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공화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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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리에스코 | 페드로 몬트 | 라몬 바로스 루코 | 후안 루이스 산푸엔테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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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로 알레산드리 | 페드로 아기레 세드라 |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 | 가브리엘 곤잘레스 비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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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 호르헤 알레산드리 |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 살바도르 아옌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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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토 피노체트 | 파트리시오 아일윈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리카르도 라고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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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첼 바첼레트 | 세바스티안 피녜라 | 미첼 바첼레트 | 세바스티안 피녜라 | |
<rowcolor=#fff> 제37대 | ||||
가브리엘 보리치 | }}}}}}}}} |
칠레 공화국 제33·35대 대통령 베로니카 미첼 바첼레트 헤리아 Verónica Michelle Bachelet Je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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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52b1e><colcolor=#ffffff> 출생 | 1951년 9월 29일 ([age(1951-09-29)]세) |
칠레 산티아고 지방 산티아고 | |
재임기간 | 제33대 대통령 |
2006년 3월 11일 ~ 2010년 3월 11일 | |
제35대 대통령 | |
2014년 3월 11일 ~ 2018년 3월 11일 | |
학력 | 칠레 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학사) |
국적 | 칠레 |
정당 |
[[칠레 사회당| 칠레 사회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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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보건부장관 국방부장관 칠레 제33대 대통령 칠레 제35대 대통령 |
신체 | 156cm, 58kg[1] |
직업 | 정치인 |
서명 |
[clearfix]
1. 개요
본명은 베로니카 미첼 바첼레트 헤리아(Verónica Michelle Bachelet Jeria)[2]이며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이다.2. 생애
1973년 칠레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군인과 고고학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3] 하지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아버지 알베르토 바첼레트가 아옌데 지지자란 이유로 고문을 받다 사망하자 사회당에 투신하였고 끝내 모녀가 1975년 DINA(국가정보국)에 체포되었는데 고문으로 악명 높은 비야 그리말디와 쿠아트로 알라모스를 거친 후 같은 해 호주로 망명하고 나서 동독에 터를 잡았다. 그녀는 1979년에 칠레로 돌아오고 학업을 재개해 학위를 받았다.피노체트의 독재가 끝난 90년대에 정치활동을 재개했으며 2000년 보건부 장관, 2002년 국방부 장관직을 맡아 인지도를 높였고 2005년 대선에 출마해 2차선거에서 세바스티안 피녜라 후보를 제치고[4] 칠레 첫 여성 대통령이란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다. 임기 초반은 신혼부부 첫날밤에 비유될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곧 교육정책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국 고딩들이 길거리에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고 전임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가 추진해 오던 산티아고 대중교통 개혁이 시행 첫날부터 개박살나면서[5] 지지율이 급하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 다가올 경제위기에 현명하게 준비해 둔 덕에 임기 말인 2010년에 칠레 대지진이 들이닥쳤음에도 지지율 84%란 기록을 달성하며 퇴임했다.
경제위기에 대한 준비 중 핵심은 전임자 리카르도 라고스가 설정한 정부 저축안이다. 주요 수출 원자재인 구리의 가격에 영향을 많이 받는 칠레 경제의 특성을 고려해 라고스 대통령은 설정해 놓은 가격보다 구리의 가격이 높을 경우 생기는 차익의 상당부분을 정부가 지출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금이 20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는 그녀가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유용하게 쓰였다.
임기 중 피노체트가 사망하면서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냐 마느냐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온 나라가 둘로 갈라지자 "피노체트의 국장에 참여하는 것은 양심에 위배된다"라고 밝혔으며 결국 국장은 없되 전임 군사령관으로서의 경력만을 인정해 군장이 치러졌다. 아버지가 피노체트 아래 세상을 떠난 걸 생각하면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2009년 대선에는 연임 제한에 막혀 출마하지 못했고 그녀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어서 우파 피녜라에게 플러스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동안 여당이었던 중도좌파연합 콘세르타시온(Concertación)이 여러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어쨌거나 이런 지지세를 바탕으로 2013년 대선에 출마했는데 1차 대선에서는 47%를 득표했고 결선투표에서 62%를 가져감으로서 다시 대통령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아들 부부가 권력형 비리 스캔들을 일으킨 데다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해 무상교육과 연금개혁 등 공약으로 내걸었던 개혁작업도 덩달아 지지부진하여 생각보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덕택에 보수층이든 진보층이든 간에 비토가 많아지다 보니 지지율이 저조해졌다. 교육 부문에 있어서 일단 교육비를 낮추기는 했지만 상당수의 중산층들은 맛보지 못한 데다 사립대 국공립화는 주저하면서 재정지출이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고 2000년대 이래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왔던 연금도 공공성이 다소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도 아니라 지지율이 추락했는데 2015년 11월 기준으로 20%를 기록하고 말았다. # 여권 연정의 지지율도 야권보단 높지만(...) 16%까지 떨어졌다. # 이후에는 지지율이 어느정도 회복되어서 30%대까지 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1기 집권기에 비하면 초라했다.
2017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스[6]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와 지지율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수준(20%대)이며 좌파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우파로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애매한 행보와 경기침체로 인해 평이 매우 나빴다. 2017년 하반기 즈음에 지지율이 회복되어서 40%대 선까지 올랐지만 막판 결집에 실패하는 바람에 정권재창출에 실패하여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피녜라가 다시 당선되었다.
퇴임 이듬해인 2018년부터는 UN 인권 고등판무관으로 활동했는데 2022년에 연임을 포기하면서 8월 31일 직무를 떠났다. UN에서의 직무를 끝낸 당일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재교육 센터가 조직적 인권 유린임을 규정하는 보고서를 공개하여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3. 기타
슬래쉬과 HTTP의 발음 밈으로 인해 유행한 적이 있었다.집권 기간 동안 지지율이 높았고 나름 괜찮은 정치를 펼쳤다는 평가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후 대통령들의 실정이 일어날 때면 "Soa Bachelet, haga algo!"(바첼레트 아주머니, 좀 나서봐요!)라는 인터넷 유행어가 돌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