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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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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순왜 목록3. 관련 문서

1. 개요

순왜()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협력한 조선인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조선 정부에 대한 원한과 불만을 가졌거나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부역 행위를 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대 개념의 단어로는 항왜가 있다.[1] 조선 입장에서 본다면 매국노이지만, 대부분이 일본군의 강요로 부득이하게 일을 저질렀거나 조선 정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았고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책임도 지적되었기 때문에 국경인 같은 아주 악질이 아니라면 처벌은 거의 없거나 가벼운 편이었다고 한다.

사극 정도전에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서 부역하게 된 후 자신은 왜구의 강요로 했기에 정당하다고 외치는 백성을 보고 정도전이 처음에는 뺨을 때리다가 나중에는 "그래 너는 잘못이 없다. 백성을 지키지도 못하는 나라가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한다[2]. 이런 관계로 순왜들도 국경인 같은 개차반이 아니고서야 무작정 비난하기는 어려운 편이다.[3]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런 순왜들을 재귀순시키기 위해 면사첩(免死帖)을 발행한 사례도 있다. 순왜 일을 그만두고 순순히 자수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증명서를 뿌린 것이다.

일뽕들의 경우 일본군 점령지에서 순왜들이 급격히 불어난 것을 근거로 헬조선 생활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 부역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문부 장군이 의병 전력만으로 함경도를 탈환할 때 대다수 순왜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그냥 냅다 투항해버린 점, 정문부 장군이 악질들을 제외하면 대다수를 사면한 점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진짜 자발적인 부역이었다면 가토의 지원을 업고 죽기살기로 맞서 싸웠을 테니 말이다.

당시 순왜에는 3가지 부류가 있었다. 1번째로 일본군의 '길잡이 역할'을 한 자. 즉, 일본군이 조선의 도성 한양으로 진격할 때 도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 경우를 말한다. 2번째로 일본군에게 조선의 상황 등 정보 제공을 한 경우며 3번째로 일본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경우 등으로 분류된다.

순왜의 대표적인 예로 임해군 순화군 함경도 회령부에서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국경인이 있다.[4] 이건 임해군과 순화군이 막장이라서 그렇지만, 실상은 국경인은 이 작자들보다도 한술 더 뜨는 개막장이었다. 국경인은 일본 점령하의 함경도에서 실질적 권력자로 행세해 함경도민들을 상대로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수도권과 삼남 몇몇 지역 출신 위주로 정치가 행해지던 조선에서 평소 지역차별적인 대우를 받아 원한을 가진 함경도 지역 주민 일부가 이들을 반겨서 협력하며 순왜가 되기도 했지만, 국경인과 일본군의 세금 징수가 하도 가혹해 협력자들도 임해군이랑 순화군보다 더 악질이라며 반발했고, 결국 정문부를 비롯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동시에 매국노 국경인을 붙잡아 참살했다. 이렇게 일본군을 함경도에서 몰아낸 전투가 바로 북관 대첩이다. 참고로 조선은 그래도 '법대로 할 경우' 서민들에게 걷는 세금이 매우 낮은 편이었지만, 일본은 걷어들이는 연공이 상대적으로 무거운 편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조선은 수익의 10%였지만 일본은 50%도 감지덕지라 할 정도였다.[5]

이 밖에도 충무공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에는 사천 해전에서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한 조선인도 있어서 충무공은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는 이 순왜에 대해 좀 드라마틱한 이야기(백사별집 4권 잡기(雜記))도 있다. 박춘(朴春)이란 재인(才人. 곡예 등을 보여주던 광대)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일본군 장수가 되었는데, 마침 포로로 잡았던 한 조선인 여자가 박춘과는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다른 재인의 딸이었다. 이에 박춘은 편지를 써 준 뒤 그녀를 몰래 풀어줘서 아버지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박춘의 아버지 박세동(朴世同)에게도 따로 편지를 보냈으나, 박세동은 후환이 두려워서 이 일을 일부러 묻어버렸다. 그 외에도 노비나 조선 사회에 원한이나 불만을 가진 일부 천민들이 면천을 목적으로 순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순왜를 역이용하여 일본군의 사정을 염탐하는 첩자로 쓰기도 했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잘 써먹었다고 한다.

반대 개념으로는 일본 군인 중 조선에 투항하여 조선에 협력한 자를 일컫는 항왜가 있다. 다만 이게 엄밀하게 통일된 용어가 아니라서 일부 문헌에서는 순종하는 일본인을 '순왜'라고 부르고 일본인에게 항복한 자를 '항왜'라고 불러서 뜻과 뉘앙스가 완전히 거꾸로 뒤바뀌기도 한다.

조선 중기 문신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 ~ 1636)이 임진왜란 무렵에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문헌인 임진일기(壬辰日記)에서는 "상주 읍내에 사는 여자들이 왜놈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관아에 드나들며 왜놈들이 주는 선물을 받고 우리나라의 사정을 몰래 알려준 데다 또 술과 안주를 갖추어 날마다 먹기를 권하였기에 (중략) 분노하여 모두 창고에 가두고 불에 태워 죽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 이로 보아서 문헌이나 사서에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일반 백성들 중에서도 순왜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순왜 목록

3. 관련 문서



[1] 항왜는 조선에 귀순한 왜군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표적으로 김충선이 있다. [2] 이 백성은 다음 순간 이방원의 활에 맞는다. 잠시 그의 상태를 살핀 킬방원은 안락사를 시전한다. [3] 비슷한 사례로 병자호란 당시에 극심한 차별을 견디다 못한 백정들이 청나라 군대에 투항하고 이들에 부역한 사례가 있다. 본래 청나라는 수렵채집민족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서 육류 가공의 전문가들인 백정들이 절대 차별받지 않고 귀하신 몸 대접을 받은지라 귀순한 백정들 대부분이 전후에도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고 청나라에 잔류하여 중국인이 되었다. [4] 징비록의 기록을 보면 일본군에게 화약을 만들어 공급해줬던 대풍손도 순왜라고 할 수 있다. 이 쪽은 화약을 잘 만들어서 류성룡이 협조만 해 준다면 살려 준다고 해서 국경인과는 달리 안 죽었다. [5] 물론 실질적 부담을 감안하면 격차가 이렇게나 많이 나지는 않았다. 조선은 그 적은 세금으로는 조정을 못 꾸려나가서 공납에 의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 눈에는 공식적 세율+공납( 일본도 공납과 비슷한 잡세가 존재했다. 단지 조선만큼 비중이 크지 않을 뿐)이 부담인 상황에서 공식 세율이 높아진 것으로 비칠 테니 당연히 기존보다 40%는 더 뜯긴다고 봤다고 해도 무방하다. [6] 순수 손씨 가문 사람이 아니다. 한국식으로 본인이 그렇게 소개했을 뿐 본명이 아니다. 손문식, 손문헌 등 이름과 신분을 여러 번 개명한 일본 대마도측 첩자로 추정된다.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에 능통하고 사명대사 일본 방문 때 일본 내 안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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