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30 22:31:26

장문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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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작전 전개
3.1. 전투 개시(9월 29일)3.2. 예기치 못한 피해(10월 1일)3.3. 수륙 양면 작전(10월 2일~4일)3.4. 수군의 소소한 전과 및 통제영 복귀(10월 5일~8일)
4. 결과5. 일본 위키백과의 반달리즘6.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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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이 9차례 출전해 총 17회에 걸쳐 벌인 크고 작은 해전 가운데서 가장 성과가 적었던 해전이며 비록 명칭을 해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전투의 성격상 해전보다는 육전의 성격이 더 강하다.

해당 작전은 1594년 9월 29일 ~ 10월 8일 사이의 기간 동안 벌어졌으며 장문포[1]뿐만 아니라 영등포[2]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수륙 합공 작전이기에 거제도 공략 작전 혹은 거제 진공작전이라는 용어로 칭하기도 한다.

2. 배경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하면서 본격적인 강화 교섭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강화 자체를 반대하는 조선 측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로서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조항들이 있어서 강화회담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한성에서 퇴각할 때 명군은 그 뒤를 추격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 관군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방해하기까지 하여 이 틈을 타 일본군은 남하 도중에 종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인명의 살육 행위와 약탈을 일삼아 조선의 인명 피해와 재산의 손실이 막심했으며 이러한 일본군을 조선군이 격퇴하려고 하여도 명군은 강화를 핑계로 싸움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선 관군의 싸움을 방해하는 일이 허다했다. 게다가 강화 교섭의 부진으로 일본군은 철수는커녕 1594년에 들어서 전력이 계속 보강하고 있는 상황이었는지라 조선 수군은 1593년 8월 이후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 행영을 설치하여 일본군의 해상 서진을 막고 1594년 3월 4일~5일 동안 당항포에서 적선 31척을 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본군의 항의가 잇달았고 당시 웅천에 와 있던 명나라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도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고 철수하라고 하여 조선 측은 일본군의 확장을 눈뜨고 지켜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형편에서 1594년 후반기에 접어들자 일본군의 군세가 경상우도지역으로까지 서진하여 확대되고 만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거제의 일본군을 제압하여 조선 수군이 부산 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던 상황에서 명·일간의 강화를 반대하여 전쟁을 주장하던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마침 명나라 부총병 유정이 서울로 철수하고 명군의 견제가 없는 틈을 타서 남원으로 내려가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독려하여 거제의 일본군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1594년 8월 충청·전라·경상 3도의 체찰사에 임명되어 거제 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작전 시작 전부터 해당 진공 계획을 보고 받은 비변사 선조는 해당 작전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윤두수의 계획은 육군 3천여 명을 수군의 지원하에 거제도에 상륙시켜 일본군을 소탕한다는 것인데, 비변사에서 판단한 바로는 오합지졸과 다름없는 병력이 변변한 무기도 없이 요새지에 웅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전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고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 판단하였고 선조 역시 이에 대해 크게 비판하면서 그럴 능력이 없는데 추진하는 무리한 계획이라고 보았기에 조정에서는 계획에 신중을 기하라는 명령을 선전관을 보내 내렸지만, 선전관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작전이 시작되고 만다.

당시 장문포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력이 1,600여 명, 전선은 40여 척이 있었으며[3] 영등포에는 병력 약 1천 명, 전선 25척이 주둔한 것으로 추정[4]되는데 반해 조선군은 윤두수의 계획대로 육군 3천 명 전원이 거제 진공작전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김덕령, 곽재우가 이끄는 주력부대 800명과 충청병사 선거이가 이끄는 지원부대 140명 등 전체 육군 940명 만을 권율이 실제 전투에 편성하여 참가시켰으며 예비대 약 2천은 후방에서 대기 중에 있었기에 공성전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공격 측의 병력이 훨씬 적은 상황이었다.

또한 수군 역시 120여 척의 전선이 있다 해도 군량 부족과 전염병의 발생으로 전선의 가동률이 2/3 수준에 불과했는데 특히 ‘수군은 태반이 역질에 죽어 선사(船師)가 외롭고 허약하니 적을 소탕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선도 운용하기 어렵다.’[5]라고 조정에서 인식할 정도로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수의 인원이 사망하여 정상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러한 실정 때문에 당시 작전에 참여한 김덕령 곽재우도 시작 전부터 이 전투의 실효성에 의문을 가졌고 수군의 지휘관이었던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6]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펼쳤으니 조정은 물론이고 당대에도 명장이라고 평가받던 장수들 전원이 작전 시작 전부터 부정적인 견해를 펼친 점에서 이미 결과가 정해진 점은 불 보듯 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3. 작전 전개

3.1. 전투 개시(9월 29일)

9월 29일 조선 수군은 흉도에서 발선하여 일제히 장문포 앞 바다로 돌입하여 장문포에 주둔하고 있는 4국세의 군영을 공격한다.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들은 영등포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신 이주인 호우세쓰를 필두로 구원 부대를 구성해 장문포로 급파하였으며 이때의 일본군은 험준한 곳에 주둔하여 나오지 않고 양쪽 봉우리에 벽루를 쌓고 조금도 항전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선봉선 2척을 공격하기는 하였으나, 배에 타고 있던 일본군이 육지로 도주하였던 까닭에 빈 배만 분멸시켰다. 이에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한 조선 수군은 칠천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여 밤을 지냈다.

3.2. 예기치 못한 피해(10월 1일)

10월 1일 조선 수군은 장문포의 4국세와 영등포의 시마즈 요시히로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화전(火箭)과 반궁(半弓)을 이용해 일본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영등포의 일본군은 포구의 모래 위에 배를 끌어 올려놓고 한 명도 나와 싸우려 하지 않고 요새에 숨어 철포만 쏘아댔다.[7] 이에 조선 측은 별다른 전과 없이 칠천도(漆川島) 외줄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해질 무렵 영등포 공격을 마치고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온 조선 수군 중에 일부 함선이 뭍에 배를 매고 정박했을 때, 일본 군선 8척이 나와서 사도 소속의 전선 1척을 공격하여 배꼬리에 불을 지르고 군졸 1명을 죽이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적선이 어둠을 타고 몰래 나와서 조선 수군을 공격하여 사후선 3척이 실종되고 승선 군졸이 대부분 피살되었으며, 낮에 공격받았던 사도진 소속의 병선은 다시 공격받아 수직(守直)하던 군졸들 중 도피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피살되었다.[8]

3.3. 수륙 양면 작전(10월 2일~4일)

10월 2일에는 선봉선 30척으로 하여금 장문포에 있는 적정을 살폈다. 2일 평명(平明, 아침에 해가 돋아 날이 밝아질 무렵)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성 밖에 나와 언덕 위에 서있는 적 병력이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일본군은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아군 병사들이 강개하여 진퇴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다.

10월 3일 진시(辰時, 아침 8시경)에 수군을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 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는 매우 흉험하였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조선 수군 지휘부는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다. 문제는 육병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수군으로서는 다시 끌어 낼 방법이 없었다.

수군 지휘부와 곽재우, 김덕령은 상의하여 수륙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10월 4일에는 전일 계획한 대로 보다 본격적인 상륙 작전을 시도하였다. 즉 첫째, 곽재우·김덕령 등은 초군 수백 명을 거느리고 상륙하여 산으로 오른다. 둘째, 선봉선을 장문포에 파견하여 들락날락하면서 싸움을 걸게 한다. 셋째, 이순신은 뒤이어 중군을 거느리고 참가하여 수륙이 서로 호응하게 한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공격했으나, 적은 나와 싸우려 하지 않고 험난한 고지에 웅거하고 있어서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4일 묘시(아침 6시경)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을 영등포의 적 소굴에도 보내 양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였으나 일본군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수 없었다. 결국 상륙한 육군 공격부대가 계속 싸움을 걸어 봐도 일본군은 응하지 않음으로써 아무런 전과도 거두지 못한 채 철수하고야 말았다.

3.4. 수군의 소소한 전과 및 통제영 복귀(10월 5일~8일)

10월 5일 칠천도에 머물면서 휴병(休兵)할 때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휘하 사후선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곶(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는 등 적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10월 6일에는 다시 선봉선으로 하여금 장문포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일본군은 “일본은 지금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하는 중이니, 서로 싸울 수 없다”(日本與大明方和睦云)라는 패문을 꽂아둔 채 응하지 않았다. 이날 묘시(아침 6시경)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과 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원균에게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와 수급을 베어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 있던 잡물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 등은 싣고 왔다.’고 하였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한편 직전의 영등포 지역에 대한 공격 영향 때문인지 이날 칠천도의 진(陳)에 왜병 한 명이 산기슭을 통해 투항해오며 자신을 영등포에 있던 시마즈(島津氏)의 병사라고 밝혔다.[9]

10월 7일에는 전일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 와서 증거품으로 하려고 하였더니, 원균이 돌아와 고하기를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도망하다가 그중에 한 명이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왔다.’고 하였으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다.[10]

다만, 이후 조선군 지휘부는 위험한 작전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작전을 종료하고 육군 측 병사 선거이, 곽재우, 김덕령 등이 회군하여 갔고 수군은 흉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10월 8일에 장문포 앞으로 나아가 함대 시위를 한 후 한산도로 귀환한다.

4. 결과

명군의 반대로 인해 침략자인 일본군에 대한 응징에 대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조선군 단독으로나마 일본군에 대한 응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나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섣부르게 실행하였기에 조선군 측도 다소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다만 9월 29일에 일본의 빈 전선 2척을 격침시키고 10월 6일에는 왜군과 맞붙어 피해를 주고 적선 2척을 반쯤 분멸시킨 후 끌고 왔으며 칠천도에서 영등포의 시마즈의 왜군 1명이 투항해오고 10월 7일에 적병 1명을 사로잡는 등, 종합적으로 보면 수적 열세와 군량 부족 및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상황 등의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분전하여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고 평할 수 있으며 이러한 소소한 전공이라도 거둔 덕분인지 비변사는 ‘비록 승첩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패배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이는 불행 중 다행이다’[11]는 것으로 평가하며 종결지었다.

또 당시 일본군은 장문포 해전과 영등포 해전에 보여준 조선 수군의 위용에 상당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타다츠네는 일본에서 조선의 거제도로 건너오던 중 10월 11일에 아버지인 시마즈 요시히로로부터 이키섬에서 편지를 받게 된다. 편지의 내용은 장문포 해전과 영등포 해전의 형국을 전달하며, 조선 수군이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에 거제도를 바로 건너지 말고 부산포를 경유하여 거제도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또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의 가신 이주인 고칸, 조주인 모리아쓰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비해 해전술이 매우 능하므로 일본군 재하선(荷積船, 짐을 싣는 배)과 같이 노의 수가 적은 배는 해전이 벌어지면 도망조차 불가능하여 절망적이라고 전하며 조선 병선의 무서움을 직접 겪고 두려워하고 있었다.[12]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결국 이후에 그 후폭풍이 거세게 일게 되는데 10월 14일에 소집된 대신회의 석상에서 선조는 장문포 작전을 비난하고 영의정 류성룡은 군인들이 전의가 없는 것은 매우 한심한 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번 작전을 계획하여 추진한 윤두수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게 되고 이는 당쟁화가 되어 서인의 영수인 윤두수에 대한 탄핵이 반대당인 북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윤두수에 대한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은 10월 30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윤두수는 도체찰사와 좌의정에서 면직된 가운데 판중추부사로 전보되고 그 여파로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에 대한 평가까지 급락하고 만다. 얼마 뒤 일본군 요시라의 간첩 행위[13]로 이순신이 정부에 불복종하였다고 하여 처벌되고, 원균이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다. 이로써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게 된다.

또한 장문포 해전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야간 기습작전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이 전술은 이후 칠천량 해전에서 똑같이 써먹어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궤멸로까지 이어졌으며 이러한 장문포 해전의 실패로 인한 혼란스러운 정국과 일본 수군의 전술 발달 등은 정유재란 초기 조선 수군의 패배와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흔들리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4]

5. 일본 위키백과의 반달리즘

여담이지만, 일본 위키에는 이 해전에 대하여 이순신 후쿠시마 마사노리 시마즈 요시히로 등에게 격퇴당했다고 왜곡하고 있는데, 애당초 조선 수군의 피해가 다소 발생 했을지언정 왜군들이 극력 전투를 회피하여 교전다운 교전 한 번 없었는데 어떻게 격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지가 참으로 의문이다.[15]

6. 대중 매체

드라마 징비록에서 다루었다. 초반에 이순신을 막으라는 명령에 당황하는 가토와 막판에 가토를 조롱하는 고니시가 깨알같이 뀌는 방귀가 개그 포인트. 그 직후에 뚜껑이 열릴대로 열린 가토의 샤우팅이 걸작.


[1]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앞바다. 장문포 왜성이 아직 남아 있다. [2] 서울의 영등포가 아닌, 거제시의 포구다. [3] 『선조실록』 권56, 27년 10월 15일(기미) [4] 제장명, 2021, 「임진왜란 시기 거제 진공작전의 경과와 의미」 [5] 『선조실록』 권52, 27년 6월 28일(을해) [6] 『난중일기』 갑오년 9월 3일 [7] 『시마즈가문서(島津家文書)』 [8] 『선조실록』 권57, 27년 11월 19일(계사); 『난중일기』 갑오년 10월 1일 [9] 『난중일기』 갑오년 10월 6일 [10] 『선조실록』 권56, 27년 10월 15일(기미) [11] 『선조실록』 권56, 27년 10월 13일(정사) [12] 『시마즈가문서(島津家文書)』 [13] 허위 군사 정보로 조선 조정을 오판하도록 유도하여 이순신을 궁지에 빠지게 함 [14] 제장명, 2021, 「임진왜란 시기 거제 진공작전의 경과와 의미」 [15] 차라리 그냥 "물러나게 했다" 정도로 표현했다면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