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22:38:14

이광(조선)

李洸
1541년( 중종 36년) ~ 1607년( 선조 4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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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1], 는 사무(士武), 는 우계산인(雨溪散人), 우파(雨波)이다.

율곡 이이의 8촌 삼종제(三從弟)이며, 택당 이식의 작은할아버지이다.

2. 생애

1541년 도사(都事:종5품)와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종5품)을 지낸 아버지 이원상(李元祥)과 어머니 평산 신씨 신옥형(申玉衡)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이다. 충무공 이순신과는 19촌의 숙질(叔姪)간으로, 비록 촌수는 멀었지만 줄곧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27세 되던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생원시에 3등 57위로 입격하고 참봉(종9품)을 지내다가 1574년(선조 7) 별시 문과에 병과 9위로 급제한 뒤 성균관 학유(學諭:종9품)·검열(檢閱:정9품)·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형조 좌랑(정6품) 등을 역임하였다.

1584년에는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북 지방민들의 구호 실태를 살피고 돌아와 영흥 부사에 임명되었다. 1586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590년 전라도 관찰사로서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미온적으로 처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591년 호조 참판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변방 사정에 밝은 인물로 남쪽 삼도를 방어하게 하였는데 이 때 전라도 관찰사로 발탁되어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과 함께 삼도를 방어했다.

이 후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으나, 용인 전투에서 참패하였다. 이어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으면서 웅치(熊峙)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앞서의 패전을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했다. 이후에도 패전을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 평안도 벽동군에 유배되었다가 1594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7년 사망했으며 저서에 《우계집》이 있으며 맏형 이섭(李涉)의 장손자 이식(李植)이 행장을 썼다.

덕산 이씨(德山 李氏) 이증영(李增榮)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뒀다.


[1] 덕수는 현재 북한 개성시 일대로 이순신, 율곡 이이와 같은 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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