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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후안 카를로스 1세 | 미겔 데 세르반테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 아돌포 수아레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 펠리페 6세 | 파블로 피카소 | 예수의 테레사 | 펠리페 곤살레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이사벨 1세 | 세베로 오초아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호세 사파테로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살바도르 달리 | 안토니오 가우디 | 엘 시드 | 알폰소 10세 | 페르난도 알론소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프란시스코 데 고야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안토니오 마차도 | 미겔 인두리안 | 미카엘 세르베투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로라 플로레스 | 펠리페 2세 | 카를로스 1세 | 로시오 주라도 | 그레고리오 마라뇬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디에고 벨라스케스 | 이사벨 판토하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미겔 데 우나무노 |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비센테 페레르 | 카밀로 호세 셀라 | 페드로 두케 | 다니 페드로사 | 파우 가솔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다비드 비스발 | 라파엘 나달 | 카마롱 데 라 이슬라 |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산티아고 카리요 | 안토니오 반데라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 페드로 알모도바르 |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 미겔 에르난데스 | 후안 마누엘 세라 | 로페 데 베가 | 엘 그레코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 호아킨 사비나 |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 앙헬 니에토 | 마누엘 아사냐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조르디 푸졸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 알레한드로 산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에르난 코르테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카를로스 사인츠 | 파퀴리 | 텔모 사라 | 몽세라 카바예 | 마누엘 데 파야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삭 페랄 | 플라시도 도밍고 | 미겔 길라 | 루이스 부뉴엘 | 엘 코르도베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프란시스코 피사로 |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 라울 곤살레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아만시오 오르테가 | 마놀레테 | 에두아르도 칠리다 | 페란 아드리아 |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 호아킨 로드리고 | 에밀리오 보틴 |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프란시스코 헨토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세바 바예스테레스 | 이삭 알베니스 |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카르멘 아마야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 마누엘 산타나 |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 자코네로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050505> 오아하카 계곡 후작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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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돈 에르난도 "에르난" 코르테스 데몬로이 이 피사로 알타미라노 (Don Hernándo "Hernán" Cortés de Monroy y Pizarro Altamirano) |
출생 | 1485년 12월 |
[[카스티야 연합 왕국| ]][[틀:국기| ]][[틀:국기| ]] 엑스트레마라두라 바다호스 메데인 (現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엑스트레마두라 바다호스 주 메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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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47년 12월 2일 (향년 62세) |
[[스페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카스티야 데 라 쿠에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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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오아하카 계곡 후작 (marqués del Valle de Oaxaca) |
직업 | 콩키스타도르 |
신체 | 약 158~163cm[1] |
배우자 | 본처 카탈리나 후아레스 |
자녀 |
돈 마르틴 코르테스 도냐 마리아 코르테스 도냐 카탈리나 코르테스 도냐 후아나 코르테스 마르틴 코르테스 레오노르 코르테스 목테수마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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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와 내 동료들은 황금으로만 나을 수 있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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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강국인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초기의 콩키스타도르이다.
한국에는 '에르난 코르테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코르테스 본인은 페르난도 코르테스, 페르난 코르테스,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다양한 이름을 썼고, 그가 가장 자주 썼던 이름은 '페르난도 코르테스'인지라 해외에서는 페르난도 코르테스로 알려지기도 한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485년 엑스트레마두라 바다호스 메데인에서 마르틴 코르테스 데몬로이와 도냐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 사이에서 태어났다.코르테스의 공식 전기작가였던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고마라는 코르테스의 부모가 모두 이달고 출신이었으며, 그의 뿌리가 유서깊은 귀족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코르테스에 비판적이었던 바르톨로메 데라스 카사스 신부는 코르테스가 시종의 아들이었으며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일단 코르테스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그의 아버지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바 있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도냐'(doña) 칭호로 불리었기 때문에 최소한 귀족 출신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당시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신분 상승을 도모할 기회는 없다시피했고, 많은 스페인인들이 레콩키스타나 이웃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부귀영화를 노렸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마르틴 코르테스는 아들 에르난을 관리로 승진시키기 위해 코르테스가 14세이던 시절 살라망카로 유학을 보냈다.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체류 시절에 대해선 말이 많다. 코르테스가 고작 2년밖에 안 되는 시간에 대학이라도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고마라는 그가 프란시스코 데발레라의 집에서 2년간 문법을 배웠으나 건강 문제로 중단했다고 기술했다. 세르반테스 데살라사르와 안토니오 데솔리스의 주장도 동일했으나 그만두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질병과 적성,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다고 다르게 말했다. 코르테스의 친척인 후안 수아레스 데페랄타는 코르테스가 바야돌리드 시에서 법원 서기로 취직해 1년간 머물면서, 글과 서기의 사무를 배워 능통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코르테스를 싫어했던 라스 카사스 신부는 코르테스가 법학사 자격을 땄으며 라틴어를 배워 구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등,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시절을 실패로 묘사한 전기작가들과는 다르게 말했다. 법학사 자격에 대해서는 베르날 디아스도 코르테스가 그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으나, 정작 코르테스 본인은 법학사 자격이 있다고 밝힌 적이 없다.
그러던 중 라레스 기사단의 기사인 수사 니콜라스 데오반도가 제3대 산토도밍고 총독으로 임명되자 코르테스는 그의 고향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이달고들을 대거 모집하여 데려갔다. 이때 신대륙으로 향한 이달고들로 알론소 포르토카레로, 곤살로 데산도발, 안드레스 데타피아 그리고 코르테스가 있었다. 오반도는 코르테스의 친가쪽 친척이었기에 코르테스는 연줄을 이용해 채용되었다. 하지만 다치는 바람에 첫 신대륙행은 무산되었고, 몇년간 스페인 남부를 떠돌다가 1504년 마침내 배에 올랐다. 아즈텍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메리카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2. 아메리카로
1504년 코르테스는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알론소 퀸테로(Alonso Quintero)[2] 선장의 배를 타고 출발하여 산토도밍고에 상륙했다.오반도는 코르테스를 아수아 시의 서기로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그곳에서 6년간 서기로 근무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집, 건축용 부지, 경작지를 보유하게 되었고 큰 수입을 얻는 등 부유해졌다. 1511년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론 제독이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에게 쿠바 정복과 통치 임무를 맡겼는데 코르테스는 300명의 쿠바 원정대에 포함되었다.
스티븐 메리맨 등은 코르테스가 쿠바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없는데다가 스페인의 쿠바 정복은 쿠바 원주민들로부터 별 저항을 받지 않았으므로 대단한 업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 그나마도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맡은 임무는 행정직으로, 페르난디나 섬(현재 쿠바)에 건설된 바라코아 시의 알 칼데로 일했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관리로서의 성공은 물론,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어냈고 목장과 금광 경영을 통해 유복한 삶을 살았다.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 총독의 처제와 내연관계가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에게 처제를 책임지라며 결혼을 강제했다.
그러던 중 1517년 쿠바에서 페르난데스 데코르도바(Francisco Hernández de Córdoba)라는 사람이 노예 수급을 위해 탐험하던 중 유카탄 반도를 발견하는 일이 있었고, 그 섬[4]의 참포톤(Champotón)이란 마을에 상륙했다. 하지만 원주민의 야습으로 26명의 사람들이 죽고 상당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탐험대의 수장인 페르난데스도 간신히 살아서 페르난디나 섬(쿠바)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원주민들에게 황금이 많다는 보고를 올렸다. 당시 신대륙을 담당하던 사람은 인도[5] 부왕(Virrey de las Indias)의 대행[6]이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였는데 이 보고를 들은 디에고는 유카탄 반도를 탐험하기로 마음먹고 후안 데그리할바(Juan de Grijalva)를 탐험대장으로 삼아 탐험대를 조직했다. 그후, 후안의 탐험대는 탐험에서 얻은 보물을 1척의 배에 실어 페르난디나 섬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계속 유카탄 인근을 탐험했다. 도착한 보물을 본 디에고는 (코르테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크게 실망하고 이번에는 탐험중이라 돌아오지 않는 후안 데그리할바를 찾는다는 구실로 다시 탐험대를 계획했다.[7]
그리고 이 제3차 탐험대를 꾸리는 과정에서 (코르테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산티아고의 알 단테를 맡고 있었던 코르테스와 접촉했는데 당시 코르테스는 나비오 선박 3척과 상당량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때문에 탐험대 자금의 2/3를 코르테스가 지원하여 탐험대를 편성했다.[8] 이후 1518년 10월 코르테스는 디에고에 의해 원정대장[9]에 임명되어 원주민들과 물건을 거래할 권한만을 가진 채 유카탄으로 떠났다. 사실 벨라스케스가 코르테스를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코르테스의 충성심이 확고해 보였기 때문인데 이 시기 코르테스는 노골적으로 벨라스케스의 요구를 한참 넘어, 식민지를 건설하고 신대륙을 정복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코르테스의 정적들은 벨라스케스에게 로비를 하여 그에게서 코르테스의 대장 임명 취소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내린 출항 중지를 씹고 1519년 2월 10일 600명의 스페인인, 300명의 안티야스 원주민, 12필의 말, 10문의 대포를 실은 10척의 배와 함께 유카탄 탐험에 나섰다. 이는 명백한 항명이었다.
아메리카 본토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상륙 직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였던 게로니모 데아귈라르를 구조했다. 아귈라르는 선박 침몰로 떠내려왔다가 마야인들의 노예가 되었는데, 코르테스의 상륙 직전에 탈출한 몸이었다. 신대륙을 정복해 황금을 열심히 강탈하려는 야망을 품은 코르테스는 (원주민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한 원주민들과 성대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멕시코 정복사의 첫 단원을 시작하면서, 협상이 가능한 부족에게서는 황금을 뜯어내고, 아닌 부족은 그냥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황금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오로지 황금을 찾아 유카탄 반도 근처를 헤집고 다녔다. 이 와중에 포톤찬에 자리잡은 마야 계열 부족에서 말린체를 얻게 되었다. 아귈라르는 스페인어와 마야어를 알았고, 말린체는 마야어와 나우아틀어를 알았기에 이후 코르테스 원정대는 "코르테스 ↔ 아귈라르 ↔ 말린체 등 마야인 ↔ 멕시코 원주민"의 의사소통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콩키스타도르의 침공에 두려움을 느낀 부족은 먼저 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10] 코르테스는 이 동맹 부족들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획득했다. 이때 이전에 표류해와 원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스페인인 선원들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황금으로 가득한 제국'인 아즈텍에 대한 이야기가 코르테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코르테스는 아즈텍을 털어 금을 약탈해 본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열심히 서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군 도중에 시비를 걸어오는 부족들은 전부 다 때려잡았다. 다만 흔히 오해되는 것과 같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 형상은 모조리 과녁으로 간주하며 피로 물든 행군을 해나간 건 아니었으며, 가능하면 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다. 마주치는 부족마다 족족 몰살한 다음 약탈을 수행하면서 진군하기에는 코르테스가 지닌 인적 자원은 너무 적었고, 코르테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은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항하는 부족들에게 코르테스의 진군에 협력하라는 전언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아즈텍 동맹 부족들 중에서도 코르테스에 협력하는 부족들이 많았다. 가령 아즈텍의 동맹이었으나 그 지배를 환멸하던 한 부족장인 치코메코아틀은 코르테스를 환대하며 그가 멕시코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베라크루스를 세우는 걸 도와주었다.[11]
한편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소식은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있는 아즈텍의 황제(우에이 틀라토아니) 몬테수마 2세에게도 전해졌다. 사실 몬테수마 2세는 히스파니올라와 쿠바 섬의 학살로부터 도망쳐 온 원주민들을 통해 이 범상치 않은 이방인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후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장차 제국에 위협이 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했는지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제국 각지로 첩보원들을 보내 이들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철제 무기나 불을 뿜는 막대, 타고 다니는 괴상한 짐승 등에 대한 정보가 황제에게 전해질 때마다 몬테수마 2세가 이들에 대해 느끼는 위협과 공포심은 커져만 갔다. 비록 머릿수는 적을지라도 아즈텍인의 눈에 콩키스타도르들은 약점 따위는 없어보이는 무적의 군대처럼 보였다.
베라크루스를 건설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던 코르테스에게 몬테수마 2세가 보낸 사절이 와, 금을 선물하며 전쟁을 피하자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때 속설과 다르게, 이 사절들은 코르테스를 신으로 대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아즈텍 신화에서 케찰코아틀의 피부가 흰 색으로 묘사되었고 따라서 아즈텍인들이 백인인 코르테스를 신으로 대했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낭설이다. 애초에 케찰코아틀이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속설도 스페인의 식민화 이후 생긴 이야기이며, 케찰코아틀의 귀환한다는 예언서도 스페인의 정복 이전에 발견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주민들이 이방인들을 신이라고 믿었다는 증거 역시 없다.
코르테스는 더 많은 금을 원한다며 사신을 모욕적으로 대했고, 콩키스타도르들이 가진 화약 무기의 위력을 과시하며 쫓아냈다. 이후 두 번째로 온 사절은 더 많은 금을 선물로 건네며, 코르테스를 테노치티틀란으로 초대했다.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에, 코르테스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적대 부족과 싸움을 붙여 이들을 공멸시키려는 몬테수마 2세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즈텍의 통솔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원주민들은 환대하는 반면 어떤 원주민들은 다짜고짜 기습하기 일쑤였고, 그 중 가장 위험했던 것은 틀락스칼텍인들과의 전투였다. 애초에 틀락스칼라는 아즈텍을 상대로 오래동안 표면상으로나마 동맹국 지위를 유지할 만큼 강대한 도시국가였으므로 화포로 무장한 콩키스타도르라도 이들을 상대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결과였다.[12]
하지만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콩키스타도르가 오랜 숙적이었던 테노치티틀란을 멸망시키려는 걸 알게 되자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맹이 되었다. 속설과 다르게 틀락스칼텍 역시 당대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행했다. 또한 애초에 틀락스칼텍은 테노치티틀란의 속국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종교성이 강한 연합체에 포함될 뿐인 오랜 라이벌 격의 적국이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와 비슷하다. 물론 테노치티틀란이 제국으로 성장한 뒤 전쟁과 공물과 관련해서 오래 시달렸단 점도 거짓은 아니나, 인육 조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명백하게 스페인이 퍼뜨린 낭설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즈텍 제국의 '꽃 전쟁' 항목과 틀락스칼텍 문서 참조.
처음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이방인 침략자라고 생각해서 저항한 것이었는데, 이후 양 측의 소모전이 지속되고 협상 자리에서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을 침략할 계획을 설명하며 동맹을 제안하자 몇 번의 내부 회의 끝에 이를 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측 기록에는 틀락스칼텍이 마치 아즈텍의 속국이자 인신공양의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스페인 본국의 독자들에게 정복자들을 영웅화하고 그들을 도운 원주민은 쳘저하게 무지하거나 피해자인 존재로 포장될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던 코르테스는 평소보다 많은 아즈텍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즈텍의 동맹도시 촐룰라에 도착했다. 코르테스는 여기서 물자를 보충할 계획이었지만, 촐룰라가 이상할 정도로 요새화되어 있는 것을 경계한 휘하 틀락스칼텍인들은 반대했다. 또한 몬테수마 2세의 사절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도시의 지도자는 코르테스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말린체가 코르테스에게 촐룰라는 사실 스페인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코르테스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 이상 확인 같은 건 하지 않고 촐룰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이는 촐룰라 학살로 이어지게 되었다.[13]
2.3. 슬픔의 밤과 그 이후
촐룰라를 불태운 코르테스의 소식이 테노치티틀란에 전해지자 몬테수마 2세는 패닉 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이미 수적으로 훨씬 열세인 상태에서 틀라스칼텍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번에는 아예 동맹 도시인 촐룰라를 함락시켜버린 이 미지의 군대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느낄 만도 했다. 코르테스도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말에 대한 공포심을 유지하기 위해 전투에서 죽은 말의 시체를 묻어 철저히 은닉하기도 했다. 몬테수마 2세의 입장에서는 아즈텍의 군사력으로 이들을 막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얼마나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던 황제는 결국 직접 나와 이들을 환영하기로 결심했다.
코르테스는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해 아즈텍의 황제인 몬테수마 2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14][15] 그러나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와 대면하자 그를 인질로 잡고 위협해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를 점거하고 황금을 받아냈다. 이때 몬테수마 2세의 황녀와도 눈이 맞아 그녀를 애인으로 삼고 사귀었다.
하지만 점거 상태가 지속되던 중 아즈텍 병사들의 기습에 포위되고 말았다.[16]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즈텍 전사 수만 명을 상대로 1,000명의 콩키스타도르들과 수천 명의 틀락스칼텍 전사들을 지휘해 간신히 버텨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멸하리라는 판단하에 포위를 뚫고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몰래 이동하던 코르테스의 군대는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어버렸다. 곧 전투와 도주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과정속에서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코르테스도 끌려갈 뻔한 위기를 세 번이나 겪게 되었지만( 슬픔의 밤, 1520. 6. 30), 코르테스 본인에겐 천만다행으로, 그리고 아즈텍에게는 애석하게도, 이때 조선 분야에 전문 기술이 있었던 마르틴 로페스는 무사히 생존하여 훗날 테노치티틀란 재공략 때 핵심인물이 되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신도주할 때 병사들은 소지할 재물들의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많은 보물을 품 속에 넣은 자는 동작이 굼뜨게 되어 거의 다 죽었다. 보물을 적게 소지한 자들은 생존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러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나온 보물은 재기를 위한 군자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모두 코르테스가 압수해버렸다.
후퇴는 테노치티틀란에서 끝나지 않고 백 수십 km 떨어진 해안 도시 베라크루스까지 이어졌다. 후퇴 과정도 고난이었는데 식량 부족에 시달린 데다가, 아즈텍의 추격자들 및 아즈텍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주변 부족들의 공격까지 뚫으면서 나가야 했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승마한 채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해 창으로 적장을 꿰뚫은 덕에 전투를 반전케한 적이 수차례나 있었다. 아즈텍의 추격을 단념케 한 오툼바 전투(1520. 7. 7)도 그렇게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코르테스와 그의 직속 기사들은 각종 무기에 능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창을 잘 써서 투창이 정확했다.
한편 그렇게 도망치던 도중 아즈텍의 인신공양을 목도하고 경악한 그들은, 신전을 향해 대포를 발사하여 의식을 중지시키고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들을 사살한 후, 의식의 제물이었던 아즈텍인을 강제 귀가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독교를 포함한 구대륙의 종교들은 대체로 인신공양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그 강도가 강렬하여 신성모독, 야만 등으로 못박아 둔 상태였다. 코르테스의 이런 과격한 의식중지 행위는 그가 전근대 구대륙인이라는 시대상을 감안했을 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기는 하다.
아즈텍 제국, 더 나아가 메소아메리카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현대인의 눈에 비합리적인 인신공양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비합리적인 카톨릭 광신을 유지하고 있었다.[17] 십자군 전쟁을 봐도 알 수 있듯, 중동의 성지 탈환하겠다고 유럽의 오만 영주, 군주들이 중동을 침공하였고, 역설적으로 그 십자군 전쟁에 실패하면서 이베리아를 제외한 유럽에서는 그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코르테스와 마르틴 루터가 같은 시대 사람인 것에서 알 수 있듯, 구교는 권위를 상당부분 상실하였고, 이는 종교 개혁을 낳게 되며, 이를 상징하는 극적인 사건이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교황령 수도 로마를 불싸지른 사코 디 로마이다. 이베리아가 이런 종교적 후진성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물론 레콩키스타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대 멕시코, 메소아메리카 역사학계의 주요 입장은 코르테스가 인신공양을 없앴으니 그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즈텍인들이 독립국가의 민족으로서 그들 스스로 인신공양 풍습을 자발적으로 없앤 게 아니라 스페인이란 외세의 침략과 수탈, 야만민족 취급 속에서 없앤데다, 과장과 왜곡이 가미된 인신공양 풍습을 빌미로 합병과 문화탄압이 병행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 발생한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화, 스페인의 메소아메리카 식민화, 포르투칼의 브라질 식민화 등은 제국주의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중세 말엽부터 시작된 타 문화권에 대한 이런 침략 및 탄압 행위들이 근대 이후 유럽권의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사상적으로 정당화된 것이 훗날 구체화되는 백인의 의무 사상이다.[18] 따라서 아즈텍의 인신공양이 코르테스의 침략과 폭정을 정당화할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19][20]
또 아즈텍을 포함한 중남미 메소아메리카 문명에서 대단위 인신공양 문화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제의를 중지시킨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어도 여기서 제물들이 감격했다는 것은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아즈텍 제국과 틀락스칼텍을 포함해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에서 인신공양의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순교에 맞먹는 명예였다. 따라서 콩키스타도르가 아닌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제물들이 인신공양 중지에 감격했다는 기록보다 오히려 내 명예를 훼손했다며 역정을 내거나 당혹스러워 했다는 기록이 더 많다. 기록에서는 이에 제물의 수가 1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대에 이는 중세 시대까지 흔했던 숫자 부풀리기식 과장법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철기, 대형 가축 등이 없어 서양과 발전상이 달랐을 뿐, 아즈텍은 뛰어난 천문학 기술, 대규모 도시 건설, 무상 의무교육 실시 등의 요소를 갖춘 선진적 제국이었고 인신공양 역시 그 집행과정을 살펴보면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것과 다르게 고도의 규칙과 체계를 따라 절도있게 행해졌다.
당시 돼지의 보급이 인신공양 말소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으나, 점령지에서 고유종교 탄압과 카톨릭으로의 강제 개종이 빈번했다는 걸 생각하면 가축을 이용한 의식도 허용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스페인과 콩키스타도르들이 자신들을 '관대한 지배자'로 미화하기 위해 날조했다는 시각이 상당히 우세하다.
당시는 아직 중세였기 때문에 이교도, 타종교에 대한 탄압이 빈번히 일어난 편이었다.[21] 침략과 착취에 대한 죄의식이나 도덕감도 부족했기 때문에,[22] 스페인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잡아먹을 상대를 찾아 잡아먹어 합병하고, 자기 체급 키우고, 수탈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 협약 이전에는 포로 대우에 대한 제대로 된 국제적 합의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청야전술이 중세, 근세 시절에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했던 것은, 공격군이 물자를 현지조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인은 도가 지나쳤다. 코르테스의 정복 이래, 스페인 제국주의로 성장하며 19세기 초까지 멕시코를 식민지배하고 착취하여 그 결과 메소아메리카 문화가 대다수 소실되었다. 거진 300년을 식민지배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의 8.5배나 되는 긴 기간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시작된 대항해시대였으니, 이 시대부터 교류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던 서로 다른 문화권에 대한 유럽권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평가된다.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본격적으로 쓰이며 타 문화권에 대한 탄압을 주도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아무튼 이후 한숨 돌린 베라크루스에서 코르테스를 싫어하는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가 보낸 나르바에스의 진압군과 마주하게 되어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아즈텍에서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이번엔 무장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하여 또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이 셈포엘란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자신의 세력에 합류시킴으로써 병력까지 보충하게 되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메리카 정복이 완전한 중앙통제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현지의 정복자들이 각자 국왕으로부터 받은 허가를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졌던 데 있었다.[23]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현지인과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왕실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다른 정복자들과도 정당성을 다퉈야 했고, 심지어 같은 스페인군끼리 전쟁도 벌여야 했다.
한편 코르테스가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실에 보내 오늘날까지 남겨진 편지들은 그의 노련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료로 남아 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래 틀락스칼텍은 물론이거니와 동맹 부족은 물론이고, 아즈텍 제국의 황족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도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등 포섭 시도를 했는데, 이런 점은 잉카 황제( 사파 잉카)와 그 처첩을 능욕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무리들과 정치력이 비교되는 부분이다.[24]
어쨌든 판필로 데나르바에스를 셈포엘란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 포로들을 자군으로 흡수한 코르테스는 전열을 재정비했다. 마침 그가 슬픔의 밤때 당한 학살을 본국에 호소함으로써 얻은 증원군까지 베라크루스에 도착했다. 이에 힘입어 아즈텍을 상대로 재공세에 나선 그는 먼저 아즈텍을 둘러싼 주위 부족들을 상대로 정치 공세를 펼쳤다. 아즈텍은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협박을 필두로 주변국에 막대한 조공을 받고 있었으며[25] 그 중에서는 애초에 아즈텍 연합에 포함되지 않은 전통적인 적국들도 많았기에 코르테스의 회유에 쉽게 넘어갔다. 사실 틀락스칼텍 역시 테노치티틀란의 전통적인 라이벌격 적국이었기에 이에 쉽게 응한 것이었으니 당연하다.
코르테스는 이간질, 혹은 매수(아즈텍에 대한 약탈권 보장) 등으로 여러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원주민 병력을 지원받았다. 한편 이 시기에 본국에서 파병되어 온 인원 중 누군가가 천연두 바이러스를 아메리카에 퍼뜨렸다. 이에 아즈텍인들이 천연두로 인해 수없이 죽어갔으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천연두는 아즈텍의 인구뿐만 아니라 아즈텍의 사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아즈텍 제국의 중심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정복군은 원주민을 동원해 내륙에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워,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아즈텍 수도를 공격했다(테노치티틀란 공방전). 당시 아즈텍의 배는 카누밖에 없었으므로 정복군의 군함이 상륙해올 경우 아즈텍군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정복군의 군함에는 대포까지 있어 거기서 포격을 가하니 아즈텍군의 피해가 엄청났다.
그래도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나중에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내륙으로 이동해 분투를 이어갔지만, 코르테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아즈텍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총 인구 500만 명, 수도 20만 명[26]의 거대한 제국이 한 유럽계 외국인 침략자를 계기로 허무하게 무너진 순간이었다.
물론 코르테스가 계기가 되었기는 했지만, 아즈텍이 완벽하게 멸망해버린 데는 코르테스의 의지보다는 동맹군의 의지가 더 컸다. 상술했듯이 아즈텍은 가진 자원에 비해 나라의 규모가 너무나도 컸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전쟁 준비까지 했는데다가 메소아메리카 특유의 혹독한 환경으로 인한 재해까지 겹치면서 언제나 자원 비축분 고갈 문제에 시달렸다.
이는 아즈텍뿐만 아니라 톨텍 문명 등 이전의 메소아메리카 문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리스크였다. 그래서 다른 문명권에 비해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잠깐의 전성기 뒤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다시 건설되는 일이 흔했다. 애초에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에서 인신공양 풍습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 역시 문명 정착 시기가 늦어서 농업이 늦게 발현했다는 점과, 여러 문명이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자연재해가 흔했기에 인신공양 종교로 이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원인이었다.[27]
에르난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테노치티틀란까지 갔던 길이 훗날 '멕시코 150번 국도'가 되었으며, 1962년에 이를 고속화한 도로인 '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50번 국도의 선형을 보면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갔던 길과 상당히 유사하다.
2.4. 말년
1521년, 아즈텍을 무너뜨리고 멕시코를 건설한 코르테스는 한동안 떵떵거리며 잘 지냈다. 당시 본국은 한창 정권이 교체(트라스타마라 왕조 -> 압스부르고 왕조)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던지라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일까지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야심만만한 젊은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 독일의 카를 5세)는 1516년에 즉위하자마자 곧장 독일에서의 내전과 대프랑스 전쟁(즉 이탈리아 전쟁), 대오스만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더더욱 신대륙에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522년 코르테스는 공식적으로 테노치티틀란 총독에 임명되었다.그런 이유로, 코르테스는 1526년까지 멕시코와 쿠바에서 왕과 다름없이 지냈다. 그리고 1519년에서 152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자신의 무용담과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서한을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송달했다. 이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 아즈텍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밝히는 데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정복자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적받고는 있지만.
하지만 처음에는 전쟁에 여념이 없어 그저 코르테스가 보내오는 막대한 공물에 만족했던 카를로스 1세도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자 슬슬 코르테스의 위치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코르테스는 본국의 큰 지원도 없이 약간의 보급과 지원병만을 가지고 멕시코를 통째로 정복한 인물로 군벌을 넘어 경쟁 식민지 국가를 세운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방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카를로스 1세는 1526년, 코르테스를 월권 혐의로 전격 파면했다.
당연히 코르테스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없었지만, 자신을 파면한 카를로스 1세는 시시한 쿠바 원정대나 아즈텍인들 따위와는 현격하게 격이 달랐다. 그는 스페인 본토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은 데다가 이탈리아 반도까지 석권 중인 당대 유럽 대륙 최강의 승자였다. 파면에 대한 항거는 곧 대규모의 유럽 최정예 군대와의 전쟁, 즉 죽음을 의미했다.
별 수 없이 일단 귀국길에 오른 코르테스는 황제를 알현해 직접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황제의 환심을 얻으려 노력한 끝에, 코르테스의 호방함과 아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카를로스 1세(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다시 신임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가 1540년까지 다시 10년 이상 총독으로 군림하며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에게 스페인 국왕의 대행자인 부왕의 지위만큼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할 일이 없어지자, 1540년, 코르테스는 60세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에 초콜릿을 처음으로 전파했다고 한다. 그는 드넓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자신이 당연히 큰 환대를 받으리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카를로스 1세의 태도는 냉담했다. 10년의 세월 동안 카를로스 1세의 관심이 식은 것은 물론, 새로운 경력을 이어가기엔 코르테스의 나이가 너무 많아졌다. 카를로스 1세는 그에게 두 번 다시 신대륙에서 활동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그의 성공을 시기한 수많은 정적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활약을 멈출 생각이 없었던 코르테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황제에게 지위와 연금을 달라고 탄원했지만,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이룬 업적에 부담을 느껴서 줄곧 무시했다. 코르테스에 대한 관심이 식은 이상 카를로스 1세에게 코르테스는 잠재적인 정치 핵폭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코르테스의 끈질긴 탄원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한 번 알현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알현식 와중에, 절차에 따라 코르테스에게 스스로를 소개할 것을 요구한 카를로스 1세는 이런 답변을 듣게 되었다.
"저는 폐하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으신 것보다도 넓은 영토를 폐하께 바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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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답에 마음이 움직인 카를로스 1세는 이후
독일에서의 신•구교간 전쟁의 장교로 코르테스를 등용해 다시 한번 경력을 잇도록 허락했다. 코르테스는 여기서도 큰 활약을 하며 성공가도를 걸었다. 예순이 넘은 고령에 그냥 은퇴해서 지금까지 번 재산으로 먹고 살아도 무방한데 끝까지 활약을 멈추지 않은 것에서 코르테스의 기량이 돋보인다.이런 활약상에 크게 감명을 받은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를 북아프리카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카를로스 1세가 친정한 원정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코르테스의 마지막 경력이 되어버렸는대, 알제리 원정 도중 폭풍을 만나면서 스페인의 함대가 박살나버리고, 코르테스와 카를로스 1세도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올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 없는 실패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카를로스 1세가 코르테스를 비롯한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대거 해임해버렸고, 이후 코르테스가 직위를 얻으려해도 카를로스 1세는 다시는 코르테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카를로스 1세의 계속되는 냉대에 지쳐 멕시코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고, 출항을 위해 세비야로 왔으나 이질에 걸려 쓰러진 후, 설사병에 시달리다가 나중에는 흉막염으로 악화되었다. 결국 코르테스는 1547년 12월 12일에 아내 후아나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의 서자들을 모두 적자로 인정했으며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누에바에스파냐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3. 평가
3.1. 자질
스페인 세력의 중남미 정복은 같은 콩키스타도르 파벌들 간에도 배신과 반목이 가득했다. 그 경쟁에서 코르테스가 승자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가장 교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9] 아즈텍 정복을 위해서는 일반적인 전쟁 외에도 이간질, 선동, 정보 교란, 문화 곡해와 사실 왜곡, 현지인 학살, 원주민 지도층 고문 및 매수 등 비열한 방법까지 가리지 않았고 이는 그의 세력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아즈텍을 정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침략자로서는 탁월한 재능이 있던 자로, 이런 일들을 뒤탈 없이 벌일 수 있을 정치력, 법률 지식,[30] 군사 지휘까지 여러 자질을 겸비하고 있었다.아즈텍 제국 백성들이 인신공양 등 박해를 당하고 있다며 스페인 본국과 교황청을 선동하고[31] 예수의 이름을 팔아 이를 근절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지원금을 타낸 뒤 자신에게 협력하는 원주민들에게 기득권 지위를 부여하는 등 본국이 아즈텍 제국의 실태를 알기 어려운 상황을 최대한 영악하게 이용해먹었다.
전염병과 우수한 무기로 손쉽게 이겼다는 아즈텍 정복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반만 맞는 말로, 사실은 실패할 변수도 충분히 많았던 원정을 에르난 코르테스 개인의 역량(그리고 어느 정도의 행운)으로 뒤집은 원정이었다. 아무리 콩키스타도르에게 강철검, 기병, 화포, 배가 있었다고 하지만, 기관총이 없던 시대에는 충분한 병력차와 적절한 전술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었다. 줄루 전쟁 초기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천하의 대영제국이 패배한 것, 슬픔의 밤 당시 코르테스가 죽기 직전까지 몰린 것에서도 알 수 있다.
3.1.1. 정치적 역량
당시 원주민들이 아즈텍에 200년간 불만을 갖고 있음에도 왜 코르테스가 당도한 이후에야 보복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당시 멕시코 중부의 부족들은 영역국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국사의 고조선이나 가야와 비슷하게 본체는 도시국가 체급에, 주변 지역 각 세력들을 느슨하게 결속하고 간접지배하는 형태의 정치체제에 머물러 있었다.테노치티틀란 주변 부족들은 메시카족, 즉 아즈텍인에게 원한이 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들끼리도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그렇기에 느슨한 간접지배 형태를 취한 아즈텍이 어렵지 않게 체급으로 협박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코르테스 원정대의 무력과 코르테스의 정치력이라는 구심점이 없었다면 그들이 서로 힘을 합해 아즈텍에 반기를 드는 그림이 나오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코르테스 원정대와 순순히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코르테스가 협상을 요구해도 난생 처음 보는 이들을 바로 믿는 원주민 부족은 드물었다. 틀락스칼텍조차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코르테스에게 맞섰고, 코르테스가 그걸 모두 막아낸 후, 스페인인들이 목표는 아즈텍 공격이라고 설득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코르테스의 밑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끌어들인 부족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배신할 위험이 있어서 후속 관리도 중요했다. 일단 2개 이상의 세력을 산하에 두면 이해관계와 행정 소요도 배가 된다.
원주민만 신경 쓰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콩키스타도르들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찍혔던 코르테스는 디에고의 친척이었던 판필로 데나르바에스에게 공격받았고, 원정대에는 벨라스케스의 인척이나 가까운 부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벨라스케스와 가깝지 않더라도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추진된 원정에 불만을 품는 부하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원정 초기 월권 행위에 반발하는 벨라스케스파를 회유하고, 원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땐 타고 온 배를 파괴해 가라앉혀 원정대의 분열을 막았다.[32] 슬픔의 밤으로 모든 걸 잃고 틀락스칼라로 물러났을 때 겁에 질려 베라크루스로 물러나길 원하는 부하들을 강하게 휘어잡아 끝내 테노치티틀란 공략을 성사시켰다. 이때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서 얻은 황금 대부분을 잃어버린 데다가, 만일을 대비해 틀락스칼라에 남겨둔 돈과 귀중품을 그의 시종들이 가지고 주인을 찾아나섰다가 아즈텍인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해서 가진 건 걸치고 있는 옷과 검뿐인 빈털터리였다.
3.1.2. 군사적 역량
10대 중반과 20대 전부를 행정 관료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수준급 전투 지휘관으로 잉카를 정복한 피사로보다 월등한 상위로 평가받는다.[33]감안해야 할 점은 아즈텍이 화약무기와 강철이 없다고 해서 그냥 만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즈텍은 중남미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국가였다.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며 산악지형을 끼고 있어 수비 부담이 적은 타라스칸조차 참패하고 수세로 전환할 정도였다. 슬픔의 밤 때 특히 아즈텍은 거마책(拒馬柵)을 세워서 기병의 기동을 차단하고 투창기와 투석, 궁시로 보병의 움직임까지 제한한 다음 화공으로 괴멸시켜려 들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을 세워 공격했고 전술 습득도 빨랐다. 그리고 모든 남아를 군인으로 키우는 징병제라서 병사 충원도 쉬웠다.
물론 코르테스의 스페인인들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 수가 겨우 수백 명이었다. 코르테스가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속이고 원정에 나섰을 때 총 병력 580명 중 석궁으로 무장한 궁수는 30명, 화승총을 든 총병은 2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코르테스는 상관인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의 복귀 명령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출항한 탓에 쿠바로 물러나거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해 조금의 실수도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어 선택지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오툼바 전투에서의 용맹도 그렇거니와, 나르바에스와 싸울 땐 비 때문에 밀랍을 막아놓은 대포를 탈취하는 특공에 앞장서 참여해 400명의 인원으로, 1,400명에 23문의 대포를 보유한 나르바에스 병력을 이렇다 할 손실없이 제압했다. 콩키스타도르 중에서 이 정도 숫자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한 사례는 보기 힘들다.[34] 늘 옳은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손에 들어왔던 테노치티틀란을 놓기 싫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다가 낭패를 본 슬픔의 밤 한 번을 제외하면 원정대를 위기에 빠뜨릴 만큼 큰 오판은 없었고, 그마저도 끝내 수습해냈다.
3.2. 통치 방식
에르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와 스페인의 통치방식은 제국주의적 식민화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다만 코르테스 한 개인에 주목했을 때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비교하면 비교적 원주민에게 온건한 편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만큼 당시 다른 스페인 침략자들의 압제와 폭거는 코르테스가 양반으로 보일 만큼 악독했다는 말이기도 하다.가령 코르테스가 본국에 소환당한 사이 그의 엔코미엔다에 속한 원주민들을 다른 스페인인들이 학대하자 멕시코에 귀환한 뒤 그들을 위한 소송장을 써주었고 결국 승소했다. 이것은 자신의 영지민으로 편입된 원주민들에 대한 봉건제적 보호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코코 북동쪽 아콜우아(Acolhua)에 있는 테페틀라오스톡(Tepetlaoztoc) 엔코미엔다는 처음에는 코르테스가 다스리다가, 그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데오캄포(Diego de Ocampo)와 미겔 디아스 데아우흐(Miguel Díaz de Aux)를 거쳐서 코르테스의 가장 악명 높은 정적이었던 곤살로 데살라사르(Gonzalo de Salazar)에게 넘어갔는데 살라사르의 수중에 들어가자마자 어마어마한 착취를 당했다.[35]
물론, 그렇다고 코르테스를 타국을 침략하고 착취한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보는 관점은 부적절하다. 그 역시 제국주의적 침략자였고, 스페인의 사제이자 역사가인 바르톨로메 데라스 카사스가 1552년에 출간한 《인도 파괴에 대한 간단한 설명》(Brevísima relación de la destrucción de las Indias / A Brief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 제5장의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르테스 역시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처럼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촐룰라 학살'과 '톡스카틀 축제 학살'이다. 일부 학살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촐룰라에서 함정을 팠다고 기록하지만 해당 내용은 당대의 전투 기록이 아니라, 이후 코르테스 개인의 주장에 의거한 것이다.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원주민들이 직접 쓴, 나와틀어로 써진 증언을 첨부하여 나름대로 객관성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연대기 저자들은 코르테스가 말린체와 틀락스칼텍에게 속아 억울하게 누명을 쓴 촐룰라인들을 학살했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위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정황도 부정하기 힘들다. 이 사건은 통첩문을 읽어주지도 않은 채 바로 촐룰라 족장들을 쏴버리면서 진행되어 뒷날 코르테스의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코르테스의 앞뒤 행보를 보면 그게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못하고 음모를 꾸밀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경우 역시, 코르테스가 지휘권을 위임한 현장 지휘관이 저지른 학살이면 그 상위 지휘관이었던 코르테스에게 당연히 감독 책임이 돌아가야 할 문제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원주민들은 사냥개를 풀어서 잔혹하게 살해했고, 아즈텍의 통치권을 정당하게 부여받은 콰우테목의 발바닥을 불로 지져서 고문했던 것은 그 역시 악랄한 제국주의자들 중 하나였음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고, 문화유산에 대한 파괴를 자행하기도 했다. 이런 기조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많은 사제와 사관이 처형되고 문헌들이 불타서 현재도 메소아메리카 문화와 역사 연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결국 코르테스가 원주민을 유럽인과 같은 동등한 사람으로 대했다기보다는, 완전한 정복 이후에 전략적 관점에서 일부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코르테스가 다른 엔코미엔다에 비해 착취를 덜 하고 온건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막대한 공물을 착취하고 자기 영지의 궁전을 짓는 데 원주민들의 부역을 동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36] 애초에 엔코미엔다가 유럽의 봉건제를 멕시코에 이식한 것에다가 반란을 없애기 위한 탄압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었으니, 코르테스가 봉건 영주로서 봉건적인 통치를 수행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또 그렇게 부려먹은 영민들에게 영주로서의 보호의무를 수행한 것은 봉건제의 상식에서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이건 코르테스가 아주 현명했다기보다는 이 정도의 시대적 의무도 이행하지 못한 다른 콩키스타도르들이 상상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잔혹한 침략자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3.3. 전쟁 책임과 종합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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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 코르테스는 영웅인가? 아니면 침략자인가?
빼어난 능력과 큰 성취로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엘 시드의 뒤를 잇는,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기독교화의 주역인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한 때 지폐에 새겨질 정도로 19세기 전까지 코르테스는 라스 카사스 신부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확실히 코르테스 한 개인의 측면에서 그의 정치적, 군사적 역량은 당대에 뛰어난 축에 속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역사학과 피정복자인 원주민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민족주의 사관이 대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시의 스페인인들이 스스로를 영웅화하고 아즈텍 제국을 악마화하는 한편,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왜곡과 편견을 가미한데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착취했다는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코르테스는 강제 개종과 제국주의적 정복을 일삼은 악당으로 재조명되었다. 때문에 스페인계 정치인과 틀락스칼텍 등 친스페인파 지배층에 의해 코르테스 우상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당연히 나머지 다수 원주민들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혀야 했고, 1820년대에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코르테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주류가 되며 현재는 이런 우상화 시도 역시 흑역사로 취급되고 있다. 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전세계에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반성적 성찰이 급속도로 퍼지며, 그를 영웅시하는 시각은 침략의 당사자인 스페인을 포함해 적어도 학계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37]
결국 확실히 해야 하는 부분은, 에르난 코르테스는 그의 업적을 떠나 현대 사학계에서 초창기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는 코르테스의 침략 명분이 전근대의 정복자들과 같은 영토 확장이 아닌, 제국주의자처럼 금을 약탈하고 원주민을 착취하며 부를 취하겠다는 식민화 및 사업적 명분이 강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의 콩키스타도르는 외교권을 지닌 정부 주체가 아니었으며 동인도회사처럼 국가로부터 일종의 투자를 받는 용병 내지 군벌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르테스 자신이 무장집단을 이끌고 타국을 침략한 약탈자인 이상 전쟁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전개나 결과가 어쨌든 간에 신대륙의 부를 획득하려는 의도에서 선제공격과 침략을 감행했고, 아즈텍인들은 어떻게 보나 일방적인 피해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본국과 교황청의 식민화 및 무리한 카톨릭화 요구를 받아들여 무자비한 문화탄압을 감행한 것 역시 제국주의의 성질을 띄고 있다. 즉, 어디까지나 당대의 무식한 여타 군인 출신 콩키스타도르보다 온건했을 뿐이지, 그를 영웅으로 이상화하는 것은 아즈텍으로부터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현대 멕시코 입장에서는 명백히 식민사관에 해당하며, 코르테스 역시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마찬가지로 침략자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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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코르테스는 근대적인 제국주의 침략론 사상의 선구자인가?
코르테스가 초창기 제국주의적 침략의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하나임은 틀림없으나, 이 시절 시작된 제국주의적 침략과 19세기에 가시적으로 발생한 사상으로서의 제국주의는 다소 구분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제국주의는 언어로 쓰여진 사상보다 그 양상이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형태로 현실에서 먼저 실현된 정치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방식이 18~19세기 유럽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정당화되어 심화된 게 백인의 의무같은 제국주의 침략론이다.
중세, 전근대까지의 제국주의는 남미의 황금과 사탕수수, 동인도의 향신료처럼[38] 식민지가 경제에 명확하게 도움이 되기에 침략을 감행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나 근대적 제국주의 관념이 완전히 정착된 근대부터는 설령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타국과의 경쟁심리와 국가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식민지를 늘리고 유지하려는 기조가 나타났으며, 이는 프랑스의 횡단 정책,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과 같은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실상은 프랑스 아프리카 식민지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이라는 황당무계한 것이었고,[39] 무솔리니가 그렇게 공을 들인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는 그냥 이탈리아의 돈먹는 적자덩어리였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사회적 배경에 기인한다. 제국주의 침략의 시작은 코르테스가 활동한 시절인 대항해시대인데, 당시는 제국주의 침략론이 언어적으로 실체화되지는 않은 중세였다. 이 때는 유럽권이 전근대적인 식민주의에서 이제 막 탈피하여 신항로를 개척하고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를 지닌 아시아, 아프리카, 신대륙과 처음 조우하여 이들을 본격적으로 식민화하기 시작한 초기 제국주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즉, 중세 말에서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근대 초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극초반이었다. 따라서 그의 원정이 중세적인 영지화의 측면과 근대적인 식민화의 측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통시적인 관점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르테스를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보는 시각은 명백히 잘못되었지만, 아예 그를 제국주의 침략론의 선구자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치부하는 시각은 객관성이 부족한 관점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큰 역사적 맥락에서 제국주의의 시작은 당대 유럽의 신대륙 발견에서 비롯된 식민주의 광풍의 분위기에 원인을 두어야지, 그 흐름에 편승하여 개인적 성공과 영달을 추구했을 뿐인 코르테스라는 일개 콩키스타도르 한 명의 행보에서 모든 변화와 비극의 원인을 찾는 것은 학문적으로 부적합한 접근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시대적 전환의 스타트를 끊으며 세계를 휩쓸 제국주의 확산의 계기로 작용한 것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쟁적인 황금 수색이었으며,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의 탐험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실행된 것이었다.[40] 그리고 결과적으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의 성공은 '정복과 식민화, 야만인들에 대한 계도'라는 구도가 곧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성공과 국가적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당대 유럽의 제국주의적 분위기를 크게 고무시켰고, 이는 100년에 걸쳐 '정복하는 우월한 문명과 정복당하는 미개한 문명'이라는 이분법을 유럽인들에게 형성하여 곧 구체적인 근대적 제국주의 관념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코르테스의 성공은 분명 유럽권의 식민화에 대한 동기부여와 제국주의 열망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또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침략자들이 써먹은 문화왜곡 및 탄압과 강제개종 정당화론이 고스란히 유럽권의 제국주의 정당화론과 식민화 방법론으로 이어진 부분을 고려하면, 코르테스가 근대의 제국주의 사상에 아예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에르난 코르테스를 근대적 제국주의 침략론의 시조라고 보는 시각은 과장된 주장이겠지만, 코르테스의 정복 활동 자체만큼은 수많은 비서구권 국가들이 식민화로 인해 받는 고통을 정당화하게 되는 19세기 제국주의 침략론이란 구체적인 사상이 태동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친 다수의 원인들 중 하나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3.4. 멕시코 현지의 평가
상술했듯이 영웅 취급을 받았던 것은 제국주의가 성행하던 시절의 옛말로, 학계의 연구에 따라 그의 악행들이 재조명되며 현재는 전반적으로 나쁘다. 다만 계층에 따른 이해관계로 굳이 정리하자면 소수의 부유층인 스페인계 백인 계층들 사이에서는 좋은 평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나쁜 평가, 그리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들 사이에서는 전반적으로 무관심 혹은 '나쁜 놈이었긴 해도 너무 오래된 일이니까 내 알 바는 아니지' 정도의 인식이 있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한마디로 현대 미국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받는 취급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1946년 코르테스의 유골이 재발견되었을 때[41]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콰우테목 동상 앞에서 화형에 처한 뒤 뼛가루는 공중에 뿌려버려야 한다고 분개하기도 했다.[42][43] 현재 코르테스의 유골은 그것이 보관되어 있었던 병원에 딸린 성당 벽에 묻혀 있는데, 위의 사례를 보다시피 원주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이 유골을 파괴하려 올지 모르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는 이 구역의 사진 촬영이나 관광을 일절 금지하고, 취재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1981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가 코르테스 흉상을 제막하는 등 코르테스 재평가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상은 얼마 뒤 원주민 민족주의자들에게 파괴당했다. 포르티요는 이듬해 1982년에 한 차례 다시 코르테스 기념상 제막을 시도했다. "메스티소 기념상(Monumento al Mestizaje)"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기념상은 코르테스 뿐 아니라 말린체와 두 사람의 아들인 마르틴까지 포함된 가족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기념상은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항의 시위가 계속되어 외딴 곳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사회적 평가에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멕시코에서 코르테스에 대한 평가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정치적인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는 점이다. 가령 멕시코에서 원주민들은 빈곤 계급이며 또한 인종차별의 대상이다. 과거 코르테스를 메스티소(그중에서도 현지의 상대적 부유층)의 아버지로 재평가하려 했던 시도와 그에 대한 저항에는 여기서 결부되는 계급성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한다. 즉, "메스티소 전통을 지지하기에 스페인(또는 코르테스)의 유산을 어느정도 인정"한다는 것이 단순히 혈통적으로 메스티소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서의 주류 백인 즉 " WASP(미국)"의 위치에 서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44]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라도 객관적 역사를 따나서 계층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평가가 갈릴 수 있다는 이야기. 때문에 멕시코 내에서 코르테스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일 때는 이러한 인종적, 계급적, 정치적 갈등을 고려해야 한다.
4. 가계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카탈리나 수아레스 마르카이다(Catalina Suárez Marcaida)와는 사별하여 재혼했고,[45] 두 번째 부인은 스페인 본국의 백작 영애였던 후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데수니가(Juana Ramírez de Arellano de Zúñiga)였다.- 후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데수니가(Juana Ramírez de Arellano de Zúñiga)
- 루이스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아레야노(Luis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 사산
-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수니가(Catalina Cortés de Zúñiga): 사산
- 마르틴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아레야노(Martín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46] - 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이라미레스 데아레야노(Ana Ramírez de Arellano y Ramírez de Arellano)[47]
- 마리아 코르테스 데수니가(María Cortés de Zúñiga )- 루이스 데퀴뇨네스 이 피멘텔(Luis de Quiñones y Pimentel)[48]
-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수니가(Catalina Cortés de Zúñiga)
- 후아나 코르테스 데수니가(Juana Cortés de Zúñiga) - 페르난도 엔리케스 데리베라 이 포르토카레로(Fernando Enríquez de Ribera y Portocarrero)[49]
적장남이었던 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는 부친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으나 누에바에스파냐의 국왕이 되겠다고 배다른 형 마르틴을 비롯한 형제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스페인 군대에 탈탈털리고 땅까지 빼앗겼다. 원래 사형당해야만 했으나 아버지가 애를 쓴 덕에 목숨만은 건졌다. 반역 혐의로 한창 고문받던 도중에 카를로스 1세가 마르틴 코르테스의 고문관을 방문했고, 다음날 코르테스가 석방됨과 동시에 고문관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휘하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스페인에서 사망했다. 스페인 국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 에르난 코르테스와는 달리 모국인 스페인에서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코르테스의 자손들은 아직도 스페인에서 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자 계통 혈통이 자주 끊겨 '코르테스'라는 성을 직접 쓰지는 않지만,[50] 어쨌든 바예 데 오아하카 후작 작위를 가지고 여전히 귀족으로 대접받고 있다. 멕시코에서도 귀족이었지만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에서는 더 이상 귀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 레오노르 피사로: 쿠바 식민개척민 여성
- 카탈리나 피사로(Catalina Pizarro) 1514년~1515년 - 후안 데살체도[51]
- 페트로 데살체도
- 말린체
- 마르틴 코르테스(Martín Cortés) 1522년 - 베르날디나 데포라스(Bernaldina de Porras)
- 아나 코르테스
- 페르난도 코르테스(Fernando Cortés)[52]
- 안토니아(Antonia)(카세레스 원주민)/엘비라 에르모시요(Elvira Hermosillo)
- 루이스 코르테스(Luis Cortés)
- 이사벨 목테수마
- 레오노르 코르테스 목테수마(Leonor Cortés Moctezuma) - 후안 데톨로사[53]
- 아즈텍 왕녀
- 마리아 코르테스 데목테수마(María Cortés de Moctezuma)
이외에도 원주민 현지처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이 있었는데, 이 중 애인이었던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르틴 코르테스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메스티소이다. 마르틴 코르테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적자로 인정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부친인 코르테스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일단 코르테스가 교황에게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탄원을 했을 뿐더러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 역시 사생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전부 인정된 것은 아니고 4명이 인정되었는데 코르테스는 죽기 직전 자신의 현지처들과 자식들을 보살피라고 당부했다. 이 때문에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 메스티소의 시조라고 불린다.
코르테스의 16대손인 아스카니오 피냐텔리가 500년만에 목테수마 2세의 14대 후손인 페데리코 아코스타와 만나 화해의 장을 가졌다. #
5. 기타
카카오를 처음 먹어본 구대륙 인물이기도 하다. 코르테스가 남미에 있었던 기간 동안 자연히 카카오를 섭취해 그 효능을 몸으로 느껴본 뒤, 훗날 스페인에 가져와 카를로스 1세에게 진상해 귀족들과 상류층 사이에서도 퍼지게 되었고, 온 유럽에도 카카오가 전파되었다. 하지만 카카오 자체는 원체 쓴 맛이 강해 호불호가 극명했고, 이를 보다 먹기 쉽도록 설탕을 넣어 먹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달달한 초콜릿이 탄생하게 되었다.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와는 7촌 관계의 친척이었다.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었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에르난도 알론소 데이노호사(Fernando or Hernándo Alonso de Hinojosa)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였다. 딱히 신기할 일은 아닌 것이,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 관계로 얽히고설킨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평가가 갈리는 코르테스에 비해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하는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안 좋다. 이는 해당 국가들이 비록 메스티소 인구가 많긴 해도 각국의 전체 인구 중 메스티소가 아닌 순수 아메리카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54] 이렇다 보니 페루와 볼리비아의 백인들과 메스티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를 대놓고 찬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개인사를 보았을 때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있다. 특히 첫 번째 아내였던 카탈리나 후아레스와는 관계가 매우 나빴으나 그녀가 죽고 나서 재혼한 두 번째 아내 후아나 데수니가와의 부부관계는 좋아서 3명의 자녀를 낳았다. 원주민 처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해 달라고 교황에게 탄원하여 그 중 4명이 적자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보통 이런 식민지에서 난 사생아들의 경우 적자로 인정받는 일은 드물었고, 아예 잊거나 무시하고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서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후아나와 그녀 소생의 자식 3명에게 현지처와 자식들에 대해서도 잘 돌봐달라고 죽기 직전에 당부까지 했을 정도였다.
업힐/멕시코/멕시코주/멕시코 수도권 항목에 있는 파소 데 코르테스 업힐이 바로 촐룰라를 함락한 에르난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으로 갈 때 이용한 길이다. 물론 멕시코 수도권의 자전거 라이더들은 아메카메카에서 파소 데 코르테스로 갔다가 다시 아메카메카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고, 촐룰라 방향으로는 오프로드라는 사정상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에르난 코르테스는 촐룰라에서 아메카메카 방향으로 향했다. 파소 데 코르테스 정상에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 길을 이용하는 장면의 동상이 있다. 지금은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멕시코시티 ~ 푸에블라 이동에 사용되고 있으며, 한때 베라크루스로 갈 때도 이 길이 사용되었으나, 150D번 고속도로보다 북쪽에 있는 멕시코 136번 국도가 왕복 4차로로 확장 개통한 뒤에는 답없는 쿰브레 데 말트라타 (Cumbre de Maltrata) 구간을 버리고[55] 이쪽을 경유한 뒤 멕시코 140D번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한다.
아즈텍 원정 도중 부하 하나가 현지인에게 중범죄를 저질러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부하를 살리면 현지인의 민심을 잃을 것이 뻔했고, 죽이자니 부하들의 불만을 살 가능성이 컸다. 이 때 타협안을 내놓는데, 일단 죄인을 나무에 매달아 교수형을 시키고, 멀리 떠났을 때쯤 죄수가 진짜로 죽기 전에 재빨리 구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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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등장인물인 코르테스 백작은 바로 이 코르테스가 모티브이다.[56]
신대륙의 비밀인 5대 원소를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같은 10인 귀족인 몬토로에게 배신을 당해 석화되고 만다.
- 닐 영의 곡인 <Cortez The Killer>는 코르테스의 행적을 까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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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육맨>에서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갑옷을 착용한 거한의 초인인 것으로 나오며, 잉카 제국 군사들을
아즈텍이 아니라?죄다 레슬링 기술로 관광보내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근육맨> 세계관에선 콩키스타도르가 죄다 레슬링 기술 하나씩은 구사할 줄 아는 초인이었나 보다변기맨의 부모가 코르테스에게 살해당하자 분노한 변기맨이 그에게 덤벼들었다가 그의 레슬링 기술을 맞고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채(...) '헤라도맨'이란 이름의[57] 초인으로 살다가 '히간테맨'[58]과의 경기를 통해 '변기맨'으로 각성하게 되었다.
- 콜린 팔코너의 소설 《깃털 달린 뱀》의 주역으로, 자신을 케찰코아틀 신이라 믿는 말린체의 도움을 받아 간교한 술수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다.
- 스팀 상점에 있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HD 판의 유저 창작 모드에서 코르테스의 아즈텍 탈출맵을 구독해서 할 수 있다.
- < 문명 5>의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나온다. 중남미 국가로 플레이하다가 코르테스가 나오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 < Fate/Grand Order>에서는 케찰코아틀이 마테리얼 4권에서 ●●●● · ●●●●에게 피를 고통스러운 맹독으로 바꾸고 태양풍으로 뼈만 남긴 다음 영혼을 해골에 고정시킨 채로 10,000년 동안 지하 명계에서 노동을 시킬거라며 아주 지독한 저주를 퍼붓는데, 저 인물이 에르난 코르테스(エルナン ·コルテス)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 황금수해기행 나우이 믹틀란>에서 코토미네 키레이가 주인공 일행과 가이드로 동행하는 원주민 테페우에게 범인류사의 중남미 문명의 산제물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에 없는 총과 기병, 산제물 의식을 거부하는 선신 케찰코아틀의 재래라는 소문을 퍼트려 몬테수마 2세를 속이면서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점거하고, 노예와 산제물로 잡혀가던 주변 부족들을 포섭해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고 언급한다. 코토미네가 말하길, 유능한 왕인 몬테수마 2세가 단순히 속은 건 아니고 산제물 의식을 계속 유지하다간 언젠가는 주변 부족들에게 아즈텍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코르테스를 포섭해 산제물 의식을 폐지하려 했지만, 말린체가 코르테스의 정부가 되면서 코르테스와 주변 부족들이 아즈텍을 멸망시키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몬테수마 2세의 영혼이 환생한 존재가 이 일로 인해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면서 범인류사 자체를 증오한다.
- <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에서 주요 보물인 '아즈텍 금화'의 기원을 헥터 바르보사가 엘리자베스 스완에게 설명해줄 때 언급된다. 여기서 코르테스가 아즈텍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금화들을 차지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신들의 저주를 받아 그 금화를 가진 자들은 모두 언데드가 되는 저주에 걸리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제독 캐릭터로 등장하며, 다른 제독 캐릭터인 사이이다 알 후라의 연대기에도 조력자 격 선역 캐릭터로 잠깐 등장한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코르테스를 이런 캐릭터로 그렸다면 수많은 항의를 받았을 것임을 생각하면 그동안 아즈텍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7. 참고 문헌
-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 2권, 에르난 코르테스 저, 앙헬 고메스 편, 김원중 역, 나남, 2009년.
8. 관련 문서
[1]
출처 유골 조사 결과 키가 158cm 정도로 측정되었지만 키가 줄어드는
파제트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어 발병 이전의 키는 163cm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2]
퀸테로는 개인적인 부를 챙기고자 상관들을 통수치고, 일정보다 먼저 신대륙으로 건너갔는데, 코르테스의 향후 행적은 이것을 보고 배운 것 같다.
[3]
이 때문에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얻은 경험으로 아즈텍을 정복했다는 일부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4]
당시
스페인인들은 유카탄 반도를 섬으로 알았고, 때문에 코르테스는 보고서에서 유카탄 섬으로 보고했다.
[5]
신대륙을 발견할 때
스페인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여기를
인도로 알았다.
[6]
당시 인도 부왕은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론(Diego Colón)이었다.
[7]
출처:에르난 코르테스,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장 첫 번째 보고서, 앙헬 고메스 편집, 김원중 번역.
[8]
이는 코르테스가 주장한 것이다.
[9]
재미있는 사실은 코르테스가 그의 보고서에 자신을 폐하의 원정대장으로 자칭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만 쓰거나 총독을 자칭했는데, 사실 코르테스는 국왕
카를로스 1세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받지 않았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항명&반란이었다.
[10]
다만 속설처럼 원주민 대부분이 이들을 환영했다는 자료는 과장된 자료다. 실제로는 아즈텍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후반에 합류한 부족이 더 많았다.
[11]
마을을 굳이 조성한 이유는, 나중에 카를로스 1세를 알현할 때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왕께 영토를 바치려고 했습니다.'라고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베라크루스 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광할한 영토를 갖다 바치게 되지만(...).
[12]
특히
기습을 잘 사용했다고 나오는데, 이런 방식은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군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잘 사용한 것처럼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상대하는 데 유용한 전술술이다.
[13]
여기까지가 코르테스의 기록이다. 틀락스칼텍인들은 자신들의 사신이 촐룰라에 갔다가 고문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코르테스가 해 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아즈텍은 틀락스칼텍인들이 코르테스를 부추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에 대한 틀락스칼텍인들의 증오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14]
여기서 스페인 측의 기록에 따르면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라는 의미의 환영사를 했다고 하지만 이게 와전된 것인지 공포스러운 침략자를 달래고자 한 건지는 논란거리이다.
[15]
코르테스에게 제국의 심장부를 덜컥 내어준 몬테수마 2세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콩키스타도르들의 경계가 풀어지기까지 최대한 기다렸다가 기습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황제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는 하나 어쨌든 수십만 명의 아즈텍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으므로 일단 전투가 벌어진다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살아나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 되었다.
[16]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테라스에 내보낸 몬테수마 2세마저 오히려 아즈텍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거나 혹은 사망했다. 자세한 건
슬픔의 밤 참고.
[17]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를 이은
펠리페 2세도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18]
#, 송영복. (2002). 멕시코의 역사 속에 나타난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인물들에 대한 시각과 비판 - 과우테목과 코르테스를 중심으로-. 스페인어문학,(24), 0-0.
[19]
이를
토마스 아퀴나스와 현대의 정의전쟁론에 결부시켜 옹호하는 이들이 있는데, 애초에 콩키스타도르의 침략은 이 입장에서 봐도 명분과 전개가 한참 선을 넘은 행위였다. 코르테스와 스페인의 의도가 정의전쟁론에 따라 순수했다면 정말 딱 인신공양만 없애고 물러나야 함이 자명하다. 심지어 이런 시대를 앞서간 선진적 주장을 펼친 아퀴나스는 해당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태어난 중세 초의 학자였으며, 해당 학자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가톨릭이 이 이론을 몰랐을 리도 없다.
[20]
이성형. (2009). 서평 : 정복하는 자아의 탄생 -에르난 코르테스/김원중 역,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 2』(나남, 2009)-. 서양사론, 101(0), 261-264.
[21]
아예 뿌리가 같으면서도
30년 전쟁까지 벌이던
구교와 신교의 대립 등.
[22]
가령 한국인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보고 '대륙 진출, 고구려 최대 판도'라며 칭송하지만, 냉정히 보았을 때, 이전에 만주에 거주하던 여진족 등의 토착민 입장에서는 침략이었다.
[23]
사실 그 당시는 유럽도 중앙통제식이 아니었고, 여전히 봉건제와 지방자치가 이루어지는 판국이었는데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중앙통제가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24]
황제와 황후를 능욕한 사건은 프란시스코 피사로 본인이 아닌 그 동생
곤살로 피사로가 한 짓이었지만, 결국 그 곤살로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이 프란시스코 피사로 본인이었으므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25]
유럽권이 벌인 식민화와는 결이 다르다. 그리고 인육 조공을 받았다는 설은 낭설이다.
[26]
당시
유럽에 이런 대도시는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미
흑사병의 타격을 받은 직후에도 인구 20만 명을 유지하던 거대도시
파리가 있었다. 그밖에
제노바나
베네치아 등 인구 10만 명 이상을 유지하던
이탈리아 대도시들도 많았다. 본 시점에서 70여년 전쯤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가 전성기 때 50만 명을 넘겼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유럽 기준으로 보아도 테노치티틀란은 상당한 대도시였다.
[27]
그나마 대형가축이 흔했다면 이로 인간을 대체할 여지가 있었겠으나, 메소아메리카는 이마저도 부재했다.
[28]
코르테스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휘하의 스페인 병사는 906명(기병 86기, 석궁병과 화승총병 118명, 칼과 방패를 든 보병 700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동맹 원주민 군대는 총합 125,000명에 달했다.
[29]
후술하겠지만 다른 침략자들이 코르테스보다 선해서 비겁한 수를 안 쓴 게 아니라, 코르테스만큼의 전문 지식이 없어서 아즈텍같은 큰 나라에는 쓸 엄두를 못냈거나 앞뒤 안가리고 일을 벌이다가 본국에 찍혀서 먼저 몰락한 것이다.
[30]
왜 법률 지식이 중요하냐면 상관의 동의없이 무단으로 원정에 나선 그가 명분에서 우위를 점하고, 국왕 카를로스 1세의 눈에 들기 위해선 법적으로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서 법학을 이수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여지지만 법률적 지식은 아주 해박해서
베라크루스 조성부터 시작해 아주 교묘하게 줄타기를 했다.
[31]
속국들이 과한 조공으로 박해를 받았다는 점은 어느정도 사실인 부분이 있지만, 백성이 탄압받고 있다는 부분은 확실히 아즈텍 왕실을 악마화해서 지원을 받으려는 의도의 선동이다. 정작 이때 핑계로 댄 착취는 정복 이후의 스페인이 아즈텍보다 더 심했다는 게 함정.
[32]
이에 대해 코르테스는 자신이 주도했다고 적고 있으며, 반대로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고마라는 코르테스가 결단을 내린 건 맞지만 가까운 부관들과 상의해 동의를 구한 뒤 행한 일이었다고 적었다.
[33]
피사로가 잉카를 정복할 때, 코르테스의 조언을 받은 덕분에 손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렇게 조언을 받았음에도, 피사로는 잉카 지역 통치에 있어서 코르테스보다 더 많은 실책을 저질렀고 그만큼 피해도 코르테스의 원정군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적지는 않았다.
[34]
이때 코르테스가 밤에 몰래 밀랍으로 대포를 막아 나르바에스의 포병들이 손놓고 당했다는 설이 떠도는데, 이는 소설에서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는 나르바에스 쪽에서 빗물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막아놓았으며, 나르바에스의 포병들은 코르테스의 특공대에 맞서 상당히 격렬하게 싸웠지 코르테스의 특공대가 들이닥쳤다고 냅다 대포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하진 않았다.
[35]
특히 원주민과 정복자들을 잇는 중간매개로 엔코미엔다 지배체제에 편입된 원주민 상층 계급은 기존에 나눠 받던 공물 수입을 살라사르에게 거의 다 빼앗겼다. 그전에 주어지던 옷, 음식, 황금, 연료, 부역 혜택이 사라졌으며 엔코미엔다의 원주민 전체가 멕시코 시에 있는 살라사르와 그의 부인 및 집사들이 살 집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1530년에는 살라사르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게다가 배에 싣기 위해서 베라크루스로 살라사르의 물건들을 운반하느라 200명이 넘는 원주민이 죽었다.
[36]
김윤경 (2013), <16세기 아스테카 제국의 정치적 식민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37]
한때 한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아즈텍의 잔혹한 인신공양 유적 때문에 코르테스가 사학자들에게 재평가 받았다는 유언비어가 퍼졌었으나, 해당 썰들은 과장 및
작성자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낭설로 가득 차있는 데다가 학계에서 코르테스가 재평가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사실무근이다.
[38]
동인도 회사 문서 참조.
[39]
현 시점에서야 사하라 사막에 상당한 자원이 잠들어 있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광물 자원의 산출량이 늘고 있으며
태양광 발전의 적합지라는 입지라도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까지만 해도 사하라 사막은 그냥 똥땅이었다.
[40]
역설적이게도, 이 두 국가는 황금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천연자원의 중요성을 괄시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전한 순간 몰락했다. 그래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에는 무적함대의 자리를
대영제국과
프랑스에 넘겨주고 만다. 어떻게 보면 남미에서 행한 무자비한 탐욕과 탄압의 대가를 치뤘다고 볼 수 있는 부분.
[41]
왜 "재"발견이냐 하면 멕시코 독립 직후, 원주민 정권에게 파괴당할까봐 유골을 소장하고 있었던 병원 측에서 숨겨버린 뒤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페인에서도 몇 사람만 알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중 한 명이
스페인 내란의 여파로 멕시코로 망명하면서 지배층에게 잘 보이려고 소재를 공개했다.
[42]
Benjamin Keen, 《The Aztecs Image in Western Thought》,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1971, p 468 .
[43]
당시 백인 계열과 일부 메스티소가 영묘까지 만들어 환영하긴 했다. 다만 그때보다도 코르테스에 대해 부정적 평가가 큰 지금 이러면 욕을 무진장 얻어먹을 것이기에 현재는 설령 상류층 백인 계열이라 해도 대놓고 칭송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44]
이는 멕시코 뿐 아니라 칠레, 아르헨티나 등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문제이다.
[45]
코르테스와는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던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의 처제였다. 게다가 카탈리나는 자식을 가지지 못했고, 코르테스가 원주민 처들과의 사이에서 혼혈 자식들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부부관계가 매우 나빠졌다. 그래서 카탈리나가 죽은 당시부터 코르테스가 암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카탈리나 사후 그녀의 형제들이 살인 혐의로 코르테스를 고발하여 그는 수사를 받아야했다. 물론 코르테스가 부인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없어 수사는 종결되었으며, 증거불충분을 인정받아 코르테스가 승소했다.
[46]
현재는 단절되었다.
[47]
마르틴의 6촌.
[48]
제5대 루나 백작.
[49]
제2대 알칼라데로스 가술레스 공작.
[50]
스페인식 이름은 외가들의 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데 포함되기는 한다.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의 작위 계승을 인정했다.
[51]
정복자이자 엔코멘데로였다.
[52]
베라크루스에서 법관으로 재직했으며, 오늘날에도 멕시코에 후손이 남아 있다.
[53]
바스크의 상인.
[54]
특히 적당히 유화책을 시전하기도 했던 코르테스와 달리, 피사로 일가는 훨씬 더 강압적이고 난폭하게 잉카인들을 복속시켰다. 그 중에서도
곤살로 피사로는 자기 위치만 믿고 당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망코 잉카에게 인권유린을 시전한 바 있었다.
[55]
과거 기름도둑 (huachicolero)이었으며, AMLO 행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인해 컨테이너 및 버스를 대상으로 강도짓을 벌이고 있다.
[56]
풀네임이 똑같은 걸 보면 확실하다.
[57]
'헤라도'는 스페인어로 '아이스크림'을 의미한다. 당시 변기맨은 지금의 잔학초인이 아닌 수수한 관절기로 상대의 기브업을 유도해 승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는데 관중들은 이 방식이 마치 아이스크림마냥 밍밍하고 재미없다며 면전에서 비난하곤 했다.
[58]
'히간테'는 스페인어로 '거인'을 뜻한다. 여담으로 히간테맨이 변기맨의 회상속에서 나온 코르테스와 모습도 흡사하고 사용 기술도 유사한 걸 보아 코르테스의 후손일 수도 있는데 변기맨과의 경기에서 그의 필살기인 공포의 변기 흘려보내기의 영광스러운 첫 제물이 된 걸 감안하면 변기맨은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자신의 기억도 잃게 한 원수의 후손을 쓰러트려 복수에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