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3대 왕 태종의 딸 정정옹주에 대한 내용은 정정옹주(태종) 문서 참고하십시오.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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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왕녀
정정옹주 | 貞正翁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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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옹주묘 전경 | |||
출생 | 1595년( 선조 28년) 2월 15일[1] | ||
조선 황해도 해주목 해주행궁 | |||
사망 |
1666년(
현종 7년)
10월 3일 (향년 7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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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성부 남부 명례방 사저[2] | |||
능묘 |
정정옹주묘[3]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 5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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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부왕 | 선조 | ||
생모 | 정빈 홍씨 | ||
부군 | 진안위 류적(晋安尉 柳頔) | ||
자녀 |
친자 없음 양자 - 유명전(柳命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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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 정정옹주(貞正翁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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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서8녀. 어머니는 현감 홍여겸의 딸인 정빈 홍씨로, 경창군의 동복 누나가 된다.2. 생애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와중에 황해도 해주목 해주행궁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선조에게 직접 효경과 내칙을 배웠고, 1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정정옹주로 책봉되었다.1606년(선조 39) 홍문관 교리 유시행의 아들 유적이 부마로 부마로 결정되었으나 혼인을 앞두고 유적의 아버지 유시행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혼인 의례가 삼년상 뒤로 미루어졌다. 그런데 예비 시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버지 선조가 승하하는 바람에 실제 혼인은 1610년(광해 2)에야 올릴 수 있었다.
옹주는 광해군 대에 갖은 고초를 겪었다. 특히 남편 진안위 유적이 인목왕후를 폐출하려는 폐모론에 반대하였기에 광해군의 일파로 둘러싸인 조정 안팎에서 살 수가 없었다.[4] 1619년(광해 11) 남편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옹주는 따라 죽으려고 마음 먹었다. 다만 어머니 정빈 홍씨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서 이룰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복 자매가 되는 옹주의 언니들은 부왕이 살아있을 적에 혼인해서 많은 예물과 재산을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광해군 대에 혼인했으므로 살림이 궁핍하였고, 혜택도 적었는데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인조가 살림살이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정정옹주는 72세가 되던 1666년(현종 7년)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현종(顯宗)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 비용을 후사하였으며, 남편 유적의 묘와 합장하도록 하였다.
2.1. 성품과 일화
화락하고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종종 이치를 아는 군자들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세상 물정을 잘 알았고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훌륭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격이 검소하여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손수 제수를 장만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 새벽녘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므로 종족들이 흐뭇한 마음으로 탄복하였다.
《유적비명》
《유적비명》에 적힌 또 다른 일화로는 한 번은 거처하던 집의 담장이 무너져 수리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 일은 이웃집과 분담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세상 물정을 잘 알았고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훌륭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격이 검소하여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손수 제수를 장만하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 새벽녘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므로 종족들이 흐뭇한 마음으로 탄복하였다.
《유적비명》
그러나 옹주는 “내가 우리 집 담장을 수리하는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더구나 이웃집은 나보다도 더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정승(李政丞)이 이 말을 듣고는 “이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옹주의 어진 성품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부마 유적의 동생 유영(柳潁)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아들들이 가난하게 지내자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하루는 임금이 사사로운 일로 안부를 묻자 옹주가 대답하기를 “늙은 몸이 의식을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애비 없는 조카들 가운데 기이한 질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데도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감동하여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주라고 명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둘러 싸인 채, 천 리도 틈도 주지 않고 끊이지 않으셨다.
그밖에 궁가에서는 하나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오직 정정옹주께서 한 차례 편지를 주시고는 그 생사를 물으셨다.
《제주풍토기》
《제주풍토기》의 저자 이건(李健)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의 아들이고, 아버지 인성군이 인목대비 폐모에 찬성하는 바람에 인조반정 이후, 반정공신 이귀에 의해 가족 단위로 제주도에 8년간 유배당한다. 그당시 제주도에 유배당한 8년간의 일을 바탕으로 제주풍토기를 지었고, 그 책 안에서도 그 설움을 토해낸다. 이 책에서 정정옹주가 안부를 물은 편지를 보낸 유일한 궁궐의 사람으로 나온다.그밖에 궁가에서는 하나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오직 정정옹주께서 한 차례 편지를 주시고는 그 생사를 물으셨다.
《제주풍토기》
3. 가족 관계
- 시부 : 류시행(柳時行, 1566 ~ ?)
- 시모 : 한산 이씨(韓山 李氏, ? ~ 1619) - 이대화(李大禾)의 딸
- 남편 : 진안위 류적(晋安尉 柳頔, 1595 ~ 1619)
- 양자 : 류명전(柳命全, 1628~1664) - 시동생 류영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