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전 미합중국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Ruth Bader Gin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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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Ruth Bader Gin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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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3년 3월 15일 | ||
뉴욕주 브루클린 | |||
사망 | 2020년 9월 18일 (향년 87세) | ||
워싱턴 D.C.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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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연방대법관 | ||
1993년 8월 10일 ~ 2020년 9월 1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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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배우자 | 마틴 긴즈버그 (1954년 결혼, 2010년 사별) | ||
자녀 |
딸 제인 긴즈버그 아들 제임스 긴즈버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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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55cm | ||
학력 |
제임스 매디슨 고등학교 (
졸업) 코넬 대학교 ( 정치학 / B.A.)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 ( 법학 / LL.B.[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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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법조인 | ||
성향 |
[[진보주의| 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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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뉴욕남부지방법원 서기 럿거스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미국시민자유연맹 여성권 프로젝트 법률고문 미국자유인권협회 법무자문위원 스탠퍼드 대학교 행동과학고등연구센터 연구원 컬럼비아구 순회항소법원 판사 미국 연방대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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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미국 연방대법관. 1993년 6월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진보/ 리버럴 성향의 대법관으로 유명하다.1963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럿거스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재직했고, 1972년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에서 여성권 프로젝트를 공동 설립했으며, 1973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자유인권협회에서 법무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이와 거의 동 시기인 1972년부터 1980년까지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로스쿨 교수로 재직한 뒤 1980년 6월엔 미국 연방상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시절 성(性)을 뜻하는 용어로 생물학적 의미가 강한 ‘ 섹스’(sex) 대신 사회적 성의 가치가 녹아든 ‘ 젠더’(gender)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자, 최초의 여성 유대인계 연방대법관이다.[2]
2020년 9월 18일, 자택에서 전이성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미국 언론들의 보도에 의하면 2019년 손녀에게 유언으로 2020년 11월 대통령 선거 전까지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2020년 9월 29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 성향
판사가 되기 전에는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성차별에 반대해 여러 소송을 제기했었다. 자신이 공동설립한 여성권 프로젝트는 1974년까지 300건 이상의 성차별 사건에 참여했고,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1973년과 1976년 사이에 대법원에서 6건의 성차별 사건을 변호하여 5건을 승소시키기도 했다. 긴즈버그는 법원에 모든 성차별을 한 번에 끝내라고 요청하는 대신, 구체적인 입법과 집행 목표로 하고 각 사건별로 하나하나씩 연속적으로 승리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원고를 신중하게 선택했고, 때때로 성 차별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남성 원고를 선택하기도 했다.판사 시절에는 1996년 군사학교에 남성의 입학만 허용한 버지니아 주에 대해 양성평등권 침해 판결을 했으며, 1999년에는 국가가 장애인을 과도하게 시설에 격리하는 데 대한 차별을 지적하는 행동을 보였다. 부분출산 낙태 금지법을 위헌이라고 소수의견을 내기도 했다.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아 오랜 친구인 마이클 카이저 케네디 예술센터 관장과 정부 경제학자인 존 로버츠[3]의 결혼식을 주재하고, 동성 부부가 이성 부부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법인 '연방결혼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 폐지에 찬성하기도 했다. 그 외에 동성결혼 합법화도 앞장서서 지지했다. 2015년 8월 3일엔 한국을 방문했을 땐 국내 1호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김승환 커플과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와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 등 국내 성소수자들과 용산 미군 기지에서 다 같이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4][5] 이후 대법원을 방문해 "성소수자의 권리와 인권 보호를 위한 대법원의 역할이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6]
에이즈 퇴치 운동 단체가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성매매 반대를 명시하도록 강요해선 안 된다는 미국 대법원의 결정(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대 Alliance for Open Society International, Inc. 사건)에 찬성하기도 했으며, 2014년 4월에는 어퍼머티브 액션 금지에 소니아 소토마요르와 함께 반대했다 ( Schutte 대 Coalition to Defend Affirmative Action 사건.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벤치에서 읽었을 정도로 다수의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진보 성향이다보니 대선 전에 관례를 깨고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해 논란이 되었고 # # # 결국 사과했다. #
3. 사후의 논란
1999년 대장암, 2009년 췌장암, 2018년 폐암을 앓았다. 특히 2009년 2월 초에는 췌장암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가서 법원에 복귀했으나 이후 법원 집무실에서 병환 증세를 보여 워싱턴 병원 센터로 옮겨져 철분 부족 증상을 치료하려고 철분 자당 치료를 받은 뒤 잠시 입원하기도 했다. 2019년에도 암 치료를 위해 잠시 업무를 쉬었다가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결국 췌장암으로 사망했다.그녀의 사후 강경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이 후임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되면서 연방대법원의 보수 성향 대법관은 6명, 진보 성향 대법관은 3명이 되어서 향후 수십년은 이 우위가 뒤집힐 수 없게 되어버렸다.[7][8] 이것을 긴즈버그 본인의 선택으로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는데 그 기회들을 본인이 다 저버렸다. 처음 대장암에 걸린 1999년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말이라 후임 대법관을 뽑기도 어려웠고 대장암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완치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때 사퇴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009년에 앓은 췌장암은 완치 확률이 매우 낮고 그 당시에도 76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에 사퇴를 할 만했고, 2014년까진 민주당이 상원 과반을 차지했기 때문에 사퇴해도 충분히 진보적인 후임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5년부터는 공화당이 상원 과반을 차지해서 오바마는 임기 마지막 해 사망한 보수 대법관 스칼리아의 후임조차 임명할 수 없었고, 전세계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힐러리를 이기면서 은퇴도 하지 못하고 아픈 몸으로 최소 4년에서 8년까지는 버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운동도 열심히 하며 버텼지만 결국 트럼프 임기 2달을 남기고 사망하면서 "후임 대통령이 자신의 후임을 임명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트럼프는 긴즈버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정중하게 추모하고 조기 게양을 지시한 것 #과는 별개로 사망한 지 8일 만에 배럿을 후임 대법관으로 지명했고, 공화당은 그녀의 유언을 지켜달라는 시위도, 스칼리아가 오바마 임기를 10개월 남기고 사망했을 때 곧 퇴임할 대통령이 수십년을 갈 대법관을 임명할 수 없다며 반대한 과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거가 2개월도 안 남은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배럿의 인준 절차를 강행했다.
이후 대법원은 낙태 금지, 어퍼머티브 액션 폐지, 동성애 배척, 학자금 채무 탕감 금지, 친환경 정책 폐기 등 긴즈버그의 사상에 반대되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았고, 그럴 때마다 긴즈버그가 오바마 때 사퇴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의견이 나왔다. 종국에는 긴즈버그 스스로가 사퇴를 거부해 배럿의 임명을 초래해서 그것들을 없애버린 것이라며 아예 법관으로서의 모든 업적을 지지층으로부터 부정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9] 그러나 긴즈버그는 " 여성 대통령이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하게 하고 싶어서" 오바마가 자신만큼 진보적인 후보를 임명하지 못 할 것 같다는 이유로 사퇴를 거부하고[10] 자진 사퇴 대신 불확실한 선거 결과에 기댄다는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고, 이게 제대로 빗나가면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남은 수명에 기대다가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순간에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도널드 트럼프의 자비만 구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로, 미국 진보 진영에게는 수십년에 걸쳐 쌓아올린 가치가 무너지고 향후 수십년간 진보 의제나 민주당 행정부의 통치행위가 사법부에서 가로막히는 참사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특히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되고 나서 절정에 달했다. # ##
긴즈버그의 죽음과 그에 따른 연방대법원의 보수화는 미국 진보진영에 충격을 주었는지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된 후 진보진영에서 30년대생 진보 대법관 스티븐 브라이어에 대한 사퇴 압박이 거세졌다. 그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내세워서 버텼지만 결국 사퇴했고[11] 후임으로는 70년생에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 커탄지 브라운 잭슨이 임명되었다. 원래 보수 대법관들은 자신을 '독립적이어야 할 사법부의 일원'보다는 '보수 진영의 일원'으로 여겨서 성향이 맞는 후임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은퇴 시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12] 긴즈버그의 죽음 이후로 진보 대법관들도 정치권을 의식하게 되었으니 크게 보면 사법부의 정치화를 심화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여담으로 뉴욕타임즈에서 조 바이든에게 공개적으로 연임을 하지 말 것을 촉구하며 바로 긴즈버그 사례를 거론하였는데 #, 사실 대통령 유고 상황에는 부통령이 직을 승계하기 때문에 연방대법관의 사망 사례와 등치시킬 수 없는 정략적인 공격에 불과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 바이든 역시 이러한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연임을 포기했다.
이후 2024년 민주당이 완패하고 공화당이 대통령과 양원까지 장악하게 되자 소니아 소토마요르도 지병인 당뇨병을 이유로 정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사퇴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4. 어록
이상적인 여성 대법관 수를 몇 명이라고 보냐는 질문에 내가 '9명중 9명'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놀란다, 하지만 1981년도까지 남자뿐일 때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 뿐입니다.
유치원생들 앞에선 선생처럼 설명했죠. 판사들은 성차별이란 게 없다고 믿었으니까요.
정부가 여성의 선택을 대신하는 건 여성을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 완전한 성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죠.
여성의 뜻과 성취와 참여는 제한될 수 없고 여성도 능력에 근거해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
여성의 동등한 기회를 제한하는 법률의 효력은 소멸할 것.
5. 기타
- 고등학교 때 자치회 선거에 나갔다가 낙선한 적이 있다. 코넬 대학교를 정치학 전공으로 우등 졸업한 뒤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13] 2학년까지 하버드에서 다녔으나 뉴욕 로펌에서 일하는 남편[14]과 함께 지내기 위해 컬럼비아 로스쿨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3학년을 마쳤다.[15] 그녀는 컬럼비아 로스쿨을 공동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여자란 이유만으로 필릭스 프랭크퍼터 대법관을 포함한 모든 판사들이 재판연구관(law clerk)으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
의외의 사실로 보수 성향의 앤토닌 스컬리아[16] 대법관은 긴즈버그 대법관을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다고 한다.[17][18] 법철학이 판이한 이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은 미국 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매년 새해 전날에 긴즈버그 가족과 스캘리아 가족이 같이 저녁 식사를 즐기며, 둘 다
오페라를 좋아해서 오페라도 같이 자주 감상하러 다닌다고 한다.
정치 성향과 개인적 친분까지 일치되는 정치병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
- 《 타임》이 선정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에서 우상 부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이름 덕분인지 미국에서도
다스 베이더와 연관시킨 짤들이 돌아다닌다.
- 이외에도 강성 지지자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노토리어스 B.I.G.를 패러디한 ‘Notorious RBG’라는 책이 나오거나 그래피티 소재로 사용되는 등 문화적인 아이콘이 되기까지에 이르렀다.
- 2022년 미국 해군 급유선의 이름으로 USNS Ruth Bader Ginsburg가 선정되었다.
- 유품들은 경매를 통해 팔렸다. #
6. 영화
- 루스 - 저스티스 긴즈버그 인 허 오운 워즈, RUTH - Justice Ginsburg in her own Words, 2019
-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 2018 펄리시티 존스를 주연으로 한 루스의 전기 영화가 제작되었다. 한국 개봉명이 원제를 심각하게 훼손시킨 수준이라 논란이 있었다.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RBG, 2018
7. 책
- 긴즈버그의 말
- 긴즈버그의 차별 정의
- 나는 반대합니다
8. 관련 문서
- 미국 연방대법원
- 앤토닌 스컬리아
[1]
당시에는 법무박사 학위였으며 1960년대 이후로는 J.D.로 변경되었다. 현재에는 미국에선 쓰이지않는 학위이며 국제적으로 보면 법학학사로 쓰이는 국가들이 존재해서 헷갈릴 수 있다.
[2]
첫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은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 배우자 간병을 위해서
2006년 은퇴했다. 또한 자녀가 있는 대법관이기도 하다. 다른 연방대법관인 소니아 소토마요르와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은 자녀가 없는 싱글이다.
[3]
미국 연방대법원장의 이름도 존 로버츠인데, 물론 다른 사람이다.
[4]
원래는
홍석천이 이태원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경호 문제로 인해 바뀌었다. 표면상으로는 경호상 문제였지만, 당시 참석자였던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의 술회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 모임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강하게 반대해 급히 미군기지 쪽으로 장소가 바뀌었다고 한다.
[5]
이 때문에 국내
기독교 단체에서 오지 말라는
보이콧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6]
한국 대법원 방문시 대법원 관계자들이 긴즈버그 대법관에게서
상고법원 도입안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들으려고
유도신문(?)을 했다가 언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
[7]
암살 등 비정상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최연장, 차연장자 보수 대법관인
클래런스 토머스(48년생),
새뮤얼 알리토(50년생)이 긴즈버그만큼 산다면 2033년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때까지 민주당이 계속 집권하고, 그 시점에 상원 과반을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 미국 정치의 양극화가 심화되어서 초당적인 찬성으로 대법관이 되었던 관행이 깨졌고, 오바마 행정부 때 상원이 야당 과반이면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 권한을 무력화시킬 수 있고 트럼프 행정부 때 여당이 상원만 쥐고 있다면 대통령 임기가 얼마나 남았든 대법관 임명을 강행할 수 있는 선례가 생겼으니 공화당이 잠깐만이라도 집권하고 상원 과반을 획득한 순간 이들이 사임하고 젊은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하거나, 민주당이 집권할 때 인원 변동이 생겨도 공화당이 상원 과반이면 연방대법원이 마비되든 말든 인준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선례가 생겼으니 토머스와 알리토도 건강을 관리하며 기회가 올때까지 죽어라 버틸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은 결국 2025년 2월까지만 살아있으면 되는 결과를 맞았다.
[8]
애초에 미국에서 민주당이 남북전쟁 이후 8년을 초과해서 연속적으로 집권하였던 것은 프랭클랜 루스벨트에서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시기 뿐이었으며(남북전쟁 이전에는 앤드류 잭슨과 마틴 밴 뷰런이 12년을 연속하여 집권하였던 적이 있다), 그것도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의 개막이라는 특수한 사정 속에서 트루먼이 아슬아슬하게 재선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클린턴과 오바마는 각자의 치적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나, 모두 간발의 차로 정권을 공화당에 넘겨주고 말았다.
[9]
다만 이 책임은 안일한 선거 운동으로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힐러리와 공동으로 져야 할 것이다.
[10]
오바마가 그녀 못지않게 진보적인
소니아 소토마요르를 지명한 것을 보면 사견에 불과했다.
[11]
이때 그를 도와준 상원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도와줬다가는 자기 정치인생도 쫑날 판이었기 때문.
[12]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지만 중도보수 성향이었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부터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었을 때 은퇴하였다. 이로 인해 공화당 정권이 단 한번이라도 세워지면 현 보수 대법관들의 물갈이가 거의 확실시 되고 있으며, 지금 공화당의 상태로 보아서는 큐어넌 음모론 신봉자가 대법관에 임명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13]
당시에 로스쿨 신입생 500명 중 9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로스쿨 학장이 이 9명의 여학생을 집에 초대해 "여학생 1명이 들어오면 남학생 1명이 떨어진다. 너희들이 여기에 왜 온 건지 나를 납득 시켜봐라"라는 질문에 "남편이 하버드 로스쿨을 다니고 있어 그를 이해하기 위해 다니는 중이다"라고 답했다. 루스는 당시 소심하게 대답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했다. 거기다 바로 옆의 학생은 "좋은 남자 좀 만나 보려고요."라고 당당하게 얘기해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14]
당시 암투병 중이기도 했다.
[15]
2년, 특히 로스쿨에서 가장 중요한 1학년을 보낸 하버드 로스쿨에게 학위를 달라고 요청했으나 하버드가 부탁을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학위를 받았다.
[16]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과 함께 연방대법원 내 강경보수의 양대산맥으로 꼽혔다. 과거형이 된 이유는 스칼리아가 2016년 2월 13일에 갑자기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17]
미국 정치 드라마 《
웨스트 윙》에서는 이 둘의 관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갑자기 대법관 2자리가 공석이 나서 신임 대법관 후보를 물색하는데, 야당인 공화당이 계속 보이콧을 놓자 아예 강경보수 성향의 남성 법관과 강경진보 성향의 여성 법관을 함께 추천하기로 한 것. 이 둘은 만나서 낙태, 동성결혼 등 사안마다 부딪히지만 의외로 서로의 철학적 바탕을 존중하며 절친이 된다.
[18]
스컬리아 대법관이 생전에 출연했던 피어스 모건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케어 사건 결정 과정에서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갈등을 빚은 뒤에 화해했고 이제 best buddy냐고 물어보는 인터뷰어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My best buddy on the Court is Ruth Bader Ginsburg. Has always been.)"라고 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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