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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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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 | ||||||||||||||||||||||||||||||||||||||||||||||||||||||||||||||||||||||||||||||||||||||||||||||||||||||||||||||||||||||||||||||||||||||||||||||||||||||||||||||||||||||||||||||||||||||||||||||||||||||||||||||||||||||||||||||||||||||||||||||||||||||||||||||||||||||||||||||||||||||||||||||||||||||||||||||||||||||||||||||||||||||||||||||||||||||||||||||||||||||||||||||||||||||||||||||||||||||||||||||||||||||||||||||||||||||||||||||||||||||||||||||||||||||||||||||||||||||||||||||||||||||||||||||||||||||||||||||||||||||||||||||||||||||||||||||||||||||||||||||||||||||||||||||||||||||||||||||||||||||||||||||||||||||||||||||||||||||||||||||||||||||||||||||||||||||||||||||||||||||||||||||||||||||||||||||||||||||||||||||||||||||||||||||||||||||||||||||||||||||||||||||||||||||||||||||||||||||||||||||||||||||||||||||||||||||||||||||||||||||||||||||||||||||||||||||||||||||||||||||||||||
볼피 컵 - 남우주연상 | |||||||||||||||||||||||||||||||||||||||||||||||||||||||||||||||||||||||||||||||||||||||||||||||||||||||||||||||||||||||||||||||||||||||||||||||||||||||||||||||||||||||||||||||||||||||||||||||||||||||||||||||||||||||||||||||||||||||||||||||||||||||||||||||||||||||||||||||||||||||||||||||||||||||||||||||||||||||||||||||||||||||||||||||||||||||||||||||||||||||||||||||||||||||||||||||||||||||||||||||||||||||||||||||||||||||||||||||||||||||||||||||||||||||||||||||||||||||||||||||||||||||||||||||||||||||||||||||||||||||||||||||||||||||||||||||||||||||||||||||||||||||||||||||||||||||||||||||||||||||||||||||||||||||||||||||||||||||||||||||||||||||||||||||||||||||||||||||||||||||||||||||||||||||||||||||||||||||||||||||||||||||||||||||||||||||||||||||||||||||||||||||||||||||||||||||||||||||||||||||||||||||||||||||||||||||||||||||||||||||||||||||||||||||||||||||||||||||||||||||||||||
제22회 ( 19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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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 19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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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 19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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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 기네스 (말의 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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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 (살인자의 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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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스 (턴스 오브 글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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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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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1708 Vine Stre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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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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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James Maitland Stewart 제임스 메이틀런드 스튜어트 |
||
출생 | 1908년 5월 20일 |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인디애나[1] | |||
사망 | 1997년 7월 2일 (향년 89세) |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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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배우, 군인, 시인, 가수, 영화감독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신체 | 191cm | |
학력 | 프린스턴 대학교 (1928-1932 / BA) | ||
수훈 |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1985년) | ||
묘소 | 캘리포니아주 그린데일 포리스트 론 묘지 | ||
활동 기간 | 1932년 – 1991년 | ||
복무 기간 |
1941년 –
1947년 (
육군) 1947년 – 1968년 ( 공군) |
||
최종 계급 | 공군 준장[2]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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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 | 지미 (Jimmy) | ||
혈통 |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 ||
종교 | 개신교 ( 장로회) | ||
데뷔 | 1932년 'Carry Nation' | ||
부모 |
아버지 알렉산더 스튜어트 (1872. 5. 19 ~ 1961. 12. 28) 어머니 엘리자베스 루스 스튜어트 (1874. 3. 16 ~ 1953. 8. 2) |
||
배우자 |
글로리아 헤트릭 맥린 (
1949년 결혼) (1918. 3. 10 ~ 1994. 2. 16)[3] |
||
자녀 |
아들
로널드 월시 맥린[4] (1944. 6. 19 ~ 1969. 6. 8)[5] 아들 마이클 스튜어트[6] (1947. ~ ) 딸 주디 스튜어트 메럴 (1951. 5. 7 ~ ) 딸 켈리 스튜어트 하커트[7] (1951. 5. 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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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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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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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의 한 장면 |
존 웨인,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은 우리가 자연스러운 배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화면 밖에서나 화면 안에서나 똑같다. 그러나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렇지 않다. 그는 엄청난 작업을 통해 대중이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그의 연기는 연구의 산물이다.[8]
ㅡ 존 포드
미국의
배우,
군인.[9]ㅡ 존 포드
할리우드 황금기의 국민 배우[10][11]이자 미합중국 공군의 장군으로, 할리우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92cm나 되는 큰 키[12], 긴 다리[13],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우등생, 노블레스 오블리주, 완벽주의자임에도 여유롭고 순탄했던 모범생, 비행 덕후, 흥행면에선 몰라도 작품성 면에선 기복이 없던 역대급 필모[14] 등으로 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사후 오랜 시간이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가장 사랑 받는 클래식 할리우드 남배우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1908년 ~ 1932년
영국계 미국인 가족이고 관광과 문화 생활을 열심히 했다. 어린시절 말수가 적고 기계설계도를 그리거나 화학 실험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릴적 소원은 아프리카와 사파리에 가보는 것이었다. 간행물과 책을 좋아하고 보이스카우트에서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다. 기계, 공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사업차 출장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칼럼니스트 동생은 제임스가 유명해지기전에 출연한 망한 연극 리뷰를 기고한 적이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장래희망은 파일럿이었다. 미국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아이비리그[15]에 전원 합격 하고 대통령 아들들이 다니던 머서스버그 아카데미에 갔다. 10대에 친구와 만든 광석 라디오를 팔고 경험삼아 도로 작업과 마술사를 도우면서 고등학교 학비를 벌고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라틴어는 싫어했다고 한다.
14세에 키가 191cm가 되면서(14세에 성장을 멈춤) 항공사나 의류 모델 제의를 받곤했다. 10대가 되기전 피아노와 아코디언 등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루고 운동신경도 좋은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평범한 학생이었다. 미식축구 학교 대표팀은 광탈했지만 54kg팀 센터였고 야구와 육상 선수였다. 라디오공학(재즈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문학, 합창단, 글리클럽, 토론대회 참여, 교내 신문 편집자로 활동하는 등 교내 모든 활동을 했지만 독서와 데이트겸 영화관람이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운 일이었다고 한다. 연출과 기획도 하면서 개구리 왕자로 연기를 처음 해보게 된다. 그러나 병약해서 한번씩 기숙학교에서 돌아와 안정을 위한 휴식을 취했고 더 야위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외출도 못하고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16] 입학도 한 해 미루게 된다. 밖에 걸어다니기 조차 힘든 기간 동안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를 보면서 더욱 비행사를 선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등 연구소도 속해 있던 신입생 500명 규모의 프린스턴 대학교를 다녔다. [17]
마천루가 들어서던 1920년대에 건축을 전공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프린스턴 대학에만 건축과가 있었고 학부에서 가업을 위한 전기공학과였다. 기계제도 수업에서 모두 채플을 설계할때 미래적인 공항을 설계한 논문으로 동대학 대학원의 건축과 전액 장학생이 되기도 했다. 동네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 제임스는 평소에 여유가 넘치는지 영화속 보다 더 느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외할동까지 열심이었다. 운동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힘들고 공부할 시간도 필요해서 그만두고 치어리더팀에 들어가서 단장이 되었다.
연극부에 들고 영화관람도 많이 했다. 후에 영화에서만 보던 스타와 데이트하게 되어 신기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가 회원이면 자동으로 가입 되는 가장 보수적인 사교 클럽에서 대학극단과 트라이앵글 클럽 활동, 데이트가 많았음에도 대담한 조슈아 로건과의 소문만 무성한 관계로 처음에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조슈아 로건은 제임스가 순진하진(?) 않았고 허약하지만 감수성이 뛰어나 대학 극단 단원이 되기를 기대했었다고 한다. 부유하고 여러번 결혼 했지만 게이였던 로건은 어디서든 성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녔다. 극단단원만이 그를 대수롭지 않게 대했고 극단에는 배우 밀드레드 냇윅과 미남 배우 앤서니 퍼킨스(젊은 시절이 제임스와 비슷한 이미지였다고)의 아버지 오스굿 퍼킨스도 있었고 사이가 좋았다. 배우 헨리 폰다도 여기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극단은 소련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많고 개방적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조슈아 로건을 따라 연극계 인사를 만나러 소련에 가기도 했다. 연극부와 달리 폐쇄적인 클럽은 동성애자가 가입할 수 없었다. [18] 클럽 멤버들은 제임스를 게이로 의심하며 냉소적으로 대했지만 제임스는 곧 클럽의 최고 인기남이 된다. 여대생을 끌어 클럽 멤버들 미래의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나와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게 알찬(?) 학창 시절을 보내고 졸업 후에는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대공황으로 취업이 어려워졌다. 프린스턴으로 돌아가려다 조슈아 로건에게 설득당해 뉴욕 브로드웨이로 간다. 사실 제임스는 조슈아 로건의 연극 공연(제임스가 뮤즈)에서 일찍이 워너 브라더스의 명함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대학 공연에서는 훌륭하지만 항상 어딘가 부적응자 처럼 보였고 뮤지컬에서 금방 웃을수는 없는 독특한 분위기로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제임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연예계에서의 성공보다는 장학생이니 학교로 돌아가거나 가업을 직업으로 삼기를 바랬다고 한다.
2.2. 1933년 ~ 1941년
조슈아 로건의 설득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잠시 머물다가 1935년 헐리우드에 데뷔. 단편영화 단역으로 시작했고 초기에는 싱거워보여 좋은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캐스팅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펄 벅의 <대지, The Good Earth, 1937>에서 반나절을 걸려 중국인으로 분장 하지만 당시의 편견에 따른 눈매와 큰 키가 중국인으로 보이지 않는다하여 모두 편집 당했다. 헐리우드 신인시절에 대학극단 단원이었던 마가렛 설리번과 헨리 폰다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마거릿 설리번에 의해 작은 영화에 출연하거나 큰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해 점점 메이저 영화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제임스도 설리번에게 힘이 되고자 했었다. 헨리 폰다와는 불확실한 미래를 함께 준비하며 평생지기가 되었고 설리번과 에이전트 헤이워드 부부 옆집에 살면서 설리번에게 개인 연기 지도를 받았다. 설리번과 여러번 공연하면서 많은 영화인과 친분이 생기고 할리우드에 무사히 정착하게 된다.
2.2.1.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2차 대전 후에 염세주의자나 무례한 캐릭터, 선악이 모호한 역을 맡을 때도 있지만 선하고 확실한 이미지를 추구했기 때문에 악역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유일한 악역은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없었던 신인 시절에 해보았는데 어색하고 악역에 소질이 없어 보였다. 할리우드 초기에는 여자친구에게 의지하는 역할을 많이 했고 순수하고 유쾌한 프랭크 카프러 감독 영화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캐프라는 영화 <Navy Blue & Gold> 의 사관생도 스튜어트를 보고 출연 시키기 시작한다. 발성과 목소리, 동작 하나하나까지 멋있는 배우도 있지만 그런 카리스마있는 배우와는 다르다고 할수있다. 알프레드 히치콕도 무엇보다 평범해서 제임스를 캐스팅했다고 한 적이 있다. 군필에 적당히 교육받고 누구나 좋아하는 성격미남이며 등등을 덧붙였지만.
제임스 스튜어트, 헨리 폰다[19], 조슈아 로건은 할리우드 신인시절에 동거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고 한다.
- Born to Dance, 1936
- Of Human Hearts (1938)
- Navy Blue and Gold, 1938
- Destry Rides Again, 1939
2.2.2. 로맨틱 코미디
초기 출연작은 대부분 로맨틱 코메디였다. 당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위트있는 대량의 시나리오 중심이었고 연극처럼 배우의 매력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상업적인 프랑소와 트뤼포, 우디 앨런 영화 같았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동시대 배우의 느끼함이 없는 상냥하고 귀여운 옆집 오빠, 형 같은 이미지였다. 낭만적인 허당으로 나와 가끔 노래도 부르고 필요하면 사지가 흐느적거리는 춤도 추며 순수 오락을 선사했다.
잘하는건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면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가 좋아 졌다고 한다. 아카데미를 받은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에서 < 오즈의 마법사, 1939]> OST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부르기도 했다. 콜 포터 [20]에게 <Easy to Love>를 부를 사람으로 산택되어 완벽했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듣기 Easy to Love
듣기 DAY AFTER DAY
- Next Time We Love
- Vivacious Lady, 1938
- You Can't Take It With You, 1938
영화에서 1930년대 조차 양산된 호남의 속물스럽지 않은 재벌 캐릭터이지만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으니 그 사회적 지위가 안맞는 옷을 입은것 마냥 어색하기만 하여 생각보다 적역이었다. 빅 애플도 추고 생기 넘치지만 무난했고 담배 연기를 코로 뿜어대는 행위가 역할에는 어긋나 보이지만 오히려 인상적이다.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처음 출연한 프랭크 카프러 감독 영화가 아카데미까지 받으면서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Made For Each Other, 1939
- It's a Wonderful World, 1939
- The Shop around the Corner, 1940
- No Time for Comedy, 1940
- Come Live with Me, 1941
2.2.3. 아카데미
프랭크 카프러 감독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1939》로 처음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뉴욕 비평가상을 받는다.
프랭크 카프러는 비상식의 상식화를 재치있게 풍자하여 아카데미에서 환영받는 감독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스미스씨로 아카데미를 수상하지 못해 다음 해에 보상 차원으로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로 받았다는 반응이 있지만 제임스 본인은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연기가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에서 보여준 배짱을 연기력 보다 높게 샀다. 막 주목받기 시작하던 때라 열정이 앞서 초췌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애쓰다가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이 영화를 찍을 때쯤 자신이 영화속 캐릭터를 은연중 모방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로 명성을 얻고 이로인해 평생 사람좋은 이미지로 많이 소모되었지만 단순하고 한정된 이미지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헐리우드 고전기 극영화 연기스타일 이긴 하지만 초기에는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코미디 연기에서만큼은 늘 적절한 타이밍과 센스로 돋보였다. 자신이 외모로 관객들의 호감을 얻는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총각시절 볼품없는 다리는 어릴 때부터 콤플렉스였는데 영화에서도 다리가 불편한 역이 많다.
프랭크 카프러, W.S. 밴 다이크와 MGM사의 루이 B.메이어 등은 늘 5kg 정도의 증량을 요구했고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면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 찍을때마다 들으니 비쥬얼을 위해 계절 가리지 않고 내복하의를 즐겨 입고 바지는 맞춰 입었다는 후문이 있다. 영화감독에게 부탁해서 다리 대역도 썼다. "관객들이 내 다리를 보면 제 영화계 커리어는 그날로 끝이에요." 라며 사정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수영복 입는 장면도 캐서린 헵번에게 부탁하여 없던일로 하기로 했다. 헵번이 상태를 보고 "그래요. 정말 끔찍하네요."라면서 들어줬다고.
하워드 휴즈의 저작권 선물로 헵번은 영화의 제작자에 가까웠다. 이 영화로 헵번은 흥행 독약도 만회 하게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커플은 아니지만 <필라델피아 스토리> 헵번 & 스튜어트를 미국 영화 최고의 커플로 선정했다. 영화는 그레이스 켈리의 마지막 영화 <상류사회>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스튜어트를 제외한 배우들은 저돌적으로 대사를 쏟아내고 연극연기같은 과장된 감정표현이라 조금 구식 연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들의 열정으로 실수 한번 없는 분위기였지만 하필 제임스에게만 주어지는 느끼한 대사로(헵번도 인정) 인해 실수를 반복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이 영화의 기자, 작가역으로 조연 분량이었지만 특급 배우들과 연기하다 보니 일취월장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게된다. 이 영화에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도 빨리한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조연분량이 주연상을 받은 드문 경우이다.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이었다. 여우 주연상은 최연소 수상자가 1920년대부터 20대였지만 남우주연상 최연소 수상자는 최근에서야 30대 기록이 깨졌다. 키스 4부작으로 화제가 되었던 <피아니스트 (2002년)>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지금까지도 유일한 20대 수상자이다. 당시의 오스카 시상식은 무대와 절차가 간소했고 대통령의 오스카 축하 메세지가 있었다. 제임스가 아카데미를 수상한 1941년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오기도 했다.
아카데미상을 받고 주저없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최초로 실전에 지원한 할리우드 스타가 되었다. 그 뒤 스튜어트 외에도 클라크 게이블을 비롯해 많은 스타가 참전했고 전사한 사례도 있었다.
2.3.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헐리우드 최고의 영화배우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육군 항공대에 자원 입대하여 폭격기 조종사로서 그 험악한 유럽 전선에서 수십차례 전투비행을 치렀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징병제로 전환하자 자원 입영원을 내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을 받자[21] 스테이크를 꾸역꾸역 먹어가며 살을 찌워서 다시 도전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또 불합격, 결국 군의관에게 사정해서 합격판정을 받아낸다. 1941년 3월 22일, 육군 이병으로 들어가 군번 0433210을 받았다. 입영지는 캘리포니아 포트 맥아더였고, 카메라맨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속옷 입고 있는 사진을 찍어 신문에 냈다. 훈련소의 한 늙은 하사관은 "너 참 불쌍한 새끼구만."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튜어트가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훈련소 정문에는 그를 잠깐이라도 보고픈 소녀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언론에서는 그의 군복무를 카메라로 찍고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스튜어트는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사실 제임스 스튜어트는 1935년에 이미 조종면허를 취득했었고 소형이지만 전용기도 소유한 숙련된 조종사였다. 자연스레 미 육군항공대로 가서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42년 1월 장교로 임관, 전선에 배치되었다. 원래는 전투기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결국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2월, 스튜어트는 4발 엔진 비행학교[22]에 입과하여 거의 탑으로 수료했고, 이후 제29폭격비행단으로 가서 B-17 교관이 된다. 그 시기에 그의 룸메이트가 사고로 죽었고 3명의 훈련생도 불운을 겪었다. 스튜어트는 군복무에 관해서는 입이 무거웠다. 스튜어트가 사망하고 몇 년이 지난 뒤 당시 스튜어트의 훈련생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모든 비행기가 돌아올 때까지 관제탑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모든 부하의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그당시의 모두가)다 그런 건 아니었다."
스튜어트는 대전중에 B-17과 B-24를 모두 몰았다. 1943년 3월, 그는 제445폭격기전대 703대대 작전장교가 되었고, 3주 후에는 대대장이 된다. B-24로 20회 출격을 하고 나서, 1945년 초 스튜어트는 버킹햄셔로 가서 453전대의 작전장교로 발령받았다. 453전대는 B-17이 주력이었고, 이때 그는 주로 관제탑에서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이 일에 심드렁해진 스튜어트는 직권남용을 한다. 그는 453전대의 선도기 B-17 '페이퍼 돌'의 부조종석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지정한 것이다.[23] 페이퍼돌의 부조종석은 고위장성이 앉았고 스튜어트가 타고 작전에 나가기도 했다. 그 폭격기 기총수 댄 브로디는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우수한 조종사임을 보이고 싶어했다. 특히나 위험한 작전에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앞에서 부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제임스 스튜어트(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
스튜어트는 폭격기 전대 사람들의 많은 신뢰를 받았다. 그는 지프차를 몰다가 막사로 걸어가는 대원들을 보면 항상 태워주었다. 원래 최선임 참모장교는 매 5회 폭격마다 교대된다. 5회째 되는 작전에는 그도 작전에 참가해야 했다. 그런데 스튜어트는 작전장교 보직을 하면서 11회나 출격했다. 2차대전 당시 폭격기 요원을 오늘날의 전투기 조종사 처럼 우아한 병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은 유럽전선에서 어지간한 육군 병사들보다도 훨씬 전사할 확률이 높았다. 폭격기가 대공포에 직격으로 맞으면 승무원들은 탈출할 여유도 없이 몰살당하는 신세였고, 대공포탄 파편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너무나 많은 승무원들이 죽은 탓에 Flak Vest라 불리는 방편복을 다른 병과보다 먼저 지급받을 정도였다. 심지어 한번 폭격 작전에 25% 이상의 손실을 기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유럽 본토 폭격을 담당한 미 육군항공대 제8공군의 항공승무원 사망률은 자그마치 12.38% 이상으로, 2차대전기 미군 내에서 최악의 사상률을 감당한 부대 중 하나다. 미 육군에서 이를 뛰어넘는 사상률을 기록한 병과는 오로지 18.9%의 전사자 비율을 기록한 보병 하나뿐이다.
그는 B-17을 몰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리버레이터를 그리워했다. 나중에 B-24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전투에서 B-17은 25,000피트 상공 대열폭격에 잘 어울리지 않았다. B-17은 12,000-18,000 피트에 더 잘 어울렸다."
종전 후 영화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군사 재판을 맡거나 미 공군 항공우주 시스템을 선전하는 등[24] 군을 떠나지 않았으며, 미합중국 공군이 육군 항공대를 기반으로 창설될 때 공군으로 전군했다. <전략 공군 사령부, 1955> 같은 공군 홍보영화도 찍었다.[25]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린든 존슨 임기 때 상원의원과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공군 직위를 고집하며 거절했다. 사실 할리우드 스타들은 한번씩 저런 권유를 받는다고 한다. 1959년 7월 23일 미 예비공군(AFRC) 준장으로 진급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있지만, 제복군인으로는 제일 높이 올라간 미국 연예인이다.
1945년 부모님과 | 동료 배우 진저 라저스와 | 미 예비공군 준장으로 승진 이후 |
1942년 Jimmy Stewart and Edgar Bergen Radio Routine
매파의 상징 존 웨인이 징집을 피해 전쟁 영화 출연 등으로 때운 것과 비교가 된다. 군 경력은 베트남전까지 이어져, B-52 스트라토포트리스에 옵저버로 탑승하여 베트남 전선에 참가했다. 2차 대전의 원로이자 장군인 헐리우드 스타였지만 항상 소박하고 자상한 태도를 보인 그의 인기는 군부대에서도 일반 사회를 방불케 했다.
스튜어트는 과묵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매사에 느렸다. 말도 느리고 밥도 느리게 먹고 걸음도 느렸다. 그러나 부대 안에서는 다른 사람 같았다고 한다. 군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상사로서 평판이 좋았다. 시키는 일이 없고 알아서 신속 정확하게 기계처럼 움직였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위험한 작전을 수행한 후 이런 말도 했다. "공포는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왜곡시키고 반사운동을 잠재운다. 그렇게 실수를 하게 되는것. 더욱 나쁜 것은 그게 전염된다는 것. 내가 공포를 느낄 때 난 그걸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전염시킨다." 1968년까지 복무하고 퇴직금은 미국공군사관학교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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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g4fcdoLi11rola9no2_1280.jpg종전 후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약 80편의 영화 출연작 중 1/3은 참전하기 전까지 5년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다작 한 결과이다.[26] 영화산업이 첨단이었던 1930 ~ 1940년대 할리우드는 독자적인 작가색과 개성은 부족하지만 완성도 높은 영화를 단기간에 완성하는 꿈의 공장이 되어 많은 명작을 남긴 황금기였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좋은 영화를 성실하게 제작하던 대형 스튜디오의 방식을 좋아했고 고정수입이 있는 배우였다. 그러다가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러닝 개런티를 받은 배우가 된다. 이는 스태프들이 출연료 외에 흥행결과에 따라 개런티를 받는 방식으로 고가의 배우나 감독의 개런티를 줄여 제작비가 지나치게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고 계약 당사자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영화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헐리우드 배우로서는 거의 최초로 독립영화에 출연하여 흥행수입에 비례하는 출연료를 제안했고 영화가 흥행하면서 1950년대 최고수입 스타대열에 들었다. 1950년대 흥행 배우 1위인데 밑에 찰턴 헤스턴, 록 허드슨을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돈가방 수준이었다.
2.4.1. 멋진 인생
전후에 잠시 은퇴를 고려해본 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잠시, 군인이나 파일럿이 중요한 일을 힘들게 하는것에 비해 연예인은 과잉수입과 대접을 받는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좋은것은 아니지만 자원입대 했고 책임의 한계에 부딪혀본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한다. 전쟁 후 첫 출연작은 제임스 스튜어트 출연작중 가장 대중적인 멋진 인생 이다.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왠지 처음에는 이역을 맡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영화의 감독 프랭크 카프라는 스튜어트를 인민주의 표상으로 활용하여 스타덤에 오르게 하였고 긴 공백기를 가지고 방황하고 있을 때도 출연 제의를 하며 할리우드에 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스튜어트는 < 멋진 인생>으로 다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도 보고 재기에 성공한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1985년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소감에서 긴 세월 동안 내가 잊혀지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는 상으로 무척 의미있다는 소감과 프랭크 카프라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하였고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2.4.2.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
제임스 스튜어트는 케리 그랜트와 함께 앨프리드 히치콕이 가장 선호한 배우였다. 보통 제임스 스튜어트하면 따뜻한 이웃 이미지이지만, 히치콕 영화에서는 사뭇 이미지가 다른데,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냉혹함을 보인다. 히치콕 영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상 언제나 수사하는 사람[27]이다. 관음증과 편집증이 있거나 신체가 불편하고 날카롭지만 감정 없는 사람같다. 히치콕은 대중적이고 사려 깊은 이미지의 스튜어트가 서스펜스를 극화 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a painstaking craftsman 이라고 묘사했다. 제임스는 히치콕이 가장 선호한 배우로 보다 예술성 있는 영화에 나오지만 성실한 샐러리맨 같고(히치콕의 표현) 그랜트와는 다르게 히치콕이 영화를 구상할 때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히치콕이 이미 능수능란하게 해오던 종류의 것보다 영화적 기법을 실험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적어도 10년은 들어 보이면서 영화 안팎으로 일복이 넘쳤는지 오십줄에 들어서자 마자 은퇴한 경찰이나 검사 같은 은퇴한 노동자역(?)을 많이 맡게되고 나이에 맞지 않는 소수의 미스 캐스팅을 인정하면서 더 흥미로운 영화에 많이 출연하게 되었다. 전쟁 전에는 주로 로맨틱 코미디나 코미디 영화에서 순진한 이상주의자를 맡았지만, 1940년대 말부터는 참전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보고 결혼도 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영화에서 일반적인 로맨스는 물 건너갔지만 노안은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배우 커리어에 있어 좋던 나쁘던 대수였다. 히치콕은 스튜어트의 노안이 《 현기증(미국 영화)》 흥행실패의 큰 요인이라 보고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제임스 스튜어트 대신 4살 연상이지만 케리 그랜트를 캐스팅했다. 스튜어트는 30대 초반까지 소년 같은 면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부터 노화가 빠르게 진행 되었다. 현기증의 상대역 킴 노백보다 20살 넘게 연상이었지만 스튜어트는 점점 더 노화해서 1970년대부터는 킴 노백보다 40살은 더 많아 보인다.[28] 동영상. 《현기증》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마지막 히치콕 영화 출연작이 되었지만 히치콕과는 후에도 잘지냈다. 히치콕은 생의 마지막 행사인 제임스 스튜어트의 AFI 행사에 참석해 주기도 하였다. 좋아했다던 그레이스 켈리가 참석해서일 수도 있지만.- 로프 (1948)
- 이창 (1954)
-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1956)
- 현기증 (1958)
2.4.3. 서부극
지금은 철지난 장르지만 당시 할리우드 스타라면 누구나 서부극에 출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많은 서부극에 나왔고 영화 출연 수입의 대부분일 정도로 서부 영화 흥행성적이 좋았다. 전통적인 교훈을 전달하면서 새로운 시도가 가미된 서부극에 많이 출연 했다.Bend of The River (1952)
- 앤서니 만의 서부극
- 존 포드의 서부극
- 기타
2.4.4. 살인의 해부 (1959)
유럽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베를린 영화제와 베니스 국제 영화제 수상경력이 이를 어느정도 증명하지 않을까 싶다. 오토 플레밍거의 《살인의 해부》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볼피컵(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법정영화이며 지금까지도 미국 사법제도를 날카롭고 통렬하고 재치 있게 분석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은퇴한 검사 폴 비글러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영화 캐릭터답게 조금은 유별난 인물이다. 독신주의자에 냉소적이고, 청렴하지만 순진하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일을 해나간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폴 비글러역으로 다섯번째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도 오른다. 이 영화의 판사역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실제 사법계의 거물 조지프 웰치가 연기했다. 영화의 포스터는 영화지 프리미어가 선정한 최고의 영화 포스터이고 이는 히치콕 영화의 타이틀을 주로 제작하던 솔 바스가 담당, 음악을 담당한 듀크 엘링턴은 재즈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료로 잠시 모습을 보인다. 당시에 보수적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버지는 이영화가 심각하게 나쁜 문제작이니 절대 관람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지역신문에 광고를 내고 아들이 영화 시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2.4.5. 기타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1957)
Call Northside 777 (1948)
1932년 일리노이 주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한 종신범의 실화를 그린 작품으로, 무고한 한 인간이 모순된 법에 의해 희생되어야 하는 일면을 파헤쳤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유일한 필름 느와르 출연작이고 극중 시카고 타임즈 기자역이다.
전기 영화
준수한 양산형 전기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투수 몬티 스트래튼, 마크 트웨인, 칼빈 소총을 만든 칼빈 윌리엄스 등.
하비 (1950)
코미디 영화《하비(1950)》로 네번째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 하비에서 보이지 않는 토끼친구 덕분에 그 옛날에 크로마키 촬영하듯 연기했다.《하비》에서의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편이었고 하비의 TV 영화와 연극에서도 같은 역을 했다.
No Highway in the sky (1951), No Highway
세월이 지나 SF 보다 재난물에 가까워졌지만 영국 엔지니어 출신 SF작가의 원작이 있는 <No Highway in the sky 1951> 에도 출연했다. 일말고 다른데에는 전혀 신경을 안쓰는지 집의 위치를 잊어버리는 괴짜지만 책임감 강한 엔지니어 역이었다.
1960년대
1960년대에는 가족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그 외에는 중국의 산악지대와 사막 등 터프한 로케이션을 선호했다. 그중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 사막의 기적(1965)이라는 재난영화는 휴 로리 주연으로 2000년대에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1962년에 가족 코미디 영화 <홉스씨 휴가 가다,1962>로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0년대 이후
1970년대부터 노안이 가속화되고 건강상태도 악화되어 활동이 줄기는 했다.[33] 사실상 이 시기 은퇴한거나 마찬가지였지만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매스컴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다. 영화에는 단역이나 우정 출연 했고 TV에 많이 출연했다. 버라이어티 쇼나 코미디 쇼, 토크쇼, 연속극 등 여러 쇼에 출연했는데 TV에서도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을수 있었다. 이 시기에 스튜어트는 영화가 수위만 높아지면서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6번째 개정판)중 가장 많은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총 14편 이고 5번째 개정판은 13편, 7번째 개정판은 14편인데 6번째 개정판에 없던 다른 영화들이 있다. '썩토'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필모는 신선한 토마토로 가득하고 100% 토마토가 열개 넘을 뿐만 아니라 평점 미정인 좋은 영화도 많다. 연기 스타일에 단점이 있지만 작품을 잘 고르고 운도 따라줘 정말 많은 걸작에 출연했다. 다작하지만 망작은 손에 꼽을 정도 이다. 관객은 고객이 아닌 파트너이며 다양한 관객이 가장 좋은 비평가 라고 한 적이 있다. 정직하고 청교도적인 세계관 속 평범한 사람의 소박한 용기와 신념을 스크린에서 실천했다. 느린 말투, 발성이 안좋지만 상쇄시킬 어떤것이 있었다. 연기자임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많이 없다. 감탄사를 많이 쓰긴 하지만 목소리나 발성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유행어 없는 코미디언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튀는 점 없는 제임스는 코미디 연기와 클래식 세대 답지 않게 생활연기를 잘했다. 동일한 사람과 여러번 작업하고 나는 나를 연기한다는 연기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데뷔가 늦고 연극 무대에 많이 서지 못한 점을 후회 했다고 한다. 영화에 많이 출연했지만 장시간 연속으로 연기하고 연기와 반응 모두 생생한 연극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특수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보다 일상을 연기하면서 감동을 주는 것이 더 고단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연기평에 영화는 온갖 기술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영화연기는 태생적으로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3. 제임스와 정치
대부분의 할리우드 인사들과는 달리 공화당 지지자이다. 로널드 레이건이 한 때 민주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지지를 철회하려 했던 철저한 공화당원이었지만[34] 1968년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민주당 지지자들과 총기 규제 법안에 찬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민주당 정책을 지지하는 등, 사안별로 다양한 의사를 표했다. 민주당 선거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언행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에서 환영받았다.그의 조사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은 오늘 국가의 보물을 잃었습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위대한 배우이며 신사에 애국자였습니다."
좋아하는 미국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고 한다. 실제 생활과 군 경력도 흠잡을 데가 없어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았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권에 대한 야망까지 내비추기 시작했을 무렵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의 직설적인 잭 워너는 한 인터뷰에서 지미 스튜어트같은 사람은 왜 대통령 생각이 없는건지 의문스럽다고 농담 했는데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하기도 했다. 1976년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선거운동을 벌였고 1968년과 1972년 선거에서는 리처드 닉슨을 위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극 민주당 지지자인 헨리 폰다와는 평생지기였고 정치 프레임을 떠나 건실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다른 성향을 지닌 폰다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했다.
"1940년대 헨리와 정치논쟁을 벌이다 싸움이 났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지. 싸움이 끝난 후 폰다가 '우리 앞으로 정치얘기는 절대 하지 말자'고 했고, 나도 그의 말에 찬성했네."
1950년대에도 헨리 폰다는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를, 제임스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지지해서 논쟁을 벌이다 서로 냉대한 적이 있고 선거철만 되면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애국자이지만 구식임은 인정했고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 에드거 후버의 FBI 홍보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에드거 후버가 캐스팅 하고 카메오 출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내키지 않았지만 1940년대 말에 정보요원으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일을 도운 적이 있다. 누군가의 밀고로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았던 민주당원 영화인 호세 패러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상당한 고충에 의하여 확실한 극단적 공산주의자의 정보만을 제공했다고 한다.
동시대 영화인 엘리아 카잔과는 다르다. 카잔의 경우 원래 공산당원이었는데 동료를 밀고한 것이고, 스튜어트의 경우 원래부터 반공주의자였으므로 격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35] 1970년대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이 불안의 상당한 원인이며 잠재적인 위험으로 느껴진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 제작의 <스카페이스, 1932>에 잘 묘사되어 있는 갱이 들끓던 20세기 초반을 겪었던 그는 FBI 자격으로 갱과 마피아 정찰에 열성적으로 임했고 자고 있을 때 마피아의 습격으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4. 사생활
1940년대 배우들과 파티
결혼 후에는 모범적인 생활을 했지만 결혼 전까진 대부분의 할리우드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생활을 했다.그러나 항상 뭔가에 집중하고 바빠서 독신주의자처럼 보였다고 한다. 화병으로 숨진 영화 제작자 어빙 솔버그와 사별한 할리우드 퀸 노머 쉬어러와 교제 하면서 경력이 급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유명인들 중에는 주로 중성적인 목소리에 미망인 여자들과 교제했다. 당시 유명인들이 결혼을 많이해서 미혼이 드문 탓도 있다. 연기파 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드물게 미혼이었는데, 둘은 결혼할 뻔했다. 드 하빌랜드는 동생 조안 폰테인과는 앙숙이었는데 폰테인 역시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뛰어난 배우로 제임스가 결혼 전 마지막쯤에 사귄 적이 있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상대역이었던 진저 라저스와도 교제 했는데 제임스에게 질리지 않고 빠져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할리우드 초기 시절 게이 루머 파장이 커지자 영화사 MGM 보스에게 매음굴에서의 난교를 증명해야 하기도 했다. 그 뒤 한동안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공연했던 진저 라저스(결혼 5회), 헤디 라마르(결혼 6회), 조안 크로포드(결혼 4회) 등과 이성애를 드러내길 바라는 소속사의 압력을 의식하여 공개 데이트하며 우정을 쌓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두 번째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제임스를 제외하고는 요즘 할리우드 영화인들보다 이혼이 많았다. 제임스와 같은 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진저 라저스의 두 번째 남편 루 에어즈는 별거 중 제임스와 같은 영화에 조연으로 나오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 인기가 없던 연예인은 없겠지만 어떤 조건이나 걸림돌에도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5. 출연작 목록
5.1. 영화
- 1930년대
- 1934년 Art Trouble (단편)
- 1935년 The Murder Man
- 1936년 로즈마리 Rose-Marie
- 1936년 Wife vs. Secretary
- 1936년 The Gorgeous Hussy[36]
- 1936년 Important News (단편)
- 1936년 Small Town Girl
- 1936년 After the Thin Man (Thin Man 시리즈)
- 1936년 Speed
- 1936년 Next Time We Love
- 1936년 Born to Dance
- 1937년 The last Gangster
- 1937년 Seventh Heaven
- 1937년 Navy Blue and Gold
- 1938년 Of Human Hearts[37]
- 1938년 The Shopworn Angel
- 1938년 Vivacious Lady
- 1938년 우리 집의 낙원 You Can't Take It with You
- 1939년 It's a Wonderful World
- 1939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Mr. Smith Goes to Washington
- 1939년 사진 沙塵 Destry Rides Again
- 1939년 <또 다른 세계의 창조>(거창해진 한국 제목) 다른 제목은 <천생연분> Made For Each Other (링크는 영상)
- 1940년대
- 1940년 The Philadelphia Story
- 1940년 모퉁이 상점 The Shop around the Corner
- 1940년 The Mortal Storm 예고편
- 1940년 No Time for Comedy
- 1941년 Pot o' Gold (링크는 영상)
- 1941년 Ziegfeld Girl
- 1941년 Come Live with Me
- 1946년 멋진 인생 - 현기증과 함께 스튜어트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38]
- 1947년 Magic Town
- 1948년 결백 Call Northside 777
- 1948년 On Our Merry Way (단편)
- 1948년 You Gotta Stay Happy
- 1948년 10000 Kids and a Cop
- 1948년 로프 Rope[39]
- 1949년 The Stratton Story
- 1949년 Malaya
- 1950년대
- 1950년 잭팟 The Jackpot
- 1950년 부러진 화살[40] Broken Arrow
- 1950년 하비 Harvey
- 1950년 윈체스터 ‘73 WINCHESTER ‘73
- 1951년 No Highway in the Sky 예고편
- 1952년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41]
- 1952년 카빈 윌리암스 Carbine Williams
- 1952년 분노의 강 Bend of the River
- 1953년 운명의 박차 The Naked Spur
- 1953년 Thunder Bay
- 1954년 글렌 밀러 스토리 The Glenn Miller Story
- 1954년 머나먼 대지 The Far Country
- 1954년 이창 Rear Window
- 1955년 전략 공군 사령부 Strategic Air Command
- 1955년 라라미에서 온 남자 The Man from Laramie
- 1956년 나는 비밀을 알고있다 The Man Who Knew Too Much
- 1957년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 혹은 <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The Spirit of St. Louis
- 1957년 밤길 Night Passage
- 1958년 현기증 Vertigo - 멋진 인생과 함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 1959년 Bell, Book and Candle
- 1959년 연방 경찰 The FBI Story
- 1959년 살인의 해부 Anatomy of a Murder
- 1960년대 이후
- 1960년 The Mountain Road
- 1961년 마상의 두 남자 Two Rode Together[42] 존 포드 감독작
- 1962년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43] 예고편 존 포드 감독작
- 1962년 서부 개척사 존 포드 감독작
- 1962년 홉스씨 휴가 가다. Mr. Hobbs Takes a Vacation
- 1963년 Take Her, She's Mine
- 1964년 Cheyenne Autumn 존 포드 감독작
- 1965년 사막의 기적 The Flight of the Phoenix
- 1965년 셰넌도어 Shenandoah
- 1966년 희귀종 The Rare Breed
- 1968년 외로운 보안관 Firecreek
- 1976년 The Shootist
- 1977년 Airport 77
- 1978년 The Big Sleep
- 1980년 A Tale of Africa [44]
5.2. 연극
- 미국
- Carry Nation (1932)
- Spring in Autumn (1933)
- Yellow Jack (1934)
- Divided By Three (1934)
- Page Miss Glory (1934~1935)
- A Journey By Night (1935)
- 하비(Harvey) (1944~1949)
- 영국
- 하비(Harvey) (1970)[45]
5.3. 다큐멘터리
- 1939년 Land of Liberty
- 1942년 Winning Your Wings 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app=desktop&persist_app=1&v=apm8MFVNYiE Everybody Joins U.S. War Effort Etc. 1942]
- Screen Snapshots 2856, 1950
- 1954년 Tomorrow's Drivers
- 1954년 Screen Snapshots: Memories in Uniform
- 1957년 The Heart of Show Business
- 1961년 X-15
- 1962년 The Convair B-58
- 1965년 Hollywood My Home Town
- 1967년 Cinema
- 1970년 F-0299 Aerospace Communications
- 1974년 That's Entertainment!
- 1976년 That's Entertainment, Part II
- 1977년 National Geographic Specials
- 1979년 V.I.P.-Schaukel
- 1981년 Margret Dünser, auf der Suche nach den Besonderen
- 1983년 Hollywood Out-takes and Rare Footage
- 1983년 James Bond: The First 21 Years
- 1984년 Olympic Gala
- 1985년 Palace of Dreams
- 1987년 Happy 100th Birthday, Hollywood
- 1988년 Hollywoodism: Jews, Movies and the American Dream
- 1990년 The Wonderful Wizard of Oz: 50 Years of Magic
- 1994년 A Century of Cinema
- 1994년 Entertaining the Troops
- 1995년 The Universal Story
- 1997년 Off the Menu: The Last Days of Chasen's
- 1997년 Hollywood Commandos
- 1999년 Sasquatch Odyssey: The Hunt for Bigfoot
- 2003년 Hell's Highway: The True Story of Highway Safety Films
- 2005년 Cineastas contra magnates
- 2008년 Erika Rabau: Puck of Berlin
- 2011년 These Amazing Shadows
- ABC 2000 : The Millennium
5.4. 라디오
- Red Cross
- Madame X
- Single Crossing
- One In A Million
- We Hold These Truths - Bill of Rights Day [46]
- Six Shooter
- Sealtest
- Screen Guild Theater
- Theat Of Rom
- Cavalcade Of America - A Sailor Who Had To Have
- Flight from Home
- Up from the Darkness
- Spns341
- Reader's Digest - One Way To Broadway
- Plays For Americans - Letter At Midnight
- Radio Fillers
- Misty Mountain
- NB CUT
5.5. TV
- General Electric Theater, 1957 (감독, 출연)
- Alcoa Premiere, 1962
- Hollywood and the Stars, 1964
- The Dean Martin Show, 1967~1974
- The Brass Are Comin', 1970
- The Tonight Show, 1970~1989
- Hollywood My Home Town, 1965
- A History of Canadian Movies 1939-1953, 1979
- The Jimmy Stewart Show, 1971~1972 [47]
- 하비(Harvey), 1972
- The World at War, 1974
- Hawkins, 1973-1974
- Brother, Can You Spare a Dime, 1975
- America at the Movies 1976
- Dinah, 1977
- The Mike Douglas Show, 1978 [48]
- Showbiz Goes to War,1982
- 남과 북, 1986
- Christmas in Washington, 1988
- Muppet Babies, 1988
- Yellow Ribbon Party, 1991
- Wogan, 1991
- Reflections on the Silver Screen, 1992
- American Masters, 1992
- La classe américaine, 1993
- Celebrity Debut, 2006
- Pioneers of Television, 2014
- Biography (1997~2006, 5 episodes)
- War Stories with Oliver North
5.6. 그 외
시네마 천국, Menace II Society : 멋진 인생라디오 데이즈 : 필라델피아 스토리
태양없이, 12 몽키즈 : 현기증
수상 이력 리스트
6. 여담
* 영국 출신 영화배우 스튜어트 그레인저의 본명도 제임스 스튜어트였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예명을 사용했다.
- 1986년부터 제임스 스튜어트 마라톤이 미국에서 열렸다. 미국 최대 규모 자선 릴레이 마라톤이다. 고향 펜실베니아에 소박한 지미 스튜어트 공항과 소박한 지미 박물관이 있다.
- 스튜어트는 공화당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민주당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스튜어트의 팬이었다. 외동딸을 뒀으며 아들이 있다면 딱 지미 스튜어트 같았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49]. 그리고, 오드리 헵번, 레이첼 바이스, 이완 맥그리거, 벤 위쇼, 토퍼 그레이스, 스티븐 스필버그, 프랑수아 트뤼포가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팬이라고 한 적이 있다. 시민 케인의 오슨 웰스는 진짜, 상록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배우 맷 데이먼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프랭크 카프러 감독 영화의 그를 좋아한다고 한다. 게리 올드먼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외모가 비전형적이고 너무 키 크고, 마르고, 목소리가 이상하지만 연기를 마법처럼 해내는 스타라고 했다.
- 어느 수상 소감에서 상은 순전히 각도 덕분이라고 말했다. 감독이 정확히 15°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라고 했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 1959년부터 프린스턴 대학교 이사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수상경력이나 외부활동 비중을 늘리는 것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여대합병, 전문 대학원 설립에는 반대하는 편이었고 부잣집 자녀들의[50] 징병회피와 학점 인플레에 반대 했었다. 이 시기에는 너무 바빠져 미리 양해를 구하고 촬영 스케줄 중에 제트기를 직접 몰고 왕복해야 했다고 한다.
- 택시 고객 불만 처리부에 민원을 넣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미 스튜어튼데요. 기사분께서 제게 20달러를 바가지 씌웠네요. 제가 돈에 연연하지는 않잖아요.(헐리우드 스타 중에서는 부자라 어느정도 여유는 있고)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인 사항이고 아시다시피 저만 당하지는 않겠죠." 동행한 조커들(jokers)의 만행이었다고 신속하게 콜 백 했지만 평소 사소한 것들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 뒤로 직원은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 비행에 관해서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수입이 늘어나자 비행기부터 구입했고 이 때 구입한 머스탱은 1940년대 제임스의 애마였다고 한다.
- 자신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커뮤니티와 미국을 사랑하는 일 잘하고 언행이 일치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 1970년대 중반에 건강 문제로 영화계에서 사실상 은퇴 했고 1983년에 피부암에 걸렸다. 젊은 시절부터 미미한 수전증이 있어 <필라델피아 스토리>나 <스트래이튼 스토리> 등의 영화에서도 보였고 모계 유전인 난청은 40대부터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하여 50대부터 보청기를 했다. 시력은 어릴적부터 좋지않아 안경을 쓰고, 공군 신체검사도 시력을 고쳐 써서 통과했다는 루머가 있다.
- 1988년에 창작의지를 저해시키는 흑백영화의 무절제한 컬러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원작자의 동의 없이 클래식 필름을 사들여 색을 입혀 다시 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로비스트였다. 캐서린 헵번,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틴 스코세이지 등의 원작자와 영화인도 동참했다. 스튜어트는 컬러화 작업이 흑백을 전제로 구상한 프레임과 명암을 망가뜨리고 인공적인 컬러로 원작을 훼손하는 행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저작권이 만료되어가는 명작은[51] 내버려 두어야 하며 고전을 피상적으로 복구하는 데만 집중하다가는 새로운 작품이나 의미있는 리메이크에 투자할 비용도 오용하게 될 것이고 어느 면을 따져도 좋을게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일로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의도대로 사업가는 자기가 사들인 영화의 원작자에게 어느 정도 예의는 차리게 된다. 제임스는 새로운 기술에는 항상 관심을 가지고 환영 했다.
- 농담을 좋아하지만 포커페이스가 안되어 항상 망치므로 공적인 자리에서 농담은 자제했다. 농담도 잘하고 평소에 달변가지만 화제가 떨어져 사생활을 늘어놓는 대화는 싫어했다고 한다.
- 연상 단어로 단어 맞추기 퀴즈쇼인 Password에 영화 홍보도 할 겸 가족과 함께 출연했는데 1960년대에 일찍이 상표와 욕설, 비속어는 자체 잡음으로 대체하는 방송 예절을 알았고 게임 도중 시간이 촉박하면 나는 늙어가고 있다며 재촉했다. 글로리아(아내의 이름, 보통 이름으로 부른다.)팀이 고전하자 힌트를 중얼거려서 게임을 망칠 뻔 했지만 글로리아가 닥쳐(shut up)라고 해서 곧 수습하긴 했다. Genius의 연상 단어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나오자 Theory로 오답을 내기도 했다. 좋아하는 옷은 오래입고 초록색 볼보 세단을 고집했다.
- 빈곤지역과 의료기관, 재활센터, 각종 비영리단체와 자선단체, 대학 등에 조용히 기부하고 봉사도 했고 그의 많은 영화작업물을 브리검영 대학에 기증했다. 거주지에는 많은 양의 음반, 소설과 계도소설, 그리스 신화, 인류학, 공학, 지리학, 공군에 관한 책, 비행기 모델, 유인원과 동물 모형이 많았다. 로마 문명에 관심 있고 존 골즈워디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었다.
- 가족이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서재였다고 한다. 친구가 그려준 그림을 걸고 미국 중산층같은 인테리어. 커다란 물고기 모형을 매달아놓은 사관학교처럼 집 벽에 작은 물고기 모형을 붙여놓거나 벽난로 주변에 이국적인 고양이 모양 도자기 장식품을 놔두긴 했다.
- 시쓰기가 취미였고 "지미 스튜어트와 그의 시들"이라는 시집도 냈다. 투나잇 쇼에서 시를 낭송하여 1991년 그래미 어워드 spoken-word 부분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기르던 견공 이름인 시 'beau'를 낭독했던 투나잇쇼는 조회수가 가장 높은 제임스 스튜어트 관련 동영상이다.[52] 그리고 낚시, 골프를 즐길뿐만 아니라 일본 공예품, 멕시코 가면을 수집, 동물, 고고학, 고생물학, 인류학, 여행도 좋아해 뼈도 찾으러 다니고 아프리카 여행을 자주 갔다. 아무튼 취미가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다.
- 동물단체들과 자연사 박물관의 이사인 아내와 활동 하고 동물 보호 활동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유독 새를 좋아해 새에 대한 잡지식을 습득(?)하고 여러 종의 새와 쉽게 친해지는 것을(?) 선보이곤 했으며 로스앤젤레스 자연사 박물관 새 전시관 비디오를 만들어 홍보도 했다.
* 게리 쿠퍼와도 친했다. 과묵해서 외출하면 한마디도 안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1961년 제임스는 게리 쿠퍼의 아카데미 공로상 대리수상자로 나와 울면서 게리 쿠퍼의 위급한 상태를 알리기도 했다. 제임스가 받은 다음해인 1942년 게리 쿠퍼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고 제임스가 수상자를 호명했다. 게리 쿠퍼는 <요크 상사>의 전쟁 영웅을 연기해 첫번째 아카데미를 받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전시 유니폼 차림이었다.
- 게리 쿠퍼 외에도 위에서 언급된 헨리 폰다와도 뜨기 전부터 절친이었다. 정치 성향이 달라서 냉대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폰다가 죽을 때까지 친했다고.
노년의 제임스 스튜어트 |
-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좋지 못한 건강에 걸맞게 할리우드 배우 치고는 노안이었다. 스튜어트보다 어려보이는 헨리 폰다보다 사실 스튜어트가 3살 어리며, 80세였던 1988년 사진을 보면 80대 중반은 되어보인다... 이런 노안 기믹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 40대였던 스튜어트가 백발이 생기고 나이가 50대 정도로 들어보이자 이로 인하여 영화 흥행이 떨어진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54] 같은 히치콕 페르소나인 캐리 그랜트가 1985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스튜어트에게 시상한 적이 있는데, 캐리 그랜트가 동안인지라 스튜어트의 노안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55]
- 루미너스 위치스의 그레이스 메이틀런드 스튜어트의 모티브가 되었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촬영장에서 존 포드 감독에게 "야 이놈의 인종차별주의자야!"라고 야단맞은 적이 있다.
- 90년대에는 톰 행크스랑 닮은꼴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2010년 이후엔 라이언 고슬링이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다.
7. 외부 링크
[1]
주(State)가 아니라 구(Borough) 인디애나이다.
[2]
영화배우로서는 가장 높은 군 계급을 지녔다. 모든 영화인들 기준으로는
존 포드.
대장이다.
[3]
글로리아의 폐암으로 인해 사별
[4]
제임스 스튜어트는 글로리아의 두 아들 로널드와 마이클을 입양했다.
[5]
로널드는 1969년 6월 8일 24세의 나이로 해병대 중위로 복무하던 중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했다.
[6]
제임스 스튜어트는 글로리아의 두 아들 로널드와 마이클을 입양했다.
[7]
인류학자다.
[8]
《존 포드》, 태그 갤러거 저, 안건형·신범식 역, 이모션북스, 2018, p.504
[9]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대전 이후 준장까지 승진했다.
[10]
현 세대의 국민 배우라 불리는
톰 행크스를 후계자로 많이 언급한다. 다만 제임스 스튜어트는 열혈
공화당인데 반해 톰 행크스는 골수
민주당으로 정치 성향은 크게 다르다. 스튜어트가 연기한 배역들 중 AFI 선정 영웅에 9위(
조지 베일리)와 11위(
제퍼슨 스미스)가 포함되어 있는데, 스튜어트의 좋은 이미지가 순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11]
연기력이나 후대에 영향력 측면에선 연기론을 다시 쓴
말런 브랜도가 존재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브랜도는 국민배우 타이틀을 단적이 없고, 각종 논란은 둘째치더라도 겸손함과 친근함이 이 천재 배우의 스타성이었던 적은 없다. 일단 주로 맡은 배역들이 당대 주류의 소신 있는 지식인, 의인들이었던 스튜어트에 반해 브랜도의 배역들은(...) 다만 브랜도가 이런 배역들을 연기함으로써 기존의 할리우드에는 없던 '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 것이다. 이 둘에 업적의 성격은 너무 다르다. 단적으로 제임스 스튜어트의 필모 중 역사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연기한 시대극은 단 한편도 없다.
[12]
그보다 큰 명배우들은 많이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록 허드슨 정도가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다. 웬만한 공포영화 배우들과 동급 수준이다. 할리우드는 산업 생성 초기부터 큰 키를 매우 선호해 남자 배우들이 최소 1인치(약 2.5cm)씩 프로필을 늘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21세기까지도 이어져 실제 키 5피트 11인치의
브래드 피트가 20년간 6피트로 프로필을 유지하다가 40대 이후 실제 키로 바꾸기도 했다. 14세 때 이미 192cm였다는데, 이는 거의
배런 트럼프 못지 않은 수준이다. 당대 동료 배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영화 장면들에 비춰, 190 살짝 안 되는 189cm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3]
《
녹색 광선》의
에릭 로메르는 좌식이 불편한 미국인이라고 한 적이 있다. 본인은 이 다리를 콤플렉스라고 생각했으며, 기자로 나오는 《
이창》 등 몇몇 출연작 중에서 다리를 다친 역을 맡은 적도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쇼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긴다리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앉아있는걸 볼수있다.
[14]
출연작 중 무려 12개가
National Film Registry에 등록됐으며,
AFI 선정 100대 영화에도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가장 많은 영화를 올린 배우다. 흥행 참패를 겪었던 《
멋진 인생》과 《
현기증》은 재평가를 받아 현재는 스튜어트의 대표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되었다.
[15]
대략 0.5%. 서부대학과 공과대학의 입결이 요즘같지 않았다.
[16]
당시에 병자성사라는 용어가 없었다. 죽음을 예상한 듯 하다.
[17]
1947년에 명예 석사를 받기도 했다.
[18]
1973년까지 미국에서 동성애는 정신질환으로 취급되었다.
[19]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폰다와는 이 시절부터 엄청난 절친이었는데, 정치 성향이 정반대라 언제 한번 스튜어트가 흠씬 두들겨맞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폰다가 죽을 때까지 친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20]
재즈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결혼은 했지만 동성애자였다.
[21]
그래도 가장 건강하던 1950년대 말 신체검사에서는 72kg까지 나왔다고 한다.
[22]
미 육군항공대의 조종사 양성과정은 기초과정 수료 후에 대형 폭격기 조종사들은 별도로 관리하여 교육시켰다. 4발 엔진이라 함은 곧 B-17, B-24, B-29 같은 대형 폭격기들을 말한다.
[23]
작전장교로 데스크 워크만 하지 않고 그 와중에도 전투출격을 했다는 이야기다.
[24]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 등에 영상자료가 있다.
[25]
사실 이 영화는 거절을 못 해서 출연했다시피 하다.
NASA의 제트기 10대로 시작한 전세기 사업 Executive Jet Aviation 설립에 참여한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미공군은 전략군으로, 미국이 경제위기가 오고
전쟁에서 지더라도 제공권은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어 홍보할 맛이 나긴 했을 것이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폭격기 조종사 출신이고, 당시 미 공군에서 폭격기를 담당한 곳이 전략 공군 사령부 였던게 컸던 듯.
[26]
5년간 무려 20개 이상에 나온 것이다! 보통 1년에 2개 나오는 것도 힘든데 공장식으로 영화를 만들던 이 당시에는 한 배우가 1년에 4개까지 찍는 것도 가능했다.
[27]
100퍼센트 그 역할만 한 건 아니다. 악역도 했었다. 단, 일반적인 악역이 아니라 여전히 영미식 신사 역할이다. 부인과 친구의 불륜을 알게 되어 분노하였으나, 신사라서 티를 내기 싫은 나머지 몰래 친구를 살해하고 그와 불륜을 저지른 부인에게 누명을 씌우려다가 잡히는 역할.
[28]
의외로 노백이 좋아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진 성상납 비스무리한 걸 하려다가 스튜어트에게 문전박대 당하기도 했다. 스튜어트가 엄청난 원리원칙주의자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
[29]
줄거리에 대해서는 뮤지컬
쓰릴 미 문서 참조.
[30]
우수하지만 학습 해야하는 학생. 가해자는 열심히 해야만 하는 학생을 비웃는 뉘앙스.
[31]
우선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캐릭터도 그의 대중적 매력을 살리기보단 이상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괴짜 아저씨 배역이라서 흥행에 불리했다.
[32]
무대 감독을 거친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영화감독. 간결하고 경제적인 연출과 시나리오, 야외 촬영 효과의 교묘한 이용에 의해 서부극에 심리적 요소를 삽입하여 묘사.
[33]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때는 B급 영화에 주로 나왔는데 1971년작 Fool's Parade에서는 당시 20세의 풋내기였던
커트 러셀,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이브 역으로 나왔지만 당시에는 아줌마가 다 된 앤 백스터와 함께 출연한다. 여기서 의안을 끼고 코믹한 연기를 한다.
[34]
아이러니하게도 레이건과 스튜어트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다. 그가 정치와 영화/친분 관계 등의 공적, 사적인 다른 관계들을 철저히 구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5]
그의 절친이었던
게리 쿠퍼와 가장 유사하다.
[36]
제임스 스튜어트가 좀더 현대적이지만 로버트 테일러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었다.
[37]
40분 지나서 등장하지만 주연이다.
[38]
이 영화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편이고 현기증의 경우 평론적 평가가 높다.
[39]
히치콕과 스튜어트의 첫 컬러영화.
[40]
제목이 같은 영화가 몇 편 있다. 최초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시각을 바꾼 영화, 케빈 코스트너 감독의 <늑대와 춤을>과
제임스 카메론감독의 <
아바타>에 영향을 주었다.
[41]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최악의 작품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제임스는 피에로 분장을 하고 조연으로 출연했다.
[42]
미국에서는 범작이라는 반응이었으나 프랑스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그해의 영화 10편에 뽑혔다.
[43]
「
다크 나이트(영화)」 에 영향을 주었다. 영화 속에서
존 웨인은 스튜어트를 순교자라고 부른다. 스튜어트가 극중에서 약간 비겁한 인물이지만 두 사람 입장이 현실에서는 조금 반대인 점이 흥미롭다.
[44]
주연은 아프리카 동물들.
[45]
1975 영국 연극 데뷔작
[46]
2차 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바치는 연설로 6000만이 청취했다.
[47]
TV 시리즈 출연작. 전형적인 안방용 에피소드로 흔한 감동이지만 「Love in a Briefcase」, 「A Bunk for Unc」, 「Period of Readjustment」, 「Paper Work」 등은 훈훈한 편 이다. 지미 스튜어트가 아니고 제임스 K. 하워드 역이다. 그의 조상은 초상화로 한번씩 등장하고 매우 닮았으며 사실은 똑같이 생겼다. 제임스 하워드는
아코디언 연주가 취미이고 가정에 충실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징그럽게 금술이 좋아 늦둥이가 조카와 또래이다. 평범한 중산층 인류학 교수 할아버지이며 유일한 친구인듯한 동네 할아버지는 노벨화학상 수상자라고는 하는데 하릴없이 직장과 집에서 붙어 다닌다. 자전거를 타고다니고 본인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다닌다. 연기를 안 하고 있는 거 같다. 정치색이 약간있고 영화에 같이 출연했던 배우들이 게스트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매니아층이 있는지
가끔씩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한다.
[48]
3세였던
타이거 우즈와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49]
다만,
해리 S. 트루먼 치세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뉴딜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미국 사회 전반에서
사회자유주의가 크게 화두에 오른 영향으로 인해, 양당이 모두 좌경화되면서 두 당 간의 정치 성향의 차이는 그리 크지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조지 월리스같은
딕시크랫계열
보수주의자가 민주당에 속해있다던가, 트루먼의 후임 대통령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같은
진보주의자가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는 등, 과거 양당의 성향이 21세기와는 정반대였던 역사로 인해, 두 당이
지역감정에 따른
포괄정당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민주당 소속 연예인이 공화당 소속 대통령에게 지지 서한을 보낸다던가,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공화당원 연예인의 팬을 자처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50]
미국은 일부 부유한 정치인 케네디라던가 아들 부시라던가, 거대 기업가나 연예인, 셀러브리티와 그 자녀들도 기여입학 제도를 애용한다.
[51]
저작권은 만료 되었지만 흑백영화 시대는 여전히 영화사의 황금기이다.
[52]
Beau?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도그마 선언을 지키는 한 편의 단편 같은)
[53]
광산왕의 외동딸로 네드 맥린과 결혼, 이혼했고
호프 다이아몬드(가격을 추정하면 3000억 정도. 현재는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의 소유자였다.
[54]
당장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현기증에서 스튜어트는 50세였지만 50대 중반은 되어 보인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는데, 영화 관계자들은 영화의 흥행 실패 이유가 스튜어트의 노안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스튜어트가 50년대 총합 흥행 1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55]
참고로 캐리 그랜트가 더 젊어보이지만, 4살 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