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왕국의 여왕에 대한 내용은 이사벨 1세(예루살렘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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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6대 국왕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왕조 초대 국왕 이사벨 1세 Isabel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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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51년 4월 22일 | ||
마드리갈 데 라스 알타스 토레스 | |||
사망 | 1504년 11월 26일 (향년 53세) | ||
메디나 델 캄포 | |||
재위기간 |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 | ||
1474년 12월 11일 ~ 1504년 11월 2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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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가문 | 트라스타마라 가문 | |
이름 |
이사벨 데 트라스타마라 이 아비스 (Isabel de Trastámara y Avis) |
||
아버지 | 후안 2세 | ||
어머니 | 포르투갈의 이자벨 | ||
형제자매 | 알폰소 | ||
배우자 | 페르난도 2세 (1469년 결혼) | ||
자녀 | 이사벨, 후안, 후아나, 마리아, 카탈리나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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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이자 스페인 왕국의 공동 통치자.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통일된 스페인 왕국을 만들었다.[1]참고로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카스티야-레온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포르투갈 왕국과 그라나다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2. 생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공주로 태어났다. 정국이 불안한 상황에서 이복 오빠인 엔리케 4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즉위 후 엔리케 4세가 새어머니인 이사벨 왕대비와 이복 동생들을 궁에서 쫓아내 가두게 된다. 이로 인해 이사벨 일가는 군대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생필품도 제때 받지 못하는 등, 가혹한 감금 생활을 했다. 포르투갈 왕족 출신인 어머니 이사벨 왕대비[2]는 일국의 공주 출신 왕비에서 갑자기 수감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 데다가 의붓아들 엔리케 왕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때문에 결국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이사벨은 공주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정신 이상이 일어난 어머니와 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직접 빨래도 하고 밥도 짓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였다. 우울함과 절망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톨릭 신앙이었다고 한다. 정국이 다소 안정된 후 왕은 이사벨을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로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태후가 사망하고 엔리케 왕에게도 오랫동안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가면서 잠재적인 왕위 계승자, 내지는 왕녀로서 정략 결혼에 쓰일 수 있는 카드가 되었다.이사벨은 처세에 능해서 이러한 엔리케 4세의 여러 가지 의심에서 벗어나 사춘기가 넘은 나이에 기어이 교육의 기회도 얻고, 훗날 긴 내전을 거푸 치르면서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웃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와의 결혼 과정에서 큰 마찰도 있었으나 엔리케 4세에게 결국 살해당하거나 하지는 않고 엔리케 왕의 딸인 후아나 공주 등 경쟁 세력들을 모두 제치고 최종승리자가 되었다.
또한 이사벨은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남쪽에 남아있는 마지막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콘키스타를 완성하였다. 여담으로 남편 페르난도는 전장에서 보내는 기간이 많았으므로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그때까지는 연합왕국일 뿐 통합된 국가는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부부이면서도 서로 미묘하게 견제하는 사이였다.
한편 이사벨은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물들까지 팔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후원하기도 하였고 마침내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왜 이사벨 여왕이 이토록 콜럼버스를 후원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야사가 있다. 콜럼버스가 자신이 믿은 항로에 대해 증명해 보인 갖가지 방법이라든가, 이사벨 여왕의 꿈에 계시가 있었다든가.[3] 가장 현실적인 관점에서 콜럼버스를 후원해 준 이유로 추정되는 건 역시 돈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으로 돈이 들어오고 옆 나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무역으로 돈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문제는 카스티야는 이런 대열에 아직 합류를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해외 무역항로를 얻으려면 지중해 항로도 아프리카 항로도 아닌 제3의 길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그걸 마련했다고 나타난 것이 바로 콜럼버스였던 것. 그리고 실제로도 이사벨이 이렇게나 돈 퍼주며 후원했던 덕에 이 개척 사업의 이익은 몽땅 카스티야에게로 들어왔다. 남편의 나라인 아라곤은 한 푼의 이익도 얻지 못했고 이어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안 그래도 쩌리였는데 더 쩌리가 된건 덤(...) 결국 원래 영토도 더 넓었던 카스티야에 사실상 통합되는 모양새가 된다. 아무튼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도박으로 보였던 이사벨 여왕의 무모한 투자가 결과적으로 스페인을 유럽 최강자로 만든 대박을 터뜨린 셈이 되었다.
페르난도와의 결혼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이복오빠인 왕 엔리케 4세가 자신을 20살 가까이 많은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과 결혼시키려고 들자, 엔리케의 비굴한 외교 등 각종 실정과 재상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던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이사벨 공주가 물 밑으로 다른 남편 후보들을 물색, 최종 낙점한 이웃나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 서신으로 결혼을 약속하고서 각자의 궁에서 야반도주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격분한 엔리케 왕의 군대에 쫓기기도 하고 이사벨 공주의 편이었던 추기경이 교황의 결혼 허가증을 위조해 주는 등 갖은 모험을 겪으며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고.
이사벨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스페인에 남은 아랍인들에게 개종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고 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강제로 개종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추방령까지 내려 쫓아내기도 하였는데 추방된 이들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에게 무시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들 일부는 오스만 제국으로 무사히 도망쳤고 그라나다의 고급 정보를 오스만 측에 전해주었고 이러한 아랍인 탄압은 현재까지도 여왕의 대표적 오점으로 남아있다.[4]
한편 신대륙에서 온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웃음이 많고 순수하다며 그들을 가족과 같이 잘 대해주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그녀 사후 아메리카에서의 살육과 고문을 보면 이사벨 1세의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행위의 주체들은 주로 콩키스타도르들이었고 스페인 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1512년 원주민은 노예가 아니라 유럽인과 동등한 인간이며, 지배하되 동시에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 보호해줘야 한다고 명시한 부르고스 칙령에서부터 아예 엔꼬미엔다 제도를 갈아 엎고, 스페인 정착민들과 분리해 부분적으로 자치를 누리는 ‘이중 공화국’ 원칙을 성문화한 1542년 신 법령까지 상당히 일관적으로 원주민을 일정한 법적 권리와 민권을 지닌 스페인 신민으로 대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흔히 세간에서 오해하는 것이, 16세기의 콩키스타도르 정복 사업은 스페인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중앙의 '군대'를 파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100% 개인 사업자들이 사병 집단 꾸려서 쳐들어 간 다음 "이 땅과 주민들을 하느님과 우리 왕께 바친다 (그러니깐 땅과 돈과 명성과 연줄을 주세요)"고 헌상하는 과정이었다.[5] 그러니 이미 사업 차원에서 투자로 후원금을 받고 들어 온 인생막장 정복자들의 입장에선 돈 되는 건 뭐든지 해야 해서 고의적으로 분란을 일으킨 것이 크다. 그나마 정치적 감각이 꽤 있고 학식도 비교적 있는 편에 속했던 코르테스가 쳐들어가 정복한 멕시코 일대가 예외지,[6] 페루에서 과테말라까지 스페인의 정복지 대부분은 이름만 빌렸지, 실제로 해 준 것도 없는 스페인에 맞서 콩키스타도르들이 다 해쳐먹겠다고 들고 일어나 오히려 그 콩키스타도르를 상대로 다시 정복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았다. 물론 이러한 말 안 듣는 콩키스타도르들을 토벌할 군대도 스페인 본토에서 보낸 테르시오 정규군이 아니라 누에바에스파냐, 페루 현지 부왕령 식민 정부의 총독들이 알아서 어찌 모은, 콩키스타도르들보다 질적, 양적으로 하등 나을 게 없는 경우가 많았으니 국가 차원에서는 몇 차례나 원주민 학대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7]
2.1. 여왕이 되기까지
이사벨은 카스티야 왕국 후안 2세의 계비[8] 포르투갈의 이사벨의 딸로, 위로는 이복오빠 엔리케 4세가 있었고 아래로는 동복 남동생 알폰소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왕위 계승자는 아니었다. 후안 2세가 사망하고 정국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사벨 공주의 어머니 이사벨 태후는 남편 전처의 아들인 엔리케를 왕으로 지지해 주었으나, 정작 의붓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되어 감금된다. 하지만 엔리케 4세의 늦게 얻은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가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후아나 왕비와 신하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후계자 문제가 발생한다.엔리케 4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일부 귀족들이 후아나 공주가 정말 엔리케의 친딸이 맞는지 문제 삼아, 1464년 알폰소 왕자를 국왕으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카스티야 왕국은 둘로 분열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1467년에 알폰소 왕자가 사망하자 알폰소 왕자의 지지자들은 1468년에 대신 이사벨을 옹립하려고 했다. 이때 그녀는 엔리케 4세가 있는 한 절대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카스티야 국내를 분열시켰던 내전은 이로써 종결될 수 밖에 없었고 이사벨의 결정에 크게 감명받은 엔리케 4세는 그때부터 내심 이사벨을 왕위 계승자로 점 찍어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뒤 이사벨의 결혼 문제로 둘의 사이는 상당히 악화된다.
2.2. 결혼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된 이사벨에게 유럽의 유력한 여러 국가에서 청혼이 쇄도했다. 그 가운데서 그녀는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의 결혼을 희망했다. 아라곤은 카스티야의 이웃 나라로,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언어와 민족이 비슷했다. 또한 페르난도와는 친척 뻘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17살의 나이에 두 나라가 합병하면 장차 스페인 반도의 통일, 유럽에서의 정치 무대가 넓어질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복오빠인 엔리케 4세는 그녀를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사벨은 결혼을 신청하러 온 포르투갈 왕의 대리인을 쫓아버리고[9] 아라곤 왕자와의 혼인을 독단으로 결정했다. 격분한 엔리케 4세는 그녀를 궁에 감금했으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이사벨은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 도망쳤다. 엔리케 왕의 추격을 따돌리며 바야돌리드까지 갔고, 그곳의 귀족에게 보호받으며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에게 급사를 파견해 나와 결혼을 하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편지를 받아본 아라곤 측은 매우 당황했다. 그리고 긴급회의가 열렸다. 자칫 카스티야 왕과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이때 페르난도 왕자는 큰 결심을 하고, 역시 대담하게도 몇 사람의 부하만 데리고 대상인으로 변장해 바야돌리드까지 350km나 되는 거리를 이틀 만에 맹렬히 돌파해서 몰래 이사벨을 만나러 왔다.
페르난도 2세-이사벨 1세 부부의 초상화.
당시 초상화들은 이상화된 얼굴을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니까 맨 위의 초상화나 이 부부 초상화나 실제 얼굴과는 차이가 상당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부부가 닮은 이유가 어쩌면 친척이라서 실제로 닮았을 수도 있지만 화가가 자기 주관대로 적절히 포토샵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469년 10월 두 사람은 바야돌리드 시에서 엔리케 4세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결혼했다.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허가를 받을 겨를도 없어서 위기를 맞은 적도 있으나, 다행히도 이들의 결혼을 지지한 톨레도의 대주교가 허가장을 위조해 고비를 넘겼다.[10] 이 결혼이 바로 이베리안 웨딩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억지로 모양새를 겨우 취한 혼인이었지만, 이사벨에게 있어 이 때의 일은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5년 뒤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고,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의 전쟁,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공주와의 긴 내전을 연이어 치르면서 모두 승리하고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다. 카스티야에서 분쟁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역시 아라곤에서도 페르난도의 아버지인 추안 2세가 사망해 그녀의 남편인 페르난도 또한 아라곤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만약 이사벨이 아폰수 5세와 결혼해서 아라곤 대신 카스티야-포르투갈이 동군연합으로 엮였다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하는 것도 은근히 통용되는 if 떡밥이다.[11]
2.3. 부부왕의 치세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에는 스페인이라는 연합체가 탄생하였고, 이사벨 여왕은 남편인 페르난도에게 '스페인 왕국은 남편과 공동 통치하지만, 카스티야의 정권에 대해서는 아라곤의 국왕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래서 이사벨은 남편의 나라 아라곤에, 페르난도는 아내의 나라 카스티야에 대해 통치자의 배우자로서 관여할 수는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공동통치는 아니었다.하지만 사실상 통일 스페인 왕국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 이사벨 1세의 통치기였기에 사실상 두 나라가 통일되어 스페인 왕국이 만들어진 게 이 때라고 보기도 한다. 1492년에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이베리아의 반도의 남부,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를 정복했다. 그라나다는 스페인 통일에 있어 마지막 거점이었다. 이건 역대 국왕들이 꿈꾸던 스페인 통일을 그녀가 페르난도와 힘을 합쳐 해냈다는 것, 즉 레콩키스타를 완성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사벨 1세는 세제의 개혁, 군의 정비, 종교 재판 도입 등의 일을 하며 스페인을 다스렸다.
또한 이사벨 1세는 1492년부터 시작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을 지원해준다.[12] 이때 즈음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설치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그라나다와 전쟁 중이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신하들은 이 무리한 투자를 맹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그녀는 산타페 양해각서까지 체결하면서 콜럼버스의 모험을 지원해주었다. 이사벨 1세는 당시 국외로 영토를 개척하는 사업에 확고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우수한 항해사를 바다로 보내 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 아프리카 서해안을 가진 포르투갈에게 뒤져서는 결코 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콜럼버스는 의도치 않았지만 행운에 힘입어 아메리카의 존재를 알리게 되며 상당한 이익을 가져오게 된다.
가톨릭 부부왕의 경우 두 사람 사이에는 평생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기인했는데, 카스티야의 국력이 아라곤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나라의 결합에 있어서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분할해서 상속받을 수 없다는 조항에 서명해야 했다. 또한 당시의 남성우월주의 사상에도 불구하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그리거나 조각할 때는 반드시 두 사람이 완벽히 같은 크기로 묘사되어야 했다.[13]
이렇게 당대 남성들과는 달리 아내의 권리를 넘보지 못하고 동등하게 지낸 페르난도는 이사벨의 사망 이후에 카스티야를 아라곤에 합병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재혼한 부인 제르멘 드 푸아에게서 상속자를 생산하지 못했고[14], 이사벨 생전의 조약에 의해 두 사람의 차녀 후아나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모두 상속받게 된다. 이 후아나와 카스티야 왕의 사위-남편 자격만 있던 후아나의 남편 펠리페 사이의 아들 카를로스 1세[15]의 대에 이르러 완전히 통합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게 된다.
2.4. 사후의 영향
그녀는 1504년 11월 25일에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그라나다에 있는 왕실 대성당에 있는데, 남편 페르난도와 딸 후아나, 사위 펠리페까지 다같이 묻혀 있다.
그녀와 페르난도 사이엔 1남 4녀가 있었지만, 아들 후안은 어릴 때 사망했고 포르투갈의 왕비였던 장녀 이사벨은 미겔 왕자를 낳다가 사망했기에 이사벨 여왕 사후에는 차녀인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후아나 여왕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16] 남편 페르난도 2세와 사위 펠리페 1세가 카스티야의 섭정 자리를 놓고 서로 다퉜고, 이후 펠리페가 섭정하는 걸로 결론이 난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카스티야에 온 지 단 두 달 만에 펠리페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페르난도 2세가 섭정을 맡는다. 겉으로는 간단히 정리된 것 같지만, 펠리페의 사망에 독살 의혹이 있고 아라곤의 왕으로 어디까지나 섭정 자격인 페르난도 2세가 새로이 후계자 아들을 갖기 위해 재혼을 하고 카스티야인들은 이를 싫어하는 등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상당히 복잡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페르난도 2세가 새로운 부인 제르멘 드 푸아와의 사이에서 결국 자식을 갖지 못한 채 사망하고, 외국에 있던 후아나 여왕의 아들 카를 5세가 어머니와 공동통치하는 형태로 즉위하면서 해결되었다. 이때 실권은 전적으로 손자 카를에게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역사에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은 카를 5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넷째 딸이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이자 메리 1세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이다. 캐서린이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1502년에 시집을 갔는데 얼마안가 1504년에 이사벨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비극적이고 고달픈 영국 시집살이를 해야했다. 이사벨 1세 사후 딸인 캐서린의 안위를 책임지고 신경써야할 남편 페르난도 2세가 캐서린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안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치세에서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개종하지 않은 이슬람교도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하고 1492년《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도 추방한 일이다. 이는 이슬람 및 유대인들은 물론, 개념있던 기독교 인사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는데 그라나다 왕조를 멸망시킬 당시 마지막 이슬람 왕인 보아브딜이 항복하며 물러날 때 조건으로 약속한 이슬람인과 유태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반드시 허용해 줄 것을 어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북아프리카 및 이슬람권 지역 기독교인들은 그 분풀이로 똑같이 추방당했기에 이들이 스페인으로 와서 니들 땜에 우리가 이 꼴이 되었으니 받아달라고 분노했다. 물론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니 받아주긴 했으나, 오랫동안 비기독교 지역에 살던 이들 다양한 기독교인들은 기존 스페인인들과 공존이 아주 잘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 칙령의 근본적인 큰 이유는 바로 돈이었다. 돈이 없어서 가장 만만한 유대인들을 족쳤고 유대인들은 너무 짦은 기간에 재산을 처분하고 떠나야 했는데 그나마도 금, 은같은 물건들은 국외 반출을 금지당했다. 대부분의 재산을 강탈당한 유대인들은 유럽 여기저기로 떠돌게 된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가톨릭 단일신앙으로 국가 대통합을 이루고 국내 안정, 영토 확장과 자금 확보 등을 이룬 셈이나 장기적으론 유대인의 제거가 스페인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고도 본다. 국내 금융업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이걸 다른 자들이 커버했어야 하는데, 곧 신대륙 황금뽕을 빨게 되면서 굳이 대처를 안 하게 되었다. 쫒겨나간 금융업 전문가 유대인들은 스페인에 감정이 좋을 리 없었고, 그 상태로 증손자 펠리페 2세의 치세 시기까지 와버리면서 해외 영토가 급격히 발견되고, 이로 인해 유럽 각국은 전쟁과 파산이 줄지어 일어나면서 금융에 서툴렀던 나라들은 점차 그야말로 빚에 깔리게 된다.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게 된 손자인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겸임하면서 낭비가 극심했고, 엄청난 빚을 졌다. 증손자 펠리페 2세는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최전성기의 호시절을 누렸지만, 그때까지도 아메리카를 통해 확보한 그 엄청난 보유량에 비해 금과 은의 정밀한 제련법 등은 발달하지 않아 스페인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매우 투박하게 굴러갔다. 치러야 할 전쟁과 빚은 더 불어났고 펠리페 2세는 파산도 네 번이나 겪었다.[17] 그리고 당시 스페인 내에서 무어인 등 무슬림들은 농업과 제조업에 주로 종사했는데, 이사벨이 완료한 레콩키스타를 기조로 삼아 펠리페 2세 때까지도 끊임없이 이들을 탄압하고 쫓아내고 북아프리카 쪽의 혼란을 방조하면서 이후 결과적으로는 스페인 반도 내에선 농업-식량확보도 망하게 됐다. 당대엔 식민지로부터 풍부한 수입에 의존할 수 있었으나, 식민지를 잃었을 때의 본국엔 발전된 인프라가 부족하게 된다. 이사벨이 얻어낸 아메리카 등 머나먼 해외 식민지에 눈이 돌아간 이 후세들은, 가까운 지중해 근방의 이슬람 세력과는 영영 멀어졌고, 독실한 카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스페인의 이러한 통일성은 '유럽 최강자', '카톨릭 진영의 군주'로서의 자긍심에 힘입어 문화적 보수성, 폐쇄성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쉽게 요약해서 이사벨은 나라를 완성하고 부강하게 만들어 대제국의 기틀을 세웠지만, 동시에 나라의 근본적인 동력을 약화시키는 불씨를 남긴 왕이라는 모순적인 유산을 남긴 것이다. 한마디로 달도 차면 이지러지듯이, 그녀가 이룬 성공을 기반으로 오만해진 후세들이 영광은 영광대로 누리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 보완하지는 못해 그 영광의 이면이었던 단점도 그대로 끌고 가버린 사례.[18]
다만 이사벨 1세~펠리페 2세까지의 광적인 카톨릭 집착과 그에 따른 이교도포비아(?) 스러운 모습을 조금 변호하자면 이전까지 스페인,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 초에서 15세기 말까지 700년 가까이 이슬람 세력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그런 이슬람을 상대로 맞서게 하는 동기는 가톨릭이었다. 오죽하면 교황도 레콩키스타를 십자군 전쟁의 일부로 간주해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게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할 의무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 700년 동안 이교도와의 전쟁, 그 명분은 일종의 성전이라는 가치관으로 인해서 이미 이사벨 1세 시기부터 이교도에 관대할 수가 없었고 여기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 시절, 종교개혁과 오스만과의 투쟁까지 맞으니 더 그럴 수가 없어졌다.
심지어 스페인은 내부적으로 지방 특색이 강해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일단 스페인이 탄생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기존까지 존재하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연합이지 두 나라가 사라지고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두 왕도 어디까지나 '카스티야의 여왕'과 '아라곤의 왕'이지 '스페인의 왕비/여왕', '스페인의 왕/국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동기는 카톨릭밖에 없었다.
3. 기타
- 목욕을 하루 평균 네 번씩 했다는 기록과 일평생 단 2번만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동시에 있다.
- 남편과 함께 로마 제국의 마지막 제위 요구자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로마 황제 칭호를 사들였다. 그러나 이미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상태에서, 그 황제 칭호는 허울뿐인 자리였기에,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그 칭호를 구입만 하고 사용하진 않았다.[19] 또한 안드레아스는 당시 매우 궁핍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기에, 말이 구입이지 사실상 기부한 거나 다름 없었다.
- 현대 스페인에서도 위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지만 스페인 정치판에서는 얘기가 조금 다른데, 다름아닌 프랑코 정권 시절 국민들에게 스뽕을 주입하기 위한 용도로 이사벨 여왕을 밀어준 탓에 좌파 진영에서는 시선이 영 좋지 않다.[20] 또한 통일 스페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보니 독립을 추진하는 분리주의자들에게도 까이고 있다. 반대로 가톨릭 정신으로 무장하고 레콩키스타와 스페인 제국 시절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파 진영에서는 스페인 통합과 가톨릭화, 콜럼버스 후원 등의 '업적'을 바탕으로 고평가를 받는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이사벨 1세 (Isabella I of Cast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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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2세 (John II of Cast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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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3세 (Henry III of Cast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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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1세 (John I of Cast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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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레오노르 (Eleanor of Arag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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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의 캐서린 (Catherine of Lancas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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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John of Gaunt, 1st Duke of Lancas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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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의 콘스탄사[21] (Constance of Cast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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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la of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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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총사령관 인판테 주앙 (Infante John, Constable of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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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1세 (John I of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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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의 필리파 (Philippa of Lancas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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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루스의 이자벨 (Isabella of Barcel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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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간사 공작 알폰수 1세[22] (Alfonso I, Duke of Bragan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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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 페레이라 드 알빔 (Beatriz Pereira de Alvim)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포르투갈의 왕비 이자벨 (Isabella, Queen of Portugal) |
1470년 10월 2일 | 1498년 8월 23일 | 포르투갈 공 아폰수 |
마누엘 1세 슬하 1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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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John, Prince of Asturias) |
1478년 6월 30일 | 1497년 10월 4일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
2녀 |
후아나 여왕 (Joanna) |
1479년 11월 6일 | 1555년 4월 12일 |
펠리페 1세 슬하 2남 4녀[23] |
3녀 |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Maria, Queen of Portugal) |
1482년 6월 29일 | 1517년 3월 7일 |
마누엘 1세 슬하 6남 2녀[24] |
4녀 |
잉글랜드의 왕비 캐서린 (Catherine, Queen of England) |
1485년 12월 16일 | 1536년 1월 7일 | 웨일즈 공 아서 |
슬하 1남 1녀[25] |
5. 대중매체에서
스페인이 처음으로 등장한 문명 2를 시작으로 문명 5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문명 2에서는 펠리페 2세와 함께, 나머지는 단독 출연. 카를로스 1세나 펠리페 2세 쪽이 더 적격이 아닐까 싶다는 의견도 있지만, 문명 시리즈 특유의 양성평등 기조도 있거니와 카를로스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이기도 하기 때문에 무리가 있다.[26] 실제로 문명 3에서는, 정식 문명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더미 데이터로 오스트리아의 군주로서 카를 5세가 있었다. 문명 6에서는 펠리페가 나오고, 이사벨을 보려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제작한 모드의 힘을 빌려야 한다. 문명 7에서 다시 지도자로 나온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선 스페인 지도자로 나오는데 엄청난 미인이다. 그에 비해 옆쪽 섬나라 엘리자베스 1세는 그냥 아줌마다.
콜럼버스를 후원했기 때문에, 콜럼버스를 다룬 영화에 자주 나온다. 톰 셀렉이 주연한 영화에서의 배우 레이철 워드의 연기는 사실 너무 나약한 편이고,《1492 Conquest of Paradise》에 나온 시고니 위버가 강인한 군주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
또한 유비소프트가 만든《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남편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성전기사단의 꼭두각시로 움직이면서 암살단과 충돌해 결국 암살단에 의해 독살되고 만다. 또한《 어쌔신 크리드(영화)》에서 종교 재판 장면에서 짧게 한 컷 등장한다.
스페인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이사벨 1세를 주인공으로 한 대작 사극《 이사벨(ISABEL)》을 방영했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카스티야 왕국의 이벤트로 등장하게 되는데 선택지 1번을 누를 경우 능력치 5/6/3 의 유능한 여왕으로 집권을 하게 되고 선택지 2번을 누를 경우 여왕으로 등극되지 않고 일반 조언가로 등장하게 된다. 다만 아라곤과의 연합을 위해 이베리안 웨딩을 필수로 하는 카스티야의 입장에서는 아라곤에도 여왕이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1번 선택지를 선호하는 입장이다.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등장. 나폴리 내전이 끝난 뒤 나폴리 왕위에 오른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트라스타마라 가문과의 혼인 동맹을 위한 사신을 보냈다고 언급되며[27] 이후 인노첸시오 8세의 십자군 선포때 주변국들 상태가 다 정상이 아니라 완전히 준비될때까지 몇 년은 걸릴테니[28] 레콩키스타를 먼저 끝내고 십자군에 가도 안 늦는다 주장하며 남편인 페르난도와 충돌한다. 결국 아라곤이 먼저 십자군에 합류하고 카스티야는 그라나다를 잡고 따라오기로 합의를 봤지만 페르난도는 부인이 자신에게 딴지를 걸어 언짢다는 태도를 보이며 향후 스페인의 분열의 씨앗이 싹트고 만다.
《 모두의 마블 for kakao》에서 그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 퀸 이사벨이 등장한다.
마블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 왓 이프...?》시즌2 6화에서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해당 에피소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특별한 능력을 얻어 유럽 열강들의 침략을 막아내는 대체역사물이라, 포탈을 통해 스페인 왕궁으로 넘어온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평화 조약을 맺는 것으로 나온다.
[1]
스페인 식민제국의 첫 군주는 이사벨 1세 부부,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첫 군주는 카를로스 1세로 간주된다. 다만 연합체였던 스페인이 법적으로 통합된건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펠리페 5세 때이다.
[2]
이 집안은 모계로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7대에 걸쳐
대물림했으며 이사벨 1세의 모후인 포르투갈의 이자벨은
주앙 1세의 손녀이다.
[3]
가장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남편 페르난도와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서 남자답고 언변이 뛰어난 콜럼버스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설일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 여왕을 자처하던 이사벨 여왕에게 이런 스캔들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유럽의 왕실 혼인 정치에 현대적 연애관을 투영시키는 건 무리라지만, 요즘의 관점에서도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남편이 전쟁 때문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었지만 서로 애정이 깊고 신뢰가 강한 편이었으며 자녀들도 여러 명을 낳았다. 더구나 당시 잘 봐줘야 무모한 모험가 내지 어쩌면 사기꾼에 가까웠을 변변찮은 사내인 콜럼버스와 일국의 공주 출신 여왕이라는 고귀한 신분, 가톨릭을 의지해 살아오고 스페인 반도를 종교적 일체로 통일하겠다는 꿋꿋한 신념을 가졌던 이사벨의 스캔들은 본인이 직접 들으면 당장 종교재판으로 불러
너 화형했을 법한 엉터리 야사이다.
[4]
그래도 여왕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가톨릭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상황에서 이교인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을 옹호했다간 국가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었다. 거기다 그 아랍인들이 스페인 이전 모든 이베리아 기독교 왕국들의 시조인 서고트 왕국 시절부터 수백년을 넘게 치고박고 싸운 원수지간이었기에 더더욱 사정을 봐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5]
그나마 피사로의 경우에는 카를로스 1세로부터 페루 총사령관, 군사 600명을 얻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다. 명목상의 지위와 수백 명의 병사 외에는 피사로가 마련해야 했다.
[6]
이쪽도 파괴 행위를 안 저지른 건 아니다. 코르테스마저도 정식으로 명령을 받고 갔던 게 아니라 한 탕 해보려고 멋대로 이탈해서 간 것이기 때문이다.
[7]
그래도 스페인 지배 하에서는 원주민들의 권리가 이후에 비해선 '그나마' 지켜졌던 편이다. 콩키스타도르나 그 이후의 크리오요들은 어찌되었든 간에 상전은 스페인이라서 속내가 어쨌든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했는데 독립 후에는 눈치 볼 것도 없어져서 스페인 지배 시기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탄압한다.
[8]
첫번째 부인은 아라곤의 마리아.
[9]
아무리 정략 결혼이라지만, 당시 아폰수 5세는 40세가 넘었기에 이사벨에겐 거의 아버지 뻘이기도 했다.
[10]
두 사람은 부계로
6촌남매 관계였기 때문에
근친혼이어서 교황의 허가가 필요했다. 뭐, 나중에는
바티칸에서 가톨릭 부부왕의 칭호를 주었다.
[11]
일시적으로나마
펠리페 2세 시기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된 적은 있다.
이베리아 연합 문서를 참고 바람.
[12]
참고로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왕국은 콜럼버스의 탐험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를 후원한 건 전적으로 이사벨의 카스티야 왕국 만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이익도 카스티야가 주로 누리게 된다.
[13]
당시 유럽에서는 예술 작품에서 가부장적 주의에 입각해 남편을 아내보다 크게 그리는 것이 전통이었다.
[14]
아들 1명이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15]
카를 5세
[16]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광녀 후아나’가 됐다. 하지만 후아나가 주술이나 마법에 심취하는 등의 이상 행동을 보인 원인은 남편의 바람기였다. 문제는 후아나의 광기가 남편이 죽고 나서도 나아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17]
통치 행정 시스템은 편집증적으로 정비했다지만 경제는 그만치 깊게 생각하지 않은 듯. 사실 이 때는 경제학도 없던 시대고 하다보니 그런 분야에선 미숙할 수 밖에 없긴 했다.
[18]
물론 부잣집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스페인은 물론 그녀의 또 다른 손자인 페르디난트의 후손 계열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까지 더하면 이사벨(과 후아나)의 후손들은 최전성기를 지나고도 매우 오랫동안 전 유럽에서 크나큰 위상을 떨쳤다. 이후의 거듭된 이 가문(특히 종가에 해당하는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폐쇄적인 근친혼은, 선대가 이룬 성공에 안주해 다른 활로를 찾지 못하고 천천히 몰락해가는 왕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다.
[19]
게다가 이때는
사돈이
신성 로마 황제로 있었다.
[20]
옆집에서도
잔 다르크가
극우세력의 상징이 되어버린 탓에 반대 진영에서 괜히 욕을 먹고 있다.
[21]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의 차녀.
[22]
주앙 1세의 사생아이다.
[23]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왕비 엘레오노르,
카를 5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 엘리사베트,
페르디난트 1세,
헝가리의 왕비 마리어,
포르투갈의 왕비 카타리나
[24]
주앙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이자벨라,
엔히크 1세 등
[25]
메리 1세 등
[26]
문명 6에서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이나
쿠빌라이 칸 등 둘 이상의 문명을 이끄는 지도자라는 개념이 나와서 후속작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유지될 경우 희망이 생기기는 했는데, 스페인은 물론 독일에 네덜란드에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문명이 한둘이 아닌 것이 문제다.
[27]
그러면서 뒤쪽으론 이사벨 여왕 사후 벌어질 계승 분쟁에서 트라스타마라 가문을 지지해주겠다는 밀서를 보내 스페인 내부의 분열의 씨앗을 심었다.
[28]
프랑스는 내전이 끝난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아직 수습이 안된 상태였고 그래서 정부가 직접 군을 보내지 않는 대신 영주들의 개인 참전을 승인하는 최소한의 성의만 보였다. 신성 로마 제국 역시 플랑드르의 반란이 진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규모 군대 동원이 사실상 불가능해보였고 이탈리아의 소국들은 동원 가능 병력의 머릿수가 부족하긴 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타고난 정치질로 다수의 독일 귀족들을 십자군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하며(베네치아 섬이 사람 때문에 가라앉을 기세였다고 한다.) 이사벨의 판단이 틀렸음을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