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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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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헌대부(資憲大夫) 의민공(毅愍公)
이억기
李億祺
파일:이억기장군.jpg
<colbgcolor=#c00d45><colcolor=#fff> 이름 이억기(李億祺)
경수(景受)
본관 전주 이씨 덕천군파[1]
출생 1561년( 명종 16년) 9월 3일
조선 한성부
사망 1597년( 선조 30년) 8월 27일 (향년 35세)
경상도 거제현 하청면 칠천도
(현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부모 부친 - 심주군 이연손(沁州君 李連孫)
모친 - 고성 이씨 이중(李中)의 딸
부인 최숙(崔淑)의 딸
자녀 서자 - 이륜(李輪)
시호 의민(毅愍)
서훈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2]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 장군이며 시호는 의민공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조선 수군 장수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했던 1597년 ( 선조 30년) 7월 16일 새벽 통제사 원균의 휘하로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다가 조선 수군이 궤멸되며 전사했다.

2. 생애

전주 이씨로 왕실의 먼 친척이다. 정종의 10번째 아들인 덕천군( 세종대왕과 4촌 관계)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심주군 이연손(沁洲君 李連孫)이다. 무의공 이순신 양녕대군의 6대손이고, 선조 세종대왕의 6대손이므로 선조, 무의공 이순신은 둘 다 이억기와 14촌 관계이다. 이들 중 나이상으론 이억기가 제일 어리지만 항렬상으로는 중종과 같은 항렬이며 저 둘의 할아버지뻘이다. 오리(梧里) 이원익과는 12촌 관계가 된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서 17세에 사복시(司僕寺)[3]의 내승(內乘)이 되었고, 10대에 이미 무과에 급제했다. 21세에 종3품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임명되었으며 이 때 두만강을 넘어온 여진족을 무찌르며 큰 공을 세웠다. 26세에 함경도의 가장 북쪽 지역인 온성도호부에 발령되며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가 되었다. 이순신 녹둔도 전투 때문에 압박 받자 이억기가 이순신에게 힘을 실어 줬다고 한다.

1591년( 선조 24년) 32세 때 순천도호부사 겸 순천진병마첨절제사전영장토포사(順天鎭兵馬僉節制使前營將討捕使)를 거쳐 정3품 당상관인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하여 당항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며 활약을 했으며[4], 그 공은 이순신 다음으로 여겨진다. 다만 임진왜란 초기의 1차 출정 당시 해전에 참전하지 않아 선무공신 2등이 되었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전라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군 제주목의 전투 준비를 성원하였다. 또한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고, 연합 함대에서 기동 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5]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자, 이항복· 김명원 등 조정 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무죄를 극구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 명령을 받고,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가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여 원균을 비롯해 충청도 수군절도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했는데, 총 지휘관인 원균은 부하들 목숨을 내팽개치고 도망갔지만, 이억기와 최호는 도주하지 않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젊어서부터 활약한 유능한 귀공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 최고의 영웅인 이순신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졸장이자 나라를 말아먹은 대역죄인인 원균의 개성에 막혀 인지도가 거의 없는 편이다.[6] 이건 당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수군의 작전 통제권(주로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을 의논할 때 선조가 "이억기는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있는데, 쓸만한 사람이다"라고 하니, 체찰사였던 이정형[7]"그는 원균만 못 합니다"라고 답하는 일생 일대의 굴욕을 겪기도 한다. 또한 이순신의 외모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당시 삼가 현감 고상안도 이억기에 대해서는 "李水使浮虛不實。神不守舍。異日或戰破。或短折.이수사(이억기)는 과장되어 실속이 모자라므로 늘 정신이 다른 곳에 있었다."라고 비판적으로 기록하였다.

2차, 3차 출동 때는 전라 좌수영 병력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병력만 동원했다.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남겨둔 것인데 이는 육군에 파견되거나 서해로 올라오는 것을 막으라는 명령 때문인 듯 하다. 이순신 역시 육군에 병력이 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차례나 장계를 보낸 바가 있다. 이후 4차 출동 때는 40척이 넘는 병력을 보냈고, 그 이후에도 삼도 수군 중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렸다. 그런 것에 비해서 너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병력을 동원하는 문제로 이순신과 대립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후 로 푼 걸로 보인다.[8] 그 외에도 이순신이 이억기에게 가니까 원균과 같이 있었다는 등 둘의 불화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사후에 선무공신 2등이 되었고, 병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정조 때 마땅히 시호를 받아야 하는데 전례에서 누락되었다는 지적이 있어 의민(毅愍)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완흥군(完興君)에 추봉되었다.

종친이라서 실력이 있었음에도 견제 받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반론도 있다. 이미 왕위 계승에서 까마득하게 멀고 추존도 되지 못 한 존재감 없는 왕 정종의, 그것도 서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9] 선조가 방계 정도가 아니라 고종 급의 정통성이었더래도 이억기 정도의 사람은 위협이 못된다. 선조가 방계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추측이며 선조가 이억기를 혈통 때문에 위험하게 봤다는 추측은 신 안동 김씨 세도정치 기간에 '똑똑한 왕손을 다 죽였다'와 같은 억측으로 보인다.

3. 기타

  • 전투 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서 아차산에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으며, 이후 하남시 배알미동에 신도비를 세웠다. 현재 후손들이 현상금을 걸고 매장지를 찾고 있다.

4. 대중매체

  • 1962년 개봉한 영화 <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이예성이 연기했다.
  • 1978년 개봉한 영화 < 난중일기>에서는 배우 이대엽이 연기했다.
이억기 : 원 수사님! (원균이 그를 돌아보자) 권관 이영남은 어찌 처리하실 요량이시오이까? 그를 따른 천여 명의 군사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리 했을까요?[10]
원균 :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이 수사?
이억기 : 글쎄요. 홍철릭을 입고 장군으로 칭해진 것이 수삼 년[11]... 난 지금까지 장군의 직위를 내리시는 것은 전하시나, 그를 인정해주는 것은 부하들이라 여겨왔소이다. 현명한 판단을 하세요. 그래야 장군의 그 홍철릭이 마지막까지 명예로울 것입니다.
- 불멸의 이순신 77회 중에서
*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최성준이 연기했다. 신립이 주재한 경상전라 연합 수장 회의에서 첫 등장해 이순신이 "왜군 특성을 고려하여 3도의 수군이 연합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을 때 유일하게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옥포 해전에서 이순신이 원균과 갈등을 빚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듣고는[12] 이순신의 연합 결성 제안에 그를 전공을 탐하는 자라 의심하고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사천 해전 이후 지원이 절실해진 좌수영의 장수들이 1명씩 찾아가 이억기를 설득하자 의심을 풀고 당포 해전 후 합류했으며 한산도 대첩에도 참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이 "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명을 듣지 않자 윤두수에게 "이순신의 군대를 뺏으라"는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본인은 이순신만큼 함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에게 합류해버린다. 성웅인 이순신과 폐급인 원균 사이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하고 정의로운 지휘관으로 묘사되는데 이억기와 달리 "함대를 뺏으라"는 윤두수의 제시를 받아들였으나 실패한 원균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기도 한다. 이후 이순신이 통제사로 승격되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으며 이순신이 금토패문을 거역한 사건으로 인해 압송되자 그 부재 기간 동안 대리로 통제사 직무를 수행하는데 권준에게 지시를 내리는 짧은 장면에서도 그가 얼마나 유능한 장수인지를 보여준다.[13] 이순신의 파직 후 원균의 통제사 부임 기간 동안 원균이 수많은 좌수영 장수들을 잘라버리고 끝내는 조방장 김완까지 쳐내려 했을 때 김완의 파직만큼은 자신의 직위까지 걸고 말렸다. 이후 칠천량 해전에서 도선한 왜군들에게 둘러싸여 휘하 장수와 등을 맞대고 항전하던 중 왜군 장수가 던진 칼을 맞고 난도질과 함께 끔살당했다. 실제의 평가로도 이순신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칠천량 해전 중 제일 죽지 말았어야 할 인물로 꼽힐만큼 호평이 많은 인물이건만 그의 죽음은 큰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장면.[14]
  • 이순신 3부작
    • 2014년 개봉한 영화 <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죽은 부하들의 원혼을 보는 장면에서 이순신이 "이 수사...... 최 수사......"라며 울며 말하던 '이 수사'와 '최 수사'는 각각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를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모른 채 지나간 대사.
    • 명량의 후속작이자 2022년 개봉작인 영화 <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공명이 연기했다. 차분한 성격으로 이순신의 학익진 결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이순신을 끝까지 믿고 따르는 든든한 후배로 묘사된다.
    • <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도 공명이 연기, 특별 출연으로 등장한다. 이억기는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해 노량 해전에는 참전하지 못했다.[15] 대신 칠천량 이후 표류하던 이억기의 판옥선을 이순신이 대장선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억기수사는 다시한번 우리와 바다에 나가 싸울것이라며 언급한다. 이순신이 전사자 명단을 보며 회상하는 장면, 노량 해전 후반부에 이순신이 보는 영령으로 등장한다.

[1] 5세 억(億) 항렬. [2] 증 효충장의협력 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 宣武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완흥군(完興君) 행 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시(諡) 의민공(毅愍公) 이억기. [3] 왕가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부서 [4] 그러나 옥포 해전 이전인 5월 1일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 모이자는 제안을 했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억기는 6월 4일 사천해전 도중에 참전했다. 대략 비슷한 시기부터 지상에서도 병력 동원과 편제가 종료되고 부대 단위의 군사적 액션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 급으로 빡빡하게 훈련을 시키지 않은 이상 조선의 평범한 군사 동원 속도가 이정도였다고 봐야 한다. [5]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 [6] 이 항목 역시 제법 늦은 2011년 5월 27일에 만들어졌을 정도며 임진왜란 때의 장수 및 이순신의 부하들보다도 훨씬 늦은 편이다. [7] 연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정암의 동생이다. 선조 이순신이 출전명령을 안따르자 노발대발하며 길길이 날뛰고 신하들도 부화뇌동하며 파직을 거들고 있을 때, 정탁과 함께 유일하게 옹호해줬던 인물이기도 하다. [8] 이건 별로 문제될 게 없는 게, 이순신은 원균은 물론이고 자신 휘하 부하들도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까는 내용을 난중일기에 남겼다. 당대의 의병장들도 깠다. 워낙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욕을 먹지 않는 것은 그 엄격함을 자기 자신에게도 지킨 덕분이다. [9] 정종은 숙종 대에야 비로소 묘호를 받았다. 세종 1년 승하하였을때 받은 시호가 온인 공용 순효 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었는데 명나라에서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받고는 공(恭)자가 두 번 들어간다며 공용(恭勇) 두 자를 지워버렸다. 그래서 조선에서 받은 시호가 고작 네 글자였는데 숙종 때에 비로소 묘호와 함께 시호 여덟자를 채우게 된다. 의문 장무 온인 순효 대왕(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10] 윤두수가 이영남 다음으로 원균에게 이순신의 함대를 뺏으라는 명령을 하자, 이에 복종할 수 없었던 이영남은 군사들을 동원해 원균과 휘하 장수들을 감금시켜 버리고 독단으로 우수영 함대를 움직여 이순신에게 합류했다. 명분이야 옳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건 내란에 가까운 사태였다. 어찌저찌 풀려난 원균은 좌수영을 찾아오자마자 이영남에게 칼을 휘둘렀고, 상황을 대강 파악한 이순신은 이영남을 하옥시킨 뒤 그 처분을 원균에게 맡겨버렸다. [11] 한 번 쯤 볼 만한 대사이긴 하나 세 가지 면에서 고증 오류인데, 이억기가 전라우수사가 된 것은 1591년이므로 "수삼 년" 이 아니라 "1년" 이다. 또 이건 이순신도 마찬가지니 문제가 더 심각하지만, 수사면 정 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자리이므로 "영감" 이라고 불러야 한다. 장군이라는 호칭은 큰 결례다. 끝으로 붉은색 철릭이 고위 장교들의 복장으로 정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보다 한참 뒤인 영조, 정조 때다. [12] 원균은 옥포 해전 종료 후에도 상륙하여 왜적을 소탕하고자 했으나 역습이 우려되는 상황이라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원균은 멋대로 진을 이탈해 상륙하려 했고, 심지어 엄연히 이순신 휘하인 이언량에게 자기 명령을 안 듣는다고(...)화살까지 쏘았다. 이를 계기로 좌수영 장수들은 이순신의 확고한 단일 지휘 체계를 확립해 원균의 망동을 막고자 조정에 단독으로 공과 장계를 올리라고 설득했고 결국 이순신은 가선대부로 승차한 반면 원균은 승리하고도 윤두수의 꾸지람과 선조의 비망기를 받아 기분을 더블로 잡쳤다. 이 때문에 더더욱 삐뚤어진 원균은 "더 큰 전공을 세우겠다"며 비망기도 무시하고 왜군과 전면전을 벌이다가 연전연패한다. [13] 이억기가 나오는 분량 자체는 생각보다 적은 편인데 이순신이 통제사로 부임한 뒤에는 연합 회의에 충청 수사 최호도 있었다. 그럼에도 극 중에서 이순신이 이억기를 많이 신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 김완이 잡히고 이억기가 죽는 와중에도 원균은 칼 1번 빼들지를 않는데 전날 이순신에게 "부산을 치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과는 모순되는 모습. 이 드라마가 원균을 미화한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원균의 무능함과 용렬함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나마 실드를 치자면 최고 지휘관의 죽음은 전력에 엄청난 손실을 끼칠 수 있으니 몸을 사린 것으로 볼 수 있기는 한데 애초에 부산 진격 자체부터 모든 전략과 그로 인한 피해까지 다 그의 엄청난 판단 미스로 비롯된 것이다. [15] 작중에서도 칠천량 해전 때 끝까지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