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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try
1. 개요
잉글랜드의 사회 계급 중 하나. 흔히 자작농, 자유 부농, 상공업자 세력 정도로 오해하기도 하나[1] 이는 요먼이라는 한 단계 밑쯤 계층에 해당하고, 젠트리는 (법적)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의 후손이나 귀족에 가까운 지방 봉건 영주들과 정계, 종교, 군인, 학계, 전문직 등 여러 사회 엘리트층이 유입된 잉글랜드 사회의 지배계층 중 하나였다.더 구체적으로 어원을 살펴보면, 영어 'gentry'는 "gent(leman)"(귀한 사람)+"-ry"(집단, 계층) 꼴로 조어된 것으로 고귀한 태생과 관련된 집단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곧 'gentleman'으로 구성된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며, 'gentleman'은 프랑스어 'gentilhomme'에서 온 말로서 둘 다 "혈통이 고귀한 사람"을 뜻한다. 즉, 오히려 단어 자체가 귀족 혹은 귀족적 계급임을 나타낸다. 오늘날 캠브리지 옥스퍼드 사전에서도 "well-born, genteel and well-bred people" of high social class라고 정의한 바 있다. 혈통과 결혼으로 성립된 상류 계층이며, 고급 교육도 받기에 조선의 양반이나 명청시대 향신(신사)와 비슷한 지배 계층이었던 것으로 대개 시사된다. [2]
이들은 역사적으로 구분해보면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때 잉글랜드 전역에 봉한 노르만족 대귀족 아래에 있던 가신 계급들이 많으며, 다시 영지 규모에 따라 준남작(baronet),[3] 기사(Knight), 향사(Esquire), 신사( Gentleman) 등으로 분류되었다. 이후 점차 토지를 독식하여 대 지주로 전환하고 사회 영향력을 넓혀갔다. 명청시대 중국의 신사(紳士). 일본의 사족(士族), 조선의 양반과 비슷한 점도 있다. 사실 '신사'로 번역한 것도 Gentleman의 번역을 중국 지방 사족계층인 신사와 의미가 통한다고 봐서 그리 번역한 것이다. 실제로 명청시대 향신 계층은 경제적으로 지주 계층으로 정치적으로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며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다.
2. 역사적 맥락: 영국 귀족의 특수성
2.1. 장남에게만 전해짐
젠트리 계층을 설명하기 위해선 대륙과는 다른 잉글랜드 특유의 귀족 제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대륙의 경우, 일반적으로 귀족은 작위보유자 외에도 그 가계 후손들도 누리는 특권신분이었으며, 귀족증서 수여를 통하여 법적으로 보장되었다.[4] 대표적으로 독일어권에서는 귀족의 자식이면 모두 귀족이고 차남이나 딸도 신분에 맞는 결혼을 하면 그 후손은 모두 작위가 있건 없건 귀족이었다. 이는 프랑스나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는데, 남프랑스의 툴루즈 백작 등은 가문의 수장 외에 그 친족들도 같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러시아에서도 공작의 아들은 전부 공작, 백작의 아들은 모두 백작이었다. 레프 톨스토이만 하더라도 넷째아들이었지만 역시 백작이었다. 스페인에서도 이달고(hidalgo) 계층은 작위가 없더라도 태생으로써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신분들은 곧 장티욤(gentilhomme), 즉 태생이 고귀한 사람들, 더 간단하게는 귀족이라 불렸다.
반면 영국에서는 11세기 노르만 정복 이래[5], 작위를 가져야만 귀족이고, 그 작위는 장남만이 물려받을 수 있다.[6] 귀족가의 자제로 예우를 받긴 하지만,[7] 법적으로는 평민이었다. 심지어 작위를 물려받을 장남이나 장손조차 작위를 정식으로 물려받기 전에는 평민이었다.[8] 즉, 대륙이었으면 gentilhomme처럼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명백히 특권신분으로서 귀족이었을 gentry(gentlemen)들은 사회적으로는 귀족이라고 여겨졌을지라도 법적 특권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9] 그 결과 잉글랜드 내의 특권 귀족은 현직 작위를 가진 수백 명에 불과했고, 적을 때는 백 명도 안될 때도 있었다.
2.2. 둘째부터 젠트리화
귀족의 자제지만 작위가 없는 차남 이하의 후손들은 3대째가 되면 자연스레 젠트리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말버러 공작의 손자 윈스턴 처칠이 예인데 처칠의 아버지는 공작의 삼남이라 법적으로는 평민일지라도 귀족가의 자제로 대우를 받았지만, 윈스턴 처칠은 자연스레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민으로 취급받는데[10] , 이런 사람들이 젠트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공작가의 손자이며 아버지가 재무장관을 지내고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33세에 장관을 맡는 금수저이며 사회적으로도 우대받는 계층을, 조선시대의 중인이나 부농으로 오해하는 것은 상당히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 다른 예로는 앤 불린의 불린 가문을 들 수 있다. 앤의 할아버지 윌리엄 불린은 부유한 상공인으로 젠트리에 속하였는데 아들 토머스 불린이 당시 잉글랜드의 유일한 공작 가문 토머스 하워드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앤 불린이 왕비가 되자 백작 작위를 수여 받았다. 그러므로 젠트리들은 귀족과 통혼이 가능한 명문가이지, 과거 우리나라의 중인 신분같은 중간 계급이 아니다.
중세 시절 기사나 에스콰이어는 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없으나,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 받은 계층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대체로 연수입 20파운드가 넘는 지주여야 젠트리 계층으로 포함되었다.[11] 훗날 사회상이 변하면서 도시의 유력계층이라 할 수 있는 상공인, 교수, 법률가 등도 출세하여 의회에 진입하며 젠트리화되었고, 기존 지방 대토지 소유 젠트리의 인적구성이 변모했다고 보면 된다.
노르만 왕조 초기에는 국왕의 직접봉신이면 누구나 남작을 자처할 수 있었고, 기사 봉토를 가졌으면 누구든 기사였으나, 13세기 후반에 국왕법정과 의회제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가 완성되면서 의회에 상원으로 소집되는 70여 명의 최고위 귀족들만이 남작으로 인정되었고, 연 토지수입 40파운드 이상에 카운티 법정의 배심원으로 소집되는 수백 명의 상류층 지주들만이 기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영주권(lordship)을 가졌으나 남작이나 기사와 같은 공적인 의무와 권리를 가지지 않은 대다수의 지주들은 향사(esquire)로 분류되었다. 법적인 신분은 소작농이지만 사실상 지주나 마찬가지로 드넓은 소작지에 재소작을 주고 대부분의 수확물을 시장에 팔아서 재산을 축적하며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는 부농은 프랭클린(franklin)으로 분류되었다.
잉글랜드의 의회는 초기에는 남작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에드워드 1세 시기부터 기사 74명(각 샤이어 당 2명), 부르주아 80명(각 도시 당 2명), 하급 성직자 148명으로 구성된 하원이 정기적으로 소집되기 시작했고, 1275년 웨스트민스터 법령은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land)의 조언(counsel)과 승인(assent)으로' 공포되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마그나카르타를 최종적으로 인정했고 의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1320년경에 쓰인 <의회를 여는 방법(Modus Tenendi Parliamentum)>이라는 책은 '왕국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사와 부르주아들이 이미 위대한 백작들보다 왕국에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상류층 계급 구분도 흑사병과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빠르게 와해되었다. 지주들이(배심원의 의무 때문에) 기사 직위를 기피하기 시작하자 14세기 후반부터는 향사들도 배심원으로 소집되었고, 영주권보다는 노동하지 않고 지대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면서 15세기 중반부터는 영주권을 가지지 않은 단순 토지보유자나 심지어 소작지를 보유한 프랭클린들도 젠틀맨(gentleman)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지주 명문가 계층(gentry)의 말석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중세부터 시작된 계급 명칭의 인플레가 계속 반복되다 보니 처음에는 기사도 향사도 못 되는 하급 젠트리라는 의미로 시작된 젠틀맨이 나중에는 상류층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 하급 젠트리인 젠틀맨과 상류층 농민인 프랭클린( 요먼)을[12] 구분하는 기준은 토지나 재산의 크기보다는 우선 직접 노동을 하느냐의 여부, 그리고 젠트리다운 취미활동과 사회활동을 하느냐의 여부였다. 예를 들어 제임스 매튜(James Mathewe)라는 요먼은 1591년 사망하면서 1100파운드 이상의 동산을 유산으로 남길 정도로 대단히 부유한 지주였지만 젠트리처럼 살지 않고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직접 농사일을 했기 때문에 요먼으로 지칭되었다.
2.3. 장미 전쟁
1436년 소득세 평가에 따르면 잉글랜드 전역의 젠트리 7133가구가 연수입 150000파운드 가치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귀족 51가구가 연수입 45000파운드 가치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즉 이 시기 평신도 지주들이 보유한 토지의 약 70%는 젠트리 소유였다. 100년 전 <의회를 여는 방법Modus Tenendi Parliamentum>의 저자의 말대로 적어도 재력이나 동원 가능한 인력의 총합 부분에서 젠트리와 부르주아들은 실제로 귀족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이 모든 지주들의 권력은 토지 소유에 기반했고, 따라서 토지 소유권의 안전을 보장하는 왕의 법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즉, 지주들은 지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이 필요했다. 현대의 공장 화재와 달리 전쟁으로 황폐화된 중세 경작지의 손실은 보험금으로 만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이라는 더 나은 대안이 있는 한 스스로의 무력으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지주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모든 지주들은 질서가 무너져 무정부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다. 헨리 6세 같은 심신상실자가 왕좌에 앉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계약은 국왕법정의 성장, 분할상속, 화폐경제와 토지시장의 발전 등으로 13세기 전후에 유명무실해졌고, 이 시기 귀족들의 권력은 부분적으로는 화폐를 매개로 한 보다 비공식적인 주종관계,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방 유력자이자 토지거래의 신뢰를 보증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 등 필수적이지만 중앙에서 일일이 통제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지방행정의 민간 보조자로서의 역할에 기반하고 있었다. 따라서 귀족층의 권력 기반은 보기보다 확고하지 않았고, 꼭 장미전쟁과 같은 형태가 아니더라도 귀족 권력의 쇠퇴와 젠트리의 부상이라는 결과는 언제든 어떤 계기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전에서 승리하면 권력을 더 얻을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던 귀족들과 달리 대다수의 소지주들에게 장미전쟁과 같은 내전은 광기어린 재난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뒤 젠트리들은 왕을 감시하고 교섭하는 역할을 지방 유력 귀족들에게 맡기는 대신 스스로 하기를 원했다.
2.4. 젠트리의 대두
그 결과, 유럽 대륙과 달리 (영국적인) 귀족 계층을 대신할 사회 지배계층으로서 젠트리가 튜더 왕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이는 귀족 대신 부르주아가 새로이 주도권을 잡았던 대륙하고는 사뭇 다른 현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갈등으로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에서는 부르주아들이 합법적으로 귀족 작위를 사서 편입하였으나, 잉글랜드에서는 젠트리가 주도하는 형태의 정치 형태가 발전하였다.[13]
튜더 왕조의 헨리 8세가 주도한 종교 개혁 당시,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여 매각하자 이를 헐값으로 얻은 젠트리 계층이 종교개혁을 지지했으며, 젠트리는 이를 통해 크게 성장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미 그 전부터 젠트리 계층은 사회 지도계층이었다. 국유 자산을 매입할 수 있는 재력이나 권력은 극소수의 전통 귀족을 제외하면 나머진 대부분 젠트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흥 상공업자가 성장하여 젠트리 계층에 편입된 경우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런던 시내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젠트리 집단이 대륙의 복음주의 신학에 공감했다고 보면 된다.
2.5. 젠트리 주류는 지방 대 지주
평민 중 일부 상인이나 법률가로 올라선 중산계급이 젠트리화되기도 했다. 훗날 청교도 혁명의 올리버 크롬웰은 그러한 신흥 젠트리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었다.[14] 인클로저 운동의 주체도 바로 이들이었다.하지만 그런데도 젠트리 계층의 다수는 시골에 일정규모 이상 토지를 보유한 지주들이었다. 대도시의 지식인 계층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아서 교수나 판사, 성직자, 장교,[15] 성공한 상공인 등이 되어 기존 지배층과 통혼하거나 정치적으로 의회 권력에 진입한 것이지, 평범한 상인들이 런던 시내에서 장사하다가 벼락출세한 케이스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젠트리들 끼리도 집안의 뼈대를 따졌고 벼락부자 출신들은 집단안에서 끼워주지 않는데다가 대부분의 의회 지역구는 농촌지역이라서 유입된 신흥 젠트리들도 기존 젠트리 처럼 지방에 지주 처럼 되려 지방의 농장을 사려고 하거나 전통 젠트리와 혼맥을 맺으려 혈안이었다. 이는 영국 내전과 청교도 혁명기에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의회를 차지한 젠트리들 중엔 보수적인 시골 지주들이 많았다. 그래서 젠트리는 종교 개혁을 열렬히 지지한 걸로 알려져 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가톨릭을 고수하는 젠트리도 상당수 있었고, 종교에 열성적이지 않은 대다수의 무리들은 잉글랜드 국교회로 편입되었다.
2.6. 자본가화
따라서 대륙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청교도는 젠트리 중 소수였다. 그렇지만 런던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였고, 이들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게 권력과 가까운 법률가, 신학자, 교수, 군인, 상공인들은 튜더 왕조 시절 권력의 상층부에 편입되면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데다가 사상적으로 대륙 개혁신학 사상으로 무장하여 17세기부터 스튜어트 왕가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이 부분부터는 청교도 문서를 참조. 이후 이들은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상공업에 종사하여, 부를 쌓은 젠트리들은 자연스럽게 자본가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부르주아들은 젠트리와 달리 투표권을 얻지 못하였다.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프랑스 7월 혁명 이후에[16]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3. 결론
상술한 대로 젠트리는 영국의 제도적 특성상 법적 귀족은 아니나 사회적으로는 사실상 귀족이자 지배층 중 하나였다. 비록 신흥계층들이 포함되었다 해도 소수의 귀족 가문을 제외하면 사실상 다른 나라의 지방 귀족 내지 기득권층에 해당하며, 그런 점에선 중국 명청시대의 향신( 신사), 조선의 양반들과 비슷한 점도 있다고 할 수 있다.한편, 이전부터 젠트리들이 간간이 줄을 잘서거나 군공을 세우거나 왕실의 친인척이 되거나 하는 식으로 귀족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경우도 있어왔는데, 제임스 1세 시절에는 연 수입 50 파운드 이상의 젠트리들은 강제로 제임스 왕의 충실한 신하임을 증명하기 위해 명예로운(?) 준남작 작위를 사야 했다. 그러니깐 이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세금 뜯으려고 강제 구입.(...) 진짜로 안 사면 더 손해일 정도의 벌금을 때렸고, 찍히면 고등 재판소에서 꼬투리 잡아서 쳐넣기도 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사실상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권리와 대우를 받아온 귀족 및 젠트리로서는 생소한 제도였다.
4. 창작물
소설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일가나 만화 엠마의 남주인공 윌리엄 존스가 바로 젠트리다.폴아웃 런던의 주요 팩션 중 하나로 젠트리가 등장한다.
5. 관련 문서
[1]
물론 후술되어 있듯 이들 중 일부가 젠트리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들이 상향유동하여 젠트리로 편입된 것이지, 젠트리 정체성 자체가 이들 주류로 바뀐 것이 아니다.
[2]
부농이나 부르주아와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3]
다만, 이 지위는 한참 후대인
스튜어트 왕조 시대에 탄생하였다.
마르크 블로크는 이 작위가 재정문제를 해결할 겸 대륙식 귀족제, 즉 귀족증서의 수여를 통한 당사자 및 그 가계의 신분상 법적 특권 인정을 도입한 것이라고 본 바 있다.
[4]
이는 기사서임식과 같은 봉건적 의식을 포함했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요식화하거나 생략되어 문서만을 수여하게 되었다. 왕실이나 이에 준하는 영역제후들은 이러한 귀족제도를 관리하고자 귀족연감을 만들었고, 증서를 받아 이러한 명부에 실리게 될 때 일정한 금액을 납부하였다.
[5]
앵글로색슨 시대에도 장자상속이 우세하기는 했으나 경우에 따라 분할상속도 시행되었다.
[6]
그래서 법률상 작위보유 여부로써 자동으로 귀족인지를 판단하다보니 오히려 잉글랜드 내에서는 원래 귀족증서나 귀족명부라는 개념이 없었다.
[7]
장남 이하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공작,
후작인 경우에 'Lord/공'으로 불렸고,
백작,
남작,
자작인 경우엔 'Honourable/아너러블'로 불렸다. 딸들은 장녀 차녀 상관없이
공작,
후작,
백작의 딸일 경우 'Lady/레이디'로 불렸고,
남작,
자작의 딸일 경우 아들들과 같이 'Honourable/아너러블'로 불렸다. 자세한 것은
귀족/영국 문서의 예우경칭 문단 참고.
[8]
그래서 어느정도 고위 귀족이라 여러 귀족작위를 병합해서 가진 집안의경우는 장남이나 장손에게 미리 하급 작위를 물려주어서 일찍부터 정식 귀족으로 만들어두는 경우도 흔했다.
[9]
중세는 원칙적으로 자유민이라면 신분상 동격인 사람들한테서 재판을 받았다. 따라서 귀족의 경우 기소되어도 귀족 재판소에서만 재판 받고
배심원도 전부 귀족이 선정되었으며, 귀족 사이에서도 격을 나누어 영역제후 등 상급귀족은 상급귀족끼리, 성주층 등 하급귀족은 하급귀족끼리 재판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10]
단 처칠은 상황에 따라서는 공작이 될수도 있었다. 처칠항목에도 있지만 사촌형인 9대 공작이 아들을 늦게 보아서 만일 아들을 못보고 9대공작이 사망했다면 윈스턴 처칠이 10대 공작이 되었을것 이라고 한다.
[11]
요먼 같은 경우는 연수입 2파운드 이상이어야 했다.
[12]
기존 어휘인 프랭클린이 새 어휘로 대체되어, 15세기 이후에는 주로 요먼이라 불리게 되었다.
[13]
이러한 차이에 관하여, 귀족과 비귀족 간 인구 차이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도
구체제 붕괴 전까지 왕족과 귀족, 성직자 모두 합쳐서 전체 인구의 2% 남짓이었는데, 비록 잉글랜드가 특유의 귀족제 탓에 이보다도 훨씬 적은 귀족수를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전체 인구보다 귀족이 적다는 특징은 프랑스도 매한가지였다. 특히 군대나 성직, 재력 등으로 그 지위를 얻은 신흥귀족(법복귀족) 대신 오랜 혈통에 근거한 전통귀족(대검귀족)만을 헤아린다면 훨씬 그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양국 간 권력의 개방성에 대한 차이가 상이한 결과를 낳았는데, 프랑스에서는 차츰 기득권 강화를 위한
사다리 걷어차기가 심화되면서 이것이 신분 상승의 막차를 타지 못한 채 남겨진 나머지
부르주아의 반발을 야기하였고, 잉글랜드에서는 의회와 내각에 젠트리의 진출이 허용되고 부르주아도 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극단적인 형태로 갈등이 표출되지 않았다.
[14]
올리버 크롬웰은
토머스 크롬웰의 모계 방계 친족인데, 그 시조는 본래 한미한 출신이었으나 토머스 크롬웰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토지재산과 권력에 처음 접근하였으며, 조상들이 대대로 법률가나 군인, 정치인 등 능력으로써 출세하여 그의 시대에는 이미 수대에 걸친 헌팅던의 명사이자 대지주였고, 그 자신도 법관이자 군인이었다.
[15]
예컨대 크롬웰만 하더라도 잉글랜드 내전기 동안 여느 지휘관들이 그러하듯 자기 재산으로
기병연대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귀족이나 젠트리 반열이 아니고서야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6]
7월 혁명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냥 그 이전부터 영국 내에서 만연한 부르주아의 불만이 반영되어서 투표권을 얻은거라 볼 수도 있어서 애매하니 그냥 '이후'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