성 기록을 적어둔 것이며, 표 오른쪽의 분석 내용은 당시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가 자신의 기사에서 추적 보도한 내용이다. |
.1541:22 (충돌 1분 4초 전) |
기장:
Flaps 30(
플랩을 30도로 펼치라고 지시) 부기장: Flaps 30 |
조종석 내에서의 체크리스트 복창이나 기기 세팅 시 기본 언어는 영어이고 이는 교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1541:31 |
부기장: 착륙 점검 기장: 잘 봐요. 560 피트(170.7m) set.[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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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42 (충돌 44초 전) |
GPWS: One thousand!(1000피트!) | 이때 801편의 위치는 VOR로부터 2마일(3704m), 고도는 1,400피트(426.7m). 이 고도는 이 위치에서 지켜야 하는 최저고도 2,000피트(609.6m)보다도 600피트(182.9m)나 낮다. 그래서 GPWS가 지면과 비행기 사이의 고도가 1,000피트(304.8m)라고 경보한 것이다. 801편은 활주로에서는 3.3마일(5.3km) 떨어져 있는 VOR 송신소를 지향하여 일직선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1541:46 (충돌 40초 전) |
기장: 글라이드 슬롭 안 되나?
Wiper on. 기관사: Yes, wiper on. |
괌 관제소가 글라이드 슬롭 고장을 선언했음에도 계속 글라이드 슬롭에 신경을 쓰고 있다.[30] |
.1541:53 (충돌 33초 전) |
부기장: Landing Checklist. (착륙 전 점검 시작) 기관사: Ignition Flight Start Flight Start''' (엔진이 갑자기 작동 중지하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 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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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59 (충돌 27초 전) |
부기장: 안 보이잖아? GPWS: Five hundred! (500피트!)[31] 기관사: 어? (놀라는 어투) 조종실: Stabilize, stabilize.(기체가 안정된 상태에서 접근하고 있다.) 기관사: 자동 브레이크?[32] 기장: Minimum.[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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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08 (충돌 18초 전) |
기장:
Landing Gear Down in green. (착륙 바퀴가 내려갔음을 확인했다.) |
이때가 충돌 18초 전인데 기장은 정상적인 착륙 절차라고 생각하고 착륙 점검을 계속하고 있다. |
.1542:12 (충돌 14초 전) |
기장: On Course. (정상 비행 중) | |
.1542:13 (충돌 13초 전) |
기관사: Flaps? 조종실: 30 green.( 플랩이 30으로 내려와 있는 것을 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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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14 (충돌 12초 전) |
GPWS: Minimums, minimums! (최저 비행 고도) ?: 착륙 포기합시다. |
GPWS(지상접근경보장치)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미니멈 경보는 착륙 결심 최저고도를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서 활주로가 보이지 않으면 무조건 그 즉시 복행(고어라운드)해야 한다. 그런데 사고기 기장과 부기장은 미니멈 경보가 나왔음에도 즉각적으로 기체를 상승시키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설사 기장이 복행 조작을 하지 않아도 규정상으로는 부기장이 복행을 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조종사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최저고도를 해발 560피트(격차고도 304피트)로 미리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 그런데 계기판이 가리키는 현재의 해발고도는 840피트, 최저고도보다 280피트(85.3m)나 높은 것으로 나오니 안심했을 것이다. "560피트(170.7m)까지는 마음 놓고 내려가도 안전하다"는 일종의 선입견 내지는 착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560피트(170.7m)라는 최저고도는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3.3마일(6,111.6m) 떨어진 VOR 상공까지 1,400피트(426.7m) 이상의 고도로 접근한 뒤 VOR을 넘어서서 활주로로 강하하는 구간의 최저고도이다. 즉 기장을 비롯한 조종사들은 최종 접근 경로의 한 구간을 통째로 머리속에서 생략해버린 채 "무조건 560피트(170.7m)까지는 내려가도 된다"는 집단적인 착각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체는 활주로가 아니라 활주로에서 3마일이나 앞에 있는 VOR을 향해 거의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듯 하강하고 있었고 그 VOR은 평지가 아니라 니미츠힐 꼭대기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니 해발고도와는 다르게 미니멈 경보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1542:14.70 (충돌 11초 전) |
기관사: 유압. 조종실: 음, Landing Lights. (착륙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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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17 (충돌 9초 전) |
GPWS: SINK RATE! (갑자기 강하 속도가 빨라진 것을 경고) 부기장: Sink rate, 오케이. (급강하 문제 없다.) 기관사: 200피트(61.0m). (기체와 지면 사이의 격차 고도.) |
비행기가 실제 지면과 급격히 가까워지니 양력이 떨어지면서 강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이다. 부기장은 기체를 상승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급강하가 문제 없다고 하고 기관사는 304피트(92.7m)일 때까지 내려가서 활주로가 보이지 않으면 즉시 착륙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 최저고도 이하로 100피트(30.48m)나 내려왔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
.1542:19.47 (충돌 7.47초 전) |
부기장: 착륙 포기합시다. | |
.1542:21 (충돌 5초 전) |
기관사: 안 보이잖아 | 기체를 급히 상승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아직도 밖을 보면서 활주로를 찾고 있다. |
.1542:22 (충돌 4초 전) |
부기장: 안 보이죠. 착륙 포기! |
바로 위 표의 조종실 대화 내용은 '미니멈 경보'가 나온 이후의 대화이다. 즉 미니멈 경보가 나왔음에도 무려 6~7초 가량을 더 하강한 것이다.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이때 부기장이 기장을 무시하고 자기 앞에 있는 조종간을 잡아당겼어야 했다는 지적이 있다. 부기장이 두 번이나 "착륙 포기"를 건의했음에도 기장은 바로 응하지 않았다. 민항기 조종사들은 기장이 명백하게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부기장이 독단으로라도 조종권을 인수하여 위기를 모면하도록 교육받는다. 하지만 801편에서는 이런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사고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대한항공 조종실 내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하단에 후술돼 있다.
.1542:22.18 | 기관사: Go Around (착륙 포기) | |
.1542:23.07 |
기장: Go Around |
기장이 마침내 착륙을 포기하고 기수를 올리기로 결심한 시각은 충돌 2.53초 전이었다. GPWS의 최저고도 경고 후 약 9초, 부기장 "착륙 포기" 첫 번째 건의로부터 3.2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
.1542:23.77 (충돌 2.3초 전) |
조종실: 자동조종장치 해제 경보음 부기장: Flaps. (플랩을 다시 집어넣음.) |
기장이 조종간을 잡아당기기 전에 자동조종장치 해제 단추를 눌렀다는 것을 뜻한다. 기장은 왼손으로 조종간을 당기면서 오른손으로 엔진 스로틀 레버를 밀어 올렸다. 비행 기록 장치의 분석치에 따르면 이 시각에 엔진 추진력과 비행 속도, 그리고 기수의 상승 각도가 증가하고 있었다. |
.1542:24 (충돌 2초 전) |
GPWS: 100, 50, 40, 30(피트) | 기장이 복행을 시도했으나 중량 210t의 보잉 747기가 시속 290km로 급강하하는 관성을 즉각 멈추게 할 수는 없었고, 지표면과 너무 가까워 양력도 부족했기에 하강을 멈출 수 없었다. |
.1542:25.78 | GPWS: 20, 충돌음 |
801편의 왼쪽 날개 밑에 달린 랜딩 기어가 먼저 언덕의 나무를 살짝 건드린 뒤 도로 곁에 있는 송유관을 치면서 도로를 건너가다가 왼쪽 날개 바깥쪽의 1번 엔진이 언덕 비탈과 충돌했다. 엔진은 떨어져 나갔고 비행기 동체는 언덕의 비탈을 기어 올라가면서 조종실이 있는 기수를 시작으로 부러지기 시작했다. 기수는 언덕의 꼭대기를 넘어 아래로 내려 꽂듯이 처박혔다. 사고기는 충돌 직전에 기장이 기수를 치켜올린 것 때문에 충돌 2초 후에는 기수가 상향 8도로 치켜져 있었다. 결국 하강을 멈추고 막 상승하려는 찰나에 나무와 송유관을 친 것인데 나중의 분석에 따르면 3m만 여유가 있었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면하고 상승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747기가 치고 지나간 송유관의 커다란 파편이 소방차 및 구급차가 사고 지점으로 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도로를 가로막게 되었고 이는 사고 대응을 더더욱 지연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다. 차량 진입이 불가능해 구조대원들이 소형 응급대응 킷만을 들고 걸어서 이동했다고 한다.
괌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의 시점에서 바라본 니미츠힐 추락 현장. 저 멀리 평지에 보이는 하얀 줄 같은 곳이 괌 공항 6번 활주로이고 그 왼쪽의 상방에 네모나게 있는 곳이 아가나공항의 터미널과 주기장이다. 그리고 사진 우상방에 하얀 평지와 그 가운데 기둥 같은 게 서있는 게 보이는데, 그게 바로 괌 공항의 니미츠 VOR이다. 왜 사고가 발생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사진이다.
.1542:29 (충돌 3초 후) |
조종실: 신음 | 떨어져 나간 조종실이 뒤집히면서 구조물이 속으로 밀려들어 왔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조종사들의 신음소리가 녹음되었다. |
.1542:32.53 (충돌 7초 후) |
녹음 끝 |
- [ 추락 후 조종실의 모습 펼치기 · 접기 ]
조종실과 1등석이 있는 기수(機首) 부분은 동체가 분리되어 뒤집어진 채 발견되었다. 기수의 코 부분은 충돌 시의 충격으로 조종실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있었다. 생존자 가운데 8명은 1등석, 10명은 뒷좌석, 13명은 3개의 의자열(列) 가운데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1층의 비즈니스석의 승객들과 어퍼덱에 탑승한 승객들은 전원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비행기가 동강날 때 의자와 함께 바깥으로 튕겨 나갔거나 기체 안에서 자력(自力)으로 안전띠를 풀고 화염과 쏟아진 짐 덩어리들 사이를 뚫고 바깥으로 탈출한 이들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충돌 직후의 승객실은 산소 마스크가 내려와 있었고 머리 위에 있는 짐칸에서 물건들이 쏟아져 바닥에 쌓여 있었으며 공사장처럼 어지러웠고 붉은 화염과 열기가 덮쳐 왔다.
한편 164명이 탑승한 아시아나항공의 OZ262편도(기체는 보잉 767) 사고기와 비슷하게 5일 오후 9시 김포공항을 떠나 괌으로 향했으나 이 비행기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때문에 801편의 복편에 탑승하려던 승객들과 승무원 그리고 마중을 위해 801편의 탑승객을 아가나 국제공항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는 아시아나항공 262편이 도착했음에도 대한항공 801편은 소식이 없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래의 ATC 기록과 같이 관제사들은 레이더에서 사라지고 두 관제사가 모두 통신이 안 되는 것을 보아 사고로 단정지었다. 잠시뒤 타워 관제사들은 801편의 뒤를따라 착륙하던 라이온에어 789편이 니미츠힐에서 정체모를 화염이 보인다는 증언을 하고 폭풍우를 뚫고 관제탑에서도 보일정도의 붉은 화염빛이 비치는것을 보고 경악하며 소방대에 이를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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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상의 초기 부분은 추락 전 801편과의 교신 내용이고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의 관제탑간(아가나타워, 괌 CERAP, RAMP Control[35])의 교신[36] 내용이다. 관제탑 녹음 테이프 원본을 사고 1년후 FAA가 공개하였지만, 원본은 현재는 찾아볼 수 없고 일부분만 녹음된 영상이다. |
아래는 아가나 타워의 교신 녹취록의 내용중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들만 발췌한것이다.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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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당시 날씨 관련 문제
당시 기사에 따르면 괌 교민들은 이 참사가 악천후를 무시한 채 대한항공 측의 무리한 운항으로 야기된 인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교민들은 "사고가 난 새벽에 괌에는 억수 같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며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사고 여객기가 부산 상공에서부터 천둥번개가 치는 악천후를 통과하면서 기체가 심각하게 흔들리는 등 정상적인 운항이 힘든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중간에 기내식 서비스를 하다가 기체가 심하게 흔들려 식사 서비스를 중단했다고 한다.이 비행기의 전 또는 전전 편 그리고 아시아나항공편을 이용해 한국으로 돌아온 여행객들의 증언에는 자신들의 비행기도 운항 중 매우 불안정했으며[41] 날씨가 좋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당시 괌 인근 기상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5.2. FAA의 일부 과실
NTSB는 조종사 과실 말고도 FAA의 과실 또한 존재한다고 결론냈다.괌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의 구조는 약간 특이했는데 보통 활주로 바로 앞에 DME와 ILS 유도 장치를 설치한 다른 공항들과 달리 DME가 공항 활주로에서 무려 5km나 떨어져 있는 공항이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아예 다른 곳에 시설을 설치해 놓은 정도다.[42]
NTSB는 FAA가 이런 특이한 구조의 공항에 ILS가 고장났음에도 3개월이나 방치해 뒀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 대부분의 미국 공항들에는 최저안전고도 경보시스템(MSAW)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MSAW는 원래는 항공기가 정상고도 이하로 지상에 접근할 때 추락 위험을 경고함으로써 사고를 예방해 주는 안전 장치로, 공항 관제소 레이더에 설치해 두고 만약 항공기가 접근하는 도중 과하게 하강하면 관제사와 조종사들에게 경고를 해 주는 시스템이다.[43]
그런데 FAA는 특이하게 유독 괌에만 MSAW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게 했다. FAA는 괌의 MSAW가 오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하거나 장비를 교체하는 게 아닌 다른 해결 방법을 썼는데, 공항에 접근할 때는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먼 바다 위 80km[44]에서만 이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러한 별도의 규정은 미 본토와 알래스카 그리고 하와이, 사이판 등 미국령 지역들을 모두 포함해 오직 괌에만 적용되었다. 당연히 괌에 착륙하는 여객기들은 80km 공역 안쪽으로 지나는 순간부터 경고를 들을 수 없었다. 즉 안전보다 편의를 앞서서 한 조치가 801편에 경고할 기회 중 하나를 없애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후 괌의 MSAW도 다른 공항들과 같은 FAA 규격대로 고쳐졌고 3개월이나 수리를 질질 끌던 ILS도 수리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MSAW와 ILS 고장 방치에 대한 과실만 인정했고 당연히 나머지 책임 소재는 대한항공에 있다고 결론내렸다. MSAW 서비스가 제대로 안되고 ILS가 고장이 나긴 했지만 그 외의 안전 장치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45] 801편보다 먼저 착륙한 아시아나항공 OZ262편을 비롯해 다른 여객기들은 전혀 문제 없이 착륙을 했기 때문이다.
5.3. 조종실의 서열 관련 문제
사건 후 조종석에 탑승한 3명의 조종 승무원들 모두 공군 조종장교 출신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박용철 기장은 1975년 공군 간부후보생학교에 입교한 조종간부 출신이다.[46] 다시 말해 기장이 공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부기장과 항공기관사가 공군사관학교 직속 선후배 사이였다. 혹자는 기장과 부기장이 공군사관학교 선후배 사이여서 마치 기장이 강압적으로 부기장을 짓눌렀다는 견해를 비춘다. 하지만 기장은 간부후보생학교 출신이므로 이는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공군 조종장교는 공사 출신과 비공사 출신끼리 파벌을 나누고 있다. 이 파벌은 항공사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보통 비공사 선배-공사 후배 관계의 경우 군대 짬밥 정도만 존중해 주고 대부분 서로 터치하지 않는다.박용철 기장은 1987년에 공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송경호 부기장의 경우 공군사관학교 26기 출신으로 1994년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그리고 남석훈 항공 기관사 역시 공군사관학교 11기 출신으로 1980년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사회는 서열에 따른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런데 상명하복이 몸에 배인 군인 출신끼리 모인 집단에서 조종석을 구성하고 있다 보니 감히 선배님이 모는 비행기의 조종대를 잡을 수 없는 분위기로 자연스레 굳어졌을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고정익 민항기 조종사의 대다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조종특기를 부여받은 후 10여 년 의무복무[47]를 했던 이들이다. 이 정도면 진급이 빠른 조종특기의 경우 대충 소령 말 ~ 중령 초는 되어야 전역할 수 있다. 참고로 중령이면 비행대대장 보직을 맡는다. 그리고 이렇게 의무복무를 마친 뒤에 민항사에 지원했거나 공군 학군단을 거친 케이스이다. 그리고 군 내에서는 사관학교 기수를 대단히 중요하게 따지며 이는 전역 후 예비역 관련 행사 등에서도 습관처럼 적용된다. 즉, 전역하고도 사관학교 선배에게 같은 민간인으로서 대하지 않고 철저히 후배가 선배의 말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종 승무원들의 군 출신 서열만 놓고 보자면 셋 중 항공 기관사인 남석훈이 가장 선배였고, 연령대로나 입사 시기나 비행 시간도 나머지 둘보다 훨씬 많았지만 조종실에서의 직급만 놓고 보자면 항공기관사가 세 사람 중 가장 하위 서열에 있었던 것이었다. 남석훈 항공기관사 입장에서는 박용철 기장이 군에서나 항공사에서나 짬밥으로는 후배이긴 해도 사관학교 직속 후배가 아니다 보니 실질적으로 선후배간의 강력한 상하관계라고 보기도 어렵고 조종석에서의 직급은 오히려 자신보다 두 단계 가까이 높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사실상 방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실제 블랙박스에 기록된 기장과 항공기관사 사이의 칵핏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남석훈 쪽에서 혼잣말로 편하게 말을 놓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해도 기장과는 대체로 상호 존칭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항공기관사는 조종석 내에서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기장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이고, 기장은 항공기관사가 자신보다 하위 직급이긴 해도 입사 시기와 비행 경력이 많아서 짬밥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사실 기록된 대화 내용이나 뉘앙스를 분석해 보면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해 본 사람들은 익히 알 만한 중대장과 행정보급관, 조금 높게 잡으면 대대장과 주임원사가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미묘한 느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석훈 항공 기관사의 이런 애매모호한 위치는 사고 당시 박용철 기장이 조종실 내 분위기를 강압적으로 몰고 가거나 나머지 승무원들에게 불평하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48] 송경호 부기장이 박용철 기장의 행동에 적극 개입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계기로 분석될 수 있다. 셋 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같은 사관학교 15년 대선배인 항공 기관사조차도 기장에게 저렇게 존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셋 중에 나이[49]로나 군 짬밥으로나 가장 막내였고 항공사 경력도 가장 신참이었던 부기장으로서는 기장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가 더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이들 중 누군가가 조종실의 분위기를 딱히 나쁘게 몰아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위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조종실에서 군 출신 구성원들로 성립된 짬밥 및 파벌 서열과 조종실 내에서의 직급 서열이 뒤섞이며 엉망이 되어 이들 간에 명확한 서열 기준이 없어지면서 빠른 의사 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결국 조종 승무원들은 1분 1초가 아쉬운 긴급 상황에서 멘붕과 망설임으로 시간을 지체하다가 참사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을 마지막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되었다. 어찌보면 당시에 송경호 부기장이 박용철 기장에게 착륙 포기를 구두로만 수 차례 건의한 것은 그 당시 조종실 분위기 속에서 나름 최대한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구두 건의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조종권을 스스로 인수했다면 당시 조종실 분위기를 감안해 볼 때 선배의 권한을 멋대로 가로챈 버릇 없는 후배로 낙인찍힐 것이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기장이 기장을 무시하고 갑자기 조종간을 잡아당겼다고 가정해 보자. 살았을 수는 있겠지만 조종실 분위기는 갑자기 싸해졌을 것이다. 가뜩이나 서열관계가 꼬여 애매한 분위기였으니,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순간이 되었을 수 있다. 사고를 복기해 보면 쉬운 상황에서 기장이 명백히 잘못하고 있는 것을 부기장이 인식한 것이 아니라 저 공항 자체가 착각하기 좋게끔 짜여져 있었으므로 기장뿐만 아니라 부기장도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부기장 본인조차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책임을 전부 지고 조종권을 인수하는 방법 대신 착륙 포기하자고 건의부터 했고 이를 기장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5초였다. 충돌 7초 전에야 부기장이 착륙 포기하자고 말했고 충돌 3초 전 기관사도 착륙 포기한다고 말했고 충돌 2초 전 기장도 받아들였으니 딱히 기장이 권위주의적으로 찍어눌러서 부기장의 의견을 묵살했기보다는 셋다 멘붕과 패닉에 빠져 당황하다가 사고가 벌어진 것에 가깝다. 부기장이 마음 먹고 복행을 시도했어도 기장이 제지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결과론적으로 사고를 복기하면서 초단위로 분석하다 보니 저때 부기장이 조종간을 잡아당겼어야 한다고 하나 기장이 딱히 독단적으로 운행하고 있던 상황도 아니었던 만큼 부기장이 조종권을 빼앗기보다는 착륙 포기하자고 건의를 했던 것이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만약 착륙 포기하자고 말을 하자마자 바로 기장도 OK해서 올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기장이 받아들이는 데 5초가 걸릴 것이란 것은 당시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 그리고 또 그 5초가 생과 사를 가르는 시간이 되리란 것은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는 몰랐을 테니 아쉬울 따름이다.
5.3.1. 아웃라이어의 인용
이 사고의 조사 보고서와 대부분의 분석 결과에 따라 이 사고는 권위주의적 문화에 젖어든 조종 승무원의 사회적 처신을 위한 망설임 하나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게 되는 인과관계는 결국 조종실 승무원들 간의 권위주의적 문화가 정상적인 CRM(Crew Resource Management)을 방해하고 항공 안전을 위협하는 악폐습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라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상황에 대해 맬컴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책 ' 아웃라이어(Outlier)'에서 언급되어 있다.맬컴 글래드웰은 이 사고의 근원을 말에서 찾았다. 부기장은 이상 징후를 알았지만 권위에 눌린 언어 습관 때문에 직설적이고 강력한 어조로 기장에게 비상 사태를 알리지 못했다는 것. 부기장은 기상 상황이 나쁘다는 말을 "비가 더 오는 것 같죠"라고만 표현했으며 심지어 기관사도 "기상레이더를 보니 얼마든지 문제가 생길 만한 상황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상황을 "오늘 weather radar 덕 많이 본다"고 '힌트 주기'로 표현했다. 결국 지친 기장은 힌트를 감지하지 못했으며, 기상레이더 덕 많이 본다는 기관사의 말에 보인 반응은 고작 "예, 좋긴 좋아요"였다.[50]
해당 책은 '문화적 유산이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내용으로, 한국의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의 폐해로 제시했다. 이 책에는 아비앙카 항공 52편 추락 사고가 이 사고와 연관지어 나온다.
다만 아웃라이어는 실제 기록과 다르게 작가의 의도를 섞어 일부 기록을 누락하거나 순서를 바꾸었다.
5.4. 피해를 키운 문제들
항공기 좌석의 잘못된 설계도 희생자들을 늘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항공기에 쓰이는 좌석은 좌석 하단부에 길고 굵은 봉이 가로로 지나가는 구조인데, 추락하면서 다리가 이 봉에 부딪히면서 대부분의 승객들이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생존자 중 한 명인 뉴질랜드인 승객인 배리 스몰은 곧 착륙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동안 벗어뒀던 신발을 다시 신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가 우연히 충격방지자세가 만들어져 추락 후 스스로 걸어서 탈출할 수 있었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돌하면서 그대로 다리가 부러졌고 결국 탈출하지 못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추락했을 때에는 기체 안에서 여러 나라 언어로 들리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다가 불길이 점점 커지면서 사그러졌다고 증언했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인 한일혼혈 일본인 소녀 마츠다 리카(11세)는 체구가 작아서 무사했지만[51] 어머니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52]
당시 면세 주류의 적재 방식도 문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면세품을 기내 오버헤드빈에 보관했는데, 당시 801편의 승무원들은 난기류를 통과한 후 면세품을 오버헤드빈으로 옮겨 주었는데 그 중에는 최소 462리터나 되는 면세주들이 있었다. 배리 스몰은 이 면세주가 산소공급장치에 쓰이는 산소에 반응하여 화재를 크게 키워서 피해가 커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항공사 기내면세품으로 실리는 술은 끽해야 약 40% 함량의 발렌타인이나 조니 워커, 시바스 리갈 등등이었을 것이다. 일단 걸레짝이 되어 구멍이 펑펑 뚫린 채로 당시의 엄청난 폭풍우를 맞고 있던 동체 내의 공기가 40% 도수 양주를 발화점 위로 가열했을 리는 만무하고 그랬다고 해도 그쯤이면 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온도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사망이다. 운 나쁘게 양주가 기폭제가 되었다고 해도 순수 알코올이 아니라 물을 포함한 각종 불순물이 절반 이상 섞인 주류는 그 양이 많다고 해도[53] 잠깐 타오르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튼 스몰의 주장으로 공론화되면서 뉴질랜드 민간항공국은 기내 면세주류 적재에 대한 위험성을 시인했고 델타항공 등 몇몇 항공사들이 이 사고 이후 아예 기내면세품 판매를 접었지만 공식적인 규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능성을 부인할수는 없지만 기내에 적재된 주류가 사고 시에 인명피해를 낼 만한 화재를 일으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 현실적으로 생기지도 않을 일을 왜 걱정하겠나?' 라는 가정 하에 벌어진 대참사들[54]도 분명히 존재한다.
6.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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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사고 6일째인 1997년 8월 11일 아침 유가족들이 괌 현지의 퍼시픽 스타 호텔[55] 2층 그랜드 볼 룸에서 전날 밤 설치된 영정을 보며 또 한 번 오열하기도 했다. |
사고 당일 보도된 생존자는 29명이다. 원래 현장에서 구조된 인원은 31명이었으나 2명이 이송 도중 사망했기 때문. 이후 추가로 병원에서 중상자 3명이 사망하여 최종 생존자는 26명이다.
휴가철인 8월, 그것도 대표적 휴양지인 괌으로 가는 항공기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였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탑승한 경우가 많아서 일가족 전원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이 지금만큼 대중화, 보편화되지 않고 주로 상류층들이 이용했기 때문에 희생자 중에 유명인들이 꽤 많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공개된 희생자, 부상자 명단을 보면 강남, 서초와 같은 부촌 거주자거나 학생들의 경우 8학군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 이 비행기를 타지 않은 사위를 제외한 장인과 그 일가족 및 직계 비속 8명이 전원 사망하여 장인의 형제들과 사위가 1천 억 원대 유산의 상속권을 두고 3심까지 가는 소송을 벌인 끝에 사위가 승소한 재판이 있기도 했다. 법대생들이 법 공부하다가 '동시사망시 대습상속'의 유명한 판례로서 접하게 되는데( 상속 항목의 대습상속 부분 참조) 상속 관련이지만 소유권 이전 등기 말소 건으로 분류되는 사건번호 97가합91172(1998년 4월 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 98나21825(1999년 2월 1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판결), 99다13157(2001년 3월 9일 대법원 판결) 이 세 판결이 바로 그 판례에 해당한다.
여기서 장인이라는 사람은 당시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지금의 에이스저축은행) 회장이었던 이성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고로 회장 본인과 부인, 아들, 며느리, 손녀, 딸, 외손녀, 외손자까지 일가족 8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한양대 의대 교수였던 사위만 개인 사정으로 혼자 가족여행에 함께 하지 못했는데 사고 후 회장이 남긴 1천 억대의 재산을 두고 이 사위와 회장의 형제 7명이 소송전을 벌였다.
소송의 쟁점이 된 논리가 위의 대습상속인데 간단히 말해 재산을 물려줄 사람(피상속인, 회장)과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상속인, 아들+딸)이 한꺼번에 사망했을 경우 해당 재산이 회장의 형제에게 가야 하는지, 아니면 사위에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민법에서는 이런 경우 상속을 개시하기 전에 상속인이 사망한다면 상속인의 배우자에게 가야 한다고 정해 놨으며 이게 대습상속이다. 그래서 당시 회장의 형제들은 상속을 개시하기 전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상속이 개시됨과 동시에 사망했다는 논리를 전개해 회장의 재산이 자신들에게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송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는데 대법원은 대습상속은 동시에 사망했을 때에도 적용해야 한다며 사위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위는 그렇게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와 35곳의 건물과 토지 등을 상속받았고 부동산값이 오르면서 추정 재산은 2천 억대까지 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부동산은 처분하고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의 주식만 소유하고 있다가 2004년에 재산을 노린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후 2005년에 인천 지역 유지로 알려진 원광인바이로텍의 김학헌 회장[56]에게 주식을 매각했다. 이 사위는 처음 상속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는 재산을 자선병원 설립, 장학기금 설립 등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으나 매각 대금을 실제로 기부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리고 현재에도 한양대 의대 교수로 있다.
- 대한항공 박완순 괌 지점장(1953년생)은 이 사고로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들 박수진 군[57]을 잃고 당시 대치중학교 2학년이었던 딸 박주희 양만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58] 자신의 슬픔을 뒤로 한 채 밤새도록 사고 수습에 전념해야 했으며, 애써 침착함을 보이며 유족(박완순 자신도 유족이었음에도)에게 죄송하다는 인터뷰를 하다 끝내 울음을 터트려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59] 참고로 박완순 지점장은 그 이후에도 대한항공 홍보팀장, 서비스아카데미 원장 등을 거쳐 대한항공에서 퇴사하고 인성교육개발원이라는 기관에서 인성교육 전문가로 활동하다가[60] 2023년 12월 18일에 별세했다.[61]
- 성우 장세준 - 정경애[62] 부부[63]가 두 아들인 장성민(장남), 장재민(차남)과 함께 전원 사망했다. 특히 두 사람은 애니메이션과 외화를 가리지 않고 여러 명작에 출연했던 터라 성우 팬을 비롯한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데다 아내인 정경애가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주역인 윈디 담당으로 내정된 와중에 방송위원회의 방송 불가 판정으로 인해 녹음 스케쥴이 없던 상황에서 여행을 떠났다가 일가족이 사망했기에 큰 이슈가 되었다.
심지어 SBS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방영 시작일이 1997년 8월 6일, 사고 발생 당일이었다. 만약 방송심의를 통과해서 예정대로 방영되었다면 당연히 사고 당일 전후로 녹음 스케줄이 있었을 테고 이에 따라 정경애가 최소한 사고 당일에 가족 여행을 안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당시의 성우 팬 및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은 방송위원회에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물론 방송심의와 항공기 추락 사고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링크에서 보다시피 당시의 방송 심의 자체가 밑도 끝도 없는 트집에 가까웠고 그렇게 방영 일정이 지연된 결과가 장세준 - 정경애 부부의 사망이었던 터라 대중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
이러한 추모 분위기 속에 정경애는 사후 한국방송대상 여자성우상을 추서받았으며, 이후 방송심의를 통과한 마법기사 레이어스는 윈디 역의 성우를
함수정으로 교체하여 2개월뒤 10월 27일부터 1998년 2월 5일까지 방영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9년
MBC에서 방영한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에서도 방영되기도 했다.
설령 장세준 - 정경애 부부가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도 그 자리에 다른 승객이 타서 사망했을 거라는 얘기도 있으나 이 항공편은 매진이 아니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385석이 정원이었으며,
747-3B5의 크기를 생각해봐도 사고 당시 탑승객 수인 237명은 만석과는 거리가 멀다. 사고기인 HL7468의 자매기인 HL7469의 경우 455석[64]이다. 이 기종은 당시 성수기를 맞아 290여석 정원의
A300으로는 부족해 전월부터 대체투입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 서울대학교병원 레지던트 2명도 희생자 목록에 있었는데 이들은 바쁜 와중에 겨우 짬을 내 휴가를 가던 중 이 사고로 사망하였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이었고 이들은 평소에도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하며 치료방사선과(현재는 방사선종양학과로 이름이 바뀜), 흉부외과를 수련 중이었다고 한다.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이 사고 이후로 서울대학교병원 소속 직원(의사, 레지던트, 간호사 등)이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면 주변 직원이 이를 말리는 문화가 존재했다고 한다. 사고로 유능한 레지던트들을 잃은 동료 직원들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언론계도 유능한 인재를 하나 잃었는데 1973년 KBS 공채 1기 기자로 입사한 24년차 베테랑인 홍성현 KBS 보도국장[65]이 일가족 5명과 휴가를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아내와 차녀를 제외한 일가족 3명(본인 포함)이 변을 당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한국방송기자클럽은 1998년부터 '홍성현 언론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 광주광역시 동구를 지역 기반으로 하던 국회의원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신기하 의원(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도 이 사고로 별세했다. 신기하 의원도 위의 성우 장세준, 정경애 부부처럼 부인 김정숙 여사[66] 및 그의 지역구였던 광주 동구의 국민회의 지구당 소속 사람들과 함께 괌 여행을 떠났던 터였다. "만약 신 의원이 이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노무현이 아니라 신기하였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최측근이었다.[67] 더 안타까운 것은 사고 당시 93세였던 그의 어머니 이묘현씨가 다른 식구들이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방 안에 있던 TV로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고 식음을 전폐하다 결국 사고 49일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 그리고 여담으로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사고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해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 1983년 소련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인해 승무원이었던 남편을 잃은 한 재미교포는 이 사고로 어린 조카와 여동생도 잃어 대한항공과 원치 않은 악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KBS
특히 괌 현지에서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현지 장례 풍습에 따라 시신을 방부 처리하고 온전한 형태로 메이크업까지 마치는 조건 하에서의 사망 인정 및 시신 인도 절차를 고수하는 괌 주정부 측 정책 탓에 시신 인도가 상당히 늦어졌다. 이에 대해 유족들이 항의하여 방부 처리 및 염습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나 사고 당시 화재 등으로 인해 시신들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기에 시신 처리 과정이 간단치 않아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과중한 업무로 인해 방부 처리 자원봉사를 하던 현지인이 과로사하는 일도 있었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한국에서도 대형사고 때마다 현장에 출동해 구조 작업을 벌였던 '점박이' 탤런트 정동남(당시 47세)이 있었다. 그는 친한 선배의 아들을 잃었다며 있던 스케줄을 마다하고 사고 발생 다음날 새벽 현지에 도착해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등 자원봉사 활동을 벌여 오다가 NTSB(미국연방교통안전위원회) 측의 발굴 작업 지연에 따른 유가족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유가족들이 직접 시신을 찾겠다고 나서자 자진해서 11일부터 현장에서 시신 발굴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을 들은 삼성그룹 3119 구조대원 2명도 13일 오후 유압 절단기 등을 갖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는데, 3119 구조대 자문위원이기도 한 정동남의 요청으로 오게 된 한경우(당시 30세)와 최진국(당시 30세)등 2명은 유족들에게 "시신발굴 작업이 늦어져 유족들이 애를 태운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며 "여건만 허락되면 더 많은 동료들을 불러오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정동남은 "한경우 등이 가져온 유압 절단기와 전개기(스프레더) 등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사용됐던 것으로 시신 발굴에 꼭 필요한 장비"라며 " 미군들이 발굴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더라도 강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다행히 정동남은 구조경력을 어필해 미국 정부로부터 발굴 허가를 받아냈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생존한 승무원 2명도 소중한 생명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승희(당시 25세) 씨는 박완순 당시 대한항공 괌 지점장의 딸 박주희 양을, 이윤지(당시 24세) 씨는 일본인 소녀 마쓰다 리카 양을 구했다.
이 사고로 가족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30대 여성이 새 삶을 살고 싶은 생각에 남의 신상을 도용했다가 구속되는 영화 화차와 같은 사건도 있었다.
유가족 대표 위원장이었던 사람은 대한항공으로부터 돈을 받고 구속되었는데 훗날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 이후 조현아 부사장의 편의를 봐주다가 또 구속되었다.
전술한 언론 보도에서 생존자는 29명으로 집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 자료를 뒤져보면 생존자 집계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어 32명→30명→29명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상자 중에서 화상 등으로 상태가 위중했던 5명은 미국 본토 텍사스 샌안토니오 브룩 미 육군 병원(Brooke Army Medical Center)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이 중 2명이 9월을 넘기지 못하고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이로써 생존자는 26명으로 줄었다.
그 뒤 같은 병원에서 한 달을 넘게 버티던 여성 생존자 한 명이 10월 10일에 사망하여 실질적인 생존자는 25명으로 또다시 줄어 들었다. 다만 사고 발생 이후 30일이 지나서 사망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사망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7. 사고 이후
사건은 한국 시간으로 밤 시간대에 발생하였다. 한국 시각 새벽에 최초로 미국 ABC[68], CNN 등지에서 다루어졌고 이 방송을 본 PC통신 유저들이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으로 소식을 전파했다. 당시는 YTN, MBN 빼고 TV가 24시간 방송하지 않았고 인터넷도 전화비 때문에 야간정액제[69]와 코넷 없이는 조심하면서 써야 하던 시대였다. PC통신 유저들에 의해 한국에 최초로 알려져서 아침 방송이 시작할 때는 어느 정도 사건이 전파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 언론 등에서도 PC통신의 위력에 대해 많이 다루어졌다.사고 원인에 대해 괌 주정부는 조종사 과실로 단정지으며 자신들의 시설 미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대한항공은 사고 며칠 후 서울 - 괌 노선의 운항을 전면 중단하였다. 관광산업에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던 괌 측에서는 주지사가 직접 한국에 찾아와 대한항공과 유족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으나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조종사 과실이라는 기존의 의견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중앙일보 시사만화에선 코쟁이 미국인들이 이 사고는 죄다 대한민국 탓이라고 실실거리는 걸로 깐 바 있으며 당시 한국 방송사들도 괌 측 잘못이 크다며 자칫하면 다른 여객기도 위험하다고 보도했는데 싱가포르 및 다른 여객기들도 괌 공항에 착륙할 때 아슬아슬한 현장이라고 보도하였다. 이를 두고 괌 공항 측은 불쾌한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별다른 반론을 하지 못했다.
이 당시 보도에서 유가족의 오열을 그대로 방송에 보여준 한국 언론사들과 달리 미국 쪽 언론사들은 유가족들의 반응과 관련한 영상은 거의 내보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미국측이 사고를 축소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미국 언론업계는 원래 이런 대형 사고에서 '지나친 감정 표현이 담긴 자극적인 보도'는 제한하는 편이다. 시청자나 구독자들이 유가족의 감정에 휩쓸려 사건의 진상을 냉정하게 따지지 못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통곡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며 피해자들이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들을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닌 '기삿거리'나 '찍기 좋은 그림' 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매우 큰 실례다.[70]
비록 끔찍한 사고였지만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 사고의 큰 충격이 안전 문제를 곱씹어볼 기회가 된 것인지 이 사고 이후로 2019년 10월 기준으로 대한항공에서 여객기 관련 사망 사고는 발생하지 않고 있으며 화물기 사고까지 고려한다 해도 1999년에 발생한 6316편( MD-11F)과 8509편( 747-2B5F) 화물기 추락사고를 마지막으로 2000년대부터는 대한항공에서는 인명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이후 대한항공은 비행기 안전을 관리하는 부서에 외국인 임원을 적극 채용한다고 한다. 아시아나항공도 2013년 샌프란시스코 추락사고 이후 안전부서에 전일본공수 출신의 일본인 임원을 채용했다. 원래 두 회사의 교류가 잦기는 했지만.
사고 4일 후인 8월 10일, 이해구, 조진형, 박세환 의원을 비롯한 당시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괌 현지에 도착해 사고기 잔해 앞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는 짓을 저지른 것이 한겨레 기자를 통해 알려지면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71]
사고 원인이 불명확했기에 조종사 과실 외에도 기체 결함, 정비 불량 등의 원인 추정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경쟁사인 아시아나항공은 사고기가 기령이 오래된 구형 기종임을 암묵적으로 디스하는[72] '아시아나는 새 비행기로 모십니다'라는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73][74] 실제 당시 아시아나항공은 신생 항공사였기에 당시에는 최신형 이었던 B737 클래식, B767-300ER, 보잉 747-400으로 기단을 꾸려나간 반면 대한항공은 구형 보잉 747-200, A300 등의 오래된 기종들의 비중이 꽤 되었기 때문에 평균 기령에 있어서 대한항공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기에 아시아나의 한국 항공시장 점유율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새 비행기 마케팅'에 굴욕적인 패배감을 맛본 대한항공은 2000년대부터 최신예 기종들을 적극 도입[75]하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보다 평균기령이 낮은 실정이며 2000년대부턴 아시아나항공에서 새 비행기 마케팅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HL7468의 기종인 B747-3B5는 사고기 포함 총 3대(HL7468, HL7469, HL7470)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후기 도입분이자 콤비기였던 HL7470(1988년 도입)은 2001년에 화물기로 개조되고 형제기인 HL7469는 화물기 개조 없이 2005년까지 운항하다가 오리엔트 타이 항공으로 매각되어 넘버가 HS-UTL로 바뀌고 2016년 9월에서야 퇴역했다. 무려 31년을 굴린 것. 해당 항공기 사진.
대한항공에서는 사고 이후 괌 노선을 운항하지 않다가 2001년에 복항했다. 그러나 801편은 영구결번되어 복항 후에는 한동안 805편[76]으로 운항하다가 2008년에 대양주 편명을 100번대로 갈아엎으면서[77] 2022년 하반기까지 111편으로 운항하였고 현재는 423편으로 운항하였다가 2024년 단항되었다.[78] 헌데 2015년 하계까지 운항 기종은 사고 기종의 후속 모델인 B747-4B5이었다.[79] 2015년 동계부터는 B747-4B5의 노후화로 인해 A330-323을 2회 운항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가 현재는 오전 출발 항공편만 운항 중이다.[80] 대한항공의 자회사 진에어 또한 괌 노선을 운영 중이다.
이 사고가 있은지 한 달도 안 되어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가 또 발생해서 21명의 한국인 승객들이 사망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사고에서 승무원이 3명 생존했는데, 그 중 손승희(당시 25세) 씨는 사고 이후 회복 후 대한항공으로 복직하였고 2024년 현재 객실 사무장으로 근무 중이다.[81] 손승희 씨는 1997년 10월 퇴원 전 인터뷰에서 “비행기를 다시 탄다고 생각하면 겁이 덜컥 나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에 대한 확신과 애착이 너무나 커 복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관련 링크 나머지 생존자 승무원인 이윤지(당시 24세) 씨와 오상희(당시 25세) 씨[82]의 근황은 사고 후 회사를 떠났다는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7.1. 항공 사고 수사대 방영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하는 항공 사고 수사대의 시즌 4에서도 다루어졌다. 재연 퀄리티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비상 착륙 공로패에 적힌 기장의 이름이 박영철로 잘못 표기되는 등의 오류가 있었고 그래픽 재현에 사용된 항공기 모델도 보잉 747-400 기종을 사용하여 윙렛이 보이는 등 고증이 좋지 않았다. 기종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747-400 기종부터 아날로그 패널에서 디지털 패널(Glass Cockpit)을 적용해 항공 기관사가 탑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기는 보잉 747-300 기종으로 실제 사고 당시 항공 기관사가 탑승해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배우 캐스팅의 문제였는지 몰라도 실제 기장이었던 박용철과 외모가 전혀 딴판인 배우를 섭외하여 말이 많았다. 해당 배우가 중국계 배우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훨씬 뒤 캐나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에서 주연인 아빠 김사장 역할로 널리 알려진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폴 선형 리(한국명: 이선형)였다.
그런데 박용철 기장의 사진을 보면 일반적인 긴 머리의 헤어스타일에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폴 선형 리는 체구도 박 기장보다 크고 대머리에 콧수염까지 있어 완전 다른 캐릭터로 묘사됐다. 물론 NGC도 대충 아시아계 배우들로 넣지 않고 나름 신경 써서 한국계 배우를 캐스팅한 것인데 박용철 기장의 외모 조사를 못 했거나 이를 그냥 지나친 것일 뿐이다.
이 점을 지적받았는지 추후 시즌에 다뤄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서의 기장 재연 배우[83]는 실제 기장이었던 천병인 기장과 이질적이지 않았다. 참고로 이 재연 배우는 항공사고 수사대의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편과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에서도 각각 교관 조종사와 기장으로 출연했다.
반면 부조종사인 송경호와 항공기관사 남석훈을 맡은 배우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이들의 경우 실제 인물과 외모상 크게 차이점이 없었고, 특히 부조종사를 맡은 Silver Kim이라는 배우는 '수고하십시오'라는 짧은 대사 속에서 명료하고 자연스러운 네이티브 수준의 한국어 발음을 보여준 덕분에 한국 시청자들에게 한국계 배우임을 강제로 인증당하기도 했다.
기장의 소지품 중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있었는데 기장이 이 약물을 복용한 탓에 상황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다루어졌다. 실제로 벤조디아제핀은 음주와 함께 운전 등 기계 조작시 사고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부검 결과 기장은 약물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8. 관련 문서
8.1. 유사 사고
- 이스턴 항공 401편 추락사고: 1972년 사고로, 조종사들이 추락 직전까지 특정 기기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비행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 이 사고와 비슷하다는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의 한 의원의 의견이 나왔다.
-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목포공항에 무리하게 착륙하려다가 부지개산에 추락했다.
-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9년 733편 사고와 비슷하다.
-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 1999년(화물기) 기장의 ADI가 고장났음에도 불구하고 부기장과 항공기관사의 조언을 묵살해 발생했다.
- 에어 인디아 855편 추락 사고: 1978년. 8509편 사고와 동일하다.
- 테네리페 참사: 1977년에 일어난 항공사상 최악의 인명피해(583명 사망)이며, 상부의 징계와 불이익에 민감해진 기장이 권위주의로 부기장과 관제탑을 묵살하고 이륙을 강행해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참사다.
- 버겐에어 301편 추락 사고: 1996년 비행기가 실속하고 있음에도 부기장과 교대조종사가 기장이 조종간을 잡기만을 기다려 일어났다.
- 대한항공 2115편 활주로 이탈 사고: 같은 괌에서 터졌으며 이쪽은 대참사는 면했다.
- 터키항공 6491편 추락 사고: 똑같이 잘못된 글라이드 슬로프 신호를 포착하고 최저고도를 어기며 하강하다가 민가에 추락했다.
-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 사고: 비슷하게 이 사고도 억지로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했다.
- 칠곡 F-15K 추락사고: 똑같이 안전고도 이하로 강하하여 산에 추락했다.
8.2. 둘러보기
대한항공의 보잉 747 3년 연속 폐기처분 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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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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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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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 이태원 압사 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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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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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19년 5월 29일27 25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8년 1월 26일51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2017년 12월 21일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7년 3월 31일22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2014년 12월 1일27 501오룡호 침몰사고 2014년 5월 28일21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299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0년 12월 13일22 제1인성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46 천안함 피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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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08년 1월 7일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192 대구 지하철 참사 2002년 4월 15일13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25일25 제7호 태창호 사건 2001년 9월 11일2,996 28 9.11 테러 2001년 7월 24일20 진주 관광버스 추락 사고 2000년 10월 27일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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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0일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103 1997년 9월 3일 65 21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101 1994년 10월 24일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78 1993년 1월 7일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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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7일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 19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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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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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31 서울역 압사 사고
- [ 195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 194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549~,000+우키시마호 사건
역대 미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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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colcolor=#000> 사망 | 사건명 |
2023년 8월 8일 ~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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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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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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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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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19년 9월 2일34 컨셉션호 화재 2019년 8월 3일23 2018년 10월 6일20 쇼하리 리무진 충돌사고 2018년 1월 9일23 몬테시토 산사태 2017년 11월 5일27 텍사스 제일 침례교회 총기 난사 사건 2017년 10월 1일61 라스베이거스 총기 난사 사건 2016년 12월 2일36 고스트 쉽 창고 화재 2016년 6월 12일50 올랜도 나이트클럽 총기난사 사건 2015년 10월 1일33 엘 파로호 침몰사고 2014년 3월 22일43 오소 산사태 2012년 12월 14일28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2010년 4월 5일29 어퍼 빅 브랜치 탄광 폭발사고
-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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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09년 2월 12일50 콜간 항공 3407편 추락 사고 2008년 9월 12일25 채스워스 열차 충돌 사고 2007년 4월 16일32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2006년 8월 27일49 컴에어 5191편 추락 사고 2005년 12월 19일20 초크 오션항공 101편 추락 사고 2005년 10월 2일20 이선 앨런호 침몰 사고 2005년 9월 23일24 텍사스 요양원 버스 화재 2005년 9월 1일45 허리케인 카트리나 집단 안락사 사건 2005년 1월 26일31 미 해병대 CH-53E기 추락 사고 2003년 2월 20일100 스테이션 나이트클럽 화재 사고 2003년 2월 17일21 E2 나이트클럽 압사 사고 2003년 1월 8일21 에어 미드웨스트 5481편 추락 사고 2001년 11월 12일265 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11일2,996 9.11 테러 2000년 10월 31일84 24 싱가포르항공 006편 이륙 사고 2000년 1월 31일88 알래스카 항공 261편 추락 사고
- [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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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1일217 100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 1999년 5월 9일23 뉴올리언스 버스 사고 1998년 9월 2일229 110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 1998년 8월 7일224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 1997년 8월 6일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7년 3월 26일39 헤븐즈 게이트 집단 자살 사건 1997년 1월 9일29 컴에어 3272편 추락 사고 1996년 11월 21일33 푸에르토리코 가스 폭발 사고 1996년 7월 17일23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 1996년 5월 11일110 밸류젯 592편 추락 사고 1996년 4월 3일35 미 공군 CT-43 추락 사고 1995년 12월 20일159 아메리칸 항공 965편 추락 사고 1995년 9월 22일24 알래스카 보잉 E-3 추락 사고 1995년 4월 19일168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1994년 10월 31일68 아메리칸 이글 4184편 추락 사고 1994년 9월 8일132 US에어 427편 추락 사고 1994년 7월 2일37 US에어 1016편 추락 사고 1994년 3월 23일24 그린 램프 참사 1993년 9월 22일47 빅 바유 캐넛 탈선 사고 1993년 2월 28일 ~ 4월 19일86 웨이코 포위전 1992년 3월 22일27 US에어 405편 추락 사고 1991년 10월 19일 ~ 10월 23일25 오클랜드 대화재 1991년 10월 16일24 루비스 카페테리아 총기난사 사건 1991년 9월 3일25 햄릿 닭고기 가공 공장 화재 1991년 4월 5일23 애틀랜틱 사우스웨스트 항공 2311편 추락 사고 1991년 3월 3일25 유나이티드 항공 585편 추락 사고 1991년 2월 1일35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지상충돌 사고 1990년 3월 25일87 해피랜드 나이트클럽 화재 1990년 1월 25일73 아비앙카 항공 052편 추락 사고
- [ 198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10월 23일23 필립스 정유 회사 폭발 사고 1989년 9월 21일21 알톤 버스 추락사고 1989년 7월 19일111 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착륙 사고 1989년 4월 17일47 아이오와급 전함 주포 폭발사고 1989년 2월 8일144 인디팬던트 에어 1851편 추락 사고 1988년 12월 21일270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 1988년 5월 14일27 캐롤튼 버스 충돌 사고 1987년 12월 7일43 퍼시픽 사우스웨스트 항공 1771편 추락 사고 1987년 11월 15일28 컨티넨탈 항공 1713편 추락 사고 1987년 8월 16일156 노스웨스트 항공 255편 추락 사고 1987년 5월 17일37 USS 스타크 피격 사건 1987년 4월 23일28 람비안스 플라자 붕괴사고 1986년 12월 31일97 듀폰트 플라자 방화 사건 1986년 9월 5일20 팬 아메리칸 항공 73편 납치 사건 1986년 8월 31일82 세리토스 상공 공중 충돌 사고 1986년 6월 18일25 그랜드 캐니언 공중충돌 사고 1986년 5월 30일21 캘리포니아 워커 버스 사고 1985년 12월 12일256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 사고 1985년 9월 6일31 Midwest Express 105편 추락 사고 1985년 8월 2일137 델타항공 191편 추락 사고 1985년 6월 25일21 오클라호마 폭죽공장 폭발 사고 1985년 1월 21일70 갤럭시 항공 203편 추락 사고 1985년 1월 1일29 이스턴 항공 980편 추락 사고 1984년 12월 19일27 윌버그 탄광 화재 사고 1984년 9월 20일24 1984년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1984년 7월 18일21 샌 이시드로 맥도날드 총기난사 사건 1983년 10월 23일307 베이루트 미군 숙소 테러 1983년 9월 1일269 62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6월 2일23 에어캐나다 797편 화재 사고 1983년 4월 18일64 1983년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1983년 2월 10일31 SS Marine Electric 침몰 사고 1982년 9월 11일46 만하임 미 육군 CH-47c 추락 사고 1982년 9월 4일25 Dorothy Mae Apartment-Hotel 방화 사건 1982년 7월 9일153 팬 아메리칸 항공 759편 추락 사고 1982년 1월 13일78 에어 플로리다 90편 추락 사고 1981년 7월 17일114 하얏트 리젠시 호텔 고가 통로 붕괴 사고 1981년 1월 9일29 뉴저지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80년 12월 4일26 스토퍼스 인 호텔 화재 1980년 11월 21일85 MGM 그랜드 호텔 화재 1980년 9월 12일34 Florida Commuter Airlines 65편 추락 사고 1980년 7월 27일23 브래들리 인 요양원 화재 1980년 6월 5일20 아칸소 재스퍼 버스 사고 1980년 5월 9일35 선샤인 스카이웨이 대교 붕괴사고 1980년 3월 14일87 28 LOT 007편 추락사고 1980년 1월 28일23 USCGC 블랙손 침몰 사고
- [ 197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11월 28일257 22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1979년 10월 31일73 웨스턴 항공 2605편 착륙 사고 1979년 5월 25일273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 1979년 4월 3일25 스르라우한 웨이사이드 요양원 화재 1978년 11월 18일918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 1978년 9월 25일144 샌디에이고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78년 4월 27일51 윌로우 아일랜드 참사 1978년 1월 28일20 코트스 하우스 호텔 화재 사고 1977년 12월 13일29 Air Indiana 216편 추락 사고 1977년 11월 6일39 켈리 반스 댐 붕괴사고 1977년 7월 19일40 로럴 런 댐 붕괴 사고 1977년 6월 26일42 모리 카운티 교도소 화재 사고 1977년 5월 28일165 비버리 힐즈 서퍼 클럽 화재 1977년 3월 27일583 테네리페 참사 1976년 10월 24일25 푸에르토리코인 사교 클럽 화재 1976년 10월 20일78 MV 조지 프린스호 침몰 사고 1976년 6월 4일46 에어 마닐라 항공 702편 추락 사고 1976년 5월 21일29 유바 시티 버스 추락사고 1976년 4월 27일37 아메리칸 항공 625편 추락 사고 1976년 3월 9일, 3월 11일26 스코샤 탄광 폭발 사고 1976년 1월 30일23 윈크레스트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76년 1월 10일20 패스파인더 호텔 폭발 사고 1975년 11월 10일29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 침몰 사고 1975년 6월 24일113 이스턴 항공 66편 추락 사고 1974년 12월 1일92 트랜스 월드 항공 514편 추락 사고 1974년 9월 11일72 이스턴 항공 212편 추락 사고 1974년 9월 8일88 트랜스 월드 항공 841편 폭파 사건 1974년 6월 30일24 걸리버즈 나이트클럽 방화 사건 1974년 4월 22일107 팬 아메리칸 항공 812편 추락 사고 1974년 4월 4일72 서던 에어웨이즈 242편 추락 사고 1974년 3월 3일346 25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12월 17일34 1973년 로마 공항 습격·납치 사건 1973년 8월 28일24 휴에바 미 공군 C-141 추락 사고 1973년 7월 31일88 델타 항공 723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23일38 오자 에어 809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22일78 팬 아메리칸 항공 816편 추락 사고 1973년 6월 24일32 업스테어 라운지 방화 사건 1973년 3월 22일32 MV Norse Variant 침몰 사고 1973년 2월 10일40 스태튼 아일랜드 가스 폭발 사고 1972년 12월 29일101 이스턴 항공 401편 추락사고 1972년 12월 8일45 유나이티드 항공 553편 추락사고 1972년 10월 30일45 1972년 시카고 열차 추돌사고 1972년 9월 24일22 새크라멘토 캐나디어 세이버 추락 사고 1972년 6월 9일238 Canyon Lake 댐 붕괴 사고 1972년 5월 2일91 선샤인 광산 화재 1972년 2월 26일125 버팔로 댐 붕괴 사고 1971년 9월 14일111 알래스카 항공 1866편 추락 사고 1971년 9월 9일 ~ 9월 13일43 애티카 교도소 폭동 1971년 8월 18일37 페그니츠 미 육군 CH-47 추락 사고 1971년 6월 7일28 Allegheny Airlines 485편 추락 사고 1971년 6월 6일50 휴즈 에어웨스트 706편 공중충돌 사고 1971년 2월 3일29 티오콜 화학공장 폭발 사고 1970년 12월 30일39 Hurricane Creek 탄광 폭발 사고 1970년 12월 20일29 파이어니어 호텔 화재 1970년 11월 27일79 미 공군 C-123K기 추락 사고 1970년 10월 2일31 위치타 주립대학교 미식축구팀 비행기 추락사고 1970년 11월 14일75 서던 에어웨이즈 932편 추락 사고 1970년 5월 2일23 ALM 항공 980편 사고 1970년 3월 20일20 오자크 호텔 화재 사고 1970년 1월 10일21 하머 하우스 요양원 화재
- [ 196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 [ 195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 [ 194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1월 29일28 아메리칸 항공 157편 추락 사고 1949년 11월 1일55 알렉산드리아 상공 공중 충돌 사고 1949년 7월 12일35 스탠다드 에어 항공 897R편 추락 사고 1949년 6월 7일53 스트라토 프레이트 커티스 C-46A 추락 사고 1949년 4월 4일74 성 안토니오 병원 화재 1948년 12월 28일32 에어본 운송 DC-3 실종 사고 1948년 10월 27일 ~ 10월 31일26 도노라 스모그 사건 1948년 8월 29일37 노스웨스트 항공 421편 추락 사고 1948년 6월 17일43 유나이티드 항공 624편 추락 사고 1948년 3월 12일30 노스웨스트 항공 4422편 추락 사고 1948년 1월 28일32 로스 가토스 DC-3 추락 사고 1947년 11월 28일20 알프스 미 공군 C-47B 추락 사고 1947년 10월 23일52 유나이티드 항공 608편 추락 사고 1947년 7월 24일27 올드 밴 8번 탄광 폭발 사고 1947년 6월 13일50 펜실베니아 센트럴 항공 410편 추락 사고 1947년 5월 30일53 이스턴 항공 605편 추락 사고 1947년 5월 29일43 유나이티드 항공 521편 추락 사고 1947년 4월 16일581 텍사스 시티 폭발 사고 1947년 3월 25일111 센트레일리아 탄광 참사 1946년 12월 7일119 와인코프 호텔 화재사고 1946년 7월 19일25 마운트 톰 B-17 추락 사고 1946년 6월 5일61 라 살레 호텔 화재 1946년 4월 25일45 네퍼빌 철도 참사 1945년 12월 24일21 나일가 요양병원 화재 1945년 11월 1일26 가게나우 미 육군 C-47 추락 사고 1945년 8월 9일34 노스 다코다 미시간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9일372 USS 마운트 후드 폭발 사고 1944년 12월 31일50 배글리 열차 추돌 사고 1944년 10월 20일131 클리블랜드 가스 폭발 사고 1944년 8월 23일61 프레클톤 항공 참사 1944년 8월 4일47 스톡턴 열차 충돌 사고 1944년 7월 17일320 시카고 항구 참사 1944년 7월 6일167 하트퍼드 서커스 화재 1944년 5월 21일163 웨스트 로치 참사 1944년 2월 10일24 아메리칸 항공 2편 추락 사고 1944년 1월 6일115 USS 세인트 어거스틴 침몰 사고 1944년 1월 3일138 USS 터너 침몰 사고 1943년 12월 18일34 USS 로그데이 침몰 사고 1943년 12월 16일74 레너트 열차 충돌 사고 1943년 9월 7일55 걸프 호텔 화재 1943년 9월 6일79 프랭크 포드 정션 열차 탈선 사고 1943년 8월 30일29 라카와나 열차 추돌 사고 1943년 7월 28일20 아메리칸 항공 63편 사고 1943년 6월 12일42 USS R-12 침몰 사고 1943년 2월 27일75 스미스 탄광 폭발 사고 1943년 1월 31일32 레이크 포레스트 요양원 화재 1942년 11월 28일492 코코넛 그로브 나이트클럽 화재 1942년 6월 5일46 졸리엣 탄약 창고 폭발 사고 #!wikibstyle="margin: 0px -10px;" 1942년 2월 18일
203 USS 폴룩스, USS 스럭스톤 침몰 사고 1942년 1월 24일48 USS S-26 침몰 사고 1941년 6월 19일33 USS O-9 침몰 사고 1940년 9월 12일52 허큘리스 화약 공장 폭발 사고 1940년 8월 31일25 로베츠빌 DC-3 추락 사고 1940년 7월 31일43 두들버그 참사 1940년 7월 15일63 손만 탄광 폭발 사고 1940년 4월 23일209 리듬 클럽 화재 1940년 4월 19일31 리틀 폴스 열차 탈선 사고
- [ 193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39년 10월 12일24 샌프란시스코 열차 탈선 사고 1939년 5월 12일26 USS 세일피쉬 침몰 사고 1938년 6월 19일23 조던 고등학교 버스 건널목 사고 1938년 6월 19일47 커스터 강 열차 탈선 사고 1938년 6월 19일45 레드 자켓 광산 폭발 사고 1938년 5월 16일34 터미널 호텔 화재 1937년 5월 6일36 힌덴부르크 참사 1937년 3월 18일295+ 뉴 런던 학교 폭발 사고 1936년 1월 12일34 SS 아이오와호 침몰 사고 1934년 12월 11일34 켄 호텔 화재 1934년 9월 8일137 모로 캐슬호 화재 1934년 7월 22일21 뉴욕 오싱 버스 사고 1934년 3월 24일22 린치버그 빌딩 화재 1933년 4월 3일73 USS 아크론 추락사고 1933년 10월 3일 ~ 10월 4일29 그리피스 공원 화재 1932년 9월 9일72 옵저베이션호 폭발사고 1932년 12월 24일54 모웨아쿠아 탄광 폭발사고 1931년 7월 25일31 리틀 시스터즈 보육원 화재 1930년 11월 5일82 밀필드 탄광 참사 1930년 4월 21일322 오하이오 교도소 화재
- [ 192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29년 10월 22일52 SS 밀워키 침몰 사고 1929년 9월 9일25 SS 안다스테 침몰 사고 1929년 8월 29일77 SS 산 후안 침몰 사고 1929년 4월 21일123 클리블랜드 클리닉 화재 1928년 11월 10일111 SS 베스트리스 침몰 사고 1928년 11월 8일20 프레블 박스 토 회사 폭발사고 1929년 8월 20일22 스터디 클럽 화재 1928년 5월 19일195 매터 광산 참사 1928년 4월 13일38 웨스트 플레인스 댄스홀 폭발 사고 1928년 3월 12일431+ 세인트 프란시스 댐 붕괴 사고 1927년 12월 17일40 USS S-4 침몰 사고 1927년 11월 14일28 피츠버그 가스 폭발사고 1927년 5월 18일45 배스 학교 폭파 사건 1927년 11월 14일26 SS 파푸스 침몰 사고 1926년 11월 4일51 반스 헤커 철광 참사 1925년 7월 4일33 USS S-51 침몰 사고 1925년 7월 4일44 픽 윅 클럽 붕괴 사고 1925년 6월 16일47 록포트 열차 탈선사고 1925년 5월 27일53 글렌 광산 참사 1925년 5월 17일77 클리블랜드 학교 화재 1924년 12월 24일36 밥스 학교 화재 1924년 9월 21일26 SS 클리프톤 침몰 사고 1924년 6월 12일48 USS 미시시피 주포 폭발 사고 1924년 5월 31일24 호프 학교 화재 1924년 4월 28일119 벤우드 광산 참사 1924년 3월 8일172 캐슬 게이트 광산 참사 1924년 3월 8일20 닉슨 니트로 공장 폭발사고 1924년 2월 5일41 밀포드 광산 폭발 사고 1923년 9월 27일30 겐록 열차 탈선 사고 1923년 9월 8일23 혼다 포인트 참사 1923년 2월 8일123 도슨 광산 폭발 사고 1923년 1월 3일35 앨렌 대교 붕괴 사고 1922년 8월 27일47 아르고넛 광산 폭발사고 1922년 2월 21일34 로마 비행선 추락사고 1922년 2월 21일29 슈피리어 시티 침몰 사고 1922년 1월 28일98 니커보커 극장 붕괴사고 1920년 9월 16일40 월스트리트 폭탄 테러
- [ 191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19년 12월 20일23 오나와 열차 탈선 사고 1919년 12월 18일35 J.A 챈슬러 침몰 사고 1919년 6월 5일92 발티모어 탄광 폭발 사고 1919년 1월 15일21 보스턴 당밀 홍수 사건 1919년 11월 11일101 맬본 스트리트 탈선사고 1918년 10월 12일453 클로켓 화재 1918년 10월 4일100 T.A 길레스피 회사 공장 폭발사고 1918년 7월 9일101 1918년 내슈빌 열차 충돌사고 1918년 7월 5일87 콜럼비아호 침몰 사고 1918년 6월 22일86 해먼드 서커스 열차 충돌사고 1918년 6월 2일52 스플릿 락 폭발사고 1918년 2월 26일30 USS 체로키 침몰 사고 1917년 12월 20일49 셰퍼드빌 열차 탈선사고 1917년 6월 8일168 스페큘레이터 광산 참사 1917년 4월 27일121 해스팅 광산 폭발 사고 1917년 4월 10일139 에디스톤 광산 폭발 사고 1916년 8월 3일24 배런 댐 붕괴 사고 1916년 11월 7일46 서머 스트리트 다리 참사 1916년 8월 29일43 USS 테네시 침몰 사고 1916년 5월 8일2p SS S.R. 커비 침몰사고 1915년 10월 28일21 세인트 존스 학교 화재 1916년 10월 20일25 제임스 B. 콜게이트 침몰 사고 1915년 9월 27일50 아드모레 폭발 사고 1915년 7월 24일848 이스트랜드호 참사 1915년 5월 7일1198 128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1915년 3월 25일112 레이랜드 광산 참사 1915년 3월 2일21 USS F-4 침몰 사고 1914년 9월 18일60 프랜시스 H. 레짓 침몰사고 1914년 4월 28일180 에클스 광산 참사 1914년 1월 30일41 SS 먼로 침몰 사고 1913년 12월 24일73 이탈리안홀 참사 1913년 12월 4일28 아르카디아 호텔 화재 1913년 11월 10일25 SS 헨리 B. 스미스 침몰 사고 1913년 10월 22일263 도슨 광산 폭발 사고 1913년 7월 22일31 브링햄턴 공장 화재 1913년 5월 24일39 롱비치 피어 오디토리움 붕괴 사고 1913년 3월 7일33 알룸 샤인 폭발 사고 1913년 2월 28일25 듀이 호텔 화재 1913년 1월 10일26 제임스 T. 스테이플 침몰 사고 1912년 7월 4일39 코닝 열차 탈선 사고 1912년 4월 14일 ~ 4월 15일1514 238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911년 12월 9일84 크로스 마운틴 광산 참사 1911년 9월 30일78 오스틴 댐 붕괴 사고 1911년 8월 26일21 캐논스버그 오페라 하우스 압사 사고 1911년 4월 9일128 배너 광산 참사 1911년 3월 25일146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 1910년 12월 22일24 시카고 가축 판매소 화재 1910년 10월 7일42 보데트 화재 1910년 10월 1일21 로스 앤젤레스 타임즈 폭탄 테러 1910년 9월 8일29 페레 마켓 18 침몰 사고 1910년 10월 5일84 팔로스 광산 폭발사고 1910년 3월 21일52 그린 마운틴 열차 탈선사고 1910년 3월 1일96 웰링턴 눈사태 1910년 2월 6일31 USS 니나 침몰 사고
- [ 190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09년 12월 8일30 ~ 38 마르케트 & 베세머 No.2호 침몰 사고 1909년 11월 13일259 체리 광산 참사 1908년 12월 1일24 D.M 클렘슨호 침몰 사고 1908년 3월 28일59 1908년 한나 광산 폭발 사고 1908년 3월 4일173 콜린우드 학교 화재 1908년 1월 13일170 로드 오페라하우스 화재 1907년 12월 19일239 다르 광산 참사 1907년 12월 9일362 모농가 광산 참사 1907년 12월 1일35 나오미 광산 참사 1907년 10월 11일22 키프러스호 침몰 사고 1907년 9월 15일26 카난 열차 탈선 사고 1907년 7월 21일88 콜럼비아호 침몰 사고 1907년 2월 15일20 우드론 열차 사고 1905년 12월 30일602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 1905년 7월 15일66 USS 베닝턴 보일러 폭발 사고 1905년 6월 21일21 20세기 리미티드 열차 탈선 사고 1905년 3월 20일58 글로버 신발 공장 참사 1905년 3월 18일24 1905년 레드 애쉬 광산 폭발 사고 1904년 9월 24일56+ 뉴마켓 열차 사고 1904년 8월 7일97 에덴 열차 탈선 사고 1904년 6월 15일965+ 제너럴 슬로컴호 화재 1904년 4월 13일36 USS 미주리호 주포 폭발 사고 1904년 1월 25일181 해윅 광산 참사 1903년 12월 26일21 이스트 파리스 열차 탈선 사고 1903년 12월 23일64 코넬스빌 열차 탈선 사고 1903년 8월 6일26 듀랑 서커스 열차 추돌사고 1903년 7월 29일22 미국 탄약공장 폭발 사고 1903년 6월 30일169 1903년 한나 광산 폭발 사고 1902년 9월 19일115 샤일로 침례교회 압사 사고 1902년 9월 8 ~ 12일65 야콜트 산불 1902년 7월 10일112 롤링 광산 폭발 사고 1901년 9월 15일24 허드슨호 침몰 사고 1901년 8월 15일40 아일랜더호 침몰 사고 1901년 2월 22일128 시티 오브 리오 데 자네이루호 침몰 사고 1900년 11월 29일21 1900 빅 게임 참사 1900년 7월 4일44 타코마 노면전차 참사 1900년 6월 30일326+ 호보컨 부두 화재 1900년 6월 23일35 ~ 37 캠프 크릭 열차 탈선 사고 1900년 5월 1일200+ 스코필드 광산 참사 1900년 3월 6일46 1900년 레드 애쉬 광산 폭발 사고
- [ 189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94년 9월 1일418 힝클리 대화재 1890년 2월 16일100+ 월넛그로브댐 붕괴 사고
- [ 1880년대 ]
- [ 1870년대 이전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76년 12월 29일92+ 애슈터뷸라 철도 참사 1876년 12월 5일278 브루클린 극장 화재 1871년 7월 30일125 1871년 스태튼섬 참사 1871년 10월 8일 ~ 10일300+ 시카고 대화재 1871년 10월 8일1700+ 페시티고 대화재 1865년 4월 27일1700+ 술타나호 침몰 사고 1860년 9월 7일300+ 레이디 엘진 호 침몰 사고 1860년 1월 10일88 펨버튼 공장 붕괴사고
[1]
추후 1인 추가 사망이 확인되었으나 사고 후 65일이 지난 1997년 10월 10일 사망하여 공식 사망자로는 집계되지 않는다. 다만 부상자에서는 제외된다.
[2]
처음 승무원 생존자는 4명이었으나 화상이 심했던 한규희 씨가 얼마 안 가 숨지며 최종 생존자는 3명이 되었다. 또한 생존 승무원 중 한 명인 손승희 씨는 사고 이후 다시
대한항공으로 복직하였고 2024년 현재 대한항공 객실 사무장으로 근무 중이다.
[3]
이 당시는 아직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기 전이라 김포공항에서 모든 국제선 항공편이 발착할 때이다.
[4]
보잉 747-300의 주요 항공사고는 단 3건인데, 그 중
안셋 오스트레일리아 항공 881편 착륙 사고와
사우디아 항공 3830편 배수로 좌초사고에서는 전원이 생존했다. 다만 보잉 747-300 기종이 판매가 매우 부진했던 형식이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
[5]
대한항공 소속 항공기가 마지막으로 사망사고를 낸 것은 1999년의
8509편 추락사고인데 8509편은 화물기라서 일반인 탑승객이 없었다.
[6]
연속적인 사고를 냈으나 이 사고가 결정타가 된 셈이다.
[7]
그 후
스타얼라이언스는 대한민국의 제2항공사인
아시아나항공이 가입했다.
[8]
1등석과 어퍼덱
[9]
대한항공이 현행 도색을 사용하게 된 계기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데 공교롭게도 007편 역시 747이었으며 동시에 801편 사고와 함께 대한항공이 일으킨 사고 중 사망자가 200명대인 유이한 사고이다.
[10]
사족으로
미국이 소개되면서 나오는 사진 중 하나가
구 세계무역센터이다.
[11]
국외의 경우에는 미주 시장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에 등장한 적이 있다.
[12]
훗날 도입된 직계 후속 기종인
보잉 747-400도 똑같이 슈퍼점보라는 이름으로 마케팅에 사용되었으며 이렇게 최신 항공기를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전통은 2017년
보잉 787 드림라이너의 도입까지 이어졌다.
[13]
대부분이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14]
후술하겠지만, 이 승객은 운이 정말 좋았다. 착륙전 벗어두었던 신발을 신기 위해 허리를 굽히자마자 항공기가 충돌했는데, 이 자세가 충격방지자세를 만들어 생존했다.
[15]
1명은 사고 31일뒤에 사망하여 희생자로 포함되지 않는다.
[16]
원래는 B747-300 대신
A300-600R이 운항할 예정이었으나 성수기로 탑승객이 많아 B747-300이 투입되었고 운항 승무원도 바뀌었다.
[17]
미합중국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태평양 전쟁 중 미 해군이 태평양함대사령부를 괌으로 잠시 이전시켰다가 종전 후 해군기지 일부만 남기고 도로
하와이로 돌아갔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대한민국에선 유난히 한 일에 비해 아는 사람이 적은 니미츠 제독을 소개할 때 이 사고를 언급하며 "그 항공기가 추락한 언덕의 이름이 이 제독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도 해당 언덕의 바위 등은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 잘 보면 나무의 뿌리 뽑힌 흔적 등이 있다.
[18]
이 세 사람도 목숨을 잃었다.
[19]
고주파 전방위 무선표지소. 공항에서 비행기들의 착륙을 유도하는 것으로,
바다의
등대와 비슷한 면이 있다.
[20]
조종사들의 브리핑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괌 공항의 니미츠 VOR은 다른 공항과 같이 활주로 평지에 있는 게 아니라 니미츠힐 즉 산꼭대기 가까이에 있다. 바로 이 점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종사들의 착각과 더불어 사고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21]
블랙박스 대화 중에 "어. 정말로 졸려서"라는 대화가 남아 있다.
[22]
관제소가 글라이드 슬롭 고장을 선언했으면, 그 어떠한 신호가 잡히더라도 그것을 무시하고 관제소 지시에 따라야 하는 게 원칙이다. 아님 불확실할 경우 관제사에게 '(글라이드 슬롭) 신호가 잡혔는데 무시하고 접근하면 되나요?' 라고 물어봐도 된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전술한 것처럼 신호를 무시하거나 관제사에게 물어보지 않고 오직 글라이드 슬롭이 되는지에 대해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
[23]
특히 항공사고 분석으로도 명성을 날린
조갑제 기자가 과거 월간조선 특집 기사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24]
801편과 공항에 접근한 시간이 비슷하다.
[25]
해당 항공기는 새로 설치된 GPS의 기능 점검 비행 후 공항에 접근 중이었다.
[26]
이 내용은 사고조사보고서 32 페이지에 나와 있다.
[27]
이 영상은 조종사들의 음성이 삭제된 CVR 녹음영상을 퍼 온 영상이기 때문에 관제사 음성과 경보음만 확인할 수 있다. 50초 부근에서 1000피트, 1분 8초에 500피트, 1분 23초에 Minimum, Minimum, 1분 33초에 오토파일럿 해제와 50-20피트 경보를 들을 수 있다. 1분 35초에 추락하는 소리가 들리고 CVR은 종료된다.
[28]
해당 녹음 영상에 관해서는 조작 논란이 있다. 실제 당시 NTSB는 녹음 오디오 원본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녹취록만 공개하였다.
[29]
글라이드 슬롭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엔 최저 560피트(170.7m)로 하게 되어 있다. 이 고도까지 내려가서도 활주로가 보이지 않으면 착륙을 포기하고 상승해야 한다. 이 고도를 최저고도로 설정했다는 것은 기장이 활공각 유도 장치가 고장난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30]
이미 사전 브리핑에서 괌 공항의 글라이드 슬롭 고장이 공지되었기 때문에 설사 글라이드 슬롭으로 추정되는 전파가 잡혔다고 하더라도 조종사들은 거기에 신경을 쓰면 안 되었다.
[31]
이때 801편의 고도는 해발 약 1,100피트(335.3m)였으나 지면으로부터는 불과 150m(492피트)밖에 떨어지지 않아 충돌 방지 장치가 다시 경보를 한 것이다.
[32]
비행기가 착지한 뒤 자동적으로 브레이크가 작동하도록 하는 장치.
[33]
브레이크를 최저 단계에 놓아 활주로에서 길게 미끄러진 뒤 멈추도록 조작 지시. 활주로에 닿기 직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34]
시신이나 혈흔은 보이지 않고 부서진 조종실이 땅에 쳐박혀있는 모습이다.
[35]
그라운드 컨트롤과 비슷한 개념이다
[36]
관제탑 또한 항공기의 CVR과 처럼 VCCS(Voice Communication Control System)의 녹음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관제탑의 주파수 통신뿐만 아니라 VCCS기기를 통한 다른 관제탑간의 대화 내용 및 전화내용까지 녹음된다.
[원본]
다음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data.ntsb.gov/Docket/Document/docBLOB?ID=40404231&FileExtension=.PDF&FileName=ATC%203%20-%20Exhibit%203C%20-%20Air%20Traffic%20Control%20Transcript%20-%20Tower-Redacted.PDF
[38]
외부 전화 라인
[39]
아가나타워 담당 관제사 Marty Irvin Theobald의 운영 이니셜
[40]
괌 관제소 담당 관제사 Kurt James Mayo의 운영 이니셜
[41]
엄청난 높이로 비행기가 급하강, 상승을 반복해서 식판이 날아다니고 서 있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42]
참고로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은 801편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DME가 니미츠힐 위에 설치되어 있다.
[43]
관제사의 관제 화면에 경고가 뜨고 그것을 관제사가 조종사에게 알려주며 지형지물에 대한 경고를 하고 상승이나 복행을 지시한다.
[44]
당연히 이 거리에서는 MSAW 서비스를 할 필요가 없다. 이 구간까지는 지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최종 접근 절차 지역 밖이기 때문에 이 정도 거리에서는 보통 전이고도 이상의 중고도 이상으로 비행한다.
[45]
대표적으로 ILS는 작동하지 않았지만 최저고도 경고 마커는 정상 작동 중이었기 때문에 정상 고도보다 한참 낮은 고도로 지나가자 비행기는 계속 경고를 울려댔다.
[46]
많은 사람들이 공군 조종장교는 모두
공군사관학교 출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공군 조종장교는 공군 ROTC와 조종장학생을 통해 또 뽑는다.
[47]
대한민국 해군
항공
병과 장교는 의무복무 10년이며, 2016년 기준으로 공사의 조종장교 의무복무는 15년이다. 조종장학생, ROTC는 13년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8년이었다. 이는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기의 조종사들은 의무복무 8년 혹은 그 이하로 추정된다.
[48]
물론 김포-괌 간 왕복 비행시간이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8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딱 채우는 바람에 초과근무 수당이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 박 기장이 신세한탄 비슷한 것을 하거나 야간 비행으로 피로를 호소하는 발언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조종실의 분위기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고, 801편이 한국 비행기임을 안 관제소가 한국어로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하자 재치있게 "수고하십시오." 라고 응답해 주는 등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여름철의 대표 피서지인 괌에 거의 도착하자 "여기가 괌이야. 괌 좋네." 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다.
[49]
남석훈 기관사 1939년 생, 박용철 기장 1953년 생, 송경호 부기장 1955년 생.
[50]
아웃라이어 한국어판에는 한국어 녹취록을 영어로 번역한 글을 한국어로 역번역했는지 "기상레이더 덕 많이 본다", "그치, 정말 쓸모 있지"로 표현했다.
[51]
당시 대한항공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 승무원 이윤지(당시 24세)씨가 그녀를 안고 비행기에서 탈출했는데, 이윤지 씨는 전신에 화상을 비롯한 큰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생존해 사고 후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리카 양이 이윤지 씨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
[52]
참사 당시 한국 방송사들이 그녀에게 인터뷰를 했는데, 21세기에는 어머니를 잃은 아이에게 그 참상을 묻는
기레기 짓을 했다며 욕을 먹고 있다.
[53]
460병의 양주가 전부 다 깨져 그 내용물이 한데 모였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54]
뉴질랜드 민간항공국이 위험성 자체를 인정한것도 사실이거니와
반차오댐 붕괴 사고: 2000년에 한 번 올 재앙적인 비가 온 경우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RBMK식 원자로는 '이렇게만 운용하지 않으면 절대 안 터진다'는 10여 가지 단계에 달하는 실수와 오판과 설계 결함이 기적적으로 한순간에 겹쳐짐 /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 부기장이 콕핏을 폐쇄하고 고의적으로 비행기를 추락시킴 /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정비 불량으로 인한 벌크헤드 파손으로 모든 유압계통을 상실하여 추락 등등.
[55]
사고 이후에는 코로나로 폐업한 뒤 인도인이 인수했으나 리모델링을 하기에는 너무 낡았고 재건축을 하자니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풀린 것도 아니라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방치되고 있다. 그래도 2023년 기준으로 괌에 해병대 기지가 지어지면 수요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지 건축 인부들이 이동한다고 한다.
[56]
몽베르CC와 에이스저축은행 등을 인수하며 사업을 확장했지만 에이스저축은행이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터지면서 검찰 수사를 받자 자살했다. 이후 에이스저축은행은
하나저축은행에 인수되었고 몽베르CC는
대유그룹으로 넘어갔다.
[57]
1985~1997. 이 비행기로 사망하기 전까지 다녔던 서울 서초초등학교 측은 당시
여름방학 중이었으나 사고 이후 박 군의 동창이었던 당시 6학년 학생들을 학교에 비상소집하여 추모식을 가졌다. 영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천천히 돌고 떠났다.
[58]
박주희 양을 구한 사람은 생존 승무원인 손승희(당시 25세) 씨로 밝혀졌다. 손승희 씨는 당시 자신이 크게 위로가 됐을 지 모르겠지만 자신도 박주희 양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상술했듯이 또 다른 생존 승무원인 이윤지(당시 24세) 씨도 일본인 소녀를 구했으니 생존한 승무원 두 명이 소중한 생명을 살린 셈이다. 참고로 손승희 씨는 회복 후 복직하여 현재도 대한항공에서 근무 중이다.
관련 링크
[59]
여담으로 저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김재철이다. 반면
KBS 취재 당시엔 소현정 기자가
맡았다.
[60]
이 과정에서
이정근 前 민주당 사무부총장과 인연을 맺어
재혼한 것으로 보인다.
<인성공부>라는 책을 공동으로 저술했다.
[61]
이로 인해 이정근 前 부총장은
돈봉투 수수 의혹으로 구속된 와중에도
남편상을 사유로 일주일간 구속집행정지를 받아냈다.
[62]
정경애는 이 날이 바로 자신의 생일이었으며 1997 한국방송대상 여자성우상 후보로 오른 상태였다.
[63]
각각 1982년
KBS 17기, 1977년
DBS 8기(이후
언론통폐합으로 KBS 15기로 편입)로 데뷔했다.
[64]
2003년 6월 기준, '2004년 건설교통부 교통통계 및 문헌조사' 자료 참조.
[65]
1946년생으로, 1994년경에 <뉴스초점> 진행을 맡았다.
[66]
아내도 같이 이 사고로 사망했다.
[67]
한편 해당 지역구는
그 해 대선과 같이 열린
재보궐선거에서
이영일 전 의원이
무투표 당선되었다.
[68]
AFN에서 뉴스를 공급한다.
[69]
동년 4월 1일 시행.
[70]
한국의 '일부라는 이름의 대다수 몰지각한
언론인들'은 이런 행태를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까지 고치지 못했다. 실제로 해당 참사 유가족이 '그들에게 저희는 피를 흘리는 원숭이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하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원숭이. 그들이 저희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그냥 구경거리 같았다. 상처투성이로 아무 준비가 안 된 채, 벌거벗겨진 채, 기자들에게 이용 당했다.'고
표현한 적도 있다.
이런 추악한 행태는 한국 대중들의 언론인 혐오 정서로 이어지게 되었다. 2020년대 이후론 한국 언론의 이러한 행태가 많이 없어졌지만, 다른 여러 나라의 언론 중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관행을 보이는 곳이 많은데 특히 대만 언론이 지금까지도 이러한 행각으로 악명이 높다.
[71]
더군다나 당시 제1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의
신기하 의원이 이 사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명백한
고인드립이다.
[72]
사실 상술했듯이 13년이라는 기령은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한 정도로 아직 장거리에 주력으로 투입할 수 있는 수준이다. 사고기 역시 후계 기종인 747-400가 도입되었음에도 함께 LA와 같은 대한항공의 주력 장거리 노선에 꾸준히 투입되었다.
사고 2년 전인 1995년, 후계 기종인 747-4B5의 1호기인 HL7477과 함께 LA에 주기된 사고기의 사진. 꼬리날개에 HL7468이라는 번호가 선명하게 보인다.
[73]
그러나 해당 광고는 이미 1997년 상반기부터 했는데 동년 5월
프랑크푸르트 취항을 알리는 자막이 나온 버전도 있다.
[74]
모델은
박주미와
최지나가 맡았다.
[75]
심지어 기령 6년 차의
MD-82나
포커 100 조차 풀 글래스 콕핏이 장착된 B737NG가 들어오며 죄다 퇴역시켰다.
[76]
여담으로 1997년 당시 KE805편은 대한항공 김포-괌 오전 출발 항공편이었다.
[77]
이렇게 된 데는 이 사고보다는
중국 노선의 확장(중국 노선이 2000년대부터 800번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78]
KE111편으로 바뀌면서 출발 시간도 바뀌었다. KE805편 당시에는 인천에서 20시 10분에 출발했으나 KE111편 이후 현재는 19시 30분에 출발한다.
[79]
2007년에는 보잉 777-200ER이였다.
[80]
특히 저비용 항공사들이 오전에 출발하는 데 반해 대한항공은 이때와 같은 저녁 출발편만 있어서 선택의 폭이 좁았다. 증편된 항공편은 오전에 출발한다.
[81]
복직 직후에는 객실 훈련원 강사로 근무하다가 사무실 근무를 했었다고 한다.
[82]
여담으로 생존 승무원들은 모두
크리스천이었고, 나이도, 대한항공에 입사한 시기도 비슷했다. 따라서 생존 승무원들은 친분이 서로 깊었다고 한다. 또한 손승희 씨는
MBC 뉴스데스크에서 추락 직후 생존자로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83]
Denis Van Akiyama. 1952년 캐나다
토론토 태생의
일본계 캐나다인으로, 여러 편의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비디오 게임의 성우도 다수 담당했다. 2018년 희귀암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