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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7B938><colcolor=#000> 청제(青帝) 복희씨 伏羲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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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태호 복희씨(太皞 伏羲氏) | |
제호 | 청제(青帝) | |
성 | 풍(風) | |
휘 | 복희(伏羲) | |
생몰 기간 | <colbgcolor=#F7B938><colcolor=#000> 음력 | ? ~ ? (기원전 2800년경에 살았음) |
재위 기간 | 음력 | ? ~ ? |
[clearfix]
1. 개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 또는 전설상의 제왕으로, 태호 복희씨(太皞 伏羲氏)로 보통 부른다. 인간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1]기원전 2800년 전에 최초의 인간사회를 탄생시켰다고 전해지는 문화영웅(Culture Hero)이며, 그가 세운 나라는 진(陣)나라라고 한다. 신농(神農), 헌원(軒轅) 또는 여와(女媧)와 함께 문명을 건설한 삼황(三皇)의 일원으로 숭배받았고 그 중에서도 시대상 가장 앞에 위치해 있다.[2] 실제로 그는 역대제왕묘에서도 삼황오제 중 첫 번째로 모셔져 있다. 그 행적이나 신격에 대한 전승은 다양하나, 세계의 실질적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신화에 따르길, 대홍수로 대지가 물로 덮일 당시, 복희와 여와만이 곤륜산으로 들어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신성한 존재는 그들의 결합을 승인하고, 이들의 결합을 통해 인류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기원전 2852년~기원전 2737년(총 115년) 혹은 기원전 2952년 ~ 기원전 2836년(총 116년) 동안 세상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197년 동안 살다가 현대의 혜난인 '첸'이라는 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3]
2. 신화에서의 면모
보통 대모신(大母神) 여와와 짝을 이루는 남성 시조신으로 여겨지는데, 여와와의 관계는 오누이 설, 부부 설, 오누이면서 부부 설, 둘이 관계 없다는 설 등이 있다. 사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 헤라나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 - 이시스, 일본신화의 이자나기 - 이자나미처럼 제왕의 계보 꼭대기에 있는 신들이 남매면서 부부인 건 세계적으로 특이한 일도 아니다. 문명의 효시가 되는 성인(聖人)이 근친상간자라는 전승을 수용할 수 없었던 후대인들이 복희와 여와를 혈연이 아닌 부부로, 나아가 당나라의 사마정에 이르면 여와를 복희의 수 세대 후 후손으로 재설정하게 되지만, 복희-여와가 한 세트로 등장하는 고대 기록이나 소수민족 설화를 살피면 남매혼 관계가 이 커플 서사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대(漢代)에 복희와 여와는 사람 머리에 뱀의 몸을 한 한 쌍의 신으로써, 흡사 DNA와 유사한 형태로 서로의 꼬리를 얽어매고 우주의 모든 것에 존재하는 양(남성)과 음(여성)의 원리를 나타내는 도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여와와의 관계와는 별도로 복희라는 신 자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전승마다 묘사되는 수준이 많이 다르다. 어떤 경우에는 음(陰)의 원기(元氣)의 화신인 여와와 짝을 이루는 양(陽)의 원기의 화신으로서 둘이 어울려 자연세계 그 자체를 탄생시킨 우주적 스케일의 창세신으로도 여겨지며, 또는 팔괘를 만들고 불과 그물의 사용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줘 인류를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준 문명의 창시자로도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세계를 휩쓴 홍수 속에서 누이(여와)와 함께 조롱박을 타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맺어진, 현생 인류의 혈연적 시조일 뿐 어떤 초자연적인 신통력은 없는 남성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차후에는 오방상제(五方上帝)라는 관념적 세계관과 결합하여 동황(東皇)/청제(靑帝)와 동일시되면서 동방의 신이자 봄의 신,[4] 태양신으로까지 간주되기도 했다.
전한 시대 지배층의 무덤인 마왕퇴의 명정(銘旌)에 그려진 그림에도 복희씨가 나오는데 하늘 맨 위 가운데에 자리잡고 좌우에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새라는 '란'(鸞)이 있으며 오른쪽에 해가 있지만 아홉 개 밖에 없고, 복희씨를 포함해야 열이 된다. 이 그림의 화가는 복희씨를 해의 신이자 하느님으로 여긴 듯 하다.
동방의 상제인 그를 보좌하는 신은 나무의 신 구망(句芒)으로, 서방 상제인 소호 금천씨의 아들 중 한 명인 중(重)이었다.
한편 유학계에서 복희는 신화에서와 같은 뱀의 몸에 우주적 신통력을 가진 모습 대신, 인간을 무명(無明)의 야생에서 구제한 최초의 성왕이자 최초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사기 <삼황본기(三皇本紀)>[5]에 따르면 복희는 성이 풍(風)씨요, 황하 중하류 유역의 성기(成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처음으로 불을 피운 수인씨와 화서(華胥)라는 여인[6]의 아들이며, 혹은 뇌택에서 화서가 거인의 발자국을 딛고 홀로 얻은 아이라고도 한다. 그는 머리를 제외한 온 몸에 용 문신을 새긴 사내였다.[7] 중국 문화에서 용은 힘과 지혜, 행운의 상징인데 복희는 인간에게 용을 포함한 신비한 생물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나온다.
하늘이 내린 총명함과 어짊을 타고난 그는 자연을 깊이 관찰하여 그 참된 이치를 체득, 그것을 알기 쉬운 직선 도형의 형태로 코드화하여 세상 만물을 표현해냈는데 그것이 팔괘다. 즉 중화문명권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우주를 음(陰)과 양(陽)의 이원적 조화와 작용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복희가 처음으로 창안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아는 팔괘[8]를 복희팔괘라[9]고도 한다. 또한 아직 문자가 없었던 당시 사회에서 복희는 서계(書契, 의사소통을 위한 원시적인 부호)를 고안하여 비로소 인간은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일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도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존재로서, 태극도를 통해 음양의 이치를 처음으로 깨달은 위대한 지인(至人)으로 여겨진다.
거기에 당시 중국인들에게 그물 낚시, 사냥, 철제 무기 사용법, 요리, 동물 사육, 음악, 악기, 글쓰기, 양잠 및 직물로 실을 짜는 법을 가르쳤고, 제방, 운하 및 관개 도량을 파서 황하 물을 길들이고,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창시했고, 당시 도덕과 사회적 질서가 없는 인류의 법을 창시했다. 즉 복희 이전의 인류는 그저 무리 생활을 하고 두 발로 걷는 동물 무리였을 뿐 짐승과 차별화되는 점이 없었는데, 복희가 지혜로 그들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자연상태의 동물성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복희는 조물주와는 다른 의미에서 인간의 창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상서》가 요전(堯典)에서 시작하는데서 보이듯 유교의 본격적 조사인 공자가 살던 시기에는 복희라는 상고의 군주 자체가 인지되지 않았다. 이는 전국시대에 살던 맹자도 마찬가지로 그의 《맹자》에 신농까지는 언급이 되나 복희는 등장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저술된 《장자》에서도 황제(黃帝)는 나와도 태호나 복희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구제강이 '고사의 누층 조성설'이라고 정리해 제기한 이론에 따르면 중국 전설에서 더 이른 시기에 군림한 것으로 설정된 인물일수록 실제 역사 기록상의 첫 언급은 오히려 후대의 기록에서나 발견된다고 한다. 즉 옛사람을 존숭하는 풍토가 컸던 고대 중국에서 자신의 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후대의 인물일수록 '선왕(先王) 이전의 선왕'을 창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로 인해 전국시대까지는 남방 '오랑캐'들의 창조신화 속 존재였던 복희가,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신농과 황제 이전의 제왕으로서 호출되어 괴력난신의 색채가 벗겨지고 유교적 지성군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남방의 소수민족, 묘족-요족의 전설에서는 기이한 형상과 신통력도, 제왕적 지혜와 인덕도 없는 소박한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복희 신화가 또한 전한다. 뇌공(雷公, 천둥신)이 인간계를 홍수로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복희의 아버지에게 붙잡혔는데, 뇌공을 풀어준 복희와 여와를 뇌공이 살려줌으로써 그의 조언을 얻어 둘만 살아남았다. 인류가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인류를 번창시키기 위해서는 남매끼리 성교를 해야 하는데 이는 도덕적 금기를 어기는 것이므로[10] 주저하였다. 고민 끝에 남매는 각각 산의 두 봉우리에 올라 연기를 피우고, 각각 피운 연기가 하나로 합쳐지면 동침을 신의 뜻으로 알자 하여 행했더니 과연 연기가 하나로 합쳐져서 망설임없이 두 신이 결혼하여 인류를 낳았다고 한다.
혹은 자신들이 타고 온 조롱박 두 쪽을 산 위에서 굴려 구르는 와중 양쪽이 꼭 합쳐졌다는 버전도 있으며, 여와가 자신을 잡으면 혼례를 치러 주겠다고 하며 나무 둘레를 계속 빙빙 돌자, 복희가 꾀를 내어 여와를 쫓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빙글 돌아 자기한테 달려드는 여와를 품에 안았다고도 한다.[11]
또한 그가 홍수로써 이루어진 세상의 재탄생과도 관련이 깊어, 곤의 의지를 받들어 치수 작업을 이어나가는 우(禹)와도 만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가 치수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동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뱀과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는 신이 바로 복희씨였다고 한다.
2.1. 해석
아무튼 이렇게 복희(그리고 여와)는 전승에 따라 '우주적 역능을 지닌 뱀 몸의 창세신', '동방을 다스리는 봄과 태양의 신', '인간을 동물로부터 상승시킨 문화적 시조', '현생 인류의 혈연적 시조' 등 다양한 면모를 파편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본래 단일한 신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방, 다른 공동체에서 숭배받던 서로 다른 자연신/조상신이 '태호 복희씨'라는 이름 아래 습합한 과정으로 보인다. 즉 춘추 - 전국 - 진/한을 거치며 중국 문명권이 넓어지고 또 전란과 통일정책 속에서 한데 뒤섞이면서, 각자 전혀 다른 집단에서 다른 기능으로 숭배받던 존재들이 어떤 연상작용에 의해 동일시된 결과가 '성은 풍씨요 이름은 복희며 별명은 포희고 시호는 태호에 제호는 청제인' 이 신이다. 본래 서로 다른 이름과 기능을 가진 신들을 죄다 동일인으로 간주하면서 그 여러 이름들을 당시의 유교적 이름 전통에 따라 어거지로 짜맞춘 결과라는 것.이는 다른 삼황인 신농-염제[12], 헌원-황제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 신화에서 으레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의 건국신화만 봐도, 우리가 일반상식으로 알고 있는 '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주몽' 역시 이러한 습합의 결과물이다.[13] 그리고 '동명'과 '추모'가 합쳐져 '동명성왕 주몽'이 된 것과 유사한 일이, '태호 복희씨'에서도 일어난 셈이다. 학설에 따르면, 원래 전설상으로 태호(太皞)는 제수(濟水)[14] 일대의 부족들과 파나라의 공동 시조신이었고, 복희(伏羲)는 초나라의 시조신이었다. 즉 별개의 인물이었는데, 전국시대 진나라에서 편찬한 《세본》에서 동일 인물로 서술하자 이후부터 동일인으로 서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화의 남쪽 변방의 신화 출신인 본기가 <삼황본기>에서 황하 유역 곧 중원 태생으로 설정된 것도 태호와 습합한 영향으로 보인다.
또한 위의 소위 '조롱박 남매 신화' 역시 남방 묘만(苗蠻)족의 설화이기에, '종족의 기원담'과 '인류의 기원담'이라는 유사성의 연상작용으로 인해서 홍수에서 살아남은 오누이와 창조신 커플 간의 느슨한 습합이 이루어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15] 이러한 연상은 개별 신화의 내용이, 그 대상은 자연세계/문명/인간종(種)으로 각자 다를지언정 세계의 기원담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는 점에서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즉 창세신부터 동양판 노아까지 통일되지 않은 다양한 면모를 가진 복희지만, 그 각각의 면모를 관통하는 본질적 개성은 기원자(起源者), (자연/문명/인류의) 제1 시조로서의 성격에 있다고 하겠다.
한편 세계를 木火土金水의 오행(五行)과 그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은 전국시대부터 발생해 중국인이 세계를 설명하는 주요한 패러다임으로 발전해갔으며, 한대 동중서에 의해서 유교적 세계관과 결합하면서 관념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된다. 이 헤게모니로서의 음양오행설에 대한 중국인의 강박은 어마어마해서,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을 다섯 범주로 나누어 목화토금수에 억지로라도 배속해가며 세계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오행이 관념상의 당위가 되면서 현실이 당위에 끼워맞춰진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의 악기도, 인간의 장기 부위도, 감정도, 별자리도, 관직도, 모든 것이 오행에 따른 5개 범주를 얻게 되었고 이는 신(神)도 마찬가지였다. 세계가 동서남북중앙의 5방으로 나뉘자 그 주재자인 천제(天帝)도 청백적흑황의 5제로 나뉘어 배치되고, 각 방위의 상제가 해당 오행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최상위 인격으로 설정되었다.
즉 청제(靑帝)란 원래는 정말 관념상의 존재로, 오행 중 木의 원리를 지배하고 주재하는 상제(신)였다. 그것은 주몽같은 시조신이나 제우스같은 자연신과도 조금 다른, 관념이 선재하고 그 관념에 의해 탄생한 철학적인 신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오행강박이 상고의 성인들에게도 미치면서, 그저 위대한 시조이자 탁월한 통치자였던 그들이 오방상제와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염제 = 신농, 황제 = 헌원은 그 이름에서부터 쉽게 火의 화신인 적제, 土의 화신인 황제와 동일시되었으며[16] 오행의 상생원리 상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으므로[木生火火生土] 둘보다 선대인 복희는 자연히 木의 제왕으로 비정되었고 靑帝와 동일시된 것이다. 나아가 오행에서 木은 만물이 갓 생성되어 약동하는 작용을 상징하므로, '기원자'이자 '제1 시조'인 복희의 역사 계보 내 지위와도 부합하였다.
그리하여 복희는 그 본래의 서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동방에 관념적으로 배치된 것이고, 나중에는 급기야 그러한 관념적 부회가 소급적용되어 동이 출신의 제왕이라는 인식까지 벌어지게 된다. 현재 중국이 민족 통일을 위한 역사공정 과정에서 복희를 동이의 인물로 소개하는 것은, 전근대 학문계에서 벌어진 관념의 강박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동이를 하나의 민족집단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 있으며, 나아가 이를 가지고 '복희는 한국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과 부회를 거듭해야 가능한 무리수이다. 복희를 한민족의 인물이나 신으로 추정할 실증적 근거가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17] 따라서 복희 동이설은 과거 치우 한민족설과 유사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 혹은 현대의 정권발 신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대중매체에서
- 고전 소설 《 봉신연의》- 신계를 다스리는 3명 중 하나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로 나오지만, 실제 등장은 거의 없다.
- <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히든 캐릭터 - 복희(무쌍 오로치 시리즈)
- 《 작안의 샤나》 - 《작안의 샤나》의 최종 보스인 제례의 뱀이 플레임헤이즈에 의해 봉인되기 이전에 사용했던 통칭이라고 한다. 하지만 작중에서는 주인공이자 대행체인 사카이 유지의 몸에 깃들어 있으므로 통칭 역시 사카이 유지를 사용하고 있고, 복희는 Q&A에서만 언급되고 작중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 《 전생검신》에 등장하는 신격 - 무협소설인 《 전생검신》에서도 등장한다. 자세한 것은 복희 항목으로.
- < 바람의 나라> - 복희&여와
- Nine Sols - 복희(Nine Sols)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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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 인두사신(人頭蛇身), 어떤 때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함.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의 몸이라는 말도 있다.
[2]
혹은 여와를 복희보다 먼저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서 그보다 먼저 존재했던 여와 시대는 원시 모계 사회로, 이 시대 출산에 대한 개념은 남성과 어린 아이가 배제된 기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다 번식 과정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중국 사회는 가부장적 시스템으로 옮겨져갔고, 그 첫 상징이 복희라는 것이다.
[3]
중국 정부는
1996년부터 복희의 무덤을 민속문화 보호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 삼황 복희의 무덤은 중국 중부 허난성에 있다고 하는 우아이양에 있는데, 수천년의 시간동안 숭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무덤은 무려 3,000여 년부터 존재해온 곳으로, 8개의 삼자명을 반영하기 위해 건물과 식물이 거대한 복합 건물에 배치되었다. 복희의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구멍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데 오래 전부터 여성 숭배자들은 행복한 결혼생활과 자녀들의 건강을 위해 사아렌 동굴 입구의 초석에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문지르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전설에 의하길, 복희의 무덤에 있는 자리는 그가 결혼을 결정하기 위해 젊은 남녀들을 모았다고 하는 장소라고 한다.
[4]
한시 등에서 東皇이나 靑帝는 흔히 봄의 신 또는 봄 자체의 인격화로 간주된다.
[5]
단 <삼황본기>는 사마천의 저술이 아니며, 한참 후 당대의 학자 사마정(司馬貞)이 추가한 것이다. 사마천은 신화적이고 허황된 이야기를 역사로 취급하기 꺼려했기에, 그가 중국사의 시작으로 잡은 것은 오제의 첫고등인 황제 헌원씨였다.
[6]
혹은 화서국(華胥國)의 여인. 《
열자》에서는 황제(黃帝)가 꿈 속에서 찾아간 나라가 화서국이라고 하며, 그곳 사람들은 욕심이 없고 정부가 없어도 서로를 보듬고 아끼며 평화로이 살았다고 한다. 고사성어 화서지몽(華胥之夢)의 유래다.
[7]
이는 <삼황본기>를 지은 사마정이 인두사신(人頭蛇身)이라는 복희의 전승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괴력난신을 배척하는 유학자인 그는 자연신적 존재였던 복희의 원형을 인간 통치자의 모습으로 재구성해야 했던 것이다.
[8]
건괘가 제일 위에 있고, 곤괘가 제일 아래 있는 팔괘.
[9]
이와 대비대는 것은 문왕팔괘이다.
[10]
유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 시대지만, 근친상간 금기는 유교와 무관하게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매우 오래고 보편적인 금기므로 이상할 것은 없다.
[11]
이 이야기는
일본 신화의
이자나기-
이자나미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일본 기기신화가 상당히 후대에 정치성을 가지고 지어진 이야기임을 감안하면, 복희-여와 설화를 의식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12]
전국시대 문헌에서 신농과 염제는 엄연히 별개의 인격이었으며, 염제는 신농에 대항해 반역을 도모하기도 했다!
[13]
부여계에서 갈라져나온 고구려의 시조신 또는 건국영웅인 추모(주몽)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이 별개로 존재했는데, 고구려가 부여를 삼켜버리면서 추모와 동명의 동일시가 일어나고 동명의 신화 서사가 추모의 것으로 흡수되어버린 것. 나아가 고려-조선시대에는
해모수가
단군 또는
환웅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14]
지금의 황하 강 유역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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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서로 따로따로 존재하던 남녀 창세신 신화가 오누이 설화와 결합하면서 남매 커플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고, 인두사신의 남매신 신화가 기존부터 존재하다가 오누이 설화와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세 케이스가 모두 별개로 존재하다가 연상작용에 의한 동일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16]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는 이미 전국시대 문헌에서부터 이름이 보이므로 오방 상제의 정립 이전부터 존재하던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이때까지만 해도 일종의 독립적인 고유명사였지, 백제나 흑제 등을 상정한 대응기표로서의 이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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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상의 인물에게 출신 운운하는 것도 넌센스지만, 굳이 따지자면 복희는 남방계에서 비롯한 신으로 보는 것이 옳다. 복희라는 이름의 기원이 초나라의 시조신이며, 조롱박 남매 신화도 남방 소수민족의 전승이고, 위의 마왕퇴 유적도 중국 남부 후난 성에 있다. 하물며 상단의 복희여와도가 발견된 아스타나 고분은 중국 신장자치구에 위치하여 중국 본토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어서 고조선-고구려 강역과 오히려 더 멀어졌다. 거기다 전국통일 이전 중국의 협소한 규모를 생각하면 '중원 동쪽'의 범위는 엄청나게 넓어지고, 이 시기 중국에 중화민족이란 것이 없었듯이 한민족이라는 민족공동체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 고대에 고조선 지역 쪽에 복희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손 쳐도 그들이 이후 한국사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는 보장은 없고, 오히려 그들의 신앙과 문화가 중원에 흡수 및 계승되었다면 이들 원시 복희공동체를 한민족의 원류라고 규정할 이유나 필요성이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