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6:56:31

에바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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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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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마사 산드로 데 아메리카 타토 보레스 티타 메레요 술 솔라르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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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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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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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정권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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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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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5AADB><colcolor=#fff> 에바 페론
Eva Perón
파일:1000007436.jpg
본명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페론[1]
María Eva Duarte de Perón
애칭 에비타
Evita
출생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망 1952년 7월 26일 (향년 33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직업 배우 → 정치인
배우자 후안 페론 (1945년 결혼)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에바 페론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비참한 어린 시절2.2. 후안 페론과의 결혼2.3. 에비타 신화의 빛과 그림자2.4. 사망2.5. 사후의 수난
3. 기타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여배우이자 정치인이었으며,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애칭인 에비타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비참한 어린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5월 7일 팜파스에 위치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바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2] 후닌으로 옮겨가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영화배우라는 꿈을 키웠던 에바는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가서 5년 만에 연예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녀는 1943년에 라디오 DJ를 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슬픈 듯 하면서도 호소력이 짙어서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목소리는 훗날 정계에서도 우아한 미모와 함께 뛰어난 연설력으로 에바의 큰 무기가 되었다.

2.2. 후안 페론과의 결혼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어질 때쯤인 1944년, 에바는 당시 산후안에서 일어난 대지진에 대한 이재민 구호 기금을 마련하고 있었던 노동부 장관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1938년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아가던 후안 페론은 에바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1945년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이후 에바는 대통령 선거에 참가한 남편 후안을 돕기로 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그녀의 얼굴을 알리게 되었고, 에비타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2.3. 에비타 신화의 빛과 그림자

이후 1946년 후안 페론은 정식으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고, 영부인이 된 에바는 남편인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리고 본능적으로 그들을 이해하면서 일명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3]라 불리던 가난하고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던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쳤다. 이 와중에 프랑스로부터 식량 배급 약속을 받거나, 스페인에서의 아동 구호 활동, 노동 단체와 기업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4] 에바 페론 재단의 성립과 같은 자선 사업 정책으로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면서, 그녀는 '가난한 자들의 성녀' 대우를 받으며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도 더 유명인사가 되었고, 덩달아 남편 후안 페론의 인기도 치솟게 되었다.

다만 페론의 개혁은 장점만큼이나 문제점들도 있는 개혁이었단 평가도 있다. 이른바 ' 페론주의'로 알려진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부부의 정책은 '중산층을 육성하고 개혁을 시도했던 선구자'라는 칭송에서부터 '대중의 인기를 권력 유지에 이용한 독재정치'라는 신랄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페론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이 남미 포퓰리스트의 시초이며, 우고 차베스 등의 지도자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페론주의가 모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빈민 계층을 위한 정치'를 명분으로 삼아 남편인 후안 페론과 종신통치를 하려는 낌새를 보이기도 했다. 후안 페론은 정당간의 토론과 협상을 통한 대의민주주의를 불신했으며[5],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계층간 갈등을 표면화시킴으로써 훗날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불안정을 유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6] 이러한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꼰 뮤지컬이 바로 < 에비타>였다.

성적으로 상당히 난잡했다는 말도 있는데, 무명 배우였던 시절부터 성공을 위해 성관계를 맺는 걸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섹스 스캔들 중에서 가장 큰 건이라고 하면 무려 영부인이 된 후에 그리스의 선박왕인 아리스토틀 오나시스[7]와 정사를 나눈 것이다. 오나시스는 식사를 하고 그녀에게 자선 사업에 기부한다는 명목으로 정사를 나눈 후 100,000달러라는 거액의 수표를 끊어 주었고, 그날 점심 때 에바가 만든 오믈렛을 "지금까지 먹어본 식사 중에서 가장 값비싼 음식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4. 사망

1950년 당혹스럽게도 자궁암 진단을 받고[8] 이후 그녀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했기에 1년 후엔 부통령 후보로까지 지명되었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실 건강이 나빠 유세도 힘들 정도였지만 남편을 위해 유세를 하고 결국 1951년 11월에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후안 페론은 에비타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지만, 그녀는 건강 악화로 1952년 7월 26일, 33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만다. 오랜 투병으로 몹시 여위어 사망 당시 겨우 32㎏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이 에바 페론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헌데 에바 페론의 시신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남편 후안 페론과 당시 그녀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지지 세력들에 의해 정치적 목적도 더해져 방부처리되었다.(...) 현존하는 미라 가운데 그 방부처리가 손에 꼽힐 정도로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웹에서 검색하면 미라가 된 사진은 물론 미라로 만드는 작업 중인 사진도 찾을 수 있다. 이하 링크에 있는 사진들은 에바 페론의 시신 방부 처리 과정과 관련된 사진들로 사람에 따라 혐오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 열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 #2 #3 #4 #5 #6 #7 #8 #9 #10 #11

2.5. 사후의 수난

1950년대 중반 쿠데타로 후안 페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민중들에게 추앙받고 있었던 에비타 신화의 불을 끄기 위해서 에바 페론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몰래 빼돌렸다.[9] 그래서 한동안 그녀의 시신은 오리무중이었는데, 그녀의 추종자들이 군부 인사를 납치해 시신의 행방을 추궁했고, 이탈리아에 있다는 것을 안 이후 1971년 후안 페론 측으로 송환된 그녀의 유해는 1975년 이사벨 페론(후안 페론의 세 번째 아내)이 대통령이 된 이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1976년 또다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었고, 에바의 유해는 대통령궁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레타 구역[10]의 두아르테 가족묘지로 옮겨져 안장된 후 현재까지 남아있다.

파일:800px-Buenos_Aires-Recoleta-Cementery-P2090035.jpg

현재 그녀의 미라는 그녀의 가문 묘역 깊은 지하에 안장되어있으며 대중들도 함부로 출입이 불가능하다.

이러다보니 그녀의 시신은 네크로필리아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기도 한다.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즈의 《산타 에비타》라는 소설과 알리시아 두호브네 오르띠스의 저서 《에비타 페론: 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에서는 에바 페론의 시신에 정욕을 느껴 정신이 이상해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제 그녀의 시신을 방부처리 중인 사진을 보면 보존도가 괜찮은데다가 아름답다고 여겨질 정도이며 죽은 시신이 아니라 잠자는 듯이 보일 정도이다. 이래저래 생전이나 사후나 수난이 많은 인물이다.

3. 기타

  • 워낙 극적인 인생을 산 데다가 평가 또한 확연하게 엇갈리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녀의 일생을 주제로 여러 작품이 제작되었다.
    • 1978년 뮤지컬 < 에비타>가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하여 크게 흥행했다. 다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에바 페론을 굉장히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으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런던에서의 흥행이 한동안 주춤하기도 했다. 그래도 7~8년간 2,900회를 공연하며 큰 흥행을 기록했고, 21세기에도 재차 공연이 올라오는 등 흥행과 작품성 양면에서 호평받았다. 1996년 뮤지컬을 영화화한 < 에비타>가 개봉했고, 에바 페론 역에 마돈나가 캐스팅되자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크게 우려했으나 낮은 기대치를 뛰어넘는 섬세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 1995년 아르헨티나 작가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스가 에바 페론 사후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산타 에비타》를 집필해 출간했다. 이후 2022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 산타 에비타》가 제작되어 디즈니+에서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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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에바의 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유부남인 데다가 에바의 어머니 외에도 따로 정부가 있었기에 에바의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 대척점은 에스탄시에로(estanciero)라 불리던 대지주 [4] 헌금이 엄청나게 들어왔다고 한다. 실제 이 돈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도 쓰여졌지만, 돈 액수가 액수다보니 훗날엔 비리 의혹도 생긴다. [5] 다만 군부 쿠데타로 쫓겨난 이후부턴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했고 실제 말년에 집권했을 땐 권위주의적 성향은 거의 사라졌다. [6] 이성형, 《아르헨티나 사태와 우리 언론의 자폐증》, 2001년. [7] 후일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2번째 남편이 되는 그 사람이다. 영부인 킬러 [8] 후안 페론의 첫번째 부인도 자궁암으로 사망해서, 오늘날 호사가들은 후안 페론이 숙주가 된거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9] 이때 시신 일부가 훼손되었다. 군부는 미라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귀 일부분과 손끝을 잘라 조사했고, 그 외에도 코가 깨지고 발이 훼손당했다. (이 부분은 왜 훼손된건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훼손된 부분은 어찌어찌 복원되었다. [10] 다른 이름으로 '무소코 공동묘지'라 불리며, 이 묘지는 세계에서 최고로 호화로운 묘지로 정평이 나 있는데 무덤을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집처럼 만들어 놓은 게 일품이다. 무덤을 집과 동일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문은 말할 것도 없고 창문도 달려있는 데다가 심지어는 관 옆으로 침대, 책상, 의자, 꽃병까지 전부 구비되어 있다. 이곳에 묻히는 가장 저렴한 비용이 자그마치 6억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