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07:42:13

의인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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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 懿仁王后
파일:목릉 의인왕후릉.jpg
목릉 의인왕후 능침
출생 1555년 5월 15일( 음력 4월 15일)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사망 1600년 7월 26일( 음력 6월 27일)
(향년 45세)
조선 한성부 정릉동 행궁 석어당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능묘 유릉(裕陵) → 목릉(穆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569년 12월 18일 ~ 1600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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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반남 박씨
부모 부친 반성부원군 박응순
(潘城府院君 朴應順, 1526 ~ 1580)
모친 완산부부인 이수[1][2][3][4]
(完山府夫人 李壽, 1528 ~ 1595)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선조
자녀
양자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임해군(臨海君, 1572 ~ 1609)
차남 - 광해군(光海君, 1575 ~ 1641)
종교 유교 ( 성리학)
전호 효경전(孝敬殿)
존호 장성(章聖)
휘호 휘열정헌경목(徽烈貞憲敬穆)
시호 의인왕후(懿仁王后) }}}}}}}}}
1. 소개2. 생애3. 가계4. 평가5. 여담6. 대중매체에서7. 참고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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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 정비. 성은 박(朴)이고 본관은 반남이다.

2. 생애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외할아버지 문천수 이수갑은 세종 신빈 김씨의 아들인 계양군의 증손자이다. 1569년(선조 2년), 선조 결혼하여 15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소생은 없었다. 결혼 초기부터 후궁 공빈 김씨 인빈 김씨에게 밀려 평생 남편인 선조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공빈 김씨 소생으로 일찍 생모를 잃은 임해군 광해군을 자기 친자식처럼 여겼으며 광해군 세자로 책봉 당시 직접 양자로 들이기도 하였다.

인빈 김씨 공빈 김씨가 죽고 난 이후에 선조의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고 자신의 장남이자 선조의 4남인 신성군 왕세자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후견인인 의인왕후와 여러 의미로 정적이기도 했다. 한편 의인왕후가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나 새 왕비 적통 왕자를 낳으면 인빈 김씨가 밀려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이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맞물려서 지켜주고 있던 셈이었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존재한다.[5]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남편 선조와 피난길에 올랐으나 군민들에게 길이 가로막혀 1595년(선조 28년)에나 선조와 만났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남편 선조와 떨어져 분조를 이끄는 세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을 갔는데 왜군이 철수할 때까지 환도하지 못하다가 2년 뒤인 1599년(선조 32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 중 열악한 피난 생활 등으로 결핵을 앓게 되었고 병세에 차도가 있었지만 점점 불면증, 식욕 부진과 음식을 먹으면 구토하는 증상 및 숨이 가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등의 증상을 앓았고 결국 1600년(선조 33년) 병세가 깊어져 6월 27일에 향년 46세(만 45세)로 끝내 승하하였다. 죽은 뒤에는 유릉(裕陵)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선조 무덤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위치한 목릉(穆陵)의 곁으로 이장되었다.
비망기
대행(大行)이 곤전에 있으면서 두 대비(大妃, 공의왕대비 · 의성왕대비)를 받들어 섬김에
정성과 효를 다하였고, 를 섬김에도 공경을 다하여 한결같이 어김이 없었다.
그리고 외가의 사사로운 일로 요구하지 않았으며,
빈어(嬪御)를 대함에도 은애가 지극하여 그들 보기를 수족같이 할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아이들을 어루만지기를 자기 소생보다 지나치게 하여 항상 자신의 곁에 두기에,
내가 간혹 그 소행을 시험하여 여러 아이들을 장난삼아 질책하면 문득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뒤로 도망가 숨곤 하였는데,
대행 왕비(大行王妃)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 주었다.[6]
평생 동안 조급히 서두르는 언행과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궁인 여종에 대해서도 또한 일찍이 화를 내어 꾸짖지 않았다.
그리고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修飾)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속에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록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仁慈)하고 관후(寬厚)하며 유순(柔順)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아,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어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하는 법이건만,
불행히도 자식을 두지 못하고 수명 또한 길지 못하였으니, 천도는 과연 지각이 있는 것인가.
운명이란 이처럼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 마후(馬后)[7]의 덕행으로도 자식을 두지 못하였고 또 장수하지 못하였다.
내 이에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 선조

의인왕후가 죽은 후 중전의 자리가 비게 되어 훗날 논란의 여지, 큰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이후 51세의 선조는 19세의 인목왕후 김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여 적통인 정명공주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선조의 유일한 적통으로 당시 왕세자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어 광해군 즉위 후에 벌어진 계축옥사 서궁 유폐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3. 가계

  • 친정( 반남 박씨)
    • 아버지 :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
    • 어머니 : 완산부부인 이씨(完山府夫人 李氏)
      • 오빠 : 박동언(朴東彦)
  • 배우자 / 자녀

4. 평가

성격이 좋고 현명하며 됨됨이가 착한 사람이였고 특히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를 잃은 광해군을 직접 품안에 두고 키웠기에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의인왕후는 15세에 선조 왕비가 되었는데 선조의 법적 어머니였던 인순왕후 심씨[8]와 큰어머니였던 인성왕후 박씨[9]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모셔 두 대비들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총애를 넘어서 아예 인성왕후 인순왕후가 의인왕후의 입지를 위해 그녀를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1575년(선조 8년), 의성왕대비인 인순왕후가, 1577년(선조 10년), 공의왕대비였던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의인왕후는 너무나 슬퍼했다고 한다.[10] 이런 의인왕후의 성격은 바로 아버지의 영향이 컸는데 아버지인 박응순은 성격이 검소하고 바른 사람이여서 선조의 국구(國舅, 장인어른)인줄 몰랐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매우 겸손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닮은 의인왕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가 나름 있다.

외모도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유순했던 의인왕후에게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바로 불임. 의인왕후 스스로도 불임 문제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때문에 남편 선조는 많은 후궁들을 들여서 왕자를 생산했는데, 특히 후궁들 중에서 공빈 김씨 인빈 김씨를 총애해서 공빈 김씨에게는 임해군 광해군, 인빈 김씨에게는 정원군[11]을 포함한 4남 5녀를 얻었다. 이처럼 선조 후궁들에게 많은 자식을 낳은 것을 보면 불임의 문제는 선조가 아니라 의인왕후에게 있었던 것 같다.[12]

자식을 낳지 못한 의인왕후가 그녀만의 외로움을 떨쳐내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후궁들과 후궁의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의인왕후는 비록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남편 선조의 자식을 낳은 후궁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었다. 사실 의인왕후는 인빈 김씨를 포함한 후궁들 사이에서 미묘한 입지를 보여왔지만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 양자로 삼아 세자의 어머니, 후견인을 자처해 입지가 더욱 굳건해졌다. 이런 계기를 통해 의인왕후와 광해군의 관계가 모자 관계를 넘어서 정치적 동반자로 바뀌었다. 사실 의인왕후가 광해군을 예뻐하고 키우게 된 이유는 광해군의 친어머니 공빈 김씨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공빈 김씨 광해군을 낳은지 2년만에 산후 후유증(産病)으로 사망하였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선조 임해군 광해군 공빈 소생의 왕자들을 홀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인왕후가 전적으로 공빈 김씨의 자식들인 임해군 광해군 양육을 직접 맡게 되었다. 특히 생후 2년만에 친모를 잃은 광해군이 상당히 불쌍한 아이였기에 그에게 더욱 신경을 썼다고 한다. 광해군도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기에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된 의인왕후를 유난히 어머니처럼 따르게 되었고 심지어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선조는 가장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와 함께 피난을 갔지만 의인왕후는 양자 광해군 내내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선조 후계자 건의(건저 문제)가 가속화되자 정철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광해군 세자로 추천할 만큼 광해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렇다고 광해군 외에 다른 후궁의 자식들도 홀대하지는 않았다. 만약 의인왕후가 선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신성군 양자로 삼았다면 그의 친모인 인빈 김씨의 권한이 커질 가능성이 커서 오히려 광해군을 직접 밀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광해군의 경우에도 생모인 공빈 김씨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고인이라 공빈 김씨이 커져 트러블이 일어날 우려도 없었다. 의인왕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광해군을 끝까지 지원했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이렇게 훌륭하게 내명부를 다스린 의인왕후가 승하하면서 남편 선조 역시 매우 슬퍼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남편 선조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아이를 낳지도 못해 왕비로서의 권위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도 못한 의인왕후는 후궁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친자식마냥 잘해 줌으로서 자신의 자리와 입지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실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며 다른 후궁의 자식이 임금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수긍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 의인왕후는 본래의 성품이 온화하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올바른 마음과 바른 행동을 보였던 왕비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녀는 없었지만 왕비라는 직함으로 후궁들에게 군림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를 않았다는 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은 크지 않았고 광해군의 사람됨을 보고 세자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의인왕후가 광해군의 후견인이 되어주면서 광해군은 물론 걸림돌들이 있었으나 훗날 임금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광해군이 된 후 의심병이 심해지고, 옥사를 저지르는 등 세자시절과 다르게 삐걱대는 이유가 거의 유일한 지원군이자 심리적 버팀목이던 의인왕후가 아버지 선조보다 일찍 사망한 것이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영창대군 이전에도 비슷한 신성군이 있었지만 그는 의인왕후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의인왕후가 더 장수해서 선조보다 오래 살았다면 불씨들도 없었을 테고 정실 왕비의 지지까지 얻는 광해군의 정통성은 더이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13][14] 덧붙여서 의인왕후가 만일 매우 장수해서 대비의 자리까지 앉았다면[15]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저지를 일도 없었을 것이고[16], 그로 인한 인조반정으로 쫓겨나지도 않고 으로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5. 여담

  • 의인왕후의 외가는 전주 이씨이다. 실제로 윗대를 올라가면 고조부가 계양군 이증( 세종 신빈 김씨 사이의 아들)에게 닿는다.[17] 따라서 선조는 세종의 6대손, 의인왕후는 세종의 외6대손에 해당하니 이들은 12촌이다.
  • 본인과 남편 선조, 실제 시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모두 세종과의 후손들로 엮인다. 선조는 세종의 적2남 세조의 5대손,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세종의 적2녀 정의공주의 외증손, 본인은 세종의 서2남 계양군의 외5대손이다.
  • 그리고 의인왕후 본인과 남편 선조는 세종 한확을 공통 조상으로 한다. 의인왕후의 외할아버지가 문청정 이수갑인데 세종의 서2남 계양군의 증손자이며 또한 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 한씨는 소혜왕후의 친언니이기에 세종으로 항렬을 보면 12촌, 한확으로 보면 11촌이 난다.

6. 대중매체에서

선조가 집권할 때 임진왜란이 겹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등장한다. 선조가 무능력한 남편으로 늘 등장한다면, 의인왕후는 그런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후궁들에게 밀리지만 조용히 선조와 선조의 후궁들과 그 소생들을 조용히 내조하는 역할이다.

7. 참고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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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종의 서차남 계양군의 현손녀이다. [2] 계양군 → 영원군 이풍 → 도안군 이철 → 문천정 이수갑 → 이수 [3] 태종의 17녀 숙신옹주의 외고손녀. [4] 숙신옹주 → 심안의의 처 윤씨 → 심빈 → 도안군 이철의 처 심씨 → 문천정 이수갑 → 이수 [5] 다만 불임 이외에 의인왕후는 왕비로서의 결격사유가 아예 없어서 쫓겨날 리가 없었기에 인빈 김씨가 기본적으로 궁녀 출신이라 왕비가 될수있었을리도 없었고 왕비에게 무례하게 굴기는 커녕 의인왕후에게 숙여야했다. 훗날의 숙종이 투기와 불임을 이유로 인현왕후를 쫓아낸 사례가 있긴하나 숙종 재위 당시에도 불임은 결격사유가 사실상 아니었으며 인현왕후의 투기는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준인데다 그 외에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매우 불합리하고, 말도 안되는 처사라고 신하들이 만장일치로 당연 반대하였고, 숙종은 자신의 초특급 정통성에서 오는 국왕의 권위로 찍어누르며 사약 고신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해서 억지로 감행했다. 이로 인해 숙종은 당대나 지금이나 매우 큰 비판을 받고있다. 하물며 아직 유교질서도 크게 정립되지 않았고, 왕권 숙종만큼 강하지 않았던 선조 불임이라는 이유 하나로 정비 의인왕후를 쫓아낼 수 없었고 실제로 그 정도로 막나가는 임금은 아예 아니다. [6] 【여기에서 대행 왕비가 여러 아이들을 친애하고 여러 아이들이 대행 왕비를 친애하여 받들었던 점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아울러 언급하였다.】 [7] 후한 명제의 황후인 명덕황후를 지칭. [8] 조선 13대 임금 명종 왕비. 선조 왕위에 올랐을 때 1년간 수렴청정했다. [9] 조선 12대 임금 인종의 왕비. 의인왕후와는 같은 반남 박씨이다. [10] 사실 정치적으로 봐도 인순왕후와 인성왕후의 사망은 의인왕후에게 비극이었던게 선조의 법적 어머니인 인순왕후가 바로 의인왕후를 선조의 왕비로 내정해주었고, 인성왕후는 의인왕후의 항렬상 큰어머니면서 남편 선조의 법적 큰어머니이기도 했다. 아무리 선조의 성격이 결함있다해도 인순왕후와 인성왕후 생전에는 의인왕후가 좋든 싫든 자식을 못낳는다해도 신경쓰고 대우를 잘할수 밖에 없는데 인순왕후가 1575년에 일찍 사망하고, 인성왕후까지 2년 후인 1577년에 사망했으니 선조 성격상 본인이 눈치봐야할 왕실최고어른인 대비들이 모두 없으니 의인왕후는 바로 관심 밖이 되었을 것이다. [11] 인조의 친아버지. 훗날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됐으나 아들인 인조가 아예 반정의 정당성과 정당화를 위해 아버지를 추존된 왕인 ' 원종(元宗)'으로 묘호를 내리고 종묘 영녕전에 신주를 모셨다. [12] 다만 그렇다고 세자를 늦게 책봉한 건 그냥 인빈 김씨의 소생인 넷째 신성군을 제일 이뻐해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지, 딱히 방계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 때문이 아니다. [13] 선조가 의인왕후를 다소 홀대하긴 했으나 훗날의 영조 정성왕후를 대한것과 달리 후궁 이하의 취급을 한 것도 아니고, 싫어한 것도 아니었다. 금슬도 원랜 나쁘지 않았다가 불임으로 인해 멀어진 것이며 이후 권위가 높아진 광해군을 견제하던 선조에 맞서서 광해군을 계속 감쌌기 때문에 더 멀어진 것이기도 했다. [14] 원래 대비의 역할에 왕의 정통성을 세워주는것이 어느정도 들어있다. 당장 광해군이 쫓겨나고 왕이 된 인조도 대왕대비인 인목왕후의 생전에는 대왕대비의 권위에 기댔고, 아버지 선조 또한 집권 초기에는 왕대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많이 기댄 편이다. 특히 서자라는 흠이 있는 광해군에게 후견인인 왕대비가 있었다면 보증까지 있는 마당에 쫓겨날 가능성이 적었을 것이다. [15] 의인왕후는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그리 단명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의인왕후와 같은 반남 박씨이자 큰어머니 뻘인 인종비 대비 인성왕후 1577년(선조 10년)까지 살아서 60대의 나이로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광해군도 내심 의인왕후의 장수를 매우 기대했을 것이다. [16] 의인왕후가 살아있었으면 모두가 내심 죽기를 바라던 임해군조차 의인왕후의 커버로 간신히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임해군 사이코패스 살인마였다지만 의인왕후가 광해군과 함께 직접 거둬서 기른 만큼 의인왕후의 얼굴을 봐서라도 광해군이 사이코인 친형을 죽이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7] 더군다나 계양군의 부인은 조카인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부인인 인수대비의 친언니이다. [18] 이때 의인왕후의 상궁으로 출연한 배우가 바로 위 항목의《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 의인왕후를 맡은 김용선이다.중궁전 상궁의 하소연이 진심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