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정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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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의 어진.2. 상세
2.1. 당대의 어진
정조는 어진을 자주 그렸고,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화산관 이명기와 유명한 화가 단원 김홍도가 어진 화사에 참여 했으므로 매우 뛰어난 어진이었을 것이다.[1] 하지만 용두동 대화재 때 모두 다 타버려서 정조의 얼굴은 선원보감의 간략한 초상화로 추정할 뿐이다. 정조의 표준영정이 다소곳한 이미지라면 현재 선원보감에 남아 있는 초상은 골격이 우람해서 무인 기질이 엿보인다. 표준 영정을 다시 그리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할 듯하다. 화령전에 있었던 구군복 어진 2축 중 1축이 신선원전 운송 중 분실되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화령전 소재 구군복본 어진들은 한 점도 분실되지 않고 모두 창덕궁 신선원전에 보존되어 있었으며 이는 1935년에 간행된 <선원전영정수개등록(璿源殿影幀修改謄錄)>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사항이다. 그러나 이 역시 부산 용두산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다 잿더미로 변했다.즉, 현재 남아있는 정조의 어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2]
2.2. 표준영정
정조 표준영정 지정번호: 제42호 |
정조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그린 구군복 차림의 어진[3] | ||
정조 표준영정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렸다.[4] |
정조는 평생 동안 어진을 3번 그렸다고 한다. 정조를 그렸던 어진화사 중에는 김홍도도 있어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어진이었다. 정조를 포함한 조선 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은 6.25 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정전 협정 이후 어진을 부산에 방치하였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5]
표준영정 지정번호 제 42호 어진은 후대에 제작된 상상도로서 정조 표준 영정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린 것이다. 그 바로 밑에 어진은 1989년 9월 26일에 수성고등학교가 수원 화산릉 행차 행사에서 사용된 정조의 얼굴을 상상하여 그린 어진이고, 우측의 어진은 경매장에 나온 어진이라고 한다.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공식 지정된 이길범 화백의 정조 어진이다. 물론 실제 어진이 불타 사라졌으므로 완전히 상상해 그린 것인데, 같은 이길범이 그린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화와 너무 비슷하게 그려서 성의없다는 지적이 있다. 어쨌든 현재 어진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고 방송이나 왕실 관련 행사에 공식적으로 쓰인다.
2.3. 선원보감
선원보감에 실린 정조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 초상화 |
그런데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의 초상화는 위의 공식 어진과는 달리 자못 야성적인 외모인데 후술된 순조의 회상과 제일 일치한다. 순조의 회상에 따르면 정조의 외모는 뒷머리가 영조를 닮았으며 눈자위가 펑퍼짐하고 입은 네모졌으며 코가 높고 겹턱이며 또래보다 나이들어 보였다고 한다.[6][7] 드라마나 영화에서 귀공자나 훈남으로 묘사된 정조에 익숙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어진을 보고 당황하기도 한다.
2.4. 그 외
출처 |
그리고 중국 도자기 골동품 경매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가 어느 미국의 박사가 스웨덴의 왕족으로 부터 정조 추정 어진을 구입하였다는 정보를 얻어서, 사진을 입수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를 하였다. 왕실에서 정식으로 그린 어진이 아니고 민간에서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선원보감의 정조와 약간 흡사해서[8] 경매 블로그 측에서는 이 그림이 실제 정조에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 포스팅을 봐선 아닐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특히 저 그림은 불교식 탱화에 가까운 모습이다.
출처[9] |
또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사도세자 릉인 융릉에 설치된 문인석이 정조의 얼굴을 형상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
3. 대중매체에서
바람의 화원에서 사용된 정조 어진 |
SBS 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 11화의 어진화사 장면에서 나온 정조 ( 배수빈) 어진으로, 동양화 작가 백지혜가 그렸다. 물론 드라마 속의 소품으로 사용된 것이지만 구도나 복식, 용상의 퀄리티가 상당하다. 제작기간에 두달 반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 화백은 열성어진의 모습을 바탕으로 정조의 외모를 묘사했다.[10]
[1]
이명기가 얼굴, 김홍도가 몸을 그린 작품으로는 서직수 초상이 남아있지만 서직수 본인은 이름난 화가들이지만 정신적 면모를 한 조각도 나타내지 못했다고 적어놓았다.
[2]
심지어 추정 어진이라도 존재하는 숙종과 헌종과는 달리, 정조는
세조와 더불어 추정 어진조차 남아있지 않는 유이한 왕이다. 다만 적어도 세조는
초본이라도 멀쩡하게 남아있지만, 정조는 이조차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3]
수원 화성 화령전에 봉안되었다.
[4]
이 정조 어진은 수성고등학교에서 수원 화산릉 행차 행사에서 사용되었다.
[5]
정조 어진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어진 대부분이 한국 전쟁 중 또는 전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6]
순조의 외모는 정조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묘사를 보면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으며 용안은 불그레하고 골격은 풍만하고 장대하였다" 고 한다.
[7]
아들 순조의 골격이 "풍만하고 장대한 것"과 아버지 사도세자도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서는 "몸이 석대하다" 승정원 일기에서는 "체심비풍"(몸이 아주 뚱지다)라고 표현한 것 이 외에도 정조가 겹턱이었다는 것을 보면 정조의 체격 또한 장대할 것으로 추정된다.
[8]
겹으로 된 턱과 긴 뒷머리을 보면 일치하는 면이 있다.
[9]
일러스트레이터/만화가인
우용곡이 융릉 문인석을 바탕으로 작업한 어진
[10]
그래도 젊은 시절 모습은 살집 없이 많이 준수한 외모로 그려졌다. 가져온 것은 각진
턱과 짧은 텁석부리
수염 정도. 다만 나이가 든 모습은 위 초상처럼 어느 정도 후덕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