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7:24:56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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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5153E><colcolor=#FFC224> 광해군일기
파일:광해군일기 정초본.jpg
분량 187권 중초본 64책, 정초본 39책
기록시기 1608년 2월 ~ 1623년 3월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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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인 광해군 이혼(李琿) 재위(1608년~1623년) 15년 2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중초본 187권 64책, 정초본 187권 4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51호에 해당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가기록원에 소속된 역사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국사편찬위원회 광해군일기(중초본) 전문
국사편찬위원회 광해군일기(정초본) 전문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2개월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中草本)과 정초본(正草本) 두 종류가 모두 남아있다. 또한 유일하게 인쇄본이 없이 필사본만 존재하는 실록이다.

광해군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다른 왕과는 달리 광해군실록이 아니라 광해군일기며, 연산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초본( 태백산본)은 1624년( 인조 2년) 2월 29일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1627년 정묘호란의 발발로 잠시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1633년(인조 11년) 12월에 최종 완성하였다. 총 187권 64책이다.

정초본(정족산본)은 중초본이 완성된 다음해인 1634년 정월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동년 5월에 최종 완성하였다. 총 187권 40책이며, 당시 정초본을 만들며 그 편집 과정을 모두 기록한 광해군일기찬수청의궤(光海君日記纂修廳儀軌)와 함께 사고에 같이 보관하였다.

원래 일반적으로 실록 편찬을 완료하면 초초본과 중초본은 세초하여 없애고 정초본만을 인쇄해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광해군일기만은 특이하게 중초본까지 사고에 보관하여 남겼다. 이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붉은 먹 또는 검은 먹으로 내용을 수정하거나 가필한 모습이 생생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당시 실록 편찬 체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는다.

중초본이 남은 것은 물론 북인들이 싸그리 사라져버렸으니 중초본을 사그라뜨릴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좀 더 직접적인 이유는 광해군일기가 편찬 중에 조선의 재정위기의 충격을 제일 세게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광해군일기는 인조반정 직후에 편찬을 시작하지 않았는데, 서인이 먼저 시정기(時政記)에서 북인 색을 빼는 작업부터 관심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이괄의 난이 발생하며 시정기와 승정원일기가 상당수 날아가버리고, 그 이후에야 실록 편찬을 시작했다. 공식 자료가 구멍이 숭숭 뚫렸으니 대체 자료를 취합하느라고 속도가 느려졌는데, 정묘호란이 터지고 그 이후에도 국력을 수습하느라 일기는 중초본도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 한참을 머물러야 했다. 위의 1633년 12월은 중초본이 완성된 해이다. 재정 때문에 "일단 이거라도 사고에 보내놓고 나중에 정초본 만들자"라는 마음이었는지 몰라도 그렇게 중초본은 태백산사고로 향했고, 1634년(인조 12년) 5월에야 정초본이 두 벌 완성되어 정족산과 적상산에 보관되었다. 끝내 인쇄본은 나오지 않았다. 이후에도 187권 중에 그나마 제7권까지만 인쇄된 게 전부.

이와는 별개로 광해군일기의 내용은 당시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공정성이 결여된 서술을 많이 하였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1] 이것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초본과 중초본을 모두 없애지 않고 남겨놓은 까닭에 학자들이 양쪽을 모두 볼 수 있게 되면서 알려진 것이다. 즉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광해군이 후대에 어느 정도 재평가될 여지가 남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광해군 시기의 UFO 소동: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모티브가 된 UFO 출몰 기록으로 유명하다. 광해군일기 20권 1609년 9월 25일 세 번째 기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강원도의 이형욱 감사와 주민들이 목격한 것이다. 1609년 8월 25일 강원도 다섯 곳에서 UFO가 목격됐는데, 간성군에서는 햇무리 모양, 원주목은 붉은색 배, 강릉부는 큰 호리병, 춘천부는 큰 동이, 양양부는 세숫대야 모양이었다. 다만 광해군일기의 것이 가장 유명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세종실록 때부터 UFO 목격 기록은 흔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2만여건에 이르는 조선의 천문 기록 중 UFO에 관련된 기록도 인조 60건, 숙종 27건, 광해 17건 등으로 꽤 있다고 한다. [역사속 공무원] UFO 뜨면 행자부가 출동?, 조선왕조실록의 UFO 기록…그들은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는 걸까?

여담이지만 광해군은 광해군일기 정초본 완성 당시 살아있었다. 생존 당시 자신의 실록이 편찬되기 시작한 왕은 단종(추정), 연산군, 광해군 3명인데, 광해군이 워낙 오래 살았다 보니 완성까지 된 건 유일한 사례.

3. 외부 링크



[1] 예를 들어 정초본에는 "왕이 눈병이 있어서 눈이 충혈되었다"고 쓴 것이 중초본에는 "왕이 사람을 많이 죽여대서 광기로 눈이 벌개졌다"고 왜곡되어 기술되어 있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