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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조지 예배당에 걸린 가터 기사단원 가문 및 왕실 문장 |
1. 개요
에드워드 3세가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에 결성한 잉글랜드의 기사단. 본거지는 윈저궁이었으며 수호성인은 드래곤을 잡은 성인으로 유명한 성 조지이다. 가터는 양말이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해주는 그 가터가 맞다. 위 상징에서 모토가 쓰인 둥근 원을 자세히 보면 가터다.2. 상세
기사단 이름의 유래에 따라서 이 가터가 여성용인지 남성용인지가 갈린다. 하나는 솔즈버리 백작부인 조앤[1]이 칼레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다 가터가 풀려 바닥에 떨어지자 궁인들이 웃었는데, 왕이 이를 주워 백작부인에게 바치며 가터 기사단의 구호인 '이를 삿되이 여기는 자에게 수치 있으라(Honi soit qui mal y pense)'고 말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설립자인 에드워드 왕이 십자군 때 사자심왕 리차드가 성 조지에게서 영감을 얻어 가터를 매고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는 일화를 기억해내어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여성용 가터일 것이고, 후자에서는 남성용 가터일 것이다. 다만 설립 목적이 프랑스 왕위 획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투와 연관짓는 게 더 설득력 있을 듯하다.일종의 명예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잉글랜드 국왕을 단장으로 총 26명의 기사를 뽑았다. 최초에는 21명이 정원이었으며, 근대 이후로는 정단원 외에 명예단원으로서 가입하는 경우도 있다. 선발되는 기준은 그 기사가 세운 공적이 보통 기사와 비할 수 없이 클 때. 이론적으로는 평민이나 여자도 기사서임을 받은 뒤 공훈이 혁혁하다면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는데, 실제로 가터 기사단이 존재하는 동안 여자 68명이 가터 기사단원으로 임명되었다.[2]
그러나 영예로운 가터 기사단에게도 흑역사가 있으니, 사형선고를 받은 가터 기사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가터 기사 중 42명이 사형되었으며, 헨리 8세 시대에만 8명이 사형당했다. 가터 기사단이 스코들랜드와 통합되기 이전에는 잉글랜드의 유일한 궁정기사단이라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힘 좀 꽤나 부리는 귀족들이었는데, 인권보장을 포함한 법의 지배원칙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중세와 근세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무장반란을 포함한 정치적 대립에서 패배한 가터 기사단원들이 받는 처벌은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가터 기사단에 가입하는 동시에 가터 훈장을 서훈 받는다는 의미이다. 서훈시 문장이 새겨진 방패와 브로치ㆍ대수ㆍ검ㆍ 가터벨트 등을 받으며, 이들 중 일부는 사망 시 반납된다.
영국과 우호적인 공화정 국가의 국가원수는 가터 기사단에 가입하지 않고, 대신 외국인에게 수여 가능한 최고 훈장인 바스 훈장 대십자장을 받는다.
3. 가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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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가터 기사단 예복을 입은 윌리엄 왕세자[3], 앤드루 왕자, 찰스 3세[4] |
비 그리스도교 국가 중에서는 1856년 오스만 제국의 압뒬메지트 1세가 처음으로 가입했다. 그 다음으로 1873년 카자르 왕조의 나세르 앗딘 샤, 1901년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뒤이어 가입했다. 남미에서는 유일하게 브라질 제국의 페드루 2세가 가입했었고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유일한 일원이다. 일본의 천황도 단원이기 때문에 기사단원으로서 받은 문장도 존재한다. # 현재 일본의 나루히토는 부황 아키히토와 더불어 가터 기사단 멤버 중 단 둘뿐인 유색인종이자 비 그리스도교 신자이다.
윈스턴 처칠도 가터 기사에 서임되었다. 최초로 서임제안을 받은 때는 1945년 대독 전쟁이 종료된 후 치러진 선거에서 참패한 후. 이때는 "국민으로부터 선거 패배라는 훈장을 받았는데, 다시 가터 기사훈장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서임을 거절했다. 처칠이 가터 기사로 서임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의 일이다. 클레멘트 애틀리, 해럴드 맥밀런 전임 총리 또한 가터 기사에 서임되었다.
2024년에는 글로스터 공작부인 비르기트가 가터기사단으로 임명되었는데, 왕족으로 태어난 사람의 배우자 중 국왕의 배우자나 왕위 후계자의 배우자가 아닌 사람이 임명받은 최초의 사례다.
[1]
에드워드 1세의 친손녀로 이후
흑태자 에드워드와 재혼해
리처드 2세를 낳았다.
[2]
사실 중세기 영국은 여성상속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귀족가문에 남은 유일한 상속인이 여자라면 작위와 영지를 계승받을 수 있었다.
[3]
왕세손 시절
[4]
왕세자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