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22:26:41

웅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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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 해전
熊浦海戰
시기 1593년 3월 12일 ~ 4월 7일
(음력 2월 10일 ~ 3월 6일)
장소 조선 경상도 웅천
원인 일본군의 재정비 및 웅포 연안 전진 기지 구축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와키자카 야스하루
쵸소카베 치카우지†[1]
구와나 치카카츠
하타 치카시
병력 판옥선 89척
전라좌수영 42척
전라우수영 40척[2]
경상우수영 7척
거북선 3척
조선 수군 1,700명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3] 군함 51척 침몰
사망자 2,500명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영향 일본의 대명(對明) 강화 협상 입지 약화
한양 철수
1. 개요2. 전개
2.1. 출전 (2월 6일 ~ 10일)2.2. 교전(2월 11일 ~ 3월 6일)
2.2.1. 웅포 지역의 특징2.2.2. 해전2.2.3. 수륙병진 작전2.2.4. 재정비 그리고 재공격(2월 28일 ~ 3월 6일)
2.3. 복귀 (3월 10일)
3. 전과4. 평가5. 패전?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 당시였던 1593년( 선조 26년) 계사년 2월 10일 ~ 3월 6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웅천(웅포)에서 약 1개월간 7번 접전을 펼친 끝에 일본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해전이자 임진왜란 최초로 이순신 상륙전을 전개했던 해전이다.

2. 전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옥포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모두 승리했으나 아직도 일본군 규모는 만만치가 않았다. 이는 일본군의 함선이 많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조선 수군의 함선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부산포 해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원 아래 재무장이 강화되어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호남 지역 내륙으로 진출하고, 해상으로 병진하기 위해 웅포 연안에 전선 115척에 병력 1만 6천명의 전진 기지를 설치하였으며, 부산포에는 다시 500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던 것이다.[4]

웅포의 적군이 부산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한,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부산 출격이 불가능하며, 또한 부산으로 초월 공격을 한다해도 일본군의 양면 협격을 당할 경우, 열세한 통합 함대가 중과부적으로 역공을 당하여 대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순신은 웅포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2.1. 출전 (2월 6일 ~ 10일)

이에 이순신은 2월 6일 낮 12시 판옥선 42척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2월 7일 남해도 남단 미조목을 거쳐 사량도에서 1박하고 2월 8일 정오에 견내량에서 이억기 함대 판옥선 40척과 원균 함대 판옥선 7척과 합류하여 연합함대를 구성했다. 총 89척이었다. (원균이 경상 우수영 병력을 제대로 온존시켰다면 경상 우수영 완편 함대 기준 170척 가량이었을 것이다.)

연합함대는 2월 8일 오후에 견내량을 출범하여 저녁 늦게 칠천도의 외줄포[5]에 당도했다. 일기 불순으로 2월 9일과 10일은 해상 기동이 불가능하여 계속 그곳에서 유박 하면서 작전 계획을 검토했다.

2.2. 교전(2월 11일 ~ 3월 6일)

2.2.1. 웅포 지역의 특징

웅포 지역은 웅천 읍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웅포를 가기위해서는 웅천 왜성(남산 왜성)과 지금 전망대가 있는 곳(백석 말이고 지금은 남문 전망대)을 지나가야하나 그 폭이 600미터 내외로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이 진을 형성하여 들어가기는 불리하였다.

폭은 600미터이지만 진입할 수 있는 거리는 200미터 내외이고 웅포까지의 거리가 1.5km인데 좁은 수로의 폭으로 형성되어있어서 접근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군은 웅천 왜성과 반대편 능선(백석말)에서 조총으로 무장하여 이동하기가 불리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주력을 송도 서측 해안에 결진 대기케 하고 수심이 깊은 밀물 때를 이용하여 7척 ∼ 8척이 교대로 진입하여 유격전 식 전법으로 장기 소모전을 펴면서 적을 격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웅포 해전은 8대 해전 중 최장기전으로 무려 1개월간 계속 되었는데, 2월 10일, 12일, 18일, 20일, 22일, 28일 그리고 3월 4일 ∼ 6일의 7회에 걸친 맹공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2.2.2. 해전

기간 중 해전은 2월 18일 웅포에서 5척, 3월 4일 저도(거제도)에서 8척, 3월 5일 저도(거제도)에서 17척, 3월 6일 청승에서 21척, 도합 51척을 분멸하였다. 국내 사료에는 구체적인 일자별 전과가 없이 20여 척으로 돼있으나, 일본 사료에는 피해를 일자 별로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웅포 해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마지막 단계인 2월 22일에는 이순신이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2.2.3. 수륙병진 작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순신은 수륙병진 공격을 주장해왔는데, 웅포 일대에는 그 당시에 적 육군 1만 6천여 명의 대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부산포 해전 이후 관하에 1,600여명의 승군과 의병으로 하여금 적 접근 예상 통로를 차단·방어케 하고 있었던 바, 웅포의 적을 포위 섬멸키 위해 이들 중 1,100명을 2월 22일 남양리(웅포 동쪽)에, 600명을 제포(웅포 서측방)에 각각 상륙시켜 수륙 3방향에서 포위 공격을 실시하였다.

웅포 주위에 왜성이 많이 있어서 왜군들의 입장에서는 수비를 하기가 좋았다. 또 왜군의 입장에서는 물러 설 수 없는 위치적, 지리적 특성 때문에 1만 6천여 명이 포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웅천 왜성, 웅천 읍성, 제포성 등의 왜성이 있어서 수비에 대한 부담을 덜었을 것이고 가까이에 웅천 도요지가 있어 도공들을 납치하여 데려가기 좋으니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다.

2월 22일, 웅포를 공격한 공격 함대는 화포로 많은 적선을 파괴했고, 상륙한 의병과 승병은 다수의 적을 무찔렀다. 이순신의 당시 장계를 보면 상륙군의 결정적인 역할과 활약상을 알 수 있다. 「...... 의 승병들은 창을 비끼고 혹은 활과 총통으로 종일 돌격전을 감행하여 무수한 적을 쏘아 죽였다. 비록 참두는 못했다해도 우리 군사는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날 수륙 합동 작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적 수군과 육상의 육군을 완전 격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웅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수로를 이용해야 했는데 이는 사화랑에서 제포까지 거리가 가까운 이유도 있었지만 사화랑에서 제포까지 산들이 막혀있어서 육로로 갈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화랑에서 제포까지는 5리 정도 되고 조선 수군의 배로 이동을 해도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조선군들이 제포에 상륙을 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간길은 제포에서 제포성 방향이다. 조선 수군이 삼포 왜란 때 왜군이 갔던 그길로 똑같이 갔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적 수군은 통합 함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목책을 설치하여 당파 당하지 않도록 아군 함의 기동을 저지했고,[6] 양안(남산과 백석말)의 조총 진지에서 사격으로 엄호하였다.

2.2.4. 재정비 그리고 재공격(2월 28일 ~ 3월 6일)

연합 함대는 2월 28일 일단 칠천도의 외줄포로 물러서서 부대를 재정비 한 다음 주력을 이곳에 두고서 일부 공격 부대로 하여금 2월 28일 당일은 물론 3월 6일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7]

2.3. 복귀 (3월 10일)

이순신이 건의한 바 있는 조·명 연합군의 공격 기동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고, 온다던 명나라 수군은 나타나지 않으며 농민들의 파종 시기가 늦지 않아야 함으로 3월 10일 웅포 해전을 마감하고 본진으로 귀환하였다. 무려 1개월이 넘는 장기원정 작전으로 장병들의 피로는 극도에 달했고, 군수 지원 문제도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적의 영향권 내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3. 전과

1개월여의 7회에 걸친 장기 지구전에서 이순신 통합 함대는 적선 51척을 당파·분멸 했으며, 적군 2,500여 명을 수륙 협공으로 사살한 대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이 웅포 해전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승리를 얻는 동안 다행히 2월 12일 행주 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적은 더 이상 서울을 사수하지 못하고 4월 18일부터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4. 평가

흔히 웅포 해전은 별로 중요한 해전이 아닌 것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명·일 강화 교섭기에 행하여진 중요한 일전이었다. 특히 이순신이 선조에게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되기 상당 기간 이전에 정식 명령에 모든 수군을 총동원하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봐 삼도 수군 통제사 직제를 창설할 구상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말라」(片帆不退)는 강력한 왕의 지시는 적의 퇴로 차단과 추격 소탕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바, 이순신은 최장 기간인 1개월 3일간의 힘겨운 작전을 전개하였다.

아무튼 이순신의 웅포 해전은 도요토미의 특별 명령에 따라 적 수군이 웅포에 구축한 해상 전진 기지 겸 육상 전초 기지를 반신불수로 대파함으로써 일본과 명나라간의 강화 협상에서 조선에 불리한 조건들을 일방적으로 일본이 관철치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특히 강화 기간 중의 웅포 해전 승리는 도요토미의 조선 입국을 멈추게 하고 일본군의 서울 철수를 불가피하게 강요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2월 12일의 행주 대첩을 가능케 한 간접적 요인도 됐다.

이순신이 전라도를 지켰기에 권율이 3천 명의 의병을 전라도로부터 동원하여 상경할 수 있었고, 충청 수사 정걸이 판옥선에다 화살과 쌀을 싣고 한강 하류에 갖다 대어 행주 산성의 전투원들에게 추진 보급할 수 있도록 보장한 것 역시 이순신의 전라도 해역 제해권 확보 덕분이었다.

웅천 해전이 진행 중이던 1593년 2월 27일 서울에 모인 일본 장수 15명은 논의 끝에 다음 사항을 결정했다.
식량이 부족하므로 부산까지 철수한다.
② 부산에 가서 도요토미에게 건의하여 본국 철수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 후 3월에 서울에 왔던 도요토미의 특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선 현지 주둔군 장수들의 의견을 수렴한 건의문을 갖고 귀국하기에 이른다.
① 병사들에게 잡곡밥을 먹이면 4월 11일까지는 견딜 수 있다.
서울까지 식량 추진이 불가능하다.
③ 전라도를 치는 일은 신중한 계획이 필요하다.
④ 전라도와 경상도를 치고 난 다음 해안가에 튼튼한 성을 쌓을 것이다.
 
이리하여 강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다음 사항이 비밀리에 합의됨으로써 명나라는 조정과 수군에게 공격 중지 지시를 하달하게 된다.
① 일본군은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되, 명군과 조선군이 도중에 공격 못하도록 보장한다. 일본군도 도중에 약탈과 살인을 하지 않는다.
② 일본군은 서울 철수와 동시에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③ 일본군은 4월 18일 서울을 떠난다
 
이 정도의 강화 교섭이라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 이순신이 그동안 이룩한 수군의 전과 덕분이었다.

5. 패전?

김운회와 더불어 사이비 저술가로 악명이 높은 백지원 조일전쟁은 웅포 해전을 패전이라고 주장하는데, 전선이 암초에 걸려 좌초해서 그 배에 있던 수군 병사들이 육지로 올라가 도망치거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 걸 300명을 잃는 참사라고 하였다. 웅포 해전은 해상 대결을 피하는 일본 때문에 임진년 해전만큼 당장 눈에 띄는 전과는 안 보이지만, 그럼에도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조선 수군이 철수한 것도 상술한 거처럼 조명 연합 육군의 지원은 없고 파종 시기가 다가와서 한 것이지 조선 수군의 피해가 커서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웅포를 함락시키지 못했다지만, 애당초 수군만으로 웅포 수복까지는 무리였고, 그래서 육군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그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 이순신의 패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8][9] 결정적으로 조일 전쟁에서는 정유년 초 이순신이 파직당하기 직전의 부산포 출동에 대하여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 올린 장계 내용을 웅포 해전에서 그때의 상황이라고 적고 있다. 즉, 사료 인용 자체가 잘못됐다.

6. 관련 문서



[1]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조카, 쵸소카베 모토치카 대신으로 참전하였으며 교전 기간 중 병사하였다고 한다. [2] 다만 이순신의 기록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가 40척이 채 되지않는 판옥선을 이끌고 합류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미루어 볼 때 89척은 수치가 과장된 것이라 짐작된다. [3] 세간에서는 전선 4척 정도(이순신 장계에 의하면 통선 1척)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고 있다. [4] 부산포 해전에서 이순신은 무려 128척의 적선을 깨뜨렸으나, 그 직후에도 여전히 350척이 건재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본대가 철수한 뒤 부산 일대의 제해권을 다시 장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따라서 재건도 빨랐다. [5] 외줄포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견내량 전투에서 패한 지역이 외줄포가 아닌가 추청됨. [6] 목책은 바로 옆 제포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출입하는 선박을 관리하기 위해서 였다면 웅포에는 조선 함대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다고 보임 [7] 칠천도와 외줄포로 이순신 함대가 간 이유는 임진왜란 동안 조선 수군의 숙영지이기도 하지만 육안상으로 거제도에서 웅포가 보이고 웅천 왜성에서도 거제도가 보인다. 사화랑에서 철수했던 원인이 일본군의 병력이 사화랑을 넘어서 기습 공격할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8] 아니, 패전이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패전이다. 이순신은 해군제독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것이고, 명령만 내려놓고 손가락 빨던 조정과 육군의 책임이 크다. 이순신이 조선육군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을 감안하고 해병대 같은 상륙부대를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9] 애초에 당시 조선 육군 물자의 3할에서 5할은 이순신이 공급하고 있었다(...).이 정도면 삥이다 당장 행주 대첩에서 권율이 사용한 천자총통과 화약이 어디에서 온 건지 생각해보자, 삼도수군통제사가 육군을 멋대로 기르는 것은 월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