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04:15:03

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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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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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청 추존황후
효흠현황후 | 孝欽顯皇后
청 동치제 · 광서제조 성모황태후
자희황태후 | 慈禧皇太后
파일:attachment/Empress-Dowager-Cixi2.jpg
출생 1836년 1월 17일[1]
산시성 루안부 창지현
(現 산시성 창지시 상당구 샤친촌)
사망 1908년 11월 15일[2] (향년 72세)
북경 중난하이 의란전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시청구 중난하이)
능묘 정동릉(定東陵)
재위기간 청 귀인
1852년 2월 ~ 1854년 2월 2일
청 의빈
1854년 2월 2일 ~ 1856년 3월 23일
청 의비
1856년 3월 23일 ~ 1857년 1월
청 의귀비
1857년 1월 ~ 1861년 11월 11일
청 황태후
1861년 11월 11일 ~ 1908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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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성씨 예허나라(葉赫那拉)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
부모 부친 예허나라 혜징
모친 부찰씨
배우자 문종 함풍제
자녀 1남
신장 153cm[3]
봉작 귀인(貴人) → 의빈(懿嬪) → 의비(懿妃) → 의귀비(懿貴妃)→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
존호 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태황태후
(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太皇太后)
시호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
(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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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칭호3. 생애4. 평가
4.1. 사치 행적4.2. 이화원 문제4.3. 총평
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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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사치녀효흠현황후.jpg

청나라 말기의 황태후.

청나라의 제9대 황제 함풍제의 추존황후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4]이자 또한 마지막 황제 선통제에게는 큰친할머니가 된다.

2. 칭호

서태후는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으로, 공식 명칭은 햐오슝아 깅우지 일어투 황허오(ᡥᡳᠶᠣᠣᡧᡠᠩᡤᠠ ᡤᡳᠩᡤᡠᠵᡳ ᡳᠯᡝᡨᡠ ᡥᡡᠸᠠᠩᡥᡝᠣ, Hiyoošungga Gingguji Iletu Hūwangheo), 한국식 한자로는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이다.

성은 '예허나라'(ᠶᡝᡥᡝ ᠨᠠᡵᠠ, 葉赫那拉)씨다.[5] 그 외에도 자희태후(慈禧太后), 노불야(老佛爺).[6] 등의 이명이 있다.

시호는 다 써놓자면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로 줄여서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보통 자희태후(慈禧太后: 츠시타이호우)라고 하며, 영미권에서는 보통 이를 영어 번역한 'Empress Dowager Cixi'라고 부른다. 'Cixi'(츠시)는 위의 시호 중 '자희'(慈禧)의 중국 발음.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서태후/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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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중국 국내외 가릴것 없이 부유했던 청나라 몰락의 원흉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권력에 집착해 청나라 황실의 뿌리를 근본부터 흔들리게 했고 심지어 국방비까지 삥뜯어서 본인 사치향락에 썼고 청나라는 막대한 국고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열강에게 뜯겨나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서태후는 중국내에서 아직까지도 여후, 측천무후(또는 가남풍)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의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나마 여후, 가남풍은 '잔혹한 면이 분명 있었지만 통치력은 괜찮은 편이었다'라는 재평가나 옹호론도 있고, 특히 측전무후는 본인이 권력을 잡아 뛰어난 통치력은 물론 제2의 전성기인 개원의 치를 이끈 여러 기반을 마련해 준 반면 서태후는 안 그래도 혼란한 시기에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은 판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

4.1. 사치 행적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C5%C2%C8%C4_%B9%B0%B3%EE%C0%CC.jpg
이화원에 있는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족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품위 유지를 위해 적당한 사치를 부리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당연한 관례로 용인되었다. 왕의 권력보다 힘이 강한 영국 의회마저도 왕실의 품위를 위해 사치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그런 선을 아득히 넘었다. 당시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져가는 상황과 그 상황서 국방비를 빼돌려 사치향락에 사용했다는 점이 서태후가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선 진귀한 음식에 관심도 많고 식탐 또한 대단했기에[7] 한 끼에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100냥이었으며, 이는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 식비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천여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8]이자 이를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2000년 전후의 한국을 기준으로 약 8천만 원 정도다.

그리고 서태후는 절대 같은 음식을 3번 이상[9] 먹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관상용으로 호화스런 음식을 가득 차려서 따로 내놓거나 아예 과일을 요즘의 디퓨저처럼 소비하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10] 요리들 중에서 오리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육식을 무척 좋아했으며 서태후는 한 번 먹은 음식은 두 번 다시 입에 대기를 꺼렸지만, 오리고기/돼지고기/닭고기로 만든 요리만큼은 매끼마다 빠진 적이 없었을 정도로 좋아했다. 돼지고기 요리 중에서도 동파육을 특히나 좋아해서 향령(響鈴)이라 이름을 붙이고 매번 즐겼다. 고기 외에도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고, 후식으로는 과일/사탕/떡을 즐겨 먹었다. 이러다 보니 서태후가 전용 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서 4칸이 주방이었고, 서태후의 식사 준비를 수행하는 요리사만 50~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실제 서태후의 식생활과 관련된 야사가 있다. 피난 생활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서태후 일행이 곤란을 겪으면서 청나라 백성들이 평소 먹던 옥수수빵을 바쳤고, 허기에 지친 서태후는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하루는 자금성으로 돌아온 서태후가 그 때 그 맛을 떠올리고 황실 요리사들에게 옥수수빵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황궁으로 돌아와서 다시 입맛이 고급이 된 서태후에게 그 옥수수빵을 그대로 올려봐야 피난 시절 때 허기진 채 먹었던 그 맛이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요리사들은 궁리 끝에 견과류와 설탕을 넣어 맛을 더한 옥수수빵을 만들어 바쳐 서태후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옥수수빵이 중국에서 흔히 먹는 워워터우(窝窝頭)라고 한다. 선조 도루묵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 하지만 해당 음식이 명나라 시절의 기록에도 언급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더불어 비슷한 이야기는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에게도 있는지라[11] 진실은 저 너머에.

서태후는 자신의 위엄이 훼손됨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꼴을 매우 싫어해서 궁인들의 시중을 받을 때에도 자신의 측면에만 서게 했다고 한다. 이화원에 거주할 때도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건방지게 누워서 통화하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다.[12] 심지어 서태후의 운전기사도 예외가 아니라서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차를 운전해야만 했기 때문에 서태후가 탄 차는 늘 잔사고가[13] 많았다. 그나마 전용 열차의 경우 초창기 증기 기관차는 아예 기관사가 서서 운전하는 구조라 자동차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C5%C2%C8%C4_%C0%C7%BA%B9-1.jpg
서태후의 복장을 재현한 모습

서태후의 사치는 옷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옷이 무려 3천여 벌이나 되었고 옷을 담는 박스가 700박스가 넘었다. 옷은 물론 버선과 신발에도 굉장히 신경을 써서 서태후의 옷, 버선과 신발을 만드는 데만 매년 3천 명가량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1만 냥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음식에도 그랬듯이 옷/버선/신발도 한 번 신거나 입고 나면 그대로 버렸다. 심지어 서태후가 쓰고 한 번 버리는 목욕수건도 수를 놓은 것을 사용하는 등 돈을 물 쓰듯이 사용하였다.

특히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영향과 전술했던 자신의 위엄과 자신감을 세우기 위해 본인의 외모 관리에 유독 집착했다. 먼저 그녀는 새똥으로 만든 옥용산이란 화장품으로 늘 세안을 하고 꽃과 약재로 목욕을 했으며 심지어 피부 미용을 위해 진주를 갈아 먹고 건강하고 젊은 산모를 불러다가 모유를 먹었다고 한다. 또한 환관을 거리에 보내 가장 인기 있는 헤어스타일을 보게 한 후 매일 색다른 헤어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런데 갈수록 탈모가 심해지자 머리카락에 집착했고 당시 머리 손질 시중을 든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매질을 당해 궁녀들은 늘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게다가 보석에 대한 애착도 대단해서 아예 과일 모양의 특이한 보석의 경우. 환관들을 시켜다가 자물쇠로 늘 지키게 했고, 이들 중 일부는 서태후의 무덤에 매장됐다고 한다. 특히나 비취 진주를 가장 좋아해서 진주와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반지야 말할 것 없고, 비취로 장식한 호갑투[14]와 머리 장식, 진주, 비취로 만든 망토[15] 심지어 식기들과 악기도 비취로 만들었다.

이게 청나라 황실에 할당된 예산 하에서 이루어진, 원래 쓰던 정도의 사치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라가 망국지란의 위기에 있는데 이런 사치를 부림은 좋게 볼 수 없는 게 사실. 밑에서 설명할 이화원 문제만 봐도 그러하다.

4.2. 이화원 문제

서태후가 가장 욕 먹는 이유. 북양함대의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떠돌았지만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러시아를 막기 위해 북양함대의 예산 일부를 육군이나 광둥 해군 예산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하지만 이화원과 그곳에서 벌인 서태후의 환갑잔치에 쓴 은전 3,600만 냥은 당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의 30%에 달하는 수치로[16] 이 막대한 돈이 정원 건설에 낭비된 점은 분명하다. 해군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건대 외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방에 힘을 써야 했다. 마땅히 정원 따위에 쓸 돈이 있었으면 국방비로 돌려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결단이었다.[17]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직접적인 원인은 총체적인 청군의 난맥과 지휘관들의 무능 때문이었지만, 이 돈이 헛되이 낭비된 것도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중일 양국의 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바이다.

특히나 이건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서구 열강도 갖지 못한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청의 북양함대는[18] 수병의 숙련도만 충분히 받쳐주면 당시 일본 함대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19] 그런데도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은 정작 훈련할 포탄과 연료 부족으로 수병들의 훈련 상태가 바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20] 전함은 전장에서 쓰는 가장 거대한 기계이고, 자동화 이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모든 함선은 수병의 숙련도가 절대적이었다. 특히 포술의 발달로 포의 사거리가 점점 길어지던 시기였기에 이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이 국운을 걸고 전 함대를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에 비해 청나라의 전시 준비는 말 그대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이런 군대의 무능은 거국적인 시야와 통찰력 없이 권모술수만으로 정치적 생명만을 연장시켜 온 서태후의 책임이 매우 크다. 특히 동북아에서 청일전쟁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서태후가 저지른 횡령은 당시 시대상황상 국방비와 근대화에 집중 투자해도 모자랄 귀중한 백성의 피땀을 이런 식으로 마구 낭비해버리는 건 어떻게 봐도 변호할 수가 없다.

당연히 청일전쟁을 국치 중의 국치로 생각하는 현대 중국에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안 좋다 못해 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중국 CCTV에서 2003년에 방영한 근현대사 TV 드라마인 <주향공화>(走向共和)에서는 이 부분을 묘사하면서 서태후를 신랄하게 디스했을 정도다.

4.3. 총평

청나라 멸망의 원흉이자 의화단 사건으로 중국이 반 식민지화 된 이유 때문에 당연히 중국에서는 암군이자 까임 0순위로 꼽히며[21] 서양에서도 이미지가 굉장히 나쁜 듯 하다. 사실 의화단 사건에서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데다 죽을 때까지 통상 개화에 소극적이었고 동양식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보여준 인물이니 아무래도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특히 선통제의 영어교사를 맡고 나중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레지널드 존스턴은 자신의 책에서 이 사람이 청나라 황실을 말아먹은 사람이라고 맹렬하게 깠다. 또한 서태후가 달라이 라마와 만났는데 이에 중국 민중들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둘이 만났으니 하나는 곧 죽을 것이라 했는데, 서태후가 곧 죽었다며 깠다.[22]

물론 서태후가 문제가 많은 인물인 건 사실이고, 서태후 생전에도 아편전쟁으로 인해 청나라가 불안불안했지만, 썩은 기둥이나마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듯 서태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완전히 분해[23]되지 않았고 양무운동 동치중흥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서태후 덕분이다. 서태후는 인권(특히 여성인권)과 교육, 전족 등 악습을 폐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서양 문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황실의 웃어른이었기 때문에 서태후가 시작하면서 유행하거나 알려진 패션 등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사치와 정치적인 면과는 별개로 당대 청나라 백성들에게는 많은 존경을 받은 모양이다. 서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펄 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골 농촌 같은 곳에서는 서태후가 아직도 살아있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농부들은 서태후가 사망한 지 수십 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고 "이제 우리를 누가 돌봐줄 것인가?"라고 외쳤다고 한다.[24] 즉 서태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25]

그러나 위의 사례들을 들어서 서태후가 재평가될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은 금물이다. 당시 청나라를 포함한 전근대 중국에서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당연히 천자여야 하고, 국가의 구심점 역할도 당연히 천자가 맡아야 한다. 태후가 황제의 어머니든 뭐든 천자는 아니므로, 천자가 어릴 때 잠깐 후견을 맡는 정도라면 모를까 자기가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중국의 각종 제도와 역사는 천자가 통치를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태후라고 하나 중국의 공인된 통치자도 아닌 사람이 섭정의 수준을 넘어서 대놓고 통치를 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 차라리 스스로 '성신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처럼 본인이 천자를 했으면 모를까, 천자는 안 하겠다고 하면서 천자의 통치를 전제로 한 조직을 계속 움직이려 들었으니 모순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당장은 서태후라는 썩은 기둥이라도 있어서 청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상은 이미 그 전에 멀쩡한 천자 체제를 태후의 통치라는 썩은 기둥으로 바꿔치기한 서태후의 잘못이 훨씬 더 컸다. 청나라는 서태후 덕분에 버틴 게 아니라 서태후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서태후가 단기적으로는 청나라의 버팀목이 되어줬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청나라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셈이다. 오죽하면 서태후가 청나라를 말아먹음으로써 누르하치가 이끄는 아이신기오로 씨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한 조상(예허나라 씨족 추장)의 원수를 갚은 셈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게다가 광서제가 황제로서 의욕이 없거나 매우 무능했다면 모를까, 광서제는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는 등 황제로서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서태후라는 엄청난 걸림돌 때문에 광서제 본인의 유능함이 무의미해졌고 더 나아가 광서제 본인이 독살당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권력과 사치에 집착하는 섭정이 선량하고 유능한 황제를 죽여버린 시점에서 서태후는 이미 옹호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다.

결국 이제 막 기다 걸을 나이의 선통제가 황제가 된 후 서태후가 급사하자 권위 있는 어른이 없는 청나라 황실은 권력의 진공 상태[26]에 빠져들었다. 서태후의 뒤를 이어 황태후가 된 융유태후는 인간성 면에서는 서태후보다 아주 살짝 나았지만 황후 시절에 광서제의 후비들을 핍박하고 남편 광서제를 감시하며 오만하게 대했을 정도라 거기서 거기였고, 인품 대신 카리스마와 권모술수를 휘두르자니 이쪽은 서태후에 비해 한참 떨어졌기에 황실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서태후가 저지른 악행들이 모두 드러나면서 서태후의 평가는 박해지고 특히 혁명을 추구하는 중공 입장에서 변법자강운동을 탄압한 서태후는 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수구꼴통 봉건주의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공격의 대상[27]이 되었다. 서태후가 의화단 운동에 불을 지폈으니 반 서방주의 때문에 미화한다는 낭설도 있으나, 중공의 정통 사관에서는 오히려 외세에 굴복하여 의화단의 통수를 치고 탄압했다고 여겼다. 즉, 현재 중국 정부도 의화단을 미화할지언정 서태후를 미화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외세의 침략을 끌어들이고 중국을 반식민지화 한 서태후를 악녀로 볼 뿐이다.

5. 대중매체에서

  • 《한제국일본침략사》에서는 공친왕 혁흔의 언급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공친왕과 증국번 등을 매국노라고 매도한다.
  • 만화 방과 후의 카리스마》에서는 서태후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복제인간이 주인공의 클래스메이트 중 하나로 등장. 1권에서 색기담당 역할을 맡았고 그 뒤로는 묻혔는지 계속 안 나온다. 일단 미모만은 확실히 절륜하게 묘사됐다.
  • 영화 < 마지막 황제>에서는 중국계 미국 배우 리사 루(Lisa Lu, 盧燕)가 맡았다.[28] 시작부터 어린 주인공 선통제를 불러다 그의 천진난만함을 지켜보며 "남들이 다들 노불야라 두려워하며 죽기만 바라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구나."라며 흐뭇함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대사를 한다. 그리고 푸이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사망하고 훗날 군벌 쑨뎬잉의 손으로 토막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 야명주를 입에 물게 된다.[29] 실제로 서태후는 선통제가 즉위한 지 며칠 후에 사망하고 비록 잠깐 나왔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이 영화 < 마지막 황제>가 한국에서 대박을 거두자 부랴부랴 중국에서 만든 <서태후>란 영화가 <마지막 황제> 연관작처럼 홍보되어 개봉했으나 1989년 당시 관객 집계조차도 없을 정도로 쫄딱 망하고 막을 내렸다. 참고로 이 영화의 주연배우는 류효경 공리이다.
  • 위의 <마지막 황제>의 드라마판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드라마 <말대황제전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선 선통제가 무거운 분위기에 못이겨서 울먹이며 자리를 피하려 한다. 서태후는 사탕을 주며 달래보려 하지만, 결국 푸이에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저 어린 아이가 황제라니...'라는 식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워 한다. 이 드라마에선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뿐만 아니라 서태후 역시 독살했다고 묘사한다.
  • 64부작 대하사극 희설자희(戱說慈禧)에서 배우 총산(叢珊)이 열연했다.
  • 장서희가 출연했던 중국 드라마 <경자풍운>(庚子風雲; 庚子西京記)에서도 악역으로 등장.
  • 서태후가 주인공이었던 작품인 홍콩 드라마 <소녀자희>(少女慈禧)도 있다. 다만 액션신이 들어있는 등 각색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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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중화일미>에서는 최종 보스는 아니고 유마오신 카이유의 마지막 대결의 심판으로서 등장한다. 작가의 그림체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회춘. 뒷요리계 최종 보스 카이유의 "인격지배독선요리 파마팔진"으로 산송장이 될 뻔했지만 유마오신(비룡)의 만리장성까지 냄비로 응용한 '어머니의 태양볼' 요리로 기력을 회복한다. 마오의 요리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지 이 작품에선 내내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오는데 작가의 후속작인 푸드 헌터에선 기존의 이미지대로 음험한 실루엣으로 나온다. 달랑 한 컷뿐이긴 하지만.
  • 펄 벅의 소설인 《연인 서태후》에서는 고뇌에 찬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도 연인인 환관(환관이 되기 전) 영록대부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로 나온다. 의화단 사건이나 무술정변은 한때의 잘못된 생각이 되었다. 말년에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기품 있게 늙어가면서 중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노인으로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이다.[30]
  • 홍콩배우 구숙정이 주연한 에로영화 <외전 혜옥란>[31]이 바로 서태후 라이징을 다룬 영화다.[32] 여기서 서태후는 황제[33] 승은을 입지 못하다가[34] 유곽에서 고도의 성관계 기술을 배워 결국 황제의 승은을 얻었고, 황제가 병석에 드러눕자 황제의 동생[35]을 유혹해 불륜 관계를 가지고 임신하여 출산까지 한다. 이후 그를 이용해 조정을 장악한 다음 그마저 토사구팽하는 것도 모자라 장차 자신의 라이벌이 될 후궁들도 차례로 제거하면서 절대권력을 손에 넣는다.[36][37]
  • 확산성 밀리언아서에서는 희우형 서태후라는 기사 카드로 등장. 이 게임 카드들이 대개 그렇듯 미소녀 버전으로 능욕 변신 당했다. 이 게임에서 실존 인물들 중 기사 카드로 등장한 것은 서태후 외에도 잔 다르크, 마리 앙투아네트, 어우동 등이 있으나, 그 캐릭터들과 비교해서도 서태후는 미소녀 이미지와 괴리가 지나치게 심하다(…).
  • <천공의 옥좌>라는 일본만화에서는 서태후는 아니지만 가상의 중국왕조 덕나라의 황태후가 나온다. 내용을 보면 미녀에다 사치하는 것까지 완전히 서태후 판박이다. 남편인 선황 사후 자기 친아들을 황제로 세우지만 12년 후 그 아들이 죽고 만다. 결국 옛날에 향중독으로 독살당한 남편의 후궁 소생의 황자를 황제로 세운다. 이 황제가 평범한 민가에서 살다가 후계가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황제가 즉위하게 되는데, 황제의 나이가 어리고 병약하다는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다. 이 작품에서 황태후를 서태후로, 죽은 황태후의 친아들을 동치제로, 주연격 황제는 광서제로 비교하면 실제역사와 거의 똑같을 정도로 들어맞는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광서제는 도광제의 7번째 아들 순친왕의 소생이다.
  • 영화 <8인 최후의 결사단>에서는 잠깐 1~2분 분량이지만 쑨원이 잠시 홍콩을 들린다는 소식을 듣자 극중 보황파(만청황실세력)의 암살단 두령에게 위의 일화처럼 옷을 갈아입으면서 장막 속에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쑨원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는 포스가 압권이다.
  • 시오노 에토로지의 괴작 오토코노코물 만화 < 브로켄블러드>에서는 레오타드 격투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설정도 있다. 전설의 레오타드 중에 서태후가 입었던 레오타드도 있다는 언급으로...
  • 2010년 중일합작 드라마로 < 창궁지묘>가 있다. 서태후 역을 다나카 유코가 맡았으며, 서태후와 가장 외모가 비슷한 배우로 꼽힌다. 감독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서태후와 이미지가 매우 흡사해 캐스팅했다 밝혔지만, 중국 내에서 워낙 이미지가 안좋은 서태후다보니 중국 배우들이 캐스팅을 하나같이 거절해 일본인 배우를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도 파다하게 돌기도 했다.[38] 일본인이 주역을 맡았다는 소식에 중국 본토에선 떨떠름한 반응이 주를 이뤘지만, 서태후와 흡사한 외모에 배우의 연기력으로 이내 논란은 불식되었다.
  • 2016년 드라마 < 반요경성>에서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서태후의 시위였다. 요괴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라서 서태후는 요괴들의 힘을 빌려 열강으로부터 청나라를 지키려 했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능가하는 대사업의 최대주주가 된다. 그 대사업에서 사재까지 털면서 지분의 절반을 홀로 차지할 수 있는 자본을 대면서 대륙의 기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실제 역사와 같이 의화단 운동의 시발점으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점점 소식이 끊기더니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고 만다.
  •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아직 비(妃)의 신분이라 운신의 폭이 좁으나 원 역사에서 보여준 엄청난 권력욕과 인성이 어디 가진 않아서 수틀린다고 시녀를 뜨거운 물이 담긴 은주전자로 후려치고 의원에게 보내라는 병 주고 약 주는 태도와 영국 대사들의 선물을 받고 편의를 봐주는 나라 말아먹기 딱 좋은 악녀 그 자체다. 결국 태평천국군이 청도 조차지에서 몰살당하자 홍수전이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천안문 앞에 준비된 불구덩이에 던져져 타들어가는 뼈만 남는 최후를 맞이한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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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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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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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 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시몬 드 보부아르 안네 프랑크 토니 모리슨
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비욘세 엘라 피츠제럴드 캐서린 헵번 마돈나 메릴 스트립
미리엄 마케바 오프라 윈프리 사라 베르나르 움 쿨숨
정치인들
에이미 클로버샤 바바라 조던 캐롤 모즐리 브라운 엘리자베스 워런 프랜시스 퍼킨스
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매들린 올브라이트
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참정권주의자들
앨리스 폴 앨리스 스톤 블랙웰 캐리 채프먼 카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도리아 샤픽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프랜시스 하퍼 프랜시스 윌러드 해리엇 스탠턴 블래치 헤르타 아일톤
후다 샤아라위 아이다 벨 웰스 제인 애덤스 줄리아 워드 하우 케이트 셰퍼드
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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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835년 11월 29일. [2] 음력 1908년 10월 22일. [3] 출처 1983년 유골 조사 결과 나온 키이다. [4] 큰이모이기도 하다. [5] 서태후 일족이 예허나라씨가 아닐 가능성을 중국 사학계에서 제기했다. [6] 풀이하면 높으신 부처님(老높으신 + 佛부처 + 爺 님)이다. 청대에는 태상황제와 황태후에게 그런 극존칭을 썼는데, 그래서 중국드라마(ex: <황제의 딸>)에서 '숭경황태후'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자막이 자주 등장해서 한국인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7] 이런 식탐 때문에 서태후는 과식으로 인한 복부팽창, 기능 저하, 이질에 항상 시달렸다. 서태후는 죽음도 생일잔치에서 과식을 하다가 이질에 걸려서 맞았다. 게다가 탈모도 심했는데, 40대부터 탈모가 발생하여 60대부터는 머리카락이 얼마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래서 서태후는 여기에 스트레스를 받아 탈모를 치료하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결국 가발을 쓰고 다녔다. 노년의 서태후 사진에서는 머리카락이 풍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수리에 꽃을 꽃고 가발을 쓴 것이다. [8] 어떤 설에서는 백만 냥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서태후가 사치스러웠다 한들 이는 터무니없이 부풀린 금액이다. 1차 아편전쟁 후 청에 부과된 배상금이 백은 1200만 냥, 2차 아편전쟁 배상금은 800만 냥이었고, 청나라 최고 전성기 때인 1803년의 1년 세수가 3800만 냥을 조금 넘겼다. 조선 병자호란 후 청에 바친 세폐가 백은 1천 냥이다. 조선 후기의 소설《 허생전》에서 조선의 산물을 매점매석하는데 필요한 돈을 백은 1만 냥으로 잡았다. 당시 중국 농민의 1년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면 더더욱 100만 냥일 수가 없다. [9] 자신의 선호 음식을 알지 못하게 해서 독살의 우려를 없애려 했다는 말도 있다. [10] 이런 서태후의 식성을 간파한 환관들이 요리사들과 짜고 횡령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서태후가 관상용으로 차려만 놓고 절대 손대지 않는 요리들을 파악해두었다가 이 요리들을 상한 티가 나기 직전까지 재활용해서 상에 올리고, 그만큼 부식비를 착복했다. [11] 거지 시절, 먹다 남은 여러가지 채소를 끓인 찌개가 그렇게 맛있어서 황제가 된 후 찾았다는 이야기. 사실 국가나 특정 세력 등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어려웠던 시절 맛있게 먹은 음식을 그리워하여 다시 찾거나 계속 즐겨먹는다는 건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도루묵도 같은 케이스다. [12] 비슷한 시기에 고종 삼년상전화로 퉁쳤다는 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사실 고종은 한국사에서도 유명한 얼리어답터 군주였다. [13] 당시 자동차가 포드 모델 T처럼 손으로만 운전하는 방식이기에 망정이지 1940년대부터 보편화된 발도 쓰는 차량이었으면 아예 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4] 손톱 보호대. 당시 만주족 여성들은 손톱을 1~2cm 정도 기르는 풍습이 있었다. [15] 중국 사극들 중 청나라 시기를 배경으로 한 궁중사극들을 보면 극중 비주얼을 위해 시대적 고증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과 '대랍시'란 머리 스타일이 많이 나오는데(예: < 옹정황제의 여인>, < 환주격격>), 이런 의상과 대랍시는 청 말기에 서태후가 주로 즐겨 입거나 꾸미던 의상과 머리 형태였다. 오히려 옹정제 건륭제 시기에는 황실 차원에서 사치를 금하면서, 의상과 머리가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수수한 편이었다. 이런 검소함은 궁녀는 물론 황제의 후궁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 < 보보경심>과 < 연희공략>이 이런 옹정 ~ 건륭 시대의 의복을 잘 고증한 편이다. [16] 1874년 기준으로 청나라 예산은 1억 냥이었는데 4,000에 해당한다.(2022년 8월 은 시세가 그램 당 844원 정도하므로 약 3조 3억원이 넘는다.) 우선 청일전쟁 이후 청이 일본에 지불한 배상금이 2억 냥이었고, 또한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받아낸 랴오둥 반도 서양 열강들의 반발로 중국에 다시 돌려주는 대가가 딱 3,000만 냥이었다. [17] 한무제만 해도 흉노, 고조선, 남월과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국가 재정을 파탄내는 원인 제공을 했다. [18] 당시 청나라가 독일 조선소에 발주한 정원급 전함은 독일 해군도 발주 못한 최신예함이었다. [19] 황해 해전에서 북양함대가 그렇게 엉망진창이었는데도 일본 함대의 군함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20]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일본군 장교가 청나라 함대를 방문했을 때 충격받은 게 두 가지나 있는데 하나는 배와 포가 엄청나게 거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 사이로 널린 빨랫감들이 보였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전함에서는 포 사이에 빨랫감을 너는 걸 금지했다. [21] 벌거벗은 세계사》서태후 편에서 중국 패널 증언에 의하면 중국에서 서태후 관련 드라마를 찍으려 했지만 중국 배우들 중 누구도 서태후를 안 하려 해서 할 수 없이 일본 배우가 맡았다고 한다. 해당 드라마는 창궁지묘다. 중국에서 서태후의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22] 존스턴은 입헌군주국 영국 출신으로 변법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변법운동의 원수인 서태후와 위안스카이를 열심히 깔 수 밖에. 물론 청나라를 멸망시킨 쑨원도 미워했다. [23] 하지만 서태후의 막장 행보는 오히려 청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결과를 낳았다. [24] 다만 전근대 피지배층들은 기본적으로 상위층 특히 왕가에 대한 복종의식과 존경심을 당연히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서태후가 특별히 뭘 잘해서 이런 존경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임진왜란의 선조도, 병자호란의 인조도, 구한말의 고종도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국난을 극복하기에 능력과 의지가 부족했고 실책이 많았던 왕으로 평가하지만 일단 당시의 백성들은" 아이구 우리 나랏님 고생하셔서 어뜨케 ㅜㅜ" 하는 반응이었다. [25] 여담으로 서태후와 한동안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고종 역시 능력에 비해 과한 권력욕으로 실책이 많았지만, 당대 민중들에게는 썩은 기둥이나마 정신적 기둥 노릇을 했다는 점에서 서태후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다만 고종은 적어도 스스로 개혁을 주도하거나 일제에 저항하려 시도하는 등 나름대로 애쓴 행보도 있어서 그 부분은 긍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26] 여러 왕조, 황실에서 반란, 권력 분산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방계를 다 죽이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명망있고 지도력을 갖춘 방계는 황제 개인에게는 눈에 가시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이 다른 마음만 안 먹는다면 황실의 권위가 되어주고 이런 위기에도 황가의 구심점이 되어준다. 서태후 치하에서 이런 황실 종친들이 다 죽거나 몰락했다는 것. [27] 당장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 서태후에게 탄압을 받은 캉유웨이조차도 공화제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시신이 능욕을 당했을 정도였다. [28] 1927년생으로 현재 나이가 무려 94세나 된다. 남편인 중국계 미국인 셀링 홍은 1996년 11월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남편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자식들이 3명으로 현재 손자, 손녀들까지 보았다. 여담으로 리사 루는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도 유창하게 잘해서 중국 방송에도 출연한 적이 있으며 현재 상하이의 대학교에서 연기를 강의하는 자문 교수로 활동한다. [29] 이 장면에서, 티베트 불교 겔룩빠 승려들이 천도 의식을 위해 궁으로 들어와 나팔(걀링, gyaling)을 불며 춤을 추다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청나라 조정은 대대로 티베트 불교를 후원했다. [30] 펄 벅이 당대에 페미니즘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여성 지배자상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 심하게 각색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31] 원제: <慈禧秘密生活>(자희비밀생활) [32] 감독이 유위강으로 훗날 < 무간도 시리즈> 감독을 맡았다. [33] 함풍제 역은 우영광이 맡았다. [3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승은 자체는 극중 초반에 입었으나, 함풍제에게 이렇다 할 총애는 받지 못하고 오히려 관계가 끝난 이후에 아이를 갖게 하지 말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질내사정된 정액까지도 억지로 빼게 된다. [35] 황제의 동생인 공친왕 역을 양가휘가 맡았다. [36] 단순 19금 영화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권력을 탐하다 나중엔 권력의 화신이 되어가는 서태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된 영화다. 마지막에 공친왕을 잊지 못했는지 그냥 버렸는지 모호한 표정을 짓는 구숙정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양가휘는 이 영화에서 섹시함을 유지하며 우직하고도 냉정한 공친왕 역할을 절제된 연기로, 구숙정은 단순히 '섹시스타'라고 불리던 기존 고정관념을 이 영화로 무너뜨렸을 정도로 열연했다. [37] 톡파원 25시의 서태후편에서 기본 자료 화면으로 이 영화가 계속 나온다. [38]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중국인이 직접 언급했을 정도니 중국 내에서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지 보여주는 대목. 신문기자에 캐스팅된 심은경과 결이 비슷한 루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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