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0:46:42

제너럴 슬로컴호 화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제너럴 슬로컴호 침몰.jpg

1. 개요2. 제너럴 슬로컴호3. 전개4. 이후

1. 개요

1904년 6월 15일 미국 뉴욕 주 이스트강에서 일어난 해상 화재.

2. 제너럴 슬로컴호

파일:제너럴 슬로컴호.jpg
제너럴 슬로컴호는 남북전쟁 당시 활약한 헨리 슬로컴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증기선으로, 뉴욕에 위치했던 조선회사 Brooklyn boatbuilder와 Hoffmire & Son에서 만들었다. 1891년 첫 항해를 시작했다. 떡갈나무와 소나무로 지어진 이 배는 길이가 약 80m(254피트)의 당시로선 큰 배였는데, 최대 2,500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배는 전체적으로 하얗게 칠해졌고, 배 굴뚝과 난간, 메인 덱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양 옆에는 외륜이 달려있었는데, 두께는 2.7m, 직경 9.4m로 보일러로 동력을 얻어 최대 15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배 2층에는 자연광이 들어오는 큰 바가 있었다.

제너럴 슬로컴호는 니커보커 스팀보트 회사(Knickerbocker Steamboat Company) 소속이 되어 뉴욕 맨해튼에서 록웨이 까지 오고가는 항해를 계속해서 해왔다. 탑승료는 약 50센트였다. 항해를 하면서 다른 배나 암초와 부딪히는 크고 작은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러면서 중상을 입거나 경상을 입은 사람들도 나왔다. 이후 더 큰 증기선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슬로컴호는 점차 시대에 뒤쳐졌고, 그러면서 회사에서도 관리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구명조끼는 구멍나 썩을 때 까지 방치됐고, 소방호스마저 군데군데 끊어져있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도 계속해서 일어났는데, 항해를 시작한지 4달 만에 모레 언덕에 박는 바람에 예인선이 끌고 와야 하는 일이 있었고, 1901년에는 술취한 승객들 때문에 해상 폭동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1904년 사고가 있기 전 까지 사망자는 없었다.

3. 전개

파일:제너럴 슬로컴호 화재.jpg
1904년 6월 15일 오후 9시 30분, 제너럴 슬로컴호는 1,342명의 탑승객을 태운 채 이스트강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선장은 반 샤이크(Van Schaick)였다. 승객은 성 마르코 루터 교회 신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교회에서 배를 전세 내 소풍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주일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소풍 때 먹을 간식이 등 바구니를 든 여성들도 많았다. 이들 중 대다수는 독일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당시 규정대로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은 표를 받지 않고 탔는데, 그 수가 무려 300여명에 달했다. 원래 예정대로면 2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배 내부 건초더미 창고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얼마 안가 옆의 창고로 번졌다. 창고엔 페인트와 휘발유가 있어 불길이 순식간에 커졌다. 한 어린아이가 화재를 목격하고 선장에게 보고했으나, 선장은 어린아이가 장난치는거라 생각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불은 진짜로 난 상태였고, 점차 커지며 배를 운항할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불을 못 견딘 배의 일부가 무너지기까지 했다.

맨해튼 항구에선 화재를 목격하고 선장에게 소리쳤다. 선장은 사태를 그제서야 파악하고 배를 다시 항구로 돌렸다. 134번 가에 있는 부두로 형했다. 하지만 인근 예인선의 성장이 부두에도 화재가 번지는 걸 염려해 경고했다. 선장은 배를 다시 돌려 인근 노르 브라더 섬(North Brothers Island)으로 향했다. 그곳엔 모래사장도 있어 사람들이 쉽게 헤엄쳐 나오리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살리려고 구명조끼를 입히고 바다에 뛰어들게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구명조끼는 썩은 상태라 오히려 물을 흡수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든 아이들은 다시는 떠오르지 못했다. 선원들은 화재 대비 훈련을 하지 않아 어찌 할줄 모르고 헤매기만 했고, 소방호스는 안쓴지 몇년이나 된 상태라 바로 끊어져 버렸다. 구명정 마저 철사로 고정되어 있어 풀지 못했다. 사람들은 배에서 바로 뛰어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아예 몸에 불이 붙은 채 뛰어내린 이들도 있었다. 몇몇은 아직 작동중인 배의 외륜 쪽으로 빨려들어가 그대로 익사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부는 바람은 불을 키우기만 했다.

노스 브라더 섬의 병원 직원들은 장티푸스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쁜 와중에 화재가 일어난 걸 목격하고 바로 달려가 부상자들을 구조했다. 배는 육지로 부터 약 25피트 남긴 지점에허 멈춰섰고, 소방선과 소방차들도 달려와 불을 진압했다.

사고로 최소 965명이 사망했다. 한 임산부는 혼란 와중에 아이를 출산하고 그대로 아이와 함께 사망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라 사망자가 더 오르기도 해 더 자세한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고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 뉴욕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4. 이후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담배를 피던 사람 때문에 일어난 실화라는 설만 있다.

​언론에서는 늑장대응을 두고 슬로컴호를 슬로우 컴(Slow come)이라며 비난했다.

성 마르코 루터 교회는 신도 상당수를 잃어 교회로써 일을 제대로 행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이후 1946년 요크빌의 지온 교회에 합병됐다.

마찬가지로 독일 이민자들이 주로 살던 곳인 리틀 저매니 또한 상당수의 사람을 잃어 영향을 잃었다.

1906년 1월 27일, 선장 반 샤이크는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 간 노동형을 받았다. 회사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제너럴 슬로컴호는 다시 건져진 뒤 바지선으로 개조되어 활용되다 1911년 폭풍우를 만나 침몰했다.

뉴욕 퀸즈의 공동 묘지에는 제너럴 슬로컴 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 인근 톰킨스 스퀘어 파크에는 추모 분수도 설치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