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8:56:05

조보

1. 개요2. 역사3. 현대 서적으로 발행4. 민간 인쇄 조보 발견5. 기타

1. 개요

조보(朝報) 또는 기별[1] 조선 시대에 발행된 관보로 폭은 35cm이며, 길이가 일정치 않은 낱장의 종이 초서체로 쓰였다.[2]

2. 역사

조보에 대한 기록은 중종 15년(1520년)의 것이 가장 오래되어 적어도 중종대부터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일각에서는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으로 규정하려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인 신문과는 그 성격상 괴리[3]가 있는데다 중국에서도 더 이른 시기에 관보가 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세계 언론사학계에서는 거의 인지되고 있지 않다.

매일 아침 승정원에서 제작, 배포되었으며 임금에게 올라간 상소문이나 조정의 인사이동, 중국 일본의 소식 등 다양한 기사들이 올라갔으며 매일 아침 이렇게 작성된 조보는 임금에서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볼 수 있었으며 조보의 내용을 베껴 쓴 [4] 관보는 고위 관료와 양반계층에 한해 배달이 되었다. 관보는 먼 지방에 있는 관료나 귀양 간 선비들에게도 일주일, 한 달치 등이 모아져서 전달되기도 했으며 중요한 정보전달매체였다.

조보는 초서체로 쓰였고 활판 인쇄도 되지 않다 보니 초서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선조대인 1577년에 민간업자들이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민간 인쇄조보가 목판 인쇄되어 상업 발행되었다.(현재 남아있는 조보를 보면 목판만 쓰인것이 아니라, 금속활자로 인쇄된것으로 추측된다.) 사대부나 글 좀 아는 백성들 사이에서 가독성이 좋은 데다가 누구나 면포와 곡물을 낸다면 [5]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선조가 인쇄조보의 발매가 민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국가기밀의 유출을 우려, 크게 분노하며[6] 해당 민간업자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고 민간 인쇄조보 발행을 허가 낸 관료들도 좌천시키며, 민간에서의 신문제작은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율곡 이이가 윗대가리들은 죄다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하면서 아랫놈들만 고생한다고 대차게 깠던 적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300년간 조선에서 민간인 대상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고, 1883년이 되어서야 한성순보가 나오게 되었다.

3. 현대 서적으로 발행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8년에 조보 일부분을 모아 원문을 한국사료총서 제52집 세권으로 발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

1859년(철종 10)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약 33년 간에 걸쳐 발행된 조보들로 약 1,350편이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 소장본만 모아 발행한 것으로 타기관이나 기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조보들은 편철하지 못한 것이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해제 항목을 참조.

4. 민간 인쇄 조보 발견

2017년 4월, 조선 시대의 민간 인쇄 조보가 현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 조보는 1577년 인쇄물로 경북 영천 용화사의 지봉 스님이 경매 사이트에서 입수하였다.( #1, #2) 이는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521호로 지정되어 있다.

5. 기타

  • 조선 중종 때부터 시작하여 수백여년간 계속 관보를 펴냈기 때문에 여러 황당한 에피소드도 많다고 한다. 글씨를 너무 못 써서(...) 탄핵까지 당한 기자(1600년( 선조 33년) 이형원), 국가기밀 누설방지를 위해 이 부분은 빼라고 오프 더 레코드를 걸어놓은 기사를 몰래 게재해버린 기자(1597년(선조 30년), 1632년(인조 10년)), 중국 요동 지방이나 일본 지역까지 친절히 신문을 배달해댄 일, 정치인들의 여색 관련 문제들만 미친듯이 파헤치던 기자(1612년(광해군 4년)), 임금만 볼 수 있던 탄핵상소문을 전국에 속보로 올려버린 기자(1621년(광해군 13년)), 신문기사로 이조판서까지 낙마시켜버린 기자(1569년 이조판서 박충원) 등등이 있다고 한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보도지침' '오프더레코드'를 어긴 조선의 기자
  • 원칙적으로는 허가된 사람만 볼 수 있었지만 몰래몰래 빼가다보니 심지어 오사카에서 조선의 과거시험 합격자를 알아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 특히 속담인 간에 기별도 안 간다의 기별이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2] 1890년 5월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의 기록 [3] 신문은 대중성(publicity), 정기성(periodicity), 시의성(currentness), 범용성(universality)을 그 조건으로 가지나, 조보의 경우 대중성과 범용성에서 관보의 특성에 따른 한계가 있었다. 민간에 보급되었기는 하지만 매우 기간이 짧았다. [4] 많은 양을 베껴 쓰느라 글씨를 빠르게 쓰게 되어 글씨를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5] 당시에는 쌀이나 면포가 화폐의 역할을 했다. [6] 선조가 워낙 조선사에 손꼽히는 암군이다 보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 건도 같이 엮어서 선조가 졸렬하다는 반응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조보는 본래 왕과 관료들이 보기 위해 만든 관보라서 기밀정보들도 많이 실려 있어 이것을 가지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어차피 선조는 이 건이 아니라도 욕 먹을 일은 널려 있는 왕이라서... 조보(朝報)에 대해서 착각하는 점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