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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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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망과 관련한 의문점들
2.1. 면사첩 논란2.2. 해상 저격 논란2.3. 이순신을 저격한 조총수는 누구였나?
3. 그 밖에
3.1. 명량해전 직전 국문 및 처우에 대한 논란3.2. 유명 수군 도독 수여 여부 논란3.3. 이경록, 이운룡 녹둔도에서 이순신과 같이 3명이서 복무하지 않았는가?

1. 개요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을 비롯하여 이순신에 관하여 밝혀지지 않았거나 쟁점이 남아있는 의문점을 서술한다.

2. 사망과 관련한 의문점들

이순신의 삶은 7년을 넘게 끌었던 전쟁인 임진왜란과 함께 한 편의 이야기같이 끝났다. 이렇게 극적인 최후[1] 때문에 자살 의도설, 사망 위장 후 은둔설 등 여러 낭설이 퍼졌으나 현재까지 어떤 설에도 탄탄한 근거는 없다. 특히 자살 의도설은 이순신의 행장(行狀)에 "免胄(면주, 투구를 벗다)"란 표현이 있어, 이순신이 죽으려고 일부러 갑옷을 벗고 전선에 나갔다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胄는 갑옷 전체가 아니라 투구만 일컫는 말이며, 더욱이 "免胄"란 어휘 자체가 《좌전》을 출처로 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란 뜻의 관용어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가 되었다. 물론 행장의 지은이가 두 가지 뜻을 모두 담아서 이 단어를 골랐을 수도 있겠다.

이우혁의 《 왜란종결자》에서는 '사망 위장 후 은둔설'을 채택하면서, '그것이 이순신에 대한 정당한 보답'이라고 하여, 음모론 주장자들의 심정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 바 있다.[2] 그런데 자살설은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도 상당히 널리 퍼져있기는 했다. 당시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좌전》에 나오는 관용구의 의미를 몰라서 자살하였다는 이야기가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순신 생존'에 대한 정보가 말로 전해졌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결국 당대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심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3]

이순신의 최후를 두고 말이 많다 보니,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중간에 부하 장수인 가리포 첨사 이영남이 전사하자, 자신의 갑옷을 벗어 덮어주고 빨간 철릭만 입은 채 자신이 직접 북을 두드리며 지휘하는, 그러니까 눈에 확 띄는 모습으로 지휘를 하다가 저격을 맞고 죽는 것으로 나온다. 이도 저도 아닌 뭔가 어중간한 느낌인데, PD가 자살설과 전사설을 절충한 것이라고 한다.[4][5]

당시 선조가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있던 이순신을 견제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선조의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는 부분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정하면서 나름대로 선조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를 보여줬어도, 선조가 이를 모른체하고 이순신을 한양으로 잡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아무리 전시 상황이라고 하지만,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인 정보망도 없었을까? 결론을 말하면 선조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의 당사자를 선조는 이순신의 부하였던 안위가 한 일이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으며, 선조의 명을 받아 부산포로 출정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양으로 압송 해오기 전에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잡아오기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오라고 명을 내리기도 한다.

결국, 선조는 이미 이순신을 잡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으므로, 그 앞에는 어떠한 진실도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선조의 이런 병맛스러운 행보의 아래에는 민심의 중심이 되는 전쟁 영웅들에 대한 피해 망상과 자격지심이 극대화된 채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실제로 초본 《징비록》에 의하면, 선조는 원균의 패전 이후 그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김명원과 이항복이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고 하자 말없이 회의 석상을 나가버리고, 남아 있던 대신들이 의결을 해서 통제사 복직이 결정된 것으로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선조의 존재를 자살설의 주요한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이순신이 노량 해전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을 알고, 선조의 자신에 대한 경계심과 시기심을 의식해서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단, 노량 해전이 마지막 해전이라는 것은 전쟁 전반을 놓고 보았을 때 그랬던 것일 뿐, 아직 부산과 울산 등에서는 일본군의 철수가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즉 노량 해전이 마지막 해전이어서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노량해전 이전의 순천 예교성 전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막바지에 들어가면 명나라는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은 전투의 주도권을 명군이 아닌 본인이 강하게 잡고 있었고, 조선을 침범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아직 남아 있는 적을 제압하기 위해 명군의 참전 여부를 떠나 그 다음 전투가 벌어질 수 있었고, 따라서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자결하겠다'고 결심했더라도 노량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그 후에 부산포에서 이뤄질 진짜 마지막 결전에서 실행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즉 쉽게 말해서,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이순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죽었기 때문에 노량 해전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가 된 것이다.

참고로 고니시는 본국으로 무사 귀환을 위해 유정에게는 수급 2천을, 진린에게는 수급 1천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진린은 결국 여기에 마음이 넘어가버린다. 설상가상 노량 해전이 벌어지기 전인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과 진린은 서로의 진영을 드나들었고, 거기에 더해 일본군이 진린에게 고기와 술, 창, 칼 등을 바쳤다는 사실이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뇌물을 다 받아먹은 진린도 결국 이순신이 노량으로 출정하자 말리지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따라 나서는데 이때 명군의 군선이 아닌 조선의 판옥선을 타고 출전한다. 그 이유는 명군 측의 전선(戰船)이 워낙 부실[7]했던 탓이다.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의 사망에 관련된 모든 설을 다 보여 준 뒤 이 중에 하나일 것이다라는 가설만 세워놓고 어떤 게 확실하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속된 말로 마치 시장에 여러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그 중 하나를 사가라는 얘기와 똑같다.

여담으로 진린이 뇌물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순신을 이름 대신 이야 혹은 노야라는 극존칭을 사용해서 부르고, 군율을 어긴 명나라 군사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큰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노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 진린이 무언가 불길한 징조를 느꼈는지 그 우려를 담은 편지를 이순신에게 보냈고, 여기에 그가 화답한 내용이 있다.
吾夜觀乾象。晝察人事。東方將星將病矣。 公之禍不遠矣。公豈不知耶。何不用武侯之禳法乎。<陳璘>
吾忠不及於武侯。德不及於武侯。才不及於武侯。 此三件事。皆不及於武侯。而雖用武侯之法。天何應哉。
내가 밤에는 천문을 살피고 낮에는 인사를 살폈는데,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져 가니 멀지 않아 공에게 화가 미칠 터인데, 공은 어찌 모르시오. 어찌하여 무후( 제갈량)처럼 기도로써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으시오? -진린-
나는 충성심이 무후만 못 하고 인망이 무후만 못 하고 재주도 무후만 못 하여 세 가지 모두 다 무후만 못 한데, 비록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 한들 하늘이 어찌 들어주시겠소? -이순신-
이 내용은 진린의 묘소 비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첫 머리에 '중국 청산도에 있는 진린 도독의 비문에서 채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행록을 비롯한 이순신 주변 인물들의 문집을 보면, 오늘 저 적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식의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은 평소에도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쳐부수는 것을 주장했던 셈이다. 실제로 충무공의 어록으로서 此讐若除 死則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이란 표현이 나온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적을 물리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뜻이다. 이런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수를 갚기 전엔 (너희 왜적들은) 날 죽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시위와도 같은 것이다. 즉 이순신은 적보다 먼저 죽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2.1. 면사첩 논란

종종 자살설의 요소로 면사첩(免死帖)이 쓰이는데, 이것은 창작물과 실제 역사를 혼동한 데서 오는 오류다. 우선 소설 《 불멸》과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가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내린 것처럼 묘사되는 장면이 있고 원균 명장설을 철저하게 부정했으며 고증에도 어느 정도 신경 쓴 소설 《 칼의 노래》에도 면사첩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면사첩을 선조가 이순신에게 '너를 죽여야 하지만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선조가 자신의 명의로 면사첩을 내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명나라 경리 양호가 초유문(招諭文)[8]과 함께 면사첩을 보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이우각이 쓴 《통곡》, 《이순신 실록》에서도 같은 오류를 범해서 조선에서 발문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공식적으로 이런 기록은 없다.

사실 면사첩은 원래 조선 왕조의 제도가 아니었다. 면사첩의 기록은 왕조실록에서 선조와 인조 시기 딱 19건 정도만 나오고, 조선의 국제인 《경국대전》에도 없다. 다만 순조 19년 《승정원일기》에서 다시 면사첩이 언급되기는 한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면사첩이 나타난 《선조 실록》의 12건의 기록을 확인해보자. 면사첩을 처음 가져와서 배포한 인물은 명나라 장수인 황응양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독자적으로 조선에서 면사첩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인조 시기인데, 인조의 경우 면사첩이 발급된 이유가 이괄의 난이 직접적이기 때문에, 임진년, 정유년 경우와 동일하게 볼 수 없다.

면사첩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현재 이순신 역사 연구회와 같은 학술 단체에서는 면사첩 자체가 이순신에게 부여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지방 장수에게 면사첩을 내려 보내 적을 회유하게 한 적이 없으며,[9] 결정적으로 《난중일기》나 기타 《징비록》 등 조선의 장수나 문인들의 기록에서 조선군이 왜란 당시에 면사첩을 배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선조 30년 12월 23일의 기록에서 선조가 말했듯이, 이미 군문(軍門)과 경리(經理) 대인의 분부에 따라 면사첩 3만 장을 인출하였다는 데서 면사첩 자체에 대한 권한은 조선군이나 정부가 가진 것이 아니라, 명의 소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 경리들이 조선군의 일선 사령관에게 면사첩을 보낸 사례도 오직 하나, 이순신에게 나간 것이며, 이순신이 이후에 이것을 배포했다든지 하는 내용이 행록이나 기타 문집, 야사 등지에서도 없기 때문에, 하나의 특수적인 사례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10]

특히 이후 인조 시기에서 면사첩이 군율을 위반한 자에 대한 면사권(비변사 등록)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양호가 내려 보냈다고 해도 썩 이상할 게 없는 맥락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순신이 면사첩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

다만 난중일기 기록에 면사첩을 받았다고만 나오고, 그 후 기록은 없기에 이순신 본인이 아니라 이순신에게 왜군을 도운 자들에게 면사첩을 뿌리라는 내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에 명나라 양호가 어떤 목적으로 면사첩을 보낸건지는 알 수 없다.

면사첩 논란을 떠나 아무튼 선조가 이미 이전에 역도로 의심하며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한 이후부터 이순신에 대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무능한 왕조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싸웠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이는 상당히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다. 여러 사료에서 볼 때, 이순신은 선비로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유교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 그렇다고 백성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충무공은 최전방에서 전장의 참혹함을 실제로 느낀 분이고 이 전쟁에 희생되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피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여 그들이 안전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목민관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도 해석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나온다. 국가(왕조)=백성으로 동일시한다면 당연히 조선왕조가 있어야 거기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백성들도 존재하므로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것은 결국 백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2.2. 해상 저격 논란

하지만 자살설을 부정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전투 중에 저격을 당했다면 대장선이 함대의 전열 맨 앞에서 지휘를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은 실질적인 사거리가 40m ~ 50m, 최대사거리인 유효 타격거리도 좋게 쳐줘도 100m 이하였는데, 여기 더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쏘아야 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순신을 정확히 저격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대장선에서 30m ~ 40m 거리까지 접근하여 쏘아야 했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는 일반 판옥선보다 1층 더 높은 판옥대선이었고, 그에 반해 저격수는 압도적으로 고도가 낮은 흔들리는 배 위인만큼 그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쏴야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설령 노리고 쏜 저격이 아니라 단순히 눈먼 총탄이었더라도, 뭐가 됐든 최소 50m 이내에서 날아와야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기함의 불과 4~50m 이내의 거리로 들어올 동안 기함에 탑재된 사거리만 500m가 넘는 천자총통과 지자총통들은 다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설사 아무리 천자총통이라도 세키부네가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건 아니라 쳐도, 그럼 왜선이 그렇게 가까이 접근하는동안 이순신 장군이 미처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왜선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일본군이 조총이 아닌 활을 사용하여 먼 거리에서 저격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류성룡의 징비록에선 명확하게 이순신이 일본군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고 기록되어있다.[11]

또한, 이순신 - 일본군 조총수의 거리가 40m ~ 50m 또는 이내의 거리라면 선박 - 선박간의 거리는 더 좁혀지므로(이순신이 대장선의 가장 뒷쪽, 일본군 조총수가 세키부네의 가장 뒤쪽에 있는 경우, 이순신 - 일본군 조총수의 거리는 40미터라고 해도 선박끼리는 붙어있는 상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격만이 문제가 아니라 배끼리 들이받고 백병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더욱이 대장선은 대장기까지 달고 있어 눈에 띄기 때문에 주요 타깃이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인 등자룡의 판옥선[12]은 일본군 세키부네의 빠른 기동성에 역공을 당해 결국 백병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등자룡은 전사하고 그의 판옥선은 불타고 말았다. 물론 이순신의 함대가 포위된 진린의 대장선을 구원하기 위해 근접 거리에서 포격전을 수행하였고 야간[13]이었기에 평소보다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진린을 구하는데 성공한 이후부터 이순신의 함대는 진린의 함대와 연합해 포위진을 펼쳐 거리를 두고 일본군에 포격을 가한다. 게다가, 이순신이 전사한 시간은 아침 8시였다. 이미 진린을 구하고 일본군 함선들과 거리를 벌려둔 지 꽤 지난 시간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순신이 전사할 때쯤엔 이미 일본군 함선 200척이 분파되고 150척이 파손을 입어 퇴각하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조선군이 일본군과의 백병전에서 명백하게 열세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만큼, 백병전이 들어갈 만한 상황은 연출하지 않았다. 즉 노량해전 후반은 명량해전 때처럼 난전도 아니고 단순히 도망치는 일본군 함대를 추격하는 상황이었는데, 대장선이 함대의 선두에서 적선과 50m 이내의 거리를 유지하며 쫓는, 다소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말이 된다. 정리하면, 이순신이 기록대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라고 했을 때, 대장선은 일본군 함선들과 50m 안팎의 거리만 두고 백병전을 각오한 채 전투에 임했으며, 이미 조명 연합 함대가 승기를 잡은 뒤 잔당을 소탕하는 중에 평소와는 다르게 대장선을 무리해서 일본군 함선들 바로 앞까지 끌고 가서 싸웠다는 말이 된다. 사실상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백병전이라고 해서 영화 '명량'처럼 일본군이 아군 판옥선에 마구잡이로 건너가는 백병전 상황은 일어났을 확률이 낮다. 당장 명량해전에서 충무공의 기함 단독으로 세 시간 가량을 싸웠는데도 사망자가 2명이다. 아무리 충무공이라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도 아니고, 판옥선이 체급에서 일본선을 압도하는 만큼 일본군은 판옥선에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판옥선 상층부로 기어오르기 위해서 다시 공성전의 방식을 취했을 확률이 높다.[14] 즉 일본군이 판옥선 위로 건너와 갑판에서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 수군이 유리한 고지대에서 밑에서 기어오르려는 일본군을 두들겨 패는 근접전의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주장을 요약해서, '조총의 사거리가 50m 남짓인데 어떻게 이순신을 저격하는 게 가능한가? 함포를 쏘면서 전투를 하면 조총의 사거리는 한참 밖 아닌가, 그러면 대장선이 앞서서 백병전을 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뭔가 의심스럽다는 말에서의 조총의 사거리가 50m다 아니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수도 그 안에서 쏘면 일정한 확률 이상으로 적에게 맞을 수 있다는 것 뿐이다. 게다가 당시 총기는 규격화가 안 되어 있어 총마다 성능이 제각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총의 특성상 노리고 맞추긴 어려워도 충분한 살상력을 유지한 채 한참은 더 날아간다.[15] 즉 쏘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다가,[16] 당시 전황은 추적 섬멸 중인 상황이었기에 적의 저항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수군이 쓰는 함포는 대부분이 현자 총통이나 황자 총통으로, 이것은 지자나 천자와 같은 화포들에 비하면 사정거리가 상당히 짧은데다 해전 특성상 화포의 유효 사거리는 더 짧아졌을 것이다.[17] 즉 조선 수군의 포격이란 게 원거리에서 함포만 쏘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느 정도 근접해서 때리는 것이 중요했던 것.[18] 게다가 이순신이 전사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무렵에 적은 사력을 다해 퇴각 중인 상황, 즉 말 그대로 적이 죽자사자하는 추격전 상황에서 지휘관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다, 이순신에게는 '진린'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당장 순천 왜교성 전투 때도 진린이 혼자 정신줄 놓고 돌격하다가 일본군 수급으로 전락할 뻔한 전적이 있다. 일본군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또는 궁지에 몰린 쥐라고 생각하고 선두에 서서 몰아붙이던 진린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이순신이 그것을 구하기 위해 이동하다 총탄에 맞은 것일 수도 있다. 진린은 이순신의 사망을 전해 듣고 "어른께서 나를 구하러 오신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오!"하면서 울어댔다. 즉 진린 구출의 과정에서 이순신이 초기에 사망하고, 이후 송희립 등이 전투를 맡아 진린을 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순신이 진린의 대장선을 구하려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별도로 없다는 점과 노량해전에서 진린을 두 번째로 구한 시각이 이순신이 사망한 시각과 대략 서너 시간 가량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전투 상황과 결과를 장계로 올려야할 사람이 사망했으니 전황 기록이 세세하지 못했던 것인데, 실제로 전투 이후 선조가 진린과 접견례를 했을 때[19] 진린은 "한창 적이 포위해 올 때 내 배는 큰북을 치고 먼저 나아가고 등자룡(鄧子龍)과 이순신(李舜臣) 두 장수가 좌우에서 협공하였는데 그 두 장수는 다 적에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죽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요하지 않아 다행히 패배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운수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어쨌든 이 때문인지 '이순신 생존설' #도 만만찮게 퍼져있는데, 그 근거로 이순신은 선조와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위장하고 도주 후 은둔했다는 설이 있다. 근거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1613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가 800m 정도 이장되었는데, 이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충무공의 삶이 당대는 물론이요, 현대에서 보기에도 매우 극적이었기에[20] 이러한 떡밥들이 남은 것이다.

1592년 사천 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듯이 이순신은 항상 부상당할 위협에 놓여 있었다. 임진장초에 기록된 승첩 장계들을 보면 사천 해전 이후 벌어진 한산도 해전이나 부산포 해전에서도 끊임없이 대장선에서 부상자가 나오며, 이는 대장선 역시 적의 위협 사거리 내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뜻한다. 한 척으로 수백 척의 적선을 막아내야 했던 명량 해전에서도 부상당하지 않은 장사가 전쟁 막바지에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의문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이 내린 사람은 하늘이 거둬간다'는 말처럼 극적인 영웅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 이순신을 저격한 조총수는 누구였나?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을 정확히 저격해 죽인 일본 조총수(병사)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진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이순신을 쏘아 맞힌 병사나 장수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철천지원수겠지만, 일본에서는 강력한 적장을 처치한 영웅으로 칭송했을 것인데, 이상하게도 일본 측에는 그러한 저격을 한 병사 이름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당연히 조선 측에도 그 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에 대해선 말 그대로 이순신을 맞히려고 한 게 아닌데 우연히 맞게 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어쩌면 그 조총수마저 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순신이 총에 맞았을 때 일본군이 노량을 돌파하기를 포기하고 후퇴하던 상황이었는데, 조총 사거리가 겨우 50m라는 것을 감안할 때 조총수가 타고 있던 배는 이순신의 대장선과 상당히 근접해 있었으니 조선군에게서 집중 공격을 당하던 상황이었고 어찌저찌 살아남았다 해도 자기가 이순신을 맞췄는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해당 조총수의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었다면 그 병사는 한국에선 불구대천으로 여겼겠지만, 일본에서는 그간 어떻게 해볼 수도 없던 적장을 사살한 대영웅으로 여겼을 것이다. 일부러 쏘려고 맞혔고 그것을 자신의 눈과 주변 군사들의 눈으로 확인하였다면 그 자는 일본에서는 큰 상을 받는 건 기본이고 사무라이를 넘어 다이묘급 계급으로 신분상승을 하고 일본 역사에 이름도 남을 가능성이 있는데[21], 오히려 그걸 기록하고도 남았을 일본 측이야말로 그 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작정을 하고 쏘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맞혔다는 것이 된다. 물론 자신도 이순신이 맞았는지 확인도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 눈 먼 총알'에 이순신이 맞았다는 주장과, 아니면 사천해전처럼 저격에 성공했지만, 이순신이 쓰러짐과 동시에 함선이 발각 당해서 보고 할 틈도 없이 공격받아 침몰 했거나 둘 중 하나인 셈이다.

3. 그 밖에

3.1. 명량해전 직전 국문 및 처우에 대한 논란

이순신이 죽을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의금부 기록 등에 이순신을 고문했다는 직접적 내용이 없기도 하거니와, 고문당했다는 기록은 대체로 개인의 기록이나 상소 등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그 이후 이순신의 행적(고문 끝나고 바로 연회, 도성 잠입, 장거리 승마 이동. 당시 나이 50에 곤장을 맞았다면 죽는 게 정상이다.)을 고려할 때 심각한 고문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곤장이라 하면 연상되는 두꺼운 노는 곤으로서 이시기엔 있다는 기록조차 없었고 맞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따라서 고문을 받았다 해도 강도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탁의 <신구차>에는 이순신이 형신(刑訊)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며, 이 형신은 정강이를 때리며 문초하는 것이다. 주리나 압슬, 단근질이 난무하는 사극의 고문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 다만 당시 이미 50에 이른 이순신의 나이를 고려하면 비교적 가벼운 형문으로도 건강에 상당한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초로 죽을 정도의 고문을 묘사한 것은 이광수의 소설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의종군은 지금으로 치면 직위해제나 보직해임 정도이며 절대 이등병으로 강등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치열한 붕당정치를 펼 정도로 정치감각이 뛰어났던 조선이 호국공신을 죽도록 고문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선이 개념이 없어 보이는 건 합리의 기준이 당대라는 근본적 한계이거나 조선말기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한편 고문이 심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실록에서 이순신에 대한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고, 신구차 등 상소에 이미 추궁을 한번 받았는데 다시 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그만하자는 등의 내용이 있는 것을 근거로 주장한다. 이러한 묘사의 근거인 실록의 선조 30년 3월 13일 기사[22]를 보면, 선조가 말도 안되는 죄목을 들먹이며,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정말로 이순신을 죽이고자 하는 살의까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게다가 형신이 그리 가혹한 고문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선조실록만 보더라도 형신을 받아 '장하(杖下)'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7년에는 윤사회가 12차에 걸친 형신 끝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9년에는 형조에서 양인과 천민을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형신을 했다가 3명이나 장하에서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11년에는 조보를 인출했다가 적발된 이들이 형신을 받아 운명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놓아주는 것이 옳다는 간언이 올라가기도 했다. 즉 형신이 가벼운 형벌이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리나 단근질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이순신에게는 분명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각종 매체에서 이순신의 고문 장면은 단순한 형신을 넘어서 지나치게 잔혹하게 묘사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 고문 장면은 역대 한국 사극 고문 장면들 중 가장 잔혹하기로 손에 꼽힐 정도다. 불멸의 이순신 89회에서 10분 동안 고문씬만 나오는데 온몸에 인두를 지지고 주리를 틀고 심지어 매달아 채찍질을 한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연상케 한다는 기사가 나왔을정도. 이 장면에서 이순신의 온몸은 무지막지한 단근질과 채찍질로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으며 출혈이 심하다 못해 바닥에 피가 고이는 지경이었는데 현대 의학적으로 살아있다는 게 말이 안되는 연출이다. 물론 해당 드라마에서 연출된 고문 장면은 조선시대의 국문법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고 무엇보다도 실현되었다 쳐도 백의종군과 명량해전은 고사하고 고문 도중 사망했어야 정상이기에, 실제 고문 강도가 어느 정도였든 참고할 가치는 없다.

또한 영화《 명량》에서도 작중 초반 고문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여기서도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 단근질을 당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저 상태로 불과 몇 달 후에 절대 열세 속에 전투를 벌이고 심지어 백병전까지 치렀다고 한 영화적 상상력에 경의를... 게다가 여기서는 형조나 의금부에서 제대로 문초하는 그림조차 아니고, 웬 옥사에서 형리 몇이서 죄인을 지지고 있는 모습이어서, 결국 이것도 고증과 상관없이 이순신의 고통만을 연출하고 말았다.

3.2. 유명 수군 도독 수여 여부 논란

이 부분이 뜬금없이 들어간 것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유명 수군 도독(有明水軍都督)이란 단어 자체가 명나라 품계 정1품으로, 이순신이 생전에 도독직을 수여 받았다면 명나라에서는 선조 바로 아래 급, 즉 조선의 이인자로 대우하였다는 뜻이다.[23] 그런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명 실록이나 명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를 처음 문학 작품에서 대중적으로 두드러지게 인지시킨 김경진(소설가)이 이순신이 명량해전 직후 명나라 도독 품계를 받아 진린 등 명나라 장수들이 계급적으로도 하급자가 되었으며, 선조와 동급이 됨으로써 선조가 이순신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이야기 했지만, 정작 수여를 했다는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이순신에게 도독직을 생전이건 사후건 내렸다는 얘기 자체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래 기사 인용문을 보면 충무공 도독인과 다른 명나라 도독인 사이에 차이점이 30개나 있다고 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명 도독직 수여 자체가 병자호란 후 어느 시기에 숭명 사상에 따라 조선 측에서 만든 조작일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다.

또 도독인 등 팔사품 자체가 명 조정의 하사품이 아니라 진린의 개인적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단, 이 가설을 정설로 채용하면 정조를 비롯한 후대의 조선 임금들은 이순신을 높이면서 자기 조상인 선조를 깎아내린 패륜을 저지른 셈이다, 받지도 않은 도독직을 사칭한 것을 명나라가 알면 가만 있었겠느냐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유명수군도독이라는 직책은 시대순으로 나열하면 먼저 대동법으로 유명한 효종 대 영의정을 지낸 김육이 지은 충무공 신도비문에서 첫 등장하는데 효종 시대는 알다시피 명나라는 이미 망했고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던 시대이다.

그리고 조상을 깎아내렸다고 하는데, 기록의 나라인 조선이지만 기록이 너무 방대하다보니 기록이 있음에도 후대에 가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믿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예종의 후궁인 공빈 최씨가 어느 시점부터 최씨 문중에서 문종의 계비라고 잘못 주장하며 국가에 추숭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이를 거부한 일이 영조, 정조, 고종 때에 거듭하여 일어났다. 또 다른 예로 태종 이방원을 호랑이로부터 구한 무사 김덕생이 실제로는 태종에게 큰 상을 받았으나, 후대에 어느 시점에서부터 김덕생이 임금을 향해 활을 쏜 죄로 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이야기가 바뀌더니, 정조실록에까지 김덕생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실려버리는 왜곡이 일어났다. 물론, 전쟁 시기와는 동떨어진 예시들이지만, 효종, 정조 대에 이순신이 명 도독직을 받았다고 실렸다고 해서 정말로 이순신이 명 도독직을 받았다는 근거로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진린이 개인적으로 주었다는 해석은 진짜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24][25]
(전략)상이 이르기를,
"대인의 신묘하신 계책을 힘입어 8년간의 강적이 하루아침에 섬멸되었으니 고마우신 은덕은 형용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진인이 말하기를,
"한창 적이 포위해 올 때 내 배는 큰북을 치고 먼저 나아가고 등자룡(鄧子龍)과 이순신(李舜臣) 두 장수가 좌우에서 협공하였는데 그 두 장수는 다 적에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죽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요하지 않아 다행히 패배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운수입니다."(후략)
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7일 정사 1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진린이 선조와 나눈 대화 중의 일부이다. 보다시피 이순신을 자신의 상급자로 인식하는 내용이 전혀 없으며, 자신의 부하인 등자룡과 동급, 잘해봐야 자신의 동급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외에도 다른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을 애도하는 대화들을 봐도 이순신을 상급자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생전에 명 수군 도독을 받았고 이 때문에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에게 복종했다면 진린이나 다른 명나라 장수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 진린이 우리말로 했을 리는 만무하고 통역이란 것이 의도와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진린의 말도 일부 의도적인 조작된 통역 혹은 서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다만 이순신의 조카 분(芬)이 기록한 ‘이충무공행록(행록)’에 적힌 진린이 화를 내며 "황제가 내게 장검을 하사하셨소”[26][27]라는 내용을 보면 이순신이 명나라에 도독직을 받았다는 내용은 더욱 신빙성이 의심된다.[28]

종합해보자면 현재로써는 어떤 내용이 맞는지 아무도 정확한 근거를 대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3.3. 이경록, 이운룡 녹둔도에서 이순신과 같이 3명이서 복무하지 않았는가?

이순신의 녹둔도 근무에 동료로 함께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정작 이 두 사람들도 서로 동료로 지냈다는 말이 없다. 이순신이 녹둔도에서 치렀던 억울한 백의종군은 한 번인데, 이 두 사람 모두 이 일로 백의종군을 지냈다는 기록은 있다.

[1] 류성룡이 파직된 날도 이순신이 전사한 날과 같다. [2] 정확한 책의 내용은 "이유도 없는 전쟁에서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을 구한 대공을 세운 이순신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운명이라고도 믿는 바이다."라고 적혀 있다. [3] 2001년에 칼의 노래를 발표한 소설가 김훈도 그의 여행기 《자전거 여행》 2권에서 이순신의 죽음이 '의도된 전사' 내지 '위장된 자살'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정황 증거로만 따지면 신빙성이 아주 높다"며, 평소 자신의 주장(예를 들어 자기 지휘권 바깥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중앙의 관리들과도 선이 닿아 있는) 지방 수령과 아전의 무능한 작태나 군납비리, 부정부패의 실상을 낱낱이 적어 조정에 올리고 이들을 군율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조정에서 공개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순신이 노량에서 죽지 않고 살았더라도 임진왜란 이후의 권력 재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정치적 여백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장 대신 중 이순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유성룡을 포함한 여러 남인 대신 역시 낙향해서 정치적 입지 역시 약했을 것이다. [4] 다만 세간에서 '인간 이순신'을 연구한다는 취지로 무작정 죽기 무서워서 자살한 척 했다는 설보다는, 장수된 자로서 조국을 전장의 참화 속에서 온전히 지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남쪽 바다에 묻어버린 자신에 대한 속죄로 적의 탄환에 스스로 맞은 것처럼 묘사하는 설도 있다. 중요한 대사는 바로 "이 바다는,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물론 이런 설이 있다는 것이고, 자살설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후술. [5] 정작 이순신을 연기했던 배우 김명민은 대본을 읽고는 이순신이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이 종영된 뒤 나온 특별판에서 인터뷰를 한 것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은?' 이라는 물음에 '왜 그런 선택( 자살)을 하셨는지 묻고 싶다.'라고 답했다. [6] 감정적인 면은 차치하고, 현실적으로 보기에 이순신은 전란초기 세운 전공에 의해 민중에겐 영웅이 되어있었으며, 그 지위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예외적인 지위에 이르렀다. 이쯤되면 아무리 본인이 반역의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들 총부리가 뒤로 돌 수도 있는 이상 어떤 왕이더라도 이걸 내버려두긴 힘들 것이다. 혹자는 이런 상황이라면 세종 대왕 같은 성군일지라도 '설마...?'하는 의심을 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라고 할 정도. [7] 한 때는 정화의 원정에서 보듯 아프리카까지 갔던 대함대를 꾸릴 자본과 기술력이 있던 명나라였지만 국력의 쇠락과 이런저런 행정적 병크가 합쳐져 임진왜란기에는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던 원정함대가 죄다 유실되어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어버렸고, 실제 명군의 주력 전선인 호선(虎船)과 사선(沙船)은 그 크기가 일본 측 전선인 세키부네보다도 작은 배라 화포조차 제대로 탑재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조선 수군에게 판옥선을 선물받고 그렇게 좋아했을까. [8] 반란 폭도들이나, 적, 혹은 적에게 붙었던 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해온다면, 너그러운 조건으로 포용해주겠다는 포고문. [9] 울산성 전투 당시 가토 기요마사를 설득하기 위해서 명나라 경리 야불수가 직접 영기와 상공기, 면사첩 등을 함께 사람을 시켜 보냈다. 그리고 선조 26년에 황응양이 강화에 있을 때에 면사첩을 가져와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면사첩의 배포 자체는 조선군 독단으로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10] 이 때문에 선조가 면사첩을 보냈다는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임진년 ~ 정유년 당시 현장 지휘관으로서 면사첩을 받은 장수는 오직 이순신 한 명뿐이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1]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징비록 기준으로는 탄환이 이순신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쓰여져 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체(자살설을 부정하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당연히 갑옷을 입고 있었을 테니)를 뚫고 나갔다는 것을 보면 유효 타격거리가 아닌 살상거리 안팎에 있어야지 가능하다. [12] 노량 해전 당시 진린을 포함한 명나라 장수들은 명나라 함선의 구조적 문제로 판옥선에 타고 있었다. [13] 12월 16일, 어두운 새벽(전투는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14] 손무는 (공격하는 진영의 입장에서) 공성을 최하의 병법으로 꼽고 있다. 육상 전투에서 방어의 우위를 챙기려는 목적으로 높은 지대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15] 이를 유효 사거리, 최대 사거리를 언급하며 부정하기도 하나 애초에 조총의 유효 사거리가 짧은 이유는 이 시대 총포는 규격화가 안 되어있고 강선이 없어 탄도 자체가 엄청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상 가능 거리는 총에 따라, 그리고 화약 양에 따라(이 당시 조총은 규격화가 안 되어있어서 사수가 화약 양을 눈대중으로 넣는다.) 충분히 더 길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총열이 버틸 수 있는 이상의 화약량은 총이 터져버린다. 다만 이 때는 제식이 없는, 말 그대로 총마다 성능차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때라서 평균치도 못 버티고 터지는 경우나 평균치를 상회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조총 유폭 사고는 기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16] 조총과 같은 초기 총포는 탄도가 현대와 같이 일정치 않아 사수의 실력에 크게 좌우된다. [17] 황자 총통의 경우 지자나 천자보다 짧은 것이지 당시의 조총보다 짧지는 않다. 황자 총통은 최대 사거리가 500보였고, 이는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포들 중 가장 짧았던 축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현자 총통의 경우 최대 사거리가 2000보에 달했고 이는 지자 총통(800보)이나 천자 총통(1300보)을 상회하는 긴 사거리였다. 보 단위는 시대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략 1.2m에서 1.82m 정도 되는데, 전자인 1.2m로 환산해도 현자 총통의 최대 사거리는 2,400m에 이른다. 즉 유효 사거리는 대략 300m ~ 400m 정도였다. 하지만 해전에서 화포의 유효 사거리는 보통 지상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육지 사거리의 절반 거리에서 포격해야 '그나마' 유효한 수준의 명중률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조총은 들고 쏘기 때문에 그나마 이러한 선체 움직임의 영향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교전 중 조총 사거리 내로 들어가는 것이 생각만큼 무리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란 소리다. 판옥선은 단순 장거리 포격뿐이 아닌 조총에 대한 대응 방어와 적함에 대한 유효한 포격, 근접전을 어렵게 하는 선체전고 등 구조적 우위를 활용한 전투를 주로 하였으며 지근거리 교전도 분명 있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점이 있는데 원거리 포격 만으로 함선을 '격침'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이후 전열함 시대만 하여도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백 문이 넘는 포에 얻어터져도 격침되지 않고 중파나 대파에 머무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조선 수군이 화살 형태의 포탄을 사용해서 일반적인 구형 솔리드탄보다 관통력이 좋았고, 일본군 함선이 얇고 약한 삼나무로 만들어져 방호력이 약했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제대로 침몰시키려면 흘수선 아래로 완벽한 각도로 포탄이 들어가야 하는데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18] 천자총통 문서에 나와있듯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근접 사격을 주력 전술로 삼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근접 사격 하나만을 주력 전술로 사용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주 전술 중 하나로 쓰였을 가능성까지 부인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19] 선조 109권, 32년(1599년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2월 7일(정사) 1번째 기사 [20] 누명을 썼어도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거시고, 절망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죄다 박살내 전쟁의 흐름을 아예 바꾸었으며, 압도적인 열세로 시작한 마지막 전투에서 조국의 원수들을 무수히 깨부순 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의 삶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극적이다. 그야말로 영웅 소설이 현실 세계에 고스란히 실현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다. [21] 마냥 비현실적인 말이 아니다. 중국 삼국시대 당시 병졸이었던 풍칙 손권이 아주 증오하던 황조의 목을 베어서 돌아오자 즉시 풍칙의 이름을 사서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상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22] 선조실록 권86, 선조 30년 3월 13일 계묘 2번째 기사. 비망기로 우부승지 김홍미(金弘微)에 전교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23] 명나라에서 친왕과 도독이 둘 다 정1품이라는 기존의 서술은 사실이 아니다. 세종실록 세종 9년 10월 19일 癸酉 2번째기사를 보면 세종이 "中朝官制, 首親王, 次公侯, 次一品" 즉 "중조(명나라)의 관제에는 으뜸이 친왕이고 그 다음이 공작과 후작이며 그 다음이 일품"이라고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즉 명나라의 친왕은 조선의 대군·공주·왕자군·옹주처럼 무품이었다. [24] 다만 진린이 아니라 만력제가 직접 하사한것이라고해도 유명 수군 도독직을 수여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예를 들어 병자호란 직전에 숭정제 인조에게 황제만 입을 수 있는 팔단룡포를 하사했으나 그것이 명나라가 조선을 황제국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25] 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794366 [26] 조선 장수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음을 시시한 말이다. [27] 출처 [28] 진린이 개인적으로 이순신을 존경한것과는 별개로 이순신과의 갈등도 분명히 존재했다는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며 이순신이 명나라에 도독직을 받아 상관이 되었다면 저런 일 자체가 상상도 할 수 없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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