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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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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럽3. 아시아4. 아프리카
4.1. 북아프리카4.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5.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6. 2 대륙 이상

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를 서술한 문서.

2.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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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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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프리카

4.1. 북아프리카

  • 관체족: 오늘날의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 살던 토착민들로, 베르베르인과 동계의 민족이라는 것을 빼면, 이들의 전반적인 문화나 생활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17세기 이후로 관체족은 모두 절멸했지만, 현대 카나리아 제도 주민들의 혈통에 관체족의 피가 섞여있다. 특이하게도 이슬람교를 믿지 않았던 몇 안되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 중의 하나이다.[1]
    • 귀마르의 피라미드: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들인 관체족이 세운 피라미드형의 건축물로, 원래 고고학계에서는 관체인들이 해풍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바람막이 벽이나,[2] 농사짓다가 골라져 나온 돌들을 버린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탐험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토르 헤이에르달 귀마르의 피라미드들의 서쪽 계단은 동짓날 아침의 일출 방향을 따라 조성되었음을 밝혀내어, 이 피라미드가 당대의 천문학 지식을 적용하여 인위적으로 지었음을 밝혀내면서, 관체족들이 이를 어떻게 지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관체족이 체계적인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중앙집권제 국가를 세운 것도 아니라서[3] 피라미드의 건축 배경이나 건설 방식은 상당한 의문을 낳고 있다.
  • 이집트 제18왕조와 관련된 미스터리
    • 네페르티티의 최후: 네페르티티 이집트 제18왕조 파라오 아케나톤의 왕비인데, 남편의 사후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의문이다. 한때는 아케나톤이 사망하기 직전에 궁을 나왔다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그녀가 투탕카멘 왕의 장모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있어서 이 설은 부정되고 있고, 현재는 스스로 파라오로 즉위하고 이름을 바꿨다는 설이 유력하다. 문제는 그녀의 바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고[4], 그녀의 미라도 발견되지 않았다[5]. 일단 주류 학계는 그녀가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 투탕카멘의 사인: 이집트 제18왕조의 왕인 투탕카멘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가 사망한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무수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는 그의 미라의 두개골에서 갈라진 흔적이 발견되어서 그가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후속 연구에서 투탕카멘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두개골의 갈라진 부분이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단순한 오해로 결론났다[6]. 그래서 오늘날에는 미라의 모습을 토대로 그의 생전 모습을 복원한 결과, 오랜 근친혼으로 인한 선천적인 장애가 있음이 밝혀져서, 현재 주류 학계에서는 이것이 그의 사인과 관련되어있다고 보고 있다. 진짜 미스터리인 부분은 투탕카멘의 죽음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게 그의 장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가 불편한 몸으로도 꽤 능동적으로 통치를 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7], 알려지지 않은 어떤 대외 활동 중에 당한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는 설[8]과, 선술한 장애때문에 생긴 합병증으로 급사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확실한 해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전갈왕 2세: 영화 스콜피온 킹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고왕국 시대 이전의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현존하는 기록에서도 그저 전갈 기호로만 묘사되고 있다. 일단 이집트가 통일된 초창기에 전갈왕 2세 - 나르메르 - 메네스 - 호르아하 순으로 통일 이집트를 통치한 군주들이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그러나, 나머지도 같은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 하와라의 미궁: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파라오 아메넴헤트 3세가 자신의 장제전으로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집트의 거대한 미궁. 헤로도투스뿐만 아니라 스트라보 등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과연 실존하는 유적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 중이다. 미궁이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집트 하와라 지역을 유력한 장소로 본다.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로 유적이 있을 만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까지 찾아냈지만 이집트 정부가 조사를 불허하여 지금까지도 고고학적 조사가 없었던 탓에 실존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 티니스: 이집트 초기왕조의 수도로서 도시의 존재 자체는 고대 기록에서 검증이 되지만 아직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전갈왕 2세를 비롯하여 수수께기 투성이인 이집트 초기 왕조의 의문을 풀 열쇠로 추정되고 있기에 수많은 학자들이 티니스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4.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말라가시인 마다가스카르 이주: 언어학, 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말라가시인들이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에 널리 분포된 말레이-폴리네시아인들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는데, 이들이 어떻게 바닷길이 개척되기 훨씬 이전에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의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마다가스카르 섬에 상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밝혀지지 않았다. 말레이인은 전근대 시기부터 이미 캐터머런이라는 전통 배[9]를 이용해 태평양을 항해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이미 11세기에 남아메리카에 도달한 적도 있으므로, 마다가스카르도 이런 배를 타고 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배로도 당시에 동남아시아에서 동아프리카 방향으로 인도양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0]. 무역풍이라고도 불리는 인도양의 편서풍 때문에 서기 7, 8세기 경에서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인도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가 만들어졌는데, 기원전의 말레이인들이 이게 가능했을지가 의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말레이인의 진출도 태평양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 중세 이전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역사: 동시대의 이집트 이집트 상형문자와 여기서 파생된 신관 문자 및 민중 문자를 개발하여 대대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아서 그 역사를 소상히 알 수 있는 데 반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역사는 자체 문자가 없어서 알려진 바가 많이 없다. 심지어는 13세기까지 존재한 와가두 제국[11]의 역사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바로 밑에 위치해 있던 누비아 문명에 대해서도 모르는 부분이 많으며, 짐바브웨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이기도 한 그레이트 짐바브웨 또한 토착민 문명이 세웠다는 것 말고는 관련 정보가 하나도 알려진 게 없다.[12] 여기에 더해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또 있는데, 바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민족들의 대부분의 조상격인 반투족들이 어떻게 발전한 농업 기술을 보유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이 중앙아프리카, 서아프리카에서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까지 도달했을 때 이들의 숫자가 기본이 수천 명은 된 것으로 보이고, 목축만으로 부양하기 힘든 이 정도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수준 높은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고 전해지나, 이런 기술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사막화되기 이전의 사하라 지역도 농사가 불가능한 사바나 지역이었는데 발달된 농업 기술을 얻게 된 경위로, 학자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농업 기술을 얻었다는 설과 동쪽의 이집트인들이랑 접촉해서 농업 기술을 배워갔다는 설이 있다.[13] 역사학자들에게 아프리카는 아직도 미지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다.

5.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

  • 20세기 초중반 미국 블루스 음악가들의 정체와 생애: 20세기 초엽은 블루스 음악과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생겨난 재즈 음악이 태동하던 시기이기에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중요한 시기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활동했던 블루스 음악가들의 대부분이 그 정체나 전반적인 생애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미국 음악사 연구에서 크나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로큰롤 록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블루스 음악가인 로버트 존슨 또한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가설이 있으나, 로버트 존슨은 그래도 사진 3장과 생애가 공개되는 등 가장 잘 알려진 음악가이며, 키드 베일리처럼 음악가와 관련된 사료가 음반 밖에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키드 베일리는 아예 음반 한장 빼고는 불명확한 목격담이 전부이며,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아서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유튜브에선 대체로 윌리 브라운이 그의 정체일 것으로 추측한다. 키드 베일리처럼 신원이 불분명한 음악가도 적잖게 있다. 거스 깁슨처럼 대강 정체가 알려지긴 했으나 생몰연도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도 많아서, 각각의 음악가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었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도 파악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블루스 음악가들이 미국 사회에서 극심하게 차별받던 흑인이라서 관련 기록이 많이 안 남았다는 추정이 있으나, 팔머 맥아비처럼 인종 자체에 대해 논란이 일어난 경우도 있어서[14], 꼭 그런 이유로 정체를 알 수 있는 인적 자료가 소실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 로어노크 식민지: 1588년부터 1589년까지 북아메리카 지역에 세운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CROATOAN'이라는 의미불명의 글자만 남긴 채로 주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멸망했다. 현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기근으로 인해 식민지를 버리고 인근의 다른 원주민 부족에 합류하여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지만, 어느 부족에 동화된 것인지가 불명이다.
  •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 1951년에 미국인 부부인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 미국의 기밀정보를 넘긴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53년에 처형된 사건이며, 이 사건의 전말은 당대부터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일단 냉전이 끝난 후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들 중 남편인 줄리어스는 정말로 간첩이었다고 밝혀졌고, KGB의 전직 요원인 알렉산드르 페클리소프의 증언에 의해 에델 역시 남편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보를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헌데, 에델의 경우는 남편 줄리어스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그녀도 간첩이었는지가 의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간첩 여부를 떠나서 줄리어스가 제공한 정보가 과연 소련 측에게 유용한 것이었냐는 문제도 있다. 미 연방 검찰 측의 주장에 의하면,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 측에 원자폭탄과 관련된 기밀을 넘겼다고 하며, 사형 선고 시에도 판결문에 이 점이 반영이 되었다. 그러나, 선술한 페클리소프의 증언이나, 기밀해제된 소련과 미국 양측의 자료에 의하면, 연방 검찰 측의 주장을 뒷받침할 물증이 나오지 않아서, 결국 미국의 사법부가 이들의 간첩 여부와 무관하게 사법살인을 저질렀다는 논란이 거세다[21].
  • 롱고롱고: 이스터 섬에서 발견된 고대 원주민들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 마이클 록펠러 실종 사건: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며 당시 뉴욕 주지사였고 후일 미국 부통령을 지냈던 넬슨 록펠러의 아들 마이클 록펠러가 1961년 뉴기니 탐험 도중 실종된 사건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종 사건 중 하나이며 흠좀무하게도 가장 유력한 설은 원주민에게 식인을 당했다는 것이다. 록펠러 가에 대한 평전에서도 식인종에 의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1973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뉴기니섬의 원주민인 아즈맛 부족을 촬영한 영상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발가벗고 노를 젓는 백인 남성이 나와 그가 마이클 록펠러가 아니냐는 추정이 있다. 만약 이 백인 남성이 진짜 마이클 록펠러라면 그는 식인종에게 사망한 것이 아닌 아즈맛 부족의 부족원으로 받아들여져 그들과 함께 생활하다 병사 또는 자연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마이클 록펠러가 록펠러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미스터리다. 문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해당 영상 속 백인 남성이 발견된 게 50여년이 지난 2020년대라 더이상 조사가 불가능하는 것이다.
  • 미국의 금주법: 비록 당시 국민 감정이 금주법이나 비스무리한 걸 제정하는 걸 원했던 건 사실이나 현실성이 전혀 없는[25] 악법인 금주법을 역사/문화적으로 술을 퍼마시던 국가인 미국의 헌법에도 쓸 수준으로 이끈 원동력이 된 사상/단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원인으로는 기독교 근본주의 단체의 영향이나 독일계 이민자 견제의 일환으로 나뉘는데, 독일 이민자 견제 쪽의 가설은 모순점이 있어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설이 조금 우세하고 두 개의 결합가설도 간혹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마피아 배후설까지 나왔다.[26]
  • 모아이 문명 이스터 섬(라파누이) 원주민들: 구체적으로 당시 폴리네시아의 기술로 어떻게 커다란 대규모 석상들을 세웠을 수 있었는지, 또한 모아이 주민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되었는지, 동시에 그들의 문명이 쇠퇴 또는 멸망이 되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27]
  • 빈란드: 9세기 경에 바이킹들이 오늘날의 캐나다 뉴펀들랜드 일대에 정착하여 세운 식민지인 빈란드는 오랫동안 단순한 구전 전설로만 전해지다가, 1960년에 노르웨이의 탐험가인 헬게 잉스타드와 그의 부인이자 노르웨이의 고고학자인 안네 잉스타드가 캐나다 래브라도 반도의 랑스오메도스 지역에 있던 정착지 유적을 발굴하면서 역사적인 사실로 밝혀졌다. 이 빈란드 정착지는 금방 스크렐링기(Skrælingi)라고 불리는 원주민[28]들에게 패망하여 멸망했다고 여겨지지만, 미국 메인주 해안에서 발견된 11세기에 주조된 노르웨이 동전들인 메인 페니의 존재나, 랑스오메도즈의 빈란드 유적지에서 11세기까지 소급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 측정 결과가 나온 것, 빈란드를 탐사했던 토르핀 카를세프니의 장남인 스노리 토르핀손의 출생지가 오늘날의 미국 뉴욕주로 비정된다는 점에서[29], 실제로는 바이킹들의 정착이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된다. 일단 스크렐링기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알곤킨족이나 틀링깃족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이들에게서 바이킹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호 간의 인적교류는 전무했음이 밝혀져있다[30]. 적어도 15세기까지는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이 우수한 목재를 조달하는 곳으로서 빈란드를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이후로도 재정착이 시도되었거나 최소한 원주민들과의 교류라도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입증한 증거가 전무하여 빈란드 역사의 전반적인 면모는 분명치 못한 부분이 많다.
  • 아나사지 문명: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미국 애리조나 주 일대에서 번성한 문명인데,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애리조나 현지의 선주민 푸에블로족의 조상이나 사촌 격의 민족이 건설했다는 것 말고는 문명의 전반적인 모습이나 멸망 원인이 의문투성이이다. 오늘날의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번성한 도시 국가군인 미시시피 문명이 이들의 후손 내지는 자매 문화권이며, 아나사지 문명과 함께 오늘날의 미국 영토에 속한 지역에서 도시 국가를 이룰 정도로 크게 번성한 단 둘뿐인 문명이다. 특히 아나사지 문명은 현대의 미국을 제외하면 앵글로아메리카 유일의 대제국이었다.
  • 앰브로스 비어스: 악마의 사전으로 유명한 작가로, 1913년에 멕시코 혁명의 영웅인 판초 비야를 만나러 가다가 영영 실종되어 버렸다. 판초 비야에 의해 총살되었다는 주장은 그가 판초의 지지자였다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아마도 판초가 이끄는 혁명군을 따라가다가 전사했거나, 멕시코로 건너가기 전에 앓고있던 천식의 악화로 인해 사망했다는 추정이 있으나, 현재 그의 최후 행적을 알 수 있는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아서, 끝내 그의 행방은 미스터리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하는 에토레 마요라나 실종 사건 및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 사건과 함께 20세기 초반에 발생한 실종 사건 중에서는 가장 사회적 파장이 컸다.
  • 어밀리아 에어하트 실종 사건: 미국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로, 가장 널리 알려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해 사망했다는 설 이외에도 무인도인 가드너 섬에 조난당했다 사망했다는 설, 심지어 일본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 엔론 사태의 원인: 엔론은 한때 미국 7대 기업으로 손꼽혔으나 9.11 테러 이후 분식회계의 교과서로 전락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16만명에 이르는 실직자를 만들고 2007년에 파산한 부실기업인데, 2010년에 미국 의회의 재조사에서 분식회계만으로 파산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9.11 테러 이후 한달만에 파산한 건 부자연스럽다는 결론이 나와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파생상품 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근거가 될만한 자료를 엔론 측이 인멸하거나 숨겼고, 분식회계 당사자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나서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이 파생상품이라는게 미국 의회의 재조사 이전에 이미 세계를 뒤흔들만큼의 재앙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여기에 무게를 두고 있다.
  • 올멕 문명: 중앙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으로, 위의 인더스 문명처럼 이 문명을 세운 민족이 누구인지도, 이들의 언어도 불분명한 상태이다.[42]
    • 인두상: 올멕 문명 지역 곳곳에서 발견된 사람 머리 조각상으로 높이는 2미터, 무게는 25톤이다. 그 지역에는 없는 암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올멕 문명 당시에 원거리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유물이다. 그러나 생김새가 마치 아프리카 흑인처럼 생긴 것에 대한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았다.
  • 음악이 죽던 날의 미스터리: 음악이 죽던 날은 1959년 2월 3일 미국 중서부에서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다니던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빅 바퍼가 아이오와주 클레어 레이크에서 다음 행선지인 미네소타주 무어헤드로 비행기로 이동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조종사 로저 피터슨까지 합쳐서 4명이 전원 사망한 사고를 뜻한다. 비행사고 자체는 조종사 로저 피터스슨의 단순과실로 인해 일어났지만, 이 사고에서 여전히 풀리지않는 미스터리는 리치 밸런스와 빅 바퍼가 비행기를 타게 된 경위다. 가장 잘 알려진 경위는 영화 라 밤바에도 나왔듯이 독감에 걸린 빅 바퍼가 웨일런 제닝스로부터 자리를 양보받았고 이후 리치가 토미 올섭과 동전던지기를 한 끝에 리치가 승리해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것이다. 이때 리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을 두려워 했지만, 살면서 누구에게 이겨본 것이 처음이라 용기를 내어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겨울 댄스 파티 투어에 빅 바퍼, 리치와 함께 게스트로 참가했던 디온&더 벨몬츠의 리더인 디온(가수)이 2009년에 한 인터뷰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디온에 따르면 홀리가 게스트였던 빅 바퍼, 리치, 그리고 자신을 탈의실로 따로 부른 후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이때 자리가 하나 부족했기에 디온과 리치가 동전던지기를 했고, 디온이 이겼지만 비행기 좌석값이 자신의 한달 하숙비와 같은 36달러라는 것에 부담을 느껴, 리치에게 양보했으며[43], 당시 독감에 걸린 것도 빅 바퍼가 아닌 리치라고 주장했다.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 중 어느쪽이 맞는 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 잉카 제국 건국 이전의 안데스 산맥 원주민들의 역사: 잉카 제국 자체도 문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그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은데, 잉카의 건국 이전에 있었던 치무 왕국이나 아이마라족의 문명의 역사도 문자 사용 이전의 것인지라서, 상세한 역사는 불분명하다. 일단 아이마라족은 현재도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잘 보존하고 있어서[44] 대강의 역사를 유추해볼 여지는 있으며, 치무 왕국은 그 경쟁자인 잉카 제국 측의 전승으로 단편적으로나마 문화의 양상을 추정할 수도 있고, 각 원주민 부족들의 전승을 토대로 역사를 재구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문증 가능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는, 고고학적 연구만으로 이렇게 역사를 재구해보는데는 한계가 분명하므로, 여전히 안데스 산맥의 옛 문명들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은 불분명하다.
    • 나스카 문명: 나스카 지상화로 유명한 문명. 아직도 문명의 전반적인 모습이 불명이다.
    • 중앙아메리카 문명들과의 교류: 의외로 안데스 산맥의 문명들은 중앙아메리카 문명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는 했었음이 밝혀져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옥수수의 전파 과정이다. 옥수수는 멕시코 일대가 그 원산지로 추정되는데,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기 이전까지는 파나마 지협 주변에는 옥수수가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전파가 된 것은 분명하다. 허나, 미국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파나마 지협을 중심으로 거대한 정글 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유라시아의 경우와는 다르게 활동적인 문물 교류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문에 옥수수 이외에는 남아메리카 라마 중앙아메리카의 문자 등의 여러 유용한 문물들이 전파되지는 못했다. 노르웨이의 아마추어 고고학자이자 탐험가인 토르 헤이에르달이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발사나무로 건조한 배인 콘티키 호를 이용해서 페루 카야오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라로이아 섬까지 항해하는데 성공하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배로도 원양 항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입증되었으나, 바닷길을 이용한 교류가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 중단이 된 것인지[45], 옥수수 말고도 상호 간에 무슨 영향이 오갔는지는 사료와 고고학적 연구 결과의 부족으로 인해 의문에 싸여있다.
    • 티와나쿠: 티와나쿠 잉카 제국의 건국 이전에 번성했던 가장 거대한 규모의 대도시였다. 전성기에는 당대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관광지로 기능하였지만, 잉카 제국을 세운 케추아족이 도래하기도 전에 도시 전체가 버려졌고, 그 유적지만 남았다. 티와나쿠 유적을 조사하던 페루의 고고학 연구진들은 이곳에서 상당한 수준의 가뭄이 들었던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것이 티와나쿠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16세기에 이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이 가톨릭 성당을 짓기위한 석재를 조달하느라고 유적지의 상당 부분을 훼손해서, 이 도시의 거주민들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특징을 알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극도로 부족해졌다.
    • 폴리네시아인과의 교류: 잉카 제국 건국 이전부터 안데스 산맥 일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인과 교류를 한 사실은 이미 주류 역사학계로부터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폴리네시아 제어의 공통조어[46] 고구마를 뜻하는 단어인 *kuumala는 같은 뜻의 마오리어 단어 kumara와 동원어로, 잉카 제국의 공용어인 케추아어 kumara의 차용어이며, 11세기의 폴리네시아인 유적에서 고구마가 출토된 사례도 있다[47]. 체질인류학 연구 결과로는 12세기 경에 오늘날의 콜롬비아 지역에서 폴리네시아인과 현지 원주민 간의 혼혈이 대거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도 했다. # 문제는 폴리네시아인과 남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문물 교류가 언제 시작하고 언제 중단되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에 너무 먼 거리때문에 활발한 교류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중론인데, 그럼에도 잠깐이나마 교류가 이루어졌다가 중단된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점과 더불어, 폴리네시아의 각 섬들에 비해 땅도 넓고 더 풍요로운 남아메리카로의 폴리네시아인의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반대로 남아메리카 원주민 측에서 폴리네시아로 진출한 흔적이 전무하다는 점은 주류 학계를 의문에 빠뜨리고 있다[48].
  •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비교적 현대인 1960년대에 발생한데다가 국가 원수가 살해당했고 저격 당시 비디오까지 생생히 찍혔던 사건임에도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 순방을 돌며 카 퍼레이드를 하던 중 머리를 저격당해 암살당했다." 빼고는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는 냉전 시기의 희대의 사건이다.[49] 덕분에 공식적인 수사결과보다 음모론이 더 신빙성있게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어서, FBI 설, CIA 설, 전직 대통령 배후설, 부통령 설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고 있었으나 최근 미국의 기밀 문서의 잇따른 공개로 CIA가 사실상 암살에 개입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 암살범에 관련된 논란: 존 F. 케네디를 암살한 혐의로 체포된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 배후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서 논란이 되고 있으며, 실제로 오즈월드 본인도 자기는 음모의 희생자라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오즈월드마저 잭 루비의 손에 암살당하여 모든 것이 의혹 수준에 그치게 되었다. 이런 의혹과 관련하여, 잭 루비의 오즈월드 암살 역시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잭 루비가 오즈월드를 살해하고 1년뒤에 암으로 급사해버려서 알 방도가 없어졌다. 그러나 상술한 기밀 문서 공개로 인해 실제로 음모론의 희생자였을 거라는 가설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린든 B. 존슨의 취임선서 논란: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은 갑작스런 케네디의 암살로 케네디의 시신을 실은 에어 포스 원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이때 케네디의 아내인 재클린 케네디도 참석했는데, 이때문에 케네디가 사람들과 케네디의 부하측근들이 남편을 잃고 충격을 받은 재클린 여사를 그 자리에 참석시켜야 했냐며 불만을 토해냈다.[50] 이에 린든 B. 존슨은 재클린 케네디의 참석은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법무부장관인 로버트 케네디의 제안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이것에 대해 부정하며 린든 B. 존슨의 독단적 행동이라며 비난했다. 현재까지 재클린 케네디가 린든 B. 존슨의 취임선서에 참석한 것은 누구의 제안인지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파라과이 건국부터 1870년 이전까지의 역사: 3국 동맹 전쟁 패전으로 파라과이 초기 역사와 관련된 기록물 및 유물들이 대거 브라질 제국군에 전리품으로 약탈되어 브라질로 옮겨졌는데, 이 파라과이 초기 역사의 기록물 및 유물들이 2018년 9월에 발생한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대부분 소실되면서 파라과이 건국으로부터 1870년에 이르는 역사는 이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 해럴드 홀트 실종 사건: 위의 마이클 록펠러 실종 사건 및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 사건과 함께 20세기를 떠들썩하게 한 실종 사건으로 호주의 수상이었던 해럴드 홀트 1967년에 현직 총리 신분으로 지인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던 중에 실종되어 버린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당시 홀트 수상은 경호원들도 뿌리치고 혼자 바다로 헤엄쳐 갔는데, 그 뒤로 그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고, 호주 해군 해안경비대, 주 경찰의 수색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헤엄치던 도중에 파도에 쓸려서 익사했다는 설과, 그가 유례없는 친중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사실 해럴드 홀트는 중국 측에 포섭된 스파이이며, 당시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그가 사고를 가장하여 미리 약속된 지점까지 헤엄쳐서 중국 스파이와 접선한 뒤에 그대로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으나,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내용이라서 무시되었다. 그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개판 5분 전이라 그럴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인 시기여서 북베트남을 돕던 소련이 납치해서 굴라크에 끌려갔다는 썰도 있다. 그 이외에 상어에게 물려서 사망했다는 설, 수영 도중에 비타민 결핍증으로 인해 몸에 마비가 와서 익사했다는 설도 있으나,[52] 유력한 가설은 없는 상태이다. 일단 호주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가 수영하던 도중에 사고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6. 2 대륙 이상

특정 지역의 역사로 간주하기 어려운 두 대륙 이상이 연관된 기록에 대한 미스터리를 다룬다.
  • 노벨상에서 수학 부문이 제외된 이유: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의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가 군사용으로 이용되어 많은 살상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노벨상을 제정했을 때, 수학 부문이 유독 제외되어있던 것이 제정 당시부터 숱한 의문을 낳았다. 한때는 그 이유로 스웨덴 수학자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53]가 노벨과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않았다는 뚜렷한 근거도 없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미타그레플레르가 노벨상 위원회에 직접 가담하여 수상자 선정에 참여했던 사실이 밝혀져서 부정되었다. 2023년 현재까지 알프레드 노벨이 당시 노벨상 부문[54]을 선정한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고, 선정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서, 수학 부문이 굳이 제외된 이유는 영원한 미스터리가 되었다[55].
  • 정화의 대원정
    • 도달한 지역: 관련 기록이 상당수 소실되면서 정화가 이끈 명나라의 대함대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가 불분명해졌다. 호주나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지만,[68] 우선 명나라의 함대가 동아프리카까지 도달한 것은 입증되었다.
    • 함선의 규모: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는 정화의 대원정에 동원된 함선들이 17,000톤에 달하는 엄청난 배수량을 자랑했다고 알려졌지만, 목재 자체가 가진 한계로 인해 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낭설의 근거가 된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의 너비 44장, 폭 18장이라는 기록은 당대의 과장으로 여겨지며[69], 이에 따라 대만 해양대학 교수인 수밍양은 길이 74m, 너비 12.8m 정도로, 상하이교통대학의 교수였던 신원어우는 600톤 내지 800톤급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공정학원의 교수인 탕즈바는 정화 보선을 길이 55.5m, 선폭 15.3m, 배수량 1,500톤급으로 추정하였다. # 일단, 동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코뿔소 기린을 실어왔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당대의 조선 기술을 감안했을때 유례없이 거대한 선박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당대의 일반적인 선박과 유사한 크기의 함선이었다고 추정되어서, 정화의 대원정에 동원된 함선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70].
    • 항해의 목적: 이런 대규모 항해를 기획한 목적도 불분명하다. 한때는 건문제의 실종과 엮어서 그의 행방을 찾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주류 학계에서는 설령 그런 목적이 있다고해도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보며, 일반적으로는 영락제의 단순한 과시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해적에 대한 토벌[71], 조선이나 일본, 몽골 등의 동북아시아 국가들로만 제한되어있던 외교 정책에 대한 외연 확장이 목적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스터리
    • 노르망디의 한국인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에 의해 체포된 독일 국방군 육군 동방대대 소속의 한 동아시아인 병사로, 미국 역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스[72]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언급해 논란이 일었다. 주류 역사학계에서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 많은 가설을 제안했는데, 나치 독일에 의해 포섭된 반공주의 성향 소련인들을 모아 만든 러시아 해방군 소속이거나, 소련군 포로들로 구성된 동방대대 소속이라는 설이 있으며, 그 출신 성분도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징집된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재차 독일 국방군에 징집된 한국인 병사라는 설, 처음부터 소련군 소속이었던 고려인이나 기타 동아시아인계[73] 병사라는 설이 있다. 이 병사의 최후도 불분명하여,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이송된 뒤에 그곳으로 귀화하고 정착했다는 설, 전쟁 직후에 한국으로 돌려보내졌다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설[74], 소련으로 되돌려보내진 후에 굴라그에 수감되었다는 설 등의 여러 이설이 있다.
    • 루거우차오 사건 :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지만 사건의 원인이 된 총성과 일본군 병사의 실종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총성에 관해서 당대에 일본 측은 '중국군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주장하고 중국 측은 '총소리는 일본 쪽에서 났다.'는 상반된 견해를 보였던지라 현재까지도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현재는 그나마 일본의 전쟁 명분 생성을 위한 자작극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명확한 해설은 없다. 또 일본군 병사의 실종의 경우 그 실종된 20분동안 무슨 일을 했었는지가 사건 당시의 조사 부실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사건 이후로는 그냥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그랬다는 것이 진상이라는 소문이 퍼져있다.
    • 안네 프랑크 가족을 밀고한 자: 이웃들도 그 행방을 몰랐을 정도로 감쪽같이 숨는 데 성공했던 안네 프랑크의 가족들이 발각된 원인에 대해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밀고에 의해 발각되었을 가능성으로는 안네 가족들을 돕던 미프 히스의 친척이 안네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밀고했다는 설과[75] 똑같은 동기로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의 부하 직원이 밀고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밀고가 아니라, 우연히 나치 독일군의 수색에 걸려들었다는 설도 있다.
    • 제2차 세계대전기의 바티칸: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교황 비오 12세 이탈리아 각지의 신부 주교, 수도자들에게 홀로코스트를 피해 교회로 달아나는 이들[76]을 숨겨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은 있었고, 연합국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전쟁의 피해를 입은 수많은 로마 시민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한 기록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이는 연합국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한 뒤의 기록으로, 그 이전에 바티칸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 등의 추축국을 대상으로 무슨 입장을 취했는가가 의문에 싸여있다. 이 시기에 대하여 충격적이게도 비오 12세가 홀로코스트로 죽어가던 유대인 공산주의자, 성소수자들을 외면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심지어 아예 바티칸 가톨릭 교회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추축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드물다. 비오 12세 본인이 남긴 기록들은 비오 12세의 유언에 따라 친구이자 비서였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77]가 모조리 소각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비오 12세 재위 기간 중 작성된 공식 외교 문서에 대한 봉인이 9년 앞당겨 해제되었으나 문서의 양이 워낙 방대해 해답을 찾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 커셔 폭격: 커셔 폭격이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6월 26일, 헝가리 왕국 커셔(현 슬로바키아 코시체)에 신원미상의 폭격기 3대가 폭격을 가한 사건이다. 폭격 직후 이 사건의 주범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헝가리군 관계자들이 폭격에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이며, 이에 따라 폭격의 주범은 소련 공군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림에 따라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정계가 군부 중심의 참전파와 총리 중심의 중립파로 두쪽이 나서 5일간 중립을 지키던 헝가리가 독소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그러나 폭탄이 소련제라는 것을 빼면 도대체 정확한 범인이 누구인지 발생 이후 8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아서 소련의 의도적 폭격이다/소련의 오폭이다/독일이 헝가리를 참전시키려고 한 짓이다/헝가리가 독소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다/루마니아가 북트란실바니아를 되찾기 위해 한 짓이다/슬로바키아가 남슬로바키아를 되찾으려 한 짓이다/체코나 유고슬로비아 파르티잔이 벌인 짓이다. 라는 주장들만 허다하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 히로시마의 그림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폐허가 된 스미토모 은행 히로시마 지점 앞 계단에 사람이 앉아 있던 흔적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남겨졌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이른 아침 시간에 왜 은행 문 앞에 나와 있었는지 추측할 길이 없다.
    • 존 왈터 윌콕스 주니어 소장의 최후: 1942년 3월 26일 미국 해군은 전함 워싱턴, 항공모함 와스프, 중순양함 위치토와 터스컬루사,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진 제38 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영국 스캐파플로 항에 파견한다. 이 함대의 사령관이었던 존 왈터 윌콕스 주니어 소장이 포틀랜드 항을 출항한지 하루만에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구축함 윌슨이 실종된 윌콕스 소장의 시신을 발견했으나 인양에는 실패했고, 3월 27일 시신 수색을 종료하고 로버트 칼라일 기펜 소장이 윌콕스 소장을 대신하여 함대를 지휘하였다. 윌콕스 소장의 사망 원인은 폭풍이 치던 밤에 갑판에 서있던 소장을 보았다는 터스컬루사의 수병의 증언으로 악천후에 의한 실족사로 추정되지만, 자살설, 심장발작으로 인한 실족사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어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 수리가오 해전에서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단독으로 돌입한 이유: 1944년 10월 24일 수리가오 해전에서 당초 일본군의 계획은 니시무라 쇼지 소장의 함대와 시마 기요히데 중장의 함대가 함께 수리가오 해협으로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리다 다케오 중장이 지휘하는 본대가 팔라완 해협에서 미군 잠수함 다터와 데이스의 공격을 받아 기함인 아타고가 격침당해 원래 계획한 시간에 맞춰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못한다. 이때 니시무라 소장은 구리다 중장으로부터 후퇴나 속도를 늦추라는 명령을 받지 못해 당초 계획보다 4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린다. 당연히 함께 돌입해야 할 시마 함대는 아직 도착도 못한 상황에 니시무라 소장은 독단적으로 수리가오 해협에 돌입해 버린다. 니시무라 함대는 전 함이 7척이었는데, 수리가오 해협을 지키고 있던 미군의 제시 바렛 올렌도르프 소장의 함대는 전함만 7척으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으로 니시무라 함대를 궤멸시켜 버린다. 니시무라 소장은 전사하고 구축함 시구레와 대파당한 중순양함 모가미만이 간신히 달아나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니시무라 소장이 무슨 이유로 시마 함대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수리가오 해협으로 돌입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일본군이 그나마 미군에게 우위에 있다고 여겨진 야전을[78] 하기 위해서라거나, 니시무라와 시마가 서로 성격 차이로 사이가 나빴던데다가, 구리다 중장의 지휘를 받는 니시무라 소장과 달리 시마 중장은 미카와 군이치 중장의 지휘를 받아 지휘 체계가 서로 달라서 생긴 문제라는 설이 있으나 최근에는 연료가 부족해서 어쩔수 없이 돌입했다는 설이 부각되고 있다. 어찌됐든 니시무라 소장의 단독 돌입의 이유는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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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몰타인이나 에티오피아인, 에리트레아인, 레바논 아랍인 기독교를 믿는 등, 대부분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을 지언정, 일단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 이들이긴 했다. 그러나 관체족은 그것도 아니고, 절멸 직전까지 자신들의 토착 신앙을 고수했다. [2] 대한민국에도 이런 용도로 지은 구조물이 있다.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전라남도 여서도라는 섬은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내고자 주민들이 돌을 쌓아서 벽을 조성했는데, 그 모양이 고대 유적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해서 종종 ' 한국 마추픽추'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3] 관체족이 전멸할 때까지 카나리아 제도는 계속 부족 사회를 유지했으며, 거대 규모의 피라미드의 건축을 명령할 정도의 강력한 지배자가 나온 적도 없었다. [4] 아케나톤 사후의 기록에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의 유사성말고는 이 사람이 네페르티티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고,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인물 자체가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5] 네페르티티 본인 또는 그 친족으로 추정되는 미라는 발견되었다. [6] 애초에 투탕카멘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긴 했으나, 그 배경에서 자신의 장모이자 계모인 네페르티티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즉위했다는 점과 더불어, 즉위 후에 그가 능동적인 통치를 했다는 점, 그의 파라오위를 노릴 수 있는 강력한 상대인 아이가 그의 사후에나 투탕카멘의 이복누나이자 왕비인 안케센나멘과 결혼하면서 즉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살아생전의 투탕카멘은 생각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적도 없어서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면서, 그가 살해당했다는 설은 힘을 잃었다. [7] 투탕카멘의 치세 중에 누비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노예나 기타 진귀한 야생동물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받은 기록이 있고, 그가 궁궐 내에서 무예를 익힌 기록도 확인되었다. [8] 투탕카멘 미라에서 심장이 제거되어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설이다. 이는 심장이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미라 제작 시에도 심장을 남겨두던 당대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으로, 당시 미라 제작자들이 그의 심장을 보존하는데 실패하여 그들의 내세관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심장이 손상될 정도의 사인으로 사고사를 거론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가설 중에는 투탕카멘이 전차 경기를 하던 중에 전차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사고사했다는 가설들의 공통점은 투탕카멘이 가지고 있던 선천적 기형때문에, 통상의 비장애인들이 당하는 사고에 비해 훨씬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다. [9]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그것이다. [10] 현재의 추정에 따르면, 말라가시인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일대에서 발원한 민족으로, 중도에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몰디브 등에 상륙한 바 없이 인도양을 서쪽으로 직접 횡단하여 마다가스카르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기술로 인도양의 편서풍을 어떻게 뚫고 지나갔는지에 대한 의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11] 흔히 가나 제국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2] 11세기 경의 아랍인 상인들이 오늘날의 짐바브웨까지 내려가서 관련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는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갔던 바이킹 탐험가들 수준으로 일회성 방문에 그친 터라, 문화적으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다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로는 적어도 1830년대까지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주변에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13] 일단 주류 학계에서는 서아프리카 이집트에서 너무 멀다는 점을 들어 반투족들 스스로가 농업 기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기는 하다. [14] 일단 음악학자들은 당대에 남겨진 기록을 토대로, 팔머 맥아비 백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있다. [15] 텍사스 알렉산더에 대해 흑인라는 점과 텍사스 주의 소도시인 주어트에서 살다왔다는 점, 생몰년도와 출생지까지 몽땅 밝혀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알려진 내용들도 모두 텍사스 알렉산더 본인의 증언에 의한 것뿐이라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16] 네임드 블루스 가수들 중 한 명. [17] 둘 중 시몬 볼리바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 아르헨티나에서 국부로 숭앙받는다. [18] 회담 자체가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참관하지 않았고, 회담의 내용과 진행에 대해서 두 사람 중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고 죽었다. [19] 호세 데 산 마르틴 자신이 직접 군주가 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럽의 왕족들 중 한 사람을 군주로 옹립하고 실권을 정부와 의회가 행사하는 방식을 지향한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목숨걸고 투쟁했던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하겠다는 얘기는, 시몬 볼리바르에게는 그냥 스페인 치하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로 들렸을 법하다. [20] 과야킬 회담 이후로 추방당한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이후로 경조사 때문에 임시 귀국한 것 빼고는, 두 번 다시는 아르헨티나 땅을 밟지 못했다. [21] 실제로 줄리어스의 간첩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로젠버그 부부는 이런 석연치않은 부분때문에 매카시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꼽힌다. [22] 지금의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와 뉴질랜드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부였으며, 오늘날의 호주 연방 정부의 전신이다. [23] 당시의 호주 대륙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비견될 정도로 헬게이트였다. 백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이 원한 때문에 지나가는 백인 탐험가들에게 적대적이었으므로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광활한 초원 사막이 펼쳐져 있어서 탐험 도중에 식량이나 물이 바닥나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기가 무척 쉬웠다. 즉, 이런 곳을 탐험하다 돌아오지 못했으면 십중팔구는 현지에서 사망했다고 보아야 했다. [24] 비슷한 사례로, 영국 해군 장교인 존 프랭클린이 이끄는 탐사대 전원이 북극에서 조난사한 사례가 있다. 이쪽은 항해 일지와 같은 기록물이 일체 발견되지 않아서 사건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은 경우이다. [25] 대표적으로 금주단속 관리관이 있는데, 미국은 당시에도 인구가 1억명에 가까웠음에도 관리 인원은 주 단위도 아닌 국가단위로 고작 4000여명 밖에 산정하지 않았다. 그런 수의 인원으로 단속이 가능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26] 다만 대통령령이나 일반 입법은 냅두고 왜 굳이 헌법까지 갔냐는 것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한 법의 일반적인 원칙인 상위법 우선의 원칙 때문인데, 사회문화 현상에 특성상 금주법을 미국인 100%가 찬성하라는 법은 없어서 대통령령이나 법률만으로 했다간 반대파가 언제든지 위헌 선고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고 당시의 미국 헌법으로도 금주법을 법률로 만들었다간 충분히 위헌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았다.(수정 헌법 제17조까지. 금주법은 18조, 폐지 조항은 21조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이나 법률을 뛰어넘는 최고법인 헌법에다가 아예 박아버려서 위헌 판결같은 귀찮은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던 것이다. [27] 다만 원주민 감소의 경우, 섬을 발견한 원주민에 의한 환경파괴가 기근으로 변해 이로 인한 식인, 전쟁 때문에 원주민들이 많이 감소된 것은 과장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외 석상을 지으려고 통나무들을 대규모로 많이 베어서 섬이 황폐화된 것이 근본적 이유라고 알려졌지만 이 외에도 여러 추측이나 가설들이 나돌았으며 숲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던 원주민들이 왜 그토록 많이 나무들을 베어야 했는지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그 중 유력한게 항해할 때 먹을 목적으로 데려오거나 혹은 원주민들이 항해할 때 몰래 따라온 폴리네시아 쌀쥐들 때문에 야자열매와 어린 나무들이 많이 사라져 숲의 생태가 많이 황폐화된 것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28] 이들의 거주 위치 상, 주류 역사학계는 이들의 정체를 베오투크족이나 알곤킨족으로 비정하고 있다. [29] 캐나다 뉴펀들랜드가 실제 출생지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치는 않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출생지가 어디든지간에, 일단 스노리가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30] 이에 대한 이유로 현지 원주민들이 체포된 바이킹 포로들을 곧장 죽여버렸던 것이 거론된다. [31] 케트어가 속한 언어군으로,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일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32] 나바호어, 애서배스칸어, 에야크어 등이 속한 언어군이며, 북아메리카 서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33] 이누이트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며, 이들의 언어인 유픽어 이누이트어와 함께 이누이트알류트어족으로 분류된다. [34] 유픽족이나 이누이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류되는 다른 민족들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 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카소이드 동아시아인의 공통조상인 고대 북유라시아인(ANE)계이고, 유픽족이나 이누이트족은 그 이후에 형성된 동아시아인 계통이다. [35] 아메린드어족 가설이라 하여, 이누이트 유픽족, 알류트족이 쓰는 이누이트알류트어족 계통 언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전체를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가설은 있지만,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기정사실로 취급되고 있기라도 하는 데네예니세이어족과는 달리, 완전히 가설로만 취급되고 주류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학설이 아니다. [36]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이누이트족과 조우했다는 설도 있다. 9세기경에 아이슬란드에 막 상륙한 바이킹들의 기록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국적불명의 사람 두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정체가 그린란드에서 표류해 온 이누이트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7] 그 근거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카 도래 이전의 폴리네시아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구마의 존재와 고구마를 가리키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소속 언어들의 어휘들이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말레이 폴리네시아어군 조어로 고구마를 가리키는 단어인 쿠우말라(kuumala)는 케추아어로 고구마를 뜻하는 쿠마라(kumara)에서 차용한 말이다. 인류학자들은 형질인류학 연구를 통해, 폴리네시아인들이 케추아계 부족들과 조우한 곳이 지금의 페루 칠레의 국경지대에 해당하는 곳임을 밝혀내었다. [38] 9세기 경부터 바스크족들은 유럽에서 어부나 무역상같은 항해사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을 만큼, 전통적으로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전해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서 어업이나 포경업에 종사하곤 했고, 그 흔적이 바로 바스크어 아이슬란드어 피진이라는 혼종이다. 이런 관계로 어쩌면 바스크인들이 아이슬란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린란드를 통해 오늘날의 캐나다 북동부 지역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39] 이 주장은 아래의 오크 섬의 보물 떡밥과도 연결된다. [40] 여담으로, 뜻밖에도 고구마의 전파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가 바이킹 북아메리카 진출 이전에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한 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오세아니아에서의 고구마 전파 과정에 대해서는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11세기에 남아메리카까지 가서 고구마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지역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그 이후의 탐험가들이 고구마를 가져왔던 것이 시초라는 설이 부정되면서 생물학계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때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된 게 고구마 DNA 정보를 연구한 결과인데, 이 연구에 의해 무려 1200년 전부터 아메리카 밖으로 고구마가 전파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식물이 사람의 도움도 없이 타 대륙으로 퍼져나갈 수는 없으므로, 결국 이미 폴리네시아 원주민들보다도 먼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조우했거나, 최소한 아메리카 땅이라도 밟은 이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41] 공룡이 그려져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화제를 모았던 이카의 돌이 현지인의 날조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던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42] 문명의 이름인 올멕은 훨씬 후대에 중앙 아메리카에 정착한 아즈텍족이 붙인 이름이었는데 나우아틀어로 고무 인간이라는 뜻이다. [43] 이때 리치는 디온에게 자신의 기타를 맡겼다고 한다. [44] 볼리비아의 전(前)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라족 출신이다. [45]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도래했을 시기에는 이미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나 자기들끼리만 교류를 했을 뿐이었다. [46]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대양어군에 속한다. [47] 고구마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다. [48] 다만,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 방면으로 진출한 적이 있었다는 설이 있긴 하다. 잉카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상인들로부터 황금으로 그득한 전설의 땅인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직접 태평양 방향으로 원정을 떠나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돌아왔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는 당시 잉카 제국에 원양 항해 기술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진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이 설화의 진위 여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를 갈라파고스 제도 이스터 섬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이스터 섬 원주민들인 라파누이인들의 모아이 관련 전설에서 언급되는 옛 지배층들인 장이족을 이때 투팍 잉카 유판키가 이끌고 온 잉카인 탐험대라고 보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49] 다만 냉전 즉, 미국과 소련과의 갈등은 원인이 아닐거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 시기가 냉전이라 저런 타이틀이 붙은 것. 다만 이하에 서술했듯이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어 소련이 배후라는 음모론도 없지는 않다. [50]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선서 직전까지 에어 포스 원의 화장실 안에서 틀어박혀 있었다. 또한 그녀가 입은 옷에는 케네디의 피가 묻어있었고, 그녀는 이것을 닦을 생각조차 못할 만큼 패닉상태였다. [51] 참고로 이 둘은 미국 영상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특수효과 전문가이자, 수준급 공학자들이다. [52] 실제로 해럴드 홀트는 이전에도 이 증세로 인해 수영 도중에 익사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53] 복소해석학의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인 미타그레플레르 정리로 유명하다. [54] 알프레드 노벨이 생전에 지정한 노벨상 부문은 노벨평화상,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노벨생리학·의학상, 노벨문학상인데, 전부 그의 유언장에서 지정받은 분야들이다. 허나, 문제의 이 유언장에는 저 부문들을 무슨 이유로 지정했는지까지는 전혀 쓰여있지않고, 뜬금없이 저 분야에 대해서 업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시상하라고만 되어있다. 참고로, 노벨경제학상은 1969년에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노벨의 유언과 상관없이 제정한 상이다. [55] 2023년 현재까지 수학자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199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수학자인 존 내시와 202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가 있다. [56] 후배 탐험가인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1500년에 오늘날의 브라질 해안 지역에 상륙하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업적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포르투갈 왕실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바스쿠 다 가마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혹은 알려지지않은 다른 탐험가들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하여 해당 대륙의 존재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카브랄의 탐사 결과에 대해 태연작약한 반응을 보였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구대륙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정작 자신이 탐험한 곳을 인도 아시아 어디쯤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별개의 대륙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입증된 건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3년에 같은 지역을 재탐사한 뒤의 일이다. 더 이상한 것은 1498년에 이미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가 먼저 브라질에 도달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도 포르투갈 측이 매우 조용했다. 그래서 실제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은 바스코 다 가마가 아닐까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57] 우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실제로 브라질에 도달한 적이 있는데, 위의 각주에서 선술한 카브랄의 탐사 당시에 그의 함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58] 일단 기록을 보면, 기원전 1700년대 쯤에 처음 기록이 등장해서 기원전 1100년대에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가 남긴 "더 이상 바다 민족이란 없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역사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즉, 이들은 최소 6세기 동안이나,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라서 '단번에' 지중해권 문명들의 리즈 시절을 끝낸 건 아니다. 하지만, 바다 민족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당시에는 이들의 존재가 지중해 일대의 국가들에게 상당히 충공깽스럽게 받아들여진것도 사실이며,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패망하기까지 했으므로 그 후로도 6세기 동안은 바다 민족 출신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쓰거나, 이들의 침략을 무척 두려워하는 기록이 속속들이 나올 만큼, 공포의 대상으로 불린 것도 사실이다. 이는 비슷한 이미지인 바이킹이나 몽골인들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둘 다 각각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그리고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실제로 서유럽 동유럽, 남유럽의 수많은 나라를 무력으로 위협하여 내내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첫 등장 시에 이들을 보고 '신의 징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고대에는 이런 바이킹과 몽골인들의 역할을 바다 민족이 했다고 볼 수 있다. [59] 미케네 문명외에도 오늘날의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의 라코니아 지방 주민들의 기원이 되는 도리아인을 말한다. [60] 뒷날 로마 제국을 세운 로마인들의 먼 친척뻘되는 민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 시칠리아 원주민들의 언어는 큰 틀에서는 전부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나, 어군 수준에서 분류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61] 성경에도 나오는 민족들이며, 다윗 왕의 즉위와도 관련있는 민족이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으로 추정되지만, 세부적으로 어느 어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나, 당대의 다른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리스인과 동계이거나, 아나톨리아 반도를 거쳐온 그리스인 이민자들이라고 추정된다. [62] 바다 민족으로 분류되는 민족들 중에는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인들( 히타이트인들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다.)과 에트루리아인의 조상격인 민족인 티레니아인도 있다. [63] 바이킹의 경우와 같이 원거리 무역 활동이나 용병 활동을 동반한 일종의 해적 행위가 목적이었다는 설과 중세 초의 게르만족의 대이동처럼 외적의 침입이나 기후환경의 변화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목숨을 건 대이동을 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64] 미국 정부가 타국의 핵실험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발사한 벨라 위성에 의해 감지되었기 때문에, 벨라 사건이라고 한다. [65]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서쪽으로 200km쯤 떨어진 곳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속령인 프린스 에드워드 제도가 있다. [66] 알다시피 이 시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벌어지고 있었기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이들에게 대대적인 경제 제재를 벌이고 국교를 단교한 바 있다. 그래서 남아공 정부는 이에 대한 반항으로 핵무기 보유를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와 비밀리에 협력하여 핵무기를 개발한 바 있다. 따라서 훗날 F. W. 더클레르크 넬슨 만델라가 연이어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할 때,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이때 개발한 핵무기를 모조리 폐기했다. [67] 이 섬광 자체가 핵실험에 의한 것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 그 범인으로 지목되는 또다른 나라가 프랑스다.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동쪽으로 500~600 km 정도 떨어진 곳에 프랑스의 속령인 케르겔렌 제도가 있으며, 훨씬 뒤인 1995년에도 프랑스는 자국의 다른 식민지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핵실험을 한 전적이 있다. [68] 아메리카는 몰라도, 호주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유럽인의 도래가 있기 훨씬 전부터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 교류를 해 온 바가 있어서 퀸즐랜드 주에서는 이들의 영향으로 잠시나마 농업이 시도되기도 했고, 말루쿠 제도 뉴기니 섬 서부의 원주민들도 오래 전부터 중국이나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해왔다. 그러니 명나라의 함대가 호주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심지어 정화의 대원정이 있기 훨씬 전부터 중국인들이 호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69] 애초에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부터가 1597년에 저술된 소설이며, 학술 서적이 아니다. [70] 물론 중요 물품을 수송할 기함만 특별히 거대하게 건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것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71] 실제로 정화의 대원정 초기에 정화가 이끄는 명나라 함대에 의해, 오늘날의 베트남 앞바다에서 활동하던 한족 해적 진조의가 토벌된 사례가 있다. [72]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이 된 역사서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73] 타타르족이나 우즈베크인, 키르기스인 [74] 스티븐 앰브로스가 제안한 가설이다. [75] 안네 프랑크 일가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안네 프랑크는 금수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가 가세가 기울자,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던지라, 전쟁 전만 해도 부족한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일가가 홀로코스트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자, 그들의 막대한 돈을 노린 이들이 꽤 있었다. [76]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나, 공산주의자나, 프리메이슨 단원, 성소수자 및 반(反) 나치 운동가들도 여럿 있었다. [77] 한때 '여교황'(La Papessa)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을 만큼, 비오 12세의 치세에서 바티칸의 실권자였다. 이는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힘든 상황으로 생긴 신경쇠약이 나날이 악화되어서, 바티칸의 국가원수로서의 행정 실무는 전혀 보지 못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황으로서 종교 관련 업무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해야 할 행정 처리를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대행하였는데, 문제는 수녀는 사제가 아닌 수도자이기 때문에 교회 행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78]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 견시요원의 초인적인 능력과 산소 어뢰의 위력으로 야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보섬 해전.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일본군의 숙련된 견시요원들이 죽어나갔고, 미군의 레이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야전에서도 미군이 일본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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