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1:00:52

구르카

구르카 용병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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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e0055563_4f17eed639bff.jpg
완전군장을 한 구르카 용병의 모습
Bravest of the brave, most generous of the generous, never had country more faithful friends than you.
(용감한 자들 중 가장 용감하고, 관대한 자들 중 가장 관대한 그대들만큼 충실한 벗을 이 나라는 가져본 적이 없노라)
랄프 릴리 터너 경(Ralph Lilley Turner)[1]

고르카(गोर्खा, Gorkhā), 고르칼리(Gorkhali) 또는 구르카(Gurkha)는 영국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외인부대 가운데 네팔 인도 북부 출신의 군인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구르카라는 명칭은 네팔 왕국의 지역이었던 '고르카'에서 온 것으로, 이는 중세 인도의 전사이자 지도자였던 구루 고락나트(Gorakhnath)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후 고르카는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별칭이 되어, '네팔 왕국'을 '고르카 왕국' 또는 '고르카 제국(Gorkha Empire)'이라고도 불렀다. 이에 관해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이 명칭이 '네팔의 산간지대에 사는 어떤 한 민족인 구르카족'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특정한 민족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며, 영국에서 네팔인이나 셰르파, 인도 북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두루 이르던 명칭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세계 최고의 고산지대에서 살아왔으며, 덕분에 일반인이라면 정신도 못 차릴 고지대에서도 뛰어다닐 만큼 심폐량이 높으며, 그에 따라 신체능력도 당연히 뛰어나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수한 용병으로 유명한데 네팔의 3대 수입원으로 마약, 관광[2], 구르카 용병을 꼽을 정도다. 이들은 네팔 전통 칼인 쿠크리를 사용한다.

영국 육군의 2개 구르카 대대 중 1개 대대는 브루나이에 주둔 중이며, 브루나이군에서도 자체적으로 구르카병을 모병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예비대(Gurkha Reserve Unit)가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 육군도 자체적으로 구르카병을 모병하여 10만 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다. 싱가포르 경찰도 영국 육군에 모병을 위탁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다.[3]

2. 구르카 용병의 역사

네팔 왕국과 동인도회사 간에 벌어졌던 구르카 전쟁(1814-1816) 중 영국은 자신들이 구르카로 칭한 고르칼리 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평화 협정에 따라 고르칼리군은 동인도회사 군대와 계약하여 이들로 합류하게 된다.

전통적으로는 네팔 산간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체트리(타쿠리), 머거르, 구릉의 사람들이 영국과 맞서 싸운 원조 구르카이다. 브라민( 브라만 네팔에서는 브라민이라고 부름), 셰르파·따망 들은 입대가 허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구르카는 모든 네팔의 부족들로 이루어져있는데 기존의 구릉, 머거르, 체트리(타쿠리) 외에도 라이, 림부, 셰르파, 따망, 네와리 등이 속해있다.

원래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4]를 창설해 유지해 왔으나, 인도 및 홍콩, 아프리카 등 자국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현지인 부대도 대부분 해체했다. 그러나 오직 구르카 용병 부대만은 해체하지 않은 채 지금도 2개 대대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 구르카 부대 창설 이래의 전사자도 만여 명에 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영국 육군의 일부로 정글등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활약했다.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나라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1962년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브루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싱가포르에 주둔한 구르카 부대가 투입되어 반란을 진압했다.

포클랜드 전쟁 때는 일부 아르헨티나 육군 병력들은 구르카 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항복하거나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또한 영국 육군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최근에도 여전히 중요한 전투부대 중 하나이다.

1990년대 후반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에서 인도 육군 소속 구르카병들이 파키스탄 육군과 대적하여 이름을 날렸다.

2.1. 영국과의 전쟁

1803년 이래 네팔의 구르카 정부는 인도의 국경지대를 노골적으로 침범하여 영국을 도발했다. 특히 인도 북부의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의 촌락을 약 200개나 병합하고 갠지스 강 상류까지 침략할 기미를 보였다. 인도 총독 민토 경(卿)은 이 지역은 영국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네팔은 계속 권리를 주장하여 양도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부임한 총독 모이라 경이 비상수단으로 현지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강경한 태도로 임하였다.

당연히 네팔인들은 가만있지 않고 1814년에 그 경찰서를 습격, 18명의 경찰관을 살해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도 이에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하여 네팔로 진격시켰다. 히말라야 산맥의 험난한 지세를 이용한 네팔인들은 여러 성새(城塞)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영국군은 초전에 고전하였으나, 서틀레지 방면으로 진격한 사령관 D.옥털로니의 분전으로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고 구르카군의 최후거점인 마룬 등의 요새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한다. 패배한 구르카 측은 항복하여 영국과 사가우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교원에서 출간한 랜드 앤 피플에 따르면 이 당시 영국군은 구르카 족의 용맹함에 치를 떨면서도 영국 측에게 점심 먹을 시간이니 전투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당신들의 티타임 동안에는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네팔인의 매너에 감탄했다는 모양.

특히 네팔인 군인의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영국군을 향해 계속 칼을 휘둘렀다든지,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쿠크리 하나를 들고 왔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적혀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휴식시간에 영국이나 구르카 족이 서로 간의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훈훈한 광경도 나왔다는 모양. 어쨌든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네팔인이 적이었으나 그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그 결과 영국군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2.2. 영국군이 된 구르카

이들이 맹활약한 전투로 알아주는 게 세포이 인도용병대들의 반란을 진압한 전투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1차 전쟁(1839~1842)에서 호되게 털린 영국은 당시 영국군 및 인도계들로 이뤄진 영국군이 전멸(딱 1명만 살아 돌아옴)당한 것을 교훈삼아 산악전의 고수인 구르카병을 2차 전쟁이 벌어진 1878년에 대거 파병했다. 그리고 카불 점령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20만이 넘는 구르카병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이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먼저 진격하며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물론 4만에 이르는 구르카병이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의 피해도 컸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이 대거 파병 나갔지만 영국은 1차대전의 피해도 엄청났던 터에 여기에 총력을 다할 수 없어서 지원도 흐지부지된 상태였고, 몇달 안 가 전쟁은 대충 끝났던 탓에 구르카군은 2차 전쟁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구르카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제2차 세계 대전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별다른 사진 자료나 취재 기록이 없었던 거랑 다르게 2차 대전에서는 상당한 자료와 취재가 이뤄졌기 때문.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장병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주기적으로 기습해 장병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실제로 이들의 전과를 의심하여 참호 구축이나 화장실 청소나 하라고 비아냥댄 영국 육군 장교 앞에 적군에게서 따온(?) 귀를 한바구니 보여주기도 했다.[5] 일본 육군은 정글전에 능해서 영국 육군 지휘관들이 정글에서 싸우기를 꺼려 했는데, 그러자 구르카 용병은 이 정글에서 일본 육군을 겁내지 않고 맞서 싸웠고, 엄청난 활약들을 하였다.

구르카 용병들은 일본군 상대로 특히 많은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로 Agansing Rai 아간싱 라이라는 제5왕실구르카소총연대 2대대 소속 하사(Naik는 영국군 계급으로 Corporal이다. 영국군/계급에서 보이듯 이 계급부터 부사관 대우를 받는다.)의 활약을 들 수 있다. 임팔 전투 중인 1944년 6월경, 비셴푸르 근처 마을에서 일본군에게 'Water Piquet'라는 곳, 그리고 'Mortar Bluff'라는 2개 거점이 점령당했고 일본군은 여기에서 영국군 간의 소통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사가 속해 있던 중대는 2개 거점 탈환 임무를 받은 상태였지만, 영국군의 사전포격이 있었는데도 일본군은 Mortar Bluff에서 기관총 화망을, 그리고 정글에서 37mm포[6]를 퍼부어 중대에 많은 사상자가 난 상태였다.

이 때 하사는 돌격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Mortar Bluff의 기관총 진지로 돌진하여 분대원들의 엄호 하에 진지에 있던 4명의 일본군 중 3명을 죽였다. 하사의 분투에 사기가 올라간 분대원들은 같이 돌격하여 Mortar Bluff의 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를 보고 Water Piquet의 일본군과 정글에 있던 일본군은 Mortar Bluff를 향해 기관총과 대전차포를 발사했으나 하사와 그의 분대는 우선 정글로 돌진하였고, 엄청난 화력 때문에 하사를 포함하여 3명만이 대전차포 진지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사는 여기에 있던 5명 중 3명을 죽였고, 분대원 2명이 나머지 2명을 죽였다.

대전차포 진지가 점령된 것을 보고 중대에서 Water Piquet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사이, 하사와 그의 분대원들은 Mortar Bluff로 돌아와서 한 벙커에 있던 일본군이 (엄폐해 있던) 다른 중대원들을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고, 분대원들의 브렌 경기관총 엄호를 받으며 수류탄과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벙커로 돌진하였다. 하사는 벙커 안에 수류탄을 까넣은 다음 톰슨 기관단총을 난사하여 벙커 안의 일본군 4명을 전부 사살했다. 하사의 깡과 용기를 보고 Water Piquet에 있던 일본군은 모랄빵이 나서 전부 도주했고, 중대가 돌격하기 전에 Water Piquet이 접수되었다.

당연히 아예 불리한 전황 자체를 뒤집어버리는 용기를 보여준 라이 하사는 빅토리아 훈장을 수훈받았다.[7] 그런데 공식 기록이 이 정도면 실제로는 Mortar Bluff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일본군을 사살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사례로 Lachhiman Gurung 랏치만 구룽이라는 제8구르카소총연대 4대대 소속 이병(밑에 적힌 대로 진급했지만, 당시 계급은 Rifleman이다. 현재 영국군의 Private에 대응되므로 이병이다)이 있는데, 구룽 이병은 1945년 5월 12일, 버마에서 소대 최전방 전초기지에서 자신 포함 3명과 같이 주둔하다가 새벽 1시경에 200명, 즉 1개 중대 규모나 되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구룽이 있는 전초기지는 그가 속한 중대 본부로 가는 유일한 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이 전초기지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일본군은 처음에 (아마 대포가 없어서) 포격 대신 많은 숫자의 수류탄을 투척했다. 구룽은 참호에 들어온 수류탄 3개 중 2개는 되던졌으나 마지막 한발이 그의 오른손 안에서 폭발해 동료 2명이 중상을 입어 전투 불능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도 오른손가락이 절단되고 오른팔이 작살나고, 안면과 오른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왼손으로 소총을 들고 31명을 사살하며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버텼다. 참고로 이때 소대 전체 일본군 사살 수는 87명이었다…그의 참호가 점령되었으면 소대는 전멸했겠지만, 그가 버틴 덕분에 결국 소대는 방어에 성공했고, 그도 살아남았다.[8]

이게 정말 대단한 게, 당시 영국군 소총은 거의 대부분 볼트액션인 리-엔필드였을 것이고, 아무리 리-엔필드가 볼트액션 치고는 연사력이 빠른 편이라지만 한 손으로 발사 및 장전을 하면서 지속적인 사격을 했고 그걸 또 지정사수 수준으로 31명 사살을 해낸 것이다. 대신 후송되고 나서 부상 후유증으로 오른눈을 잃고 오른팔도 잃었다. 그래도 이 공적으로 1945년 12월 영국군은 중사(Havildar, 영국군 계급으로는 Sergeant로, 중사이다) 진급 및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는 2년 가까이 군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군인 신분을 유지했다. 1947년 그는 비로소 움직일 정도로 몸을 회복했지만 팔 하나와 눈 하나를 잃은 이상 더 이상은 군인으로 복무는 힘들었다.

그래도 영국군 측은 상사로 특별진급을 시켜 예편시켰고 구르카병이 아닌 영국군 상사 연금(이는 일반 구르카병보다 훨씬 더 많이 받는다)을 수여하기로 했다(현재는 영국군과 구르카는 동일한 연금혜택이 있음). 영국군 상사 계급으로 연금을 받고 빅토리아 훈장도 받아 고향 네팔로 가서 농장을 운영하며 풍족히 살았다. 두 번 결혼으로 네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도 구르카병 시험에 합격하여 바로 그가 복무했던 8구르카소총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가 제대했다.

잊혀지던 구룽은 1990년대 와서 영국군이라면 이 정도로 잊혀질 수 없다고 화제가 되면서 다시 재조명받는다. 초청을 받아 영국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친히 쓴 치하장을 받았고 2000파운드 특별 추가 연금 및 당시 존 메이저 영국 총리를 만나기도 했고 영국 특별 시민권도 수여받았다. 오히려 구룽 본인이 '사는 데 문제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환영이 어색하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룽은 만 92세(만 93번째 생일을 겨우 18일 앞두고) 천수를 누리다가 폐렴으로 런던 차링 크로스 병원에서 사망했다.

마지막 사례로 Bhanbhagta Gurung 반바그타 구룽이라는 2구르카소총연대 3대대 소속 이병(Rifleman)이 있다. 구룽 이병은 18세의 나이로 구르카 여단에 입대하여 2구르카소총연대 3대대에 배속되었으며, 버마에서 친디트라 불리는 특수부대[9]에서 복무하였다. Chindits는 특수부대였기 때문에 적진 한가운데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2구르카소총연대 3대대는 일본군 33사단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3대대는 재편을 하고 1944년에 25인도사단 산하로 편재되었다.

사실 구룽 이병의 원래 계급은 하사(Naik)였는데, 앞선 전투에서 목표가 아닌 다른 언덕을 점령하는 바람에 분노한 대대장의 징계로 이병으로 강등된 상태였다. 사유는 직무태만이었다.[10] 얼마 후 1945년 3월 5일 버마에서 구룽 이병이 속한 중대는 일본군이 탈취한 'Snowdon East'라는 언덕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진 중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경기관총, 수류탄, 박격포로 공격을 시작하여 구룽 이병이 속한 분대가 전부 엄폐한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약 68미터 떨어진(75야드) 남쪽 나무 위의 일본군 저격수가 움직이지 못하는 분대원들을 계속 저격하고 있었다. 이에 구룽 이병은 표적이 될 위험이 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일본군 저격수를 사살했다.

공격이 약해지자 분대는 계속 전진하였고, 목적지의 18미터(20야드) 이내로 접근하자 일본군은 다시 강한 화력을 퍼부었다.구룽 이병은 어떤 명령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첫번째 일본군 참호(fox-hole)로 돌진했고, 수류탄 2개로 일본군 2명을 폭사시켰다. 구룽 일병은 망설이지 않고 두번째 참호로 돌진하여 안에 있던 일본군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어서 구룽은 (분대를 향해 화력을 퍼붓고 있던) 2개의 참호로 홀로 돌진하여 수류탄과 대검으로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목표의 북족 끝에 있는 벙커에서 계속 경기관총을 난사하여 구룽 일병을 방해하고 있었다. 구룽은 이 벙커가 뒤에 있는 자신의 소대뿐 아니라 서쪽에서 접근하고 있는 다른 소대에까지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룽 이병은 벙커를 제압하기 위해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홀로 벙커 근처까지 접근하였다. 구룽은 이내 벙커의 지붕 위까지 올라갔지만, 앞서 참호를 제압할 때 수류탄을 다 썼기 때문에 남은 수류탄이 없었다. 이에 그는 벙커 안에 연막탄 2개를 투척하였고, 2명의 일본군이 연막 때문에 벙커에서 뛰쳐나왔다. 구룽은 가지고 있던 쿠크리로 2명을 죽였다. 하지만 안에는 일본군 1명이 계속 기관총을 쏘고 있었고, 구룽은 벙커로 잠입하여 남은 1명의 일본군을 죽인 후 기관총을 노획했다.

이런 활약 덕분에 후속 부대는 별 피해 없이 목표 거점은 점령하였지만 후퇴한 일본군은 북쪽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룽 이병은 이를 인지하고 근처의 브렌 경기관총 사수와 2명의 병사들을 불러 앞서 점령한 벙커 안에 자리를 잡자고 하였다. 자리를 잡고 얼마 후 일본군은 반격을 개시했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구룽과 병사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이런 믿기지 않는 활약으로 구룽 이병은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다.[11]

반바그타 구룽이 이런 괴물같은 활약을 했으니 중대장은 더 복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구룽 이병은 고향 네팔에 홀어머니와 처자식이 있어서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전역하였다. 영국군은 그의 전역 때 원래 계급 회복은 물론 중사(Havildar)로 특진을 시키고 그도 영국군 중사 연금을 수여했다. 구룽은 이후 네팔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다가 2008년 86세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영국군은 반바그타 구룽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영국 중북부 Catterick이라는 마을에 있는 구르카 훈련중대의 건물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또한 그의 세 아들들 모두 2구르카소총연대에서 복무했다.

그 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구르카 여단 출신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는 위의 세 사람을 포함해서 총 12명이다. 이 중 2명은[12] 영국인인데 장교로 구르카 부대를 지휘했으므로 제외하고, 사병 중에서는 인도인이었던 Ganju Lama[13]까지 제외하면 2차 대전의 순수 네팔 국적 구르카인 수훈자는 총 9명이다. 영문 위키에서 개별 항목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큰 활약을 했다. 9명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1명,이탈리아 전선에서 2명,[14]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버마 전선에서 활약하여 훈장을 받았다.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받기가 까다로운 편이라서 1개 여단 규모 정도였던 구르카들은 잘 싸운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의 막나가는 전술 반자이 돌격에도 구르카들은 코웃음치면서 무쌍을 찍기도 했다.[15] 사실 영국군의 화력에 반자이 돌격을 하던 일본군은 마구 털리던 와중에 가까스로 영국군 진지에 일본도나 총칼 들고 와봐야 쿠크리 들고 기다리던 구르카를 만나면 안 봐도 뻔했다. 그야말로 일본군 피바다 풍경…월간 지오 한글판에서 1997년에 이들에 관하여 취재한 적이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이들은 쿠크리 하나로 일본 육군들을 대적한 기록이 나와있으며 일본도를 단숨에 동강내고 쿠크리 하나로 일본 육군 15명을 베어죽인 구르카병 이야기도 나온 바 있다.[16] 이 사람은 당시 취재에서도 나와 인터뷰했는데 수수한 옷차림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고 있었다. 당사자는 매우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도 전설의 용병으로 알아준다고 인터뷰했다.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영국에게 두둑한 연금을 받으며 매우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이 외에도 2차대전 당시 구르카 부대의 용맹함 혹은 무시무시함과 잔혹함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널리 알려졌다.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생활을 하던 미군 병사들을 구르카 부대가 구출하였는데,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학대하던 일본군 병사들의 귀를 잘라 선물(!)한 일화도 있다. 출처를 보면 이 폭격기 승무원은 양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양곤에는 앞서 언급한 Chindits 포로들도 많았다. Karnig Thomasian과 같은 포로 수용소에 있었던Chindits 병사의 이야기인데, 양곤 수용소를 해방한 구르카 연대가 어디인지는 불명이지만(양곤 탈환 작전에는 10구르카소총연대, 3구르카소총연대, 구르카 부대에서 따로 차출한 대대로 구성된 50인도공수여단 등 많은 구르카 부대가 참전했기 때문에 알기 힘들다) 전우였던 Chindits에 대한 일본군의 학대에 분노하여 저랬을 수 있다.[17]
우리가 떠날 때, 구르카병사들이 우리를 자꾸 손으로 불러. 그때 그들이 잡은 일본군 한 명이 얼굴에는 붕대를 둘렀고 구르카가 목에 로프를 걸어 잡고 있어. 그런데 중간에 다른 구르카병사 몇이 박스 하나를 들고 미친 듯이 우리에게 질주해서 오더라고. 마지막 할 말이 있는지 말이야. 그 박스는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었어. 무슨 선물이냐고? 구르카가 감방에 잡아넣은 일본군들에 관한 물건이야. 그들이 오더니 선물 박스를 열어 보여주었어. 귀가 가득 차 있었어(It was full of ears). 난 감정을 힘겹게 억눌렀어. 사실 그 구르카들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더라고. 그들은 아군이고 우리에게 전혀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니잖아? 오, 하느님. 어떻게 그런 것을 하지? It’s terrible. 그게 선물이야? 그 사람들이 문화가 그런지는 모르겠어. 난 더 이상 못 보겠더라고. 이후 구르카병사들이 우리를 병원선이 있는 곳으로 호위해주었고, 타기 전에 이도 잡아주었지.
- B-29 기총수였다가 격추 후 일본군 포로생활을 하였던 Karnig Thomasian 수기 출처

2.4. 포클랜드 전쟁

이후, 1982년 포클랜드. 포트 스탠리를 지키는 아르헨티나 수비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는 영국군이 계속 민사심리전을 펼쳤고 SAS 부대가 기습을 담당할 예정이었는데 아르헨티나군이 구르카들이 온다고 하자 서로들 달아나거나 손 들고 기어나와서 이들은 무혈입성했다.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항복하면서 제발 구르카에게 우릴 넘기지 말아달라고 울며 사정까지 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걸 전해들은 구르카병들은 "우린 저항하지 않은 자, 포로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다!"며 불쾌해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위의 서술은 명확한 레퍼런스 및 근거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걸러 들어야 한다. 만약 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포트 스탠리가 아닌, 구스 그린 전투 때 벌어진 일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구스 그린을 지키던 아르헨티나군은 신병 위주로 편성되어 급조된 부대였으므로 사기도 낮았고 훈련도도 낮았기 때문이다.

구스 그린 전투 뒤에 한 전초기지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못 이겨 아르헨티나군이 (코만도와 교대 후 주둔해 있던) 구르카에게 항복했고, 구르카들은 항복한 아르헨티나군에게 몸수색을 위해 엎드려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거의 다 엎드렸는데, 한 공군 장교가 버티고 있자, 구르카들이 쿠크리로 위협해서 엎드리게 한 기록이 있다. 구스 그린 전투 후에 근방 아르헨티나군은 대체로 구르카에게 항복했다.

반면 포트 스탠리의 경우 당장 본 위키의 포클랜드 전쟁 항목에서 4번 영국군의 승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포트 스탠리 주둔 아르헨티나군은 주변 감제고지랑 방어선[18]이 다 털려서 항복한 것이다. 그리고 스탠리와 주변 감제고지를 지키는 아르헨티나군은 사기도 높고 혹한기 훈련 등 훈련도 제대로 받고 무장도 충분한, 나름 정예부대였고, 의외로 영국군은 제법 고전했다. 이 때 구르카 대대는 스탠리 주변 감제고지인 윌리엄 산(Mount William) 점령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감제고지를 수비하는 아르헨티나군은 사기도 높고 장비도 충분했기에 구르카를 보고 쫄기는커녕 박격포를 쏴서 8명이나 부상입혔다. 그리고 이후에는 아르헨티나군의 반격으로 13명이 추가로 부상을 입었다.

윌리엄 산 점령작전은 스코츠 가드가 주도한, 그리고 또 다른 감제고지인 텀블다운 산 점령전과 같은 작전 내에서 이루어졌다. 영국군 근위대인 스코츠 가드가 텀블다운 산 점령의 주공을 맡는 동안 구르카 대대는 텀블다운 산 남쪽의 윌리엄 산을 공격하는 조공을 맡은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구르카 대대(당시는 7구르카소총연대 1대대)[19]는 1명의 전사자를 냈다.

2.5. 카길 전쟁

1999년 파키스탄 인도 카슈미르에서 벌인 국지전인 카길 전쟁(현지 발음은 까르길 전쟁)에서 인도군 소속 구르카병들도 참전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의하면 역시 백병전에서 이들은 무서운 활약을 했기에 파키스탄군들이 절대로 이들과 가까이서 싸우지 말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한다.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구르카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던 파키스탄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부랴부랴 물량전으로 반격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구르카들이 종전 뒤 풀려나서 인도군 훈장을 받고 후한 보상을 받은 것도 나왔다. 파키스탄군도 용병인 그들을 꽤 우대해줬는데, 만일 박대했다가 나중에 호되게 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고 한다.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족들도 만만치 않게 전투민족이고 파키스탄의 주 인종인 펀자브인들도 무서운 민족이다. 아프가니스탄도 히말라야 못지않게 척박한 산지 힌두쿠시를 중심으로 온갖 외세 공격을 자기 힘으로 막아내던 전투민족이다. 그런 이들이 상당수인 파키스탄군도 구르카에게 무척 고전했다는 뜻. 하긴 위에 나온 대로 이미 120년 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들이 파슈툰족이 다수인 카불을 함락할 때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2.6. 비슈누 쉬레스타

현실판 아저씨. 본인이 타고 있던 열차에 무장강도가 들어 원래 조용히 넘어가려 했으나 강도단이 어린 여자아이를 건드리는 것을 보고 불의에 참지 못해 손수 나서 강도단을 조져버린 이야기.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7. 구르카병과 30인의 탈레반들

네팔 비마 출신의 영국 육군 구르카연대 3대대 소속, 딥프라사드 푼(Dipprasad Pun) 하사(31세)[20] 는 2010년 9월 17일, 아프간 헬만드 주[21] 라힘 칼라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서다가, 전방의 어둠 속에서 뭔가 땅파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처음 짐승의 소리인 줄 알았으나 소리의 정체는 IED를 매설 중이던 2명의 탈레반들이었다.

그의 소대는 순찰을 나간 시점이었기에 그는 즉시 무전기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삼각대에 거치돼있던 GPMG 1문을 떼어들고, 개인화기인 SA80 한 정과 하부 레일에 부착된 유탄발사기 한 정, 수류탄 다수, 무전기 두 대를 가지고 지붕으로 올라간 후 사격을 개시했다. 탈레반들도 RPG를 발사하고 사격을 가해왔으나, 푼 하사는 15분 이상 그 위치를 사수하면서 400여 발의 탄환과 수십 정의 수류탄 등등 손에 잡히는 무기를 몽땅 사용해 최소 세 명 이상의 탈레반을 죽이고 다수를 부상 입혔다고 한다. 처음엔 겁이 났지만, 교전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진 채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그때, 푼 하사는 덩치 큰 탈레반 전사 한 명이 벽까지 완전히 접근해왔고, 그가 사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하사는 지붕 위에서 사격하고 있던지라 무거운 GPMG로는 사격 각도가 잘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놈이 접근해서 벽을 타고 오르려는 것까지 발견했다. 이에 푼 하사는 L85A2를 들고 발사하려 했지만, 이미 단기간 안에 별다른 관리 조치 없이 400여 발을 연달아 쏜 직후라 기능고장이 발생한 상황이었다.[22] 그는 주위에 무기로 사용할 만한 마땅한 물건을 찾다가 삼각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대응하였다고 한다. 그는 "마추 탈라이(Marchu Talai)!" 라고 소리지르며 탈레반에게 달려들었다. 그 말은 네팔 말로 지금 네놈을 죽이러 간다 는 뜻이라고 한다.

홀로 30여 명의 탈레반들을 물리친 공훈으로, 푼 하사는 2011년 3월 25일, 용훈십자훈장(Conspicuous Gallantry Cross)을 받았다.[23][24] #

2.8.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 정규군이나 바그너 그룹 등 러시아의 무장집단에 입대하는 구르카족이 적지 않다. 네팔인들 입장에선 러시아군이나 러시아 용병의 급여도 고임금 범주에 들어가며, 상당한 경쟁률을 뚫어야하는 영국군, 인도군, 프랑스 외인부대 등과는 달리 경쟁률은 커녕 죄수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만성적인 전투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러시아 측도 이들을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

2023년 11월 16일에는 8명의 구르카 용병이 계약금만 받고 먹튀(…)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네팔인 출신 사상자가 급증하자 네팔 정부에서 러시아 취업을 금지시켰다.

네팔 정부의 공식입장은 약 200여 명의 네팔인이 러시아에서 싸우고 있다지만 귀국 용병들의 증언으론 1만 5천 여 명의 용병들이 있다고 한다. #

3. 선발 과정


KBS 수요기획 〈네팔 구르카 용병 선발 - 그 100일간의 기록〉(2008.2.13 방송)

구르카의 급여나 연금은 원칙적으로 영국군과 동등하다. # 2018년 기준으로 이병이 연간 14,000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2,260만 원 정도인데 영국에서 고졸도 연봉으로 3,600만 원은 받는 걸 생각하면 꽤 적은 돈이지만 추가수당이 붙고 군인 특성상 세금 공제가 덜하고 막사생활을 하기 때문에 식비도 어느정도 줄어들어 그럭저럭 먹고살 수준은 된다. 그러나 네팔에서는 이 정도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받는 것이다. 연간 국민소득이 같은 시기 한국 35,000달러의 30분의 1보다 조금 넘는 1200달러(150만 원 정도)가 좀 넘는 최빈국(2021년 기준)이므로 구르카로 복무하고 전역한 사람은 지금까지 모아온 봉급을 가지고 네팔에 돌아오면 부유층으로 살 수 있다.[25]

그래서 매년 2 ~ 300명 선발에 경쟁률은 매년 2만 명 가까이 응시하므로 70 대 1을 넘는다. 신체검사와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양한 능력을 지닌 전형을 요구하고 17세부터 21세 사이만 응시 가능하므로 사회 엘리트인 대학생들이 몇 년씩 구르카 준비에만 매달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26] 수도 카트만두에는 구르카 준비를 위한 사설 학원 20여 곳 가량이 성업 중이다. 또 아버지가 용병 출신이면 후손에게도 이 직업을 추천하며 직접 아들을 훈련시키기도 한다. 용병 역사가 200년이나 되다보니 3대가 용병이거나 친척 중에 용병이 많은 집안도 있다. 구르카 민족이 많이 모여 살고, 도시 자체가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어서 심신을 단련하기 최고인 포카라에는 한국의 학원가 마냥 용병 양성 학원 단지가 있다. 도시 곳곳에 고등학교처럼 보이는 운동장 딸린 건물의 80%는 용병 학교라고…그야말로 네팔 버전 한국 공무원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08년도 기준 경쟁률이 700 : 1을 넘는다. 2015년 2월 기준으로 영국군 가운데 구르카 출신은 장교가 110명, 사병이 2,610명 수준이었다. 출처

특히 최근에는 사교육을 많이 하는 도시민의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다. 한 해 40명 선의 합격자를 배출한다는 유명 사설학원의 수강료는 한화 월 3만 원으로 한국이라면 용돈 수준이지만 네팔에서는 부유층이거나 구르카 출신의 아버지가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이다. 이런 학원은 전직 구르카 출신이 운영하며 영국군의 선발전형에 맞춘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한다. 반면 지방민이나 저소득층은 신체적 스펙은 갖출 수 있다 쳐도[27] 영국군과 소통해야하는 영어와 기본 고등수학까지 배우는 영국 수준에 맞춘 수학이 큰 장애물인데 네팔은 아직 학교조차 없는 지방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1천 명가량인 1차 합격자도 한 번도 배출해보지 못한 시골 마을도 많다. 그러니 최종선발되면 가문의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발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구르카 출신 모병관이 가을에 고향을 돌면서 지역 예선을 실시한다. 여기서는 키와 가슴둘레 등 신체조건과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치르며 약 2~3배 수를 선발한다.[28] 예선통과자들은 포카라에 위치한 모병소에 입소하여 보름간 최종 경선을 진행한다. 이때 입소자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모병소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 수능 등굣길 분위기이다. 다양한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로서 다양한 과목을 수행하는 중에 하나라도 미달되면 그 즉시 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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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도코 레이스'인데, 25㎏의 돌을 채운 전통바구니(도코)를 끈으로 머리에 매고 네팔의 가파른 산길 6㎞를 달리는 것. 30분대를 달성해야, 즉 10분 기준 2㎞를 달려야 합격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며 중간에 쉬거나 48분을 넘기면 바로 탈락. 즉 탈락 마지노선은 평균시속 7.5㎞/h를 유지해야 하고 합격권은 12㎞/h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짊어진 무게도 무게인데다 비포장 산길을 주파해야 하고 네팔은 전국이 고산지대라 산소가 평지에 비해 희박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29]

게다가 도코 레이스에서 붙어도 전원합격이 아니라 면접과 시험을 추가로 더 보고 추첨까지 해가며 최종선발인원에 맞춘다. 즉 모든 시험을 다 붙고도 단지 정원에서 밀려서 떨어질 수 있는데 억울하다 해도 영국군이 갑이니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 이렇게 최종 선발된 인원은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다음해 1월 영국 본토로 가서 8개월 동안 정규군 훈련을 받는다.

한편 영국군 외에 싱가포르 경찰 인도군도 구르카를 선발한다. 싱가포르 경찰은 영국군 선발에서 차순위자들을 데려가고[30], 싱가포르의 구르카도 영국군보다는 급여가 낮고, 싱가포르 기준에서는 일용직 근로자와 메이드 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박봉이지만 역시 네팔 기준으로 매우 큰 돈이기에 인기가 아주 많다. 2014년 기준으로 월 1,500~2,000유로(년간 2600만 원 정도)를 받는다. 네팔 초등학교 영어강사의 한달 월급이 한화로 50만 원 받으면 많이 받는 수준임을 생각하면…1년에 300명쯤 뽑는데 2014년에는 14,000명이나 경쟁자가 몰렸다고 한다. # 많을 때는 경쟁자가 2만 명이 넘는 해도 있다고 한다. 여기도 즉 영국군 못지 않는 경쟁률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인도군은 별도의 선발 시험을 실시한다. 이쪽은 급여가 덜해서 경쟁률도 영국군이나 싱가포르 경찰보단 낮다. 물론 보통 네팔 인 노동자보단 많이 받는다.[31] 영국군 출신처럼 부유층은 되기 어려워도 장기복무하면 중산층은 될 수 있다. 그래서 영국군 선발에 최종 불합격하면 다시 인도군 선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영국군 구르카보단 경쟁률이 낮다 뿐이지 여기도 경쟁 자체는 치열하다. 인도 열차 강도사건의 영웅 비슈누 쉬레스타도 여기 출신이었다.

그리고 네팔에도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가 활성화되면서 2019년 8월쯤부터는 프랑스 외인부대에도 지원이 폭주하고 있다. 영국군 구르카에 비해 비교적 쉬운 입대 테스트와 영국군과 비교하여 조금 더 높은 월급, 폭 넓은 수당 제도[32], 많은 해외파병 임무[33], 병과 선택에서 폭넓은 자유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진급 시스템[34], 굉장히 실전적인 훈련[35]과 실적 평가, 여기에 5년의 의무복무 후 2년간 지급되는 90유로(한화 119만 원 상당)의 실업급여까지…근무환경이나 정예화, 복지 시스템은 영국 육군보다 훨씬 좋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외인부대는 영국군과 달리 외국인이라도 프랑스 어만 되면 복무능력과 실적으로 진급을 시키기 때문에 말단 이등병으로 입대해도 부사관으로 진급한 뒤 시민권을 취득하는데 성공한다면 장교 선발에도 도전해볼 수 있으며[36] 임관에 성공했다면 대위로 진급해 권력이 막강한 분견대장도 할 수 있고 비록 바늘구멍이긴 하지만 실전에서 공을 세운다면 영관급도 문이 열려있어 네팔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셈이다. 구르카 전투력의 명성이야 세계적으로 자자하니 프랑스 외인부대 측도 아쉬울 게 없고.

그래서 눈치 빠르고 머리 좀 좋고 경제적으로 좀 낫다 싶은 사람들은 프랑스 외인부대를 기웃거리는 중. 영국 구르카 여단과 달리 이쪽은 지원 단계에서 언어와 비자, 그리고 돈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게 걸림돌이다. 네팔은 제국주의 시절 당시 영국의 영향권이었기 때문에 영어는 아쉬운대로 다들 할 줄 알지만 프랑스 어는 그렇지 않아 압박이 크다. 하다못해 공부를 하려 해도 돈이 들고.[37] 그리고 현지에서 선발하는 영국군과 달리 입대 테스트를 치르려면 프랑스까지 가야 한다. 모든 유럽국가를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들에게는 실감이 잘 안 나겠지만, 불법체류 등의 문제로 개발도상국 국민들이 선진국 입국 비자를 얻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난이도에 속한다.[38] 프랑스까지 날아가는 비행기값도 싼 게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데 평균 월급인 2~30만 원 수준에 그치는 네팔인들에겐 너무나도 비싼 값이다. 네팔 청년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외인부대 지원률이 다소 낮은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 밖에도 공식부대는 아니지만 말레이시아 로얄 레인저 특수부대(Royal Ranger Regiment)에도 구르카병 일부가 보안군으로 복무하며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 해군 부대 보안군으로서 구르카병이 일부 복무하기도 했는데 아프간 주둔군은 2021년 전원 철수했으므로 지금도 복무하는지는 불명이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 여파로 네팔 국가산업이나 다름없는 관광업이 그야말로 박살나버려, 관광 가이드나 숙박시설 관리직도 실직자가 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어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구르카 혹은 해외취업밖에 없게 되면서 더더욱 경쟁률이 올라갈 전망이다. 그나마, 2022년 이후로 코로나 19가 진정되는 기미라서 해외여행도 늘어나서 겨우 관광업도 되살아나 네팔 실직도 조금씩 줄어들긴 했다.

3.1. 급료와 연금 등 처우

선발되면 영국 육군에서 복무하는 기간은 최소 4년인데 이는 영국군의 의무복무기간과 동일하다. 정년은 영국 육군과 동일하게 만 55세이다. 장기복무 계약은 영국 육군과 동일하게 입대 후 22년이고, 이후 매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기 때문에 22년 복무 후 진급이 누락되거나 하는 경우 정년 전에 예편해야 한다.[39] 구르카 용병으로 선발된 시점부터 복무가 시작된 것으로 간주되며 입대 후 4년간 의무복무하면 장기복무를 신청할 수 있다. 거절되더라도 전역한 뒤 영국 국적을 받고 영국에 정착할 기회가 주어진다.[40]

1997년 전까지는 영국 정규군이 받는 돈의 3분의 1수준이었지만[41] 1997년 홍콩 반환으로 영국으로 구르카 연대의 본부가 옮겨짐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규정상 영국 정규군과 동등한 급료를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월급이나 복지 등에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기사 이분은 영국군 최고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은 사람인데도 사후복지가 차이가 난다고 할정도니 무시할 수준은 아닌 듯하다. 특히 월급보다 사후복지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며 그보다 더 문제는 영국군의 고질적인 군축문제로 최소 복무기간만 복무하고 정리해고 되며 장기복무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14년에만 해도 350명의 구르카가 해고당했다고 한다. ## 퇴역용병들의 연금도 2005년이 돼서야 95파운드(약 20만 원)에서 450파운드(90만 원)로 인상되었다. 게다가 퇴역 용병들의 영국 정착이 무지하게 까다로웠다. 이런 차별 대우에 여러 인권단체가 항의한 결과[42] 2009년 5월 29일 영국 의회에서 네팔 구르카 용병의 영국 정착을 조건 없이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늦게나마 그들의 노고가 보상받았으니 다행이다.

문제는 이렇게 인권단체의 요청으로 구르카의 복지 수준이 대폭 향상된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구르카의 장점은 싼 값에 뛰어난 병력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가 뛰어났다는 점인데, 영국군과 동등한 급료와 연금을 받으니 딱히 영국군이 구르카를 쓸 메리트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국군에게 지불된 급료는 영국내에서 선순환되는 반면에, 구르카에게 지불된 급료는 네팔로 빠져나가니 영국 입장에서는 더욱 손해다. 물론 영국 정착을 허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구르카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영국군에 입대한 것이어서 시민권을 받고도 정작 귀국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다가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제국주의 시절처럼 용병을 쓰느냐는 비판도 있다. 물론 구르카의 선발과정은 영국군보다 엄격하므로 선발 자원의 질은 좋을 수 있겠으나 영국군도 어디가서 약병(弱兵)소리 듣는 군대가 아니고, 병사 개개인의 전투능력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시대도 아니다. 19세기처럼 영국이 전 세계를 떠돌며 전쟁하는 것도 아니고 영국군이 병력 자원 확충에 어려움도 없어서 구태여 구르카를 쓸 이유가 없다. 여기에 더해 네팔 정부도 구르카 퇴역 병사들의 영국 정착에 반대하고 나서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 이 때문에 영국내에서 구르카 그만 쓰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 #1, #2 따라서 점차적으로 신규 병력 모집을 줄여나갈 것이 유력하다. 이런 이유로 2015년은 구르카 연대 창설 200주년이지만 영국의 군축 영향으로 구르카가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나온 적이 있다. ##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감축행렬에 제동이 걸린 반면, 오히려 영국 육군에 지원자가 없어서 구르카조차도 능력만 인정받으면 장기복무가 잘 되는 쪽으로 바뀌어가는 추세이다.

사실 장기복무까지 갈 것도 없이 구르카가 영국군에서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사와 관련이 있는 업종에서 재취업할 때 막강한 호소력을 가진다. 돈을 꾀한다면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는 일. 영어도 되겠다 만기전역하면 영국 시민권도 있을 테니 어느 나라를 가도 먹고 사는 데 아쉬울 일 없다. 실제로 구르카 출신들이 경비 보안 회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

4. 6·25 전쟁 참전 오보

2018년 북미정상회담 당시 싱가포르 경찰의 구르카 분견대가 경호를 맡으면서 국내에 구르카 용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언론사에서 구르카 용병과 관련된 다양한 기사들을 보도하였다.
그런데 이때 6·25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부대들 중 구르카 부대가 존재했었고 이 구르카 부대가 지평리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는 오보가 많이 나왔었으며 급기야 문재인 정부 청와대 페이스북 국방홍보원에서 운영하는 국방TV에서 2021년에 제작한 구르카 관련 영상 콘텐츠에 영국군에 배속된 구르카 부대가 지평리 전투 피의 능선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버렸다.(영상의 15분 15초부터 참고)

그러나 이는 완전히 잘못된 사실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영국군의 배속된 부대들 중 구르카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방홍보원 역시 오류를 인정하고 아래와 같이 고정댓글로 정정 공지를 하였다.
국방홍보원 X-벙커 제작진입니다.
본 콘텐츠의 구르카 용병 활약상에 대한 내용 중 구르카 용병이 6·25 전쟁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웠다는 부분은
부정확한 내용으로 확인되어 바로잡습니다. 구르카 용병이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항상 국방TV를 사랑해 주시는 구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향후 콘텐츠 제작에 있어
정확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근래에도 팩트 체크 확인 안 하고 기사 작성하는 기레기들에 의해 가끔씩 구르카 부대가 6·25 전쟁 참전했었다는 오보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5. 그 외

  • 이들을 상징하는 칼로 쿠크리를 꼽는다. 부대 문양도 쿠크리 두 개의 검날을 교차한 것이다.
  • 1979년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43] 장례식 당시 정복 차림의 구르카병 20명이 장례식에 참가했는데 용병이면서도 근위병들과 한자리에 있었기에 눈길을 끌었다.
  • 싱가포르 경찰 소속 구르카들은 경찰임에도 쿠크리를 차고 다닌다.
  • 구르카들은 일부가 독일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한편 당시 프랑스군도 북아프리카 산악에 거주하던 모로코 출신 유목민 구미에(goumier)를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이들도 엄청나게 출중한 근접전 실력을 보여준 까닭에 나치군들은 이들과 근접전으로 싸우느니 하루 종일 포탄 세례를 받는 게 낫다고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구르카와 이들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연합군들이 궁금해했지만, 이들은 서로 동맹이었던지라 일절 싸울 일이 없었기에 이 농담에 대한 진실은 가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자유 프랑스 육군 장교가 야습을 준비하는 용병 곁을 지나가며 혹시 쓸만한 손목시계가 있거든 하나 구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 날 아침에 그 장교 막사 입구에 손목시계가 원래 주인의 손목째로 공손하게 놓여 있더라고 한다. 구르카나 라지푸트 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구미에들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에 대한 일화들이 '타임 라이프 2차 세계대전사'에 일부 실려 있다.
  • 영국군의 구르카나 프랑스군의 구미에처럼 미군도 자체적으로 운영할 해외용병부대를 계획했는데 그 대상국이 바로 몽골이었다고 한다. 해외 주둔 미군 모습을 다룬 저서 <제국의 최전선>에 따르면 미군 장교들이 몽골에 파견된 이유가 몽골 군인들을 구르카처럼 미군에 복무할 외인부대로 양성하는 것이었다고 저술하고 있다. 다만 현지인 병력 육성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실현되지는 않았다.
  • 90년대에 독일 출판사에서 제재한 인문지리백과인 랜드 앤 피플에서도 소개되었다. 여기서는 구르카 족의 돌격 구호로 아요 구르칼리[44]를 사용한다고 서술했다.
  • 러시아의 전통적인 전투민족인 카자크와도 만난적 있다. 맥마흔 라인이 발표되기 이전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 아시아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때, 히말라야에서 만난 영·러 양국의 조사단이 서로 각각 구르카와 카자크를 호위부대로 데리고 왔다. 이 두 부대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 이어졌고[45] 나중에 헤어질 때 구르카병들은 받들어 총을, 카자크들은 기병도로 받들어 칼을 하여 서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자신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산만한 코사크들을 처음 본 구르카병들은 영국대표에게 가서 '저들에게 우리 민족이 전부 이렇게 키가 작은 건 아니라고 알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 2018년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의 치안 유지를 위해 회담장 주변에 구르카 용병들이 배치되었다.
  • 네팔 내부의 코로나19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네팔의 총리가 구르카 용병을 언급하며 영국에게 백신의 지원을 요청했다. #
  • 네팔에서는 주요 선진국에 취업하기 위한 비자를 받는 경쟁 또한 구르카 선발 못지 않게 치열한 편이어서 구르카 시험 외에 이쪽으로 방향을 틀고 지원하는 사람들도 많아 소위 구르카 용병 지원자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특히 한국행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도 유의미하게 많은데[46] 시험날 분위기는 구르카 시험과 크게 다르지 않고, 학원 등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의 합격률이 높은 것도 다르지 않다.

6. 미디어

6.1. 게임

6.1.1. 서든어택

근접무기중 구르카라는 이름의 무기가 있다. 실존하는 무기로 실제 이름은 쿠크리인데 쿠크리가 구르카 용병의 주요 무기이기 때문에 쿠크리가 아닌 구르카라고 표기한 듯 하다.

6.1.2. 도미네이션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구르카족(도미네이션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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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중 하나로 등장한다.

6.1.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항목 참조.

6.1.4.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3

영국군 진영의 유닛으로 등장한다.

6.1.5. 스틸 디비전 시리즈

영국군 보병으로 등장하며 톰슨 3정 + 브렌 2정으로 근접전과 중거리 전투 모두 적절히 할 수 있다.
레이더+파나티컬 특성으로 포위된 상태에서도 사기 패널티가 없으며 항복하지 않는다.

6.1.6. 제5인격

생존자 진영캐릭터 용병(제5인격)이 구르카족 용병 출신이다.

6.2. 만화

6.2.1. 켄간 아슈라

캐릭터 하루오가 구르카족 출신이다. 다만 작중 등장하는 구르카는 현실의 구르카와 동떨어진 야만전사로 나온다.

6.2.2. 통 엣지 2

6.3. 소설

6.3.1. 버어마의 하프

일본의 소설가 타케야마 미치오가 지은 '버어마의 하프'를 보면 버마에 파견된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구르카병이 언급된다.

6.4. 영화

6.4.1. 구르카 워리어

2023년 9월 27일에 개봉한 영국, 말레이시아 합작의 전쟁영화로 한국에는 IPTV를 통해서 2024년 7월 14일에 소개되었다. 1949년에 발생했던 말라야 비상사태 당시에 벌어진 영국 육군의 작전 실화를 모티프로 하였다.
영국 군대와 긴밀하게 동맹을 맺어온 네팔의 전설적인 구르카 군인들. 1949년 영국의 말라야 비상사태때 적진 뒤에 갇힌 병력을 구출하러 말라야 정글에 상륙한다. 하지만 밤에 적군의 기습에 직면하고 소대는 여러 그룹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1] 런던 대학교 동양학 교수로, 1차대전 때 제3 구르카 소총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면서 그들의 용맹을 몸소 경험하였다. 그가 남긴 이 문구는 현재도 런던 구르카 기념관 정문에 새겨져 있다. [2] 주로 히말라야(특히 에베레스트) 등반에 관련된 관광 사업이다. [3] 대부분 용병이라고 알고 있으나 국제법에 따라 구르카는 용병이 아니다. [4] 세포이 같은 부대 덕분에 이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영국에서 알아주게 된다. 자세한 것은 세포이 참조. [5] 다른 말로는 적 수급들을 영국장교 침대 앞에 일렬로 세워놓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난 영국장교는 기겁한 것은 덤. [6] The London Gazette에서는 그냥 37mm포로 기록돼 있지만 아마도 94식 37mm 속사포거나 1식 37mm 속사포일 것이다 [7] 출처: The London Gazette [8] 출처: The London Gazette [9] 77인도보병여단으로, 2구르카소총연대 3대대는 이곳 소속이었다. 전후 SAS 증설 때 이 Chindits 복무자도 일부 선발했다. [10] 후의 진상 조사에 의해 소대장이 목표를 잘못 보고 내린 명령을 구룽이 수행했단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의 소대장이 징계를 받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때 분대장이었던 구룽이 독박을 쓰고 징계를 받았을 수 있다. [11] 출처: The London Gazette [12] Michael Allmand 대위, Frank Blaker 소령. 둘 다 버마에서 활약했으며, 전사 후 추서받았다. 특히 Allmand 대위는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 엘리트 학생이었는데도 특수부대 복무를 자원해서 앞서 언급된 Chindits 구성 부대인 6구르카소총연대 3대대에 배속되었다. [13] 본명은 Gyamtso Shangderpa인데 모병관이 실수해서 Ganju Lama로 등록되었다. 그는 7구르카소총연대 1대대 소속으로, 임팔 작전 때 일본군이 대규모 포격을 하고 중형전차 5대로 기습했을 때 혼자 PIAT를 들고 포복전진 하다가 포격으로 손목이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었는데도 전차 3대를 격파하고, 이어서 탈출하는 전차 승무원들을 수류탄으로 전멸시켰다. 인도인인데도 구르카 여단에 들어갔던 이유는, 당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구르카랑 비슷하게 생겼거나 접경지대에 살던 인도인까지 그냥 받아줬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인도-네팔 접경지의 시킴 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구르카로 복무가 가능했다. [14] 안타깝게도 2명 모두 전사 후 추서되었다. 심지어 사인까지도 비슷하다. 모두 독일군이 우세한 화력으로 밀어붙여서 영국군이 후퇴할 때 다른 병사들을 브렌 경기관총으로 엄호하다가 전사했다. [15] 애초에 반자이 돌격은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에 진심으로 증오심을 품고 자발적으로 입대한 미군 병사들조차 휴식시간용 놀거리로 여기고 웃으며 따라하던 전술(?)이다. [16] 위의 아간싱 라이 하사나 반바그타 구룽 이병은 더 적은 수의 적을 사살했는데 빅토리아 훈장을 받고, 이 사람은 받지 못한 데에는 아마도 주어진 상황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두 병사는 최소 기관총과 벙커, 최대 대전차포로 무장한, 그러니깐 방어가 매우 잘된 일본군 진지에 돌격하여 적을 사살했고, 이 사람이 상대한 일본군은 그 정도까지 방어가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두 병사는 단순히 적을 많이 죽인 것이 아니고 본인의 무공으로 아예 큰 피해가 예상되던 전투 자체를 뒤집어버리는 활약을 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훈장을 받은 것이다. [17] 실제로 빈 라덴 사살 작전 때 Devgru 대원들이 9.11 테러에 대한 분노로 빈 라덴의 머리에 권총을 쏴서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사살 영상이 비공개 처리된 일이 있다. [18] 특히 세 번째 방어선인 롱돈 방어선과 마지막 방어선인 텀블다운 산에서는 아르헨티나군이 제법 선방했다. [19] 영문위키에 따르면 포클랜드 전쟁에 참여한 구르카소총연대는 7구르카소총연대 1대대가 맞다. 다만 현재는 영국이 군축을 하면서 하나의 구르카연대에 3개 대대로 편성하고 나머지 연대는 해체하였다. 옛 2구르카소총연대는 구르카연대의 1대대이며, 옛 7구르카소총연대는 구르카연대 2대대를 구성하고 있으며 3대대는 옛 10구르카소총연대로 구성되어 있다. [20] 참고로 위의 2차 세계대전 구르카 여단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 12명 중 하나인 툴 바하두르 푼(Tul Bahadur Pun)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랑 손자가 같은 구르카병으로 복무했고 둘 다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이다. [21] 탈레반 세력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위험지역 [22] 이 때문에 한국웹에서는 L85A2가 A1 같은 결함품이라고 까이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400발은 경기관총의 총열 교체 주기도 뛰어넘는 숫자라 그 정도를 쉬지 않고 사격하면 웬만한 기관총도 크고작은 기능고장이 발생하기 쉽다. 미군의 M4나 M16 등의 검증된 AR-15 계열 총기들도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관리 조치 없이 수백 발을 쏘고 고장나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꽤 있었다. [23] 이 훈장은 93년 제정된 이래 50명도 받지 못한 훈장이다. [24] 원래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라는 두드러진 용맹을 보이는 경우에 수여하는 훈장이 있었으나, 사실상 장교에게만 부여하던 것이라서 이를 대체해 계급 구분 없이 수여하도록 용훈십자훈장이 제정되었다. [25] 네팔의 GDP를 150만 원으로 잡았을 때 구르카의 연 급여가 2,400만 원이라면 일반인 연수입 기준으로 16배라는 건데, 한국 기준으로 하면 연봉 3000만 원이 평균이니까 4억 8천만 원을 연봉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도 전문적인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군복무만 하면 그 돈을 받으니 목숨걸고 지원할만 하다. 게다가 네팔은 전반적인 자산가치가 매우 싸기 때문에 복무 끝나고 수천만 원 들고 돌아오면 도박에라도 빠지지 않는 한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다. [26] 좀 다른 예시긴 하지만 한국도 과거 카투사를 자체시험으로 선발했었는데, 지원자가 몰리고 경쟁이 과열되어 입대를 할 나이가 됐음에도 청년들이 카투사 시험에만 몰두하여 재수, 삼수 이상을 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오죽하면 '카투사 고시'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이를 막고자 일정 공인영어시험점수만 확보하면 추첨으로 뽑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생에 딱 한번만 카투사에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27] 원래 네팔 비롯 개도국 자체가 가난해서 육체노동 종사 비율이 높다 보니 청년층 중에는 강골이 많은 편이다. 나이들면 골병들어 고생하는 게 문제지만. [28] 이때 마을 아가씨들이 구경 나와 최종 합격할 것 같은 장정을 마음 속으로 점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9] 평소에 운동을 한 게 아니라면 대부분 일반인은 맨몸으로 평지에서 평균 8~10㎞/h의 느린 속도를 고작 30분조차 유지하지 못한다. 국군 기준으로 보면, 특급전사 컷이 평지 3㎞를 맨몸으로 12분 30초 이내 주파(시속 14.4㎞/h)이며, 특전사나 UDT의 5㎞ 평균 기록이 20분 내외(평균시속 약 15㎞/h)이다. 또한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30㎏ 내외의 완전군장 급속행군 시 10㎞를 1시간 10분~1시간 30분(시속 약 6.6㎞/h) 안에 주파하는 것이 목표다. 합격권 기준으로는 거의 두배의 속도를 내야하는 셈이다. 여담으로 이 사진에서 보이는 뒤의 두 산은 안나푸르나 남봉과 마차푸차레이다. [30] 2차 전형은 전적으로 영국군이 관리한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위탁선발인 셈이다. [31] 월급이 25~30만 원쯤 되는데, 네팔에선 대졸이 20만 원 정도 월급을 받으니 그래도 큰 돈이다. 거기에 위에 나오듯이 카길 전쟁 같은 실전 나가서 활약하면 당연히 추가 수당을 준다. [32] 외인부대는 해외 파견이 아니더라도 다른 부대, 다른 프랑스 내 지역으로 파견을 가도 수당이 따로 붙는다. [33] 프랑스 군의 해외 파견은 무조건 수당으로 이어진다. [34] 1년차는 레죠넬( 이병), 2년차 프리미어 클라스( 일병), 3~4년차 카포랄( 상병. 하지만 카포랄부턴 진급심사 제도가 적용되며 정말 사고만 치지 않고 평범하게 했다면 4년차에 카포랄 근속진급), 6~7년차 카포랄 쉐프( 병장) [35] 외인부대는 순수 '사용'의 목적인 충격군 집단이기 때문에 모든 훈련은 실전과 최대한 똑같이 진행하며 사소하게 작은 상황 부여마저 실전과 비슷하게 실행한다. [36] 장교는 무조건 프랑스 시민권자만 가능하다. [37] 당연히 강사가 널려있는 영어와 다르게 거의 제3외국어 취급하는 프랑스 어 강의가 훨씬 더 비쌀 수 밖에 없다. [38] 입국비자 한번 얻는데 대사관에서 거주지 정보, 가족증명서, 재산증명서 등 자신의 신상을 증명할 수 있는 온갖 서류들을 요구하고 면접까지 보며 심지어 다 통과해서 비자를 얻어도 입국 심사에서 수상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경우들도 개발도상국 시민권 소지자들에게는 흔한 케이스다. [39] 2008년 2월 13일 방송 KBS 수요기획 네팔 구르카 용병 선발 100일의 기록 방송에는 15년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그 뒤 영국 육군의 인사제도가 변경되어 22년으로 늘어났다. [40] 모든 안정적인 직업이 다 그렇듯 연공서열형 급여체계에서는 장기복무를 할수록 급여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구르카 병들도 보통 장기복무를 신청한다. 또한 모든 군인연금이 다 그렇듯이 영국의 군인연금도 15년을 기준으로 최소 그 이상 납입을 해야 혜택이 커지기 때문에 더더욱 장기복무를 선호한다. [41] 하지만 네팔 쪽에서 보면 그래도 큰 돈이긴 하다. 2차대전 당시 받은 돈으로 네팔로 돌아와서 제법 풍요롭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구르카들이 받는 월급은 네팔 직장인 평균 70배나 되었다고 하니 경쟁률이 몇백대 일이 될 수 밖에. 지금은 네팔 물가도 많이 올라서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돈이다. [42] 구르카 부대 지휘관 출신 아버지를 둔 영국의 배우인 조아나 럼리의 활동이 특히 유명했다. [43]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삼촌이다 [44] '구르카 족이 나간다!'란 뜻이다. [45] 정작 양측 대표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 했다. [46]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한국어능력시험과 고용허가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달리 돈이 없어도 신체, 정신적인 건강 및 노동력에 문제가 없으면 심사를 통해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또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자국민과 동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