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21:40:58

남효온

生六臣
생육신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山林三傑
산림삼걸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추강 남효온
秋江 南孝溫
구봉 송익필
龜峰 宋翼弼

진승총(震乘總)
{{{#!folding [ 본기(本紀) ] 권1기
, 제1대 「태조기(太祖紀)」, , 제2대 「정종기(定宗紀)」, , 제3대 「태종기(太宗紀)」, ,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 제5대 「문종기(定宗紀)」, , 제6대 「단종기(端宗紀)」, , 제7대 「세조기(世祖紀)」, ,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 제10대 「연산기(燕山紀)」, ,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 제12대 「인종기(仁宗紀)」, ,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 제17대 「효종기(孝宗紀)」, , 제18대( 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 제19대( 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 제20대( 수정록) 「경종기(景宗紀)」,
이순 이윤
부록
금상(今上) }}}{{{#!folding [ 평전(評傳) ] 평전
이용 · 김종서 · 황보인
,「부록 사육신(死六臣)」, ,「부록 생육신(生六臣)」,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 }}}{{{#!folding [ 부록(評傳) ] 저자 · 부록
이민보,저자, · 당파원론 · 국조연대 · 선원록 · 호송 금부도사의 작가 · 김지남 }}}

성명 남효온(南孝溫)
본관 의령 남씨[1]
출생 1454년 조선
사망 1492년 조선
국적 조선
백공(伯恭)
추강(秋江),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벽사(碧沙)
시호 문정(文貞)

1. 개요2. 생애3. 학문과 사상
3.1. 도학과 성리학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 단종~ 성종 시대의 인물. 생육신 중 1명.

저서로는 추강냉화, 육신전, 수향기, 추강집, 사우명행록, 고담궤설, 귀신론 등이 있다.

2. 생애

개국공신 남재의 5대손이다. 남효온의 아버지는 남전, 어머니는 이곡의 딸이고 남효온의 할아버지는 남준, 할머니는 강석덕의 딸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남간이다. 남효온의 아내는 성도 이름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남충세와 2명의 딸을 얻었다. 첫째 사위는 임성, 둘째 사위는 이온언으로 이온언은 한산군 이손의 셋째 아들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 장군, 영의정을 지낸 남곤, 문신 남포와는 친척이다.

남효온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김시습의 제자로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주계정, 심원, 안응세 등과 친교를 맺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낸 일이 마음에 걸린 남효온은 현덕왕후 권씨의 소릉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임사홍, 정창손 간신들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유랑 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사망 후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고 현덕왕후 소릉의 복위를 주장했다하여 부관참시당했다가 중종 때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가 저술한 육신전 숙종 때 간행되었으며 정조 6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 학문과 사상

당대 사림의 종주인 김종직과 재야의 김시습에게서 모두 수학한 영향으로 그의 학문은 김종직의 다른 제자들에 비해 독특하며, 도가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는 등 김시습의 영향력이 드러난다. 다만 동시에 김종직의 제자는 제자라고 다른 사림파들처럼 경세론 등을 통해 성리학 위주의 국가질서 구축에도 관심이 많았다.

3.1. 도학과 성리학

먼저 김시습의 사상과연계되는 점을 보면 김시습의 사상체계는 도일기일심(道-氣-心)으로 이어지는 형태였는데, 남효온의 사상체계 또한 거의 같다. 이는 도-심으로 연계되는 구조인데 남효온에게 있어 도와 심은 연계 내지 일치되며, 특히 이 모든 것이 심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심을 통해서 전 우주의 생성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남효온이 심을 강조한 사상체계는 <성론>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일반적으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양분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 성은 하나라고 하면서 기질지성은 성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남효온의<심론>은 그의<귀신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그가 다시 귀신론을 지었던 것은 당시 만연하던 무불의 습속을 이론적으로 공격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남효온도 다른 당대 유학자들처럼 불교가 무속처럼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한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당시에 무속이든 불신이든 사람들의 운명을 이들 귀신들이 좌우하고 있어 귀신에게 기도하면 복이 온다는 생각이 만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남효온은 귀신이란 이기(理氣)와 다름이 없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는 도교의 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심에 의해서 구현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동시에 귀신이 바로 이이기 때문데 禮가 아닌 것은 흠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무불에게 드리는 기도가 결국은 흠향되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이치에 근거하여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습속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이를테면 귀신에게 점을 쳐 화복을 구하는 테세나 풍수지리를 따지는 풍속 등을 귀신의 이치를 가지고 설파하였다. 결국 남효온은 당시 널리 퍼져 있는 귀신화복론에 대해 귀신은 사람에게 화를 끼치지 않음을 말하면서 무석술가[2]의 설이 만연되고 있는 것은 도학이 밝지 않은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1] 충경공파(忠景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 [2] 무당에게 길흉화복이나 오행 등 우주의 이치를 묻고 의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