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올브라이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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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UN주재 미합중국 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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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2172><colcolor=#ffc224> 본명 |
마리에 야나 쾨르벨로바 Marie Jana Körbelová |
국적 |
체코슬로바키아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37년 5월 15일 |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프라하 | |
사망 | 2022년 3월 23일 (향년 84세) |
미국 워싱턴 D.C. | |
직업 | 정치인, 외교관, 교수 |
신장 | 147cm |
재임기간 | 제64대 국무장관 |
1997년 1월 23일 ~ 2001년 1월 20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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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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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성공회) |
학력 |
웰즐리 칼리지 (정치학 /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 (국제정치학 /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국제정치학 / 박사) |
약력 |
제20대 UN 주재 미국대사 (1993-1997) 제64대 국무장관 (1997-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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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역사상 첫 여성 국무장관.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UN주재 미국대사와 국무장관을 연이어 역임하며 199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확장에 힘을 쏟으며 발칸반도에서 벌어지는 집단 학살을 막기 위해 동맹의 개입을 촉구하였고,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북미 공동 코뮈니케 발표 및 미 장관 중 최초로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등 핵무기 확산 억제를 추구하며 전 세계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옹호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상대적으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이슈엔 소홀했다는 비판도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서맨사 파워 등 여성 정치인·관료의 앞길을 연 선구자이기도 하다.
2. 생애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지만 부친인 요제프 쾨르벨(Josef Körbel)과 모친 안나 슈피겔로바(Anna Spiegelová)를 비롯한 가족들은 가톨릭 신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으로 피난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지만, 이때 친인척 3명이 학살당했다.전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의 길을 걷자 1950년 미국으로 이주한다. 1957년 미국 시민이 되었으며 1959년 웰즐리 칼리지를 우등졸업하며 정치학 학사를 받았고, 동시에 언론 재벌 올브라이트 가문의 조셉 메딜 패터슨 올브라이트(Joseph Medill Patterson Albright, 1937–)와 결혼하고 한동안 가정 주부로 생활한다.
남편은 당시 윌리엄스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자료조사를 위해 덴버 포스트에 드나들며 당시 언론인을 지망해 덴버 포스트의 업무보조로 일하던 매들린과 알게 되어 6주만에 청혼을 하였다. 남편의 외가쪽 선조는 시카고 트리뷴을 경영하던 조셉 메딜로, 노스웨스턴 대학교 메딜 언론대학의 메딜가에 해당한다.
결혼 후 조셉이 시카고 선 타임스에서 잠시 일하다 워싱턴 DC에 살던 시절 매들린은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1년 후 남편의 이모 얼리샤 올브라이트가 사망한 뒤 가업인 뉴욕 데일리 뉴스를 잇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하여, 매들린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는 1968년 컬럼비아 대학교 러시아연구소에 인증서를 받고 석사를 취득하였다. 이후로는 박사과정을 밟으며 에드먼드 머스키의 대선 캠프에서 일하며 1975년 공법 및 정부학(public law and government)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해당 학과는 현재 컬럼비아대 국제공공정책대학원(SIPA)에 들어있고 매들린의 전공이 소련정치이므로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보면 된다.
1970년대 후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의 입법담당 수석고문을 잠시 지냈고,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당시 외교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밑에서 NSC 직원을 역임한 후 1982년 남편 조셉 올브라이트와 23년의 결혼생활을 마치고 이혼한다. 조지타운의 집과 농장을 받게 되어 재정적 어려움은 없었지만 마음이 공허해 도피처로 찾은 것이 조지타운 대학교의 교수직과 월터 먼데일 민주당 대선후보의 선거운동본부 부본부장이었다. 매들린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소련 외교를 가르친다.[1] 교수로 일하며 1980년대엔 2번의 민주당 부통령·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활동하지만 정권 교체에 실패한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 후보를 돕고 그가 당선되자 1993년 UN 주재 미국대사로 부임하여 UN 개혁을 밀어붙이던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결국 부트로스 갈리 총장의 연임을 좌절시킨다.
1997년 빌 클린턴 행정부 2기의 출범과 함께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적극 개입해 학살을 막으려 노력했다. 한편 1998년 8월 나이로비에서 생긴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 이전에 케냐 대사가 대사관의 경비를 강화하도록 국무부에 거듭 요청하였음에도 이를 묵살했다는 비판도 있다. 북한의 NPT 탈퇴로 불거진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자 2000년, 북한 외무상 백남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총정치국장 조명록과 미국에서 회담했으며 자신이 직접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다.
2009년부터는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의 회장을 역임하며 현재 조지타운 대학교의 외교학교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했다. 2012년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비영리 싱크 탱크인 미국외교협회(CFR)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2022년 3월 23일, 암으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에 조 바이든,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등 전·현직 대통령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며 애도하였다. #
그녀의 사망 이듬해인 2023년 6월, 모교 조지타운 대학교가 외교학부의 명칭을 '올브라이트 외교학부'로 개명하는 방안을 발표했지만, 교내 여론을 포함한 대내외의 논란이 이어지면서 철회했다.[2]
3. 기타
- 키가 작은 편인데, 웬만한 서양인 여성 단신도 150은 넘는 것에 비해 147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미국 여성 평균키보다도 10cm 이상 작은 키이고 동 나이대 한국인 여성 평균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인 중 2번째로 키가 작다.[3]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한 탈북자가 여성 미 국무장관을 본 적이 있다고 해서 진행자들이 힐러리 클린턴이냐고 묻고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다소 답답한 장면이 나왔는데 올브라이트의 방북 당시를 이야기한 것이다.