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칸 영화제 | ||||
황금종려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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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 19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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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 194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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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릭 에블러 (결정적 전환점) 프란티셰크 카프 (날개 없는 사나이들) 레오폴트 린트베르크 (마지막 기회) 알프 셰베리 (아이리스와 중위) 로베르토 로셀리니 ( 무방비도시) 체단 아난도 (아랫마을) 데이비드 린 (밀회) 장 들라노이 (전원 교향곡)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마리아 칸델라리아) 빌리 와일더 (잃어버린 주말) 보딜 입센, 라우 라우리첸 (붉은 초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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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미넬리 (지그펠드 폴리스[1]) 자크 베케르 (앙트완과 앙트와네트[2]) 벤 샤프스틴 ( 덤보[3]) 에드워드 드미트릭 (십자포화[4]) 르네 클레망 (패배자의 최후[5]) |
데이비드 린 Sir David Lean C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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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데이비드 린 (David Lean)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08년 3월 25일 |
서리주 크로이던 | |
사망 | 1991년 4월 16일 (향년 83세) |
런던 라임하우스 | |
직업 |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각본가, 편집자 |
신체 | 1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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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각본가, 편집자.생전 40여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 단 16편의 영화만을 찍었지만, 영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들 중 한 명으로 꼽히며[6], 콰이 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같은 대작 서사시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자 1940년대와 1950년대 영국 영화를 대표하는 고전적 스타일 영화의 거장이기도 하다.
또한 찰스 디킨스나 E. M. 포스터 같은 고전 영문학가들의 소설이나 희곡을 영화로 옮기는 데 능해, 문학을 가장 잘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7]
2. 생애
1908년 3월 25일, 영국 크로이던에서 태어나 1927년에 TV 스튜디오에 입사해 슬레이트 보이로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편집 보조, 카메라 보조 일을 거친 뒤, 촬영 감독이 되었다가 뉴스 영화사로 옮겨 편집 기사로서 일을 하게 되며 실력을 쌓았고, 1930년대에는 꽤 촉망받는 편집 기사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8][9]편집 기사로서 실력을 인정받은 데이비드 린은 1942년 전쟁 프로파간다 영화 《토린호의 운명》을 극작가 노엘 코워드와 공동 감독하며 장편 연출 데뷔를 하게 된다.[10]
이후 그는 노엘 코워드와 협업을 이어가며 코워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깁슨 가족 연대기》 (1944), 《즐거운 영혼》 (1945), 《 밀회》 (1945) 등의 작품을 연달아 감독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밀회》가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을 거두며 데이비드 린의 명성을 쌓게 된다.
《밀회》의 성공 이후 데이비드 린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했던 작가인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 위대한 유산》과 《 올리버 트위스트》를 영화화하게 되고, 두 작품이 모두 성공하면서 데이비드 린은 '문학을 가장 잘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50년대에 들어서 《매들린》, 《소리의 장벽》, 《홉스의 사위 고르기》 등의 수작을 감독한 데이비드 린은 50년대 중반에 이르자 캐서린 헵번[11]을 주연으로 한 《여정》을 기점으로 할리우드 자본을 축으로 한 다국적 대작 영화 쪽으로 연출 방향을 돌렸고, 피에르 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57년작 《 콰이 강의 다리》를 통해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자 당시 기준으로 1,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초대작 《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7,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을 성공시키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영화화해 역시 1,100만 달러를 들인 대작 《 닥터 지바고》마저 1억 1,700만 달러라는 흥행 대성공[12]을 이루며 데이비드 린 감독의 명성은 정점을 찍게 된다.
그러나 《닥터 지바고》 이후 린의 후기작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원작으로 한 1970년작 <라이언의 딸>은 영국에서 1년간 장기상영됐을 만큼 관객의 사랑을 모았지만 평단의 집요한 비판에 의욕을 잃은 린은 무려 14년간을 칩거 상태로 보냈다. 다만 이는 <라이언의 딸> 이후 영국 영화계 자체가 불황에 들어서고 린 본인도 영화계 트렌드에서 밀려난 이미지였기에[13] 입지가 좁아졌던 부분도 있었다. 14년이 지난 1984년, E. M. 포스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인도로 가는 길》로 복귀해 호평을 받는다.
이후 여든이 넘은 나이에 후기작에서 함께 협업했던 각본가 로버트 볼트와 함께 조지프 콘래드의 16세기 멕시코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노스트로모>를 영화화하던 도중, 1991년 4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촬영 현장에서 쓰러진 뒤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특징
단순하면서 중후한 화면 구성으로 고전 영화계의 화면 미학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으며, 정갈하면서 아름다운 영상미의 고전극이나 거대한 자연 풍경을 아주 멀리서 사물을 잡아내는 '익스트림 롱 샷'으로 드넓게 담아내면서도 빛을 잘 활용해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또한 편집 기사로 활동했던 초창기 이력의 영향으로 영화 속 편집 장면에서 많은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14]
3.1. 비판
1960년대 즈음부터는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은근한 백인 우월주의, 구체적으로는 유럽 및 서구 우월주의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5]린 감독의 대표작인 《 아라비아의 로렌스》, 《콰이강의 다리》나 《인도로 가는 길》 모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랍인들이나 일본인들, 인도인들 같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묘사로 상당히 비판을 받은 바 있으며 특히 《인도로 가는 길》의 경우 인도 극우들이 엄청나게 비난했으며 대다수 인도인들의 여론도 좋지 않았던 영화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영화 전체에 마치 '인도는 무식하니까 영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라는 느낌이 깔려있다는 의견마저 있다.
다만 위 세 작품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 한 것이며, 오히려 린 감독의 경우 원작의 장점을 잘 살리면서도 집필자의 시각상 필연적으로 나오는 제국주의적인 시각이나 아시아인들에 대한 비하를 상당히 편집해서 공정하게 그린 편이라는 평가도 공존한다.
또한 상술한 문학적인 성향 때문에 문학 각색물 같다고 까는 평론가들도 있었다. 영국 영화 항목에서 고다르랑 트뤼포가 깠던 부정적인 의미로 영국 영화스러움을 거론할 때 항상 꼽히는 감독이다.[16] 전반적으로 영화 고유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평론가나 감독들에게는 평가가 짠 경향이 있다.
또 다른 단점으로는 《 닥터지바고》가 있는데, 원작의 사색과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이 영화에서는 대이비드 린 특유의 미장센으로 배경만 보여주고 끝났다는 비판이다. 다만 이는 책이라는 매체가 영화라는 영상매체로 변환되면서 어쩔수없었다는 변론도 있다.
4.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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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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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링크 열기 |
연도 | 제목 | 연출 | 각본 | 편집 | 비고 |
1942 |
토린호의 운명 In Which We Ser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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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
깁슨 가족 연대기 This Happy Bre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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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즐거운 영혼 Blithe Spir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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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밀회 Brief Encoun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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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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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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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정열적인 친구들 The Passiona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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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매들린 Madele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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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소리의 장벽 The Sound Barr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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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
홉슨의 사위 고르기 Hobson's Ch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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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여정 Summerti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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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콰이 강의 다리 The Bridge on the River Kw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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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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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닥터 지바고 Doctor Zhivag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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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라이언의 딸 Ryan's Daugh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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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인도로 가는 길 A Passage to In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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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알렉 기네스와는 < 위대한 유산>을 시작으로 < 올리버 트위스트>, < 콰이 강의 다리>,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닥터 지바고>, 그리고 유작 <인도로 가는 길>까지 총 6편을 함께 할 정도로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행보와는 다르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는 않은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데이비드 린은 기네스를 'My good luck charm'로 부르며 계속 캐스팅했다고 한다.[17]
- 요절한 제임스 딘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데이비드 린은 자신의 후기 대표작 <라이언의 딸>에 제임스 딘 닮은꼴 배우 크리스토퍼 존스(Christopher Jones)를 캐스팅했는데 문제는 이 크리스토퍼 존스가 인간 말종이었단 점이다. 영화가 한창 촬영 중이던 1969년, 전 연인 올리비아 허시에게 데이트 폭력을 저질렀다. 심지어 당시 허시는 만18세로 미성년자였다.
[1]
뮤지컬 코미디 부문.
[2]
심리 애정 영화 부문.
[3]
애니메이션 디자인 부문.
[4]
사회 영화 부문.
[5]
모험 범죄 영화 부문.
[6]
직접적으로 인터뷰 등지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감독들만 해도
스탠리 큐브릭,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조지 루카스,
스파이크 리,
세르조 레오네,
존 부어만,
폴 토머스 앤더슨,
기예르모 델 토로,
오우삼,
조 라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등 수없이 많다.
[7]
대표작 콰이 강의 다리와,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었고, 하술하듯 죽기 직전까지도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노스트로모》를 촬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8]
이 시절 주로 전쟁터에서 직접 공수된 필름을 편집해서 뉴스릴로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시간에 쫓긴 나머지 본능에 따라 손이 가는 대로 편집한 뒤 나중에 작업실 뒤편 마당을 거닐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가를 점검하면서 영화 편집의 리듬감을 익혔다고 한다.
[9]
즉 보다시피 촬영 감독과 편집 감독 경력이 둘 다 있어, 영상에 관한 것은 모두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 완벽한 영상미의 비결은 바로 이것인 듯.
[10]
그 이전에도 1941년작 '바바라 소령'의 편집에 참여하며 공동 연출자 중 한 명이기도 했지만, 크레딧에는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11]
캐서린 헵번은 함께 작업한 감독 중 데이비드 린을 가장 존경했다.
[12]
2020년 기준으로 물가 상승률을 적용할 경우 역대 가장 성공한 영화 9위라는 엄청난 대성공이다.
[13]
당장 린과 반대되는 '앵그리 영 맨' 사회파 사실주의 감독들도 중견에 들어서던 시절이었다.
[14]
특히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성냥을 불어 끄자 사막의 여명으로 하드컷이 되는 씬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화인들 사이에서 영화사상 최고의 명편집으로 뽑히고 있다.
[15]
이러한 원인은 아무래도 데이비드 린이 대영제국 시대를 살았던 영국인이었던지라, 사고방식에서 보수적인 면이 컸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16]
이외에는
제3의 사나이로 유명한 캐롤 리드, 바질 디어든이 꼽힌다.
[17]
다만 후기작으로 갈수록 주연에서 비중 있는 조연 급으로 비중이 줄어든다.
[18]
<콰이 강의 다리>는
영국군과
일본군의 악연이니 영국인 데이비드 린 입장에선 감독할 이유가 충분했지만,
진주만 공습은
미국군과 일본군의 악연이다. 린이 섣불리 나설 순 없는 소재이기도 했고, 공교롭게 이 시기는 린이 <라이언의 딸>을 끝내고 14년의 긴 칩거 생활에 들어가는 시기와 맞물린다. 그래서 진작에 거절한 프로젝트인데, 20세기 폭스 측은 요 부분은 쏙 빼놓고 "
데이비드 린 감독님에게도 시나리오 초안을 보냈다."까지만 구로사와에게 이야기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