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41:20

효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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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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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제4대 국왕
효문왕 | 孝文王
생몰 <colbgcolor=#fff,#191919>기원전 302년 ~ 기원전 250년 (52세)
재위 기원전 250년
영(嬴)
조(趙)
주(柱)[1], 식(式)[2]
봉호 안국군(安國君)
부모 부왕 소양왕
왕후 화양부인
자녀 진 장양왕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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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秦)나라의 29대 군주이자 제4대 왕. 휘는 주(柱) 혹은 식(式). 기원전 250년에 즉위하여 3일간 통치하고 죽은 비운의 군주.

2. 생애

소양왕의 차남이었지만, 장자였던 도태자[3]가 위나라에 인질로 있던 중 죽어서 태자가 되었다.

태자 시절에 '안국군'(安國君)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20명 이상의 자식이 있었는데 서자 중에 이인(異人)의 어머니인 하씨를 총애하지 않은 데다가 그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인을 진나라의 숙적인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정실부인인 화양부인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는데, 서자가 후계자가 되면 힘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화양부인이 이인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안국군을 설득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효문왕 원년(기원전 250년), 소양왕이 사망하자, 죄인을 사면하고 부왕 때의 공신을 표창하면서 친척들을 후대하고 정원을 개방했다. 그런데 소양왕의 상을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지 3일 만에 사망했는데, 너무 급작스런 죽음 때문인지 태자가 된 영이인(장양왕)의 후원자였던 여불위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딱히 증거도 없고 《사기색은》에 따르면 소양왕이 너무 장수하고 훙서한지라, 그 뒤를 물려받은 효문왕의 나이도 이미 52세였는데, 그 당시로는 그 자체로도 고령이다보니 그냥 갈 때가 되어 갔다는 설이 주류이긴 하다. 50대가 평균 수명인 당시 평균 수명으로 보아 효문왕은 어차피 갈 날이 멀지 않았고,[4] 이미 영화가 보장되어 있는 여불위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런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5] 거기다 50대 나이로 상을 치렀다면 몸이 망가질 만도 하다. 고대에 50대면 요즘으로 치면 70~80대의 고령이다. 즉 당시로서는 요절이 아니라 그냥 평균인 셈이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인 자초(이인)가 진왕으로 즉위하였다.

3. 매체에서

김성한의 소설 진시황제에서는 그냥 사람 좋은 태자로만 나온다. 진나라 바깥에선 비루 먹은 말같은 놈이라고 온갖 디스를 당하며 화양부인의 싸바싸바와 여불위의 로비에 넘어가 영자초를 태자에 봉한다. 소양왕이 승하한 후 왕위에 올라 자신의 나이가 이미 50이 넘었으니 벌써 몇년 덤으로 산 셈이라고 하더니만 정말로 3일 있다가 체한 증상을 보이다 죽었다. 작중에서는 왕은 반드시 자연사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의원들의 치료를 막았고 이 때문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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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기록된 이름. [2] 《광홍명집》(廣弘明集)에 인용된 《도공연기》(陶公年紀)의 기록. [3] 시호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4] 심지어 1970년대만 해도 평균수명이 50대라 60살에 환갑잔치를 크게 치렀고 1990년대까지도 그 문화의 여파와 60대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환갑잔치를 대부분 치렀다. [5] 문제라면 자기의 후원자인 자초 역시 수명이 고작 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여불위가 예언자가 아닌 담에야 그걸 염두에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다만 효문왕보다 자초가 먼저 죽었으면 실제로 일이 꼬이긴 했을 것이다. 자초의 장남 은 당시 어린아이였던 것을 감안해 그에게 왕위가 갔다기 보다는 효문왕의 다른 아들이 후계를 이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면 여불위의 큰 그림은 모두 박살나는 것(…). 허나 효문왕의 아버지인 소양왕도 서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외삼촌 위염의 후원을 받아 즉위한 점과 효문왕의 아내인 화양부인이 자초를 총애한 것을 감안하면 화양부인과 여불위가 연합한다면 어떻게든 가능했을 것이다. 변수라면 화양부인이 자초는 그렇다고 쳐도 영정을 총애하느냐 마느냐인데 화양부인에게는 자초 말고 다른 효문왕의 자식을 밀어준다는 선택지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