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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
캐서린 헵번 KATHARINE HEPBU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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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284 Hollywood Blvd. | }}}}}}}}} |
}}} ||
<colbgcolor=#CD5C5C><colcolor=#ffffff> 캐서린 헵번 Katharine Hepburn |
|
|
|
본명 |
Katharine Houghton Hepburn 캐서린 호튼 헵번 |
출생 | 1907년 5월 12일 |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 |
사망 | 2003년 6월 29일 (향년 96세) |
미국 코네티컷 주 펜윅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
학력 | 브린마 칼리지 (학사 / 1924 – 1928) |
신체 | 172cm |
활동 | 1928년 – 1994년 |
부모 |
아버지 토머스 노발 헵번 (1879년–1962년) 어머니 캐서린 마서 호튼 헵번 (1878년–1951년) |
배우자 | 러들로 어그던 스미스 (1928년–1934년; 이혼)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 |
별명 |
Kate The Great Kate First Lady of Cinema |
서명 | |
링크 |
[clearfix]
1. 개요
지성과 진정한 미국적 가치에 뿌리를 두는 면모로 인해 다른 할리우드 아이콘들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배우. An actor of substance whose intelligence and rootedness in true American values set her apart from other Hollywood icons. ―
더 가디언
|
사회가 여배우에게 기대하는 요구에 따르길 거부했다. 노골적으로 말하고, 자주 맨얼굴을 보였고, 여성의 바지 착용을 괴상하게 보던 시절에도 늘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3] 피임약과 낙태를 대놓고 옹호하기도 했다.[4] 이는 미국 여성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20세기 "현대 여성"이 구성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헵번은 "세상과 그 안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이해하고자 하며 "분투하는 여성들 전체"를 대변했다. 또한 동료 배우들이 감독이나 다른 배우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성격이었다.[5]
미국에서 보통 "First Lady of Cinema"라고 하면 릴리안 기시를 가리키지만 헵번도 간혹 이 명칭으로 불린다. 영화가 처음 발명 됐을 때 영화배우, 특히 여성 영화배우는 연기보다는 수동적 행동이나 이미지를 부각 시키는 게 주된 관건이였다. 이는 할리우드 초창기에 특정 이미지가 강한 여성 스타들이 주를 이룬 이유이기도 했다. 헵번은 이런 기존 체제에 반발해 이미지 틀을 배제하고 주관이 강한 연기로 영화사를 장식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또한 그레타 가르보 등 대부분의 1900년대생 배우들과는 달리 데뷔작부터 유성영화에 출연해[6] 처음부터 특유의 발성은 물론 강한 성격 묘사를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2. 어린 시절
|
4살 때 |
1907년 5월 12일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의 부유한 집안에서 6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캐서린 마서 호튼 헵번[7]은 마거릿 생어의 동지였으며, 코네티컷 여성참정권 협회의 회장을 역임한 명망 있던 운동가로, 헵번을 여성참정권 운동에 동참시켰다. 아버지 토머스 노발 헵번[8]는 하트퍼드 병원의 비뇨기과 전문의로, 대중에게 성병에 대해 알리는 시민단체 미국 사회 보건 협회[9]를 설립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편견과 달리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좋은 어머니들이라는 점을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헵번을 포함한 자녀들과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몇 번 실린 적이 있다.
|
|
둘 다 제일 오른쪽이 헵번이다 |
헵번의 부모님은 머리를 스스로 짧게 치고 자신을 "지미(Jimmy)"라고 불러달라고 하던 활동적인 헵번을 하트퍼드 골프 클럽에 등록 시켜줬다. 헵번에 따르면 양산을 들고 따라다니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캐디가 총 두 명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유서 깊은 부촌 펜윅(Fenwick)에도 자주 데려가 헵번이 다양한 운동 과외도 받게 했다. 1913년 가족이 펜윅에 휴가용 저택을 구매하며 제2의 집으로 삼은 덕분에 헵번은 코네티컷 여성 주니어 골프 대회에 출전해 준결승전까지 오르고 기사에 언급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10] 이후 골프는 헵번의 일상에서 큰 일부분이 되었다. 프로 골프선수 파드라그 해링턴은 우연히 헵번이 골프 하는 사진을 보고 그립이 훌륭하다고 감탄하기도 했다.[11]
진보 성향의 부모님은 토론을 통해 헵번에게 독립심, 인내, 용기를 길러주었다. 헵번은 빅트롤라 축음기가 필요한 나바호족 원주민이 있다는 걸 안 뒤 자발적으로 펜윅의 집 뒷마당에서 친구들과 미녀와 야수 공연을 올리고 이웃들에게 입장료로 50센트씩을 받아 총 60달러를 모금해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헵번은 "특별한 부모님들"과 같은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 어린 시절의 경험이 배우로서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헵번은 평생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
외가 친가 양쪽 가계에 모두 자살 경향이 있었다. 변호사였던 헵번의 큰아버지는 1915년 자택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고, 의사였던 작은아버지는 1921년 차고를 완전히 밀폐하고 차의 엔진을 켠 채로 운전석에 앉아있다가 질식사했다.[12]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형은 각각 1892년과 1897년에 총으로 자살했다. 전부 신변에 뚜렷한 문제도 없었다.
이런 경향을 물려받은 오빠 톰[13]도 여러 번 자살 조짐을 보였다. 집에서 올가미를 목에 걸었다가 들키기도 했다. 걱정한 부모님은 기분 전환을 하라고 1921년 오빠를 헵번과 함께 대모인 메리 토울[14]의 저택으로 여행을 보냈는데, 오빠는 우연히 낮에 보게 된 연극 속 장면을 모방해 대모 댁 다락방에서 홑이블을 찢어 급조한 밧줄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그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헵번이었다. 당시 오빠는 15살이었고 헵번은 13살이었다. 경찰의 면밀한 조사 결과는 오빠의 강렬한 자살 의지를 낱낱이 드러냈지만,[15] 부모님은 그저 장난을 치다가 잘못된 거라며 현실을 부인하고 다른 자식들에겐 이를 함구했다. 그러나 이 비극에 대한 은밀한 공유로 헵번과 부모님의 유대는 유달리 깊어졌다.
그러나 헵번은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불안에 시달렸다. 다니던 사립여학교[16]를 자퇴하고 홈스쿨링을 하게 됐다. 그 뒤로 헵번은 오빠의 생일인 11월 8일을 자신의 생일로 삼고 살았다. 헵번은 1991년이 되어서야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회고록 "Me: Stories of My Life"를 통해 자신의 진짜 생일을 대중에 고백했다.
3. 경력
3.1. 무대배우
1924년 어머니가 졸업한 사립 여자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브린마 칼리지에 입학했다. 원래는 죽은 오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대학에서 기본 화학 코스조차 따라가지 못해[17] 성적이 전부 바닥을 치자 포기하고 역사와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곧 헵번은 연기에 관심을 가졌지만 성적이 낮아 성적 요구 조건이 있는 대학 연극에 출연할 수 없었다. 4학년 때 겨우 성적을 올려 판도라를 소재로 엘리자베스 시대에 쓰인 희극 "The Woman in the Moon"의 주연을 따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헵번은 이를 계기로 진로를 연기로 잡기로 결심하고 1928년 상업 무대에 데뷔한 이래 4년간 연극판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첫 상업 주연작에선 연습 때 자주 지각했고, 대사 실수 등 미숙한 연기마저 혹평을 받아 잘렸다. 이때부터 헵번은 특유의 목소리와 연기력을 개선하기 위해 음성교사와 드라마 교사에게 과외를 받으며 배우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뒤로도 공연에서 쫓겨나는 일은 몇 번이나 반복됐다.
1928년에 필립 배리[18]의 "Holiday"에서 겨우 주인공 대역이 됐을 땐 대학 동창과 결혼하기 위해 2주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나중에 이 희곡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1938년 영화, 그리고 배리가 1939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 <필라델피아 스토리(The Philadelphia Story)>(1940)는 헵번의 대표작들이 된다.
무대가 그리워진 헵번은 다시 공연계에 돌아왔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연기력 부족이 문제시 돼 여러 공연에서 몇 번 더 해고됐다. 필립 배리도 연기력 문제로 헵번을 내보낸 적이 있다.
헵번은 그대로 꺾이지 않았고, 드디어 1932년 3월부터 뉴욕 모로스코 극장[19]에서 올라간 연극 "전사의 남편(The Warrior's Husband)"에서 주연을 맡은 헵번은 호평을 받았다. 헵번이 연기한 신화 속 인물 안티오페는 헵번 본인처럼 열정적인 면모가 있었다.
|
연극 "전사의 남편" |
3.2. 할리우드로의 성공적 진출
할리우드 에이전트 릴랜드 헤이워드[20] 밑에서 일하던 한 스카우트가 "전사의 남편"에서 헵번을 발견했다. 헤이워드는 헵번이 RKO 라디오 픽처스 제작예정작인 <이혼 증서>에 존 배리모어의 딸 역할로 스크린 테스트를 받게 했다. 감독 조지 큐커[21]는 헵번을 인상 깊게 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헵번은 신인으로서는 많은 양이었던 주급 1,500달러를 요구했다. 큐커는 그 요구를 영화사가 받아들이도록 도왔고, 영화사에서는 일단 3주 가계약을 했다. RKO의 우두머리였던 데이비드 O. 셀즈닉[22]은 헵번의 외모를 맘에 안 들어했지만 색다른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특별한 기회"라고 말했다. 셀즈닉은 헵번이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큐커는 헵번이 성질은 있으되 자의식과 지성도 갖춘 배우라고 생각했다.헵번은 1932년 7월 25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주에 도착해 연극과 다른 영화 연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영화 산업에 빠져들었다. 1932년 9월 30일에 개봉한 최루성 신파극 <이혼 증서>는 흥행에 성공했고 헵번도 호평을 받았다. 당시 뉴욕 타임즈 평론가 모던트 홀은 헵번의 연기에 대해 "매우 좋다... 헵번의 성격 묘사는 현재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연기 중의 하나이다"라고 평하였다.
헵번은 1933년에 개봉한 영화 <아침의 영광>으로 1934년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최다 수상 기록(4회)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리얼리(really)를 랠리(rally)처럼 들리게 하는 헵번 특유의 발음이 화제가 돼 30-40년대 미국 대중문화계에서 일종의 밈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또한 1933년 대성공을 거둔 영화 중 하나인 < 작은 아씨들>에서 주인공 조세핀 마치 역을 연기해 1934년 제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는다. 헵번도 조 마치 역을 가장 좋아하고 자랑스러운 연기 중 하나라고 여겼다. 조 마치의 성격이 털털하고 활달하다는 설정인데, 헵번과 닮은 면도 있다. 이렇게 1933년에 개봉한 두 영화가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모두 성공하면서 헵번은 할리우드와 RKO의 대표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3.3. 슬럼프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제작비에 비해 흥행 수익을 크게 거두지 못했다. 1934년 <기적의 처녀(Spitfire)>와 <The Little Minister>는 헵번의 자신감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브로드웨이 무대로 돌아가 "호수(The Lake)"를 공연했지만 혹평 세례만 받았다. 대중은 헵번이 회사돈을 횡령한 아버지와 같이 도망친 뒤 케리 그랜트와 함께 셋이 사기를 치고 다니는 <실비아 스칼렛>과 작곡가 역의 헵번이 지휘자인 남편과 맞바람을 시도하는 <Break of Hearts>도 맹렬히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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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스칼렛> |
1935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두 번째로 후보에 올려준[23] 영화 <Alice Adams>의 성공을 제외하면 흥행 성적이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1936년 개봉한 <A Woman Rebels>에선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유부남 애인의 아이를 조카로 위장해 기르는 여성을 연기했는데 헵번과 감독조차 상영 취소를 부탁할 정도의 망작이었고, 명감독 존 포드가 연출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도 흥행과 당대 비평을 전부 망쳤다. 할리우드를 떠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 헵번은 동부로 돌아와 1937년까지 연극 " 제인 에어" 투어를 했다.
결국 1938년에 극장주 연합[24]으로부터 마를레네 디트리히, 메이 웨스트, 그레타 가르보, 조운 크로퍼드, 에드워드 아놀드 등과 함께 '흥행국밥'[25]으로 불리게 되면서 할리우드에서의 커리어에 차질이 생긴다. < 폭풍의 언덕> 여주인공 역도 이 때문에 물을 먹었다.
언론과의 관계도 껄끄러워졌는데, 언론과 인터뷰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주는 걸 거절하는 등 언론에 불친절한 동시에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것 자체는 매우 좋아해 오만하고 이중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헵번 본인도 70년대부터 언론에 친절해지면서 몇 번 실토했듯이 헵번은 명성, 관심, 인기를 그 무엇보다 좋아하고 추구하는 배우였다. 오히려 헵번은 이런 성향 덕에 할리우드에서 스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헵번은 자신의 사생활 보도를 뜻대로 다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의 속성을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팬들에게 사인해주길 거부하고 무례하게 구는 행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대중의 평판 역시 점점 안 좋아졌다.[26] 결국 헵번이 연기했던 Catherine of Aragon에서 따온 Katharine of Arrogance(오만한 캐서린)이라는 별명이 생겨 80년대까지[27] 헵번을 일컫는 호칭으로 자주 쓰였다.[28]
급기야 같은 해 RKO에서 B급 영화의 주연을 맡으라는 제의까지 들어왔다. 헵번은 이를 거절하고 아예 스스로 RKO와의 계약을 파기했다.
헵번은 그나마 흥행이 아주 심각하게 나쁘진 않았던 <스테이지 도어(Stage Door)>(1937년) 덕에 RKO가 제작하고 하워드 혹스가 감독한 코미디 <베이비 길들이기>(1938)를 계약해 케리 그랜트와 주연을 맡았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평도 그닥 좋진 않았다. 영화의 미친 코미디 감각이 당대엔 잘 이해 받지 못한 것이 결정적 실패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50년대부터 정당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이 영화가 워낙 강한 인상을 남긴 덕에 헵번 역시 로런 버콜이나 캐롤 롬바드처럼 혹스식 여성을 맡은 배우로 꼽힌다.[29] 다시 그랜트랑 만난 1938년 컬럼비아 픽처스 제작의 코미디 영화 <휴일(Holiday)>은 당대에도 좋은 평을 받았지만 흥행엔 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헵번이 코미디와 어둡고 진지한 드라마 양쪽 모두에 총명하고 민감한 재능을 갖고 있음을 증명했다.
3.4. 재기
이대로 지는 스타로 남을 것 같던 헵번은 필립 배리의 희극 "필라델피아 스토리(The Philadelphia Story)"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 연극은 헵번이 주연을 맡았을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 지원까지 했고[30] 1939년 3월 뉴욕 브로드웨이 슈버트 극장에서 공연돼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모두 성공을 거뒀다.헵번의 당시 연인이던 하워드 휴즈는 이 연극으로 헵번이 다시 스타덤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초연 전에 이미 영화 판권을 헵번에게 사준 바 있었다. 연극의 성공 이후 헵번은 당대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사인 MGM에 판권을 팔면서 자신을 주연으로 쓸 것과 감독은 조지 큐코어, 두 남자 주연은 케리 그랜트와 제임스 스튜어트를 기용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대로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는 1940년에 개봉한 영화들 중 가장 성공한 작품들 중 하나로 남게 됐고, 헵번은 재기에 성공한다. 헵번은 영화 속 배역을 통해 기존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재창조 해냈는데, 그동안 헵번에게 씌여있던 부정적인 이미지가 캐릭터 속에 생생하게 살아나게 만들어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심한 오해를 받는 여인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헵번은 이 영화로 1941년 세 번째로 아카데미에 후보 지명되었다. 한편 연극 "필라델피아 스토리"는 장기 공연됐는데, 1940년 3월에 뉴욕 초연이 끝나고 1940년 10월부터 1941년까지 워싱턴 D.C.와 시카고 등에 순회공연을 다녔다.
헵번은 이후 1940년대에 MGM과 스타 계약을 체결했고, 계속 왕성하게 주연급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한다. 1942년 10월엔 브로드웨이로 잠시 돌아와, 다시 헵번을 염두에 두고 쓴 필립 배리의 연극 "Without Love"에 주연으로 출연해 16주 동안 매진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3.5.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만남
헵번은 1941년에 환상의 짝꿍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스펜서 트레이시다. 1941년 헵번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그 해의 여자>의 각본에 직접 관여하고 다시 감독 및 주연 선택권을 가졌는데, 남자 주인공으로 트레이시를 추천한 것이다. 헵번의 선택대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42년 2월에 개봉해 성공을 거뒀고, 헵번은 네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됐다.헵번은 트레이시와 사귀게 됐지만 유부남이었기에 불륜 관계였는데, 트레이시가 이혼을 완강하게 거부해 헵번은 평생 트레이시와 결혼하지 못했다. 트레이시는 알코올 의존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자주 우울해했는데, 헵번은 그가 편안해지도록 곁에서 헌신하느라 1943년 "Without Love" 폐막 이후 1950년에야 다시 연극 무대에 나올 정도로 일이 줄어들었다.
한편, 1944년 펄 벅 원작의 <Dragon Seed>에서 야심차게 중국인 농부를 연기했지만, 영화는 적자를 봤다.
트레이시-헵번 커플의 인기에 MGM은 둘을 짝으로 맺은 영화를 계속 만들어냈는데 눈 먼 영웅 숭배를 주제로 한 <키퍼 오브 더 플레임>(1942)처럼 흥행에 실패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흥행 성적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했고 1949년 조지 큐코어 연출의 코미디 영화 <아담과 이브>가 트레이시-헵번의 40년대 주연 영화 중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둘의 주연 영화 중 최고로 평가 받았고, 1992년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선정, 보존되었다.
1950년 1월 어느덧 40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헵번은 " 뜻대로 하세요"에서 로잘린드 역을 맡아 뉴욕 코트 극장[31]에서 공연했다.
그 뒤 존 휴스턴이 연출한 <아프리카의 여왕>에 고지식한 독신 선교사 역으로 나와 험프리 보가트와 연기 대결을 했는데, 헵번의 첫 테크니컬러 영화였다. 이 영화는 주로 벨기에 콩고 로케이션에서 촬영됐다. 휴스턴은 전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모델로 삼을 것을 주문했고, 1951년 말 개봉 결과는 성공이었다. 대중의 지지와 비평가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고, 햅번은 다섯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보가트는 자신의 유일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엔 트레이시가 헵번보다 인기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는데, 10년 전 찍은 <필라델피아 스토리> 이후 트레이시 없이 만든 이 첫 번째 성공적 영화를 통해 단독으로도 흥행이 가능함을 증명하며 인기를 재확립했다. 헵번은 이 영화를 시작으로 1950년대에 자주 해외로 나가 작업하며 다양한 연기의 기회로 삼았다.
1952년 여름엔 조지 버나드 쇼의 "The Millionairess"를 런던의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New Theatre에서 10주간 연기했다. 연기에 대한 평가는 갈렸지만 인기는 확실히 있어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다시 10주간 공연했다.
한편 헵번은 MGM과의 계약에 따른 마지막 작품인 스포츠 코미디 <팻과 마이크>(1952)로 트레이시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 수상한 프로모터의 도움을 받게 되는 골프/테니스 분야 여성 선수를 다룬 이 영화는 헵번의 뛰어난 운동신경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커플의 주연 영화 중 호평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이며 헵번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다. 이 작품으로 헵번은 1953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뮤지컬/코미디 부문)에 처음으로 후보 지명되었다.
1955년 데이비드 린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여정>에서 다시 한 번 깐깐한 독신여성을 연기했는데 여기에선 사랑 찾기에 성공한다. 헵번은 나중에 린이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훌륭한 감독이라고 말했다. 린 역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헵번이라고 밝혔다. 이 영화를 찍다가 본인의 잘못으로 수로에 떨어지는 바람에 만성 안감염증에 걸렸지만 그게 헵번을 멈추게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헵번은 그대로 올드 빅의 호주 셰익스피어 투어에 참여해 "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캐서린, " 잣대엔 잣대로"의 이사벨라, " 베니스의 상인"의 포셔 역을 맡았다. 1957년에 고향의 아메리칸 셰익스피어 극장[32]에서 포셔를 다시 선보이면서 " 헛소동"의 베이트리체도 연기했는데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1962년엔 유진 오닐 희곡이 원작인 < 밤으로의 긴 여로>, 1967년엔 트레이시의 마지막 작품인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나왔다.
3.6. 후반
스펜서 트레이시의 죽음 이후에도 헵번은 왕성하게 활동했다.피터 오툴은 트레이시가 사망한 바로 그 주에 헵번에게 <The Lion in Winter>의 대본과 짧은 메모를 보내며 출연해달라고 사정했다. 긴장감이 들끓는 이 영화에서 헵번은 엘레오노르 다키텐 역[33]을 맡아 헨리 2세 역의 오툴과 팽팽한 연기력 대결을 했다. 촬영 당시 헵번은 61세로 36세의 오툴보다 25세 연상이었다. 오툴은 평생 함께 연기한 여배우들 중에서 헵번을 가장 흠모했다.
1969년 막을 올린 뮤지컬 "Coco"는 1953년 코코 샤넬이 은퇴한지 15년 만에 고급 양장 패션의 세계로 돌아와 파리에 상점을 내는데 프랑스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아 파산하기 직전에 미국의 유명 고급 백화점들인 삭스 피프스 애버뉴(Saks Fifth Avenue), 블루밍데일스(Bloomingdale's), 베스트 앤 컴퍼니(Best & Company), 오바크스(Ohrbach's)에서 주문이 들어오면서 기사회생한다는 얘기다. 헵번이 참여한 유일한 뮤지컬로 앙드레 프레빈[34]이 작곡가였다. 토니상 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1981년 <황금 연못>으로 마지막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마지막 극장용 영화 주연작인 <Grace Quigley>(1985)를 찍던 1984년부터 눈에 보일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빠져 활동을 차차 줄이며 은퇴 준비에 들어간다.
4. 말년과 죽음
80세였던 1987년 인터뷰에서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 그것은 멋지고 긴 꿈일 것이다" 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까지도 나이에 비해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1994년 <러브 어페어> 출연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악화되는 건강 탓에 은퇴를 해야 했으며 이 후 10여년간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투병생활을 하면서 헵번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펜윅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1996년 겨울 폐렴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으며, 거의 죽을 뻔 했으나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이 후 1997년부터는 매우 허약해지며 말과 식사가 줄어들었고 치매 증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망하기 1달 전인 2003년 5월에는 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목에서 종양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렇게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헵번은 비밀리에 자신의 전기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기작가로 풀리쳐상을 수상했던 작가 스콧 버그가 20년동안 헵번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원고를 작성했으며, 2002년 최종 작성이 완료되어 보관되었다. 헵번은 자신이 죽으면 이 전기를 발간해달라고 부탁했다.
2003년 6월 29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임종 당시 "전 약하지 않아요... 전 죽지 않아요. 전 강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겼고, 가족들 앞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죽기 전 자신에 대한 추도식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는 추모행사는 진행되지 않았고, 가족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장례식을 치른 뒤 하트퍼드에 위치한 시디 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아카데미 시상식은 단순한 In Memoriam이 아닌 줄리아 로버츠를 내보내 헌정 연설을 진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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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 中에서 |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헵번이 "국가 예술의 보물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고 직접 애도성명을 발표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헵번이 연극에 끼친 업적을 기리기 위해 7월 1일 거리 등불을 껐다. 2004년에는 헵번의 소원에 따라 유품이 소더비 경매에서 580만 달러로 팔렸다.
5. 주요 출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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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증서(A Bill of Divorcement), 1932 - 시드니 페어필드(Sydney Fairfield) 역
데뷔작이다. 프리코드. 조지 큐코어 연출. 1920년대초 영국에서 여성이 남편의 정신이상을 이혼 사유로 들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자 이를 소재로 삼은 1921년작 희곡이 원작이다. 같은 희곡 바탕으로 1922년에 영국에서 동명의 무성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RKO는 1940년 모린 오해러와 애덜프 만주를 기용해 이를 다시 개작했다. 9월 30일 개봉.
영국 배경. 마거릿 메그 페어필드(Margaret "Meg" Fairfield, 빌리 버크 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15년째 갇혀있는 남편 힐러리(Hilary Fairfield, 존 배리모어 분)으로부터의 이혼 증서("a bill of divorcement")를 완결 짓고 연인 그레이 메러디스(Gray Meredith)와 결혼할 생각으로 들떠있다. 그러나 힐러리는 정신병원을 탈출해 사랑을 호소하고, 힐러리의 정신병은 사실 유전이라 딸 시드니 역시 발병할 거란 사실이 밝혀지는데...[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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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스트롱(Christopher Strong), 1933 - 레이디 신시어 대링튼(Lady Cynthia Darrington) 역
The Great Desire, The White Moth로도 유통되었다. 프리코드. RKO. 도로시 아즈너 연출, 조이 에이컨스 대본. 3월 31일 개봉.
분방한 런던 상류층 사교사회. 한 파티에서 진행한 물건 찾아오기 놀이에서 크리스토퍼 스트롱 경(Sir Christopher Strong, 콜린 클라이브 분)은 '5년 이상 결혼생활했으면서도 아내에게 신의를 지킨 남성'의 표본으로, 비행에만 전념해온 신시어는 '20살이 넘었는데 연애를 안 해본 여성'의 사례로 선택돼 파티장에 불려오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하필 이 두 사람이 불륜 관계에 접어든다. 신시어는 세계일주 비행 경주에 나서 독일,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까지 중계된 끝에 우승해, 차를 타고 성대한 시가 행진까지 하며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신시어가 위험한 비행을 단념하길 바라는데...[36] 크리스토퍼의 딸이 유부남과 불륜하는 보조 서사도 비중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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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영광(Morning Glory), 1933 - 이버 러블레이스(Eva Lovelace) 역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프리코드. 조이 에이컨스의 동명 희곡이 원작. 로우얼 셔먼 연출. 1958년 개작 <Stage Struck>이 나왔다. 4월 18일 개봉.
매우 순진하고 이상에 찬 뉴잉글랜드 출신의 신인 배우 이버는 힘 있는 극장주이자 제작자 루이 이스턴(Louis Easton, 애덜프 만주 분)과 하룻밤을 보낸 뒤 연인이 됐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버는 순간 이용 당했을 뿐이고 루이는 연락을 끊어버린다. 이버를 짝사랑하는 젊은 극작가 조저프 쉐리던(Joseph Sheridan,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 분)은 진실을 알지만 이버에게 상처를 줄까봐 함구한다. 조저프는 루이가 제작하는 자신의 신작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스타 리터 버넌(Rita Vernon, 메리 덩컨[37] 분) 대신 이버를 주연으로 써야한다고 주장한다.[38]
-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33
- Alice Adams,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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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스칼렛(Sylvia Scarlett), 1935 - 실비어 스칼렛/실베스터 스칼렛(Sylvia Scarlett/Sylvester Scarlett) 역
케리 그랜트와의 첫 협업작이다. 조지 큐코어 연출, 글래디서 엉거 등 대본, 제인 로링 편집. 1930년대의 손꼽히는 흥행실패작이나 헵번의 인상적인 남장 연기 덕에 자주 언급된다. 초반에 헵번이 프랑스어 대사를 하는 장면이 꽤 자주 나온다. 12월 25일 개봉.
프랑스. 아버지 헨리(Henry, 에드먼드 그웬 분)가 속옷 공장 회계 장부를 담당하다가 횡령한 사실이 들통나자 실비어는 경찰을 피하기 위해 긴 양갈래 머리를 싹뚝 잘라 남장을 하고 실베스터라는 가명으로 아버지 헨리와 영국 해협을 오가는 정기선에 오른다. 실베스터/실비어는 배 위에서 보석밀수꾼 지미 몽클리(Jimmy Monkley, 그랜트 분)와 알게 되고 의기투합하여 일종의 사기 집단 " 삼총사"를 결성하는데... 자신을 남자로 아는 여성에게 입맞춤 당하는 장면이 있다. 중간에 실비어가 반하여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게 만드는 화가 마이클 페인(Michael Fane) 역으로 브라이언 어헌이 출연한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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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데이(Holiday), 1938
조지 큐코어 감독.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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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길들이기(Bringing Up Baby), 1938
하워드 혹스 감독.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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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스토리(The Philadelphia Story), 1940
조지 큐코어 감독.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
- 아프리카의 여왕(The African Queen),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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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Summertime), 1955
데이비드 린 연출.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비서로 일하는 미혼의 중년 여성 제인(Jane Hudson)이 평생 벼르던 베네치아 여행을 와서 현지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40] 산마르코 광장, 바포레토 등이 등장하며, 치자나무 꽃이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는 개체로 기능한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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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메이커(The Rainmaker), 1956
똑똑하고 가사일에도 뛰어나지만 평범하기 그지 없는 외모 때문에 노처녀로 늙어가고 있는 리지(Lizzie Curry)는 마을의 보안관을 오래 짝사랑 중이지만 가망이 없다. 이때 마을에 가뭄이 심해지면서 리지의 인생에 새로운 남자 빌리(Bill Starbuck, 버트 랭카스터)가 나타난다. 그의 직업은 다름 아닌 기우사(rainmaker)다.
- 지난 여름, 갑자기(Suddenly, Last Summer), 1959
-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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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on In Winter, 1968
앤서니 하비[41] 연출. 아들 리처드 1세 역에 안소니 홉킨스가 나왔다. 촬영 중 당시 신인이었던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를 쭉 지켜보다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마! 카메라가 널 의식하게 만들어!"란 중요한 조언을 해줬고, 이후 안소니 홉킨스는 이 가르침을 자신의 중요한 연기 지침으로 삼았다. 티머시 돌턴이 필리프 2세 역으로 나오며 스크린 데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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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ly Olly Oxen Free, 1978
The Great Balloon Adventure, The Great Balloon Race로도 유통되었다. 가족영화. 독립영화다. 버트 레널즈, 율 브리너가 나온 <Fuzz>(1972)를 연출한 리처드 A. 콜러 감독. 아역배우 데니스 딤스터는 나중에 감독으로 전향해 발 킬머 주연의 <Double Identity>(2009) 등을 연출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웃의 두 아이와 함께 열기구를 띄워 야외 오케스트라 공연장에 박수를 받으며 착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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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Quigley, 1985
블랙 코미디. 캐논 제작. 헵번의 마지막 극장용 영화 주연작이다. 70년대 말 작가가 조지 큐코어의 자택에 원고를 투척했는데 세 들어 살던 트레이시 때문에 자주 이곳에 드나들던 헵번이 읽고 맘에 들어해 콜롬비아 픽처스에서 스티브 맥퀸을 상대역으로 정해 제작을 진행하던 중 80년 맥퀸이 사망하면서 제작사와 남자배우 모두 교체되었다. <The Lion in Winter>(1968)로 헵번에게 아카데미의 영광을 안겨줬으며 TV 영화 " 유리동물원"(1973)도 감독했던 앤서니 하비가 연출했으나 평과 흥행 모두 실패했다. 1984년 칸에서 상영되었다. 나중에 작가가 재편집해 The Ultimate Solution of Grace Quigley라는 제목으로 다시 내놓았다.
삶에 지쳐 두 번 자살을 감행했으나 실패한 노부인이 자신을 내쫓으려던 집주인을 자신의 눈앞에서 죽인 살인청부업자( 닉 놀테 분)를 고용한 뒤 자신을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살인전문가가 집도하는 조력자살을 원하는,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을 더 소개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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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어페어(Love Affair), 1994
타히티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숙모 지니(Ginny) 역으로 바람둥이 남주인공 마이크(Mike Gambril, 워렌 비티 분)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여주인공 테리(Terry McKay, 아네트 베닝)에게 뼈때리는 거침없는 조언을 해주고, 마지막에 남주가 오해를 풀고 여주와 맺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였다. 카메오라고는 하지만 단순한 특별출연이 아니고 극중 아네트 베닝이 '피아노 솔로'를 허밍으로 부를 때 그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주는 명장면에도 함께했다. 헵번의 출연작 중 Stage Door Canteen(1943)와 더불어 주연이 아닌 단 두 작품 중 하나이자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42] 더불어 비티, 베닝이 부부의 연을 맺은 후 함께 출연한 첫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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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Can't Be Love, 1994 - 매리언 베넷(Marion Bennett) 역
CBS에서 방영한 TV 영화. 앤서니 하비 연출.
배우인 두 남녀가 50년만에 재회한다.[43] 예전에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품은 채로. 헵번의 실제 성격, 개인사, 배우 경력이 조금씩 비틀려 차용되었다. 촬영 당시 헵번은 86세, 앤서니 퀸은 78세였는데 영화 속에서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연하남으로 설정돼있다. 헵번의 개인 조수 역으로 제이슨 베이트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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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Christmas, 1994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TV 영화. 모든 영상매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생전 마지막 출연작이다.
5.1.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콤비작
더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 해의 여자(Woman of the Year), 1942
- 키퍼 오브 더 플레임(Keeper of the Flame), 1942 - 크리스틴 퍼레스트(Christine Forrest) 역
- Without Love, 1945 - 제이미(Jamie Rowan)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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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Adam's Rib), 1949
배우 루스 고든이 각본을 썼다.
- 팻과 마이크(Pat and Mike), 1952
-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 1967
5.2. 저서
- Me: stories of my life (1991)
- Kate, Remembered (2003)
6. 사생활
남편의 원래 이름은 러들로 어그던 스미스[44]였다. 그런데 헵번이 이대로 결혼하면 자신의 이름이 케이트 스미스라는 너무 평범한 이름이 돼버린다며 남편에게 성을 바꿀 것을 요청했다. 남편은 이에 순순히 따라 S. 어그던 러들로[45]로 개명했다. 그러나 헵번은 활동하면서 가정적이었던 남편의 존재를 동료들에게 숨겼다. 헵번의 형제들에 따르면 남편은 헵번의 의견을 늘 존중해주고 연기 경력을 다시 시작하는 걸 바로 찬성하고 응원해줬으며 헵번이 없을 땐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불평 없이 기다렸는데, 헵번은 그런 남편의 부드러운 태도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1933년부터 그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에이전트 릴랜드 헤이워드[46]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고, 결국 1934년 멕시코 유카탄에서 남편과 이혼했다. 그러나 남편은 헵번의 다른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이혼 후로도 몇 년 동안은 주요 행사 때마다 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헵번은 자신의 행동을 잘 후회하지 않는 성향이었음에도 남편에 대해서만큼은 크게 뉘우쳐 나중에 이 당시의 자신은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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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러들로 어그던 스미스 | 릴랜드 헤이워드 |
6.1. 존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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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은 아직 헤이워드와 사귀고 있던 중에 두 아이가 있던 유부남 감독 존 포드와도 사귀기 시작했다. 헵번은 심지어 포드를 본가에까지 데려가 부모님 및 형제들에게도 소개했다. 포드와 결혼하기 위해 포드의 아내에게 150,000달러를[47] 줄테니 포드와 헤어져 달라고 했으나 거절 당했다.
한편, 헵번이 포드에게 집중하는 동안 헵번과 사이가 멀어진 헤이워드는 헵번의 바람에 되갚아주기 위해 헵번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던 에드너 퍼버 희곡 바탕의 연극 "Stage Door" 주연을 마거릿 설러밴[48]에게 넘겨줬다. 급기야는 설러밴과 사귀기 시작해 1936년 결혼했다.
6.2. 하워드 휴즈
포드와 아직 사귀는 중이었던 1937년 1월, 케리 그랜트가 자신의 친구라며 미남 괴짜 거부 하워드 휴즈를 소개한다. 처음엔 응하지 않았지만 휴즈가 헵번이 다니던 골프장인 벨에어 컨트리 클럽[49]에 나타난 뒤 매일같이 데이트하게 되었다. 그리고 1월 22일 LA 신문들은 일제히 휴즈와 헵번의 결혼 관측 기사를 낸다. 헵번은 그 뒤로도 몇 주 동안 휴즈와 계속 공개적으로 만남을 가져 언론에 대서특필 되고 있는 와중에도 포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고민 끝에 휴즈와 끝내고 포드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했지만 그간의 언론 보도를 다 받아본 포드는 당연히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그해 5월 헵번은 포드를 포기하고 휴즈와 동거를 시작한다.헵번은 휴즈 덕에 누릴 수 있게 된 호화로운 일상과 언론 및 대중의 관심을 매우 반기며 행복하게 즐겼다. 오슨 웰스에 따르면, 헵번은 휴즈와의 성생활에 대해서까지 숨김없이 얘기하고 다니기도 했다. 헵번은 말수가 적고 어색한 태도의 휴즈를 ' 세례자 요한'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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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은 매우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자신과 닮아있는 휴즈에게 동질감을 느꼈지만 존 포드나 후에 만나게 되는 스펜서 트레이시와 달리 휴즈를 사랑하진 않았다. 휴즈가 다른 여성들을 만나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휴즈가 제공하는 역동적이고 화사한 생활과 휴즈 덕에 어딜 가나 기자들이 몰려든다는 점이 헵번을 계속해서 크게 만족시켰을 뿐이었다. 1938년 휴즈의 청혼을 받았을 때 헵번은 당연히 이 생활상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하려고 바로 부모님께 인사 시켰지만, 부모님과 휴즈는 바로 서로를 싫어하게 됐다. 휴즈는 홀로 자택으로 돌아갔고, 가족들의 인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헵번은 휴즈를 잡지 않았다. 그 뒤로 휴즈와 헵번의 관계에선 이렇게 정식 절차 없이 헤어졌다 붙는 과정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이 둘의 연애사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 에비에이터>에 어느 정도 묘사되어있는데, 영화 속 모습이 다 실제의 반영은 아니다.
6.3. 스펜서 트레이시
아직 휴즈와 사귀고 있던 1941년, <우먼 오브 더 이어>를 찍으면서 두 아이가 있는 유부남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를 만나자마자 휴즈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트레이시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헵번은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9편의 영화를 같이 찍었다.트레이시는 첫 만남부터 헵번에게 무례하게 굴었지만 트레이시에게 크게 반한 헵번은 개의치 않았다. 트레이시는 사귀게 된 이후로도 수십 년간 매일같이 헵번을 다른 동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모욕했지만 헵번은 단 한 번도 반박하지 않고 트레이시의 지적과 명령에 순응했다. 헵번은 트레이시 근처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그의 모든 행동과 말에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동료 배우들은 헵번이 수시로 트레이시의 몸단장을 챙기고 마사지를 해주는 걸 자주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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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이 청동으로 주조한 트레이시의 두상 |
헵번은 포드 때와 마찬가지로 트레이시와 매우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신체 기관 전반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청각장애인 아들을 평생 간병한 아내[50]를 존경해 이혼을 강경히 거부했다. 트레이시가 헵번을 자신의 공간에 재우는 걸 싫어해서 헵번은 트레이시와의 동거조차 좌절 당하고 각자의 거주공간을 유지해야했다. 트레이시는 베벌리힐스 호텔에서, 헵번은 배우 존 길버트[51]의 옛 자택에서 지냈다.
자기파괴적 성향의 트레이시는 방문을 잠그고 알몸이 되어 눈에 뵈는 게 없을 때까지 혼자 술을 들이키곤 했다. 그래도 헵번은 혹시 트레이시가 자신을 필요로 할 일이 생길지 모른단 생각에 트레이시의 호텔 방 앞 복도에서 잠들 때가 많았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직원에게 부탁해 문을 따고 방에 들어가 자신의 분비물로 더럽혀진 채 잠들어있는 트레이시의 몸을 닦아주었다. 게다가 트레이시는 불면증으로 하루에 두세 시간 밖에 잠들지 못했고, 낮엔 커피와 각성제로 버티고 있었다. 갈수록 짜증이 늘어 헵번에게 더 심하게 대하기 시작했지만, 헵번은 불평없이 버텼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사후에 트레이시가 술에 취해 자신을 때린 적이 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1950년부터 트레이시는 헵번의 권유로 감독 조지 큐코어의 오두막 한 채를 빌려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헵번은 집주인인 조지 큐코어에게 자기 대신 트레이시의 상태를 체크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레이시는 이 오두막에도 헵번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트레이시를 만난 뒤 트레이시에게만 충실해진 헵번과 달리[52], 트레이시는 1952년 <사선을 넘어서(Plymouth Adventure)>를 찍으며 진 티어니와 이중 바람을 피웠다. 자잘한 바람까지 따지자면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1956년 알콜 중독과 약에 대한 의존으로 완전히 망가진 트레이시는 MGM에서 계약을 취소 당한다. 헵번은 옛 연인 존 포드에게 그의 차기작 <마지막 함성(The Last Hurrah)>에 트레이시를 캐스팅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1958년 트레이시와 포드는 28년 만에 협업하게 된다.
한편, 일부에 잘못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트레이시의 아내 루이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용인해준 적이 없다. 루이스는 죽을 때까지 트레이시의 아내로 남기를 원했고, 언제라도 헵번과 트레이시가 관계를 끝내고 트레이시가 집에 돌아오길 바랬다. 트레이시와 헵번이 그 소원을 평생 들어주지 않았을 뿐이다. 헵번은 트레이시와의 관계 내내 아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트레이시의 공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러나 트레이시와 헵번의 불륜이 대중에 새어나가지 않게 가장 고생한 사람은 MGM의 언론 담당인 하워드 스트리클링[53]이었다.
트레이시가 병환으로 앓던 말년 5년 간 헵번은 그를 간호하기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중단했다. 트레이시는 호흡기, 간, 방광, 신장이 다 망가졌고, 전립선 비대증과 고혈압에 시달렸다. 기억도 온전치 않았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촬영장에 24시간 붙어있었다. 헵번의 존재가 거슬려서 촬영에 방해가 된다는 트레이시의 불평에 헵번은 최대한 트레이시의 눈에 안 띄게 숨어서 뜨개질을 하며 대기하다가 쉬는 시간마다 위궤양에 도움이 되는 우유와 약을 먹였다.
1963년 트레이시는 산소호흡기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결국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한 걸음에 달려온 아내 루이스는 트레이시가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트레이시는 다시 조지 큐코어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헵번도 이 오두막에 들어갔다. 다만 트레이시와 같은 방에서 지내진 못하고 식모방에서 자야했다. 트레이시는 결국 1965년 전립선을 절제했고 그 과정에서 거의 죽을 뻔 했다. 헵번은 1967년 트레이시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찍을 땐 트레이시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트레이시의 출연료는 트레이시가 촬영을 다 완성하면 받겠다'는 조건을 단 조건부 날인 증서를 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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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지 않은 손님> 촬영장 |
트레이시는 1967년 사망했다. 헵번은 아내 루이스가 오기 전에 급히 오두막에 있던 자신의 짐을 다 빼내야했다.
트레이시는 감독 조지 큐코어가 증인으로서 지켜보는 가운데 유언장을 통해 전재산을 아내 루이스에게 남겼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장례식만큼은 자신이 지휘하고 싶어했지만, 아내 루이스가 거부해 하지 못했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가족끼리 치르기로 한 장례식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헵번은 아내 루이스에게 이제 친구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불륜 피해자였던 루이스는 당연하게도 "당신은 그저 소문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대꾸했다. 이 발언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헵번은 나중에 트레이시와의 관계가 거의 공식화된 후 이 사건을 들먹이며 실제로 트레이시의 곁에 있던 건 자신인데 어떻게 겨우 소문 따위로 취급할 수 있냐며 루이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헵번은 부모님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였던 트레이시의 딸 수지 트레이시[54]와는 친구가 되는 데 성공했다.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PBS TV 다큐멘터리 <The Spencer Tracy Legacy: A Tribute by Katharine Hepburn>(1986)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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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트레이시의 딸 수지 트레이시와 헵번, 1986 |
헵번이 사망하기 전 한 작가는 "왜 그렇게 당신을 함부로 대하고 폭력적이고 바람피워댄 남자를 떠나지 않았냐?"고 대놓고 물어봤는데, 헵번은 "그를 사랑했는데 뭘 달리 어쨌겠나? 난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고 했다.
7. 수상
헵번은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4번 수상하였으며, 12번 여우주연상에 후보로 올랐다. 헵번의 후보 지명 기록은 메릴 스트립이 넘어섰으나 수상 기록을 넘은 인물은 없다.헵번은 후보자가 됐을 때에 단 한 번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 이에 대해 "내게 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에게 상이란 내 작업이다(As for me, prizes are nothing. My prize is my work)"라고 말한 적이 있다.[55] # 또 1979년 1월 14일 자 CBS(미국) '60 Minutes' 인터뷰에선 "상 받겠답시고 시상식에 앉아있을 내 모습이 이류(second-rate)같이 느껴져 싫었다."라고도 답변을 남기면서도 상을 받지 못했을 때에는 두렵다고도 했다. # 영상
그래서인지 딕 캐벳과의 인터뷰에선 "상을 받기 싫으면 처음부터 후보 명단에서 빼달라고 해서 아무도 자기한테 투표하지 않게 하면 된다"라며 원주민을 대신 내보내 아카데미상을 거부하는듯한 퍼포먼스를 벌였던 말론 브란도에 관해서 "it's just silly"(실없다)고 비판했고,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남편과 함께 후보에 올랐지만, 당시 남편 리처드 버튼이 전에 3번이나 후보에 올랐다가 수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대해선 "업계에 대한 (존중)이 없는" "오만하고" "멍청한 짓"을 했다고 비판했다. 영상 헵번 자신은 상을 받고 싶었기 때문에 늘 명단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얘기였다. "나도 실은 가서 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게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헵번은 수상자가 되면 그 누구보다 감격하며 트로피를 수령했다. 그리고 1969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을 때는 은근 자존심이 상했을 정도로 상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았다.
상은 수령하지만 시상식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던 헵번은 딱 한 번 4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하였다. 그녀는 기립 박수를 받으며 농담조로 자신은 사람이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 41년[56]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 영화인이라면 모두가 수상하고 싶어 안달 난 아카데미상과 하다못해 초대라도 받고 싶어 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41년 동안 단 한 번 참석도 하지 않은 캐서린 헵번 본인만이 할 수 있는 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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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아카데미 시상식[57] 中에서 |
헵번은 또한 오랜 세월 후에 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4년 첫 번째 상을 받은 후 마지막 상을 받기까지 사이에 48년의 세월이 지났다.
영국 아카데미상에서 2번의 수상과 5번의 후보로 올랐다. 또한 에미상에서는 1번 수상하고 6번 후보로 올랐으며, 골든 글로브에서는 8번 후보에 올랐으며, 토니상은 2번 후보에 올랐다. 이외에도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하였으며, 또한 1979년에 미국배우조합으로부터 평생공로상을, 1990년에는 문화발전에 기여한 예술가들에게 주는 상인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7.1. 아카데미상 수상 및 후보 목록
제6회 여우주연상 : <아침의 영광>, 수상제8회 여우주연상 : <앨리스 아담스>, 후보
제13회 여우주연상 : < 필라델피아 스토리>, 후보
제15회 여우주연상 : <여성의 해>, 후보
제24회 여우주연상 : < 아프리카의 여왕>, 후보
제28회 여우주연상 : <써머타임>, 후보
제29회 여우주연상 : <레인메이커>, 후보
제32회 여우주연상 : < 지난 여름 갑자기>, 후보
제35회 여우주연상 : < 밤으로의 긴 여로>, 후보
제40회 여우주연상 : <초대받지 않은 손님>, 수상
제41회 여우주연상 : <더 라이언 인 윈터>, 수상
제54회 여우주연상 : < 황금 연못>, 수상
8. 어록
상당히 재치 있는 말발의 소유자로 유명한 어록을 많이 남겼는데, 언행일치의 삶을 살다간 사람이라 후대의 귀감이 되고 명언 모음집의 단골이다."사랑이란 당신이 뭘 가졌는가는 관심 없고 - 당신이 뭘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 그것이 전부에요."
"전 사랑을 했었고 아직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큰 차이가 있죠."
출처
"전 사랑을 했었고 아직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큰 차이가 있죠."
출처
"사람들은 나를 마치 오래된 건물처럼 사랑한다."[58]
"그것은 지-루-함. 당신이 거만 떨 때 받게 될 첫 번째 찬사."
"인생에
월계관은 없어요... 새로운 도전만 있죠."
"내가 가랑이를 쫙 벌리자 그제야 나를 받아준 곳."
할리우드에 대해서…
할리우드에 대해서…
"평범한 외모의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보다 남자에 관해 더 많이 알아요."
"캐서린 헵번이 누구냐고요? 이 '물건'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랍니다."
"죽음이 두렵냐고요? 천만에요. 도리어 안도감을 느낀답니다. 왜냐면 죽으면 당신 안 봐도 되잖아요(...)."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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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취미여서 상당량의 자화상과 풍경화를 남겼다. 촬영장에서도 자주 그렸다.
- 캐서린 헵번은 마릴린 먼로와 혈연관계다. 아주 먼 친척 관계라고 한다. # 원래 알려진 사실은 아니고, 오랫동안 DNA 검사와 친자확인으로 마릴린 먼로의 친부[60]를 밝히는 과정에서 우연히 밝혀진 사실이다. 이 사실은 2022년 4월 4일에 버라이어티(Variety)가 처음으로 독점 기사를 냈고, # 이로 인해 마릴린 먼로는 생후 약 96년 만에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았다. 생전 친부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에이브러햄 링컨을 가상의 아버지로 여겼던 마릴린 먼로는 사후 약 60년 만에 진실을 찾은 셈이다. 캐서린 헵번 17촌의 손녀가 마릴린 먼로인데 우리로 치면 철종(조선)과 고종(대한제국)의 손녀 이해경의 사이다.
- 타인의 일을 위해선 울어도 자신의 일에 대해선 절대로 울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선 언제나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기 때문이라고.
- 그레타 가르보에 대해 가르보가 기존의 여배우들은 해내지 못했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는 매우 정당하며, 가르보는 엄청난 영화 연기 재능을 지녔다고 평했다. 또한 독보적으로 포토제닉한 얼굴과 신비한 분위기를 지녔다고도 말했다.
- 딕 캐벳과의 인터뷰에서 베티 데이비스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아주 훌륭한 배우라고 답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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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란 그저
커스터드
파이를 기다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연기엔 양극단의 결과가 도사리고 있어서 달콤한 디저트로서의 커스터드 파이와 같은 깜짝 선물이 주어질 수도 있지만 커스터드 파이에 얼굴이 처박히는 것과 같은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교훈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말 직전에 헵번은 찰리 채플린이 커스터드 파이를 얼굴에 맞는 장면을 보고 전설적인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감탄했던 일화를 얘기하고 있었다. 즉 연기는 커스터드 파이를 얼굴에 처박히는 일 따위가 전부인, 별 것 아닌 잡기술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연기란 그냥 외운 대본을 따라가는 게 다인 단순 노동이라는 건 헵번의 오랜 지론이었다. 이와 관련해 유명한 아역배우 셜리 템플에 대해서 "연기는 천부적인 재능이지 생계를 유지하는 아주 고급스러운 방법은 아니다. 보라, 셜리 템플은 불과 4살에 해내지 않았나."란 말을 남겼다. 이는 네 살짜리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연기라는 게 '별것도 아니'라는 의미라고 한다. 대신 "나는 언제나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게 꽤 낭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그렇더군요." #란 말과 "연기란 다른 사람인 척 - 자신을 파는 유치하면서 멋진 직업이다.( Acting is a nice childish profession - pretending you're someone else and at the same time selling yourself.)"란 말도 남겼는데 이를 보면 캐서린 헵번은 '배우'라는 직업은 무척 자랑스러워하면서 배우가 하는 '연기'라는 예술엔 시큰둥한 예술가인 듯.[61]
- 피터 오툴은 <The Lion in Winter>를 촬영할 때 대기실에서 카드 게임을 마저 하느라 헵번을 기다리게 한 적이 있다. 화가 난 헵번이 쳐들어와 "내가 왕년에 돌아이들을 꽤 만나보긴 했지만 넌 진짜 미친놈이다"라고 소리를 치르고 오툴에게 주먹질을 했다. 몇 시간 뒤 오툴은 헵번에게 선물을 주며 사과했는데 헵번이 "걱정 마, 이 돼지놈아. 난 좋아하는 사람들만 때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 30여 년간 헵번의 상주 가정부/요리사로 일했으며 헵번의 절친이기도 했던 노라 컨시다인[62]의 딸 아일린 컨시다인-미라[63]의 책에 따르면 1974년 감독 앤서니 하비와 레너드 번스타인의 오페레타 캉디드를 보러 간 헵번은 벤치형 관객석이 불편하다고 불평하다가 무대 위 주인공이 누워있던 소파가 편하게 보인다며 저 소파에 가서 눕는다 못 눕는다로 하비와 100달러 내기를 걸게 되었다. 헵번은 정말로 무대에 올라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가 돌아왔다. 배우는 놀라 굳어버렸고 당연하게도 헵번을 알아봤던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날 밤 헵번을 나무라기 위해 성이 난 채로 헵번의 집을 방문했던 사람은 스티븐 손드하임이었다. 근데 이 일을 계기로 서로의 집에 꽃 사들고 왕래할 정도로 친해졌다.
- 아일랜드 출신인 상주 요리사 노라 컨시다인을 위해 헵번은 매년 세인트 패트릭 데이마다 뉴욕 집을 떠나 펜윅에 머무르곤 했다. 컨시다인이 뉴욕 집을 통으로 사용하며 아일랜드계 가족, 친지, 친구들을 마음껏 초대할 수 있게 배려했던 것이다.
- 전속 요리사가 있었음에도 장보는 것부터 시작해 본인과 트레이시의 식사를 스스로 준비하는 경우도 많았다. 프랭크 시나트라, 시드니 포이티어 등 많은 동료들이 집에 초대 받아 헵번이 직접 한 요리를 대접 받았다.
- <The Madwoman of Chaillot>(1969)을 같이 찍었던 리처드 체임벌린은 헵번이 뻣뻣하고 사람들 흠을 잡아대곤 했다고 회고했다. <Grace Quigley>(1985)의 상대역 닉 놀테는 헵번이 그저 (그 나이답게) 짜증을 잘 부릴 뿐 매우 유쾌한 사람이라고 했다.
- 평생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었고 매우 이른 새벽에 기상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페데리코 펠리니는 자신이 <The Madwoman of Chaillot>(1969)의 촬영장을 방문했을 때 8시가 가까워지자마자 자신을 버려두고 자러간 헵번을 탓하지 않았다.
-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에 같이 나온 시드니 푸아티에이와 친하게 지냈다.
- 트레이시와 영화 여러 편에 같이 출연하면서 트레이시의 절친이 됐던 로버트 와그너와 친해졌다.
- 본인만의 브라우니 요리법도 존재한다. 1975년 8월호 잡지 Ladies’ Home Journal과의 인터뷰에서 처음 밝혔고, 이후 몇 요리책에서 언급되다가 2003년 헵번 사망 직후 예전 뉴욕 이웃이 뉴욕타임즈에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교통사고 병문안 선물로 브라우니를 만들어 선물했더니 헵번이 맛을 보곤 잘못 만들었다고 성토한 뒤 자신만의 비법을 알려줘서 이웃이 그 자리에서 급히 받아적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2015년 이 요리법을 소개한 기사에 달린 한 댓글 사연이 인터넷에서 엄청난 화제가 돼 1600만 개의 뉴욕타임즈 댓글 중 최고의 댓글로 선정된 적이 있다.
- 자신을 연기한 배역이 아카데미를 탄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자다. < 에비에이터>에서 헵번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이 아카데미를 거머쥐었다. 이걸로 2005년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
- 비비안 리가 로런스 올리비에와 결혼할 때 신부 들러리였다. 정작 본인은 다신 결혼을 못했지만. 다만 캐서린 헵번을 원했던 남자들은 많았다. 첫 번째 남편 러들로 어그던 스미스는 이미 헵번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헵번과 이혼 안 하고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유지하려 하자 헵번이 멕시코 유카탄까지 날아가 혼자서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했고[65], 존 포드는 캐서린 헵번을 자신의 은퇴작 <일곱 여인들>(1966)의 주연으로 캐스팅하려 했고, 하워드 휴즈는 말년에 그 유명한 은둔생활 중에도 캐서린 헵번과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하워드 휴즈와 캐서린 헵번이 주고받은 55장의 편지들
- 로런 버콜과 친했다. 헵번을 "케이티(Katie)"라고 부르곤 했다. 바콜은 헵번에 대해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충직한 친구라고 평했다.
다만 이 작품 속엔 헵번이 파이를 맞아 얼굴이 인종차별의 일종인 블랙페이스로 변하는 장면이 있어 오늘날엔 거의 방영되지 않거나 혹여 전파를 타더라도 이 부분은 삭제된 채로 나온다. 물론 이는 헵번의 잘못이 아니다.
-
디즈니
도널드 덕 단편 만화영화 <The Autograph Hound>(1939)에서
그레타 가르보 등 다른 탑스타들과 함께 과장되게 묘사된 적이 있다. 왼쪽은 에디 캔터(Eddie Cantor), 오른쪽은 슬림 서머빌(Slim Summerville)이다. 오늘날엔 완전히 잊혀졌으나 당대엔 최고 인기 엔터테이너들이었다.
- <아침의 영광>(1933)을 찍을 때 조운 크로퍼드와 결혼생활 중이었던 상대역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는 헵번에게 들이댔다가 까였다.
- 할리우드 황금기 배우들이 보통은 자녀들이나 업계인을 통해 사생활이 알려지는 반면 헵번은 특이하게도 개인사에 관한 자료의 가장 큰 원천이 형제자매들이다.
- “내가 전설이 된 이유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냈으면서도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처럼 보이기 때문이에요. 난 여전히 이 빌어먹을 (인생이란) 배를 직접 젓고 있다고요."
-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탐낸 헵번은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에게 "제가 스칼렛 오하라에요! 그 역할은 절 위해 써졌어요."(I am Scarlett O'Hara! The role is practically written for me.)라며 강하게 어필했지만 셀즈닉은 헵번에게 버틀러를 그렇게 몇 년 동안 매달리게 만들 정도의 성적 매력은 없다고 생각해 난감해했다. 또 385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미친 제작비를 쓰는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입장에선 하는 작품마다 줄줄이 말아먹던 '흥행 국밥'(Box Office Poison) 시절의 헵번을 딱히 캐스팅하고 싶어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망하면 니가 책임질 겨???참고로 스칼렛 오하라은 원작 소설에선 미녀가 아니라(Scarlett O'Hara was not beautiful, but...)고 묘사된다. 그래도 카메라 테스트 기회는 한 번 주려고 했는데 이미 셀즈닉으로부터 직설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몇 번이나 들은 헵번이 거절했다. 그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미국 역사를 다룬 영화에 미국인이 아닌 영국인 비비안 리를 캐스팅한 걸 두고 "가짜 미국인 흉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 지난 여름, 갑자기>(1959) 촬영 중 감독 조셉 L. 맨키위즈가 공동 주연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건강 상태[68]를 고려하지 않고 촬영장에서 마구 돌리자 빡쳐서 촬영 내내 싸우다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나자마자 "당신과 당신 영화는 더 이상 볼일 없다"(I have nothing more to do with you or your film)란 말과 함께 조셉 L. 맨키위즈 감독 얼굴에 침을 뱉었을 정도로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현장에 같이 있던 제작자 샘 스피글(Sam Spiegel)이 진땀 빼며 뜯어말려서 간신히 넘어갔다. 헵번은 이후 다시는 맨키위즈 감독과 같이 작업하지 않았다. 조셉 L. 맨키위즈는 <필라델피아 스토리>(The Philadelphia Story, 1940), <여성의 해>(Woman Of The Year, 1942)의 제작자로서 주연배우였던 헵번과 이미 두 작품이나 함께 한 사이였다. 이 둘은 단지 헵번의 대표작들에 불과한 게 아니라 경력 전체에서 유의미한 작품들이다. 먼저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는 당시 지긋지긋하던 헵번의 슬럼프를 종식시킨 작품으로, 간단하게 말해 말론 브란도에게 < 대부>(1972)가 있다면, 헵번에겐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가 있다고 보면 된다. 또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로 자신에게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 헵번이 고마웠던 맨키위즈가 그 후 <여성의 해>(1942) 제작 당시 주연배우였던 헵번에게 감독 및 주연 선택권이란 특혜를 줬기에[69], 헵번은 스펜서 트레이시를 <여성의 해> 공동 주연으로 캐스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여성의 해>는 헵번과 트레이시 공동 주연 9 작품의 시작이었다. # 이런 인연으로 1941년 조셉 L. 맨키위즈의 아버지 프란츠 맨키위즈(Franz Mankiewicz)가 사망했을 때 헵번이 위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처음 작품을 같이한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헵번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일화다. 극중 헵번의 배역은 비비안 리에게 먼저 제의가 갔지만 리가 거절했다.
- 후배 배우 말론 브란도에 대해서 "I don't think he's a limited actor at all - I think he's a very gifted actor. Although I'm afraid he may be a limited person."(난 그가 한계 있는 배우라 생각하지 않는다. - 난 그가 아주 재능 있는 배우라 생각한다. 비록 그가 한계 있는 삶을 살게 될지라도.)란 평가를 남긴 적 있다.
- 자기중심적이고 유별난 성격으로 유명했다. 이에 대해 헵번은 "배우 치고 성격 없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스타는 결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 1969년 겨울 뮤지컬 "Coco"를 할 때는 "(같이 출연하는 다른) 여자애들이 얼어죽든말든 내가 알게 뭐야"라며 전체 의상실에 난방을 못 켜게 해서 여성출연자들은 모두 얼음장 같은 공간에서 버텨야했다. 그러나 여성출연자들은 한편으론 대배우 헵번이 자신들을 동등한 여배우로 대해준 점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기도 했다.
- 더 노멀 하트의 작가 래리 크레이머 등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신뢰할만한 성소수자 업계인들로부터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라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동성 연인의 존재는 전무했던 것으로 보이며 다양한 여성들이 하룻밤 성관계 상대로 지목되는 중인데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폭로 초반엔 십 단위였지만 현재는 백 단위가 넘어가고 있다. 아직 증거는 없는데 증인은 넘쳐나는 상황이다. 정기적으로 돈을 받고 헵번에게 직업 여성들을 제공했다는 유명 할리우드 포주들도 있다.
-
헵번은 양성애자조차 아니고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헵번이
존 포드와 불륜을 할 때 성관계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주목한다.[70]
하워드 휴즈는 아예 평생 성관계를 자제한 사람이었다. 이쪽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스펜서 트레이시조차 회사에서 헵번의
성 지향성을 감춰주기 위해 억지로 엮은 비지니스 커플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트레이시가 평생 헵번을 대한 태도나 다른 여자들과 달리 헵번에겐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자는 걸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점을 그 근거로 든다. 하지만 이는 트레이시와 헵번의
불륜 사실이 대중에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양한 언론 전략을 써야했던 당시 영화제작사들의 노고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래서 새로 나온 게 헵번의 동성애 성향, 트레이시의 양성애 성향을 영화사조차 몰랐다는 주장이다. 서로의 이해 관계가 일치한 헵번과 트레이시의 커플 위장 연기가 그만큼 철저했다는 것. 즉, 불륜 관계는 업계인들을 속이기 위한 이중 트랩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다시 자기중심적이기로 유명했던 헵번이 트레이시를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몇 년이나 희생했던 사실과 대치한다.
-
오슨 웰스는 헵번이 트레이시를 만나기 전, 헵번이 "남자들과 미친듯이 자고 돌아다닌다"고 몇 번 뒷담화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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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다니면 니가 뭘 어쩔?[71] 이 역시 헵번이 동성애자라는 주장의 신빙성을 낮추는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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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던 1967년 아직 대중화 되지 않았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진이 있다.
- 오즈 야스지로의 <초여름>(1951)에서 주인공 노리코가 좋아하는 배우가 헵번이다. 당시 헵번을 향한 여성들의 지지가 전 세계적이었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
- 후배 배우들 중에 줄리아 로버츠, 존 트라볼타, 해리슨 포드의 연기를 좋게 평가했다. 멜라니 그리피스가 신인이었을 시절, 그리피스가 주디 할러데이[73]를 떠올리게 하는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커리어가 빨리 저물 것 같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 글렌 클로즈의 무대 연기를 싫어했다. 발이 뚱뚱하고 못생겼다고도 했다.
- 헵번의 신인 시절을 다룬 <Kate>라는 영화가 제작 중에 있다.
[1]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1967년작이지만 영국에선 1968년 개봉해서 1968년작 〈겨울의 사자〉과 같이 1968년작으로 분류된다. 수상은 1회지만 사실상 2회 수상.
[2]
이 사실로 아카데미 연기상 3회 수상, 최다 노미네이트
잭 니콜슨과 자주 함께 거론된다. 두 사람 다 이와 관련한
기네스북 기록이 있다. 이후
다니엘 데이 루이스,
프란시스 맥도먼드 역시 3회 수상 반열에 오르며 아카데미상으로 언급되는 배우들 반열에 올랐다.
[3]
RKO에서 바지를 못 입게 하려고 청바지를 숨겨버리자 팬티 바람으로 촬영장을 돌아다니며 시위해 다시 받아낸 적이 있다.
[4]
이는 그녀가 한창 활동하던 1920년대~60년대 중반까지의 황금기 시절이라 불린
클래식 할리우드 당시 업계의 문란한 성생활을 지켜보던 그녀가 자신의 친부이자 저명한 비뇨기과 외과의였던 토머스 노발 헵번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5]
몽고메리 클리프트 문서 참고. 그 당시 업계의 엄숙한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배우가 영향력 있는 거물 감독과 제작자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
[6]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 싱어>가 1927년에 개봉한 이래 29년부터 토키(talkie)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헵번은 32년이 돼서야 할리우드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7]
Katharine Martha Houghton Hepburn. 1878 – 1951.
[8]
Thomas Norval Hepburn. 1879 - 1962.
[9]
American Social Hygiene Association. 2012년 American Sexual Health Association로 개명했으며 현재도
명맥을 유지 중이다.
[10]
당시 평균 타수는 8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11]
이를 반영해
하워드 혹스의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첫 등장 때 골프를 치며 등장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라 실제 헵번에게서 따온듯한 설정들이 더 있다. 코네티컷주 부자 가문 출신이라던가 독립적이고 드센 성격이라던가.
[12]
헵번의 오빠 톰이 자살하고 몇 주 뒤에 일어났다.
[13]
Thomas Houghton Hepburn.
[14]
어머니의 브린 마 칼리지 동창이었다.
[15]
서까래에 매단 밧줄이 너무 길어 목을 매달고 나니 발이 땅에 닿자, 무릎을 꿇어 밧줄이 팽팽해지도록 유도한 뒤 긴 시간에 걸쳐 숨을 거뒀다.
[16]
Oxford School.
[17]
원래 브린마 칼리지는 이과 계열이 강세다.
[18]
Philip Barry. 1896 - 1949.
[19]
Morosco Theatre.
[20]
Leland Hayward.
프레드 아스테어 등 유수의 황금기 스타들이 고객이었다.
[21]
올드팬들 사이엔
조지 큐코어란 발음이 더 익숙하다.
[22]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자.
[23]
수상은
베티 데이비스.
[24]
Independent Theater Owners of America
[25]
"box office poison"
[26]
헵번은 팬에 대한 태도를 몇 십 년이 지나서야 고쳤다. 경력 후반엔 팬들에게 다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팬레터가 오면 아주 짧게라도 자필로 일일이 답장해주기도 했다.
[27]
태도 변화가 시작된 건 70년대지만 예전 악명의 여파가 이때까지 남아있었다.
[28]
그러나 이렇게 태도를 크게 지탄 받으면서도 사랑과 관심 역시 크게 받았기 때문에 비슷한 성격을 지녀 자주 공격 당하던 친구
로런 버콜이 매우 부러워했다.
[29]
헵번은 영화 속 배역처럼 표범을 꽤 잘 다뤘다고 한다. 반대로 그랜트는 실제로도 표범을 무서워했다고. 조지 역을 연기한 개 애스더는 당대의 명연기견으로
레오 맥캐리가 감독한 그랜트의 대표작인 <
이혼 소동>,
윌리엄 파월와
머나 로이가 주역을 맡은 <
그림자 없는 사나이>에도 출연했다.
[30]
배리는 이런 헵번의 열정에 힘입어 역할을 헵번에 맞춰 희곡을 작성했다.
[31]
Cort Theatre.
[32]
American Shakespeare Theatre.
[33]
헵번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실제 직계 후손이다. <
관상(영화)>의
이정재가 이와 비슷한 케이스. 이쪽은
수양대군의 방계 후손.
[34]
André Previn.
[35]
스포일러 힐러리가 고통 받아온 아내를 놓아주고, 시드니도 약혼을 깬 뒤 부녀가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가기로 한다. 작곡가인 힐러리가 참전으로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소나타의 뒷부분을 함께 이리저리 즉흥적으로 연주해보면서 끝이 난다.
[36]
스포일러 신시어는 크리스토퍼에게 아이를 임신한 걸 알리지 않고 "용기는 사랑조차 이긴다"는 편지를 남기고 고도비행 세계신기록 도전에 나선다. 두 사람은 일전에 용기는 죽음을 이기지만 사랑을 이기진 못한다는 요지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기존 기록을 넘어선 순간 신시어는 추락해 사망한다. 신시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팔에 날개가 달린 모양의 동상이 세워지고 크리스토퍼 내외의 결혼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암시된다.
[37]
Mary Duncan. 1894 - 1993.
에드위나 애슐리 백작부인의 애인이었던 스티븐 샌포드의 아내였다. 부부의 연을 맺어준 사람은 매리언 데이비스.
[38]
조저프의 예상대로 이버는 대성공을 거두지만, 이버는 수많은 반짝 스타("morning glory")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버는 곧 자신의 불안을 딛고 자신이 그저 반짝 스타로 그쳐도 상관없다며 두렵지 않다고 외치며 영화가 끝난다.
[39]
그러나 마이클이 실비어를 애 취급을 해 실연 당한다.
[40]
스포일러 곧 유부남으로 밝혀진다.
[41]
Anthony Harvey.
[42]
Stage Door Canteen(1943)에선 여러 유명 배우들이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고, 캐서린 헵번 역시 이렇게 본인 역으로 특별출연한 배우 중 한 명이라 정식으로 배역을 연기한 작품들 중 주연이 아닌 작품은 사실상 〈러브 어페어〉 단 한 작품뿐이다.
[43]
스포일러 초반에 둘은 서로 사귄 적조차 없던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40년대에 짧지만 강렬한 결혼생활을 했었다는 게 밝혀진다.
[44]
Ludlow Ogden Smith.
[45]
S. Ogden Ludlow.
[46]
그레타 가르보와도 관계가 있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47]
2022년 가치로 40억원 이상.
[48]
Margaret Sullavan.
에른스트 루비치의 <모퉁이 가게>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헨리 폰다의 첫 번째 아내(1931 - 1933)이자
윌리엄 와일러의 첫 번째 아내(1934 - 1936)였다. 헤이워드와의 결합은 설러밴에게 세 번째 결혼(1936 - 1948)이 된다. 마거릿 설러밴은 케네스 웨그(Kenneth Wagg)와 네 번째 결혼을 한 뒤 죽을 때까지 함께 했다.
[49]
Bel-Air Country Club.
[50]
Louise Tracy. 1896 - 1983.
[51]
무성영화 시절에
루돌프 발렌티노와 호각으로 여겨졌다.
그레타 가르보의 연인이었다.
[52]
헵번도 많은 여성들과 바람피웠다는 주장이나 정황들은 있으나 아직 확실한 증거들은 나오지 않았다. 여담 항목 참조.
[53]
Howard Strickling.
[54]
Louise "Susie" Treadwell Tracy. 1932 - 2022.
[55]
출처: "Kate: The Life of Katharine Hepburn"
[56]
처음 아카데미상에 후보로 지명되고 첫 여우주연상을 탄 1934년(물론 이때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 나이 불과 27세..)부터 아카데미 시상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1974년까지 총 41년이다.
[57]
미국판
카우치 사건인 오펄 알몸 사건이 일어난 시상식이다.
[58]
이 말의 의미는 영화
차이나타운(1974)에서 잘 나오는데, 남주인공이 식사하는 자리서 "부자시고, 신문에 나기엔 너무 존경받는 분이죠(You're rich, and too respectable to want your name in the newspapers.)"라고 비꼬자 "정치인, 오랜 건물들, 창녀는 오래되면 그 존재만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네(Politicians, ugly buildings and whores get respectable if they last a long time.)"란 답변이 돌아온다. 즉, 오래 버티기 힘든 분야에서 오래 버티면 그 존재만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탈무드 격언이라 한다.
[59]
하지만 헵번이 월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둘 가운데 헵번의 나이가 스무살 넘게 더 많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60]
Charles Stanley Gifford. 1898.09.18.~1965.06.27.
[61]
이 직업윤리는 후배 배우
말런 브랜도와 정반대다. 말론 브란도는 '배우'란 직업은 하찮게 여겼지만 그 배우가 하는 '연기'라는 예술엔 굉장히 엄격한 예술가였다.
[62]
Norah Considine.
[63]
Eileen Considine-Meara.
[64]
Richard Avedon. 1923 - 2004.
[65]
대신 이 심성 착한 남자 가슴에 대못 박은 경험으로 헵번은 자신이 결혼과 양육엔 전혀 준비가 돼있지 않은 사람임을 깨달았다고.
[66]
Marion Hepburn Grant.
[67]
Katharine Houghton
[68]
3년 전, 1956년 교통사고 후유증에 한창 시달리고 있었다.
[69]
영화는 엄연히 감독의 예술이지만 촬영장에서 가장 실권이 큰 사람은 제작자라는 아이러니한 프로젝트다. 이런 모순된 그리고 손쉽게 순식간에 역전되는 갑과 을의 관계는
데미언 샤젤 감독의 <
라라랜드>, <
바빌론>에서 잘 나온다.
[70]
이는 존 포드가
천주교 신자라 불륜에 큰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71]
오슨 웰스는 인성이 워낙 나쁘고 자뻑이 심해 대놓고 동료 험담 하고 돌아다녔다.
[72]
다만 메릴 스트립은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끝으로 메소드 연기는 접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캐서린 헵번 사후의 일이다.
[73]
Judy Holliday.
[74]
한창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활동하던 시절 시상식에서 만난 사진이 있다.
[75]
두 사람은 생전 잭슨과 매우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말론 브란도는 <You Rock the World>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