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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 |||
|
|||
효창원 전경 | |||
출생 |
1782년
10월 13일 (음력 정조 6년 9월 7일) |
||
한성부
창덕궁 연화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책봉 |
1784년
8월 17일 (음력 정조 8년 7월 2일) |
||
한성부
창덕궁 선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사망 |
1786년
6월 6일 (향년 3세) (음력 정조 10년 5월 11일) |
||
한성부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효창묘(孝昌墓) → 효창원(孝昌園)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784년
8월 17일 ~
1786년
6월 6일 (음력 정조 8년 7월 2일 ~ 정조 10년 5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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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양(㬀)[1] | ||
부모 |
부왕
정조(정조 선황제) 모후 효의왕후(효의선황후) 생모 의빈 성씨 |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장남 | ||
사당 | 문희묘(文禧廟) | ||
시호 |
온효세자(溫孝世子) → 문효세자(文孝世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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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 휘는 양(㬀). 시호는 문효. 조선왕조 역사를 보더라도 굉장히 어린 나이인 3세(22개월, 만 1세)[2]에 왕세자 책봉[3]되었는데 가장 단명했다.효장세자( 영조의 장남) - 의소세손( 사도세자의 장남) - 문효세자(정조의 장남)에 이르기까지 3대째 장남이 모두 자식 없이 단명했다.[4] 효명세자와 헌종 역시 20대에 요절하면서 정조의 대는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그러자 정조의 이복동생의 후손이 철종이 되고, 철종도 자식들이 모두 죽은 뒤 사망해서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후손이 고종황제가 된다.
정조는 1786년(정조 10년)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5]의 연이은 죽음에 상심했다. 이에 정조는 1789년(정조 13년) 장헌세자의 능을 이장했고, 이후 수빈 박씨에게서 순조가 태어난다.
2. 생애
2.1. 축복받은 탄생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새벽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태어났다. 이날 밤 갑자기 한 줄기 붉은 빛이 침실을 비추었는데 마치 해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효의왕후는 불임인데다가 정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원빈 홍씨는 입궁한지 1년만에 죽었으며, 화빈 윤씨의 상상임신 소식을 듣고 설치한 산실청[6]은 30개월이 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한편 궁인 성씨(宮人成氏)를 총애해 2차례 임신했지만 유산하고 3번째 임신 때 겨우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왕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들을 불러보고 하교하기를,
“궁인 성씨가 태중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대신과 원임대신을 불러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1735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1782년 9월 7일
“궁인 성씨가 태중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대신과 원임대신을 불러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1735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1782년 9월 7일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 궁녀가 아들을 낳으면 후궁으로 삼는다"는 관례에 따라, 궁인 성덕임을 소용(정3품)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또한 정조는 30살이 되어서야 처음 자식을 얻은데다,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에 무척 기뻐했다.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9월에 영조와 정조가 태어났는데 이 달에 아들이 태어나다니 대단한 길조'라고 평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는지 20개월째 철거되지 않은 화빈 윤씨의 산실청을 놔두고 윤씨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렸다.[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이 왕자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늦은 나이에 본 첫 자식에다 가장 사랑하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경사라고 기뻐하는 모습이 나온다.
막상 신하들의 생각은 달랐는데 이미 화빈 윤씨는 회임을 발표한 지 20개월이나 지난 뒤에도 출산 소식이 감감무소식이어서 윤씨의 출산에 대한 기대를 버렸고[8], 만일 윤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이미 장자가 있는 상태에서 복성군이나 영창대군 같은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에 소용 성씨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가지게 된다.[9]
2.2. 원자가 되다
원자는 왕세자와 달리 봉해지는 작위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이른다. 정궁의 몸에서 난 적장자라면 태어난 순간부터 원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고 논란의 여지도 없지만, 사람 일은 그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정조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친형 의소세손이 죽은 이후라서 신하들이 원손으로 불렀다가 영조가 "원손 정호를 정식으로 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부르냐"며 언짢아했다. 물론 의소세손은 이미 고인인지라 당일로 원손의 호를 정해주기는 했다.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건 후궁에게서 후계자를 볼 수밖에 없는 경우다. 숙종 때 희빈 장씨가 경종을 낳자 처음으로 ‘원자정호(元子定號)’라는 방법을 썼는데, 이는 신분세탁을 말한다. 이런 발상을 내놓은 것은 숙종으로, 경종에게 원자정호를 할 때 남인조차 "왕세자 책봉이나 할 것이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당황했다. 이에 숙종은 "니들은 왕실 일을 잘 모른다"고 대꾸했다.
이때 왕자를 원자로 삼았지만, 이때만 해도 원자의 개념이 제대로 정의된 게 아니었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폐위를 명했을 때 반대 논지가 ‘원자라는 것은 적자라는 것이고, 적자라는 것은 적모의 자식이라는 것이니, 원자는 중궁의 아들인데, 어찌 왕자의 어머니를 폐하시느냐.’는 논지를 펼쳤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아들로 인해 어머니가 귀해진다’며 왕비가 되었지만 결국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왕세자를 인현왕후의 정식 아들로 삼아 최종적으로 경종의 양모는 인현왕후다. 결국 이 과정에서 하나의 선례가 완성되었는데, 왕위계승 후계자가 서자라면 그 아이를 중전에게 인도하고 원자정호를 하는 것으로 신분세탁을 해 후계자가 적자가 되게 하는 방법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서자를 후계자로 삼으려할 때 다들 이 방법을 따랐다.
참고로 영조는 원자정호와 같은 공식적인 족보세탁을 안 하고 즉위한 서얼 임금이다. 영조~철종 시기에 작성된 왕실 선원팔고조도에 영조의 비(妣, 죽은 어미)를 인원왕후로 적었지만 영조가 인원왕후 밑으로 들어갔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고, 영조가 인원왕후 사후에 생모인 숙빈 최씨를 자신의 비(妣)라고 부르겠다고 주장했던 걸 보면 인원왕후 건은 ‘왕의 법적인 모친은 적실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잡은 뒤 편의적으로 끼워 넣은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시대에 작성된 2개의 선원팔고조도에 모자관계가 다르게 기록된 점으로도 알 수 있는데, 영조~철종 시대에 작성된 선원팔고조도에는 원종의 비(妣)는 생모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였는데 후대에 재작성된 계보에는 의인왕후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이후 첩에게서 태어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는 둘 다 영조의 정궁 정성왕후에게 인도되어 양모가 되었다. 효장세자는 영조가 왕자였던 시절에 태어나 경우가 다르지만 사도세자의 경우 태어난 당일 즉시 정성왕후에게 인도되어 원자정호를 받았다. 이는 순조도 마찬가지다. 반면 문효세자는 원자정호가 되는 데 3개월이 걸렸는데, 사도세자의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늦춰진 점에서 궁인 성씨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처음에는 없었음을 보여준다.
원자의 호칭을 정하였다(元子定號). 영의정 서명선 등이 아뢰기를,
“이처럼 경하하는 날에 신들이 종사의 대계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나라를 돌보시고 도우시어 원량이 탄생하여 국가의 근본이 크게 정해졌으므로 마음은 팔도의 사람들이 모두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탄생한 경사가 이미 3달이 넘었으니 미리 세우는 계책은 실로 하루가 시급합니다. 더구나 영종(영조)의 신주를 옮기지 않는 전장(典章)을 때마침 이때에 시행하게 되었으니, 일이 마치 때를 기다린 것과 같아 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터전을 공고히 하셨던 계획을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칭호를 정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자전(慈殿)의 뜻을 여쭈어 보아야겠다.”
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9월 이후로 천심의 지향이나 인심의 기대가 오직 호칭을 정하는 한 가지 일에 있습니다. 자궁(慈宮)에 계신 자전께서도 반드시 명을 더디 내린다고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여쭈어서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원자의 호칭을 정하는 것은 무진년(1688년 경종)과 을묘년(1735년 사도세자)에 하교한 것에 따라 여러 사람들의 소원을 좇아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관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탄생의 경사가 이미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과 맞았고 호칭을 정하는 일이 또 선대왕을 세실로 모시는 때에 있게 되었으니, 복록이 장구하고 사랑함이 도탑다는 것을 여기에서 예상할 수 있습니다.”
1782년 11월 27일
“이처럼 경하하는 날에 신들이 종사의 대계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나라를 돌보시고 도우시어 원량이 탄생하여 국가의 근본이 크게 정해졌으므로 마음은 팔도의 사람들이 모두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탄생한 경사가 이미 3달이 넘었으니 미리 세우는 계책은 실로 하루가 시급합니다. 더구나 영종(영조)의 신주를 옮기지 않는 전장(典章)을 때마침 이때에 시행하게 되었으니, 일이 마치 때를 기다린 것과 같아 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터전을 공고히 하셨던 계획을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칭호를 정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자전(慈殿)의 뜻을 여쭈어 보아야겠다.”
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9월 이후로 천심의 지향이나 인심의 기대가 오직 호칭을 정하는 한 가지 일에 있습니다. 자궁(慈宮)에 계신 자전께서도 반드시 명을 더디 내린다고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여쭈어서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원자의 호칭을 정하는 것은 무진년(1688년 경종)과 을묘년(1735년 사도세자)에 하교한 것에 따라 여러 사람들의 소원을 좇아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관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탄생의 경사가 이미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과 맞았고 호칭을 정하는 일이 또 선대왕을 세실로 모시는 때에 있게 되었으니, 복록이 장구하고 사랑함이 도탑다는 것을 여기에서 예상할 수 있습니다.”
1782년 11월 27일
결국 3개월 동안 줄다리기를 하다가 정조도 더 이상 화빈 윤씨에게 가망이 없다 판단해 포기하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큰애를 후계자로 정하게 되었다.
시임대신과 원임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영의정 서명선이 아뢰기를,
“원자의 호칭을 정한 뒤에 소용의 관작을 올려주는 것은 당연히 거행해야 할 일로서, 사체가 특별한 만큼 즉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원자의 호칭을 정한 뒤에 소용의 관작을 올려주는 것은 당연히 거행해야 할 일로서, 사체가 특별한 만큼 즉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책봉하기를 기다렸다가 하더라도 늦지 않으니 앞으로 상량해서 하교하겠다.” 하였다.
1782년 12월 9일
1782년 12월 9일
이때 영의정 서명선의 경우에는 후계자의 어머니 지위가 낮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소용 성씨의 지위를 더 높이라고 했지만, 책봉을 언급하면서 미룬다. 아마 소용 성씨의 정식 책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상태에서 올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는 뜻으로 보인다. 원래 책봉식을 좀 늦출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서명선이 빨리 하라고 보채서 처음 예정보다 빨리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일반적으로 공식 책봉식은 1년 텀으로 잡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용 성씨에게 의빈(宜嬪)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1783년 2월 19일
1783년 2월 19일
이후 소용 성씨는 원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정식으로 정3품 소용으로 책봉된지 2개월 만에 정1품까지 한번에 뛰어오른다. 하지만 승은후궁이었기 때문에 화빈 윤씨와 달리 일반 후궁의 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2.3. 왕세자가 되다
보양관 좌의정 이복원과 우의정 김익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데, 우리 전하께서는 경사스러운 복록(福祿)이 끝이 없어서 큰 운수가 바야흐로 도래하시니, 이에 길한 달과 아름다운 날에 원자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근본은 비록 정해졌지만, 예의(禮儀)를 아직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두 분 자성(慈聖)을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뜻을 받들지만, 자전(慈殿)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성대한 예식을 빨리 거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원자의 지혜와 생각이 점차 깨우쳐지고 호기심이 장차 싹트게 될 터인데, 빈사(賓師)의 직임과 강독(講讀)의 관직을 가지런하게 숫자대로 갖추고 아침저녁으로 좌우에서 모시게 한다면, 어찌 미천한 신하 한두 사람이 1달에 1번 만나서 가르치는 것보다 좋지 못하여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무더위가 물러가고 천기가 한층 새로워지니, 때가 바로 만물이 결실을 맺는 초기에 속할 뿐만 아니라, 또 생신을 경하(慶賀)드릴 성절(聖節, 임금의 생일)이 다가옵니다. 만물이 형통하고 시절이 아름다운 기회에 경사를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므로, 세자의 칭호를 정하고 책봉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시기와 의미를 가지고 논할 때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문제(漢文帝) 원년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太子)를 미리 세울 것을 청하자, 문제는 그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주자는 이것을 《강목(綱目)》에 기록하여 후세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등극하신 지 이미 8년이 되었습니다. 문제의 고사에 비교할 때 왕세자를 미리 세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은 명령을 내려 빨리 책봉 예식을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영의정 정존겸, 영부사 김상철, 판부사 서명선, 이휘지, 홍낙성이 잇달아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와 상소를 올려 책봉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것은 지극히 중대한 나라의 예법이다. 경등이 들어와서 직접 아뢰도록 해라.”
하였다. 이리하여 시임(時任), 원임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예조 당상관, 경재(卿宰, 재상), 여러 승지들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서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같은 목소리로 아뢰기를,
“오늘 신 등이 서로 이끌고 등연(登筵)한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똑같은 심정에서 나온 소청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허락하기를 꺼리는 것은 진실로 큰 복을 아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자의 의젓한 용모가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으니, 금일의 책봉예식도 또한 늦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실로 종묘사직의 큰 계책이다. 내가 어찌 허락하기를 꺼리겠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원자를 세자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784년 7월 2일
“생각하건데, 우리 전하께서는 경사스러운 복록(福祿)이 끝이 없어서 큰 운수가 바야흐로 도래하시니, 이에 길한 달과 아름다운 날에 원자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근본은 비록 정해졌지만, 예의(禮儀)를 아직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두 분 자성(慈聖)을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뜻을 받들지만, 자전(慈殿)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성대한 예식을 빨리 거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원자의 지혜와 생각이 점차 깨우쳐지고 호기심이 장차 싹트게 될 터인데, 빈사(賓師)의 직임과 강독(講讀)의 관직을 가지런하게 숫자대로 갖추고 아침저녁으로 좌우에서 모시게 한다면, 어찌 미천한 신하 한두 사람이 1달에 1번 만나서 가르치는 것보다 좋지 못하여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무더위가 물러가고 천기가 한층 새로워지니, 때가 바로 만물이 결실을 맺는 초기에 속할 뿐만 아니라, 또 생신을 경하(慶賀)드릴 성절(聖節, 임금의 생일)이 다가옵니다. 만물이 형통하고 시절이 아름다운 기회에 경사를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므로, 세자의 칭호를 정하고 책봉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시기와 의미를 가지고 논할 때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문제(漢文帝) 원년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太子)를 미리 세울 것을 청하자, 문제는 그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주자는 이것을 《강목(綱目)》에 기록하여 후세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등극하신 지 이미 8년이 되었습니다. 문제의 고사에 비교할 때 왕세자를 미리 세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은 명령을 내려 빨리 책봉 예식을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영의정 정존겸, 영부사 김상철, 판부사 서명선, 이휘지, 홍낙성이 잇달아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와 상소를 올려 책봉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것은 지극히 중대한 나라의 예법이다. 경등이 들어와서 직접 아뢰도록 해라.”
하였다. 이리하여 시임(時任), 원임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예조 당상관, 경재(卿宰, 재상), 여러 승지들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서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같은 목소리로 아뢰기를,
“오늘 신 등이 서로 이끌고 등연(登筵)한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똑같은 심정에서 나온 소청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허락하기를 꺼리는 것은 진실로 큰 복을 아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자의 의젓한 용모가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으니, 금일의 책봉예식도 또한 늦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실로 종묘사직의 큰 계책이다. 내가 어찌 허락하기를 꺼리겠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원자를 세자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784년 7월 2일
결국 상상임신임을 깨달아 화빈 윤씨의 산실청도 철거하고(이재난고) 의빈 성씨는 윤3월 20일 딸도 낳아 1남 1녀의 가정을 이루게 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조의 나이가 이미 30대라 신하들이 많이 초조했는지, 아직 3살(만 1세)임에도 "왕세자 책봉이 늦어지고 있다. 빨리 왕세자로 책봉하라."고 모두가 정조를 설득했고, 본래는 좀 더 늦출 생각이었던 정조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신하들의 뜻이 확고한 데다 스스로도 나이가 있음을 알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빈 박씨가 낳아 당일에 원자정호를 한 순조도 10살에 왕세자가 된 데다 어쨌든 받아들인 건 정조니, 일찍 할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왕세자의 이름(名)을 정하였다. 고례(古例)에 자(字)를 정하는 것은 관례(冠禮) 뒤에 행하였으므로, 승지 이시수가 전례를 들어다가 의견을 개신하고 품신(稟申, 상소)하니 임금이 그 의견을 옳게 여겼다.
1784년 7월 6일
1784년 7월 6일
이후 4일이 지나 문효세자의 이름, 정확히는 휘를 정하였다. 이를 보아 책봉되기도 전에 죽은 갓난아기 왕자녀들은 이름 짓기 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효세자의 책봉식은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치렀으나 이 자리에는 문효세자 본인이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책봉례와 수책례를 별도로 치르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문효세자책례계병>에도 두 예식의 모습이 각각 묘사되었다. 이렇게 별도로 치른 이유는 왕세자가 당시 22개월로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책봉 당일인 1784년 8월 1일 인정전에서 임금이 대신들을 모아두고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는 예식을 치렀다. 이어 임금의 사자들이 책봉 교명과 책인을 가지고 동궁 중희당으로 이동한다. 왕세자는 책봉례 동안 중희당에서 대기하다가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데, 이를 수책례라고 한다. 하지만 문효세자는 수책례에서 교명과 책인을 받는 역할은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이 대신 맡았다고 한다. 아기 왕세자는 이후 사배례를 올렸다. 문효세자 책봉례 전날 예행연습을 했는데 정조는 중희당에서 이 예행연습을 참관했다. 덧붙이자면 의궤는 책자고 책례 계병은 병풍이다.
2.4. 왕세자로서의 삶
1784년(정조 8년), 동복 여동생인 옹주가 태어나나 이 옹주는 2달이 안 된 음력 5월 12일에 졸하였다.1784년(정조 8년), 22개월(세는나이 3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 정조의 차남 순조가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것에 비해 매우 빠른 일이었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운 세자궁인 중희당을 지을 정도로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문효세자 탄생을 기념해 왕실 어른에게 존호를 올린 의례,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책례, 원자와 보양관의 상견례, 정조가 왕세자궁인 중희당에 친림한 도목 정사가 궁중 행사도로 그려져 남아있는데, 현존하는 정조 시대 행사도는 문효세자와 직간접적인 관계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조가 31세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10]인데다, 15년을 기다려 취한 사랑하는 여인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효세자는 왕이 될줄 알았으나.....
2.5. 사망
문효세자가 훙서하기 전달인 4월부터 전국적으로 유행병이 돌았다고 한다. 문효세자의 병이 깊어지자 종묘 사직에 2번이나 기도제를 올렸다. #1786년(정조 10년) 5월 11일[11] 5세(만 3세)에 홍역으로 훙서하였다. 문효세자가 훙서하고 종묘, 영녕전, 경모궁에 훙서한 사실을 고하는 글이 있다.
묘의 이름은 효창묘로 당시 고양군 율목동[12]에 있었는데 송림이 울창했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인 9월 14일, 생모 의빈 성씨가 죽자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 옆에 묻어주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 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서울지명사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아버지 정조가 정조선황제로 추존되면서 문효세자 역시 문효태자로 추존되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우선 왕이나 황제 추존에 따라 그 자손의 호칭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며, 이는 의소세손의 호칭을 세자로 추봉하는 과정과 그것이 특별한 은전[殊典]을 이유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의소세손의 호칭을 의소세자로 바꾼 기록은 분명하지만, 의소세자나 문효세자의 호칭을 태자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없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제사 때 표기를 '정조 선황제 제1자 문효세자'라고 한다. #
이것에 대해 ' 고종이 정조 - 순조 - 문조(효명세자)의 계통을 잇다보니 방계 쪽인 문효세자를 태자로 추존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란 의견이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근거를 마냥 사실로 인정하기엔 약간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문효세자의 후손이 있으면 모를까, 1명도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될 가능성이 '0'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기 보다는 단순히 추존 왕이나 황제 추숭에 따른 자손들의 별도 추숭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을 뿐일 가능성이 높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효창원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었다. 때문에 모자가 100보 가까이 나란히 묻히게 한 정조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자 옆에 묻혀있고, 의빈 성씨의 무덤은 2km 거리의 후궁묘의 빈·귀인 묘역에 있게 되었다.
문효세자의 사당은 문희묘인데, 원래 경모궁( 사도세자의 사당) 근처에 지으려 했으나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13] 생모 의빈 성씨가 졸하자 종로구 안국동에 의빈궁(의빈 성씨의 사당)과 함께 지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순종 황제 때인 1908년(순종 2년), 재정을 아끼기 위해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신위를 땅에 묻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문효세자가 무사히 보위에 올랐다면 수렴청정을 피하고 곧바로 친정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인 19세(만 18세)였다면 이복 동생 순조가 너무 어린 나이(11세, 만 10세)에 보위에 올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 뒤에는 왕권이 약화되는 반남 박씨(순조의 외가), 안동 김씨(순조의 처가) 등의 세도정치가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14]
문효세자는 어려서 죽었지만, 효창공원에 그 흔적을 남겼고, 독립투사들의 묫자리를 잡아 준 것과 마찬가지이니 나름 역사에서 역할은 했다.
3. 여담
- 정조가 손수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문효세자 탄생 관련 일화가 전한다.
-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처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울면서 내전( 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정조)는 이를 느끼고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 15년 동안 후궁( 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널리 뽑았고, 다시 빈( 의빈 성씨)에게 명하였으나 또 굳이 사양했다. 그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명을 따랐다. 저녁의 달에 임신하여 임인년 9월에 왕세자(문효세자)를 낳았다. 이에 소용으로 봉해지고, 오래지 않아 아들의 귀함에 의빈으로 품계가 올랐다.
- 정조가 손수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문효 세자는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의 양자로 입적했는데 양육은 생모 의빈 성씨가 맡았다고 한다. 몽오 김종수의 몽오집 제7권 <문효세자지문>에는 문효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혜경궁 홍씨가 길렀다고 하며. 이재 황윤석의 이재난고에는 효의왕후가 양육하였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왕실 사람들이 손이 귀한 아들이라고 다들 아낀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공식적으로 원자의 보호와 양육을 하는 것은 보양청이지만, 사실상의 양육은 왕비와 유모, 보모 상궁이 한다고 한다.
-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관련 기사
-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비(御製碑)를 내렸다.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는 정조 자신이 쓴 것으로 사랑하는 문효세자를 잃고 슬픔에 괴로워하는 정조 자신의 심경을 서술했다. 이러한 정조의 애통한 심정은 비문 끝에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라고 한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세자 양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4달이 되어 빈렴하였으며, 또 발인하고 장사를 지냈다. 나는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도중에는 믿게 되었으니, 끝내 또 아득하여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 정을 둘 곳이 없어졌음을 의심하였고, 처지를 바꿀 수 없음을 믿게 되었으며, 이치를 알 수 없음에 아득하여 또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 만약 세자의 생이 달리 끝났다면 과연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내 나이 30이 넘어 세자가 태어나서 3달 만에 원자로 정호하였고 3년이 지난 갑진년에는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2년 후 병오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태어난 임인년으로부터 겨우 5년 만이었다. 시호는 문효이며, 이해 윤월에 고양 율목동좌 임원에 장사지냈다.
담당 관리가 돌을 준비하여 내게 고하였으나 지극한 슬픔에는 꾸밈이 없는 법인데 내 어찌 차마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내린 자질과 타고난 아름다움은 실로 바깥의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고 오직 나만이 아는 것이니, 또 어찌 차마 한 마디도 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어나던 날 저녁에 붉은 빛 한 줄기가 침실을 비추었으니 마치 해가 떠오르는 듯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백일도 되기 전에 능히 병풍 사이의 글자를 분별하였으며, 장난감 중에서는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오직 서책만을 매우 사랑하였으니, 그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천자문을 주고 빈료를 두고서도 개강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 일찍 철드는 것을 꺼려서였다.
일찍이 밤중에 방에 불이 났었는데 좌우에서는 자느라 알지 못하였으나 세자가 부르는 것을 듣고서 비로소 불이 난 것을 깨닫고 구할 수 있었으니, 이때가 태어난 지 한 해가 되기 전이었다.
미리 세자로 책봉하기로 한 것을 궁중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재촉하기를 장차 받을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내린 운명이었으리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소리 내어 나를 재차 불렀는데 내가 가서 보자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으니, 어찌 내게 작별을 고하려던 것이겠는가? 아마도 내가 구해주어 살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의 탄생이 늦는 것을 걱정하다가 다행히 그가 태어나는 경사를 맞았는데, 그가 탄생한 경사를 믿고 부모로서 자식이 병들까 걱정하는 마음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리저리 헤맨 끝에 구할 수 있는 약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영영 이별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때 아비가 된 것이 부끄러웠다.
아! 시호를 내린 날 새벽에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데 홀연히 규삼에 공정책 차림으로 나타나 무릎 앞에서 작별을 고하기에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곧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니, 한바탕 꿈이었다.
살아서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죽어서는 꿈에 나타나 하직하였으니, 나를 사랑하고 사모하며, 나를 의지하고 그리워함이 그토록 지극하였다. 천성에서 우러난 착한 성품이 아니라면 어찌 어린 나이로 죽고 사는 즈음에 스스로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문효라는 시호조차 극히 일부분만을 드러내어 밝힐 뿐이다.
아! 나는 바야흐로 처한 상황을 갑자기 믿을 수가 없어서 헛된 꿈일 뿐 참은 아니리라 의심하다가 다시금 꿈속의 꿈임을 깨달았으니, 달관한 사람더러 분별하게 하였더라도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참인가?’ 하였으리라. 이른바 참이라는 것도 반드시 참은 아니고, 꿈이라는 것도 반드시 꿈은 아닐 것이다. 원통하고 슬프도다.
비명에 이르노니, 어렵게 얻었는데 빠르게 앗아감은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나는 물을 수도 없으니, 그의 병을 일찍부터 걱정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도다. 네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내가 보았으며, 네가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을 내가 들었다. 지난밤에 내게 어디를 간다며 고했던 것을 생각하니 캄캄하구나. 차마 바로 떠날 수 없었던 것인가?
아! 국문으로부터 10리가 되지 않는 곳, 하늘이 내린 길지로써 효자를 길이 위로하노라. 내가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병오년의 초가을, 윤 모월 모일에 세우다.
정조,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명》 http://royal.aks.ac.kr/WH/Image?book_id=JSK_WH_25332&imgid=G002%2BJSK%2BKSM-WH.1786.1117-20150515.25332-1
내 나이 30이 넘어 세자가 태어나서 3달 만에 원자로 정호하였고 3년이 지난 갑진년에는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2년 후 병오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태어난 임인년으로부터 겨우 5년 만이었다. 시호는 문효이며, 이해 윤월에 고양 율목동좌 임원에 장사지냈다.
담당 관리가 돌을 준비하여 내게 고하였으나 지극한 슬픔에는 꾸밈이 없는 법인데 내 어찌 차마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내린 자질과 타고난 아름다움은 실로 바깥의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고 오직 나만이 아는 것이니, 또 어찌 차마 한 마디도 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어나던 날 저녁에 붉은 빛 한 줄기가 침실을 비추었으니 마치 해가 떠오르는 듯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백일도 되기 전에 능히 병풍 사이의 글자를 분별하였으며, 장난감 중에서는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오직 서책만을 매우 사랑하였으니, 그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천자문을 주고 빈료를 두고서도 개강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 일찍 철드는 것을 꺼려서였다.
일찍이 밤중에 방에 불이 났었는데 좌우에서는 자느라 알지 못하였으나 세자가 부르는 것을 듣고서 비로소 불이 난 것을 깨닫고 구할 수 있었으니, 이때가 태어난 지 한 해가 되기 전이었다.
미리 세자로 책봉하기로 한 것을 궁중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재촉하기를 장차 받을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내린 운명이었으리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소리 내어 나를 재차 불렀는데 내가 가서 보자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으니, 어찌 내게 작별을 고하려던 것이겠는가? 아마도 내가 구해주어 살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의 탄생이 늦는 것을 걱정하다가 다행히 그가 태어나는 경사를 맞았는데, 그가 탄생한 경사를 믿고 부모로서 자식이 병들까 걱정하는 마음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리저리 헤맨 끝에 구할 수 있는 약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영영 이별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때 아비가 된 것이 부끄러웠다.
아! 시호를 내린 날 새벽에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데 홀연히 규삼에 공정책 차림으로 나타나 무릎 앞에서 작별을 고하기에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곧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니, 한바탕 꿈이었다.
살아서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죽어서는 꿈에 나타나 하직하였으니, 나를 사랑하고 사모하며, 나를 의지하고 그리워함이 그토록 지극하였다. 천성에서 우러난 착한 성품이 아니라면 어찌 어린 나이로 죽고 사는 즈음에 스스로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문효라는 시호조차 극히 일부분만을 드러내어 밝힐 뿐이다.
아! 나는 바야흐로 처한 상황을 갑자기 믿을 수가 없어서 헛된 꿈일 뿐 참은 아니리라 의심하다가 다시금 꿈속의 꿈임을 깨달았으니, 달관한 사람더러 분별하게 하였더라도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참인가?’ 하였으리라. 이른바 참이라는 것도 반드시 참은 아니고, 꿈이라는 것도 반드시 꿈은 아닐 것이다. 원통하고 슬프도다.
비명에 이르노니, 어렵게 얻었는데 빠르게 앗아감은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나는 물을 수도 없으니, 그의 병을 일찍부터 걱정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도다. 네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내가 보았으며, 네가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을 내가 들었다. 지난밤에 내게 어디를 간다며 고했던 것을 생각하니 캄캄하구나. 차마 바로 떠날 수 없었던 것인가?
아! 국문으로부터 10리가 되지 않는 곳, 하늘이 내린 길지로써 효자를 길이 위로하노라. 내가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병오년의 초가을, 윤 모월 모일에 세우다.
정조,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명》 http://royal.aks.ac.kr/WH/Image?book_id=JSK_WH_25332&imgid=G002%2BJSK%2BKSM-WH.1786.1117-20150515.25332-1
- 《조선왕조실록》의 정조대왕행장, "5월에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어 왕은 슬픈 생각에 겨를이 없는 처지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날마다 유사(有司)들을 단속하여 민간의 유행병 치료에 전력하게 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생명이 살아났다."
- 정조는 문효세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문효세자가 죽은 해에 그 어머니였던 의빈 성씨마저 죽자 "죽은 문효세자가 이제 다시 태어나나 싶더니..."[15] 라는 내용의 글을 썼고 《어제의빈치제제문》에서는 의빈이 죽기 전 뱃속의 아이가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형제(문효세자와 뱃속의 아이)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는 등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 연암 박지원이 진향문을 지었다. 정조 대의 문신 이성원의 개인 문집 조은집에 <문효세자만장>이 수록되어 있다. 조은집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 문효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의 앞길에는 본격적인 암운이 드리워지게 된다. 안그래도 아들 귀한 효종 가계에서, 서른 넘어 얻은 문효세자의 사후 정조가 다시 후사를 보는데는 4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과로로 인한 빠른 노화에 시달리고 있던 정조는 순조의 나이 11살 때 사망하면서 조선은 19세기 격동의 시대에 채 자질을 갖추진 못한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되었다.[16] 물론 문효세자가 글도 깨치기 전인 워낙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딱히 자질이고 뭐고 평가할 건덕지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정조의 통치를 눈으로 보고 겪으며 18살의 성인으로 성장해 즉위했을테니 적어도 신료 장악에 손을 놔버린 순조보다는 나았을 가능성이 크다.
4. 가계
4.1. 친가 ( 전주 이씨)
- 고조부: 숙종 이순
- 고조모: 인경왕후 김씨
- 고조모: 인현왕후 민씨
- 고조모: 인원왕후 김씨
- 생고조모: 화경숙빈 최씨
- 증조부: 영조 이금
- 증조모: 정성왕후 서씨
- 증조모: 정순왕후 김씨
- 생증조모: 소유영빈 이씨
- 조부: 진종소황제 이행
- 조모: 효순소황후 조씨
- 생조부: 장조의황제 이선
- 생조모: 헌경의황후 홍씨
4.2. 외가 ( 청풍 김씨)
- 외조부: 청풍부원군 김시묵(淸原府院君 金時默, 1722 ~ 1772)
- 외전조모: 증 의춘부부인 의령 남씨(贈 宜春府夫人 宜寧 南氏, 1721 ~ 1746)
- 외숙: 김기대(金基大, 1738 ~ 1777)
- 외조모: 당성부부인 남양 홍씨(唐城府夫人 南陽 洪氏, ? ~ 1791)
- 모친: 효의선황후 김씨(1753 ~ 1821)
- 외숙: 김기종(金基種)
4.3. 사친 ( 창녕 성씨)
- 생외조부: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17]
- 생전외조모: 장흥 마씨(長興 馬氏, 1715 ~ ?)직장 마시행(直長 馬時行)의 딸
- 생외조모: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1756)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
- 생계외조모: 단양 지씨(丹陽 池氏)
- 생외숙: 성담(成湛, 1741 ~ 1783) - 무과 합격
- 생외숙: 절충장군 성협(折衝將軍 成浹, 1742 ~ 1810)
- 생외숙: 부사용 성완(副司勇 成浣, 1743 ~ 1806) - 성식(成湜)에서 개명
- 생외숙: 성숙(成淑)
- 생이모: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생이모: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생모: 의빈 성씨(성덕임, 1753 ~ 1786)
-
생외숙: 성흡(成洽) - 무과 합격
5. 대중매체
5.1. 드라마
5.2. 예능
- 2017년 MBC 예능 《신비한TV 서프라이즈》 746회
5.3. 소설
- 2005년 로맨스 소설 《 비단속옷》
- 정조와 세자익위사 우익위 성연(의빈 성씨)의 사랑을 그렸으며 문효세자는 독살당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 2007년 ~ 2008년 드라마 소설 《이산 정조대왕》
-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 현대의 대학원생 오세아가 정조 시대에 한세로 태어나서 문효세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 2017년 로맨스 소설 《 옷소매 붉은 끝동》
[1]
원음은 '순'이나, 1784년에 작성된 문효세자의
작명 단자에는 음이 '양(陽)'이라고 적혀있다.
[2]
3세에 왕세자 책봉된
경종 / 문효세자가 공동 2위.
사도세자 /
순종황제가 공동 1위로 2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3]
참고로 왕세자 책봉된 나이 :
이방석 11세,
정종 42세,
태종 34세,
양녕대군 11세,
세종 22세,
문종 8세,
단종 10세,
덕종 18세,
예종 8세,
연산군 8세,
폐세자 이황 6세,
인종 6세,
순회세자 7세,
광해군 18세, 폐세자
이지 11세,
소현세자 14세,
효종 27세,
현종 11세,
숙종 7세,
경종 3세,
영조 29세,
효장세자 7세,
사도세자 2세,
정조 8세, 문효세자 3세,
순조 11세,
효명세자 4세,
순종 2세에 왕세자 책봉되었다. 다만
태종,
효종,
영조는 왕세자가 아니라 왕세제이다.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이들은 세자를 거치지 않은 경우이다.
[4]
그것도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특히 의소는 정조가 태어난 해에 죽었다.
[5]
게다가 임신 중이었고 만삭이었다.
[6]
조선 궁내에 비(妃), 빈(嬪)이 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관련한 일을 맡아보던 임시 관아.
[7]
아마 미천한 궁녀 출신인
의빈 성씨와 간택후궁이던
화빈 윤씨의 신분차이 때문에 그런 듯 하다. 만약 의빈 소생의 왕자를 후계자로 정한 후 화빈이 아들을 낳아버리면 양반가 규수를 어머니로 둔 왕자를 제치고 궁녀를 어머니로 둔 왕자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니,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듯.
[8]
아이가 잉태되고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이 대략 9개월 정도인데 산실청을 설치한 지 7-8개월 정도 지났으면 몰라도 20개월이라는 점에서
답이 없다고 느꼈던 듯.
[9]
모친의 신분이나 적서로 왕위계승을 정했던 조선 초기와는 달리 조선 중-후기만 가도 왕실의 손이 줄어들기 때문에 장자계승이 원칙처럼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이쪽은 적자와 서자라는 차이도 없는 같은 서자인 상황이라 장자인 의빈의 아들에게 힘을 더 실었던 듯 하다.
[10]
단순히 2018년 현재 수명과 대입해보자면 (31 ÷ 조선 왕 평균 수명 × 남자 평균 수명) 지금의 50대 초반에 첫 아이를 안아본 꼴이다.
[11]
먼저 죽은 여동생(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녀)의 2주기가 다음 날인 5월 12일이다.
[12]
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동
[13]
문효세자는 5월에 졸했고, 의빈은 9월에 졸했지만 그 사이에 윤7월이 있어 5개월 뒤이다.
[14]
아니, 적어도 문효세자가 아니라 의빈이 낳지 못한 아이가 남자였다면 그래도 15세로 수렴청정은 피한다. 일반적으로 수렴청정은 15세에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15]
의빈이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정조는 이것이 '죽은 아들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 내 아들로 돌아오는구나'라는 식의 생각을 했다는것.
[16]
중간에 그나마 기대되던
효명세자가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정사에 손을 놔버린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에 나섰다가 과로로 의심되는 급사를 맞이했다.
[17]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