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8:55:08

이완(1579)

李莞
1579년( 선조 12) ~ 1627년( 인조 5)

1. 개요2. 상세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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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덕수(德水), 는 열보(悅甫), 완이(莞爾).

2. 상세

충청도 아산현(현 충청남도 아산시) 출신. 이순신 장군의 맏인 이희신(李羲臣)의 아들로 이순신의 조카다. 이순신의 형인 이희신과 이요신(李堯臣)은 모두 일찍 별세했는데 그래서 형들의 가족도 모두 이순신이 부양했다고 한다. 당시 정읍 현감으로 내려가는 이순신에게 조카들을 모두 데려가면, 탄핵받아 또 면직당할테니 다 두고 가라고 주변에서 권유했으나, 정작 이순신은 두 형님이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조카들을 내가 버리면 세상 어디에 의존하겠는가?라며 정읍으로 모두 데리고 내려갔다. 다만 이는 주변 사람들이 인정머리가 없어서 조카를 두고 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은 지방으로 부임하는 수령들에게 일가 친척들이 몰려가서 붙어먹는 짓들이 공공연해 수령들이 자신의 친척들까지 먹여살린다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임의로 징수하는 일이 있어 지방민들의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를 남솔(濫率)이라 한다. 물론 정읍으로 내려간 뒤에는 주변의 우려가 완전히 불식될만큼 그 가족들이 처신을 잘했다.

임진왜란 당시 숙부 이순신을 따라 해전에 참전했고 특히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임종을 지키고 이후 싸움에서 독전한 인물로 유명하다. 아마 충무공 일가 중 제일 유명한 인물일듯 하다.[다만]

전란이 끝난 후 21세 되던 1599년(선조 32) 별시 무과에 을과 14위로 급제해서[2] 무관직을 지냈는데 인조 때 일어난 이괄의 난 평정에도 공을 세웠다.

정묘호란 무렵에는 의주 부윤을 지냈는데 이때 가도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군 모문룡의 패악을 참지 못해 모문룡의 병사들을 구타했다는 혐의로 강등되기도 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한이었던 듯. 아마 이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적인 성품의 배경에는 평생을 청렴 강직하게 살았던 숙부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3]

마침내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후금군이 의주를 공격하자 분전하다가 결국 전사했다.[4] 성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탄약고와 함께 자폭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설이 있으니, 이완이 후금군 침공 전날 술에 대취해 자고 있었는데 적이 공격해오자 술이 덜 깬 채로 전투에 나섰다가 불화살을 쏘려던 중 화살을 떨어뜨려 그게 쌓여 있던 화약을 유폭시켰다는 것.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거두인 김상헌의 형 김상용도 강화성 함락 당시 같은 사인[5]으로 죽었다는 무함을 받았다. 두 사건 모두 진위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조선 조정에서는 두 사람의 사인이 자폭임을 공인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목격자가 많을 사안도 아니라서 생긴 논란. 특히 이러한 자폭설을 부인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시 임금인 인조였다. 사후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강민(剛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유일하게 충무공 가문 구성원들 중 이순신 장군의 유지를 너무 잘 이어받은 인물로 유명한데 이순신 장군의 적자들의 경우 알다시피 임진왜란 직후 활약상이 전무하지만 이완의 경우 광해군 시절 부터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해 충청도 병마절도사 시절에는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숙부와 동급 벼슬인 가선대부를 하사 받았으며 성품 역시 숙부를 닯아 의주부윤 시절에는 조선백성들을 괴롭히는 모문룡의 부하들을 참교육 했다가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는등 숙부를 닯아 무관으로써 행적이 두드러진다.

게다가 의주성 전투에서 후금군의 항복을 거부하고 3000명의 병력으로 의주성을 사수하다가 실패하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등 아들이 아닌 조카이지만 숙부의 유지를 너무 잘 이어 받은 인물로 조선의 제갈첨으로 불리는데 당대 조선의 선비들은 이완을 가리켜 숙부보다 지혜와 재주는 모자라지만 충심만큼은 숙부 못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로 충무공 가문 구성원들이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게 되는 원인을 본의 아니게 제공했다.

3. 대중매체


[다만] 해당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 처음 등장했던 터라, 서인 측에서 일부러 기존에 기록된 인물인 손문욱을 지운 게 아니냐는 의혹이 짙다. [2] 본래 이완을 비롯해 이회, 이분(李芬) 등 이순신의 아들 및 조카들은 아버지이자 숙부인 이순신을 따라 수군에 종군했는데 일개 의병으로 참전했다. 당시 조선의 국법에는 '상피제'라고 해서 친인척들이 같은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이 이를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3] 말이 숙부지 사실상 양부나 다름없었다. 친부인 이희신은 이완이 아주 어릴때 요절하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줄곧 이순신이 이희신의 가족들을 부양했으며 좌천되거나 백의종군을 하는 등의 고난의 시기에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친자식들 못지 않게 정성을 다했다. 이희신과 이요신의 자제들 역시 숙부를 매우 잘 따랐다고 한다. [4] 이 당시 후금군에는 이괄의 난때 도망쳤던 이괄의 부하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의주성의 약점을 잘 알고있었다. 바로 수구문이었는데 후금군은 이쪽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결국 이완과 나머지 장군들 및 병사들이 전멸한다. [5] 김상용은 화약더미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불이 튀어 폭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자살할 것을 알고 김상용의 하인이 주저하자 담배를 피우겠다는 핑계로 불을 가져오게 한 다음 자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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