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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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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608 ~ 1623)
대북
육북 중북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정구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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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소북
골북 청북 (남당) 탁북 (유당)
홍여순 류희분 남이공 김신국 류영경
인조
(1623 ~ 1649)
남이공 정창연 정온 김신국 김세렴
남인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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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정인홍
鄭仁弘
<nopad> 파일:wzKcJ3I.jpg 청람사에 봉안된 정인홍 상상화 영정 남명학연구원
출생 1535년( 중종 30) 또는 1536년(중종 31)[1]
경상도 합천군 상왕산(象王山) 아래 남사촌
(현 경상남도 합천군)
사망 1623년 5월 1일
(음력 인조 1년 4월 3일)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참수형
묘소 경상남도 합천군 군북면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
재임기간 제99대 영의정
1618년 2월 12일 ~ 1619년 4월 26일
(음력 광해군 10년 1월 18일 ~ 광해군 11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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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ff> 봉호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2]
본관 서산 정씨 (瑞山 鄭氏)
덕원(德遠)
내암(來庵)
붕당 사림파 (1573 - 1575)
동인 (1575 - 1591)
북인 (1591 - 1599)
대북 (1599 - 1623)
가족 아버지 정륜(鄭倫, ? - ?)
어머니 진주 강씨(? - 1582년)
아내 남원 양씨
아들 정연(鄭沇, 1571년 - 1592년)
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
2.1. 광해군 즉위 전2.2. 광해군 즉위 후2.3. 사망2.4. 사후
3. 여담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북인 계열 문신.

남명학파이자 조식의 적통 제자로 조식이 말년에 자신의 보물인 경의검을 물려준 인물이다. 강직하고 배타적인 성품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강직하고 배타적인 성품 탓에 남인 유성룡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리고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에 대해 같은 북인 류영경과 토론 배틀을 해서 결국에는 대북 소북으로 분당되는 원인을 가져왔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난 뒤에도 남인 계통인 이황 이언적의 종사를 반대하면서 논란을 자초했으며, 성균관 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나면서 북인이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결과적으로 서인과 남인을 손잡게 만들어 인조반정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2. 생애

2.1. 광해군 즉위 전

경상도 합천 태생이다. 16세기 조선의 거유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어릴 때부터 조식 문하에서 배웠다. 남명 조식은 실천 유학자로서 학문과 무예를 공부했는데, 정인홍은 스승 조식을 본받아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스승 곁을 지키며 살았다. 선조 6년(1573) 잠시 황간 현감(종6품)을 맡았으나 얼마 안 있어 귀향하여 책을 읽으며 후학을 길렀다.

서인 강경파 정철은 정인홍의 마음이 공정하다며 자신을 탄핵해 귀양을 보내더라도 길에서 정인홍을 만나면 같이 술을 마실 것이라 말할 정도로 정적에게도 강직함을 인정받았다.
첨지중추부사 정철(鄭澈)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철은 시배들이 장세량(張世良)의 옥사(獄事)를 일으키자 마음으로 항상 불평하여 여러번 사색(辭色)에 나타내었고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취한 뒤에는 시배들의 단점을 많이 말하자, 시배들은 더욱 의심하였다. 하루는 이발(李潑)과 취중에 서로 꾸짖어 교분이 끊어졌다가 이에 이르러 시배들이 며(澈)을 배척하니 귀향하게 된 것이다. 이이(李珥)가 강가에 나가 전별하면서 조심하여 수양하고 술을 끊도록 권하니 철은 이발의 심사는 믿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그대의 소견이 편벽하다. 경함(景涵)이 식견은 밝지 못하나 그 마음은 선량하다." 하니, 철은 머리를 흔들면서, "아니다. 아니다. 정덕원(鄭德遠)은 그 마음이 공정하다. 비록 나를 논핵하여 멀리 귀양을 보내더라도 만일 길에서 만나면 내가 술을 한 잔 부어 같이 마실 것이다." 하였다. #
석담일기(石潭日記) 하권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성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전공을 올렸다. 환갑에 가까운데도 의병을 지휘했고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명나라군이 대규모로 참전해 육군의 주력이 되고 남부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조명 연합군이 공략하는 양상으로 바뀌었으며 전쟁이 길어져 물자가 부족해 의병을 유지하기도 힘들어 정유재란 때는 의병 활동이 뜸해졌다.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마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金俊民)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난중잡록(亂中雜錄)
한편 당색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주관이 강해 정적을 많이 만들게 된다. 후대의 송시열과 유사하나 보스형 정치인으로 확실한 파벌의 수장으로 이끌어간 송시열과 달리 정인홍은 애매한 처신으로 대북이 실권을 쥔 내내 전반부에는 기자헌이, 후반부에는 이이첨과 어정쩡한 동거를 했다. 선조 32년(1599)에 홍여순이 대사헌에 임명되자 남이공 김신국이 반대했다. 그래서 정인홍과 유영경은 북인 내부의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에 대해 서로 토론을 열며 논쟁을 펼쳤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가 좁히지 않았고 결국에는 협의를 보지 못한 채로 결국에는 북인은 2개로 나눴다. 정인홍은 자신을 따르는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을 중심으로 대북이 구성되었고, 그러자 유영경도 역시 자신을 따르는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을 중심으로 소북을 구성되었다.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으로 인한 북인 내의 갈등으로 인해 사헌부는 위신이 약화되었다. 선조 35년(1602) 선조는 사헌부의 위신을 회복하고자 유영경과 더불어 대북, 소북 분당의 원인이었던 정인홍을 불러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헌은 왕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자리인데다가 사회 지도층의 비리 등을 잡아내는 검찰총장과 같은 자리였다. 이전에 정인홍은 왜군과 화의를 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류성룡을 권좌에서 밀어냈다. 정인홍은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과 손잡은 대북의 중심 인물이 되었지만 조정 관직에 있지 않는 탓에 소북의 영수 류영경을 비롯해서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주도하는 소북에게 완전히 밀렸다. 그래서 선조 41년(1608) 선조가 향년 57세로 사망할 때까지 소북이 정국을 주도했다.

선조 39년(1606)에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선조 41년(1608) 1월, 선조가 광해군을 견제함을 아는 영의정 류영경 일파가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며 행동이 점점 과감해지자, 재야에 있던 정인홍이 유영경을 규탄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려 정국을 긴장시켰다. 링크 이후 조정은 해명하고 대죄하는 신하들로 난리가 났다. 선조는 분노해 유배형을 내렸는데 선조는 대놓고 "아주 미쳤구만. 미친 놈이니까 이딴 소리를 했지. 딴에는 나라 생각한다고 한 모양인데 불충도 이런 불충이 없다."하며 신랄하게 비난했고, "광해군은 천자의 인정도 못 받았는데 무슨 놈의 세자냐?" 덧붙여서 광해군이 울면서 맨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사죄해야 했다.

정인홍이 유배지로 떠나기 직전에 선조가 죽어서 형이 집행되지는 않았고 덕분에 정인홍은 풀려났고, 그 대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유배지로 가던 길에 자결했다. 그래서 소북은 대북에게 기세가 눌렸다. 대북이 옥사와 정책을 펼치거나 서인 남인계 신하들이 조정에서 쫓겨날 동안, 소북은 이러한 상황에서 방관하고 대북의 옥사나 정책에 대해서는 지지해서 대북의 정치적 노림수에 의한 연루를 피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한편 정인홍은 광해군 재위 내내 탄탄한 위치가 보장됐다.

2.2. 광해군 즉위 후

광해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다 쿠데타 인조반정으로 축출되어 인조 정권이 정인홍을 간신으로 윤색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크게 재평가되었다. 애초에 유배를 불사하면서까지 할 말을 했다는 점만 봐도 권세를 좇은 이이첨과 비교하기에는 확실히 부당하며, 이이첨이 화살받이로 그를 자주 내세운 것도 한몫했다. 무슨 말만 하면 "이거 정인홍이 시켰다.", "정인홍도 나와 뜻이 같다." 주장했고 아예 정인홍 이름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정인홍에겐 사후에 알렸다. 이 때문에 정인홍의 제자인 정온은 정인홍이 이이첨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며 정인홍과 사제의 연을 끊었다. 인조반정 이후 정온은 정인홍 사형을 반대하면서 정인홍이 80세가 넘은 이후에 정신이 흐려져 이이첨에게 속아서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소신이 강한 강경파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정인홍이 정적들에게 어그로를 끈 최대의 이슈가 이 무렵 있었다. 스승 조식을 높이고자 문묘에 종사되기로 결정된 이황과 이언적을 빼버리고 빈 자리에 조식을 집어넣자고 우겨댄 것이었다. 회재(이언적)와 퇴계(이황)을 문묘 제향에서 빼버리자고 주장했다 하여 이 사건을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다른 학파로부터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매우 거세게 들었다. 정적인 서인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같은 범동인계인 남인마저 적으로 돌려버렸다. 조정에 출사한 관리들뿐 아니라 전국의 유생들이 반발하였고, 급기야 조선의 공식교육기관이자 당대 엘리트들의 집궐지인 성균관에서는 정인홍의 이름을 성균관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제외하기까지 했다. 이는 정인홍을 선비, 나아가 유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성균관에서 퇴출되자 젊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광해군이 정인홍을 옹호하며 성균관 유생들을 엄벌에 처하려 했으나, 오히려 유생들은 권당을 해서[3] 광해군을 압박했다.

아래 내용은 이언적과 이황을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에 반대하며 정인홍이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문 회퇴변척소의 내용이다.
신이 젊어서 조식(曺植 1501-72)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君師父) 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 1497-1579)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가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故) 찬성(贊成)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뻣뻣한 선비는 중도(中道)를 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작은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 여러 해입니다.

옛날에 사마광(司馬光)이 맹자를 비난하고, 이구(李覯)와 정숙우(鄭叔友)가 【맹자를】 비방하여 그 말이 극도로 패악하고 거만하였습니다. 이에 여윤문(余允文)과 주문공(朱文公)이 오묘한 것을 극도로 변론하여 밝혔습니다. 또 주문공이 육상산(陸象山) 학파의 비난을 받자 진건(陳建)이 《편년(編年)》을 지어 그 부(蔀)를 밝혔습니다. 맹자와 주자는 해와 달입니다. 사람이 비록 비방하고자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마는 세 분의 군자가 그래도 힘써 논변하여 그냥두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조식과 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습니다. 태산 교악(泰山喬嶽) 같은 기(氣)와 정금미옥(精金美玉)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작게는 사귀고 주고 거절하고 받는 사이와 크게는 행하고 감추고 나가고 들어앉는 즈음에 고인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바르고 바른 규모는 모두 사범(師範)이 될 만하니, 성문(聖門)의 고상한 길을 걷는 사람이며 성세(盛世)의 숨은 어진이라고 함이 옳을 것입니다. 단지 한 세상의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사이에 권면될 뿐만 아니라 백세의 후에 듣는 자들도 역시 흥기될 것이니, 구구한 문자의 학문으로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황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고상(高尙)을 일삼는다.'라고 하였는데,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 뜻이 법칙이 될 만하다.' 하였고, 정자가 또 이에 대해 증거를 대기를 '이윤(伊尹)과 태공망(太公望)과 같은 인물의 시초이고 증자(曾子)·자사(子思)의 무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윤이 신(莘)에서 농사짓고, 여망(呂望)이 바닷가에서 살고, 증자와 자사가 벼슬하지 않은 것이 과연 세상을 경멸하고 중도를 지나쳐 노장의 행동을 한 것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잠룡(潛龍)이니 쓰지 말 것이다.'와 간괘(艮卦) 초륙(初六)의 '첫 움직임을 그친 것이니 길이 곧다.'와 돈괘(遯卦)의 '잡기를 누런 소의 가죽을 쓴다.'와 절괘(節卦)의 ‘문앞을 나서지 않는다.'는 등등의 효사(爻辭) 뜻을 이황이 과연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기 위한 효이고 괴이한 행실을 하기 위한 의의라고 여긴다면, 복희(伏羲)와 문왕(文王)과 주공(周公)과 공자는 중도로 길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고 노장의 조종(祖宗)이란 말입니까. 그가 사람을 논하고 도를 논하는 것이 크게 성현의 뜻을 잃었으니 식견이 투철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사사로운 뜻에 가리고 의혹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문공이 말하기를 '양웅(揚雄)이 안자(顔子)를 단지 일개 흙덩이처럼 자신만 지키는 사람으로 여기었다. 그래서 근세에 안자를 석노(釋老)의 공적(空寂)에 가깝다고 논하고 있다.' 하였으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중용(中庸)》은 자사께서 도를 전한 책입니다. 그 책에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고 괴이한 행실을 하는 것은 중도에 지나친 것이고,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은 미치지 못한 것이고, 세상을 피해 있어도 근심이 없고, 인정받지 못하여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용에 따른 군자라고 하였는데, 어찌 도가 아닌 것을 자사께서 써서 후학에게 일러주었겠습니까. 만약 세상을 피해 있으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을 중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자사가 요망한 말을 하여 후인을 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사만 중도에서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순 임금도 깊은 산속에 살면서 나무나 돌과 이웃하였고 사슴과 함께 놀았으니, 이 역시 중도에서 지나친 하나의 잘못으로서 세상에 요 임금이 없었다면 그냥 그렇게 세상을 마쳤을 것이니 어찌 중도를 쓴 대성(大聖)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빈곤한 생활을 바꾸지 않은 안자와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은 이동(李侗)·채원정(蔡元定) 등 역시 높고 뻗뻗한 노장의 무리라는 제목 가운데 들 것입니다.

대개 중은 정해진 체가 없이 때에 따라 있는 것이니, 때에 따라 행하고 때에 따라 그치거나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나는 것이 시의(時義)에 합당하면 모두 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 임금과 직(稷)과 안자가 각각 그 자체가 중이 되는 것이니, 만약 우임금과 직과 안자의 사이에서 중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한쪽 방면을 의거하여 중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 볼 때 고상(高尙) 자체가 중용이 되는데 도리어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니, 장차 천하 만고가 길이 어두워져 다시는 누추한 마을에서 극도로 곤궁한 생활을 하는 안자의 시중(時中)은 있지 않고, 나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모르는 호광(胡廣)의 중용이 세상에 도도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이황이 말하는 중은 자못 성현의 뜻을 잃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했다고는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한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출사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이 소윤들이 주도한 을사사화를 막지 못하고 소윤들과 같이 협력하며 비루하게 벼슬까지 지냈음에도, 성리학에 대한 학설을 제대로 확립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균관이 문묘종사를 한다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자신의 스승 조식은 학문적 경지가 이황과 비슷한데 왜 문묘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가정(嘉靖)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과 정미년(1547, 명종 2년) 사이에 혹은 극도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혹은 청직과 요직을 지냈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 이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 되거니와, 만년에 이르러서는 결연히 물러나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높고 뻣뻣한 일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행실입니다. 어찌하여 조식과 성운이 행한 바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지나치게 높은 노장을 본받았단 말입니까.

대저 고상을 지나치다고 하는 말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이황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한 세상을 우롱하고 나 외에는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았으니, 그의 병통은 현자·지인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라서 화답하여 혀를 놀리는 자가 너무도 많으니 조식과 성운이 무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옛날 성현에게까지 무함이 미치고, 또 장차 후학을 속여 사도(斯道)를 해칠 것이니, 이는 작은 우려가 아닙니다. 신이 논변해 밝혀서 언어와 문자 사이에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황이 조식과 성운에 대하여 절개요 이단이라고 하여 다시는 돌아보지 아니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속을 좇아 세력에 붙고 이익을 탐하여 수치가 없으며 시종일관 권간(權姦)의 문객이 되어 맑은 논의에서 버림을 받은 이정(李楨)과 황준량(黃俊良) 같은 약간의 무리들을 도학으로 허여하기도 하고 성현으로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들과 왕복한 편지가 쌓여 책을 이루었습니다. 어찌 앞서서 나가고 앞서서 숨어서 명리(名利)의 마당에서 늙은 자를 하루아침에 도학의 공정(工程)과 성현의 사업으로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좋아하고 미워함과 취하고 버림이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데, 이것이 과연 천부적 본심과 올바른 성정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 때문에 신이 더욱 마음에 불만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삼가 선대 조정에서 전하신 비망기를 보니, 하나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밝혔다고 하였고, 하나는 선비가 벼슬에 나아가고 버리는 의리를 바로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전에도 후에도 발명하지 못한 바른 의론을 발명하였다고 하고는, 이어서 무고한 왕자의 사형을 청한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선왕은 이언적의 일이라고 여기셨으나 혹자는 언적이 아니라 이황이라고 합니다. 그 일을 국가의 문적에서 비록 누구라고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선왕의 전교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학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지니고서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에 구하지 못하고 같이 행동을 한 수치가 있었으니, 신하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는 의리와 돌처럼 단단한 절개로 속히 떠나는 의리와는 또한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또 그들이 평소에 한 모든 일은 주행기(周行己)의 허물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정자가 주행기를 너무 심하게 꾸짖은 것이 잘못이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군자가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자신을 닦는 도리로 헤아려 볼 때 너무나도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이것이 속인에게 있는 일이라면 진실로 별일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유학을 한다는 이름이 있는 자에 있어서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황이 자기를 살피는 데에는 어둡고 남을 책망하는 것은 심하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심사이겠습니까. 신의 구구한 견해가 대개 이와 같았기 때문에 일찍이 조식과 성운이 무함을 입은 것에 대해 변론하고, 이어서 이와 같은 일들을 언급하여 후학의 의혹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시배(時輩)의 분노를 사서 무리지어 욕하고 배척하여 팔도에 알림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나라 안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비망기의 묵이 아직도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유생이 소를 올리고 대신이 의논하고 전하께서 들으시어 문묘에 배향함에 높여짐이 지극하고 명성이 매우 성하여 그 기세가 두려워할 만합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와 재야의 유생들이 서로 이끌고 나서서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이 추켜세운 자를 전하께서 이미 추켜세우셨으니, 그들이 좌절시킨 자들 역시 전하께서 당연히 좌절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식과 성운의 무함은 더욱 두터워지고 무상한 신을 배척하는 것은 장차 전날 하던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아, 성현이 도학을 논한 뜻과 후학에게 일러준 의미를 위와 같이 진술하였으니, 하늘의 해처럼 명석하고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성현의 교훈을 믿지 않고 이황의 한마디 말에 의혹되어 티를 가리고 옥이라 하여 마치 바람에 쓰러지고 물결에 밀리듯이 하고 있으니, 백세의 뒤에 어느 누가 다시 이황의 허물을 알 수 있으며 조식과 성운이 노장이 아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부득불 입을 열어 할 말을 다함으로써 감히 맹자를 높인 고사의 의의에 따라 다시금 도마 위에 올려 놓고 해방하는 피해 따위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이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문학은 본시 성인의 일체(一體)입니다. 그런데 근원이 멀어지고 세대가 오래됨에 문학이 크게 그 진실을 잃어서 인심을 함닉시키고 세도를 떨어뜨려 그 해가 홍수보다 심하여 구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범영(范寧)이 왕필(王弼)의 죄를 꾸짖은 것과 불행히도 근사합니다. 그 해로움이 도리어 노장보다 적지 않으리니 어찌 훗날 근심이 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신은 바로 노장의 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일세의 나아가고 버림이 정해졌고 조정의 호오(好惡)가 결정되었고 전하의 향하는 바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다른 파당의 시기를 취하겠습니까. 지난번에 곽재우(郭再祐)가 한번 도성에 들어가서 시사(時事)를 언급하였는데, 구설이 분분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고 기롱하고 비난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위로 성상을 번거롭게 했으니, 신은 이것을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신으로 하여금 기어이 한 번 가서 가까이에서 성상을 뵙고 감히 아는 바를 다 말하게 할 경우 헐뜯고 배척하여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자 하는 자들이 단지 곽재우에게 했던 정도로만 하고 말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더욱 감히 명에 달려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한두 가지 나아가기 어려운 뜻을 대략 진술하여 성명께서 불쌍히 여겨 살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여겼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체직하시고 다시 부르지 마시어 얼마 남지 않은 이 목숨으로 하여금 낭패스러움을 면하고 전리에서 죽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이는 진실로 천지의 생성(生成)해 주는 은혜입니다만 감히 바랄 수 없기에 북쪽의 대궐을 바라보고 단지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립니다.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
오현종사[4]로 성리학의 정통을 확립해가는데 정인홍은 회퇴변척소로 태클을 걸자, 성균관의 유생들이 대규모로 반발하여 권당(학업 거부)이라는 파업에 들어갔다. 정인홍이 올린 회퇴변척소는 그를 파멸로 몰고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항복이 나서서 그들을 처벌하려는 광해군을 만류하여 최악의 결과는 피했으나, 이미 정인홍은 학문적 지지를 모두 잃은 뒤였다. 스승을 높이려 함은 유학자로서 당연한 일이니 이해하고도 남지만 이황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렸다. 이황을 폄하하기보다는 조식 또한 문묘에 종사되기 합당하다는 식으로 온건하게 주장했더라면 훨씬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황은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 계열이 이이의 스승격으로 올려 학문적 정통성을 이어갈려 했을 정도로 조선 성리학의 거두 중의 거두였다.

물론 정인홍이 공격한 시기에는 그만큼 불가침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그때에도 성리학의 대가로 많은 유생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기에 너무나 많은 정적을 만들어버렸다. 이언적 역시 이황의 스승격 존재로서 성리학의 계보를 성립해갔던 유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미 둘 모두 문묘에 올라간 상태에서 너무 무리수적인 발언이었다. 결과적으로 인조반정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 유학 흐름의 중요한 방점을 찍었을지도 모를 인이다. 이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명종 시기 이미 퇴계의 이름이 조선팔도에서 유학의 종주격에 있었기에 문묘에 쉽게 종사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남명은 약간 비주류에 가까웠다.

이에 괄괄한 남명의 제자들은 문묘에 종사된 이언적과 이황이 명종 시기 외척들에게 굴복한 절의가 없는 인물인 것에 비하여서 우리의 남명선생은 절의를 잃지 않았다는 식으로 주장하였다. 퇴계의 제자인 남인들은 말할 것이 없고, 서인들 역시 자신들의 학통이 이언적-이황을 거쳐서 율곡에게 이어졌다고 주장하던 터라 기를 쓰고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또한 이황과 조식의 문하를 오가며 수학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선조 36년(1603)에 죽은 동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추모하며 지은 만시(晩詩)에서 '퇴계는 정맥이고 남명은 고풍이다.'라고 하자, 정인홍은 선조 39년(1606)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이란 글을 쓰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고 깠다.

근데 글의 제목은 '정맥고풍이라는 말에 대한 변박'인데, 내용을 보면 회퇴변척소랑 비슷하다. 글 자체의 내용을 떠나서 잘 쓴 글이라서인지 훗날 노론의 수장인 송시열도 읽어보고 '이거 잘썼네'라고 칭찬했다고 하지만 발견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연구가 안 되고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황의 수제자 조목의 문인들은 남인이었음에도 북인들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정인홍의 회퇴변척소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 덕분에 조목의 문인들은 대북파의 지원에 힘입어 광해군 6년(1614) 류성룡-김성일 계열의 극렬한 반대를 누른 채 본인들의 스승인 조목을 도산서원에 배향할 수 있었다.

이후에 정인홍은 조정에서 관한 일과 자신이 이끄는 대북을 맡기 위해, 친했던 사람들이 이끌도록 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기자헌과 이이첨으로 대북의 영수로 활동하며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폐모론이 불거지자, 폐모에는 찬성했지만 인목왕후를 죽이자는 허균 일파의 주장에 대해서는 "서모도 어머니는 어머니인데 어떻게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는가?"라고 반대했다.

2.3. 사망

첫째, 사림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품관(品官)이었다는 것.

둘째,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무단을 위세를 부렸다는 것.

셋째, 괴귀한 학문을 퍼뜨렸다는 것.

넷째, 이언적, 이황을 배척하고 그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는 것.

다섯째, 폐비를 반대한 동료요 후배인 정온, 이대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바로 체포된 뒤 3월 28일 한성부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국문당했다.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그에게 이러한 이유로 체포했다. 국문에서 정인홍은 자신은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변을 하였으나 서인 정권은 정승을 지낸 인물과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참수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대명룰을 어기고 그를 복주(참수)했다.[5]
내 열 다섯의 어려서부터 스승 남명에게서 학문을 배워 군신부자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아! 슬프다. 구원에 물러나 있은 지 지금 20여 년! 어지러운 세상일을 듣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90세의 모진 목숨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마침내 폐모의 죄명을 얻으니, 이제 한번 죽음에 돌아봐 서운한 것은 없으나. 장차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을 뵙겠는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정인홍의 유언
참고로 정인홍의 복주(참형) 이전에 대북의 영수였던 이이첨이 처형되었고, 이후에는 소북 출신인 류희분이 처형되었으며, 같은 소북이었던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했다. 하지만 서인과 남인은 피의 보복을 그치지 않았고, 급기야 북인 권신과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 세력들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시기에 정책에 대해 비판하다 유배를 간 북인들은 살려줬지만, 북인 권신과 광해군 측근 세력에는 엄청난 처벌을 내리면서 세력 멸망과 몰살에 가세했다.

중북 계열인 유몽인과 기자헌은 인조 정권에 출사를 거부하고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려 했기에 숙청을 당했다. 유몽인은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당하고 중북 원로 기자헌은 이괄의 난때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여러명의 북인쪽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한다.

이러한 반정세력의 가혹한 숙청은 북인에게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는 곧 또다른 반역으로 이어진다. 이괄의 난이 끝난 직후 광해군 정권에서 삼정승을 지낸 적이 있던 박홍구는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사를 꾀했지만 발각이 되어서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임취정과 유효립등이 주축이 되어 박홍구 처럼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마찬가지로 발각되어서 처형당했고 1631년에 정한추대사건[6]을 꾸미는 등 서인 세력에게 반격을 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리하여 북인은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임취정을 비롯한 북인 영수들의 죽음과 끊임없는 반역 시도로 인해 세력이 소멸되며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에 남이공과 김신국을 중심으로 북인을 이끌다가 남인에게 흡수되었다. 한편 조식과 정인홍이 이끌던 남명학파는 북인 세력이 영향력을 잃고 멸망하면서 자취를 감쳤다.

2.4. 사후

경상남도 합천군 각사면 야천리 종록(鐘麓)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형되었으며 가산이 몰수되었으나 의외로 그의 후손들은 살아남았는데 원래 반정 세력은 정인홍의 일가 역시 연좌제로 다스리려 했으나 옛 제자 였던 동계 정온의 반발로 정인홍 본인만 사형당한 걸로 끝났다고 한다. 정인홍은 의를 숭상하는 청렴한 인물에서 음험하고 포악한 인물로 격하되었다. 이후 조선 왕조 내내 정인홍은 대역 죄인 취급을 받았다. 1864년 늦가을에 합천군 각사면에 있던 정인홍의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가야산 해인사입구 각사 탑동으로 이장하기 위해 후손들이 그의 관의 뚜껑을 열었을 때, 정인홍의 시신은 입고 있던 수의도 썩지 않고, 머리칼, 피부도 살아생전 그대로이며 어깨와 목은 피 자국이 은은하게 그대로였다 한다. 묘소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산 130-2번지(526㎡) 탑골​에 있다. ​남원양씨는 1596년(선조29) 12월에 사망했다. 2018년 9월 20일 경남도 기념물 제292호로 지정됐다.

그의 문하생들은 고종 즉위 전까지 출사길이 막혔으며, 제자이자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을 지지한 것에 반발한 동계 정온의 학맥 일부만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고종 때 가서야 그의 후손들과 북인 계열 유생들이 복권 상소를 올렸다. 1863년 12월 고종 즉위 직후 흥선대원군이 사색타파를 선언하자 정인홍의 후손 유학 정기덕을 중심으로 첫 신원의 요구가 있었으나 노론계열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1864년 다시 정인홍의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노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08년(대한제국 융희 2년)에 가서야 그해 4월 30일에야 이완용의 건의로 이현일 윤휴 등 78명이 복권되었고, 영의정의 직위를 찾았다. 1911년에 문집(내암집)이 간행되었다.

3. 여담

  • 곽재우와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동문이며 곽재우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의병장을 지냈다. 그러나 꼬장꼬장하기는 했어도 정인홍처럼 배타적이지는 않았던 곽재우는 큰 이미지 훼손없이 지금도 의병장으로서 유명하지만 계속 정계에 머물며 특유의 배타성으로 정적을 양산한 정인홍은 반정 이후 철저히 소독되어 의병장으로서의 활약마저 묻힌 감이 있다. 서인들에 의해 간신배로 오랫동안 평가절하당했으나 간신배라기보다는 너무 강직하고 독단적이었을 유학의 대가라는 인식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순종 때 복권되었으나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진정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1911년 정인홍 문집이 전 15권 7책 실기 1권으로 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신채호처럼 그의 활약에 크게 주목한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여[7] 지금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인 조식처럼 점점 조명이 이뤄져가고 있다. 특히나 정인홍은 의병 가운데서도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경상도 지역의 의병장으로써 경상도의 모든 의병들은 정인홍의 지휘 아래에 있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높았다. 전 재산을 바쳐 의병을 지원하였고 아들 정연이 전쟁 도중 병사하는 일도 있었다.
  • 현재는 고향인 합천군 가야면에 그의 고문서 및 서적과 묘소가 정비되어 있다.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조식의 수제자이기도 했는데 원래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려 했다가 이황이 그의 완고한 성품을 보고 '너무 대쪽 같아서 유연성이 없다'는 자못 괴한 이유로 퇴짜맞았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거의 사실 무근인 얘기. 자세한 것은 이황 항목의 에피소드와 본 링크의 분석글을 참조하자.
  • 남인의 영수 류성룡과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 같은 정적 관계였는데 결국 이산해와 함께 류성룡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의 비판을 보면 전쟁 중 류성룡이 왜군과 내통하거나 자기 수하의 사람들로 관직 독점을 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룬다. 특히 권력 독점 문제를 "류성룡의 조아, 응견"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과격하게 비판했다. 왜군과의 내통설은 헛 소문으로 취급되었지만 권력 독점 문제는 선조도 인정하였고 결국 류성룡 파직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산해와 류성룡은 서로를 왜군과 내통했다고 고발하여 1번씩 퇴출시킨 전례를 남긴 셈. 그런데 왜군과 내통설이 사실이 아니라도 류성룡이 다소 정직하지 못했던건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애초에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탐방하고 왔을 때도 김성일이 거짓말을 했다는걸 "류성룡은 처음부터 알았다."는 주장이 <서애일기>에 나와 있고 선조 역시 류성룡을 신임하면서도 "류성룡이 왜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닌 인물이 류성룡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정인홍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로 남명학 연구원에서 2010년 8월에 펴낸 《내암 정인홍(예문 서원)》이 있다. 정인홍 관련으로는 가장 체계적으로 각 잡힌 으로 여러 대학의 역사학 교수 및 연구자들이 집필에 참가한데다 정인홍과 남명학에 대한 풍부한 사료와 철저한 고증에 빛나는 명저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일독해보기 바란다. 다만 이 책은 정치가, 학자로서의 정인홍에 대한 연구는 풍부하지만 의병장 정인홍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으니 유의하자.
  • 위에 올린 영정은 후대의 상상화이고 조선 시대 때 그린 영정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정인홍이 참수당한 후에도 합천 사람들은 외경의 마음을 담아 정인홍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봉안했는데 훗날 부임한 어느 군수가 " 역적을 모셔 무엇하느냐"하면서 사당과 영정을 태웠다. 그 직후 군수와 일가족 모두 병에 걸려 죽자 "천벌을 받았다"며 수군거렸다.[8]
  • 80대 후반까지 장수한 정인홍과는 달리 아들 연과 손자 능은 모두 30세도 채우지 못하고 정인홍보다 먼저 죽었다. 당시 평균 수명이나 시대 배경을 따지면 정인홍이 비정상적으로 오래 산 것인데 전란까지 겪은데다가 인조반정만 아니었으면 더 살았을 것. 특히 정인홍이 살았던 시기를 보면 90대 가까이까지 산 것이 참 신기할 정도.
  • 동계집과 내암집의 기록을 보면 이원익과 제자였던 정온은 정인홍이 노망에 걸렸던 걸로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정온은 정인홍이 나이 80이 넘어 정신이 흐려져 이이첨 한찬남의 무리에게 사기를 당해 이용당한 것에 불가하다며 정인홍의 사형을 반대했고 이원익 역시 정인홍이 젊은 시절에는 강직했지만 늙어서 정신이 혼매해져 이이첨 일당에게 속임을 당하고 흉악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며 한탄하였다.
"신이 정인홍에게 비록 책을 들고 가서 수업(受業)한 일은 없지만 스승과 문생의 신분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계축년(1613, 광해군5) 이후로 그의 논의가 서로 어긋나 마치 다른 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듯하였으므로 신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고서 스승과 문생 사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마는, 이는 모두 80세가 넘어 정신이 흐려진 뒤의 일입니다. 가까이는 기(沂), 결(潔), 옹(滃), 회(澮) 등의 무리가 부추겨서 재화를 불러일으켰고, 멀리는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의 무리가 우롱하여 재앙을 매개하였으니, 늙은이가 사기를 당한 모습이 어찌 애처롭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어린아이와 늙은이는 죄가 있더라도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정인홍의 죄가 용서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극형(極刑)에다 연좌(緣坐)와 적몰(籍沒)의 형률을 시행하여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에게 적용했던 것처럼 똑같이 시행한다면, 비단 옛 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성상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너그러운 법을 힘써 따르는 성덕에 손상이 가지 않겠습니까.
동계집 제3권 / 소(疏) - 계해년(1623, 인조1)에 올린 사직 상소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는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을 지냈다. 계유년(1633, 인조11)에 백강이 전라 감사가 되어 강가로 완평을 찾아가 작별하였다. 완평이 이르기를 “나는 빨리 죽기를 가장 원한다. 근자에 정인홍 같은 사람은 젊은 시절부처 청렴하다는 명성과 곧은 절개로 당세에 이름을 떨쳤으나, 늙어서도 죽지 않고 있다가 정신이 혼매해져서 흉악한 무리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결국 흉악한 이름을 얻었으니 나는 이것을 경계로 삼아 매번 곧 죽지 않은 것이 걱정스럽다.”라고 하였다. 이해에 완평이 세상을 떠났다.
내암집 제15권 / 부록(附錄)

4. 대중매체

4.1. 소설

  •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의병장 시절을 다루기 때문에 대북파를 이끌던 시절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평가가 호의적인 편.

4.2. 드라마

  • 1995년 KBS 드라마《 서궁》에서는 배우 서상익이 연기했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한명구가 연기했다.


[1] 153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생년도는 불명으로 1536년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 [2] 인조반정 이후 정운공신 삭제로 인한 삭탈. [3] 간단히 풀어쓰면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다. 요컨데 대학생들이 대학 출석을 거부하며 시위를 하는 것인데 당대 성균관의 위상을 생각하면 권당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500년 조선 역사에서 96회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조선 후기에 남발된 권당이 다수를 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 붕당이 심화되기 이전인 조선 중기에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다. [4]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성균관의 문묘에서 제사를 지냄을 가리킨다. [5] 정인홍의 제자였던 동계 정온이 정인홍의 사형을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정온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이첨과 달리 가족들이 연좌되지는 않았다. [6] 이 역모에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 [7] 사학자 신채호는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1931년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쓴 편지를 통해 그를 높이 평가했음을 밝혔다. "정인홍 공약전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며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한국의 역사상 삼걸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으며 특히 정인홍의 개혁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8] 이인좌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인홍의 증손도 연루돼 장살당했는데 그 때 사당과 영정도 피해를 입은 듯하다. 후대 인물 이옥의 기록에 따르면 정인홍은 굉장히 늙은 여우와 닮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