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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1918)

김승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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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제1회
( 1963년)
제2회
( 1964년)
[1] 김승호
( 혈맥)
김진규
( 잉여인간)
제4회
( 1966년)
제5회
( 1967년)
제6회
( 1969년)
신영균
( 시장)
김승호
(만선)
신영균
(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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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국산영화상 남우주연상
1957년 1958년 1959년
- 김승호 김진규
(나 혼자만이)
한국최우수영화상 남우주연상
1960년 1961년 제1회
( 1962년)
황해남
( 10대의 반항)
김승호
(박서방)
신영균
( 연산군)
남우주연상
제2회
( 1963년)
제3회
( 1964년)
제4회
( 1965년)
신영균
( 열녀문)
김승호
( 혈맥)
신영균
(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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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승호
金勝鎬
파일:김승호(1918).jpg
본명 김해수(金海壽)
출생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군
(現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사망 1968년 12월 1일 (향년 50세)
서울특별시
가족 배우자 이해경 (1929 ~ ?)
아들 김희라
손자 김선주, 김금성
손녀 김채주
학력 경성수송보통학교 (졸업)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영화학 / 학사)
데뷔 1937년 연극 《임자없는 자식》
1946년 영화 《 자유만세
종교 불교

1. 개요2. 생애
2.1. 초반 생애2.2. 후반 생애
3. 필모그래피4. 수상목록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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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연극 배우 출신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이다.

본명은 김해수(金海壽)이다. 아들로는 역시 배우 김희라가 있으며, 손자로는 역시 배우인 금성(본명 김기주)이 있다.

2. 생애

2.1. 초반 생애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3대 독자[2]로 출생하였고, 이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김두한이 동양극장 청춘좌에 소개해 준 것을 계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확히 어떤 업무를 했는지는 불명이지만 화신백화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1945년, 자유극장 창립단원 가운데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1946년 영화 《 자유만세》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1940~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연 내지 단역으로 무명생활을 하다가 1956년,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맹진사 역을 맡은 그는 195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수상하면서 스타로서의 지위를 확립해 나갔다. 이후 《 로맨스 빠빠》, 《 마부》, 《돈》, 《 인생차압》, 《박서방》, 《삼등과장》, 《굴비》, 《돌무지》 등 25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였다.

2.2. 후반 생애

1960년 4.19 혁명 당시 제1공화국에 대한 긍정적인 연설을 했다고 분노한 4.19 단체에서 집으로 쳐들어가 습격받기도 했지만, 김두한에 의해 오해가 풀렸다.[3]

1950년대 중반 ~ 1960년대 초반에는 콧수염 기른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가 1960년대 중반 들어 콧수염을 밀고 형사 같은 현대의 중년 남성상을 맡게 되었다.

1966년 당시 48세의 만학으로 한양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했다. #

1967년에는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8년 10월에는 부도수표 문제로 구속되었고 11월에는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 혐의로 잠시 기소되기도 했다.

1968년 12월 1일, 평소 앓던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해 집에서 세수하던 중 심혈관질환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 중에 사망했다. 향년 50세.

죽을 당시 구급차에 실려간 채로 무척 분한 얼굴로 "억울하다! 아직....더.. 아직 더 활동할 수 있어, 아직 죽긴 억울하다!"라고 아쉬워하며 유언을 남겼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당대수명이 짧았다지만 그래도 아직 50세밖에 안 되었고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배우로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된 지 한 달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망 당시 외아들 김희라는 21세였고, 동국대 임학과 재학 중이었다가 김승호의 사망 이후 중퇴하고 배우로 데뷔하여 배우 활동에 집중하였다.

3. 필모그래피

4. 수상목록

5. 여담

박근형의 회고에 의하면 연극을 마치고 선배배우들과의 만남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대선배인 김승호가 와락 끌어안으며 "이자식, 이거 배우 되겠네!"하고 극찬을 해주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1963년 첫 시상식 개최 [2] 그의 아들 김희라 역시 독자이니 김희라는 4대 독자가 된다. [3] 2010년 10월 25일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